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부의 역사와 루터의 95개 논제에 대한 소고

 

I. 서론: 문제의 제기(왜 면죄부가 아닌 사면부인가?)

종교개혁사에서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마르틴 루터와 95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사면의 능력의 선언에 대한 논제'(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루터의 95개 논제가 면죄부 판매에 대해 신학적 논쟁을 한 것으로 인식하여 왔다. 면죄부로 번역된 라틴어의 "인둘겐치아"(indulgentia)는 원래 "관용, 부드러움, 자비, 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후에 "사죄", "사면"이라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면죄부라는 용어보다 사면(赦免)이라고 쓰는 이유는 "indulgentia"(indulgence, Ablaß)라는 원래의 의미가 죄를 면해 준다는 면죄부(免罪符)보다는 죄에서 용서를 받고 형벌을 면제받는 사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사면보다는 사면부라는 용어로 사용하겠다.

루터 이전에도 물론 사면부 발행은 있었다. 그런데 왜 루터에게서 이 문제가 제기되었는가? 이것은 교회의 프락시스(praxis)에 대해 성서와 신앙에 근거하여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시대로 무르익어 갔다는 것이다. 루터의 사면부 논쟁은 기독교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이다. 여기에서 사면부의 역사와 루터의 사면부 논쟁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II. 사면부의 역사

1. 중세 교회에서 사면부의 기원과 형성

사면부(indulgentia)는 회개의 실행에 속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회개(Buße)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심령의 일회적인 방향전환(????????)이었다. 고대 교회에서 소위 말하는 "죽을 죄"(우상숭배, 간음, 살인)를 지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이런 형태의 회개 제도는 6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스페인에서는 반복된 회개에 대해 신부로부터 사면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공적인 회개는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 대신 대 바질리우스(Basilius d. Gr., 329-379)에 의해 헬라의 수도원에서 가르쳐진,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사면을 받는 '개인의 고해'(Privatbeichte)가 나타났다. 이것은 6세기와 7세기에 아일랜드의 선교사들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에 전해졌다. 이제 '개인의 고해'는 더 이상 수도원 생활의 제도가 아닌 신자들이 죄로부터 해방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목회 제도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회개는 죽을 죄 뿐만 아니라 경미한 과실에도 해당되었다. 여러 가지 과실에 따른 회개의 종류와 기간이 수록된 6세기에 만들어진 '리브리 포에니텐치알레(libri poenitentiale)'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회개의 방법으로 금식, 기도, 구제 그리고 격리 등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혹독한 형태로 '종신 국외 추방'(peregrinatio perennis)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는 회개는 잠자지 않음, 계속적인 시편 낭독 혹은 이와 유사한 일을 통해 더 짧은 기간의 벌로 대치될 수 있었다. 또한 소위 말하는 대속(Redemption)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정해진 벌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거나 돈을 지불함으로 회개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금식은 시편 50편을 노래한다든지 구제로 대치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고해 회개'(Beichtbuße)는 공개적인 '교회 회개'와 수도원과 경건한 평신도들 사이에서 행해진 '사제의 고해'가 결합된 것이다. 이것은 고대 교회의 공개적인 참회의 기능 -교회 공동체로 다시 받아들임- 을 만족시켰지만 비밀스런 죄들까지 확대되었다. 이런 형태의 회개의 실천 방법은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의 선교사들에 의해 대륙에 전해지게 되었다. 8세기 후기의 프랑켄 교회의 회개교본의 내용들은 켈트족 교회에서 온 것이다. 켈트족의 교회에서는 공개적인 회개 대신 사제 앞에서 개인적으로 죄에 대한 고백을 하고 선행의 보속(satisfactio)을 하는 고해 회개를 통해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주었다(reconciliatio). 9세기 초에 소위 말하는 카롤링거 시대의 회개 제도의 개혁은 고대 교회의 공개적인 회개를 부활시키고 '리브리 포에니텐치알레'를 폐지한데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리 포에니텐치알레'는 존속하였고 개혁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800년경에는 교회에서 행하는 공개적인 회개는 사라지고 전통적으로 공적이고 중대한 범죄에 적용된 교회적인 속죄행위인 "통례적인 회개"(poenitentia solemnis)만 남게 되었다. 켈트족의 교회로부터 전수된 고해 회개는 널리 퍼졌으며 마침내 로마 가톨릭 교회의 회개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이 제도가 고대 교회의 것과 다른 점은 회개가 반복될 수 있고, 경미하고 비밀스런 죄까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공개적으로 행해지지도 않았으며, 순수한 개인적이고 비밀스런 회개와 차이가 있었다. 이 회개는 사제 앞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과 바로 부과되는 선행의 보속들(satisfationes)과 결합된대 있다. 이 선행의 보속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제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로 이해했던 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면죄부가 아니었음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사면부(indulgentia)의 기원에 있어서 고해 신부나 다른 성직자들의 중보 기도를 토대로 사죄(absolutio)는 대속(redemptio)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사면은 교회에 의해 과해진 회개 행위(교회법에 따른 회개, 교회에서 부과하는 벌)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하나님이 내리는 처벌에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신자가 참회를 하고 사제로부터 사면을 받은 것을 확신하여, 하나님이 그의 죄를 용서하고 그에게 두려움이 되는 영원한 지옥의 벌로부터 건져내었다 할지라도, 그는 계속 죄에 대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기한적인 벌과 연옥을 각오해야 한다. 죄에 대한 기한적인 벌의 완화 혹은 취소에 대한 명백한 소원은 사제들의 중보 기도를 통해(per modum deprecationis)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영적으로 고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에 대한 사제의 도움으로 이해된 사면부가 점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규적인 의무를 진 정당하면서 권위 있는 법률적인 방책으로 이해되었다.

파울루스(Nikolaus Paulus)와 포쉬만(Bernhard Poschmann)의 자세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면부는 11세기에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두 개의 사건으로 1035년의 '구제 사면부'(Almosenablaß)와 1095년의 '십자군 사면부'(Kreuzzugablaß)가 있다. 사면부는 죄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는 기한적인 벌에 대해 교회로부터 인가받은 확고하면서 동시에 법적으로 유효한 약속과 숫자로 정확하게 기술된 규정이 되어있다. 예를 들면 100일간의 사면부로 100일간에 해당되는 기한적인 벌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연옥의 전체 기간(이것은 알 수 없지만)에서 100일을 줄일 수 있는 것으로 가르쳤다. 소위 말하는 '부분 사면부'는 사면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예로 11세기에 南프랑스에서 교회건축을 위한 사면부가 있다. 반면 '완전 사면부'(indulgentia plenaria)는 이런 제한이 없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Urban II.)는 제1차 십자군에 지원한 사람들에게 '완전 사면부'를 약속했다. 이 십자군 사면부는 교회가 제정한 모든 벌에 대한 광범위한 대속으로 이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죄로부터 용서받는 것"(remissio omnium peccatorum)과 죄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기한적인 벌이 면제됨을 확실하게 약속했다. 1세기 후인 1187년 교황 그레고르 8세(Gregor VIII.)는 십자군에 참전하지 않더라도 십자군을 위해 기부한 사람들에게도 사면부를 주었다. 이런 경우 회개와 관련된 내용은 쉽게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사면부에 대해 신학적으로 맨 처음 비판한 사람은 초기 스콜라 신학자인 아벨라르드(Peter Abaelard, 1070-1142)였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참회 감정을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되는 원인으로 간주했다. 의지는 교회에 의해 과해진 회개행위를 완전케 하기 위한 참회에 속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00-1160)의 명제집과 볼로냐 출신으로 카말드리 수도원의 수도사인 그라치안(Gratian, 1158년 사망)이 1140년경에 펴낸 '그라치안의 교회법전'(Decretum Gratiani)도 사면부를 아직 고려하지 않았다. 13세기 초반에 가서야 사면부에 대한 내용은 다양해지지만 활발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사면부(Indulgentia)가 교회법으로 새롭게 등장한 것은 13세기부터이다. 1215년 제4차 Lateran 공의회는 고해(Beichte)를 성례로 결정하였다. 이 공의회의 교회법(Kanon) 21조는 교인은 정규적으로 1년에 1번은 정해진 신부에게 모든 죄를 참회할 것을 결정했다. 이로써 개인을 교회제도에 완전히 묶어버렸다. 제62조에서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교황 제외)은 정규적인 사면부를 신자들에게 40일 이상 줄 수 없음을 규정하였다. 이것은 결국 큰 사면부는 교황만 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비로소 토마스 폰 아쿠빈(Thomas von Aquin, 1225-1274)에게서 깊이 있고 긍정적인 사면부 이론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명제해설'(Sentenzenkommentar)에서 사면부의 본질, 사면부를 주고받는 자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교황의 죄 용서의 권세는 그리스도 (요 8:11)와 사도들의 (고후 2:10) 죄 용서의 권세로부터 온 것이며 사면부의 실행은 우주적인 교회의 무오 권리를 부여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파리대학교 교수인 도미니크 수도회의 초기 스콜라 신학자 후고 폰 쌍트 케어(Hugo von St. Cher, 1097-1141)가 전개한 '교회의 보화'(thesaurus ecclesiae) 이론을 받아들였다. 13세기에 그의 이론은 사면부의 이론에 결정적인 강화를 가져왔다. 이 이론은 사면부를 주는 것에 대해 교회 전권의 시대라는 인식을 하기에 충분했다. 후고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인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는 성인들의 잉여 선행과 더불어 보화의 형태로 교회에 위임되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보화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들은 수량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공로들이 하늘에서 온 것을 생소하게 여기게 하고, 현세적이고 법적인 집행을 위해 사용하였다. 이 보화는 특히 교황의 권한 안에 있는 도구가 되었다. 토마스는 사면의 시여에 대한 전권은 오직 교황에게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교황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즉시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토마스는 연옥에 있는 죽은 사람에게까지 사면부의 사용이 가능함을 인정했다. 사면부가 과거에 개 교회에서 개인의 회개와 목회에서 자리를 차지하였다면 이제 사면은 모든 교회와 이 교회의 머리인 교황의 과업이 되었다. 교황은 '교회의 보화'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교황은 '공로의 보화'가 있다면 "사면부를 집행할 수 있는 권세"(potestas faciendi indulgnetias)를 가진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바로 '교회의 보화'가 사면부의 근거가 되었으며, 이것이 교황의 칙서에 나오게 되기까지 약 100년이 걸렸다.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 1342-1352)가 1343년 공포한 칙서인 'Unigenitus'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완전 사면부는 교황이 공포했다는 점에서 클레멘스 6세의 칙서보다 시간적으로 훨씬 앞서 있다.

사면부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은 1300년 교황 보니파츠 8세(Bonifaz VIII., 1294-1308)가 공포한 기념 사면부 칙서인 'Antiquorum habet fida relatio'이다. 이 기념 사면부는 과거의 완전 사면부와 똑 같은 효력을 가졌다. 과거의 완전 사면부가 교회의 특별한 프로그램에 의해 제한되고 어려운 것에 비해 (예를 들면 십자군 원정) 이 사면부는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열려있었다. 이 기념사면부 칙서는 "plenissima omnium suorum venia peccatorum"(그의 모든 죄과에 대한 완전한 용서)을 약속했다. 이것은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에게 주어진 완전 사면부와 똑 같은 것이다. 누구든지 참회하고 이 사면부를 받고 난 다음에 죽으면 바로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어떤 추기경은 해석하였다. 이제 좀 더 1300년의 '기념 사면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보니파츠 3세는 1300년을 거룩한 해로 지정하였다. 그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성 바울 성당을 그 해에 순례하는 모든 카톨릭 신자에게 완전 사면을 약속했다. 티버(Tiber) 강변에 자리잡은 이제까지 교회와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숙소로 이루어진 황량했던 도시인 로마가 새로운 활기를 띠고 "영원한 도시(urbs aeterna)"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기념 사면부는 100년에 한번씩 거행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곧 바로 이 기한은 50년, 33년으로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25년으로 줄어들었다. 50년으로 줄어진 이유는 "인간 연수의 짧음"(brevitas vitae hominum)과 구약성서의 희년에, 33년은 예수의 지상에서의 생애에 근거한다고 했다. 그러나 기한이 짧아진 것은 교황청의 재정 수입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념 사면부는 결국 신자들의 영적인 빈곤과 교황청의 물질적인 빈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고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90년 교황 보니파츠 9세(1389-1404)는 이 기념 사면부를 로마 순례에 국한시키지 않고 유럽 여러 지역에 있는 성지에도 해당된다는 'Ad-instar' 사면부를 발행하였다. 예를 들면 아시시(Assisi) 근처에 있는 포르티운쿨라(Portiuncula) 교회를 순례하거나 아인지델른(Einsiedeln)이나 아헨(Aachen)에 있는 성교회들을 순례하는 것 등이었다. 'Ad-instar' 사면부는 매우 확대되었는데 1398년 보니파츠 9세는 후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작센 선제후국의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있는 城敎會 순례를 포르티운쿨라 교회를 순례한 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했다. 즉 누구든지 '모든 성인들의 날'(11월 1일)에 비텐베르크의 성교회를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하고 이 교회의 유지를 위해 성심껏 헌금하면 포르티운쿨라 교회를 순례해서 받는 것과 같은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면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사면부에 대한 새로운 변혁은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 1471-1484)에 의해 일어났다. 1476년 8월 4일 식스투스 4세는 남 프랑스에 있는 성인들의 주교좌 성당 개축을 위해 "살바토르 노스터(Salvator noster)"라는 칙서를 공포했다. 이 칙서에서 식스투스는 사면부가 살아있는 사람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연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죽은 사람들의 구원에까지 효력이 있음을 공포하였다. 이 사면부는 교회의 중보기도를 통해 가능했다(per modum suffragii). 40일간의 사면부는 연옥의 벌로부터 상당한 면제를 뜻했다. 이것은 과거의 회개규정에 의한 40일간의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는 것과 같은 효력을 지녔다. 이 규정이 매우 애매했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사면부를 사야한다는 충동을 유발시켰다. 이 때에 바로 교황의 재정관리에서 부패가 최고도에 달했다. 사실 죽은 자에 대한 사면은 신학에서 오래 전에 되어 왔다. 이와 함께 병행된 것으로 가장 유사한 것이 '죽은 자를 위해 드리는 연미사'(Seelenmesse)이다. 이미 제1차 십자군 원정 때 십자군은 자신들의 공로를 죽은 친척에게 양도할 수 있었다.

2. 고해와 사면부의 관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중세 시대부터 공개적인 회개 외에 신부 앞에서 개인적으로 고백을 하고 사죄를 받는 것까지 포함된 고해(Beichte)는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구성되었다. ① 심령의 통회(contritio cordis): 죄지은 것을 참회하고 아픈 마음을 갖는 것, ② 입의 고백(confessio oris): 신부 앞에서 입술로 죄를 고백하는 것, ③ 선행의 보속(satisfactio operis): 자신이 지은 죄에 따른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선행으로 갚는 것. 선행의 보속으로 회개의 계율은 점점 약해지게 되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회개(고해)는 성례(Sakrament)로 승격되면서 신부가 사면하는 말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ego te absolvo). 더 나아가 고해의 첫째와 셋째 부분이 완화되었다. 첫째, 심령의 통회 대신 두려움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부를 통한 성례전적인 특성이 강조되었다. 둘째, 11세기부터 죄의 용서 이후에 행해지던 선행의 보속이 일시적인 벌들의 면제로 이해되었다. 고해성사에서 신부가 사죄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게된다. 즉 지옥에서의 영원한 벌은 죄의 용서로 면제 된다. 그러나 일시적인 벌들, 즉 기한적인 벌들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사면부에 의해 면제받아야 한다. 병, 전쟁, 기근, 연옥 등은 기한적인 벌에 속한다. 사면부에 의해 사람들은 기한적인 벌들을 감면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를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면죄부), 기한적인 벌을 면제받는 것이다(사면부).

.이제 한 장의 사면부는 삶과 죽음의 위급한 순간에 지불할 수 있는 수표의 한 종류가 되었다. 통회와 고해는 행하는 것이 아닌 지불해야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면부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교회 재정의 높은 수익성의 원천이 되었다. 사면부의 부과는 교황청의 관할 하에 있었다. 그러나 세속의 군주들은 자기들의 영토에서 사면부 판매를 금지할 수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면부는 중세교회의 가장 심한 타락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트렌트 공의회에서 폐지되었다(sessio XXI). 그러나 이 사면부가 예술과 사회적인 목적으로 쓰여졌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이 사면부의 수입으로 대학을 위한 보조, 엘프(Elb) 교량들의 건설 그리고 수많은 교회의 장식품을 위해 사용했다.  

III. 루터의 95개 논제의 원인과 내용

1. 95개 논제가 나오게 된 원인

수도사로서 그리고 세상에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던 루터는 사면부에 대한 논쟁으로 고요한 독방에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사면부에 대한 루터의 논쟁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당시 독일에서 판매되고 있었던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한 사면부에 있었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는 로마에서 성 베드로 성당을 새로 짓는데 필요한 재정적인 충당을 채우기 위해 '완전 사면부'(Plenarablaß)를 공고하였다. 그의 후계자인 교황 레오 10세(Leo X., 1513-1512)는 이 일을 계승하고 1515년 3월 31일 독일의 敎會州인 막데부르크(Magdeburg)와 마인츠(Mainz)에 '완전 사면부'인 'Sancrosancti salvatoris et redemptoris nostri'를 공고하게 하였다. 마인츠 대주교구는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교구였다. 1504년부터 1514년 사이 대주교가 무려 3번이나 바뀌었다. 이것은 그 만큼 많은 돈이 로마 교황청에 뇌물로 바쳐졌다는 것이다. 대주교가 되기 위해서는 14,000 굴덴(Gulden)이 필요했다. 1514년 알브레히트 폰 마인츠(Albrecht von Mainz, 1490-1545)는 마인츠의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알브레히트는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요한 치체로(Johann Cicero)의 아들로 영적인 일에 별로 열심이 없고 영적 생활의 변화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짧은 시간에 중요한 여러 성직에 임명되었다. 19세의 나이로 그는 마인츠에서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원이 되고 1513년 막데부르크(Magdeburg)의 대주교와 할버슈타트(Halberstadt)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베틴가(Wettin)에 속한 작센의 선제후들에게 속해 있었던 주교관구 막데부르크를 빼앗았다. 그러나 호엔촐렌가(Hohenzollern)인 알브레히트와 그의 형인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 1세(Joachim I.)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514년 알브레히트는 대주교구 마인츠를 손에 넣음으로 1518년에는 선제후이며 동시에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이미 막데부르크의 대주교와 할버슈타트의 주교이기 때문에 또 다른 직위에 오르는 것이 교회법적으로 위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알브레히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특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이 대가에 대한 조건으로 뇌물을 주었다. 이 뇌물 외에도 알브레히트는 공식적으로 다른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교황청에 대주교직의 띠를 두르기 위해 돈을 바쳤다. 이 띠는 대주교직을 상징하는 것으로 20,000굴덴 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독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만 마르크(DM)가 된다. 알브레히트가 이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자 아욱스부르크에 있는 은행업자인 푸거가문(die Fugger)이 이 돈을 선불해주었다. 루터는 이와 같은 배경을 1517년에 알지 못하고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알브레히트에게 1515년 마인츠, 막데부르크 그리고 브란덴부르크에서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한 '완전 사면부'를 8년간 판매할 수 있다고 허가했다. 실제로 '완전 사면부'는 교황이 제시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죄에 관계하였다. 수도사 서원(청빈, 순결, 복종) 외의 거의 모든 서원은 이 사면부를 사게됨으로써 변경할 수 있으며 이로써 변제할 수 있다. 간음죄와 정당하지 못한 물건을 버는 것까지 포함된 거의 모든 죄가 면제될 수 있었다. 이 사면부를 판매할 동안에는 다른 모든 사면부는 폐지되었다. 이 사면부에 대한 설교 때문에 다른 모든 설교는 중단되어야 했다. 이 사면부에 대한 방해는 법으로 금지되었다. 루터는 1517년 늦은 여름에 이 사면부에 대한 교황의 칙서를 알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식적으로 이 사면부의 수익금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신축을 위해 써야 했지만 레오는 낭비벽 때문에 이 돈의 일부를 사사로이 사용하였다(공금횡령). 알브레히트는 사면부 판매의 절반은 바로 로마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푸거가문에게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는 "거룩한 사업"의 실행을 위해 능숙한 사면부 설교가인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도미니크 수도사 요한 테첼(Johann Tetzel, 대략 1465-1519)을 채용하였다. 테첼은 10년 이상 면벌부 설교자로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며 사기성이 농후한 말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야 마는 굉장한 사람이었다. 이 일로 그는 상당히 돈도 벌었으며 자기 하인에게 상당한 일당을 지불할 능력도 있었다. 라이프치히에 그의 사생아가 둘이나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테첼 자신이 개정하여 설교에 사용한 '막데부르크 교범'(Magdeburger Instruktion)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위, 영혼의 구원, 교황에 대한 존경 그리고 성 베드로 성당의 유익을 담고 있었다. 최소한 일주일에 3번은 '완전 사면부'에 대하여 설교해야 했다. 완전 사면부 설교의 내용으로는 '완전 사면부 칙서'의 내용, 교황의 권위,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의 필요성을 위해 교황이 신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 등이었다. 특히 이 사면부를 사는 사람에게 내리는 4가지 은총이 강조되었다. 첫째,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사면이다. 죄인은 완전한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을 입으며 덧붙여 죄와 연옥의 벌로부터 사면을 받는다. 이 사면부를 사기 위해 왕과 왕비는 25굴덴, 대주교, 고관 귀족은 10굴덴, 일반 성직자, 일반 귀족은 6굴덴, 시민과 상인은 3굴덴, 수공업자 1굴덴, 그 외의 사람 ½굴덴을 지불해야 했다. 빈곤한 사람은 금식과 기도를 해야 했다. 남편을 둔 아내와 이와 비슷한 경우에는 특별한 법을 적용시켰다. 둘째, 일생에 두 번, 자신이 가장 원하는 시간과 죽음의 시간에 교황이 정한 죄들로부터 사면을 받는다. 셋째, 사면부를 사는 사람과 이 사람들의 죽은 친척들에게 기도, 금식, 구제 그리고 경건한 행위들과 같은 교회의 모든 선행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진다. 이 은총은 참회 없이 가능하며 사람들은 죄의 상태에서 교회 공동체의 선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 넷째, 연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영혼을 위해 이 사면부를 사면 교황의 중보 기도에 의해 이 영혼은 죄의 벌로부터 사면을 받는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동시에 성 베드로 성당 건축에 기부할 수 있다. 여기에서 대중적인 유행어가 나왔다. "돈이 연보함에 떨어져 울리자 마자 영혼이 연옥의 불로부터 뛰쳐 오를 것이다."

테첼은 1517년 1월 사면부 판매를 위하여 아이스레벤에 왔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Kurfürst)인 프리드리히 현공(Friedrich d. Weise, 1486-1525)은 테첼이 자기의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국민의 돈이 호헨촐렌가로 새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테첼이 국경에서 가까운 위터복(Jüterbog)과 체릅스트(Zerbst)에서 활동할 때에 루터에게 고해를 하는 프리드리히의 비텐베르크 주민들이 그곳에 가서 사면부를 사왔다. 이들은 사면부를 사가지고 비텐베르크에 와서 시교회(市敎會, Stadtkirche)의 신부인 루터에게 고해 성사를 할 때 그들의 죄에 대한 아무런 뉘우침이나 아픔도 없이 사면에 대한 선언을 요청했다. 진지한 신부였던 루터에게 있어서 이 일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종교개혁의 시발은 루터가 성서신학 교수로서 신학적인 영역의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닌 당시 교회에서 행해지는 회개의 실행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성 베드로 성당 사면부에 대한 책임이 바로 알브레히트에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망설여 왔고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 그리고 기도로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그의 이름으로 시행이 되고 있는 이 사면부의 취소를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루터가 이 편지를 쓴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루터는 알브레히트가 알지 못하는 사면부 설교를 비판하지 않고 이 설교에 나온 내용을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루터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면부 설교를 근거로 하여 그들이 사면부를 사는 것만으로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하게 된다고 한탄하였다. 루터는 신자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교회 특히 감독들의 책임이 중대함을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직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면부를 설교하라고 명령한 적이 결코 없으며 복음을 설교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막데부르크(Magdeburg) 대주교의 문장이 새겨진 사면부 설교자들을 위한 교본(Instructio summaria)이 알브레히트의 인지와 허가 없이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면부를 구입함으로써 얻게 되는 죄의 완전한 용서를 약속했다.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해 사면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참회나 고해가 필요 없다고 했다. 국민들은 사면부를 사게 되면 구원이 확실히 보장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들은 사면부가 벌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면제해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루터는 이 교본은 곧장 폐지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루터는 이 문제가 결국 회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사면부의 판매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었다. 루터는 교회의 책임있는 선생으로서(신학박사로서의 의무) 이에 대해 의견을 표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루터에게 있어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지은 죄에 대한 고통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회개 이해가 사면부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게 한 것이다.

같은 날 루터는 자기가 속한 교구의 주교인 브란덴부르크의 히에로니무스 슐체(Hieronymus Schulze von Brandenburg)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 편지는 보존되지 않았다. 알려지기에는 이 편지에 테첼이 이 교구에 나타나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루터는 이 편지들 외에 사면부 논쟁을 뜨겁게 불러 일으켰고 종교개혁의 시발이 된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교회(城敎會)의 문에 1517년 10월 31일 붙였다. 그 당시 성교회의 문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이었다. 이 논제의 제목은 "사면의 능력의 선언에 대한 논쟁"(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이다.

2. 95개 논제의 내용

95개 논제는 형식에 있어서 논쟁적인 논제이지 교리적인 견해는 아니다.

① 제1항-4항은 루터의 회개관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다. 제1항은 95개 논제의 전체내용이 요약된 것으로 신약 성서를 근거로 한 회개관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주님이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회개하라'...(마4:17)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임을 알리시는 것이다.""이 말씀은 성례전적인 회개(사제의 직무에 의해 행해지는 죄에 대한 고백과 보속)의 언급으로서 이해될 수 없다(제2항). 이것은 회개가 무엇임을 분명히 표명한 것으로 회개가 성례전적인 고해나 보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속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적인 회개이다. 내적인 회개는 육신을 죽이는 것(carnis mortificationes)이다(제3항). 참된 내적인 회개인 자신에 대한 미움이 있는 한 벌은 머물러 있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제4항).

② 제5항-7항은 교황의 벌에 대한 통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제5항에는 "교황은 자신의 고유한 결정이나 교회법에 의해 부과된 벌만 용서하거나 할 수 있다"고 했다. 교황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선언할 수 있다(제6항). 하나님은 사제에게는 복종하면서도 하나님께 겸손하지 않은 자에게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제7항). 제5항-7항에서 루터는 교회의 규정이나 법을 문제로 삼으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교황이 오직 자신에게 정해진 벌들을 사할 수 있다는 견해는 연옥에서 벌을 받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위해 사면을 실행함과 최소한 모순된 것으로 보았다. 비록 당시에 사면부에 대한 교리가 공식적인 개념을 세우지 못했지만 루터는 약 300년간 실행되어 왔고 교황들에 의해 수많은 사면부 칙서로 증거된 교회의 관습을 반대했던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③ 제8항-29항은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죽은 자들을 위한 사면부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루터는 교회의 회개 규정들은 오직 산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죽은 사람에게 결코 해당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제8항-13항). 제14항-16항에서 루터는 연옥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불완전한 구원은 죽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준다. 이들의 절망적인 공포는 연옥이다. 제17항-24항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상태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이들이 공적을 세우거나 사랑을 더 많이 한다거나 그들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이성과 성서를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본다.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 교황은 단지 중보 기도를 통해서 면제를 줄 수 있다(제26항). 이것은 교황이 천국 열쇠를 가진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돈이 연보함에 떨어져 울리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뛰쳐 오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금전욕과 탐욕을 증가시킬 따름이다(제27-28항).

④ 제30항-55항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사면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참회가 참된지 아닌지를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며 따라서 죄에 대한 완전한 사면을 더 더욱 확신할 수 없다"(제30항)는 내용을 시작으로 제30항-40항은 사면부와 참된 회개는 서로 어떤 상태인가를 다루고 있다. 진실한 참회는 벌을 달게 받지만 사면부는 이것을 멀리한다(제40항). 제41항-52항은 참회와 사면부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므로 사면부는 선행과 갈등한다고 본다. 루터는 선행과 구제가 사면부를 사는 것보다 훨씬 선한 일임을 가르치고 있다. 루터는 사면부를 사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이 더 나은 것임을 기독교인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제43항). 제53항-55항은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사면부를 설교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⑤ 제56항-68항은 교회의 보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교회의 보화는 지상에 있는 재산이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 또는 라우렌티우스(Laurentius)가 말한 것처럼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교회의 참된 보화는 영광의 가장 거룩한 복음과 하나님의 은총이다"(제62항).

⑥ 제69항-80항은 사면부 설교의 폐해들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 널리 퍼지고 있는 사면부 설교는 복음과 모순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⑦ 제81항-91항은 사면부를 반대하는 평신도들의 날카로운 질문들과 이것과 더불어 제어되지 않는 사면부 설교로부터 교황의 명예를 구하고자 한다.

⑧ 제92항-95항은 사면부 설교에 대한 경고와 주의를 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벌 때문에 도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를 것을 당부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제94항). "위안보다는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 (제95항).

3. 반향

루터는 이 논제에 대해 누군가 논쟁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측에서나 히에로니무스 측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원래 이 논제는 평신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논쟁을 위한 것이었다. 루터는 이 논제를 세상에 공포하려는 의도나 계획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먼저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려고 했기 때문에 뉘른베르크에 있는 쇼이어를(Christoph Scheurl)에게 논제를 보내지 않았다고 1518년 3월 5일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11월 11일 루터는 이 논제를 외부에 보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그리고 이 논제는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전 독일에 퍼졌다. 이에 대해 루터의 동시대인으로 종교개혁사를 서술했던 뮈코니우스(Friedrich Myconius, 1490-1546)는 "마치 천사들 스스로가 이것을 전하는 사자(使者)들 같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뉘첼(Kaspar Nützel)이 12월에 독일어로 이 논제를 번역하였다. 루터의 이 논제는 루터가 생각하지도 못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IV. 결론

루터의 95개 논제는 학문적인 신학의 영역이 아닌 목회현장에서 부딪히는 가장 중요한 죄와 이에 따르는 벌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중세인들은 죄에 대한 용서뿐만 아니라 이 죄에 대한 벌로부터의 사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 중세인들의 삶의 방식에 맞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교회는 벌로부터의 사면을 남용하였고 신자들로 하여금 사면부를 사는 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표로 생각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교황청이 요구하는 종교적 행위였지만 그리스도가 가르친 복음이 아님을 루터는 알게 되었고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토대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죄와 벌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속죄보다는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과 멀어질 수밖에 없음을 간파한 것이다.

사면부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죄와 그에 따른 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세 시대의 교회에서 교육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언제나 사제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이 성직자들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주었고 성직자들은 그들의 교권을 세우는 방책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 당시 이러한 상황에서 "만인 제사장직"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사실 오늘 한국의 개신교회의 목회가 과연 복음적인가 라고 자문해볼 때 너무 종교적인 것에 복음이 얽매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든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의 95개 논제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참 교회로 거듭나도록 자성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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