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의 목회적인 적용
(Pietism and Its Application in Minisrty)

 

논문 요약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은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의 성서와 하나님의 은총 중심의 신앙 운동을 다시 일으킨 신앙부흥운동이었다. 경건주의자들은 참교리(die wahre Lehre) 보다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로서 해야할 신앙의 행위를 더 중요시 여겼으며 행위로 증빙되지 않는 신앙의 삶을 거짓 믿음으로 간주하였다. 이 운동의 발상지에 대하여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으나 운동으로서 정착을 하게 된 곳은 독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 경건주의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슈페너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철저히 교회의 갱신 그리고 루터교 내에서 성서중심적인 목회, 생활 속에서 경건의 실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속의 작은 교회"운동, 주일성수, 교리문답교육, 선교와 사회봉사 사업이라는 새로운 목회상을 루터교회에 제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서적인 목회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봉사·교육·친교에 대한 구체적인 목회상의 실제적인 모습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목회의 틀을 통해 경건주의자들은 신앙의 열기가 식어있는 루터교 정통주의의 신학 아래 있는 루터교회에 영적인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 이 운동은 17세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유럽의 교회에 지속적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특히 19세기에 일어난 부흥운동은 이 운동의 지속적인 영향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경건주의의 정신과 운동을 계승할 필요가 있으며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역사적인 교훈을 발견하고 영적인 능력이 있는 교회로 발돋움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I. 서론: 경건주의의 개념과 특징

19세기 독일 루터교회에서 신루터주의(Neuluthertum)의 대표적인 신학자요 목회자인 뢰헤(Wilhelm Löhe, 1808-1872)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리에 있어서 종교개혁은 완성되었지만, 삶에 있어서 종교개혁은 미완성이라고 했다. 경건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승하면서 무엇보다도 기독자의 실천적인 삶을 중요시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주의는 정치사적으로 볼 때 30년 전쟁(1618-1648)을 종식한 1648년 베스트팔렌 종교평화협약으로부터 1806년 독일의 신성로마제국(das Heilige Römische Reich Deutscher Nation)의 몰락까지, 신학사적으로는 1675년에 출판된 슈페너의 '경건한 소원들'(Pia Desideria)을 기점으로하여 1799년에 발표된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의 '종교에 관한 講話'(Reden über die Religion)를 종점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분명 경건주의는 과거의 운동이며 사건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17·18세기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러한 과거의 운동을 그것도 우리 땅이 아닌 유럽에서 일어난 운동을 우리가 배우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이 운동이 오늘 우리의 목회 현장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으며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의 목회를 점검해보고 더 나은 미래의 목회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건주의에 대해 독일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①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 리츨 이전에도 경건주의에 관한 연구가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연구의 총체적인 결정판은 그의 '경건주의의 역사' (Geschichte des Pietismus, 1880-1886)에 나타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경건주의를 교회를 해체시키는 교회 밖의 작은 종교 집회(Konventikel)와 개인주의(Individualismus)의 정신으로 본다. 개인주의는 한편으로는 중세기의 신부(新婦) 신비주의의 종교적인 性愛로 나타났는데 특히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bhard von Clairvaux, 1091-1153)의 솔로몬의 아가서와 연관을 맺은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중세 수도원에서 세상에 속한 일을 초월한 금욕으로 승화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리츨은 경건주의를 루터의 종교개혁의 완성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완화된 재세례파이며 "종교개혁의 좌파"(linker Flügel der Reformation)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② 그륀베르크(Paul Grünberg): 傳記的이고 地域史적인 연구를 통하여 리츨의 연구에 대해 측면으로 공격을 하면서 3권으로 된 슈페너에 관한 전기와 슈페너의 업적을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Göttingen 1893-1906)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그륀베르크에 의하여 경건주의는 객관적인 구원의 선물에서 주관적인 구원의 확신으로 관심을 넓혔다. 그륀베르크에게 있어서 경건주의란 개인의 신앙의 삶과 윤리적인 검증을 위해 교리적인 이론이나 논쟁을 가치절하한 운동이었다.

③ 리츨과 그륀베르크 이후 경건주의에 대한 교회사적인 연구는 한편으로는 루터에게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성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루터에게 찾은 학자들: 칼 홀(Karl Holl, 1866-1926)과 그의 제자들인 히르쉬(Emanuel Hirsch)와 하인리히 보른캄(Heinrich Bornkam). 홀은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생활에 있어서 큰 전쟁들의 의미'(Die Bedeutung der großen Kriege für das geistige und religiöse Leben des deutschen Protestantismus, 1915)에서 루터교 정통주의가 개혁에 대한 의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경건주의자 특히 슈페너와 프랑케는 루터에 접근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영성주의에서 찾은 학자들: 제베르크(Erich Seeberg, 1888-1944)와 그의 제자들인 벤츠(Ernst Benz, 1911 출생)와 슐라이프(Arnold Schleiff, 1907-1943). 제베르크는 경건주의자 가운데 신비적 영성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는 아르놀트(Gottfried Arnold, 1666-1714)에 관한 그의 저서인 '고트프리트 아르놀트. 그의 시대의 학문과 신비주의'(Meerane, 1923)에서 신비적 영성주의의 전례에 없는 위대한 의의와 원대한 힘에 대하여 확실하고 명백히 주장하고자 했다. 제베르크 자신의 위대한 발견은 경건주의의 선구자요 전승자로서 신비적인 영성주의(der mystische Spiritualismus)를 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硏究史에서 볼 때 우리는 경건주의가 두 개의 교회사적 사건에 기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경건주의는 16세기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개혁 이후 또 다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이 교리면에서 완성을 보았다고 한다면, 경건주의는 삶에서 미완성의 종교개혁을 완성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경건주의자들은 루터의 로마서 서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그들이 진정 종교개혁자의 후예임을 천명하였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요 1장)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 기질, 감각, 그리고 모든 힘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들며, 성령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오! 믿음은 살아있고, 굳세고, 강력한 것이다. 믿음이 선한 일을 끊임없이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은 선한 행위들이 행해져야 될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고, 오히려 이미 선한 행위들을 했으며 언제나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경건주의자들은 살아있는 믿음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을 상기하고 다시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경건주의란 결국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초대 기독교적인 살아있는 기독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운동이다. 이들은 그 당시 舊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die altprotestantische Orthodoxie)와는 달리 "교리"보다는 "실천", "직무"보다는 "성령", "외형"보다는 "능력"(딤후 3:5)을 더 중요시 하였다.

둘째, 신비적인 영성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교인들의 영적 욕구에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진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루터교 내에서 성령에 관한 관심을 새롭게 일으킨 운동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교회사적 근원에서 우리는 경건주의 운동에 나타난 특징을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① 경건주의에서는 교회의 공예배 이외에 작은 동아리(?콜레기아 피에타티스, Collegia Pietatis?, 기도 시간, 교회 밖의 작은 기도 모임, 종교적인 사적인 모임)를 중심으로한 종교적인 모임이 생겨났다. 경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과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교회의 교리와 직무에 예속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경건에 속한 인식을 하고 엄격한 기독교인의 공동체에 속하는데 있었다. 구원과 은혜의 기관으로서 그리고 포괄적인 조직으로서 기성교회(Amtskirche)가 경건주의에서는 보완이 되면서 한편으로 또한 배제되었다. 이것은 성전 뜰만 밟는 대다수의 교인에 대해 자신들을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로서 여겼던 경건주의자들의 자율적이고 지역적인 결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트뢸취(Ernst Troeltsch, 1865-1923)가 말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한 분파(sect)를 이루었던 경건주의자들의 교회 밖의 작은 종교집회(Konventikel)은 모든 신자를 포괄하였던 교회를 두 개의 그룹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신자들의 주관적인 결정을 교회의 근본 기초로 삼았다. 기도 시간은 경건주의적인 삶의 중심이되었다.

②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갱신과 내면화의 운동으로서 그리고 종교적인 개인주의로서 표현되어지는 경건주의에서 경건주의자라로 여김을 받고 싶어하였던 사람들이 인정해야 했던 확고한 정신적인 전통이 시작되었다. 1700년 이후 경건주의자는 교회사에 대한 경건주의적인 해석에 연관된 자 만이 될 수 있었다. 즉 슈페너를 종교개혁을 계속 수행하고 경건주의를 창시한 사람으로서 루터와 같은 위치에 두어야 했다. 뷰르템베르크에서는 특히 벵엘(J. A. Bengel, 1687-1752)을 슈페너의 참 유산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여겼다. 후에 경건주의자는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경건주의의 역사적인 "아버지"인 슈페너와 경건주의 운동의 또 다른 창시자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절대적인 권위를 요구했었던 각 지역과 지방의 지도자인 "대부"(Patriarche)의 종교적인 견해를 인정해야 했다. 경건주의에 있어서 다양한 경향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감동 감화를 신뢰하는 개인들에 의하여 생성되었지만 후에는 각 그룹들 사이에 지도자들의 차이를 야기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모든 종교적인 모임에서 성경 이외에 열심히 읽혀진 책들은 경건주의의 창시자들이 쓴 경건서적들 이었다. 성경은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조언자였다. 경건주의 혹은 경건주의적인 그룹들의 고유한 신학적인 경향은 경건 서적들에서 자리를 잡았다.

③ 경건한 자로서 종교적인 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종교적인 신념들과 정해진 생활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주관적인 요소가 아직도 역할을 하였다. 윤리적으로 살고 거듭난 사람으로 간주되어도 그는 아직 경건주의자가 아니었다. 교회에 예속되지 않은 기도 모임의 회원들 가운데에서 "형제"로서 불러지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져야 경건주의자였다. "형제"라는 호칭은 각성한 사람들의 영적인 공동체를 표시한 것이었으며, 슈바벤 지역의 농부들 뿐만 아니라 북부 독일의 귀족들도 포함되었다. 형제는 교회 밖의 기도 모임의 회원일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도 모임의 회원이기도 했다. 종교적인 모임들은 시간과 지역을 초월하여 아주 널리 퍼졌으며, 이것들의 회원들은 서신과 방문들을 통하여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물과 같은 이들의 결사(結社)는 사회 구석구석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로써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형제들 사이의 깊은 신뢰 관계가 싹텄다. 이 관계가 대부분의 경건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들의 정치적인 활동에도 이용되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자녀들" -여기에는 경건주의자들 외에 크리스챤도 포함되어 있음- 로부터 분리는 형제들의 소속감을 확고하게 하였다. 이들은 생활의 변화와 신앙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인식 아래서 살았으며 미지근한 기회주의적인 크리스챤, 교회 그리고 공적인 생활의 다른 모습들의 집단으로부터 미래에 구별되어져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경건주의의 반대자들이 위선과 교만으로서 낙인을 찍은 이 특수한 지위는 행동과 의복에서 나타났다. 비록 각 경건주의자들이 자주 그들의 중생에 대하여 의심을 하였지만 그들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확고히 신뢰하였고 후회와 회개를 통하여 죄를 극복하고 철저한 회심을 통하여 그리고 개인의 "성결"의 여러 단계를 넘어 영원한 구원에 이르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경건주의는 세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① 경건주의는 여러 지역에서 교리의 증명을 실천적인 삶에서 요구하였던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앙이 참되려면 이미 이 세상에서 선행으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요청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지켜지지 않았다. 바로 뷰르템베르크에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정관파(靜觀派) 신비주의가 역사의 상당한 시대에 전체 경건주의 운동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② 경건주의 신학은 모든 경건주의적인 경향으로부터 모든 점에서 인정받을 만한 완결된 체계를 세우지 못했다. 경건주의 신학이 모든 시대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신학적인 가르침과 구별이 되지만 - 먼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그리고 계몽주의 마지막으로 자유주의 신학 - 경건주의 전통 안에서 각 경건주의의 대부들과 추종자들에 의해 다양한 신학적인 가르침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신학과 천년왕국설과 같은 중심 교리에 나타났다. 또한 경건주의자들의 종교적인 자기 이해도 다양하였다. 부분적으로 지방과 지역에 따른 경건주의의 대부들의 영향은 더 나아가 각 지역에서 여러 곳의 기도 모임과 공동체를 생기게 했고 이들의 회원들은 형제들로서 여겨졌지만 이들의 견해에서 볼 때 경건주의적인 신앙의 본질과는 구별이 된다.

③ 윤리적인 척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의 생활의 변화는 각 세기마다 동일하지 않았다. 경건주의의 모든 경향에 있어서 외형을 강조하고 드물지 않게 엄격한 윤리에서 나타났던 "세상 안에서의 금욕"에 대한 이해가 상이하였다. 이 금욕은 각 시대의 상황과 윤리적인 척도가 생겨난 사회 계층의 생활 관습에 예속되었다. 경건주의의 모든 모임에서 사치와 방탕은 확실하게 거부를 받았다.

2. 경건주의의 발단과 발전

경건주의의 발단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논란은 계속되어 왔다. 경건주의를 유럽 전 지역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볼 때 경건주의의 발단을 지역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1. 영국

영국의 청교도 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는 경향이다. 영국은 대륙과는 달리 종교개혁이 신학적인 문제에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영국왕 헨리 8세(Henry VIII, 1509-1547)는 자신의 비합법적인 결혼 문제로 1534년 영국왕은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하여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정치적이고 법적인 혁명이지 종교개혁이 아니다. 메리(Mary Tudor) 여왕의 통치(1553-58)로 다시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시대에 개신교로 복귀하였다. 청교도 운동은 1559년에서 1567년 聖服論爭(vestiarian controversy) 기간 중에서 형성되어 진다. 영국 교회는 이미 스위스 제네바의 칼빈주의적 개혁정신과 재세례주의자들의 두 가지 경향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이 두 경향은 장로교와 회중교회를 탄생케했고 이들은 영국 국교회가 더 개혁되기를 원했다. 특히 개혁을 원했던 사람들은 성복논쟁을 통하여 성의와 예전에 잔존하고 있는 교황주의의 잔재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청교도들을 강력하게 억압하자 수 많은 사람들이 튜더왕조의 전제정치로부터의 도피처로 네덜란드를 택했다.

독일 헷센의 교회사가인 헤페(Heinrich Heppe, 1820-1879)는 '경건주의 역사와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 있는 신비주의'(Geschichte des Pietismus und der Mystik in der reformierten Kirche, namentlich der Niederlande, Leiden 1879)라는 저서에서 경건주의는 이미 16세기에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성행하고 있었던 퓨리타니즘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랑(August Lang)은 1941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청교도주의와 경건주의'(Puritanismus und Pietismus)의 제3장에서 영국의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를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평가하였다. 퍼킨스는 경건주의적 청교도들의 초기 그룹의 핵심 인사로서 1557년 캠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자비생으로 입학하여 1584년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안수를 받은 후 성 안드레 교회에서 설교자로 일했다. 그는 경건하고 무흠한 생활을 했으며 그의 설교는 평이하지 않았지만 너무 학문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민들도 이해할 수 있는 경건한 설교였다. 슈퇴플러(F. Ernest Stoeffler, 1922 출생)는 영어로 경건주의에 관한 새로운 단행본(경건주의 초기 역사, The Rise of Evangelical Pietism, Leiden, Brill 1965; German Pietism during the Eighteenth Century, Leiden, Brill 1973)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퓨리타니즘부터 융-슈틸링(Johann Heinrich Jung-Stilling)까지 다루고 있다

2. 네덜란드

네덜란드에 그 기원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리츨은 그의 '경건주의 역사' 제1권에서 경건주의의 시작은 독일 보다는 네덜란드의 개혁교회가 더 빨랐다고 본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독일의 교회사가로는 호이시(Karl Heussi), 뢰베니치(Walter von Loewenich), 쿠어트 디트리히 슈미트(Kurt Dietrich Schmidt), 쿠룸비데(Hans-Walter Krumwiede) 등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개혁교회의 청교도적 교회 갱신 운동이 "나더레 레포르마띠"(nadere reformatie)라는 이름으로 푸치우스(Gisbert Voetius, 1589-1676)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나더레 레포르마띠란 17세기 초반부터 네덜란드에서 생활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교리의 종교개혁이 보완되는 종교적인 갱신 운동이다. 이 운동은 우트레히트 대학 교수인 로덴슈타인(Jodocus van Lodenstein)을 통해 "제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했다. 로덴슈타인은 우트레흐트에서, 특히 해상권의 상승을 통한 홀란드의 경제부흥기 이후와 프랑스의 관습이 유입된 이후부터, 교회보다는 기독교적인 생활의 일반적인 타락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다. 로덴슈타인은 푸치우스와 독일 브레멘 출신인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 교수였던 코케우스(Johannes Coccejus, 1603-1669)의 영향을 받았다. 코케우스는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동맹으로서(기독교 강요 II, 9-11) 신약과 구약에 대해 이미 칼빈에 의해 발전되었던 교리를 하나의 완결된 "동맹신학"(Föderaltheologie, foedus=동맹)으로 완성하였다. 이 동맹신학에서는 世界史가 창조에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까지 구속사(救贖史)로서 이해되고 있다. 은혜의 동맹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과 더불어 맺었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함으로 손상을 입힌 행위 혹은 자연동맹(창 1:26)에 뒤따르는 것으로 이미 "원복음"(Protevangelium, 창 3:15 기독론적인 주석)에 약속이 되어 있다. 구약 성경에 대한 진술이 유형적인 해석에 의해 그리스도에 연관을 맺게 되었다.

네덜란드 경건주의의 또 한 사람으로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가 있다. 라바디는 원래 프랑스 태생으로 예수회 회원이었다. 그는 어거스틴과 베르나르의 신비주의 그리고 파리에 있는 시토 수도원인 포르 로얄(Port Royal)의 얀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칼빈주의자들의 공동체 생활에 감명을 받고서 1650년 개혁교회로 개종하였다. 1659년 제네바의 개혁교회인 성 베드로 교회의 설교자로 일했다. 이 때에 제네바에 학문연구를 위해 머물고 있었던 젊은 슈페너(Ph. J. Spener)가 그의 설교를 들었던 것이다. 1666년 라바디는 네덜란드의 미델부르크 개혁교회로 부름을 받았다. 1668년 미델부르크에서 이탈하여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교회를 "바벨론"으로 간주하여 저주하고 교회 밖의 "작은 교회" (ecclesiola)를 세워 개혁교회에서 분리하여 나가자 추방을 당했다. 그는 암스텔담에서 각성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정교회를 세웠고 박해를 받고 있는 신비주의자들의 피난처인 헤어포트(Herford)에서 그의 추종자들의 공동체 생활의 광신적인 형태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추방을 당하자 독일 함부르크-알토나에 있는 메노니트파의 교회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경건주의적인 교회 밖의 종교 모임의 아버지의 하나로 여겨진다.

3. 독일

독일을 경건주의의 시발점으로 보는 견해이다. 리츨이 경건주의의 시작에 있어서 네덜란드가 독일보다 앞선 것에 대한 반박은 먼저 작세(Eugen Sachsse)의 '경건주의의 근원과 본질'(Ursprung und Wesen des Pietismus, 1884)에서 시작되었다. 작세에 뒤이어 로이베(Hans Leube, 1896-1947)는 '정통주의 시대에 있어서 독일 루터 교회의 개혁 사상'(Die Reformideen der deutschen lutherischen Kirche im Zeitalter der Orthodoxie, Leipzig 1924)이라는 자신의 교수 자격 취득 논문에서 이미 루터교 정통주의에서 개혁 사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독일의 경건주의의 시작을 프랑케가 라이프치히에서 일으켰던 경건 운동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독일의 경건주의의 시작에 관한 견해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아른트와 그의 '참 기독교에 관한 4권의 책'(Vier Bücher vom wahren Christentum, 1605-1610)을 경건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로는 슈페너, 슈퇴플러, 왜((Wilhelm Koepp), 샤텐만(Paul Schattenmann) 등이 있다. 둘째, 슈페너와 "경건의 모임"(Collegium Pietatis, 1670) 또는 그의 '경건한 소원들' (Pia Desideria, 1675)의 출판을 경건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이다. 마르틴 슈미트, ?만 등이 이 견해를 가지고 있다. 셋째,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의 라이프치히의 소요 즉 루터교의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와의 갈등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이다. 로이베가 이 견해를 가지고 있다.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네덜란드

독일

-1879 헤페(Heinrich Heppe)

경건주의는 청교도주의에서 일

어난 운동

-1941 랑(August Lang)

-1960 알란트(Kurt Aland)

-1965 슈퇴플러(E. Stoeffler)

-경건주의의 창시자: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 헤페, 랑, 슈퇴플 러

- 1880 리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사람

들:

호이시(Karl Heussi)

뢰베니치(W. v. Loewenich)

쿠어트 디트리히 슈미트

쿠름비데(H.W. Krumwiede)

- 경건주의의 창시자:

로덴슈타인(Jodocus van

Lodenstein, 1620-1677)-리츨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

- 1884 작세(Eugen Sachsse)

리츨에 대해 비판:

로이베(H. Leube) RGG 제2판

마르틴 슈미트 RGG 제3판

- 경건주의의 창시자

아른트-슈페너

아른트-슈퇴플러

슈페너-리츨 이전 시대

슈페너-마르틴 슈미트

1675년 Pia Desideria

프랑케-로이베

프랑케-리츨

 

3. 경건주의의 목회적인 적용

1. 성서 중심의 목회

17세기에 루터교는 루터교 정통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표식(主標識)은 루터교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도입이다. 이것은 루터가 배격했던 것을 다시 끌어들인 것으로 혹자는 루터가 앞문으로 쫓아버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통주의 시대에 슬그머니 뒷문으로 다시 들어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경건주의는 다시 성경을 신학과 신앙적인 삶의 중심에 옮겨 놓았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의 목회 현실과 더불어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나라처럼 목회의 르네상스 시대가 있었을까 할 정도로 우리나라 교회는 목회에 관한 프로그램과 교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목회에 대한 방법이 너무 많다고 할 수있다.

목회에 대한 원전은 바로 성서이다. 여기에 길이 있고 방법이 있다. 그런데 오늘의 목회자들은 너무 많은 신학, 너무 많은 방법론에 얽매어 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성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리스도가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한 것처럼, 목회에 이 방법이 좋고 저 방법이 좋다고 귀를 솔깃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성서 이상 더 훌륭한 목회서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성서와 씨름하느냐이다. 남이 해본 것을 그대로 나의 목회에 적용하려는 것은 인스턴트 목회이다. 그러나 자신이 성서를 통하여 찾아내고 성서를 중심으로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일구어낸 목회는 인스턴트가 아닌 살아 있는 생목회(生牧會)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테크닉이 아닌 성서에서 모델을 찾아야 한다.

경건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의 사람이었다. 슈페너는 자신의 대표작인 '경건의 소원들'(Pia Desideria, 1675)에서 교회의 개혁을 위한 6가지 프로그램 가운데 맨처음에 성서를 열심히 읽을 것과 교회의 공예배 이외에 성서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드는 일(기도회 모임 제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 이외의 프로그램들: 신자들의 영적(만인) 제사장직의 실현, 기독교 신앙은 이론보다는 실천에 관한 것, 신학적인 논쟁은 필요한 경우로만 제한, 교회 개혁의 핵심으로서의 신학 교육의 개혁(체험있는 신앙은 배운 지식보다 중요), 설교는 신앙의 촉진과 열매를 위해 쓰여져야 하지, 설교자의 허영과 학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2.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

루터 이후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을 받는다는 명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해야 한다. 어떤 성도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사실 살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니 행동거지가 도저히 구원받을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이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믿고 행동은 세상사람들 보다 다를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목사님의 답변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 문제는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끊임없이 질문되어지는 것 가운데 하나다.

이 문제에 대한 답으로 1520년 2월 루터는 종교 개혁적인 윤리에 관한 글인 '선행에 관한 설교'(Sermon von den guten Werken)에서 십계명에 의거하여 신앙선행에 관한 새로운 관련성을 제시한다: 최고의 선행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에서 성속(聖俗) 행위들 사이의 구별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경건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루터보다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슈페너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선행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요 믿음이라는 것은 선행에 의해 증명되어 진다는 것이다.

3. 교회 속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

슈페너의 공헌 중의 하나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프로그램인 '기독교 구성원의 향상을 위해 독일의 기독귀족에게 고함'(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에서 벧전 2:9을 근거로하여 주장한 만인 제사장직을 다시 주장한데 있다. 루터는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라고 했다. 슈페너는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직을 영적 제사장직으로 칭하고 이들이야말로 거듭난 사람들이며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목회자의 조력자들이지 목회자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소그룹이 교회 안에서 활성화 될 때 교회가 산다. 이런 소그룹이 있어야 목회자가 미치지 못하는 구석구석에 손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성숙하고 부흥되며 개혁되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고 오락을 즐기고 볼링치러가는 소그룹이 아닌 모이면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경건 서적을 읽고 시험에 들거나 연약한 사람들이 있거든 권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모임들이 살아서 움직여야 한다. 또한 이들은 가정에서 가정의 성직자로서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이런 때에 참 교회가 이 땅에 더 많아지게 된다.

4. 주일성수

오늘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주일을 성수한다는 것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나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일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계명이다. 슈페너는 주일성수를 단지 주일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날은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므로 예배드리는 것은 물론이지만 노동과 상행위, 오락, 술마시는 일 등 육신과 세상을 위한 하는 일 모든 것을 금했다. 슈페너는 그 당시의 루터교회의 부패를 진단하면서 이 부패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신자가 주일 이외의 날을 거룩하게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주일을 구별없이 보내는 것은 바로 로마 카톨릭의 부정적인 잔재(ex opere operato: 성례전 특히 성찬식의 기계적인참여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가 루터교에 남아 있어서 예배만 참석하고 주일의 모든 의무를 이행했다고 여기고 주일을 아무렇게 보내는 당시의 신자들의 생활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이다. 슈페너는 이미 대학시절 부터 주일성수를 경건훈련의 기본으로 생각하고 이 날에는 세속적인 모든 일에서 떠나 -자신의 학업을 위해 공부하는 것 까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에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이 때에 실천했던 주일 성수로는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금욕적이고 경건한 서적들을 읽고 친구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명상시들을 지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였다.

5. 교리문답교육

루터와 그의 동료들이 작센지역의 교회와 학교를 탐방하면서 (1526-1530년) 얻은 중요한 결과는 주민들이 너무 무지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직자들 가운데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성직자들의 무지가 이러한데 일반 국민들의 무지는 아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탐방의 결실로 나온 작품이 바로 루터의 대·소교리문답(1529년)이다. 루터의 소교리문답이 어린이를 위해 씌여졌다면, 대교리문답은 바로 성인들, 특히 목사, 교사들을 위해 씌여진 것이다. 대·소교리문답은 종교서적일 뿐만 아니라 국민을 교육시키는 교과서의 역할도 한 것이다. 17세기에 슈페너는 다시 이 책의 중요성을 독일 국민에게 일깨워 준 사람이다. 그가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목사로서 일할 때 그는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과 어린이들에게 종교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직시하였다. 슈페너는 교리문답이 성인들에게는 설교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교리문답에 나오는 기본적인 교리를 모르면 설교에 나오는 교리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임을 주장하였다: "마음의 밭은 가시가 자라고 무성하게 되기 전에 일찍 어렸을 때부터 갈고 씨를 뿌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어렸을 때 받을 수 있는 교리문답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궁정수석설교자로 있었을 때, 또한 베를린에서 교구 감독장으로 있었을 때 이 교리문답교육을 결코 그만둔 적이 없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리문답교육의 붐을 일으켰고 그의 이러한 교리문답교육의 열기는 전 독일로 확산이 되었다.

6. 선교사업

개인 심령의 영적부흥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의 교회와 국경을 넘어 사랑의 실천을 이제 국외로 까지 눈을 돌리게 되는데 이것은 해외선교에서의 눈부신 활약이다.

1) 할레(Halle)의 해외선교

프랑케가 할레에 세운 고아원과 프랑케의 영향력이 지대한 할레대학교는 기독교 선교지의 요람이었다. 할레에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되었다. 할레의 첫 해외선교는 1706년 남인도의 트란게바-트리키노폴리(Trangebar-Trichinopoli) 근처에서 시작되었다. 첫 선교사인 바르톨메우스 치겐발크(Bartholomäus Zigenbalg, 1682-1719)는 드레스덴에서 가까운 풀스니츠(Pulsnitz)출신으로 덴마크 식민 총독부의 심한 몰이해적인 반대를 극복하고 짧은 생애에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회와 학교를 세웠고 창세기부터 룻기까지 그리고 루터의 소요리문답을 타밀어로 번역하였다.

프랑케가 죽은 후에도 할레는 해외선교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오지에서 쫓겨났던 루터교 광부들은 프랑케가 죽은 지 7년이 된 1734년부터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인 조지아(Georgia)에 이주하였다. 할레는 이들에게 선교사를 맨 먼저 파송하였고 여기에서 선교사로 일했었던 대부분이 할레 출신이었다. 이민 온 광부들은 황무지와 더위 속에서도 부지런히 기독교 공동체를 일구었고, 이 공동체는 유럽 각지에서 온 인근 주민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초기에는 헤른후트형제교회와 깊은 연관을 맺은 영국 성공회에서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가 된 죤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이 공동체에 매력을 느꼈다.

할레의 선교활동에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유대인 선교이다. 유대인에 대한 선교는 이미 슈페너가 그의 대표작인 '경건한 소원들'에서 그의 종말론과 관련하여 언급을 한 바 있는데 할레의 경건주의에 와서 이 결실을 보게 된다. 물론 제2차대전 이후 독일에서 제3제국이 유대인에게 저지른 죄와 과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조명하면서 깊이 사죄하는 신학자들에게는 유대인에 대한 선교가 반유대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유대인 선교를 위한 젊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인내를 반유대적이라고 속단하기에는 무리라 생각된다. 할레에는 1728년 칼베르크(Johann Heinrich Callberg, 1694-1760)교수에 의해 유대연구소가 세워졌고 세계 시민으로서 유대인의 해방을 주도했었으며, 히브리어-독어책들을 찍는 독자적인 인쇄소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훈련원도 있었다. 여기에서 훈련받은 선교사들은 동부 독일과 중동부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파송되었다.

2) 친첸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선교활동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친첸도르프 백작(Nikolaus Ludwig Graf von Zinzendorf, 1700-1760)은 프랑케가 할레에 세운 학교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여기에서 "이방인 선교"에 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경건주의에서 독창적인 길을 개척하였다. 특히 그의 선교활동은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었다. 헤른후트 형제교회는 신앙상의 이유로 백작의 영지에 은신처를 쁹게된 수공업자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는데 이들은 해외선교에 헌신적이었다. 1732년 8월 21일 형제교회에서 제비 뽑힌 도버(Leonhard Dober)와 니취만(David Nitschmann)이 평신도 선교사로서 서인도로 가게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엔 다비트(Chrristian David)와 두 명의 형제가 그린란드로 파송되었다. 친첸도르프 자신도 1741-1743년 북아메리카에 머무는 동안 인디안 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1732년에서 1760년 사이에 226명의 헤른후트 형제교회 선교사들이 10개의 선교지에서 활동하였다. 헤른후트 형제들은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20년 동안 영국 성공회와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 이전에 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들이 놀라운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선교가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공동임무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1930년까지 헤른후트 형제교회(모라비아 교회)는 거의 3,0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교인수와 선교사의 비율은 12대 1이었다.

7. 사회봉사 사업

개인의 내면적인 신앙의 부흥은 인간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실천으로 나타난 것이 경건주의 운동의 한 특성인데 이것은 교회가 교회 안에 쌓은 담을 부수고 (이것을 필자는 '교회의 교회주의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이라 표현하고 싶다) 그들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회에 실천하였다. 이 사랑의 실천이 경건주의자들에게는 살아있는 참믿음에 대한 증거이다.

1) 슈페너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사회사업

1669년 7월 슈페너는 설교에서 정부가 빈민구제의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빈민구제사업을 제안하였다. 또한 1674년의 설교에서는 거지에게 적선하는 것은 그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 없고 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자리와 공동으로 거할 수 있는 집을 지어 줄 것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결실을 얻어 1679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 빈민, 고아 그리고 노동자를 위한 집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경건주의 운동이 사회에 보여준 관심과 경건의 실천으로 그 이후의 사회사업운동의 한 본보기가 되었다: 1693년부터 베를린에서 일어났던 빈민구제의 개혁에 대한 본보기, 1690년에 카셀에서 고아원이 설립됨, 1710년 슈트트가르트에서 고아원, 노동자의 집, 교화소가 설립되었다.

2) 프랑케의 고아원 설립과 빈민구제

슈페너가 경건주의의 이론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면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는 이것을 조직하고 실천하였다. 이러한 실천은 바로 그가 할레(Halle)에 세운 고아원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die Weltverwandlung durch Menschenverwandlung)라는 경건주의의 근본 목적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케가 세운 고아원에는 그가 세상을 뜬 해인 1727년에 2,234명의 어린이가 있었고 그 중에서 고아는 137명이 있었던 대규모의 고아원이었지만 그 시작은 아주 평범하게 시작이 되었다. 프랑케가 목회를 했던 할레의 관문에 위치한 글라우하(Glaucha)에서는 매주 목요일 마다 각집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이 적선을 받아갈 수 있었다. 프랑케는 매주 목요일 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목사관 문 앞에서 빵을 나누어 가지도록 배려를 했는데, 바로 그 때에 이런 만남을 영혼구원과 기독교 기본지식의 전달을 위해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조그만 모임을 통하여 프랑케는 교리문답을 가르쳤고 기도로 마친 이후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프랑케는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이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음을 목격하고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회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는 방문객이 잦은 목사관의 거실에 두개의 성구를 붙이고 그 밑에 상자를 두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일 3:1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는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 이 일은 1695년에 시작되었으며 1695년 부활절에 프랑케는 자신의 공부방 앞의 방에서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학교를 열었다. 이렇게 작게 시작한 학교는 확장되어 1695년 가을에는 네명의 고아들과 함께 고아원을 열게 되었다. 할레의 고아원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간주되었고, 여기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선교사로서, 디아스포라(Diaspora) 목사로서, 외교관으로서 그들이 맡은 일을 통하여 경건주의의 정신을 독일 뿐 아니라 외국에까지 널리 펼쳤던 것이다.

4. 결론: 목회 현장에 대한 제안

한국의 개신교는 2,000여 년의 기독교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이제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역사가 짧은 교회이다.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올 때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19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은 간접적으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에 일어났다가 사라진 운동이 아니라 이처럼 그 유산을 남긴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경건주의는 기독교 진리의 실천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고 이 진리의 실천의 힘이 영적인 힘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간파한 것이다. 이 사상적인 영향은 부흥운동에서도 볼 수 있는데 특히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선교활동은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한국의 개신교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교회였다.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뿐만 아니라 사회개혁의 실천은 바로 교회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것은 야고보서 1장 27절의 내용을 실천하는 교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개신교도가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에서 인구비율로 볼 때 개신교가 가장 많은 한국의 실정은 어떠한가? 신자의 수적인 증가와 함께 범죄와 도덕적인 타락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한국교회의 영적인 능력의 상실과 신자들의 경건의 실천이 없기 때문이며 가장 큰 요인은 루터가 말한 것처럼 "성직자들의 타락"에 있다. 슈페너는 교회가 부패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성직자가 부패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부패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물질과의 결탁에서 왔음을 교회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때에 목회 현장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를 촉구하는 교회가 되고 회개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면벌부(indulgentia)에 대한 95개 논제를 내걸었을 때에 제1항은 바로 회개의 참의미에 대한 것이다. 회개는 감정적이거나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기독인의 전생애에 걸쳐서 해야할 일이다.

둘째, 소유에 대한 포기 내지는 철저한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1524년 루터는 "상업행위와 이자놀이"라는 글에서 초기 자본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이 비판의 신학적인 핵심은 모든 것을 자신만을 위해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심이었다. 우리는 소유에 대하여 수도사적인 청빈이 이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시대는 수도사적인 청빈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제어하지 않은 한 결국 멸망의 길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오늘의 기독교인에게 그러므로 요청되는 것은 기도할 때 마다 "주시옵소서" 라는 간청보다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라는 소원이 진정한 기도로 자리잡아야 할 때다. 내가 죽지 않고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도서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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