프랑케와 할레의 경건주의

August Hermann Francke and Pietism of Halle

 

요약

17세기에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은 종교개혁 이후 침체해진 교회에 새로운 활력과 개혁을 가져다 주었다. 경건주의자들 가운데 프랑케는 교회의 영역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루터교 정통주의의 토양 아래서 자랐으며 학문과 경건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특히 1687년 회심 사건을 통하여 프랑케는 사변적인 신앙에서 체험적인 신앙인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독일의 할레에서 루터교 목사로 그리고 할레 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하면서, 그의 선생이자 동료인 슈페너가 제안했던 경건주의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교육 사업과 선교 사업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이런 사업들을 통하여 프랑케가 도달하고자 한 것은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의 변혁"이었다. 결국 그의 경건주의 운동은 인간의 전인적인 구원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I. 서론

한국교회는 새로운 천 년대를 맞이하면서 나아갈 방향을 여러 면에서 찾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17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인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신앙이 침체해진 독일의 루터교회에서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을 실천에 옮긴 사람은 슈페너의 제자이며 그의 친구이기도 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nmann Francke, 1663-1727)이다. 神學史와 경건의 역사에서 볼 때 프랑케는 슈페너 이후 경건주의의 인물로 사실 인정받는다. 그는 기독교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있어야 하며 과거의 죄로 물든 본성에서 회심하여 거듭남을 체험해야한다고 가르치면서 슈페너의 사상을 계속하고 진보화하는데 있어서 경건주의의 금욕적인 특성을 강화했다. 잘레(Saale) 강변에 있는 할레(Halle)에서 프랑케의 활동과 더불어 경건주의는 극치에 도달했다. 프랑케는 할레에서의 놀라운 사역을 통해 기독교적인 봉사의 새로운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초기 경건주의의 폭발적인 힘은 할레에 있는 프랑케의 재단이 조직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이 중심지는 사회 상태의 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사명을 표방하였다. 이것을 통해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성향을 지닌 수많은 각성된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에서 돌이키게 되었다. 프랑케는 자신의 놀라운 프로젝트를 미래의 세계 개혁에 대한 기여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슈페너의 "더 나은 시대에 대한 희망"(Hoffnung künftiger besserer Zeiten)에 근거한 것이다. 이 유토피아적인 궁극적인 목적은 그에게 궁색하고 어려운 현실에서 끝까지 버티어 개혁에 대한 최대한을 달성하게 하는 기력을 주었다.

 

II.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생애와 활동: 할레에서의 사역 이전까지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는 1663년 3월 22일 법률가의 아들로 뤼벡에서 태어났다. 프랑케가 태어난지 3년 후 그의 부친은 작센-고타(Sachsen-Gotha)의 에른스트 信公(Herzog Ernst d. Fromme)의 신하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프랑케는 고타에서 자신의 훗날의 개혁 프로젝트에 대한 자극을 받았었다. 에른스트 신공은 그의 재상인 제켄도르프(Veit Ludwig von Seckendorff, 1626-1692)와 함께 30년 전쟁(1618-48)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데 매진하였다. 이 두 사람은 종파간에 있는 증오의 극복과 어린이 교육의 개선에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인식하였다.

프랑케는 유명한 고타 고등학교(Gothaer Gymnasium)를 졸업하고 16세에 에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대학교에서 별로 만족을 얻지 못하고 키일 대학교(Universität Kiel)로 옮겼다. 키일 대학교에서 그는 특히 교회사가이며 실천신학자인 코르트홀트(Christian Kortholt, 1632-1694)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프랑케는 외삼촌이 설립한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다. 이 재단의 장학금은 학자가 되거나 성직자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지급되었다. 조카의 영적인 발전과 모든 행동에 대해 만족을 갖지 못한 그의 외삼촌은 1682년 더 이상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프랑케는 키일 대학교를 그만두고 함부르크에 있는 유명한 오리엔탈 학자인 에드차르두스(Esdras Edzardus, 1629-1708)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운 후 패배한 학생으로 고타에 돌아왔다. 2년 동안 집에서 공부하면서 보냈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를 압박했다. 마침내 어느 학생에게 히브리어를 개인교수하기 위해 1684년 라이프치히에 갔다. 그곳에서 프랑케와 이 학생은 슈페너의 사위이며 신학교수인 아담 레헨베르크(Adam Rechenberg)의 집에서 살았다. 프랑케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1685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것으로 성서에 대한 언어학적이고 성서주석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프랑케에게 있어서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에 대한 몰입은 정적과 은거에서 내적인 정화에 대한 욕구를 강화하였다. 1687년 프랑케는 회심 이전에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1628-1696/97)를 알게 되었다. 프랑케는 라이프치히의 루터교 정통주의자의 동의 아래 몰리노스의 몇 개의 글들을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프랑케는 몰리노스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나 겸손의 실천, 참회를 받는 신부를 위한 조언,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상 그리고 의심에 대한 조언의 체험을 배척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고 교리에 위반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랑케는 파울 안톤(Paul Anton)과 함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콜레기움 필로-비블리쿰'(Collegium philo-biblicum)을 만들었다. 이것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젊은 석사들의 모임으로 매주 모여 구약과 신약의 한 장을 해석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 모임은 매우 주목을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 대학교에서는 단지 교리적이고 논쟁적인 신학 강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행해진 성서해석은 엄청난 학생들을 불러모았으나 또한 프랑케에게 내적인 위기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1687년 가을 뤼네부르크(Lüneburg)에서 이 위기는 일어났다. 이것은 학문과 경건, 자신의 더 존귀한 영광에 대한 학문의 현존 혹은 이웃에 대한 의무에 있어서의 삶 가운데 결정을 해야할 문제였다.

라이프치히에서 학문적인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프랑케는 1687년 다시 외삼촌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뤼네부르크에 있는 잔드하겐(Caspar Hermann Sandhagen) 감독에게서 성서 해석을 교수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프랑케는 외삼촌의 명령을 기도의 응답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뤼네부르크에서 그는 내적 정화에 대한 필요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 있을 때 그는 요 20:31에 관한 설교를 부탁 받았다. 원래 그는 살아있고 자신이 체험한 믿음과 죽었으며 가르침을 받은 믿음 사이의 차이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본문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숙고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내적인 신앙의 확신이 결핍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는 기독교인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그렇게 생각하고 터키인들은 코란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누가 알 수 있는가? 불확실함은 점점 커져가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었다. 전적인 불확실함의 상황 가운데 공허함과 이제 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미함이 그에게 엄습해왔다. 높은 망루에서 전 도시를 관망하는 어떤 사람 앞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전 과정이 그의 앞에 놓여졌다. 의심은 점점 커져갔다. 프랑케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다. 설교를 3일 앞두고 마침내 변화가 일어났다. 가득한 행복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이 섰다. "바로 나의 모든 의심은 사라져 버렸다."

프랑케는 1687년 뤼네부르크에서 있었던 자신의 유명한 회심의 체험을 1690/91년에 기록해 놓았다. 그를 무신론적인 회의론자로 만들었던 이성은 다시 신앙에 대한 시녀가 되었다. 루터의 로마서 서문의 글로 프랑케는 이 "내적인 거듭남"을 서술하였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 기질, 감각 그리고 모든 힘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든다."이런 점에서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는 프랑케의 회심을 루터와 비교하고 있다. 즉 신앙의 본질을 루터의 로마서 서문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의 안에서 타오르는 경건과 학문 사이의 갈등이 이제 실천적인 기독교에 근거하여 결정되었다. 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가치를 두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냄새나는 분뇨 웅덩이"로서 나타났다. 새롭게 얻은 내적인 독립과 확신이 그에게 반박을 제기하고, 적대 관계를 견디어 내고 박해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데퍼만(K. Deppermann)은 프랑케의 뤼네부르크의 회심을 세 가지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

① 프랑케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루터처럼 죄의 용서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무신론적인 의혹으로부터의 승리였다. 의혹은 무엇보다도 세 개의 대표적인 유일신론적인 종교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되었다.

② 의심의 극복은 논리적인 것이 최종방법이 아니라 더 이상의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서적인 체험에서 찾은 것이다. 프랑케가 계몽주의의 자연신학에 대한 통로를 결코 발견하지 못하였음은 이것과 확실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연신학은 그에게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③ 신앙의 확신에 대한 체험은 계속되는 삶의 방식에 유효한 결론을 주었다. 이웃에 대한 실제적인 봉사는 이제 프랑케에게 있어서 자신의 명성을 위한 학문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뤼네부르크에서 회심을 체험한 이후 프랑케는 함부르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슈페너의 친구 중의 한 사람인 요한 빈클러(Johann Winckler, 1642-1705) 목사가 세운 자선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이것은 그의 외삼촌을 다시 노하게 했다. 그는 이러한 일을 비합리적인 광신의 표시로 여겼다. 빈클러의 교육에 대한 자극들은 프랑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난다. 함부르크에 있을 때 프랑케는 드레스덴에 있는 슈페너에게서 두 달 동안 지냈다 (1689년 1월/2월). 프랑케와 슈페너는 긴밀한 우정을 맺었다. 1689년 2월 프랑케는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바로 프랑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성서 주석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정신은 즉시 확실히 나타났다. 교리적이고 신학 논쟁적인 강의 시간은 이제 모든 학부의 학생들을 위한 부흥의 시간이 되었다. 또한 도시에 있는 수공업자들과 시민들도 청강을 하였다. 수십 개의 소그룹과 기도 모임이 생겨났다. 교수들 스스로 조직적인 학술 연구, 학문의 활기찬 활동의 종말로 대학교의 몰락을 두려워했다. 물론 여기에 상처받은 자부심과 수업료의 감소도 한 몫을 하였다! 수공업자들은 물론 여자들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소그룹에 참여하였다. 왜냐하면 기도 모임 참석자들은 일반적으로 공 예배를 무시하거나 꺼렸기 때문에, 이 새로운 운동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목사들과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 운동은 학생들이 목회적인 차원의 환자심방을 했을 때에 그들의 활동 그룹 내에서 갈등을 겪었다. 정통주의자들은 새로운 경건운동을 "경건주의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1690년 라이프치히의 소요가 일어났다. 슈페너의 프랑크푸르트 '콜레기아 피에타티스'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콜레기아 비블리카'가 되었다. 프랑케는 법적으로 이 일에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 신학부는 1690년 3월 프랑케에게 모든 성서 주석 강의를 금했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단한 소요가 대학교에서 일어났으며 마침내 유명한 법률가인 토마시우스(Christian Thomasius)가 법률고문으로 상담하게 되었다. 법적인 고려에서 이 위대한 계몽주의자는 교황청 같은 루터교 신학부에 완전히 냉소와 경멸을 퍼부었다. 그러나 토마시우스의 평가서는 프랑케를 이롭게 하기보다는 더 어렵게 했다. 왜냐하면 그가 드레스덴의 궁전으로부터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슈페너는 작센의 선제후에게 광범위한 평가서를 통해 라이프치히의 경건주의를 후원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샤데(Johann Caspar Schade, 1666-1698)와 프랑케의 친구들은 라이프치히에서 추방을 당했다. 선제후의 정부는 1690년 3월 10일 라이프치히에서 기도 모임을 금지했다. 라이프치히 사건에서 비로소 경건주의 운동이 전 독일에서 루터교 정통주의에 대해 날카롭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이 되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료들과 더불어 경건주의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전까지 슈페너의 개혁 제안들은 광범위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었다. 이제 슈페너와 프랑케는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의 파괴자로 보였다. 물론 이것은 경건주의자들을 토마스 뮨처와 동일 선상에 놓은 것이었다.

프랑케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에어푸르트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드레스덴에 있는 슈페너처럼 프랑케도 에어푸르트에서 자신의 설교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교리문답 교육을 실시하였다. 여러 교회에서 사람들이 경건의 모임에 참석했다. 교구에서는 이 일을 등한시하고 있었다. 프랑케가 에어푸르트 대학교에서 자신의 강의에서 몇 명의 동료들과 성공적으로 경쟁하였을 때,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기독자의 완전, 직통 계시에 대한 신앙 그리고 선행의인과 관련하여 다시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프랑케는 결국 얼마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에어푸르트를 1691년 10월 14일 떠났다.

이제 슈페너는 프랑케를 구하는데 관여해야 했다. 1691년 늦가을 프랑케는 베를린에 있는 슈페너에게 머물었다. 당시 슈페너는 드레스덴의 궁전 수석 설교자에서 바로 베를린의 교회 평정관이면서 니콜라이 교회의 감독교구장 이었다. 당시 베를린의 궁전에서는 할레에 새로운 대학교를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다. 슈페너는 프랑케를 정치가들에게 소개를 시켰으며, 프랑케가 이 새로운 대학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베를린에서는 할레에 세워지는 새 대학교를 통해 엄격한 루터교적인 대학교인 비텐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 대한 정신적인 견제를 이룰 수 있을 것을 믿었다. 이미 비텐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서 사람들은 1613년부터 브란덴부르크의 왕실이 고백한 칼빈주의와 투쟁했다. 할레 대학교의 설립으로 루터교 내에 관용 정신이 확산되기를 기대했으며, 그리하여 경건주의자들을 할레 대학교의 교수로 초빙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루터교와 칼빈주의 사이의 교리적인 차이는 어떤 본질적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믿음으로 거듭난 것이 제일 중요했다.

III. 할레 경건주의의 태동과 발전

1691년 말 프랑케는 할레 근교에 있는 글라우하(Glaucha)의 성 게오르겐(St. Georgen) 교회의 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할레 대학교 철학부의 오리엔탈 언어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중심은 대학교가 아니라 목회였다. 프랑케는 아주 내버려진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글라우하의 시민들은 독한 포도주와 火酒생산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으며, 알콜 중독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다섯 집에 한 집은 술집이었다. 그리고 1691년 페스트가 휩쓸어 인구의 거의 절반이 죽었다. 1683년과 1684년 대 화재로 할레의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하여 주민들 가운데 심각한 궁핍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

글라우하에서 프랑케가 먼저 시도했던 것은 주일성수였다. 그는 설교 전 그리고 설교 도중에 술집 출입을 금했다. 교인들에게 규칙적으로 주일과 주중의 공 예배에 참석할 것과 이 설교 시간에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의 '참 기독교'를 해석하였다. 설교가 없는 날에 프랑케는 전 교인들과 더불어 기도회를 가졌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를 본받은 것이었다 (행 2:48). 1696년 구제 법령의 도움으로 프랑케는 모진 가난을 경감시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바로 그의 인기를 교회에서 높이진 못했다.

프랑케가 할레에서 시작한 고아원과 여러 교육기관의 설립은 경건주의의 새로운 활동을 나타내 준 것이다. 이 기관의 원래 이름은 "글라우하의 기관들"(Glauchasche Anstalten)이었다. 실제로 이 기관들은 처음부터 굉장한 계획이 아닌 글라우하에서의 눈에 띄지 않는 자극 에서 시작되었다. 글라우하(Glaucha)에는 매주 목요일 가난한 사람들이 문 앞에 와서 적선을 받아갔다. 매주 목요일 프랑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목사관 문 앞에서 빵을 나누어 갖도록 하였는데, 바로 그 때에 이런 만남을 영혼구원과 기독교의 근본지식을 전달하는데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어느 목요일 그 사람들 전부를, 한편으로 노인들, 또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을 집에 들어오게 한 다음 젊은이들에게 친절히 루터의 교리문답에 대하여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노인들은 이것을 경청하였다. 이 일은 약 15분이 걸렸고 기도로 마쳤다: 그런 다음 음식을 나누었다. 프랑케는 그들에게 앞으로 육의 양식 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도 주기를 원한다면서 그들을 보냈다. 이것은 1694년 초의 일이었다. 이 때에 프랑케는 기독교 신앙과 윤리에 있어서 전적인 무지가 특히 어린이들에게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 어린이들은 수업료가 없어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프랑케는 어린이들이 공립학교를 다닐 수 있게 그들에게 수업료를 주었다. 그들은 이 돈을 받고서 아무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프랑케는 아는 사람들을 통해 돈을 모았다. 그는 고린도후서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필요한 것들이 그에게 채워지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생각하였다. 1695년 초에 그는 공공연히 방문이 잦은 목사관의 거실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성구와 함께 함을 갖다 놓았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7).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는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약 3개월이 지난 후 프랑케는 4 탈러(Taler) 16 그로쉔(Groschen)의 기부금을 받았다. 여기에 힘을 얻어 프랑케는 자체적인 자선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나는 이 일에 대하여 혈육으로 의논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갔으며, 바로 그날 은전 두 냥 어치의 책을 사서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가난한 대학생에게 가난한 어린이들을 매일 두 시간씩 가르치도록 부탁하였고, 그에게 주급으로 6전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은전 몇 냥이 이런 방법으로 8주 동안 쓰여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희망을 주시리라."

매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아원 시설의 거대한 사업이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즉시 프랑케는 이 학교 외에 지어야 할 것에 대해 다시 설계도를 그려야 함을 인식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아들과 부모들로부터 등한시된 소년들과 소녀들을 위한 기숙사를 짓는 생각을 마침내 하게 되었다. 이 자선학교에 대한 좋은 소문은 빨리 퍼져 갔다. 중산층의 시민들도 그들의 자녀를 이 학교에 보냈다. 따라서 프랑케는 특별히 '시민학교'(Bürgerschule)를 지어야겠다는 결정을 했다. 1695년 이 계획이 착수되었고 마침내 상류층을 위한 학교인 소위 말하는 '패다고기움 레기움'(Pädagogium Regium)이 세워졌다. 프랑케의 기관들의 재정은 근본적으로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하였지만 프랑케는 이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지는 몰랐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지각하였으며, 이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확신하였기 때문에 가장 큰 어려움에도 하나님께 맡겼다. 후에 프랑케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고아원은 그 때 있었던 돈이나 모든 비용을 자진해서 맡아 주었을 높은 사람들의 확고한 약속이나 그 외의 어떤 것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세워졌다."

루터교회의 세 계층론인 지배계층(Regierstand), 가르치는 계층(Lehrstand) 그리고 평민층(Hausstand)에 의거하여 1700년에 프랑케의 전체 학교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정비되었다. 독일의 학교는 평민 계층을 위해 즉 농민과 수공업자를 위한 초등학교의 초석을 놓았다. 대학교 공부를 준비했던 라틴어 학교는 지위가 높은 시민 계급의 자녀들의 교육에 기여했다. '패다고기움 레기움'은 미래의 지배층, 장교, 고위 관리 그리고 騎士領의 영주를 위한 교육을 맡았다. 신분의 제한은 프랑케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아니었다. 고아들은 그들의 재능 정도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 프랑케는 자신의 학교의 선생들과 관리인들을 할레 대학교의 학생들 가운데 뽑았다. 그들은 고아원에서 매일 두 시간씩 일하고 장학금을 받았다. 곧 바로 프랑케는 자체적인 사범학교를 만들었고, 이것은 독일에서 최초의 정규적인 교원 교육이 되었다. 프랑케의 교육도시의 범위는 당시 유례가 드문 것이었다. 1727년 프랑케가 죽은 해에 이곳에서 100 여명의 남선생과 여선생 그리고 여러 종류의 학교에 약 2,000 명의 학생이 있었다. 학생과 선생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고아원에는 약 100 명의 학생들이 10명의 교사 밑에 있었다.

1698년 9월 19일의 윤허에 의해 프랑케의 기관들은 선제후의 직속에 속하게 되었다. 프랑케는 이 기관들이 가능한 한 근근히 살아가는 기부금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해야함을 생각하였다. 이런 점에서 교육 기관 뿐만 아니라 인쇄소, 약국, 서점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 서점에서는 '할레 신문'(Hallische Zeitung)이라는 신문도 발간하였다. 이 사업들은 적지 않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프랑케의 기관들은 자발적인 기부에 의해 유지되었다.

프랑케에게 있어서 교육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참된 구원"(wahre Gottseligkeit)과 "기독교적인 현명"(christliche Klugkeit). "구원"에 대해 프랑케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간의 뜻의 제한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이기심의 극복과도 같은 의미이다. 삼주덕(三主德)이 계속하여 닦아져야만 진리에 대한 사랑, 복종 그리고 근면이라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체형(體刑) 없이 학생들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을 쉴 틈 없이 감독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인 발달이 지속적으로 통제되었다. 프랑케는 이 총체적인 통제를 모든 선한 교육의 핵심으로 여겼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죄의 싹을 막고 체형을 필요 없게 하였다. 지속적인 통제의 이러한 방법은 자아가 약한 학생들에게는 적응, 패기 없는 사람 그리고 위선으로, 반대로 활동적이고 의지가 강한 학생들에게는 학교와 교사에 대한 반항, 무시 그리고 증오로 이끌어 가게 되었다. 규칙 준수, 근면, 신뢰, 복종 그리고 겸손은 이 학교에서는 의식적으로 요청되었으나 대부분 사적인 결정권, 여흥 그리고 자기 인식에 대한 희생이 있었다. 물론 프랑케의 교육을 근대 교육 구상의 척도로 재서는 안 된다. 타인에 대한 통제 외에 자아에 대한 통제가 큰 역할을 했다. 매일 저녁 학생들은 "양심 검사"(Examen conscientiae)를 행했다. 이것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 스스로 평가한 것이었다: "하나님과 자신의 웃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했는가". 이론적으로 프랑케는 회심의 방법론을 거부하고 신앙이 강요되거나 거듭남이 인간의 행위로 되지 않는 참으로 하나님의 행위임을 확신하였다. 실제적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회심과 성화는 교육 방법의 목적이 되었다.

프랑케는 "기독교적인 현명"이라는 교육 목적과 더불어 그의 시대에 참으로 근대적이었다. 첫째 규칙은 시간을 선용하는 것이다. 쉴 틈 없는 활동은 고아원과 '패다고기움 레기움'에 있는 어린이들의 하루 일과로 결정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재능은 사용되어져야 했다. 기독교인들은 현명한 사람들이 되어야하며 또한 실제적이고 자연과학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 수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프랑케는 박물 표본실을, 더 나아가 천문 관측소, 기계 작업장 그리고 식물원을 만들었다. 어학 시간에는 자유로운 회화와 신문 읽는 것에 가치를 부여했다. 정해진 영역에서 학생들은 개인의 재능에 따라 그들의 학과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근대적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프랑케의 교육학에 있어서 미래를 가리킨 것이다. 분명히 연구에서 그의 교육사업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1698년 프랑케는 할레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프랑케는 할레 대학교에서 신학공부에 성서주석을 가장 중요시 했다. 슈페너가 '경건의 소원들'(Pia desideria)에서 제안한 신학공부의 개혁이 할레에서 관철되었다. 이 성과는 할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할레 대학교 신학부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번창한 신학부가 되었다. 성서신학에 대한 집중, 실습 활동, 경건과 관련하여 학문적이고 논쟁적인 신학에 대해 가치를 절하했다. 이것은 슈페너가 요구한 성서주석에 대한 집중을 참작하여 신학 공부의 개혁 프로그램을 실현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수많은 학생들을 할레로 모여들게 했다.

또한 1715년에는 할레에 있는 울리히스교회(Ulrichskirche) 의 목사가 되었다. 이 도시에서 경건주의자들과 루터교 정통주의자들 사이에서 루터교 정통주의와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결국 경건주의자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어서 프랑케와 그의 친구들은 "영토주의"(Territorialismus)의 교회법적인 제도 즉 교회 문제에 있어서 국가의 조정권을 고백했다. 그러나 할레 대학교에서는 그의 동료와 이전의 전우인 토마시우스가 프랑케 교육 기관에 있는 교육 방법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계몽주의자인 토마시우스는 중단 없는 감독, 개인의 사고를 파멸시키는 끊임없는 독서와 듣기에 대해 반박했다.

토마시우스와의 갈등보다 더 심각한 결과는 계몽주의와의 두 번째 충돌인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와의 논쟁이었다. 볼프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 순수한 이성으로 하나님에 대한 증명의 가능성 그리고 오성의 깨달음을 통한 보편적인 세계의 개량을 확신하였다. 그는 행복의 추구를 인간의 삶의 가장 강한 모티브로 시인했고 이성적인 인생의 향락에서 어떤 악한 것도 보지 않았다. 볼프가 중국인의 실용 철학에 관한 강연에서 무신론주의와 비도덕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중국인을 예로 들어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닌데도 덕 있는 행동을 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프랑케와 요하힘 랑에 그리고 그의 동료는 볼프에게 철학 강의의 포기를 압박하기 위한 그들의 목적을 끝까지 추구했다. 마침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왕은 볼프에게 48시간 내에 프로이센에서 떠나야 한다는 징계를 내렸다(1723년 11월 8일). 볼프의 추방은 계몽주의에 대한 할레 경건주의의 피러스의 승리(Pyrrhussieg: Pyrrhus 왕이 로마군을 격파할 때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였다. 경건주의자들은 냉혹한 권력의 사용을 통해 승리를 얻었다. 진지한 정신적인 논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이 마침내 볼프를 다시 할레로 불렀다. 할레에서 볼프의 추방은 이미 할레 경건주의의 정신적 쇠퇴를 암시한 것이었다.

프랑케의 재단으로부터 중요한 활동들이 유래하였다. 이것을 본받아 독일의 다른 많은 도시들에서 많은 고아원들이 설립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할레 경건주의의 정신자체가 프로이센의 군대에 스며들었다. 그가 다스리던 때, 할레에서 공부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서를 가져온 사람은 프로이센의 군대에서 군목이 될 수 있었다. 또한 1700년 이후 프랑케의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명단을 보면 이들 대부분이 프로이센 제국의 장교들, 고위 관리들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케의 노동윤리의 영향 아래 많은 경건주의 귀족들이 공장을 세웠고 여기에서 나온 순수한 수익을 고아원의 재정에 보태주었다. 전적으로 프로이센 제국은 복종하고 직업에 성실하고 사회적인 책임감을 인식하는 국민이 되게 한 할레 경건주의의 교육에 은혜를 입었다.

프랑케의 개혁 계획들은 독일을 넘어 퍼져갔다. 그는 전 세계에 있는 어려움에 처한 특히 남동부 유럽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디아스포라를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다. 할레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언어로 성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프랑케는 러시아의 페터 대제, 영국 그리고 덴마크와 관계를 맺었다. 덴마크와의 관계에서 할레 경건주의는 해외선교를 개척하였다. 이것은 할레 경건주의가 개신교에 끼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교의 이니셔티브는 할레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덴마크 국왕인 프리드리히 4세(Friedrich IV.)는 덴마크 식민지의 원주민에 대한 선교를 원했다. 덴마크에서는 선교사로 파송 할만한 목회자를 찾을 수 없어서, 1705년 덴마크 궁정 설교자이며 과거에 베를린의 감독교구장이었던 뤼트켄스(Franz Julius Lütkens)는 베를린에 있는 자기 동료들에게 도움을 구하게 되었다. 그는 경건주의적인 목회자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베를린에 있을 때 할레에 비판적인 루터교 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플뤼챠우(Heinrich Plütschau, 1677-1746)와 치겐발크(Bartholomäus Ziegenbalg, 1683-1719)를 추천 받았다. 이들은 베를린에서 랑에(Joachim Lange)의 제자이며 할레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치겐발크는 작센의 풀스니츠(Pulsnitz) 출신이었다. 그는 이미 어린 학생이었을 때 회심을 체험했으며 슈페너와 프랑케와 교제를 나누었다. 칸슈타인(Canstein)은 그가 베를린에서 중·고등학교(Gymnasium), 1703년부터 할레 대학교를 다닐 때 그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그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공부를 중단해야 했으며 결국 대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는 어떤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프랑케는 그를 메르제부르크와 에어푸르트에 교사 자리를 주선해주었고, 그는 1705년 다시 베를린에서 살았다. 선교사로의 부름은 그에게 먼저 숙고를 하게 해주었고 그리고 이 부름에 응할 결심을 하였다.

이 두 명의 선교사 후보들은 코펜하겐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그들이 원래 생각했던 아프리카가 아닌 덴마크 식민지인 남인도의 동해안에 있는 트란케바(Tranquebar) 라는 작은 지역임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단지 왕의 강요에 의하여 두 명의 경건주의자가 루터교의 감독인 보르네만(Bornemann)으로부터 시험을 치르고 목사안수를 받게 하였다. 1706년 7월 이들은 트란케바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가톨릭 교회 하나와 덴마크 사람들을 위한 루터교회 하나가 있었다. 덴마크 목사와 덴마크 관청들과의 갈등은 때때로 많았다. 덴마크의 이익을 대변하는 식민지 선교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확실치는 않다. 선교사들은 먼저 포르투갈어와 말라바어(Malabarisch)를 무조건적으로 배워야 했다.

1708년부터 1711년까지 어학에 재능이 있는 치겐발크는 말라바어로 신약성서를 번역하였다. 뒤이어 교리문답과 찬송가를 번역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말라바의 이교"와 "말라바 신들의 계보"에 대한 깊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인간 구원에 대한 필연성과 구원하는 복음은 선교 복음의 내용으로서 문제없이 확실하였다. 여기에 첨가된 것이 이웃 사랑의 실천이었다. 입증된 모범에 따라 청소년을 위한 학교교육에 특별히 주의가 기울여졌다. 더구나 소녀들을 교육시킨 것은 엄격한 인도 사회의 전통을 부순 것이었다. 인도에 있는 유럽인들이 기독교인으로서 매력적인 모범을 보여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1707년에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 때 이미 인도에 '새 예루살렘 교회'가 건축되었다. 사망과 타락으로 인한 교인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1712년 교인수가 이미 202명이었다. 1709년 선교사들은 할레에서 온 두 명의 선교사인 요한 에른스트 그륀들러(Johann Ernst Gründler)와 폴리캅 요르단(Polycarp Jordan)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치겐발크와 그륀들러는 코펜하겐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선교에 있어서 선교사 부인들도 전체적으로 아주 유용했다.

선교 사업과 선교에의 동참은 경건주의의 업적이다. 빈번한 서신을 통하여 사람들은 할레로부터 선교사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조언과 용기를 주었다. 예를 들면 프랑케는 주둔하고 있는 덴마크 식민지 관청에게 선교에 대한 긴밀한 의존에 대해 반대하였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업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협조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고아원과 선교를 위하여 출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미 프랑케는 1707년 치겐발크의 초기 편지들을 '할레의 서신들'(Hallesche Correspondenz)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1708년 랑에는 치겐발크의 많은 편지들을 '동인도에서 온 놀라운 소식'(Merkwürdige Nachrischten aus Ost-Indien)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냈다. 이 책은 여러 판을 거듭하여 출판되었다. 후에 나온'할레 소식'(Hallesche Berichte)은 최초의 독일 선교 신문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이런 종류의 신문들의 효시가 되었다. 여기에는 주로 선교 동지들을 자극하지 않는 선별된 기사가 실렸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새 예루살렘 교회'의 대 건축은 보도되지 않았는데, 이 일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혼의 구원에 대해 필요없는 일로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기부금의 모금 또한 공무의 계획이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공적인 수입 외에 이 기부금에 의지하였다. 이 기부금의 대부분은 할레에서 왔으며 덴마크에서 온 것은 전혀 없었다. 프랑케는 고아원에 대한 기부금의 침해를 덤으로 받았다. 그는 선교 사업을 "마치 그가 해야할 일로서" 여겼다. 그는 여기에서 생기는 사업들을 그의 동료인 미하엘리스(Christian Benedikt Michaelis)에게 위임하였다.

1709년 안톤 빌헬름 뵈메(Anton Wilhelm Böhme, 1673-1722)는 '동인도에서 온 놀라운 소식'을 '동인도에서 복음의 전파'(Propagation of the Gospel in the East)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하고 영국의 '복음전도협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SPG)에 헌정했다. 이 책은 3판(版)까지 출판되었다. '복음전도협회'가 사업을 북 아메리카 식민지에 국한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뵈메는 '기독교 지식 증진 협회'(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SPCK)로 방향을 돌렸다. 뵈메는 SPCK에서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치겐발크와 플뤼챠우는 특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후에 런던을 방문했다. SPCK는 트란케바를 위해 포르투갈어 신약성서 1250권을 인쇄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쇄 직공을 포함하여 인쇄기를 트란케바로 보낸 것이다. 타밀 인쇄소는 어쨌든 1713년 할레에서 온 것이다. 할레와 트란케바 사이의 서신과 소포들은 대부분 런던을 거쳐서 왔다. 영국 선교사들은 인도에 대해 할레의 주요한 인적 자원들과 같은 간접적이나마 확실한 것을 얻을 수 없었다. 대주교 테니슨(Tenison)이 트란케바에서 사용하고 있는 루터교 교리문답에 제2계명이 빠졌음을 비난했을 때 SPCK에서 어려움이 생겼다. 뵈메의 충고에 따라 선교사들은 그것을 추가했다. 그 외의 사역에서 SPCK를 통한 루터교 선교의 후원은 거의 문제가 없었으며 에큐메니칼적인 위대한 사례를 남겼다. 프랑케가 죽은 후에야 마드라스에서 할레와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

할레에서 성취된 경건주의와 선교의 연결은 결코 중단될 수 없었다. 여기에서 경건주의는 새롭고 넓은 활동 영역을 발견했다. 여기에 경건주의는 인적으로 물적으로 강력하게 참여했고 단지 주지만은 안았다. 바로 선교 사역으로부터 그리고 그 사역 안에서 계속하여 새로운 힘과 용기가 경건주의를 자라게 했다.

프랑케의 지도 아래서 할레 경건주의는 세상에 대한 실천적이고 행동적인 경건을 보여 준 것이다. 교회의 영역을 넘어서서 매우 많은 자극들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케의 생애 말년에 신학 연구에서뿐만 아니라 이 기관이 있는 도시의 전체적인 교육에 문제들이 나타났다.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 이것이 할레 경건주의의 목적이었다. 언제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였다. 학문, 특히 철학에 대한 경시, 윤리의 문제에 대한 일방적인 집중으로 할레 경건주의에는 계몽주의와의 싸움에서 존속할 수 있는 정신적인 방패가 결핍되어 있었다. 계몽주의에 대한 이해없이 마침내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처지에 있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친천도르프의 형제교회와 뷰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 더 나은 준비가 있었다.

교회 안에서 경건주의의 주장과 확대가 성공한 것은 특히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국가의 요청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케는 이 나라의 실행력으로 선교기관들의 설립, 동양과 서양의 폭 넓은 교류 그리고 선교와 같은 새로운 사업을 착수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경건주의는 이미 넓은 파노라마임을 나타냈다. 벌써 할레의 광범위한 영향이 지속되었다. 친첸도르프(Zinzendorf), 벵엘(Bengel) 그리고 웨슬리(Wesley)와 같은 인물들과 더불어 위대한 경건주의자들의 다음 세대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또한 독일 이외의 나라들에서도 각 나라의 경건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결국 프랑케의 할레 경건주의는 교회의 개혁보다는 세상의 개혁을 달성한 것이 되었다. 여기에서 교육은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IV. 결론

프랑케가 일으킨 할레의 경건주의는 슈미트(M. Schmidt) 교수가 말한 대로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혁"이었다. 이것은 리츨이 경건주의에 대하여 평가한 탈 세상적이고 중세의 수도원적이고 신비적인 경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적극적으로 변혁을 시도했으며 실천에 옮겼다. 특히 이 실천은 할레의 고아원과 기숙학교를 통한 교육과 사회복지 영역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프랑케의 이 사업은 사회의 소득의 분배에 또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고아원에 들어 온 기부금과 헌금을 고아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 사용할 때 가난한 대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이에 대한 보수를 지급하였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소득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점에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 모범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 처음으로 해외 선교를 개척함으로 개신교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개신교에 선교의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이런 사업은 그의 목회 현장에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목회는 루터교 정통주의 시대에 교권적인 교회의 아성을 스스로 허물어 버린대 특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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