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선행의 관계

-루터의 '선행에 관하여'(1520)를 중심으로-

               1. 시작하는 말

올해는 루터 서거 450년 주년되는 뜻깊은 해로 독일에서 "루터의 해 '96(LUTHER-JAHR '96)"이라는 표제 아래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 "루터 도시(Lutherstadt)"라는 별명을 가진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위시하여 루터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여러 도시들을 관광할 수 있는 상품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필자가 지난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3번째의 루터 유적지 방문에서 이번의 루터 전시회는 신학적인 측면보다 오히려 루터의 인간적인 측면을 더욱 부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루터를 이제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굴레에서 신학적으로 해방한 인물로 보는 입장에서 더 나아가 루터를 새롭게 발견하고자하는 시도라고 보여졌다. 그 가운데 루터가 라틴어 학교를 다녔던 아이제나흐(Eisenach)에 있는 루터 하우스(Luther Haus)의 "목사 사택 기록(Pfarrhausarchiv)" 전시회는 성직자들의 결혼이 금지되었던 카톨릭의 세계에 성직자도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선물을 준 루터의 업적으로 16세기부터 현대까지 목사 사택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려주는 흥미있는 전시회였다. 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 홀(Luther Halle)에서는 "루터와 백조"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회가 있었는데 이것은 "후에 백조가 나타나서 교회를 개혁하리라"는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후스(Johannes Hus, 약 1370-1415)의 예언이 루터의 출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교회 개혁의 중심 사상은 바로 칭의론(Rechtsfertigungslehre)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3가지의 '오직'(sola)을 통해서 가능하다: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3가지의 '오직'으로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과"라는 신앙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은총과 공로, 믿음과 행위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 루터의 이런 사상은 오늘 우리에게도 전승되어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강조는 자칫 행위는 불필요하며 구원에 있어서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답변이 바로 루터가 1520년에 쓴 글인 '선행에 관하여(Von guten Werken)'라는 설교이다.

본 소고는 루터의 이 설교를 중심으로 신앙과 선행의 문제를 접근하고자 한다. 이 글은 또한 오늘 한국 개신교에서도 계속 대두되는 신앙과 행위의 문제에 대한 좋은 답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루터의 명제인 '오직 믿음'을 그 당시의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문제에 부딪히게 됨은 당연하다. 이러한 전이해가 없이 개신교인들에게 항상 용서해주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만 부각된다면 죄에 대한 아픔도 없이 언제나 죄를 범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죄를 범해도 주일날 교회에 가서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는 잘못되고 안이한 생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을 감정적으로만 이해하는데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요즘은 부흥회 때도 회개를 강조하지 않지만 부흥회 때에 울고 짜고 기도하면 용서를 받고 믿음이 생긴다고 알고 있다. 과연 루터가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계속 죄를 범한 인간을 간단히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말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신앙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감추어진 면이 있었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알기 위해 이 글에서는 루터의 칭의 이해 그리고 선행과 신앙의 관계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2. '선행에 관하여'(1520)의 배경과 구성

2.1. '선행에 관하여'(1520)가 나오게된 배경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루터의 사상은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68년 사망)의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인쇄가 예전보다 훨씬 쉬어지자 팜플렛(Flugschriften)을 통하여 급속도로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성서신학 교수로서 대학의 강단에서 뿐만 아니라 비텐베르크 시교회(市敎會, Stadtkirche)의 설교자로서 매주일 설교한 목회자이기도 했다. 루터의 설교는 평신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특히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루터의 주장은 이제까지 행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신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와 혼돈을 초래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선행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루터가 선행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루터는 이에 대해 어떻게 선행이 행해져야 되며 어떻게 이것이 인식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해야할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선행에 관하여(Von den guten Werken, 1520)'라는 설교가 나오게 되었다. 루터는 이 글을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Kurfürst Friedirch)의 비서이며 궁중 설교자인 슈팔라틴(Spalatin)의 권고로 프리드리히의 동생인 작센의 제후 요한(Herzog Johann)에게 헌정하였다. 루터는 1520년 3월 25일 슈팔라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설교라기 보다는 작은 책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제까지 쓴 책 가운데 "최고의 책"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루터는 이 글을 1520년 2월 26일부터 쓰기 시작했으며, 1520년 5월말 혹은 6월초에 비텐베르크에 있는 멜리호르 로터 2세(Melchior Lotter d.J.) 출판사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루터는 이 글을 신학자들을 위해 쓴 글이 아니라 평신도를 위하여 썼다. 그러므로 그는 이 글을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썼다. 그는 평신도들이 신앙에 대하여 오도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를 바로 잡아 주고자 했으며, 또한 자신이 배우지 못한 평신도들을 위해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설교하고 글을 쓴 것에 대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는 그 당시 라틴어로 설교하고 글을 쓴 성직자와 비교해볼 때 민중의 편에 선 목회자요 교육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2. '선행에 관하여'의 구성

루터의 '선행에 관하여'라는 설교를 뢰베니치(W. v. Loewenich)는 복음주의적 윤리의 가장 아름다운 진술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설교를 통해 루터는 자신의 새로운 윤리의 근본을 제공하고 있다. 이 설교는 선행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모세의 십계명을 해설하고 있다. 우리는 루터가 십계명의 분류를 우리와는 달리 제1,2계명을 제1계명으로 그리고 제10계명을 제9,10계명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루터의 분류법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겠다.

이 글은 십계명에 의거하여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모세의 첫째 돌판(제1계명부터 제3계명까지)에 관해서, 제2부는 둘째 돌판(제4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제1계명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에 관하여 1-17항목에 이르는 설명을 하고 있다. 특히 제1항과 2항은 이 책의 요지라 할 수 있다. 1. 선행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금하셨던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었으로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2. 첫째되며 최고의 선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기도, 금식 그리고 종교 재단을 설립하는 것과 같은 종교적인 선행이나 사람들 가운데서 선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라고 묻겠지만 우리는 이런 선행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알 수 없으며 이런 것들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 야웨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2계명에 관하여 18-31항에 걸쳐서 해설하고 있으며 제2계명에 해당되는 4가지 선행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선행은 하나님을 은총을 찬양하는 일이다(제21항). 둘째 선행은 일시적인 존경과 영광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제21-24항). 셋째 선행은 모든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제25항). 넷째 선행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든지, 저주하든지, 거짓말 하거나 속이거나 마술하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지 않은 것이다(제28항). 제3계명인 안식일 성수에 대한 계명에 대한 설명은 1-25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예배(제1항), 미사(제2항), 설교(제3항), 기도(제3-16항), 안식일 성수의 영적인 의미(제17-18항), 금식(제19-23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2부: 제4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관하여 4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제1-6항), 둘째, 교회를 섬기는 것(제7-11항), 셋째, 세속 권위에 순종하는 것(제12-17항), 넷째,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제18-19항) 그리고 결론(제20-21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비교적 짧막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부정적인 금지보다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 제5계명인 살인금지의 계명은 원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악한 마음 대신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자비로 온유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으로, 제6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순결과 깨끗함을 지키는 것으로, 제7계명인 도적질하지 말라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물질에 대한 관대함(Freigebigkeit)으로, 즉 인간이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물질에 자신의 신뢰를 두지 않는 것으로, 제8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진리와 복음을 위한 경주가 교황, 감독, 군주 그리고 왕에 대하여 요구되어짐으로 해석하고 있다. 제9계명과 10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아주 짧막하게 이웃의 것에 해를 입히지 말라고 언급한다.

3. 루터의 칭의에 관한 이해

3.1. iustitia Dei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fides)과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는 톱니바퀴 처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통로이며 하나님의 의는 신앙을 통해서만 전달되어 진다. 루터가 신앙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통로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는 어거스틴 은자회 수도원에서 구원에 대한 절망으로 인한 자기 자신과의 투쟁(Anfechtung), 옥캄주의와의 결별 그리고 성서 연구에의 몰두라는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된다. 루터는 근대의 방법(via moderna)으로 대표되는 옥캄(Wilhelm von Ockham, 1285-1347)의 가르침에 충실한 수도사였다. 옥캄은 "인간 안에 있는 힘으로 선행을 할 수 있다(facere quod in se est)"라는 명제 아래 이미 고대 교회에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펠라기우스가 패배한 논제를 다시 끌여들었던 것이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옥캄이 가르친대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선을 쌓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수도사에게 요구되어지는 두가지의 선, 즉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성취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 속에 잠기게 되었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과 투쟁하였던 것은 자기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었을 때 그를 더욱 절망 속에 빠뜨린 것은 어거스틴의 예정론에 관한 글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멸망으로 예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성서를 통해 구원관에 대한 확신이 서기까지 그는 불안과 번민 가운데 지냈던 것이다. 왜냐하면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를 깨닫기 전까지 그가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행위를 중요시여긴 바로 그 당시 교회의 가르침과 신학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이점에 있어서 루터는 중세 후기에 속한 사람이었다.

루터에게 언제나 의문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롬 1:17에 나오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였다. 그는 하나님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구약의 율법이라는 의를 주셨는데 복음에도 하나님의 의를 주셨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루터는 미워한다고 표현하였다. 루터는 성서를 "복음"으로서가 아닌 "율법"으로 읽었던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의롭게 되어야할 의로 이해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서 "하나님의"에 해당되는 속격을 하나님의 속성에 도달해야하는 주격적인 속격(genitivus subjectivus)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이 의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성취해야 할 의이다. 이 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죄인과 불의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의이다.

루터는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낮이고 밤이고 오랫동안 씨름하였으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특성(Qualität)으로서의 이 의로 여기던 이제까지의 관념을 깨고 "하나님의"라는 속격을 목적격적인 속격(genitivus objectivus)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의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성취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덥입혀주는 수동적인 의이다. 이 의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선물이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이다.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달은 다음 자신의 심경을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으며 낙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그가 죽기 1년전인 1545년 출판된 그의 라틴어 저작 전집의 제1권의 머리말에서 술회하고 있다.

3.2. justificatio et justificare

루터에게 있어서 justificatio와 justificare는 하나가 아니다. 의롭게 여긴다는 동사인 justificare는 루터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루터는 이 말을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의해 인간이 정당하다고 선언(die Für-Gerecht-Erklärung)을 받음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로 무죄 판결을 받아 새롭게 변화된 사건(Geschehen)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선물하심으로 이 의를 통하여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선행의 실행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의로 여겨진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루터는 "낯선 의(iustitia aliena)"라고 한다. 의롭게 된 것이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죄를 더 이상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의는 인간 "밖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의는 오직 신앙을 통하여 가능하다. 이 신앙과 더불어 그리스도가 인간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이 의는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게 된 유일한 통로가 된다. 이로써 루터는 중세 신비주의, 특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327년 사망)의 입장인 그리스도가 인간 안에서 탄생한다는 것과 확실한 결별을 나타내고 있다.

루터는 롬 3:4을 다루면서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하나님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여겨지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또한 롬 4:7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루터는 의롭게 됨이라는 명사인 iustificatio는 두 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어떤 사람도 마음에서 나온 순수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은 선한 행위를 하려고 하지만 그 자신이 선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분열되어 있고 죄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선한 행위를 하려면 인간은 일치되어 있고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 인간이 은총의 도움으로 순수하고 완전한 헌신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윤리적으로 완전한 의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구원의 수단으로 참작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왕이 베푸는 것과 같은 은총에 속한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 그러므로 iustificatio는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은채 심판 날에야 완성된다. 이것은 종말에 실현될 희망 속에 남겨져 있다.

4. 루터에 있어서 신앙과 선행의 관계

4.1. 최고의 선행으로서 신앙

신앙과 행위라는 주제는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설교된 이후부터 불가피하게 대두된다. 루터는 이에 대한 답변을 '선행에 관하여'라는 설교에서 십계명을 해석함으로써 얻어낸다. 이 설교는 신앙과 선행에 관한 새로운 관계 정립이다. 루터는 이 설교의 서두를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는 더 나은 어떤 선행이 없다는 것으로 장식하고 있다. 이것은 선행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명시한 복음서의 내용(마 19:17)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선행이란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첫째되며 최상의, 가장 귀한 선행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우리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루터에게는 왜 신앙이 최고의 선행이 되는 것일까?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이 내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 내적 연관의 근본이 바로 신앙에 있음을 갈파하였다. 그러므로 신앙 외에는 어떤 선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십계명의 제1계명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신앙이란 선한 마음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갖는 것이다. 제1계명이 지켜지고 있지 않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계명이 가장 근본적인 계명이며 구원에 이르는 계명인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신앙을 외형적이고 종교적인 것에서 쁹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금식, 기도, 교회 안에서 구제하는 행위등을 통하여 선행을 쌓아 의에 이르려고 하지만 이런 일들은 거짓되고 위선적이며 바리새적이고 비신앙적인 선한 행위이다. 이것이 비신앙적인 선한 행위인 것은 그 근본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십계명의 제1계명을 범한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십계명의 제1계명은 바로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제1계명의 말씀이며 이 신앙에 대한 간구이다. 이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다는 것이며 여기에 어떠한 다른 것이 끼어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제1계명으로부터 야웨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2계명의 선행이 흘러 나오게 된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의 은총을 고백하고 오직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게 되고 존귀와 영광을 받게되는 것이며 모든 곤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앙이다. 다음으로 제3계명이 뒤따른다: 기도와 설교를 들음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고찰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여기에 고행과 자신의 육신을 억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제3계명은 주기도문의 "나라이 임하옵시며"와 연관되어 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일에서 휴식을 취하고 우리 안에 오직 하나님께 대한 행위만 있도록 하며, 눅 17:21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안식일과 휴일이 올바로 지켜지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4번째 간구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모세의 둘째 돌판에 새겨진 나머지 7개의 계명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둘째 돌판에 있는 7개의 계명들을 따르고 지키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이웃에 대해 행위로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 루터에게 있어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선행 의인은 인간 스스로 노력한 힘으로 구원에 도달하려는 우상 숭배로 여겨진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은 모든 선한 행위의 원천이며 근거가 된다. 선행은 신앙과 연관되어야 한다. 신앙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선행은 선행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은 모든 행위의 "주된 행위(Hauptwerk)"이다. 그렇다면 신앙은 이미 행위를 내포하고 있게 된다. 이에 대해 루터는 1522년 독일어로 번역된 신약 성서 로마서 서문에서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요 1장)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 기질, 감각, 그리고 모든 힘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들며, 성령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오! 믿음은 살아있고, 굳세고, 강력한 것이다. 믿음이 선한 일을 끊임없이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은 선한 행위들이 행해져야 될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고, 오히려 이미 선한 행위들을 했으며 언제나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4.2. 선행에 대한 두 가지 구분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십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것과 인간에게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4.2.1.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선행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선행은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제시한 95개 조항도 인간의 죄의 해결을 위한 종교적인 행위인 고해 성사의 세번째 단계인 소위 "선행의 보속(satisfactio operis)"에 대한 논쟁이었다. 루터 당시는 신앙이 쇠약해진 시대가 아니라 사람들의 종교적인 관심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앙적인 행위에 열심을 냈던 것은 사실이다. 루터가 태어났던 중세 후기를 가리켜 괴팅엔(Göttingen) 대학교 신학부의 교회사 교수인 묄러(B. Moeller)는 "중세 후기는 교회화의 최고조의 시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신앙의 문제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영원한 구원이었다.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 애쓰는 것 중의 하나는 종교적인 행위이다. 이 종교적인 행위를 루터 당시의 카톨릭 교회는 제1계명을 지키는 선행으로 가르쳤다. 찬송부르는 일, 미사 참석, 아침 기도회와 저녁 기도회를 지키는 일, 매일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키는 일, 종교 재단을 세우는데 헌금하는 일, 교회, 교회의 제단 그리고 수도원들을 꾸미는 일, 로마와 성자들의 유적지를 순례하는 일 등이 신앙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는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불완전한 사랑의 표현으로 보였다. 이것을 남녀 간의 사랑을 비유로 들어 말하는데 상대방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할 때는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지만 상대방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면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서 상대방을 여러 면에서 조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무마해보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종교적인 행위의 열심이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지 저으기 의심스럽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게 된 것도 신앙적인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을 주로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루터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철학이나 윤리의 범주가 아닌 신학적인 입장에서 이야기 한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종교적인 선행은 결국 우상 숭배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닌 인간의 공로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십계명의 제1계명을 범하는 행위이다.

루터는 기도, 금식 등 종교적인 선행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인간의 직업 상의 일, 휴식, 먹고 마시는 일, 잠자는 일 등 일상의 생활 또한 선한 행위 임을 주장한다. 선한 행위다, 선한 행위가 아니다는 인간이 정해 놓은 것이요, 하나님에게는 이런 차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루터는 세속의 일과 종교적인 선행의 구분을 철폐하고 모든 행위가 차별없이 선한 것임을 천명하였다.

4.2.2.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윤리적 선행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은 하나님과 관계된 영역 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 언급되어진 것으로 기독자의 윤리 문제를 다루게 된다. 루터는 십계명의 제4계명부터 제10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인간의 윤리적인 선행의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다. 제4계명에서 루터는 부모와 지식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엄하게 가르치고 있다. 루터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제4계명에서 세속의 권위와 교회의 성직자들의 해악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사치, 매춘 그리고 고리대금업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루터는 다른 계명들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언제나 이러한 계명이 신앙과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인간이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근원은 신앙에서 나와야 한다. 신앙으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은 후에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된다. 이 사람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자연적으로 맺는 것처럼 선한 행실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이 선한 행실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루터는 인간의 윤리적인 선행의 한 부분을 시민적 정의(iustitia civilis)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을 협소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시민적 정의는 인간 사이의 도덕적이고 시민적이며 외적이고 정치적인 의이다. 우리는 이것을 완전무결하게 이룰 수 없다. 이 의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치체로(Cicero)가 가르친 정치적인 덕의 총괄이다. 이러한 의는 이방인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국민들의 질서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 의의 영역을 허락하셨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의는 사람들 앞에서 유효하며 영광을 가지고 있지 하나님 앞에서 유효한 것이 아니다. 루터는 여기에서 신학적인 의와 정치적인 의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세속에서 재판관으로부터 의롭다고 선고를 받는 정치적인 의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고를 받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의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의 심판 앞에서 인간을 전혀 도울 수 없다. 이 의는 가면이요 위선이요 거짓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진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외적인 행동은 시민적으로 정치적으로 가능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모신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영웅적인 덕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윤리적인 행위가 신앙인에게 불가피하게 따르게 됨을 주장하고 있다. 신앙인이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서가 아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해된다. 성령은 인간 안에서 선행을 하게 하는 원동력의 역할을 하며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사람의 마음에 불어 넣는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이 성령의 활동 때문에 강제적이 아닌 자율적으로 선행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신앙이 없다는 것이다. 삶은 신앙의 훈련으로서 나타나게 되므로 행위는 신앙의 모습이다.

5. 끝맺는 말

루터의 '선행에 관하여'는 선행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변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참 신앙이 무엇임을 변증하기 위해 행위의 근본이 되는 십계명에 대하여 해설하고 있다. 루터는 신앙과 선행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최고의 선행임을 천명함으로써 세속적인 일들과 성스러운 일들 사이의 차이를 허물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 안에서 선행의 차이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선행이 신앙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에 우선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죽은 것이며 이 행위로 구원에 도달하려는 것은 우상 숭배에 해당된다. 신앙은 행위를 가능케하는 원천이 되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의 열매로서 선한 행위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선한 행위가 결코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으며 이러한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행위임을 주장하고 있다.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창조가 아닌 두 번째 창조인 거듭남(regeneratio)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루터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 그에게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을 전혀 쁹아볼 수 없다.

루터에게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신앙적인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으려는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에 대한 반박의 역사적인 배경에서 먼저 조명해야 할 것이다. 루터는 선행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선행이 신앙과 은총보다 선두에 있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선행과 신앙의 문제는 경건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으며, 경건주의자들은 살아있는 믿음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을 다시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들이 강조한 것은 루터와 달랐다: 경건주의자들에게는, - 루터가 원했던 것처럼 - 신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신뢰하여 그의 전체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믿음 자체보다, 생동력을 가진 선행이 더 중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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