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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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Moltmann 편,이신건 역,"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한들출판사) 중에서

 

나는 함부르크의 세속적인 교육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종교와 신학은 나와 사뭇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수학과 원자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막스 플랑크(Max Planck)와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나의 젊은 시절의 우상이었습니다. 1943년 7월 마지막 주간에 함부르크는 영국 왕실 공군부대의 '고모라 작전'에 의해 화염 속에서 파괴당하였습니다. 4만명의 사람들이 불타 죽었습니다. 학교급우들과 함께 나는 공군 지원단의 일원으로서 도시 내의 한 고사포 부대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파괴되었고, 내 옆에 있던 교우들은 폭탄에 산화하였지만, 나는 살아 남았습니다. 밤에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에게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나는 살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았습니까?라고 나는 물었습니다. 3년 간의 포로수용소 기간에 나는 우선 구약성 서의 탄식 시편에서, 그 다음에는 마태복음에서 해답을 구했습니다. 예수가 죽을 때 외쳤던 소리에 이르자, 나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버 림받은 너를 이해하시는 너의 신적인 형제와 주님이 계시다. 나는 실존을 지탱해 주는 지식을 추구하였고, 그 대신에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였습니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는 나를 깊이 동요시켰습니다.

영국 노팅엔(Nottingen)에는 개신교 신학자를 수용한 수용소, 노튼 캠프(Norton Camp)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포로로 잡힌 선생님들이 포로로 잡힌 학생들을 가르 치셨습니다. 1947년에 나는 신학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읽고 토론하였습니다. 우리는 와엠시에이(YMCA)의 보호를 받았으며, 영국 군대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포로의 실존적 경험, 즉 고난과 희망은 나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를 강화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희망의 용기를 갖게 되면, 사슬은 고통을 앓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매사가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체념보다는 고통이 더 낫습니다.

1948년에 나는 괴팅엔(Göttingen)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나는 한스-요하힘 이반트 (Hans-Joachim Iwand)의 감동적인 강의(전기공급이 되지 않아 촛불을 켜놓고 실시하는 강의)를 통하여 종교개혁자의 칭의론과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해방적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반트는 우리에게 신학적 열정을 일깨워 주셨습니다만, 학문적인 활동은 에른스트 볼프 (Ernst Wolf)와 오토 베버(Otto Weber)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서 나는 내 아내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토 베버는 우리 모두에게 박사학위 지도교수요 친구였습니다. 1952년에는 나도 학업을 마쳤고, 우리는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원래부터 어떤 교회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히틀러 제국 시절에 침묵하였거나 박수갈채를 보내었던 개신교회는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1934년에 바르멘 신학선언을 천명하였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혔던 고백 교회(Bekennende Kirche)만이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전후 (戰後)에 고백 교회는 오래 지탱되지 못했습니다. 1945년 이후에 아데나워 (Adenauer)와 디벨리우스(Dibelius) 감독이 히틀러와 '독일 그리스도인들'(Deutsch Christen, 역자주: 히틀러를 추종하면서 독일인종을 중심으로 교회를 재편하려던 교회 운동)도 막지 않았던 1933년의 낡은 관계들을 재건하였을 때, 나는 정치비판적, 교회비판적이었던 고백 교회의 추종집단, 즉 '형제단'(Bruderschaften)과 '개신 교 신학 협의회(Gesellschaft für Evalgelische Theologie)에 가담하였습니다. 그 당 시에 우리는 매우 바르트적이었고,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가 시도 한 '국가와 교회', '신앙과 시민사회', '종교와 자본주의'의 혼합을 거부하였고 '오직 그리스도만'과 평화봉사를 위한 철저한 제자도(弟子導)를 추구하였습니다. '원자폭 탄에 맞선 투쟁', '재무장 반대', '군사보호조약 반대'가 그 당시 우리의 구호였습니 다.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린 교회의 상황은 '중심의 상실'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의 중심'을 추구하였고, 배타적인 그리스도 중심주의자(오직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전후기(戰後期)의 정치적 가능성들과 문화적 도전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였을 때, 우리는 이처럼 좁게 이해된 바르트와 이러한 '바르멘 정통주의' 때문에 곤경에 빠졌습니다.

모든 '중심'은 하나의 '주변'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혀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궁지로부터 건져낸 것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편지 '저항과 복종'(1951년)이었습니다. 그의 지평확대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세상성'과 '종교가 없는 그리스도교'를 발견하였습니다. "헤겔(Hegel) 이후에 철학이 없듯이, 칼 바르트의 기념비적인 교의학 후에도 더 이상의 신학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썩 잘 말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 1957년에 나는 홀랜드의 신학자 아놀트 반 룰러(Arnold van Ruler)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를 이러한 오류로부터 고쳐 주었습니다. 나는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신학과 홀랜드의 사도직의 신학을 알게 되었습니 다. 바르멘-바써호스트(Barmen-Wasserhorst)의 목사로서 나는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신학으로 이르는 또 다른 문이었습니다.

1959년에 -나는 곧바로 부퍼탈(Wuppertal) 신학대학으로 부임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첫 신학저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지평 안에 있는 교회'(Die Gemeinde im Horizont der Herrschat Christi)를 발간하였습니다. 이 책은 단지 35쪽에 불과하였고,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어보노라면, 대부분의 후기 사상들이 이 첫 시작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메시야적인 차원, 땅에 대한 충실,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미래적 지평, 정치적인 신학과 세상적인 설교 등등입니다. 내 얼굴이 '창백해져야' 할까요?

1960년에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희망의 철학'(Das Prinzip Hoffnung)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스위스에서 휴가를 갖는 동안 이 책의 동독판으로 읽었습니다. 이 책에 너무나 매료되었기 때문에 나는 산의 경관을 감상할 틈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 즉시 받았던 나의 인상(印象)은 다음과 같은 것입 니다: 왜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자신의 가장 본래적 주제인 이 희망을 내팽개쳤는 가? 하지만 블로흐는 '성서의 출애굽과 메시야적 당파성'에 호소하였습니다(서문 17쪽). 하나님의 나라를 희구하던 원시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영은 오늘날의 제도적인 그리스도교의 어디에 존재합니까? 1964년에 내가 '희망의 신학'으로써 블로흐를 계승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또 바르트가 바젤에서 의심한 것처럼, 내가 그의 '희망의 원리'에 그리스도교적인 '세례를 베풀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제 위에서 양자를 서로 비교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블로흐가 현대의 포이어바하-맑스적 무신론을 희망의 근거로 생각했다면, 나는 성서에 나타 난 하나님의 역사(歷史), 출애굽과 부활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위한 그의 사회적 유토피아와 '억압당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위한 그 의 정의의 유토피아에다가 나는 종말론적 지평으로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추가하 였고,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안에서 죽음이 극복되는 가운데서 비로소 '동일성의 고향'(Heimat der Identität)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1967년에 튀빙엔으 로 옮겨왔을 때, 불로흐와 우리는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이웃이 되었 습니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1968년에 좌파 학생들을 매료시켰던 그의 신맑 스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 당시 나름대로 깎아내렸던 유대교적 메시야주의 였습니다.

1964년에 나는 '희망의 신학'을 흥미와 열정 속에서 썼습니다. 이 책은 내게 자유와 또 하나님의 '넓은 땅'으로 인도하는 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희망에 관한 신학이었는지 아니면 희망으로부터 생성된 신학이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소 유격은 이 둘을 다 허용하였습니다. 나중에 나는 희망이 신학의 주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책은 그 어떤 한 신학 진영(陣營)이나 많은 진영에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세속주의자들과 경건주의자들, 흑인 신학과 진보적 인 백인들, 프리메이슨 비밀 결사원들과 재림주의자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호스트 돌레(Horst Dohle)는 예리한 비평을 가했습니다. 이 책은 동독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도움이 안 되며, 너무 혁명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들의 모임에서는 벌써 '채 소화되지도 않은 몰트만'이 선전되었습니다. 그리고 몰트만은 '차라리 없느니보다 못하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19689년에 슈피겔(Spiegel) 지(誌)는 나를 '저항 의 아이들'의 하나로 분류하였습니다. '창백한 그리스도인들의 피에 칼을 들이대었 다'느니, '반항적인 희망의 신학'이니 하는 말로 나를 평가하였습니다.

1960년대는 전후기의 부흥으로부터 새로운 사건들이 터져나온 시기였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미국의 민권운동(Civil-Right-Movement),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간의 얼굴을 지닌 사회주의, 웁살라("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와 서독에서 빌리 브란트(Willt Brandt)가 주도한 정치('더 많은 민주주의 를 위한 모험')에 나타난 일치운동의 열정.

1967년에 밥티스트 메츠(Baptist Metz)가 그의 '세상의 신학'과 함께 등장하였으며, 한스 큉(Hans Küng)은 그의 해방적인 책 '교회'와 함께, 에베하르트 윙엘(E. Jüngel)은 그의 '하나님은 되어가심 가운데 있다'와 함께, 그리고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가 그의 '대리(代理)'와 함께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가 하나의 역사신학을 제시하였는데, 이로부터 '선취(先取)'의 사상이 발전되어 나왔습니다. 블로흐를 통하여 나는 바울 협회(Paulus Gesellschaft)가 주관한 그리스도교-맑스주의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67년 5월에 마리엔바트(Marienbad)에서 마지막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은 우리로 하여금 꽉 막힌 입장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전통들이 전혀 대답할 수 없었던 문제점에 직면하였기 때문입니다.

1968년은 새출발 분위기의 정점과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은 군대의 개입으로 말마암아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부끄럽게도 독일군대와 폴란드 군대도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군하였습니다.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은 교서(Humanae vitae)를 내려 교회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카톨릭 동료들이 자리를 잃었습니다. 4월 6일에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 저격당하였습니다. 흑인의 게토지역은 불에 탔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한 데모에서는 루디 두취케(Rudi Dutschke)가 총탄에 맞았습니다. 학생의 저항운동은 더 격렬해졌습니다. 나로서는 사회민주적으로 통일된 유럽에 대한 정치적인 꿈이 깨어졌습니다. 프라하의 종말은 몇 주간 동안 나를 마비시켰습니다. 그 당시 나는 '희망의 신학' 이후에 '희망의 윤리'를 쓰려고 하였습니다.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개혁인지 아니면 혁명인지를 나는 몰랐기 때문에, 이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치 신학'의 운동 가운데서 나는 '큰 대안'과 많은 '작은 대안들'로 구성된 이중전 략을 갖고서 전자를 위해서는 결사단체의 모델과 후자를 위해서는 세계교회의 모 델을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내게는 다양한 행동분야와 생활영역에 토대를 둔 세 부적인 지식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윤리'의 결실은 전혀 맺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나는 다시금 십자가 신학의 실을 붙잡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 위에 그리스도교 종말론을 세운 후에 나는 다른 측면, 즉 부활한 자의 십자가도 강조하여야 했습니다. 건강, 성공과 행운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들의 고난 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문화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임재 하셨다는 점을 회상시켜 주는 일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우셨다면, 그의 이름을 자신에게 붙인 교회는 권력자들과의 결탁을 끊어야 하며, 십자가의 그늘 안에서 사는 비천한 자 들과 연대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을 때, -나는 이 책을 말하자면 피끓는 심장을 가지고 썼습니다.- 나는 다시금 신학 전체를 하나의 초점에 맞추어 보게 되었습니다. 나로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리스도교 신학 의 근거와 비판'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슨 의 미를 갖는지는 충분히 논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질문을 뒤집었습니다. 그리 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을 위해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하늘의 무감정하신 하나 님은 골고다 상의 당신의 아들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초연한 체 침묵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이 고통과 이 죽음을 친히 겪으시는가?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실 수 없다고 고대의 형이상학적인 무감정의 공리(公理)는 신론(神論)에서 말하였습니 다. 그에 반해 나는 -물론 처음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고난을 당하실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그분은 고난 도 당하실 수 있으며, 그분의 피조물의 고난에 참여하십니다. 그래서 골고다는 우 리에게 열정적인 하나님의 고난의 계시가 됩니다. 이러한 노선을 따라 가다가 나 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 헤셀(Abraham Heschel) 은 '하나님의 열정'에 관한 사상으로써 유대교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해석하였습니 다.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는 하나님의 내주(內住: Schechina) 안에서 그분의 백성과 함께 길을 가시고 고난을 함께 당하시는 분을 발견하였습니 다. 일본 신학자 키타모리는 1966년에 '하나님의 고통'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1944년에 감옥 안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 니다. "오직 고난당하시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 영국에서는 19세기와 20세 기에 '하나님의 수난가능성과 수난불가능성'에 관해 격렬하게 논쟁된 적이 있습니 다. 독일 신학은 이를 알지 못하여,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1972년에 출판되었으며, '아우슈비츠 이후' 독일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해답을 주려는 나의 시도도 있었습니다. 나는 형성되기 시작한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 특히 혼 소브리노(Jon Sobrino)와 긴밀하게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루마니아의 정교회 신학도 나에게 동의를 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투쟁하며 고난당하는 한국교회와 태동하기 시작한 민중 신학,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수난 신학자들의 십자가 신비주의와도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겪는 하나님 경험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습니다. 순교자들의 감옥과 신비주의자들의 수도방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학문적인 비판은 다시금 내가 '일방적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논쟁적이고 대결적인가를 지적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과 여성신학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가학적-피학대적인 하 나님'에 관해 떠도는 이야기가 생겨났습니다. 내 눈 앞에는 다른 모습이 펼쳐져 있 습니다. 1989년 11월 16일에 산살바도르 대학교에서 여섯 명의 예수회 소속 회원 과 두 명의 부인이 잔인하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군인들은 형제 레이몬 모레노 (Ramon Moreno)의 주검을 혼 소브리노가 나가고 없던 방에다 끌어다 놓았습니다. 그의 피 가운데서 책 한권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El Dios Crucificado)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지금 그 책이 형제들과 자매들의 순교의 상징으로서 유리 상자 안에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나의 생애의 또 다른 전환점으로 뛰어넘고자 합니다. 1977년에 멕시코 시티에서 해방신학자들, 흑인신학자들, 여성신학자들이 함께 모인 한 모임에서 나는 내가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억압당하는 자가 아니고, 흑인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해방운동을 지원할 수 있고,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힘닿는 데까지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튀빙엔의 많은 학생들과 지구 각지로의 여행은 나에게 많은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여성 신학, 특히 그 사회심리적 출발점은 내가 의식한 것보다 더 강하게 내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했나요? 그 당시 나는 정규적인 조직신학의 과제를 생각하게 되었고, 1980년부터 1995년부터 일련의 '신학을 위한 체계적 저술'을 썼습니다. 나는 나의 '일방성'을 극복하려고 하였 으며, 신학의 묵은 문제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이 전처럼 논쟁적이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1. '풍부한 관계를 맺으시는 하 나님'에 관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썼고, 2. 위태로운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사바 트(안식일)적인 창조론을 썼으며, 3. 길의 그리스도론, 길 위의 그리스도론을 썼으 며, 4. '활력'(élan vital)으로서의 '생명의 영'에 관한 책을 썼으며, 그리고 5. 종말에 이루어질 새로운 시작에 관한 그리스도교 종말론을 썼습니다.

다섯 권의 책을 다 쓴 다음에는 방법론에 관해서도 한 권의 책을 쓸 예정입니다. 방법적 성찰은 마치 강연을 앞두고 맑은 목소리를 내려는 헛기침과 같은 것이라고 어느 미국인이 말하였습니다. 청중을 잃을 때까지는 나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항상 신학 내용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나는 짤막하게만 '헛기침하고' 싶습니다.

1. 신학적 진술들은, 개인적 경험이든 집단적 경험이든 간에, 자신의 경험에서 혹은 낯선 경험들을 이입(移入)하는 가운데서 검증될 수 있어야 합니다. 경험은 실천을 포함합니다.

2.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신학적으로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내용을 하나님 자신에게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은 기도와 탄원과 찬양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3. 내게서 신학은 처음부터 불확실하게 출발하는 하나의 모험이었으며, 신비의 초대에 응하여 사상을 발견해 나가는 여행이었습니다. 나의 신학적 미덕은 겸손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호기심과 환상일 따름이었습니다.

4. 우리는 유럽에서 풍부한 교파적인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루터가 말했다시피,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훨씬 더 풍부한 범교회적인 미래를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전통을 갖고 씨름하는 일은 세계적이고 범교회적인 사귐에 가담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