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에 대한 교회사적 고찰과 루터의 장례식 설교에 관한 소고

 

I. 서언

1998년 가을에 모 재벌 회장의 자신을 화장해달라는 유언이 우리 사회에 화장문화에 대한 대토론을 이끌어 낸 적이 있다. 1995년 보건복지부의 추산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역의 묘지 면적은 982㎢로서 주택 면적 총대지 1,937㎢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고, 전국에 있는 전체 분묘 수는 1,961만 기로 서울 면적의 1.6배, 전국에 있는 공장 부지의 1.2배 정도이며, 그 중 800만 기가 무연고 무덤이라고 한다. 1년에 약 20만 기(약 30만평)의 무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여의도 면적의 1.2배 정도의 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장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어지고 또한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육신의 죽음은 당사자는 물론 당사자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이별을 고하게 한다. 그러나 죽은 이에 대해 어떻게 이별을 고하는 방법의 문제에 있어서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특히 종교에 따라 현격하게 상이한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유교, 불교 그리고 샤머니즘의 문화적인 전통이 뿌리 내린 한국 사회에 짧은 전통을 지닌 기독교는 장례 문화에 있어서 기독교적인 장례 문화를 정착하기에는 아직도 상당한 진통과 시련이 남아 있으리라고 본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적인 장례문화의 정착을 위한 시도로 장례에 관한 교회사적인 변천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것은 유교적인 장례문화의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장례문화를 재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며, 어떻게 장례를 기독교적으로 치를 것인가는 복합적인 종교 사회 안에 있는 한국 교회에 최소한 장례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장례식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에 임하는 태도이다. 개신교에 장례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연 루터의 글을 통하여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죽음에 임해야 하는가를 알아보고 그의 장례식 설교를 통하여 의식과 제식에 그치는 장례 예배가 아닌 복음적인 장례 예배를 연구하고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II. 장례문화에 대한 교회사적 이해

1. 고대 교회

고대 교회에서 장례는 시체를 치우는 일의 기술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에서 가치있게 여겨진 장례는 인간적이고 기독교적인 의무와 경건의 계명이었다. 기독교 이전에 있었던 장례에 관한 예전과 풍습이 고대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고대 교회의 통일된 장례식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적응이 기독교적인 논증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은 장례에 대한 기독교인의 의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이며 부활을 맞이하는 사람이다(Cur. 18). 이러한 사실로부터 죽은 사람에 대한 자비로운 마지막 일들이 정당하게 여겨졌다. 사람이 숨을 거두고 나면 죽은 사람의 눈과 입을 막아주었다. 죽은 사람을 씻고 아마포로 덮어 주었다(Tertullian, An. 42; Prudentius, Cath. 10). 왕, 감독 그리고 사제에게는 때때로 그의 제복을 입혀 주었다(Eusebius, V.C.IV, 66 u.a.). 그 후 시체는 관에 눕히고 무덤으로 옮겨졌다.

매장은 처음부터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유일하고 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서 예수의 매장은 확실히 무조건적인 모범으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장례는 늦어도 2세기부터 교회의 과업이 되었다. 스스로 기독교인들의 강력한 대적자라는 아포스타타(Julian Apostata)는 기독교를 확장시키는 주요인으로서 죽은 사람들의 무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돌봄을 치겨세우며 내세우고 있다. 근본적으로 여기에는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 뿐만 아니라 구원에 참여하는 육신의 영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순교자에게 있어서 무덤과 신성한 장소는 일치하였다. 근본적으로 死者 崇拜(Totenkult)는 무덤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대 교회에서 묘지는 거룩한 장소에 속했으며 땅 위나 땅 아래에 자리 잡았다.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은 제2세기부터 4, 5세기까지 혹은 더 오래동안 죽은 이를 카타콤베(???? ??????, catacumbae; 이 이름은 "좁은 골짜기를 따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원래 로마 근교의 제바스티안의 카타콤베인데 각 묘지를 정해 놓고 표시하였다)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지하 묘지(특히 로마, 남 이탈리아,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몰타, 북 아프리카, 리비아)에 장사지냈다. 제8세기부터 붕괴하기 시작한 로마의 카타콤베가 1593년부터 안토니오 보시오(Antonio Bosio)에 의해 1849년부터는 데 로시(de Rossi) 그리고 1883년부터 빌페르트(Joseph Wilpert)에 의해 탐구되었다.

하나의 장례 양식에서 다른 양식으로의 교체는 제2세기로 넘어갈 때 일어났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을 근거로 하여 나타난 관습은 아무런 큰 어려움 없이 일반적인 변화 안에 삽입되었다. 구약 성경적이고 로마적인 관습에서 나온 장례의 세부사항들(예를 들면 주거지로부터 떨어진 곳에 안장하는 것)은 제4세기의 문서에서부터 정확하게 나옴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들로는 시신을 씻는 일, 수건으로 덮는 일, 수의, 입관, 곡(Conclamatio), 기름 바르기, 도유, 상복, 밤샘, 운구, 장례 행렬, 시편 찬송, 죽은 이에 대한 작별인사, 부장품들이 있다. 덧붙혀서 5일, 7일, 30일째 되는 연례기념일에 성묘하는 것과 40일간의 애도, 성만찬(영원한 구원을 위한 제사로서)이 있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얼굴이 동쪽을 향하도록 장사하였다. 이것은 그곳으로부터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의미가 있었다. 무덤은 꽃들로 장식되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장례와 죽은 자에 대한 제식은 전반적으로 죽은 사람에 대한 의무를 완수해야 할 가족의 일이었다. 또한 장례는 교회에서 교회의 의무가 되었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구성원은 신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소환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와 시편의 찬송으로 그를 무덤까지 수행하였던 것이다.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0/50-420)는 이미 이것을 "기독교의 전통(christiana traditio)"이라고 했다. 닛사의 그레고르(Gregor von Nyssa, ca. 330-395)는 그의 자매 마크리나(Macrina)가 죽었을 때 처녀들이 시신 옆에서 기도하고 찬송했으며 그후 함께 온 교인들이 시편을 교창(交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시편 101편이 교창되었다 (Conf. IX,12). 교회는 예배 순서에 들어있는 기도에서 큰 소리의 조사가 아닌 평온한 기도로 교회에 어울리는 슬픔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바로 예배 의식의 기도로 발전하였다. 로마 교회의 성사집에는 임종과 장례에서 사용되는 기도 모음집이 들어있다. 이런 것들로는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그레고리의 성사집(Sacramentarium Gregorianum)에 들어 있다: 임종시의 기도들(Orationes inagenda mortuorum), 죽은 사람의 몸을 씻고 난 후의 기도(Orationes post lavationem corporis), 무덤에 묻히기 전의 기도들(Orationes ante sepulcrum, prius sepeliatur), 장사 이후의 기도들(Orationes post sepultum corpus).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물을 바치는 것과 기도를 드리는 것은 후에 신학적으로 문제되었다. 터툴리안(ca. 160-ca. 220)과 카르타고의 시프리안(ca. 210-258)은 이 두 가지를 언급하였다. 고대 교회에서 장례식의 아주 구별되고 확산된 전통이 사도적인 법령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죽은 다음 3일째 되는 날에 죽은 자를 위한 예배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3일째 되는 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9일째 되는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최고의 기념제가 열리며 40일째 되는 날에도 이와 같은 기념제가 열리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매우 오랫동안 애도한데서 유래하였다(신 34:8); 죽음을 기념하는 날에는 죽은 사람의 구원을 기원하는 성찬식이 행해졌다. 어거스틴은 '죽은 사람을 위한 보살핌에 관하여(De cura pro mortuis gerenda)'에서 죽은 자를 위한 중보의 기도의 유익에 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18,22): "거룩한 관례에 따라 제단에 있는 제물과 우리들의 기도와 구제의 제물을 통해 우리가 죽은 자들을 위해 탄원한 바로 그것이 죽은 자들에게 유익하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중보기도의 축복을 확실하게 한 사람들에게만 유익하다는 것을 유보로 한다. 우리는 공을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중보기도를 거듭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중보기도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거나 받아야 할 사람 가운데 지나쳐 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중보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중보기도가 부족한 것보다는, 중보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중보기도의 잉여가 더 낫다."

마지막으로 고대 교회의 공동묘지와 무덤의 형태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평지로 된 공동묘지에 매장(나무관이나 벽돌로 된 무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개인묘지에 가난한 그리스도인들과 묘지를 함께 나누었다. 교회 묘지(Coemeterium)는 자유인들의 무덤 옆에 있는 황제의 빌라에서 시작되었다. 공동묘지는 제3세기 로마에서 정확한 경계가 없는 시의 외벽 밖에 있는 토지에서 시작되었다. 3세기의 초반부터 유래된 카타콤베는 가장 오래된 지하 대 묘지였다. 박해를 받던 시대에 사람들은 순교자 무덤들로부터 가까운 곳을 찾았다. - 무덤은 일반적으로 3가지 형태를 띠었다: 1. 최상급: 장식이 있는 석관, 2. 아르코졸(Arkosol) 무덤: 땅으로부터 팽팽하게 반원형의 화살 모양으로 쌓아 올려진 무덤, 3. 가장 단순하고 흔한 무덤: 측면이 긴 좁은 면을 가진 무덤.- 평화로운 시대에는 때때로 전 주거지역 주위에 교회묘지를 지닌 교회당이 성인숭배를 위해 건축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교회는 왕후의 영묘를 교회 안에 두고 있다. 이 교회의 원형으로 된 무덤 건축물 안에 콘스탄틴 대제의 석관은 12 사도의 가상 무덤으로 둘러 싸여 있다. 제5세기의 후반부터 무덤은 도시 안에 자주 생겨났다. 여러 종교회의에서 반대하였지만 6세기부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무덤들이 도시 교회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2. 중세 교회

고대 교회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는 신학적인 입장으로부터 중세 시대에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미사(missa pro defuntis)'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마침내 '로마의 의식(Rituale Romanum)'으로 정착되었다. 여기에서 위령미사(Exequien)는 발인하기 전에 고인을 축복하고 보내는 교회의 의식, 초상집으로부터 교회로 운구, 시신을 다루는 예식(Totenoffizium), 죽은 이를 위한 미사(Requiem), 교회에서 사죄(Absolution), 좁은 의미에서 매장, 3일, 7일, 30일째 되는 날과 매해의 죽은 이에 대한 기념의 날을 포함하고 있다. 라틴교회의 법전(Codex Iuris Canonici, CIC) 1204와 1231조는 위령미사라는 개념 아래 교회에서 행해진 의식만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원래의 매장(depositio)과 구별짓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위령미사가 의식적인 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은 이가 예배 의식서적으로 정해진 행위와 교회의 기도에 의해 마지막 시간으로 인도 받는데 있다.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은 임종의 성사, 회개, 성만찬 그리고 환자에게 바르는 기름과 임종 기도(commendatio animae)를 받을 수 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이 세상으로부터 그곳으로 인도하소서 …"라는 요청으로 시작되며 속죄에 대한 청원과 聖人들을 불러내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로 이루어진다. 숨을 거둘 때는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스데반의 기도를 말한다: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 7:59).

숨을 거두면 바로 위령미사가 시작된다. 이 의식은 시신이 얼마 동안 집에서 관대에 얹어 놓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의식은 시체에 聖水를 뿌리는 일로 시작된다. 사제는 죽은 이를 위해 시편 130편을 낭독한다. 그후 죽은 이는 십자가를 앞세우면서 시편의 기도를 하면서 가는 행렬을 따라 교회 안으로 옮겨지게 된다. 교회의 중앙에 시신이 안치되는데 죽은 이의 발이 제단을 향하게 되며, 죽은 사제의 발은 회중을 향하여 안치된다. 그 다음으로 소위 시신을 다루는 예식(Totenoffizium)이라고 말하는 모든 영혼에 대한 특별한 경본 기도의 형식이 수도원에 속한 사람들과 동료들을 위해서 이어진다.

시작이라는 라틴어인 인트로이투스(Introitus) 그리고 죽은 이를 위한 미사라는 라틴어인 레쿠비엠(Requiem)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장례미사라고 불리는데 이것만 일반적으로 행해진다. 일반미사에서는 서원미사와 마찬가지로 '나를 판단하소서(Judica me)', '영광(Gloria)', '나는 믿습니다(Credo)'와 같은 몇 가지 부분이 빠졌다; 금식기간과 회개의 성격을 지닌 그 외의 날에 할렐루야 자리에 속창(Traktus)이 온다. 그 다음에 두 개의 성경구절들 사이에 읽혀지는 속송(Sequenz)인 디에스 이레(Dies Irae: 분노의 날)가 온다. 여기에 조사가 이어질 수 있다. 조사는 옛날부터 공식적으로 특별히 뛰어난 인물에게만 널리 행해졌다. 1501년 루엔(Rouen)의 종교회의는 글로리오시(gloriosi, 영광스러운), 일루스트레스(illustres, 밝은) 와 베네 메리티 세르모네스 푸네브레스(bene meriti sermones funebres, 장례식 설교의 선한 공로)만을 인정하였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사면(Absolution)은, 여기에서 불러지는 찬송의 첫 구절이 리베라(Libera me, Domine, de morte aeterna…: 나를 구원하소서, 주여, 영원한 죽음으로부터…)라고 불러지기 때문에 리베라라고도 불러지는데 제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전통은 죽은 이의 생명을 시험해보는 행위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인데 죽은 이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주여, 나를 죽음의 날에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소서. 그리고 난 후 시신을 무덤으로 옮긴다. 이 때에 인 파라디숨(In paradisum, 낙원에서)이라는 답창가(Antiphon)를 부르면서 간다. 무덤에 도착하면 무덤을 축성하는데 전체 무덤을 축성하는 것은 아니다. 관에 성수를 뿌리고 향(Inzensation)을 피운 후 죽은 이를 묻는다. 이 때에 "수메 테라, 쿠보드 투움 에스트; 테라 에스 에트 인 테람 이비스(당신의 것인 흙을 맞아들이소서; 당신은 흙이오니 당신은 흙으로 가나이다)" 라는 형식을 지닌 말을 자주 하기도 한다. 그리고 통례적으로 "메멘토 호모, 쿠비아 풀비스 에스 에트 인 풀베렘 레베르테리스(memento homo, quia pulvis es et in pulverem reverteris, 인간이여, 너는 흙이며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라는 말과 함께 땅을 세 번 파 올린다. 그 후 시편의 여러 찬송(시 42, 118, 130, 132)과 눅 1:68 이하의 송가(Benedictus)를 부른다. 아이젠호퍼(L. E. Eisenhofer)는 이 송가를 "교회 장례식의 극점"으로서 불렀다: "이것은 교회의 장엄한 감사 찬송이며 교회는 이 찬송을 모든 풍성한 은혜로운 도움을 위해 주 하나님께 바친다. 이 은혜로운 도움은 죽은 이에게 세례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그의 구원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도록 주어진다. 이와 동시에 죽은 이의 영혼에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완전한 은총의 빛을 가능한 빨리 수여하도록 하는 의식적인 청원이 있다." 무덤에서의 일은 요한복음 11:25의 답창가와 죽은 이를 위한 중보 기도로 마치게 된다.

장례미사의 구조는 예배당에 시신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praesente cadavere). 이것은 오늘날 가능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각 지역에 따라서 영안실에서 교회로 운구하지 않거나 시신을 영안실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기기도 한다. 위령미사는 무덤에 묻히기 바로 전이나 후에 드린다. 교회에서는 관 대신에 관과 비슷한 돌관 모양의 성 유물 상자(Tumba)를 놓기도 한다. 죽은 이의 실질적인 혹은 대용적인 현존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장례식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죽은 이를 무덤으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은총과 기도를 얻게하며 그 스스로 사제의 입을 통해 참회자가 된다. 시신은 축성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를 위해 장례설교가 행해지기도 한다. 교회는 죽은 이를 영원의 문까지 데리고 간다. 교회 스스로 행동을 통하여 직접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기껏해야 회중에 게 죽은 이의 죽음이 간접적으로 경고될 따름이다. 신자는 직접적인 위로의 말로부터 위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에게 의식을 행하는 교회의 현존과 신자의 기독교적인 자비의 사역의 참여로부터 받는다.

3. 종교개혁시대

종교개혁의 교회들은 죽음 이후에도 기도와 행위로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관념을 버렸다. 이미 1517년 면벌부 논쟁에서 루터는 95개 논제, 특히 제22항 이하에서 이러한 견해를 비판하였다.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위령미사와 장례미사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특히 루터는 '弔歌 모음집의 머리말'(1542)에서 전통과의 논쟁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의 기초가 되는 신학적인 총괄이 될 만한 언급을 하였다: "우리는 교회 안에 대축일 전야의 철야 기도(Vigilien), 영혼을 위한 미사, 의식, 연옥 그리고 죽은 이들을 움직이게 하고, 해치우고 그리고 순전히 없애 버리는 다른 모든 요술과 같은 교황적인 혐오를 가지고 있다. 우리 교회를 더 이상 초상집이나 고난의 장소가 되게 하지 말고 옛 조상들이 말한 것처럼 묘지가 되게 하자. 즉 잠자는 집 그리고 휴식처로 여기자. 우리의 죽은 이들과 무덤 옆에서 슬프고 괴로운 노래를 하지 말고 죄의 용서, 안식, 휴식, 생명 그리고 죽은 기독교인들의 부활의 노래를 부르자. 이로써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사람들은 바른 신앙으로 인도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장례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실행하는 것은 공정하고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만족한 조항들, 즉 무서운 원수인 사망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의 부활에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세례식, 혼례식을 집례하는 직무(세례 예식서, 1529년에 나온 루터의 소교리문답과 관련된 혼례 예식서)와는 달리 통일되어 각 지역들을 관장할 수 있는 장례식 규범이 루터교 지역교회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주목을 받을 만 하다. 이것은 또한 개혁교회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와 함께 호평을 받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장례식이 "훌륭하게" 거행된 것에 더 많은 가치가 부여되었다. 이 개념은 16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교회규정들(Kirchenordnung)에 스며들어 있으며 공동체의 동의에 근거하여 규정되고 유래와 관습을 존중하며 복음에 따른 장례식을 나타내고 있다: "장례식은 이웃과 친구들과 더불어 훌륭하게 거행되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장례식에서 우리가 우리 가족에 대해서 가진 사랑을 표시하게 된다. 우리는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이 죽고 부활하며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먼저 보냄을 받았다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부연할 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헤어질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시간을 주실 것을 또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Pommern 1535: EKO 4, 342f).

이전과 마찬가지로 죽은 교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장례식을 치르는 일은 교회의 사랑의 의무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적인 사랑에서 온 교인에 대한 장례는 기독교적인 증거와 부활의 고백에 대한 동기를 일으키며 각 자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며 복된 마지막을 청원하기 위해 주의를 준다. 이렇게 하여 장례식 규정들은 종교개혁적인 인식에 따라 피해야할 모든 것을 삼가고 있다; 주로 죽은 이와 그의 영혼의 구원에 관련된 행위에서 죽음에 대한 부활의 알림이 되었다. 이 기본적인 결정들은 개신교적인 장례의 형태에 표준적인 것이 되었고, 장례의 구체적인 집행에 더 광범위한 자유와 다양성을 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종교개혁의 시대로부터 장례식이 거행되는 지역적인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a) 무덤으로 가는 코스-교회에서 의식; b) 무덤으로 가는 코스-무덤에서 의식; c) 집 앞에서-무덤에서 의식; d) 집 앞에서-무덤에서-교회에서; e) 집 앞에서-교회에서 f) 집 앞에서. 여기에는 지방적이고 지역적이고 관습이 대단히 지켜졌다. 특히 독일에서는 널리 사회적인 계층에 따른 구별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직자 없이 대부분 일찍 무덤에 장사되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 학생들과 함께 한 교사에 의해 자주 이른 오후에 묘지로 운구되는 "중간층"의 시민 그리고 "모든 성직자들"에 의해 무덤으로 인도되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게 되었다(EKO 1,195). 그러나 이 세 계층들에 대한 장사는 논쟁의 여지가 있었으며, 이것을 폐지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알베르트의 작센에서는 1580: EKO 1,438, 1545년 Zerbst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없이 장사를 지내서는 안됨: EKO 2, 293f).

독일의 다른 지역, 특히 남서부에서는 이러한 사회적인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장례는 "예배"를 통해 거행되었다. 당시의 높은 수준의 도덕성에서 장례에 대한 성직자들의 부담은 특히 설교가 장례와 연결되어 있었을 때 상당한 것이었음을 덧붙여서 참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반박들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특별하게 독회(讀會)와 나란히 유용되었으며 복음적인 장례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수많은 교회규정들에 설교나 짧은 권면이 배열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복음적인 장례식에는 3 가지의 표식을 가지게 되었다. a) 부활에 대한 공식적인 기별, b) 사랑과 친절에 대한 증거, c) 각자의 죽음에 대한 훈계와 이의 준비에 대한 권면.

4. 화장에 대한 교회사적 관점

매장은 바빌론, 앗시리아 그리고 이집트에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관습이다. 고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을 매장했다. 시신을 화장하는 것에 대한 고대의 관습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거절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화장이 전혀 행해진바 없음을 볼 수 있다. 게르만족, 켈트족 그리고 슬라브족에게 선교한 교회는 화장을 접했을 때, 이것을 이교도적인 것으로 낙인찍었다: 칼 대제는 784년 화장 금지를 엄하게 공포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화형으로 순교한 사람에 대한 관점에서 매장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결코 주장한 적이 없다. 오늘날에도 카톨릭이나 개신교 신학자들은 화장이 성경이나 교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위반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교회는 화장을 악습으로 배척하였으며, 그 결과 카톨릭 교회법은 화장을 금하고 있다(CIC c. 1203,1); 1) 화장을 지시하는 사람은 교회식의 장례권을 잃게 된다(CIC c. 1240, 1,5). "위령미사는 다른 이유 때문에 화장을 해야하고 아무런 불쾌감을 주지 않은 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성직자에게 화장터로 가게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Algermissen)". 어떻든 고대 교회에서 기독교의 적들은 화장을 교회를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겼던 것은 확실하다: 177년 리용(Lyon)에서 사람들이 순교자의 시체를 화장하였고, 기독교인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모욕하기 위해 재를 론(Rhone)강에 뿌렸다.

그후 17세기부터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교회와 멀어진 사람들은 화장의 고대 관습을 예찬하였다. 1797년 프랑스에서 혁명주의자들은 화장을 법률로 실시하려고 시도하였다. 1848년에 프랑스에서 다시 이러한 방향에서 새로운 정책이 추진되었다; 독일에서는 유물론자들인 폭트(Vogt)와 몰레쇼트(Moleschott)가 화장을 운동하였다. 1870년 이들은 이탈리아의 프리메이슨 비밀단원을 선전하였다. 1874년 영국의 화장협회(The Cremation Society of England)가 설립되었다. 지멘스(Simens)가 화장을 위한 근대적인 화덕을 건조한 다음 1876년 고타(Gotha)에서 최초의 화장터를 지었다. 1905년 막스주의자들은 "화장을 위한 무신론자 협회(Verein der Freidenker für Feuerbestattung)"을 결성하였다. 1920년대에 "프롤레타리아 무신론자들"은 화장과 교회로부터의 탈퇴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카톨릭 교회는 화장에 대한 승인은 교회로부터 탈퇴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1885년 베를린의 개신교 고등 교회법원(Oberkirchenrat)은 목사가 목사복을 입든 안입든 화장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1898년 "개신교 연맹 아이제나흐 대회(Eisenacher Konferenz ev. Kirchenregierung)"에서 "성직자가 화장터에 성직자의 신분으로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에 고타(Gotha)와 마이닌엔(Meiningen) 그 후 바덴(Baden), 헷센(Hessen), 안할트(Anhalt), 바이마르-아이제나흐(Weimar-Eisenach) 그리고 작센(Sachsen)에서 목사들에게 이와 반대되게 공식적으로 허락되었다. '구 프로이센 연합 교회(Altpreußische Union)'는 가장 늦장을 부렸다: 1925년에야 총회는 목사에게 화장에 대한 구속에서 자유를 주었다. 독일 루터교 연맹의 "생활규범"은 이제까지 통례적이던 루터교 목사가 카톨릭 신자의 화장에서 직무를 행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VIII, 3b).

멈출지 모르는 화장의 증가에 교회는 더 이상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1933년에는 109개의 화장터가 독일에 있었고, 1939년에는 459,271 건의 장례 가운데 46,091 건이 화장으로 치루어졌다(89.8 : 10.2.%). 오늘날에는 단지 화장에 대한 위생적이고 다른 실제적인 고려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독일 루터교 연맹(Vereinigte Evangelisch-Lutherische Kirche Deutschland; VELKD)은 1955년 "생활규범(Lebensordnung)" VIII, 10에서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교회는 매장과 마찬가지로 화장도 공포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교인들에게 매장을 기독교적인 관습으로 권유한다." 루터교 예배 의식서 또한 화장에 대한 특별한 규정을 제공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III. 루터의 죽음에 대한 준비와 장례식 설교

1. 죽음의 준비에 대한 루터의 견해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을 때 장묘(葬墓)에 대한 인식과 문화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죽음의 준비에 대한 루터의 설교는 우리에게 장묘 문화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위한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1519년 5월 초에 루터는 슈팔라틴(Spalatin)의 주선 아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의 고문의 한 사람인 샤르트(Marx Schart)의 부탁을 받고 같은 해 11월 1일에 "죽음의 준비에 관한 설교(Ein Sermon von der Bereitung zum Sterben)"의 인쇄본을 발송할 수 있었다. 루터는 샤르트에게 헌정사를 썼다. 이 글이 수많은 판을 거듭한대서 그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이미 1520년에 루터는 이 글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루터는 이 글을 쓸 충분한 시간이 없었으며 이와 더불어 이 글에 만족함을 가질 수 없었지만 평신도들을 위하여 이 글을 인쇄했다. 16세기에는 죽음에 대한 위로의 글이 베스트 셀러 이었다.

이 글은 20개의 문항으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이 글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운 모습과 죽음, 죄, 지옥의 표상을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루터는 이 글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복된 죽음을 위한 조언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루터는 인간에게 생의 확실한 경계선인 죽음을 배제하지 않고 기독교인으로서 이 경계를 현실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먼저 루터는 죽음 이후의 다툼과 싸움을 피하기 위해 이 세상의 일들을 정리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영혼이 고통 속에 있지 않기 위해 모든 사람들과 화해해야 한다고 한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일들은 죽음의 면전에서 밀어 젖혀질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홀가분하게 정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서는 일이다. 그리하면 우리의 길은 하나님에게 인도될 것이다.

루터는 죽음에 임박하여 가장 좋은 것은 성례전의 집행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믿음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성례전은 단지 신앙을 보조하는 표식이기 때문이다. 성례전을 집행해야지 죄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임종시 죽음은 고려할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 있을 때에 자꾸 되풀이하여 3 가지 저주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죄에 대한 혐오 그리고 지옥과 영원한 저주에 대한 견디기 어렵고 피할 수 없음이다. 이것을 죽을 때 가서야 행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위험하고 쓸데없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 죄 그리고 지옥과 영원한 저주를 극복하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루터는 고전 15:57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루터는 이 3 가지에 대한 싸움이 사사기 7:16절 이하에 암시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기드온이 300 명을 3 대로 나누어 하루 밤에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부수어 항아리 안에 감춰 둔 횃불을 든 일밖에 없었는데 미디안 군대는 도망하고 서로 칼날을 쳤다. 이와 같이 우리가 밤에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사람들의 빛나는 형상에게 우리 안에 있는 자리를 내어 준다면 죽음, 죄 그리고 지옥은 모든 권세와 함께 도망하게 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악한 형상을 알지 않으며 알 수도 없는 믿음이며 나팔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원기를 얻으며 강해지게 된다.

이러한 국면에서 죽음, 죄 그리고 저주가 아닌 생명, 은혜 그리고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죽음을 이긴 생명 자체이며 십자가에서 죄의 숨통을 끊고 없애고 지옥을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 루터는 이에 대한 표식을 성례전에서 찾고 있다. 이 성례전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 순종과 사랑으로 죽음, 죄와 지옥을 지시고 이기신 것을 나타나는 참된 표식이다. 그리하여 성례전에 참여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혹자와 파괴자는 그의 마지막에 가장 엄청나고 교활한 일을 행한다. 자신이 가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절망적인 의심으로 당혹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함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과 표식을 신뢰한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가치가 있으며 이 믿음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천사들의 강력한 공동체를 체험하게 된다. 루터는 유혹자의 절망적인 의심을 극복한 사람은 죽음과 멸망의 위협을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미래의 삶에 그의 은혜와 사랑을 굳게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이미 죽음을 극복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성도들. 신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곳에서 죄가 극복되었으며 이곳에서 또한 지옥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사람은 멸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아무도 이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신앙을 지속시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기꺼이 받아들이며 극복할 수 있게 된다.

2. 장례식 설교의 기원

기독교에서 장례설교의 시작은 조사(弔辭)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러나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며 어느 시대에서나 이것이 없을 때는 없었다. 교부시대로부터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까운 친척들의 조사뿐이다. 이것은 고대 시대의 송사(頌辭)의 전승을 이은 것이다: 이것은 쉽게 기독교화 되었으며 죽은 이에 대한 매우 전형적인 찬가이다(Bauer). 그리고 성 게미니아노의 요한(Johann de St. Geminiano, 1346년 사망)의 '장례설교의 모음집(Sermones funeberes)'이 있다는 중세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희미한 보고가 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세후기에 개별적인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서야 비로소 장례식에서 조사 내지는 장례설교가 전지역적이지는 않았지만 넓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있게 되었다. 루터는 1519년에 "죽음의 준비에 대한 설교(Ein Sermon von der Bereitung zum Sterben)"를 통하여 신앙의 역사에 새 장을 열었으며 동시에 정신적인 모체를 만들었다. 이 모체 위에 200년 (1550-1750) 동안 장례설교들의 장르가 번영하였다. 루터 자신도 1525년 5월 10일과 11일에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Kurfürst Friedrich der Weise)의 장례식에 즈음하여 살전 4:13 이하를 중심으로 설교하였다. 그리고 1532년 8월 18일에 작센의 선제후 요한(Kurfürst Johann)을 위해 두 개의 장례설교를 했다.

루터의 장례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 위로, 경건 그리고 교인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루터와 동시대이거나 후기 종교개혁 시대의 인물들인 멜랑히톤(Melanchthon), 부겐하겐(Bugenhagen), 마테지우스(Mathesius), 젤넥커(Selnecker) 그리고 헤르베르거(Herberger)와 같은 사람들은 루터에 의해 세워진 이러한 전통 안에 서 있었다. 부겐하겐도 1546년 2월 22일 루터의 장례식에 살전 4:13-18을 본문으로 장례설교를 했다.

실제적으로 장례 설교는 지역적인 관습에 따라 묘지(이곳에서는 조사라고도 불러짐), 교회 혹은 집에서 행해졌다. 설교의 내용은 "죽음, 부활 그리고 이에 대한 논증"으로 이루어졌다. 설교본문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신약성서의 살전 4:13이하, 요 11:21이하, 고전 15:20과 같은 본문을 주로 택했다. 이러한 성경 본문으로 신학적 요구가 정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 몇 십 년 후에 장례설교 본문의 선택에 대한 사례가 완성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예를 든다면 비뎀바흐(Felix Bidembach)는 1640년 '교회 목회의 용례(Manuale Ministrorum Ecclesiae)'에서 장례식 설교를 위하여 10 단계로 된 500 개의 본문을 제시했다. 이 본문들은 본문의 선택에 있어서 개별적인 경우가 주된 원칙이 되었다. 노인이나 젊은이, 어린이들이나 여성들, 태어난 후 바로 죽은 아이들, 회개한 사람들 혹은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 관한 성경본문이 예시되었다. 사람들은 이 본문으로 구체적인 경우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본문은 구약성경에서 왔다.

3. 루터의 장례 설교

1)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의 장례 설교

1525년 5월 5일 프리드리히 현공은 "기도회와 참회 그리고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로하우(Lochau)성에서 눈을 감았다.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자신을 "비텐베르크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수도원 교회의 제단에" (비텐베르크의 城敎會)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멜랑히톤은 장례식 전날 저녁 라틴어로 된 조사를 했고 루터는 독일어로 장례식의 설교를 했다. 당시 토르가우(Torgau)의 목사였던 츠빌링(Zwilling)은 이 설교를 훌륭한 것으로 평가했다. 슈팔라틴(Spalatin)은 이 설교가 "기독교적이었으며 매우 흡족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츠빌링을 통하여 당시 높은 신분의 장례식을 또한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이 우리의 자비로운 선제후의 시신을 완전히 무덤으로 옮길 때에 학생들로 앞에 가게 하면서 몇 명은 노래를 부르게 한다. 그리고 몇 명의 귀족들이 관을 지고 가게 하고 조신(朝臣)들은 모든 백성과 더불어 그 뒤를 따르게 한다. 그 후 선제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묻는다. 시신을 묻고 난 다음 백성들에게 권면이나 설교를 한다면 이것이 최고일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장례식 전날 밤 멜랑히톤은 라틴어로 조사를 그리고 루터는 독일어로 설교했다. 5월 10일 시신은 로하우에서 예센(Issen)과 엘스테르(Elster)를 거쳐 비텐베르크로 운구되었다. "시신이 비텐베르크의 성교회에 도착되어 교회의 중심에 놓여지자 합창단이 우리 모두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후 시편 118편이 라틴어로 불러졌다. 다음으로 멜랑히톤이 라틴어로 선제후의 장례식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 후 루터 박사가 살전 4장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고 죽은 자에 관하여 기독교적으로 위안을 주는 설교를 했다." 다음 날인 11일 마지막 장례식이 성교회에서 다시 거행되었고 이 때에 루터가 살전 4:13-18을 중심으로 설교하였고 설교가 끝나자 선제후의 시신이 교회의 제단 밑의 무덤에 안장되었다.

5월 10일의 첫째 설교에서 루터는 먼저 슬픔과 괴로움에 잠긴 사람들을 살전 4:13-18의 말씀을 통해 위로하고자 한다. 그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지도자들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제후의 죽음은 국민들을 슬프게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루터는 선제후의 신앙에 대하여 칭송하면서 그가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굳센 믿음을 가졌으며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했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의 품안에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루터는 선제후의 공적에 대하여,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 치하하고 있다. 그는 독일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였으며 광신주의자(Schwärmer)들을 타파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본다.

다음으로 루터는 살전 4:13에 관해 해설하고 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영원히 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와는 달리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으로 생각하며 최후의 날에 다시 일어날 것임을 믿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만 이방인들과 다른 점은 소망을 갖는데 있다.

살전 4:14에 관해 루터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부활을 성취한 것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한 것뿐만 아니라 의롭게하고 구원을 이룬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우리의 부활과 바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루터는 사도신경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 신앙고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5월 11일의 둘째 설교는 살전 4:15-18까지의 해석이다. 여기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교황의 독재로부터의 해방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불신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심판과 관련하여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불신자의 부활의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심판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믿는 자만 말할 수 없는 영광과 은혜를 입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러나 불신자는 그의 불신앙으로 죽게 된다. 그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수 도 없으며 밑에 머물게 되어 심판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고인이 된 선제후가 거룩한 말씀 안에 거했으며 그것 때문에 고난을 받았고 그의 생의 마지막에 그리스도가 자기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잠자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성경에 말씀한 것처럼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며 휴거할 것이라는 말로 위로하고 있다.

2) 작센 선제후 요한의 장례 설교

슈바이니츠(Schweinitz)에서 사냥을 위해 머물러 있던 선제후 요한(Johann)은 1532년 8월 15일 심한 뇌졸중으로 임종의 자리에 눕게 된다. 다음날인 16일 저녁 요한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8월 18일 요한의 시신은 비텐베르크의 성교회에 안장되었다. 이 장례식에서 루터는 장례 설교를 했다. 선제후 요한의 계승자인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Johann Friedrich)의 원에 의하여 8월 22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성교회에서 8월 18일에 했던 설교의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했다. 8월 18일과 22일의 설교 본문은 살전 4:13 이하이다. 이 본문은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의 장례설교시에도 사용되었다.

루터는 8월 18일 설교의 서두에서 위령미사나 장례미사를 더 이상 드리지 않는 것이 관습이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대신 설교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루터는 특히 설교가 예배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루터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다른이와 같이" 죽음에 대해 슬픔을 갖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 말하면서 선제후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비통하지 말라는 위로를 주고 있다. 본문에 의거하여 루터는 기독교인들이 죽은 것은 죽은 것이 아니며 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믿는 자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게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인간 전체(der ganze Mensch)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육신이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루터는 선제후의 높은 덕을 기리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죄인인 것을 말함으로 신앙고백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부각하고 있다. 선제후는 매우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루터는 그가 교만하거나 화를 내거나 시기심을 낸 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주위에는 열이나 되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었다. 루터가 이런 말을 한 까닭은 아무도 선한 일을 한 인간이 없다는 것과 그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선제후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데려감을 받는다는 것이다.

8월 22일의 설교의 서두에서 루터는 더욱 위로를 주기 위해 하는 설교임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죽음에서 이교도들과 다른 점은 죽음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믿음을 통해 얻게된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죽은 선제후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임을 루터는 확신하고 있다. 이 설교에서는 앞서 했던 설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언급하고 있으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선제후를 취하셨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데리고 오신다는 말로 위로하고 있다. 선제후가 이렇게 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고 복음을 알며 기독교의 신앙 고백을 지켰기 때문이다. 루터는 선제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리라는 종말의 소망을 고백하고 있다.

루터는 장례 설교를 통하여 믿는 이의 죽음은 그리스도에 의해 극복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피조물로 되는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그는 이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의 사역을 전파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IV. 결론

1. 장례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사실 요청되고 있는 시기에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필자 나름대로 생각한 것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며 새로운 시작이다. 전도서 7:2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한 것은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허해지며 종말론적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은사로 주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장례식은 단순히 장례식이 아니라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부활의 소망을 기다리는 설교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죽음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가 더욱 중요 중요한 것인가를 시사해주고 있다.

2.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검소한 장례 문화를 실천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땅에 묻히는 일은 죽음 이후의 계속되는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시신, 장례의식에 대한 정성과 장례식의 화려함 같은 것이 죽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위로가 된다고 보았다. 화려한 장례식이 불신자에게 유익하다면 초라한 장례식을 치루거나 장례식을 전혀 치를 수 없는 신앙인에게 해가 될 것이다. 사람의 눈에는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에게 화려한 장례식이 치루었지만, 가난한 사람은 아브라함 품안까지 인도하는 수종드는 천사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훨씬 더 화려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3. 서구의 교회 안과 교회당 주변의 무덤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의 공동체(communio)를 이루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교회 안과 주변에 무덤을 가질 수 없는 우리 나라의 현실로 보아 매장보다는 교회 안에 납골당을 두어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인식의 전환도 생각해볼 만하다. 몸의 부활을 맏는 기독교인들은 화장하면 부활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매장이든 화장이든 부활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매장된 선조들도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결국 흙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4. 기독교와 우리의 장례 문화에 대한 접목을 기독교적인 안목에서 해석을 시도해야 할 점을 발견하고 기독교화 하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기독교 전통에서 장사한 후 3일에 죽은 이에 대한 기념이 있었는데 이것은 유교적인 전통의 삼우제(三虞祭)과 유사하다. 이것을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5. 위에서 언급한 중세 시대에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과 같을 필요는 없지만 개신교 내에서 통일된 장례의식이 실행되어야 한다. 각 교단마다 예식서가 있지만 이 예식서를 교회연합의 차원에서 통일된 예식서를 만드는 작업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 예식서가 있어도 개 교회에서 이것을 준수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에 개 교회는 독자적인 예식보다는 최소한 교단의 예식서를 실행하는 노력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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