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적 유산과 과제

목창균
 

논찬: 이신건

서론

2001년은 새 천년이 시작된 첫 해인 동시에, 서울신학대학교가 창립 90주년을 맞게 된 뜻 깊은 해다. 이 역사의 분기점에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성장과 발전을 위한 필수적 과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서울신학대학교 교수단은 역사와 전통을 소중히 여겨 왔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역사를 주기적으로 정리해온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천영교수의 "신학대학의 어제와 오늘"(활천 334호, 1968년), 이정근교수의 "서울신학대학 60년사와 새로운 전망"(신학과 선교), 최희범교수의 "서울신학대학 70년사 소고" 등이 그것이다. 한편, 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적 전통, 특히 신학적 유산에 대해서는 단지 단편적으로 논의되었을 뿐이다. 그 중 하나가 조종남 전학장의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4중복음"이다. 최근 박명수교수가 서울신학대학교를 포함한 성결교회 초기 역사에 관해 폭 넓게 연구하고 있으며, 그 결실이 그의 [근대 복음주의의 주요 흐름]와 [초기 한국성결교회사] 등의 저서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 동안 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성이 논의의 주제가 되지 못했던 것은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신학 교수진은 창립 초부터 최근 10여 년 전에 이르기까지 거의 동일한 교육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초기 교수진은 대부분 동경성서학원이나 경성성서학원 출신들이었으며, 해방 후 해외 유학파 교수진은 주로 미국의 특정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유학파 교수들도 대부분 학술 학위(Ph.D.)가 아닌, 신학 기초 학위 취득자들이었다. 따라서 서울신학대학교의 교수단 사이에서 심각한 학적 갈등이나 모순이 비교적 노출되지 않았다.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교수진은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비롯하여, 독일과 영국의 여러 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한 학자들로 충원되어 왔다. 따라서 서울신학대학교의 가장 큰 취약점으로 지적되었던 학문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과거에는 노출되지 않았던 학문적 정체성의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신학 교수들이 다양한 학문적 전통과 신학배경을 지닌 여러 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충분한 여과 없이 자신의 교수와 학문활동을 통해 표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교수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학문적 양심과 양식에 따라 개인적이며 독자적으로 학문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런 개인적 틀에서 벗어나, 신학교수단 전체를 관통하는 통합적 활동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신학 교수진의 교육배경과 학문적 성향이 다양하고 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적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서울신학대학교의 학적 유산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토대로 성결교 신학을 정리하고 전개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울신학대학교가 개교 90주년 기념 학술제를 개최하고, "서울신대 신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그 주제로 잡은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한 일로 여겨진다. 특히 발제자에게 주제 논문으로 요청한 "서울신대의 학문적 유산과 과제"가 그러하다. 이는 누군가 정리했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결교 신학 정립을 위한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발제자는 성결교회사와 서울신학대학교사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자료들을 검토, 분석하여 우리의 신학적 유산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미래적 과제를 전망하려고 한다.

 

I. 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적 유산

서울신학대학교는 학문적 유산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하나는 서울신학대학교가 경성 성서학원에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다는 외형적 면이다. 성서학원이나 경성 혹은 서울이라는 외형적 명칭이 내포하고 있는 유산은 성서 중심주의와 비 교파주의다. 다른 하나는 서울신학대학교는 전도자 양성과 복음주의적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다는 내면적 면이다.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유산은 선교 지상주의와 체험적 복음주의다. 기타 다른 항목들은 이 네 가지 표제에 포함될 수 있는 세부적인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성서 중심주의

서울신학대학교는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1911년 3월 13일 무교동 복음전도관을 임시 교사로 하여 설립한 [경성성서학원]을 그 모태로 하여 교명과 교정을 달리하며 지난 90년간 발전해왔다. 1907년 김상준과 정빈은 동양선교회의 후원으로 서울에 복음전도관을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공부한 [동경성서학원] 같은 학교를 한국에도 설립하기를 원했다. 동양선교회 창립자요 총리인 카우만은 서울에 성서학원을 세울 의향이 없었다. 새로운 학교 설립에는 많은 재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동경성서학원]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의 전도관은 성서공부반을 개설하여 40-50명의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1908년 카우만 부부는 서울을 방문하여 그런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학교 설립을 위한 기금 모금을 하게 되었다.

서울신학대학교는 성서학원으로 출발한 것이 특색 가운데 하나다. [경성성서학원]으로 출발하여 1940년 [경성신학교]로 교명이 바뀔 때까지 근 30년 가까이 성서학원이란 이름으로 존속했다. 한국에 이미 신학교들이 있었고, 장로교나 감리교가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결교회는 왜 학교 이름을 성서학원이라 했는가?

첫째, 표면적 이유는 [경성성서학원]의 모델이 된 것이 [동경성서학원]이었기 때문이다. 경성에 있는 성서학원이란 뜻에서 [경성성서학원]이라 한 것이다. 한편 [동경성서학원]의 모델은 [무디성서학원]이었다. 동양선교회 공동 창립자 카우만, 길보른, 나까다 주지가 모두 [무디성서학원] 출신들이었다. 그들이 [무디성서학원]을 이상으로 동경에 세웠던 학교가 [동경성서학원]이다. 따라서 [동경성서학원]을 본 따서 세워진 [경성성서학원]의 궁극적 모델은 [무디성서학원]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학교 이름을 성서학원이라고 한 근본적 이유는 자유주의적 신학을 배격하려는 창립자들의 의지 때문이었다. 이것은 미국의 성서학원운동과 입장을 같이 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신학교들의 자유주의화되었을 때, 이에 대항하여 성서적인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보수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들이 세운 학교가 성서학원이었다. 성서학원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었다. [경성성서학원] 창립자들과 초기 선교사들 역시 자유주의 신학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와 차별화하기 위해 성서학원이란 명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셋째, 학교 이름을 신학교라 하지 않고, 성서학원이라 한 것은 신학보다는 성경을 철저히 가르치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성서학원이란 명칭은 자유주의신학을 배격하는 것과 더불어 성경공부를 강조한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목적이 있었다. [경성성서학원]의 영어 명칭을 직역하면 "성경훈련원" (Bible Training Center)이었다. 그것은 성경공부를 통해 영적으로 수양하고 훈련하는 학교를 의미했다. 성결교회 창립자들과 초기 지도자들은 성서학원이란 명칭을 통해 그들이 성경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나타냈다. [경성성서학원]의 교과서는 오직 신구약성경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강의 과목 역시 성경이었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두 가르쳤다.

[경성성서학원]이 자유주의신학을 배격하고 성경을 강조했다는 것은 성서학원의 교육 정신을 통해서도 증거 된다.

한편, [경성성서학원]이 성경과 성서적 신앙을 중시하고 강조했다는 것은 성서학원이란 명칭뿐 만 아니라, 성서학원의 설립 목적에서도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성서학원은 "남녀 전도사를 양성하여 순복음을 동양 전체에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순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서학원 존재 이유였다. 그렇다면 순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학설이나 이론이 첨부된 것이 아닌, "순수한 성경말씀 그 자체"를 말한다.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성서적인 것을 뜻한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거나 성경이 증거하지 않은 교리나 해석은 순복음이 아니다.

성서학원과 성결교회가 전한 메시지는 순복음이었다. 초기 성결교회 지도자들이 순복음이란 용어를 특히 강조하여 사용했다. "순복음을 외치며," "동양선교회가 우리 조선에 순복음을 전한지.. ," "저로 말미암아 순복음을 듣게 되었으니." 이는 이명직 전학장의 성결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도 증거되고 있다.

이명직목사가 지적한 "순복음주의 정신"은 성경과 성서적 신앙을 강조하는 서울신학대학교와 성결교회의 이념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서울신학대학교의 성경관은 어떠했는가? 성결교회 1925년 신조를 제정하여 성서학원, 교회 및 신자들이 영구히 지킬 신경으로 삼았다. 따라서 성결교회와 성서학원의 성경관은 다름이 없었다. 이명직목사의 [성결교회 약사]에 따르면,

일제 말기에 해산을 당했던 성결교회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교회를 재건하고 헌법을 개정하게 된다. 이 재건 총회에서 제정한 성결교회 헌법의 경전에 대한 항목은 수정이나 개정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성경 해석 원리로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종교 개혁적이며 복음주의적 원리를 제시한 반면, 소위 역사 비평적 분석 방법을 배격했다.

한편, 이 성결교회의 입장은 서울신학대학교의 신조와 교육 이념을 통해 반영되었다. 1968년 당시 학장 조종남박사는 "서울신학대학 반세기"라는 [활천]의 특집 호에 게재된 "서울신대의 교육 이념과 특색"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성경에 관한 서울신학대학교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서울신학대학교 신조 중 한 항목이 "신구약 정전은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으로서 기독교신학의 권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준이 됨을 믿는다" 였다. 또한 그가 서울신학대학교의 특색으로 제시한 것이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에 대한 강조였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독교신학의 권위임을 전제로 하며 신학의 출발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연구에 많은 강조점이 두며 사변적, 철학적 접근이 건전치 못한 것으로 믿는다."이러한 견해는 1969년 제정된 서울신학대학교의 신조에 포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약하면, 성서학원이란 명칭은 근 30년 동안 사용된 서울신학대학교의 공식 명칭이었으며,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반면, 성경중심의 교육을 강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성서중심의 교육 이념은 학교 명칭뿐만 아니라, 학교의 교과목이나 교육정신을 통해서도 표출되었다. 성경을 철저하게 가르쳐 통달하게 하는 것이 서울신학대학교의 일관된 교육 목표였다.

2. 비교파주의

한국 성결교회는 교회나 교단이 아닌, 전도관 형태로 시작되었다. 즉 그것은 김상준과 정빈이 동양 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1907년 서울에 세운 복음 전도관에서 태동되었다. 그들이 전도관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은 동양 선교회의 정신과 영향 때문이었다. 동양선교회는 본래 어떤 교파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도 어떤 교리에 대한 불만으로 새로운 교리를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나 교단 설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불신자들에게 전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성결교회 창립자들 역시 새로운 교파를 세우거나 선교사업을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전도관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이것은 성결교회 헌법에 언급된 성결교회 사명에 관한 항목에서도 증거되고 있다.

복음 전도관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밤에는 길가에서 등을 들고 길을 밝히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한편, 찬송가를 불러 지나가던 행인들의 관심을 끌어 불러모아 놓고 전도했다. 그리고는 장소를 옮겨 그들을 전도관으로 다시 모아 복음으로 결심하게 했다. 낮에는 지난밤에 결심한 사람들을 심방하여 가까운 교회로 인도했다. 강근환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복음전도관은 소극적으로는 비교파적이고, 적극적으로는 초교파적인 매우 소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터 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며, 그것이 또한 성결교회 특유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한편 성결교회는 많은 부훙사들을 배출했다. 부흥사하면, 성결교회를 연상하기도, 성결교회하면 부흥사를 연상하기도 했다. 성결교회 목사는 다 부흥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초교파적으로 활동했으며, 그것은 서울신학대학교의 초교파적 교육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초교파적 교육으로 교파 사이의 우호관계가 깊어지고 복음전파의 기회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신학대학교 동문들이 자신이 속한 교단 교회에 성결교회 부흥사들을 초청하거나 소개했던 것이다.

서울신학대학교 역시 교단 신학교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는 교단의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했던 반면, 성결교회는 비교파주의적 전도자 양성을 위해 성서학원을 설립했다. 서울신학대학교는 "교파주의를 지양하고, 학교 문호를 개방하여 복음파 학생들을 받아들여, 졸업 후 자기 교파에 돌아가 목회를 하게 했다."

서울신학대학교의 개방성과 포용성은 그 명칭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경성성서학원에서 현재의 명칭에 이르기까지 학교 이름에 교단의 명칭이 표기된 적이 없었다. 해방 전에서는 경성이란 지역 명칭이, 그리고 해방 후에는 서울이라는 명칭이 포함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또한 서울신학대학교가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등 다른 교단의 신학교와 다른 것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하나 같이 교단 명칭을 학교 명칭에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서울신학대학교란 명칭 자체가 성결교회 창립자들의 비교파주의적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요약하면, 비교파주의와 포용성은 경성성서학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울신학대학교로 이어진 전통인 동시에, 그 장점으로 지적된다. 서울신학대학교는 체험적 신앙에 대한 강조와 철저한 성서 중심 교육을 통해 충분한 성서지식, 풍부한 개인전도 경험 그리고 분명한 체험을 소유한 목회자를 양성했다. 따라서 서울신학대교의 졸업생들은 성결교단 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에서도 인기가 있었으며, 각 교파의 유능한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하여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몇 년 전에는 서울신학대학교 출신들이 동시에 성결교, 감리교, 장로교의 교단장으로 활약한 적도 있었다.

3. 선교 지상주의

전도와 선교는 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의 존재 이유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결교회의 원초적 사명은 전도였다. 그것은 성결교회가 본래 복음전도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도 증거된다. 복음 전도관 이란 명칭은 복음을 전파하는 곳을 가리킬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가 그 근본 사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결교회가 전도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요 교회의 근본적 사명이라는 일반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웨슬리와 동양선교회의 선교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특별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동양선교회] 설립된 것은 웨슬리와 같이 "미신자에게는 진격적으로 전도하여 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동양선교회는 명칭 그 대로 복음을 전파하여 일본, 한국, 중국 비롯하여 동양 전체를 복음으로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다. 복음을 널리 전하는 전도에 주력하는 것이 동양선교회의 창립 정신이었다.

성결교회의 전통은 전도였다. 성결교회는 전도관이란 전도단체로 출발한 교단이라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도 전도요, 둘째도 전도였다. 성결교회는 천막 전도, 노방전도, 문서전도, 전도집회 등 전도에 열정적이었다. 그것은 타 교단에서도 칭송이 되곤 했다.

전도를 강조한 것은 성서학원도 마찬가지였다. 성서학원은 "남녀 전도사를 양성하여 순복음을 동양 전체에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성서학원은 설립 목적 그대로 전도와 선교에 교육의 중점을 두었다. 학생들은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직접 전도 활동을 했다. 또한 3개월간은 교실 수업을, 그리고 9개월간은 현장으로 나가 전도사역에 헌신했다. 수업 연한은 대개 3년이었으나, 교수회의가 전도자로서 자질이 있다고 판단하면 수학연한에 구애받지 않고 졸업을 시키기도 했다. 특히 1930년 대 성결교회의 부흥은 성서학원 졸업생과 재학생으로 이루어진 전도대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전국 각지에 교회가 개척되었다. 이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으로 집약된다. 이렇듯 성서학원 학생들의 수업 기간은 1년 중 3개월, 그것도 단지 오전 시간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시간은 현장에서의 전도 사역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당시 성서학원이 얼마나 전도를 강조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울신학대학교는 창립이래 "선교와 전도를 생각하지 않는 단 한 시대도" 없었다. 조종남 전학장은 19 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총회 시 보고를 통해 서울 신학대학의 존재 목적과 신학교육의 근본 목적이 모두 선교라는 것을 분명히 천명했다.

한편, 오늘의 서울신학대학교 역시 고도의 학문과 깊은 신앙 그리고 선교에 대한 전인격적 헌신을 가진 전도자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서울신학대학교의 교육 이념은 신학교육의 목적과 핵심이 선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신학지식과 신앙체험 및 생활의 조화를 이룬 헌신적 선교요원을 배출함을 교육이념으로 삼는다."

이 외에도, 1970년 서울신학대학 최초로 설립된 연구소가 [선교문제연구소]라는 것, 그리고 1972년 창간하여 현재까지 매년 1회씩 발간되고 있는 교수 연구 논문집의 제호가 [신학과 선교]라는 것 등은 전도와 선교에 대한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요약하면, 전도와 선교는 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의 근본적 사명이요, 존재 목적이었다. "철저하고 생생한 신앙적 체험과 이 체험을 바탕으로 한 불붙는 전도열"이 우리가 자랑하는 빛나는 전통이었다. 서울신학대학교는 선교중심적 신학교육을 통해 많은 복음적 전도자와 부흥사들을 배출했다.

4. 체험적 복음주의

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의 신학 노선과 입장은 무엇인가? 성결교회는 개신교 복음주의신학 위에 서 있다. 성결교회 헌법은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에서 믿는 교리와 신조는 기독교 개신교파가 일반으로 믿는 복음주의니 이는 신앙의 생명이며 골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명직목사는 성결교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신학사상은 인본주의로 흐르고 있는 중이라도 우리의 순복음주의정신과 목적은 변함없이 금일에 이르렀음"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했다. 한편, 서울신학대학교는 창립이래 자유주의 신학을 결코 수용한 적이 없으며 항상 복음주의 신학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 "서울신학 대학교는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의 정신과 교리에 입각하여 기독교 교역자 및 교회지도자를 양성하는 복음주의 교육기관"이라고 교육 이념을 통해 스스로 밝힌 정체성이 이를 말해준다.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고 다양하여,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그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나 복음주의를 좁은 의미로 정의하면, 체험적 복음주의와 교리적 복음주의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종교적 체험을 복음주의의 본질로 생각하여, 교리보다 경험을 강조한다. 반면, 후자는 복음주의를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토대를 둔 신학적 신념으로 정의하여 특정 교리를 복음주의의 징표로 생각한다. 체험적 복음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의 두 가문 가운데 루터의 열정적 신앙을 계승하여 17세기 경건주의 운동, 18-19세기 웨슬리 부흥운동과 대 각성운동 그리고 20세기 성결운동과 오순절 운동으로 이어지는 복음주의 흐름를 말한다. 반면, 교리적 복음주의는 칼빈의 지성적 신앙을 계승하여 17세기 정통주의 신학, 18세기 청교도신학 그리고 20세기 근본주의 및 보수주의신학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말한다.

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는 어떤 복음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가? 성결교회는 "바른 교리보다는 바른 삶과 체험적 신앙"을 강조한다." 따라서 교리적 복음주의보다는 오히려 체험적 복음주의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한국교회사가 민경배교수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와 성결교회"라는 제목의 글에서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이 어느 전통에 속하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성결교회가 체험적 복음주의에 속한다는 것은 이천영교수도 이미 지적한바 있다. "동양선교회의 신학은 알미니안계통의 웨슬레안 체험주의에 입각한 복음주의 신학이다. 메도디스트 신학 초시대 사상과 같은 계통이라 할 것이니 창립자 자신들이 모두 은혜감리교회 출신이요, 복음주의 무디신학교 출신이기 까닭이다."

성결교회의 체험적 복음주의가 어떤 것인가는 앞에서도 일부 인용한 있는 성결교회 창립 목적과 사명에서 발견된다.

성결교회의 체험적 복음주의에 포함된 중요한 요소들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신앙적 체험이다. 성결교회는 신앙체험을 통해 복음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성결교회는 내적 체험을 통한 영혼구원을 선교의 기본 전략으로 삼았다. 따라서 감정주의적이며, 부흥파적 열정을 지녔다. 이로 인해 초기 성결교회는 감정주의적 광신파로 취급되기도 했다. 한편, 서울신학대학 역시 체험적 신앙을 강조했다. 성서학원은 오직 성경을 교과서로 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묵시하신 말씀인 것을 하늘의 계시에 의하여, 체험에 의하여 고조하는 것을 교육 정신으로 채택했다. 그것은 신학 이론보다는 실습과 실천 중심의 교육을 중시했다. 철야기도회, 금식기도회, 학과를 전폐한 기도회, 새벽기도회, 부흥회, 천막기도회, 노방전도대, 순회전도대 등이 그것이다. 특히 성령세례를 받아 성결을 체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1921년 일어난 성결교회의 부흥운동은 성서학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명직교수의 신앙간증과 회개를 도화선으로 전교생이 15일간 금식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전국 교회로 확산된 것이다. "철저하고 생생한 신앙적 체험과 이 체험을 바탕으로 한 불붙는 전도열"이 "서울신학대학의 빛나는 전통"으로 간주되었다. 현재에도 서울신학대학교가 높은 학적 수준과 깊은 신앙체험 사이에 균형 추구를 교육 이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복음 체험에 대한 전통적 강조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둘째, 웨슬리 정신이다. 성결교회는 웨슬리가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성결교회가 성결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강조하는가는 교단 명칭을 성결교회로 한 것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또한 1925년 제정된 성결교회의 신앙개조는 웨슬리적 성경해석을 그 근원 중 하나로 삼았다. 즉 성결교회의 신조는 신약성서, 웨슬리적 성경해석 그리고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명직목사에 따르면, 성결교회의 교리나 정신은 순 초시대 감리교회와 다를 바 없다. 한편, 서울신학대학 역시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의 전통과 교리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 교육 이념과 신조 서두에서 명시하고 있다. 또한 "신학과 성서해석"에서 웨슬리 정신을 따른다는 것을 교육 이념으로, 그리고 웨슬리의 해석에 따라 믿음으로 중생하고 성결하게 된다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는 신학적으로 웨슬리 정신을 이어 받고 있으며, 특히 성결의 도리를 강조하고 전파하는 것이 그렇다.

셋째, 사중복음이다. 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사중복음으로 믿고 그것을 힘있게 전하기 위하여 창립되었다. 사중복음은 한국 성결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말해주는 표지요, 정체성 그 자체다. 사중복음을 강조하는 것이 성결교회가 다른 교단과 구별되는 차이점이요 특징이다. 성결교회 헌법은 성결교회가 창립 당시부터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대 표제를 고조하여 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사중복음은 동양 선교회나 성결교회 창립자들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동양선교회는 "초 시대 감리교 같이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을 고조한다"고 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천영교수에 따르면, 사중복음은 동양 선교회의 전도 표제인 동시에, 동양 선교회 창립의 네 기둥이었다. 또한 성결교회의 기초와 기둥이었다. 성결교회가 전도와 부흥운동은 물론 이단 방지에 앞장섰던 것은 사중복음 때문이었다.

요약하면, 서울신학대학교는 복음주의 기반 위에 철저한 성서교육, 체험적 신앙, 복음 선포에 중점을 두는 실용적 교육과 학풍을 통해 영성 깊은 목회자 양성에 좋은 성과를 이룩했다. 경성성서학원으로부터 시작된 서울신학대학교의 역사적 유산은 성서중심주의, 비교파주의, 선교지상주의 그리고 신학적으로 체험적 복음주의 등이다. 성서중심주의, 선교지상주의, 체험적 신앙주의는 복음주의의 전형적 특징에 속한다면, 비 교파주의는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의 특징에 속한다. 한국 성결교회는 18세기 웨슬리로부터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으로 이어지는 체험적 복음주의 신앙 노선 위에 서 있으며, 서울신학대학교는 이를 토대로 실용적 학풍 속에서 그 사명을 다 해온 것으로 이해된다.

 

II. 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적 과제

이제 서울신학대학교는 창립 90주년을 지나 100년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신학대학교가 21세기 첫 10년 간 학문적으로 정리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지적될 수 있으며, 그 타당성과 근거 또한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발제자는 지금까지 논의해 온 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적 유산과 관련하여, 세 가지 과제를 제시하려고 한다. 실용적 학풍의 회복, 웨슬리 정신과 신학 방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리고 성결교 신학의 정립이다.

1. 실용적 학풍

실제로 현장에 적용할 수 교육을 강조하는 실용적 학풍이 서울신학대학교의 전통인 동시에, 특색 가운데 하나였다. 성경 깊이 아는 목사, 설교 잘하는 목사, 기도 많이 하는 목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서울신학대학교는 철저한 성서교육, 열렬한 복음 전도,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며 이론 보다 실천, 신학 보다 신앙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목회자를 양성했다. 반면 신학 발전이나 학자 양성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특히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에 물든다하여 외국 유학이나 학자 양성에 부정적이었다.

한편, 성서학원 출신 목회자들은 일반적으로 단기전에는 능했으나, 장기전에는 약한 문제점을 노출하게 되었다. 극단적 예로, 성서학원의 교과과정은 1년에 3개월 공부, 9개월 현장 실습, 그리고 3개월 수업기간도 오전에는 성경공부, 오후와 저녁에는 전도와 부흥집회로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배출된 목회자들에게서 학적 수준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으며, 장기전에 임할 실력이 부족한 것은 당연했다.

경성성서학원은 1940년대 들어 창립이래 30년간 사용하던 학교 명칭을 [경성신학교]로 변경했다. 이것은 한국성결교회 지도자들과 한국인 교수들의 의지의 결과였다. 선교사들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된 후, 학교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들은 선교사들과 달리, 성서학원의 교육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종래의 실천적인 교육에 이론적인 신학교육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59년 신학대학으로의 승격은 서울신학대학 분위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학교육이 강화되고 학적 수준이 향상된 반면, 실천적 교육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미국 유학 출신 신진들이 교수로 임용된 반면, 목회 경험이 풍부한 기존 교수진 대부분은 대학 기준령에 따른 교수자격 미달로 퇴진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1968년 조종남학장의 취임과 더불어 서울신학대학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의 주도로 "높은 학적 수준"과 "깊은 신앙생활," "신학지식과 신앙체험 및 생활의 조화"를 이상으로 하는 서울신학대학의 교육이념과 신조가 제정되었다. 그것은 서울신학대학이 전통적으로 외면해왔던 고도의 학문과 높은 학적 수준을 지양하겠다는 표현이었다.

높은 학적 수준과 깊은 신앙생활의 조화를 교육 이념으로 정한지 30년이 지난 오늘, 서울신학대학교의 현 주소는 무엇인가? 누구도 서울신학대학교가 그 동안 학적인 면에서 큰 진전을 이룬 반면, 실천적 면은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던 실천적 교육과 소홀히 하고 외면하던 이론적 교육이 역전된 것이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목회 현장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졸업생들의 일반적 고백과 "서울신대에서 무엇을 배우고 왔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목회자들의 반응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될 수 있다. 최근 총장으로 취임한 최종진교수가 "학문성에 있어서는 성 서신학과 실천신학을 강화할 것이다," "특성화된 영성교육을 통해 한국에서 인정받는 학교가 되도록 하겠다" 등의 포부를 밝힌 것은 서울신학대학교가 현재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이다.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 교회에 봉사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서울신학대학교가 목회자 양성으로 초 교파적 명성을 날렸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 유산, 즉 실용적이고 실천적 학풍을 재 발견하고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높은 학문과 깊은 경건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한 쪽으로 기울어진 추를 바로 잡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2. 웨슬리 정신

최근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교수들은 다양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통해 대학의 학문 발전과 학적 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교수의 개별적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요, 교수간의 유기적 연대나 통합적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없다.

서울신학대학교 교육 이념은 서울신학대학교가 "복음주의 교육기관"이라는 것과 "신학과 성서 이해에 웨슬리 정신을" 따른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넓게 볼 때는 복음주의 관점에서, 그리고 좁게 보면, 웨슬리안 관점에서 성서를 이해하고, 역사의 의미를 밝히며, 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신학대학교 학문활동과 신학교육의 공동 기반은 한마디로 복음주의요, 웨슬리 신학정신이다.

그렇다면, 웨슬리 신학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건전한 지식과 살아있는 신앙심의 결합, 즉 높은 학문과 깊은 경건 사이의 균형 유지를 말한다. 웨슬리 정신에서 신학과 성서를 이해한다는 것은 웨슬리 신학방법론을 따른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웨슬리는 분명한 자신의 신학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신학적 이론보다 오히려 실천과 적용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할 때, 흔히 성경, 전통, 이성 및 경험에 호소했다. 웨슬리 연구가들은 이 네 가지 신학적 지침을 웨슬리안 4요소 또는 웨슬리안 사변형(the Wesleyan quadrilateral)이라고 부른다.

웨슬리는 자신을 기독교의 최종 권위를 성경에 두고, 성경에 쓰여진 말씀 외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성서적 기독교인," "한 권의 책의 사람"으로 불렀다. 그리고 여기에 보충적 권위로 전통을 존중했다. 왜냐하면 전통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하여 성경의 진리를 보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웨슬리는 이성을 종교적 권위의 근원으로 중시했으며, 그의 사고와 신학은 분석적이며 비평적이었다. 그는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다. 종교와 이성은 손을 맞잡고 간다"고 했다. 한편, 웨슬리는 기독교인의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성경과 경험이 합치되는 것을 기독교 최고의 진리로 간주했다. 웨슬리에게 있어, 신학의 네 근원, 즉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은 역동적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호의존적 사변형을 이루고 있다.

한편, 웨슬리는 "보편적 정신"(Catholic Spirit)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예후와 여호나답의 예를 들어 본질적인 것에는 분명한 일치를, 그리고 의견에 대해서는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형제가 연합하는 길임을 역설했다. 기독교 진리의 본질적 핵심에는 일치해야 하는 반면, 부수적이고 제2차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죄가 아닌 한,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웨슬리의 사변형과 보편적 정신은 웨슬리 정신에서 성서와 신학을 이해하는 방법과 틀이다. 보편적 정신 아래 성서, 전통, 이성 및 경험이 서로 균형을 이룬 신학 활동을 하는 것이 서울신학대학교 학문적 과제 중 하나다.

3. 성결교 신학 정립

지난 90년 동안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활동한 신학 교수들은 3 세대로 구분될 수 있다. 제1세대는 성결교회 창립자들과 초기 지도자들로, 신학과 교리보다 신앙과 실천에 관심을 더 가졌다. 그들은 성결교회 신앙 전통 형성에 기여했으며, 이명직 목사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반면, 그들의 신앙 체험을 충분한 확인이나 연구도 없이 웨슬리 또는 초 시대 감리교와 직접 연결시켰던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예를 들면, 4중 복음의 기원에 대한 이해가 그렇다. 이명직목사는 사중복음을 웨슬리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간주하고, 한국 성결교회를 초시대 감리교 같이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고조하기 위한 단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4중복음은 웨슬리나 초 시대 감리교로부터 직접 나온 것도, 그들이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4중 복음 혹은 4대 복음으로 강조한 것도 아니었다.

제2 세대 신학자들은 1 세대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 주로 미국에서 신학을 인물들이다. 현재 교수직에서는 퇴임했으나, 활동은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성결교회와 성결교회 신학의 정체성에 관심을 가졌으며, 서울신학대학교의 외형적 발전에 공헌했다. 이들은 성결교회에 웨슬리 신학은 소개했으나, 웨슬리신학과 성결교 전통 신앙의 조화라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일부 급진적 웨슬리파는 이명직 목사가 웨슬리의 신학사상을 잘 몰랐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가 웨슬리의 신학 노선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과 전통적 입장을 지지하는 성결교회 원로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3 세대는 오늘의 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의 신학을 주도하고 있는 현직 교수들이다. 이들은 이전 세대들이 이룩한 학문적 유업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비평적 분석을 통해 성결교 신학을 정립해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 성결교회는 소중한 신학적 자원인 근 백년 가까운 역사와 신앙 전통을 가지고 있다. 특히 관심을 기울이어야 할 유산은 한국 성결교회 특유의 신앙 체험이다. 이 체험적 신앙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 성결교회 신학의 정체성을 해명하는 출발점이며, 그 근원을 밝히는 것이 성결교회 신학의 맥을 재 발견하는 것이다.

한국 성결교회가 웨슬리 전통 위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면에서 웨슬리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신학과 성결교회 신앙적 체험 사이에는 일치하지 않는 것도 적지 않다. 이 단절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이다. 왜냐하면 한국 성결교회는 웨슬리와 직접 연결된 것이 아니라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과 성결교 전통적 신앙 가운데 어느 하나를 희생시키지 않고, 양자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미국 성결운동, 특히 만국 성결교회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동양선교회 창립자 카우만과 길보른을 비롯, 초기 동양선교회 선교사들 대부분 만국 성결교회 츨신들이며,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론

서울신학대학교의 90년 역사는 많은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쳐왔다. 학교 명칭 자체도 경성성서학원으로 시작하여 경성신학교로, 서울신학교로, 서울신학대학으로, 그리고 현재의 서울신학대학교로 바뀌었다. 학교 교정도 서울 무교동에서 시작하여 충정로로, 그리고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부천으로 이전했다. 외형적 변화 외에도, 전도자 양성에서 목회자 양성으로, 그리고 현재의 기독교 교역자 및 지도자 양성으로 교육 목적을 수정해왔다.

이 변화들은 역설적으로 서울신학대학교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울신학대학교는 전통을 그대로 답습만 하여 개봉도 하지 않은 체 후세로 전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통을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시대에 맞게 재구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서울신학대학교의 학문적 과제는 그 역사적 유산을 재평가하여 이 시대에 맞게 진술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결교회의 신앙적 체험을 웨슬리 정신에 입각하여 신학화하는 것을 말한다. 웨슬리 정신은 경직되고 폐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관용에 기초한 열린 사고를 말한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