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에서의 죄와 악의 문제

목창균

 

Ⅰ. 들머리

  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기원하며 왜 존재하는 것인가? 악은 인간이 그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철학적 사색의 주제가 된 이론적인 문제인 동시에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실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악의 문제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악의 기원 문제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두가지로 대별된다. 악을 신의 창조물로 보는 견해와 창조물로 보지 않는 견해가 그것이다.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고대의 마니교 영지주의 현대의 보스톤 “퍼스낼리티”학파(Boston Persnalist School), 알타우스(P. Althaus)등이다. 후자는 악을 신의 피조물로 보기보다 오히려 악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것을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 이를 대변하는 것은 고대 헬라의 스토아 학파와 현대의 크리스챤 싸이언스(Christian Science )등의 입장이다. 어거스틴의 견해는 이것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악이란 본래 선했던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버린 것이다. 악은 존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부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악을 존재의 결핍(privation) 또는 결여(absence of being)로 정의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악을 실체(substance )아닌 실재(reality)의 결핍으로 이해한 신 플라톤 학파의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현대의 바르트 틸리히 등 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악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악의 존재와 기독교 신앙의 조화이다. 기독교인에게 악은 신앙의 심각한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력한 논증이 악으로부터의 논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존재하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는 신념에 근거한 것이다.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과 악의 존재는 모순된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전지한다면 악을 피하는 법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전능한다.면 악을 없앨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딜레마의 형식으로 제시된 악의 문제는 기독교인에게 심각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전능하고 전지한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단순하면서도 난해한 물음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악은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분류된다.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이다. 전자는 자연적인 재해 질병 불의의 사고 등과 같이 인간의 의지 또는 행동에 관계 없이 일어난 악 즉 고통의 문제를 의미한다. 후자는 인간의 행동과 관련하여 일어난 악 즉 죄의 문제를 의미한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고통의 문제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대답으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을 제시했다. 이는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의롭다는 이론이다. 하나님은 악조차도 선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신정론은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역할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기독교는 자유의지의 개념에 근거하여 죄의 문제에 대답해 왔다 인간은 옳게 행동할 수도 잘못 행동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 고통의 일부는 자유의 남용에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악을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자유의지 남용의 결과로 간주한다.

  악의 문제 특히 악의 기원 문제는 현대신학에서도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이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최근의 해방신학에 이르기까지 몇몇 중요한 신학자들의 죄관에 근거하여 이 문제가 어떻게 논의되었는지를 개괄함으로써 악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Ⅱ. 펼침

  1. 신적인 인과율

  슐라이에르마허(1768-1834)로부터 시작되는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은 인간의 경험 사회적 환경 이성에 대한 확신 예수의 인간성 종교적 관용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자유주의신학은 특히 낙관주의적 인간관은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강조한 반면 전통적인 타락과 원죄 교리를 거부하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악을 인간의 삶에 장애물을 일으키는 것들로 간주하고 이를 자연적인 악과 사회적 또는 도덕적인 악 두 종류로 분류했다. 전자는 인간의 행위와 관계 없이 일어나는 것이며 후자는 인간의 행위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모든 악은 죄에 대한 벌로 간주될 수 있다. 사회적인 악이 직접적인 것이라면 자연적인 악은 간접적인 것이다. 따라서 죄와 악은 원인과 결과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성경에 근거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의 종교적인 의식 즉 내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설명하고자 했다. 죄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하나님 의식에서 나타나는 반대물이나 장애물을 죄로 정의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아니고 인간의 육과 영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다. “우리는 하나님 의식이우리의 자기 의식을 고통으로 결정할때마다 죄의식을 가진다 그러므로 죄는 영에 대한 육의 대항이다.” 육과 영의 대립은 인간 안에 쾌락과 혐오감을 일어나게 하는 것과 하나님 의식을 일어나게 하는 것 사이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대립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을 자각하는데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죄를 하나님 의식의 무질서와 무력으로 규정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와 악의 근원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며 죄의 원인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남용이라는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견해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죄의 원인이라는 견해를 양자택일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양자 즉 신적인 인과율과 인간의 자유 사이에는 긴장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수용하고 다른 하나를 거부함으로써 그 긴장관계를 해소하려고 한다.면 페라기우스나 마니교도적인 이단적 견해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의 근원을 하나님 또는 인간이나 악마로 간주하거나 죄를 단지 무 또는 단순한 결핍으로 보는 일방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신적인 인과율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우리는 죄가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존재 밖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한다.”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인과율(causality)에 근거한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행위가 죄라면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일 수 없다. 죄의 상태에서도 인간은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께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구속의 필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슐라이에르마허는 단지 죄와 구속의 관계성이라는 조건에서 하나님을 죄와 악의 창시자로 보았을 뿐이다. “죄는 하나님에 의해 명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속 또한 하나님에 의해 명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가 하나님을 구속의 창시자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죄의 창시자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은총은 하나님의 선물인 반면 죄는 인간 자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할 때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된다. 죄의식 없이는 결코 은총에 대한 의식을 가지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은총과 병행하여 죄의 존재를 규정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구속의 필요성을 의식하도록 자극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죄와 악에 대한 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죄 의식은 구속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죄와 악은 그 자체에서 또는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구속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죄를 존재하게 하는 신적인 인과율은 무엇인가? 하나님 의식의 무력상태(incapacity)로 죄를 일으키는 신적인 활동은 무엇인가? 슐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명령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 하나님 의식의 무질서를 우리에게 죄가 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의 의지를 통해 일어난다. 죄를 포함하여 세계를 창조한 것과 나사렛 예수를 구속의 선포자로 정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시작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슐라이에르마허는 전통 신학과는 다른 죄관을 제시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나 불충성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행위 심지어 사탄에 속박 당하는 것도 죄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죄가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부터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 곧 하나님과 관계의 혼란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죄의식을 무력한 신 의식과 동일시했다. 이 무력한 신 의식을 인간에게 죄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적이며 효력있는 의지이다. 따라서 죄의 원인을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서 찾은 것이 슐라이에르마허 죄관의 특징이며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개념이 슐라이에르마허 죄론의 핵심이다.

 

  2. 혼돈과 무(無)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 대륙과 미국의 신학계를 지배했던 자유주의신학은 그 사상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인간의 이성 낙관주의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현한 새로운 신학파가 신정통주의 신학이며 이는 정통주의를 새로운 시각으로 개조하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이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변증법적 형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법증법적 신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인간 경험을 신학의 주자료로 삼았던 자유주의 신학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토대로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 하기도 한다. 신정통주의신학에 속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칼 바르트 에밀 브룬너 루돌프 불트만 라인홀드 니버 폴 틸리히 등이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다. 그는 하르낙(Adolf V. Harnack), 헤르만(Wilhelm Herrmann)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 밑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초기에는 그들의 자유주의신학과 입장을 같이 했다. 그러나 스위스의 작은 공업 도시 자펜빌(Safenwill)에서 10년 동안의 목회 경험을 통해 자유주의신학의 한계를 깨닫고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그의 로마서 주석(1판은 1919, 2판은 1921년에 출판)이다. 이 책은 당시 신학계에 폭탄과 같은 충격을 주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는 시골 소도시의 무명의 목사에서 20세기 현대신학의 거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는 명제를 신학의 유일한 근거로 사았다 따라서 자유주의신학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 대신에 인간 신앙 경험 감정 문화 등에 신학의 중심의 둔 것을 비판하고 그것과 결별했다.

  바르트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미래와 역사와 발전에 대해 낙관주의적 입장을 취함으로 악, 죄, 죽음과 같은 인간 존재의 어두운 면을 신중히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교의학 3권 3부 창조론을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악의 문제를 심각하게 취급했다.

  바르트는 마귀 악 죄의 기원 및 본질을 무적(無的)로 것에서 찾았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지배에 반대와 항거가 존재한다고 보고 그것을 무로 규정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13절의 혼돈과 흑암에 대한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혼돈과 무적인 것(nothingness)을 의미하는 카오스(chaos)를 악으로 보았다. 카오스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비존재나 완전한 무(nothing)가 아니라 무의 권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항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귀의 피조성을 부정했다. 마귀의 존재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도 피조물에 속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마귀는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귀는 무에서 온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을 미워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마귀가 타락한 천사에서 유래했다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해석을 거부했다.

  한편 무적인 것 즉 악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피조물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 공통적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악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바르트에 따르면 그것은 제 3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한다. 이러 의미에서 바르트는 악을 단순히 무(nothing)로 표현하기 보다 무적인 것(nothingness)으로 표현했다.

  무의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의 선택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선택하기도 하고 선택하지 않고 버리기도 한다.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는것 즉 버린 것이 무이다. 무의 성겨은 그 존재론적 특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것이 악이다. 선택 창조 보존 및 통치에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원하고 행하는 것이 그의 은혜인 반면 하나님이 원하지 않고 부정하고 거부한 것이 무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에 상반되고 적대적이며 은혜가 없는 존재가 무이다. 바르트는 이것이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악이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죄를 무의 구체적인 형태로 취급했다. 죄 안에서 무가 인간의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죄 역시 무에서 왔다고 해석했다. 인간은 범죄할 수 있거나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자유의지를 지닌 것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인간은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복종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의 가능성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찾을 수 없다. 악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가능성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악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카오스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속에 침입함으로써 존재하게 되었다. 죄의 시작은 아담의 타락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인간의 타락 이전과 이후의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르트의 죄악관은 악의 근원을 무에서 찾은 것이 특징이며 이것은 악을 존재의 결여로 해석한 플라톤과 어거스틴 사상의 영향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창조 때에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고 버린 것과 결과를 악으로 해석함으로써 악의 역사적 실재적 의미를 소홀히 한 것이나 인간의 타락 이전과 이후의 상태를 구별하지 않았던 것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바르트의 신학적 공헌은 인간 중심의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신학을 전개한 데에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으로 돌아가려했던 그의 처음 의도는 실패했다. 앞서 말한 그의 죄론을 통해서도 입증되듯이 여러 면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 형식은 전통적이었으나 그 내용은 자유주의신학적인 요소와 철학적인 요소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3. 유한성에 대한 불안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미국이 낳은 저명한 개신교 윤리학자요 정치사상가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신학자라는 것을 자주 부정했음에도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주요한 신학적 공헌은 인간에 대한 해명에 있다. 그는 자유주의신학의 낙관주의적 인간관과 정통주의 신학의 비관주의적 인간관을 모두 거부했다. 전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만을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지나치게 강조한 때문이었다. 니버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죄인 양면을 지닌 존재로 보는 기독교 현실주의적 인간관을 제시했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함과 허약함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자기를 초월하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까지 도달하는 능력 곧 정신의 자유를 포함한다. 그럼에도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유한하고 의존적이고 나약하다. 이와같이 인간은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할 수 있으므로 유한성과 자유를 함께 소유한 피조물이다. 이 자유와 유한성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 대해 염려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아직도 제한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불안이다. 따라서 불안은 “자유와 유한성과의 역설적 상태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불가피한 정신상태” 즉 자유와 유한성의 긴장 상태이다.

  니버는 이 불안을 죄의 근원으로 간주했다. 불안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죄의 내적 전제조건이 된다. 불안은 죄와 신앙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죄이다.

  인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 불안을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자신의 유한성을 부정하는 것과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 즉 교만과 육욕이다. 교만은 인간의 유한성을 거부하고 영적인 능력과 자유를 과대평가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이려는 것이다. 육욕은 정신의 자유와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시도이다. 자연의 충동에 굴복하여 영적인 능력을 포기하고 동물적인 본성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만이 인간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는 것이라면 육욕은 인간을 지나치게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 니버는 교만과 육욕을 죄의 기본 형태로 생각하고 육욕보다 교만을 더 근본적인 죄로 취급했다.

  니버에 따르면 교만은 네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권력의 교만 지적 교만 도덕적 교만 정신적 교만이 그것이다. 권력의 교만은 권력을 구하는 욕망을 의미하며 이것은 두가지 형태를 취한다. 유한적인 힘을 절대시하는 것과 불안정을 극복하는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인 반면 후자는 그 약함을 극복하려다가 그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지적 교만은 권력의 교만이 한층 더 정신적으로 이상화한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인간 인식의 유한성을 절대시하는 것이다. 도덕적 교만은 상대적으로 선한 것을 절대적으로 선한 것으로 가장하는 교만이다. 정신적인 교만은 궁극적인 죄이다. 이것은 도덕적 교만 속에 포함된 자기 신격화를 표명하는 종교적인 죄이다. 니버는 이 종교적 교만을 인간 죄악성의 최종적인 표현으로 간주했다.

  한편 죄의 두번째 형태인 육욕은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존재와 생의 중심에 두는 자기 본위로 인해 혼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특정한 충동과 욕망에 자신을 부당하게 일치시킴으로써 자기 내부의 조화가 파괴되는 것이다. 색정 포식 음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니버는 헬레니즘적인 죄관처럼 죄를 기본적으로 육욕과 동일시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울―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근본적인 죄로 간주하고 그 결과가 육욕이라고 주장했다.

  니버는 죄의 두 영역을 주장했다. 종교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이다. 전자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고 후자는 이웃에 대한 부정의를 의미한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가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의 불균등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도덕적인 면에서 균등한 죄악을 범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다. 사회적 부정의는 개인과 집단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니버의 죄관은 인간은 초월적이면서도 유한한 존재인 까닭에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 항상 불안해 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죄를 해명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불안을 죄의 전제 조건 내지 죄의 계기로 봄으로써 죄의 근원을 불안에서 찾았다. 이것은 그의 독창적인 사고라기 보다 키에르 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에 힘 입은바 큰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기독교가 소홀히 해온 사회적 부정의를 비롯한 죄에 대한 그의 예리하고 탁월한 현상적 분석은 현대 인간 이해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된다.

 

  4. 실존적 소외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독일 태생으로 나찌 정권에 교수직을 박탈 당하자 47세 때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생애 마지막 30년을 미국에서 활동한 신학자이다. 그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주도한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운동의 협조자였다. 뒤에는 바르트에 대한 비판가로 유럽 대륙 신학계에서 명성을 날렸다 미국에서는 라인홀드 니버의 동료요 친구로서 교수생활과 저술활동을 통해 20세기의 탁월한 종교사상가가 되었다.

  틸리히는 변증법적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중간길 즉 중재와 화해와 종합이라는 제3의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그의 철학적 신학이고 “관계”를 중심 문제로 삼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특별한 관심은 신학과 철학 종교와 문화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의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틸리히는 이 다양한 영역들 사이의 경계선에 서서 그들을 중재하고 종합하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신학방법을 상관의 방법이라 부르기도 한다.

  틸리히 사상의 중심점은 그의 존재론이며 그 중에서도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존재 자체(BeingItself)로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이며 모든 존재의 근거와 힘이다. 모든 존재는 이 존재의 근거에 참여하고 의존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에 관여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가 곧 소외이다.

  탈리히는 이 소외에서 죄의 근원을 찾았다. 그는 인간의 본질과 실존을 구분하고 이것을 죄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전자는 인간이 그렇게 존재하도록 의도되고 창조된 본래 상태를 말하며 후자는 경험적이며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말한다. 인간은 존재의 근거 또는 힘인 하나님 세계 및 자아에 속해 있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이 본질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러나 실존적인 인간은 본질적인 존재 즉 마땅히 존재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이 속해 있는 존재의 근거 다른 존재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실존의 상태는 소외의 상태이다.

  틸리히는 이러한 본질적인 존재로부터 실존적인 존재로의 전이(transition) 죄로 정의했다. 즉 본질적인 존재로부터의 소외는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죄라고 부른 것과 동등한 것이다. 그러나 소외가 죄이기는 하지만 죄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죄는 소외가 포함하고 있지 않은 독자적인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속해 있는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인격적인 행위가 그것이다. 따라서 소외가 사람이 본질적으로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 것 즉 비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죄는 소외가 되는 행위 즉 인간이 의식적으로 소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소외는 사랑과 신앙에 의해 극복된다.

  탈리히는 불신앙 교만 및 육욕을 소외의 세가지 특징으로 주장했다. 불신앙은 단순히 교회의 교리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의 존재의 중심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그의 전 존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행동 또는 상태가 불신앙이다.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반면 지식과 의지와 감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인 동시에 자신과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로써 자신의 초월성에 도취되는 유혹을 받게 되어 자리를 높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된다. 이것이 교만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적인 중심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불신앙이라면 인간이 자기를 자기와 세계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교만이다. 한편 육욕은 무제한적인 욕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체 현실 세계를 자기 속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다.

  한편 틸리히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인간은 죄인이 아닌 때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본질로부터 실존에로의 전이 인간과 자연이 선한 상태로부터 악한 상태로 변경된 것이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는 견해나 인간이 소외되지 않았던 때 즉 죄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견해를 거부했다. 그것이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상징적 또는 실존적 해석에 근거하여 아담의 타락을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간이 본질적인 존재로부터 실존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이 모든 인류를 부패하게 하는 원죄라는 개념을 부정했다. 그것은 상징일 뿐이지 원죄나 상속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순간 순간마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소외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틸리히는 죄를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사건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간주하지 않고 단순히 인간의 실존 상태로 간주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실존적 분석과 아담의 타락 사건에 대한 상징적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죄론의 주요한 특징은 죄의 본질을 소외로 그리고 죄를 본질적 존재로부터 실존적 존재에로의 전이로 규정한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죄론에서도 입증된다. 그는 자유주의신학의 성서비평과 역사비평을 수용했다. 또한 아담의 타락 사건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원죄의 유전적 개념을 거부한 것도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과 배치된다. 그는 지나치게 성경에 대한 상징적 해석에 의존함으로써 그의 죄관은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 소외의 현상에 근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 속에 죄가 없었던 때가 없었다는 그의 주장은 인간이 선재 상태에서 타락하여 출생 때부터 죄가 있다.는 오리겐의 견해를 연상케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경제적 갈등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유럽의 정치신학과 몰트만의 소망의 신학을 이론적 토대로 하여 196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전하여 북미의 흑인신학과 여성신학 그리고 제3세계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현대신학 사조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신학자들은 서구의 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구체적 상황에 적합치 않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장애가 된다.고 보고 독자적인 신학방법론을 취하게 되었다. 서구의 전통신학이 교리로부터 출발한다.면 해방신학은 실천으로부터 출발할 뿐만 아니라 실천에 우위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해방과 억압하는 자에 대한 악압 받는 자의 종속으로부터 해방을 신학적 활동의 주목적으로 삼았다.

  해방신학은 여러 면에서 정통주의 신학과 대비되는 죄관을 제시했다. 특히 해방신학은 죄의 본질적인 면 보다는 현상적인 면을 강조하며 죄의 근원을 경제적 갈등에서 찾는 것이 특징이다. 정통주의 신학이 창세기 13장에 근거하여 죄를 이해하는 반면 해방신학은 출애굽기 13장에 근거하여 죄를 이해한다. 해방신학이 해방만을 강조하고 원죄 문제를 등한시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정통주의 신학이 죄를 흔히 하나님과 개인의 깨어진 관계를 문제로 보는 반면 해방신학은 죄의 개인화를 거부하고 죄의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 더 관심을 갖는다. 전자에게 있어서 죄는 기본적으로 불신앙 반역 또는 그런 유형의 어떤 것인데 비해 후자에 있어서 죄의 주요한 영역은 억압과 착취이다.

  흑인 해방신학자인 뉴욕 유니온신학교 교수 제임스 콘(James Cone)에 따르면 죄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불결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억압이다. 부당한 정치적 경제적 배분을 통한 이웃의 인간성 부정이 죄이다. 콘은 이런 죄관의 근거로 아모스 5장 11-12절을 제시했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남미의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 역시 죄를 억압에 대한 투쟁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는 죄를 자기 자신 안에로 이기적으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죄를 짓는 것은 이웃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주님 자신을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거부가 가난 부정의 억압의 궁극적 원인이다. “죄는 억압적 구조들에 있어서 인간에 의한 착취에 있어서 민중과 인종과 사회 계급의 지배와 노예 상태에 있어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죄는 근본적 소외 즉 불의와 착취의 상황의 뿌리로 나타난다.”

  한편 구티에레즈는 불공정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압제자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부정의하고 죄된 것으로 분류한 반면 억압 받는 자가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한다. 이것은 타인의 죄되고 부정의한 행위에 대한 저항에서도 폭력의 사용은 나쁘다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과 다르다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압제자에 대한 증오 적대 사랑의 결여가 죄로 간주될 수 있다. 반면 해방신학자들의 견해에서 죄는 억압적 상황을 묵인하는 것이다. 콘에 따르면 억압적 상황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전복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죄이다.

  해방신학의 전제는 경제적 갈등과 권력과 소유에서의 불평등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불평등을 증진하는 것이 죄이고 부정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해방신학에 따르면 살인과 같은 특정 행위가 억압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죄로 간주되는 반면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투쟁에서 억압 받는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죄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해방신학은 경제적인 갈등을 죄의 근원으로 취급한 것이 특징이나 죄의 현상을 강조한 나머지 죄의 본질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문제점이다.

 

Ⅳ. 마무리

  필자는 악의 두 종류 가운데 주로 도덕적인 악, 즉 죄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급했다. 현대신학자들은 죄악의 근원 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적인 인과율에서 바르트는 혼돈과 무에서 니버는 유한성에 대한 불안에서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적 소외에서 그리고 해방신학은 억압과 소유의 불균등과 같은 경제적 갈등에서 죄악이 기원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들은 전통적인 원죄 개념을 재해석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며 죄의 근원을 자유의 남용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간주하는 전통 신학과는 달리 인간의 현실적 구조와 상태로부터 죄의 원인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나 성경보다는 인간의 경험이나 철학 사상에 더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앞서 말한 현대신학의 죄관들은 각각 중요한 면에서 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악을 자연적인 악과 사회적인 악으로 분류하여 죄의 사회적인 성격을 강조한 것은 그의 공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죄의 창시자를 하나님으로 보았으며 죄를 하나님 의식에 대한 혼란 또는 방해물로 간주함으로써 단지 심리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바르트를 비롯해서 니버 틸리히는 신정통주의신학에 속하는 신학들로 이들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등 정통적이었으나 신학 내용면에서는 원죄 개념을 부정하는 등 전통적인 신학과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바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음으로써 죄의 기원을 아담의 타락에서 추적하지 않고 혼돈과 무에서 찾았다. 이것은 죄의 역사적이며 실제적인 의미를 경시할 뿐만 아니라 성서적인 근거도 희박하다.

  니버는 죄에 대한 탁월한 형상적 분석을 제시했으나 인간적인 노력에 근거하여 불안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함으로써 하나님 역사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죄의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적인 노력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한편 틸리히는 성경을 지나치게 상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창조와 타락을 일치시키고 시, 공간 속에서 인간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했다. 따라서 본질적인 죄와 현상적인 죄 사이의 관계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해방신학은 불의한 사회구조로 인한 경제적인 갈등을 죄의 원인으로 봄으로써 죄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로만 보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적인 측면을 등한시했다. 또한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거나 부와 권력의 재 분배를 죄의 제거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이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라고 말씀하심으로 폭력의 사용을 엄히 경고하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마5:44)고 말씀함으로써 사랑으로 미움을 이길 것을 교훈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권력과 부의 재 분배가 죄를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님을 역사가 증명해 준다.

  죄와 악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성경은 죄와 악의 원인이 하나님이 아님을 명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하나님은 선한 것만을 창조했다. 그가 창조한 것은 그가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창 1:1-31) 그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죄와 악에 대한 해명은 앞서 말한 성경 말씀들을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현대신학은 악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으나 자유의지의 남용을 죄악의 근원으로 해석하는 전통적인 신학의 입장보다 더 만족스럽고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