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학공부 시절

<한국성결신문 제354호(1.12) - 제359호(2.23) 연재>

 

 

끈기로 시작한 미국 유학길

신학교에 입학한 이후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나는 학교를 떠나 본적이 없다. 20년은 학생으로, 16년은 교수로 있는 셈이다. 내가 학문에의 길로 들어 선 이유는 단순했다. 20대 초반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전도사로 10년을 사역해야 했다. 좀 더 공부하고 목회를 할 요량으로 숭실대 철학과에 편입했다. 철학과로 간 것은 생각의 폭을 넓히며 신학공부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본래 나의 꿈은 농촌 목회자였다. 신학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 여름방학이면 교회 청년들과 함께 농촌교회를 찾아다니며 여름성경학교 인도와 전도활동을 하곤 했다. 고려대 대학원을 마친 나는 강원도의 어느 시골교회, 동기가 담임목사로 있는 교회에 전도사로 지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몇 차례 미국 비자발급을 거절당한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1977년 10월, 스물 아홉에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미국 동부로 가는 한국 비행기가 없어, 미국 비행기를 타야했다. 영어회화에 능통하지 못했던 나는 승무원이 "Coke or Seven up?" 하며 음료수를 권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내내 오렌지 쥬스만을 시켜 마시곤 했다.
이런 영어회화 실력을 가지고 유학을 떠난 내가 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어머니의 기도, 그리고 처음 선택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 간 나의 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번 선택한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로부터 배운 지혜였다.

한번 선택한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로부터 배운 지혜였다.

 

페이스 신학교에서 청교도적 훈련

미국에서 처음 공부한 곳은 필라델피아 근교, 엘킨스파크에 위치한 페이스 신학교였다. 부호의 저택이었던 웅장한 건물, 대리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내부, 5백여 종의 유럽산 수목으로 가꾼 아름다운 교정...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학교였다.
페이스 신학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자유주의화되는 것에 반발하여, 일단의 교수들이 세운 학교였다. 신학 노선이 극보수였으며, 신근본주의 운동을 주도한 맥킨타이어 박사가 교장이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횃불트리니티 신학대 총장 김상복 목사, 합동신학대 김명혁 박사, 성결대 총장 성기호 목사 등이 있다.

신약성서 전공 석사과정(sT.M.)에 입학한 나는 주로 헬라어, 원전 강독, 70인역, 사해사본 등을 공부했다. 근본주의 운동의 본산지에서 배운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은 후일 현대신학을 공부하게 된 나에게 신앙의 버팀목이 되었다. 또한 에파트 박사, 포셋 박사의 인품을 통해 청교도 신앙인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도 페이스에서 얻은 수확 중 하나였다.
나의 페이스 신학교 수학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신학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쓸 무렵, 여름 방학에 일시 귀국하여 결혼하기에 앞서, 나는 학교 당국에 특별 청원을 했다. 미국비자 얻기가 어려워 다시 올 수 없을지 모르니, 그간 취득한 학점을 고려해 학위를 달라는 것이었다. 엉뚱한 청원 같았지만, 비자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내게는 절박한 문제였다. 교수회의는 그 청원을 받아들여, 내게 목회학석사 학위를 수여했다

 

박사과정 입학…비자문제 말씀으로 응답

1979년 여름 방학에 일시 귀국하여 결혼하게 된 나는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비자를 신청했으나 거절되었다. 서신으로 학교에 도움을 청했으나, 이미 학위를 받았으므로 도울 길이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서둘러 두루 대학교 박사과정에 지원하여 한 달 만에 입학 허가서를 받았으나, 미국 비자가 문제였다.

그 해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오산리 기도원으로 향했다. 기도하며 매 집회에 참석하던 어느 날 창세기 50장 20절 말씀을 통해 응답을 받았다. 부원장 박설자 전도사님이 "고난은 축복의 씨앗"이라고 말씀하실 때, 답답하던 마음에 기쁨과 확신이 임하는 것을 체험했다. 그 후 1980년 1월 미국 비자를 받았다. 한 학기 마음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소중한 신앙 체험과 함께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다. 전화위복의 축복이었다.

두루 대학교는 뉴욕시에서 서남쪽으로 50킬로 떨어진 뉴저지주 매디슨, 백만 장자의 여름 별장터 위에 자리잡고 있다. 교문을 들어서면 말을 타고 있는 에즈베리 목사의 동상이 이채롭게 서 있고, 아름드리 떡갈나무 사이로 고색창연한 옛 건물들과 현대식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다.

두루대학교는 1866년 미국 감리교회 총회가 세운 최초의 대학원 수준의 학교로, 본래 신학대학으로 출발했으나 그 후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었다. 대학 도서관은 최고의 현대식 시설에 수십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고, '감리교 고문서 및 역사센터'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국 감리교에 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감리교와 웨슬리 연구의 보고로서 손색이 없다.
두루 출신의 한국인으로는 정일형, 신사훈, 김용옥, 박순경 박사 등과 감신대 김득중, 광신대 정규남, 성결대 성기호 총장을 비롯하여 각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는 30 여명의 교수들이 있다. 당시 내가 입학한 신학 및 종교학부에는 루터 연구가로 대학원장직을 맡고 있던 톤슨,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오든, 화란 출신의 현대신학자 드용, 기독교 윤리학자 롱과 오글트리 박사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교수들이 많이 있었다.

 

교수생활 사표 커트니 박사

두루에서 공부하는 6년 반 동안 특히 내게 많은 영향을 준 분은 커트니 박사님이었다. 첫 학기에 그의 리꾀르 세미나를 수강했으나, 강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 없었다. 실상 나는 리꾀르란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이해도 전혀 없었다. 교수님은 내가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은 것만도 대견해 하셨다.
다음 학기 헤겔 세미나를 수강했는데, 주로 '정신현상학'이란 책을 강독하는 과목이었다. 그 후에도 헤겔 세미나를 두 번 더 청강했지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고, 연구보고서 분량을 채우기에도 벅찼다. 내 보고서를 읽으신 교수님께서 적지 않은 우려를 표시했으나, 나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지도교수로 모셨다.

세 번째 학기에 수강한 '자력종교와 타력종교'는 비교적 이해할 만했으며, 수업시간 발표한 내 발제는 학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교수님은 학업의 진전에 흐뭇해 하시면서, 졸업할 때까지 내 연구 보고서나 논문에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커트니 박사님은 지금도 내 교수 생활의 사표가 되고 있다. 언제나 밤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던 교수님의 연구실을 바라보면서 도전을 받곤 했다.

유학 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공부보다도 경제적 문제였다. 등록금과 기숙사비로 한 학기 3∼4천불을 내야 했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던 두루의 박사 과정은 사정이 달랐다. 주일 날은 뉴욕에 있는 한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고, 방과 후나 여름방학에는 학교 청소원으로 일했다. 그런 나에게 한 장로님께서 직장 신우회의 성경공부 인도를 부탁하셨다. 2년 동안 매주 수요일 계속된 신우회 예배는 나에게 성경 연구의 기회였던 동시에 생활에도 큰 힘과 격려가 되었다.

 

내 연구의 결산 슐라이에르마허 신학사상

독일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독일어판 '종교론'을 우연히 발견하고 구입하면서부터 였다. 고대 대학원에서 썻던 석사논문,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 연구'는 그 책에 대한 이해였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을 배우게 된 것은 라이언 박사의 세미나에서였다. 헤겔 세미나와 더불어 어렵기로 소문난 그 과목에서 나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신론'이란 과제물을 제출해 A학점과 함께 좀 더 발전시키면 좋은 논문이 될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슐라이에르마허의 신론 발전에 대한 학위 논문을 진행했으나, 라이언 교수님은 의외로 독창성이 없어 힘들겠다고 하셨다. 이미 2년 이상 연구한 논문의 주제를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다른 교수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3심이신 뉴저지 주립대의 스트리트만 박사님은 논문이 가능하다고 하셨고, 슐라이에르마허의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시간대의 타이스 박사님은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참고문헌과 함께 논문방향에 대해 자세한 지침을 보내 주셨다. 두 분의 조언으로 내 논문은 진행될 수 있었다.

라이언 교수님은 내게 두 가지 충고를 하셨다. 하나는 "슐라이에르마허는 거대한 늪과 같아서 젊은 신학도들이 한번 빠지면 나오지를 못한다"는 리차드 니버의 말을 인용하며, 슐라이레르마허 논문 지도는 네가 마지막이 될 것이니, 19세기 인물에 매달리지 말고 다른 것을 공부해 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슐라이에르마허에 관한 입문서를 한권 쓰라는 것이었다.

나의 첫 번째 책인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1991)은 내 연구의 결산이었으며, 이후 나의 학문적 관심은 현대신학을 거쳐 복음주의 신학으로 향하고 있다. 라이언 교수님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은 내 연구의 결산이었다.

 

6년간 학업마치고 서울신대 교수로 새출발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하나 없었던 서울신대로 내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두루에서 종합시험을 통과하고 논문 준비를 할 무렵, 한국에서 당시 총회장이시던 정진경 목사님과 총무 이봉성 목사님이 내가 전도사로 있던 뉴욕 한빛교회를 방문하셨다.

총회장님께서는 내게 많은 관심을 보이시며, 서울신대에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어디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은 터라, 불러 주시면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일년쯤 지나 뉴저지주에 다시 오신 정 목사님은 서울신학대학 이사장이 되셨다고 하시면서 서울신대로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목사님은 장학금으로 1000불을 보내주셨다. 지금도 목사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뿐이다.

한편 학위논문을 지도해주시던 스트리트만 교수님은 1~2장을 읽어본 후에도, 그것을 다른 심사위원에게 보내라는 말씀이 없었다. 내 논문은 1장과 2장이 핵심인데, 그것으로 독창성을 입증할 수 없다면, 심사 통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그것을 부심인 커트니 교수님에게 보냈더니, 뜻밖에 교수님은 극찬의 평가서를 보내주셨다. 그것과 함께 3장을 보신 스트리트만 교수님은 그제야 논문 초고를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보내라고 하셨다.

1986년 4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논문 심사위원장인 라이언 교수님이 전화를 주셨다. 1장을 읽어보았더니 제대로 되었다고 하시면서, 이번 5월에 졸업하라는 것이었다. 졸업식이 2주 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졸업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드렸더니, 한 주에 마지막 장을 쓰고 다른 한 주에 결론을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내 생애 가장 바쁘면서도 기뻤던 두 주간이었다. 논문 심사위원회의 구두 시험을 거쳐 5월 17일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6년 간의 두루에서의 학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서울신대 교수로서의 새로운 장이 내게 펼쳐지게 된 것이었다.  

   

종말론 논쟁, 현대신학논쟁은 서울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쓴 책이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