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어온 신학의 길

 

J. Moltmann , 이신건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나의 신학의 구상(構想)"을 직접 설명해 달라는 발행인의 즐거운 요청은 나를 곤경에 빠뜨린다. 사람은 많은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자기 자신과 "그의 신학"의 내적인 동기들을 알겠는가? 이전의 신학자들과 동시대의 신학자들의 신학적 구상을 연구하고 설명할 때도, 이미 객관성과 그들의 관심을 나누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자신을 설명하자면, 객관성과 주관성이 얼마나 더 많이 뒤섞이겠는가! 자신의 신학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논의에 부치려고 하다 보면, 사람은 원래 자신을 넘어서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면, 그런 구상은 더 이상 전적으로 자신의 구상이 되지 못하고 만다. 그는 이미 자신을 자기 자신과 구분해 버린 셈이다. 실로 사람이 자신의 신학적 구상에 관해서 스스로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은 매우 제한되어 있고, 자신의 정체성에 의해 윤색되어 있으며, 그래서 끝내는 대개가 특별히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에 더 많은 적성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혹은 불트만이 자신들의 신학에 관하여 20 내지 30쪽의 분량으로 친히 설명해 놓은 것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들에 관하여 전기(傳記)를 쓰려는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자기설명에 오래 집착하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것을 그들의 여러 다른 신학견해들 중의 하나로 간주할 것이고, 자기가 스스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가 어떻게 신학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어떻게 나의 저서들에서 대변되는 신학에 이르게 되었는지, 내가 어떤 길을 걸어 왔으며 또 계속 걸어가려고 의도하는지, 길이 막혀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했던 어떤 갈림길 위에 내가 서 있었는지, 그리고 내가 이 길과 갈림길 위에서 어떤 목표를 추구했는지를 설명하려고 애쓸 때에만, 나는 이 요청 때문에 빠진 곤경에서 헤어나올 수 있을 것이다.

또 발행인이 내게 요청한 것은 "개인적인 동기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요구는 내가 한 번도 처해 보지 못했던 개체성의 고독 안으로 밀어 넣는다. 한 인간이 개성에 맞게 몸소 계획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평범한 시대에서나 허락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삶의 사회적 제약들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역사적인 상황은 그로 하여금 평화롭게 자신의 개인적인 길을 갈 수 있게 하며, 신학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동기"를 추구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이러한 개인적인 자유가 보장된, 역사의 은혜를 입은 그러한 세대에 속하지 않는다. 나의 개인적 생애는 매우 고통스럽게도 지나간 제2차 세계대전 시대의 독일 백성의 집단적 생애와 그 이후의 기나긴 포로생활에 의해 결정되었고, 교차되었으며 또 철저히 변화되었다. 나의 신앙과 사고뿐만이 아니라 "나의 신학"의 "개인적인 동기"도 내 세대가 경험한 죄책감과 고난의 집단적 경험 안에 함께 묻혀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늘 날에도 역시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사회적-집단적인 "동기"에 대한 참여에 의해 결정된다.

나는 이 점을 짤막하게 생애와 관련시켜서 설명하련다. 16살이 되었을 때,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것은 수학과 원자물리학이었다. 나는 함부르크의 한 자유주의적-프로테스탄트적인 가정 출신이었고, 선천적으로 "검은 책" 성서보다는 레씽, 괴테와 니체를 더 좋아했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나와 동떨어져 있었다. 17살이 되던 1943년에 나는 군인으로 징집되었고, 1943년 7월에는 도시 안의 한 고사포 중대에서 함부르크가 화염 속에서 파괴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1944년에 나는 전선으로 나갔고, 1945년에는 전쟁포로가 되었으며, 3년 후인 1945년에 풀려났다. 벨기에와 스콧틀랜드의 포로수용소에서 나는 생의 확실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했고, 이 가운데서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희망을 경험했다. 이 신앙은 정신적 생존만이 아니라 아마도 육체적 생존까지 내게 선사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희망은 절망과 자포자기로부터 나를 건져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되돌아 왔고, 내게 생명을 선사한 희망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하여 신학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새로운 "개인적 동기"를 갖게 되었다.

나로서는 그리스도교 희망이 원초적으로 특정한 생활상황의 경험과 결부되어 있으며,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상황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상황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밖에서 본다면, 내게만 속해 있는 개인적 사안으로 보일지 모르는 일이라도, 안에서 본다면, 처음부터 그리고 항상 집단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의 동료, 친구와 친척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찢기고 총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에게 외칠 수 밖에 없는 자는 자신의 신학에서 더 이상 단절된 개인적 동기를 갖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그의 문제가 된다. 아니 이것보다 더 그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없는가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면, 아우슈비츠 이후에 도대체 우리가 무엇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말인가?! 침묵하는 것은 결코 구원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다른 잡담은 중압감을 해결하는 방편이 결코 되지 않는다. 나의 세대를 짓누르는 죄책감과 섬뜩한 무감각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후부터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래도 하나님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의 신학작업의 뿌리가 되었던 것 같이 생각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해 곰곰이 생각할 때마다, 나는 늘 거듭 이 아포리(難題)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나의 신학적 동기에 관한 또 다른 "추측"은 더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성서와 교리문답과 함께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나를 위해서 신학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는 느낌을 지금까지도 갖고 있다. 희망의 이론인 종말론, 십자가의 신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위일체론은 내게 이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괴팅엔에서 특히 한스-요하힘 이반트(Hans-Joachim Iwand), 에른스트 볼프 (Ernst Wolf) 그리고 오토 베버(Otto Weber)에게서 배운 후 나는 목사가 되었고, 브레멘-바써호스트(Bremen-Wasserhorst)의 작은 시골교회에서 5년 동안 목회했다. 그리고 1958년 이래로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학의 선생이 되었다. 이것은 가르쳐야 하는 교수의 모습 아래 설교하고 상담하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목사가 여전히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게 의미한다. 이 추측이 옳다고 한다면, 나의 신학교수 생활에서도 올바른 말보다는 오히려 여기서 지금 적합한 말이 더 중요하고, 정확한 가르침보다는 차라리 구체적인 가르침이 더 중요하며, 순수한 이론보다는 실천적인 이론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것은 어느 정도 말해 준다. 아마도 내게는 설교와 목회과제에 무관심했던 동료들처럼 설교단과 강단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던 것 같다.

내가 정치적으로 자제하려고 애썼을 때, 신학이론과 정치참여의 엄격한 분리도 내게는 항상 어려웠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정치적 지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전쟁 중에서 오로지 무의미한 죽음으로만 내몰리던 나의 세대처럼 정부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은 사람은 비정치적인 학문의 상아탑 속에서만 안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괴팅엔에서 신학을 시작할 때부터 신학의 정치적 제약성과 정치적 책임성을 깨달았다. 내게 이 점을 깨우쳐준 사람은 분명히 나의 첫 스승 한스-요하힘 이반트이다. 내게 고마운 또 한 사람은 괴팅엔 대학에서 함께 신학을 수업할 때 알게 된 나의 아내이다. 그녀는 포츠담의 고백교회의 한 공동체 출신이었으며, 함부르크 가정의 순진한 이상주의에 물들은 나보다는 훨씬 더 정치적 저항에 민감했다.

이로써 나는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나의 "개인적인 동기"를 설명해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마지막으로 반박하려고 한다. 괴팅엔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의 아내를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아마도 더 이상은 "개인"이 아니지 싶다. 우리의 생활 공동체는 신학적인 대화로써 시작되었고, 그 이래로 우리의 결혼생활은 늘 신학적인 대화로 이어졌다. 이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결혼생활은 친구의 사귐과 같이 깊어졌고, 혼자서 그리고 더불어 다른 것을 늘 새로이 발견해 가는 긴장에 찬 생활이 되었다. 이것은 물론 내가 "나의" 신학저서들에 대한 책임을 나누고 싶고 이를 한 파트너에게 전가하길 원한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나의 신학활동의 원천이 되었던, 계속적이고도 근본적인 대화 공동체를 지적하고 싶다. 이 공동체를 빼놓고서는 나의 신학활동은 이해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내 아내의 한 저서의 제목이 말하는 "하나의 독자적인 인간"이 되며, 그 자신의 생각을 펼치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길을 존중하며, 그의 발걸음과 동행한다. 이것은 아마도 사회성 속의 개체성이고, 개체성에 의한 사회성인 듯 싶다.

이제 나의 신학의 방법을 세 가지 관점 안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1.하나의 초점에 맞춘 전체 신학

이 방법을 나는 저서 "희망의 신학"(München, 1964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München, 1972년),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München, 1975년)에서 사용하였다.

2. 운동, 대화 그리고 갈등 속에서 형성된 신학

내가 참여한 60년대의 그리스도교-맑스주의의 대화는 나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고,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와 함께 "정치신학"을 결실로 맺었다. 1963년 이래로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를 위한 위원회의 회원으로 참여한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를 계기로 나는 특히 로마에서 이루어진 개신교회-카톨릭 교회의 대화와 특히 부카레스트에서 이루어진 서방교회-동방교회의 대화에 열심히 관여했다. 핀카스 라피데(Pinchas Rapide)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리고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와 게르숌 숄렘(Gerschom Scholem)의 저서들의 연구를 통하여 나는 그리스도교-유대교의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끝으로 나는 강연여행을 통하여 나누어진 이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갈등을 접하게 되었다. 제2세계에 속한 헝가리와 루마니아 출신 신학자들과의 대화, 제3세계에 속한 한국, 대만, 필리핀과 라틴 아메리카 출신 신학자들과의 대화는 특히 흥미를 일으켰고, 나를 매우 동요시켰으며,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객원강의와 객원교수직을 통하여 미국의 신학자들과 신학경향을 접하면서, 그 속에서 사고하려고 노력했다.

3. 전체 신학에 대한 기여로서의 한 부분

1977년과 1978년 어간에 대화를 통한 참여활동을 스스로 비판하고 능동적으로 이와 결별한 후, 이제 그 다음 단계에서 나는 나 자신의 "조직신학을 위한 기여"에 몰두하였다. 나는 더 이상 전체 신학을 하나의 실제적인 초점에 맞추어 설명하지 않고, 전체 신학에 대한 기여로서 나의 신학의 한 부분을 제시한다.


1. 하나의 초점에 맞춘 전체 신학

a) 희망의 신학(1964년)

내가 이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1964년에 출간된 "희망의 신학"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원래 내가 의도한 것은 그 시절에 잡지 "Evangelische Theologie"(개신교 신학)에서 이루어진 "약속과 역사"에 관한 논의에 대해 나의 입장을 표명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여기서 나는 게하르트 폰 라트(Gehard von Rad), 발터 침멀리(Walter Zimmerli), 한스-발터 볼프(Hans-Walter Wolff), 한스-요하힘 크라우스(Hans-Joachim Kraus) 등에 의해 대변된 "구약성서신학"과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에 의해 세워지고 특히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에 의해 수정, 발전된 "신약성서신학"을 중재하려고 했다. 앞에서 거론한 구약성서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에 있었다면, 불트만의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과 신앙 안에서 실천된 "역사의 종말"의 현재적 종말론에 의해 규정되었다. 에른스트 케제만은 이를 다음과 같은 그의 도발적인 테제로써 문제삼았다: "묵시문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어머니이다." 그가 말한 "묵시문학"은 물론 세계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에 관한 사변이 아니라, 언제 하나님이 그의 나라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될 것이며, 언제 그의 정의가 세계 안에서 승리할 것인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이 "역사의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미 현재하는 것도 결코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

나 자신의 신학사상은 괴팅엔 대학에서 발터 침멀리와 에른스트 케제만에게서 배운 내용을 통하여 이미 이런 방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홀랜드의 신학자 아놀트 반 룰러(Arnold van Ruler)를 통하여 나는 "사도직의 신학"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이 "종말을 바라봄"(Walter Freytag)으로써 메시야적인 동기를 갖는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의 책 속에서 나는 종말론적 희망과 역사적 실천의 이러한 상관관계를 다루었다.

그 후에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희망의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1960년에 일어났다. 나는 스위스에서 휴가를 갖는 동안에 "희망의 원리"(Prinzip Hoffnung)를 동독판으로 읽었고, 이 책에 너무나 매료되었기 때문에 스위스 산의 경관을 감상할 틈도 갖지 못했다. 그 즉시 받았던 나의 인상(印象)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자신의 가장 본래적 주제인 이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원시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영은 오늘의 그리스도교 어디에 남아 있는가?

나는 희망의 "신학"에 착수했다. 나는 성서의 약속의 신학과 묵시적 희망의 신학, 사도직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신학, 유물론적 성분을 지니고 있고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는 희망의 철학을 서로 결합하였다.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를 계승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나는 그를 추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에 칼 바르트가 바젤에서 의심한 것처럼, 내가 그의 희망의 원리에 그리스도교적인 "세례를 베풀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그 자신의 전제를 근거로 삼아 비교해 보려고 했다. 블로흐가 현대적인 무신론만을 희망의 근거로 생각했고, "무신론이 없다면, 메시야적 희망도 없다"는 테제를 제시했다면, 나는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켜서 세계의 미래의 주님으로 삼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 블로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위로를 받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철학적으로 다시 복권시켰고, 그래서 "억압당하고 멸시받는 자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정의의 유토피아를 실천하려고 했다면, 내게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희망과 성서적인 하나님 증언에 기초한 기다림이 중요한 것이 되었고, 사회적 유토피아와 정의의 유토피아를 수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물론 우리의 논의는 자주 단순한 양자택일로 빠졌다: 블로흐는 초월성이 없이 초월하고, 나는 초월성을 지니고 초월한다. 블로흐는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희망하고,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희망한다.

"희망의 신학"에 착수할 때, 나는 중세기의 "사랑의 신학"과 종교개혁 시대의 "믿음의 신학" 다음으로 희망, 그 근거와 그 미래, 그 경험과 그 실천, 즉 - 지금껏 실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 그리스도교 신학의 대상을 우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는, 임마누엘 칸트가 천명한 것처럼, 현대의 유일한 종교적 질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의 신학은 현대적인 신학이다. 하지만 책을 써 내려가는 중에 내게는 희망이 점점 더 강하게 신학의 주제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희망에 관하여 신학하지 않고, 희망으로부터 신학했다. 신학적으로 희망으로부터 사고한다는 것은 신학 전체를 이 초점에 모아서 이 희망의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종말론적인 것은 그리스도교에 덧붙여 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매개체이고,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음색이며,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기대되는 새 날의 여명의 빛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학은 그 미래의 목표로부터 생각되어야 한다. 종말론은 그 마지막이 아니라 그 시작이어야 한다"(12쪽). 그러므로 종말론(마지막 일들에 관한 이론)만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역사를 거쳐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의 모든 이론들은 다르게 나타나며, 새롭게 반성될 수 밖에 없다. 나의 "희망의 신학"은, 그 당시의 역사의 경험, 그리스도교적 역사이해와 역사적 실천과 관련을 맺으면서, 나의 전제들과 가능성의 틀 안에서 이러한 일을 해내었다: "신앙이 희망으로 나타날 때면, 언제나 신앙은 잠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게 하며, 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자는 더 이상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고난당하며, 이에 저항하기 시작한다"(17쪽).

그러나 자연철학이나 자연과학과 관련된 창조론 분야는 아직까지 새롭게 형성되지 않았다. 에른스트 블로흐가 기꺼이 받아들였던 "우주적 종말론"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1245쪽) 외에는 "희망의 신학"에서는 그것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당시의 나는 묵시적 종말론에 나타난 "우주의 역사화"를 생각했다. 나는 하늘과 땅의 새 창조, 즉 요한 계시록 21장으로부터 창조론을 구성하려고 했고,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더 이상 창세기 1장으로부터 창조론을 구성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1964년에는 "생태학적 위기"가 아직 내 의식 속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 당시의 우리는 여전히 역사의 충격 때문에 더 경악하였고, 그 가능성에 더 사로잡혔다. 1985년에 이르러서야 나는 1964년 이래로 내게 절박한 것으로 느껴지던 창조론을 출간할 수가 있었다.

1964년에 희망, 새출발이라는 주제는 말하자면 이제 막 떠오르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위해 문호를 개방했다. 미국에서는 민권운동(Civil-Right-Movement)이 극에 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교회일치운동은 큰 진보를 이룩하였다. 이전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많은 것들이 60년대에는 가능해졌다. 그러나 1968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희망으로 인해 쓴 환멸을 맛보았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희망의 신학"의 한 가지 사상이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점, 즉 "창조적인 제자도(弟子道)"의 관점 안에서 역사적 해방과 종말론적 구원을 함께 보는 시각이었다: "종말론은 악한 세계로부터의 영혼의 구원, 개인적 구원, 시련당한 양심의 위로만을 뜻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정의의 희망의 실현, 인간의 인간화, 인류의 사회화, 온 피조물의 평화를 뜻하기도 한다"(303쪽). "그리스도교의 희망이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미래를 바라봄으로써, 사귐을 창조하고 정의를 구현하며 질서를 형성하는 사랑 안에서 창조적인 제자도가 종말론적으로 가능해진다"(309쪽). 요한 밥티스트 메츠가 60년대에 이루어진 그리스도교-맑스주의의 대화 속에서 발전시킨 정치신학은 이 영향을 받았다. 제임스 콘(James Cone)이 미국의 억압받는 흑인들의 인권 운동(Black Power Movement)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한 흑인신학은 이 사상을 수용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츠(Gustavo Gutiérrez)의 해방신학도 역시 이런 노선으로 기울었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이 관점 안에서 예수의 민중(오클로스)을 하나님 나라의 민중으로 발견했다. 나는 채 알지 못했지만, 많은 영역에서 이러한 역사적-종말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새로운 실천적 장(場)들이 발견되었다.

교황 바오로 2세가 1983년에 니카라과를 방문했을 때, 그는 사제들에게 백성의 정치적 해방운동에 참여하지 말고 백성이 영생을 얻도록 도울 것을 권고했다. 이러한 양자택일을 그 당시의 우리는 그릇되다고 선언했다. 나는 영생을 믿기 때문에, 백성의 삶을 위해 투신하게 된다. 나는 치명적인 억압권력에 맞서서 싸우는 백성의 저항에 참여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다. 여기서 "종교적으로 단지 영생만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세속적으로 단지 이 세계의 변혁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나누는 자이다.

b)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년)

그리스도교 희망의 신학적 근거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부활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신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는 자는 항상 다시금 이 근거의 다른 측면, 즉 부활한 자의 십자가를 회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희망의 신학"의 그리스도론적 출발점의 논리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소 지려고 할 바로 그때에 "창조적인" 것이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도 실천으로부터도 나왔다. 그러므로 나는 1970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신학이 형성되어 감에 따라 나는 이전보다 더 강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학, 교회와 사회에게 던져 주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성공과 행운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눈이 어두운 문화 속에서, 실패하고 고난당한 그리고 수치스럽게 죽어 간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회상시켜 주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 눈을 떨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일으켜 세계의 희망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회상시켜 주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권력자들과의 결탁을 끊도록 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연대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Umkehr zur Zukunft, 1970년, 14쪽).

나는 "희망의 신학"에서 의도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다시금 시도했다. 즉 나는 전체 신학을 하나의 초점, 즉 십자가에 모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관점 안에서 신학의 많은 내용들을 이전과 달리 보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게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거와 비판"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 앞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신학이다. 여기서 견디지 못하는 것은 신학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 점은 그리스도교적인 하나님 진술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마가가 시편 22편의 구절로 해석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죽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당한 그리스도의 이 외침은 모든 신학의 종말이든지 아니면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신학의 시작이다. 모든 신학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앞에서 욥의 친구처럼 서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버림당한 신학적 이유를 말함으로써, 신학자들은 모두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버림당한 그리스도의 외침이 신학의 비판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거는 신학자들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이러한 하나님 경험을 그들의 모든 하나님 사고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그 당시의 나는 루터가 1518년의 하이델베르크 신앙논쟁을 위한 주제들 속에서 기초한 십자가의 신학(theologie crucis)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능력과 영광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라는 반대형상 아래서(sub contrario) 불경한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며, 이렇게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 그러나 나는 질문을 뒤집어 보았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가 그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 자신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다. 골고다 위의 아들의 죽음과 결합되어 있고 그 안에서 계시되는 아버지의 깊은 고난을 깨달음으로써,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았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의 고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난받는 하나님의 표상은 하나님의 불사성(不死性)과 함께 그의 본질적인 고난불가능성(무감정)도 가르쳐 온 서방의 신학전통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성서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인 이러한 무감정 공리를 극복하기 시작했을 때,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나는 전혀 꿈도 꾸지 못했다. 첫 번째의 발견은 하나님의 열정에 관한 유대교적 표상이었다. 아브라함 헤셀(Abraham Heschel)은 이 표상을 갖고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해석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랍비들과 카발라 신학이 가르친 하나님의 쉐히나(Schechina), 즉 하나님이 박해당하고 고난당하는 백성 이스라엘 안에 내주한다는 표상이다.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는 "구원의 별"에서 이를 설명한 적이 있고,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도 이를 설명한 적이 있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십자가 신학을 발전시켜 나감에 따라, 나는 이스라엘 안의 하나님의 수난사를 가르치는 유대교 신학에 접근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그리스도론"이라고 사람들은 종종 말했다. 내가 내 세대 위에 드리운 아우슈비츠의 그림자 안에서 골고다를 깨달았고, "아우슈비츠 이후의 유대교 신학"에서 도움을 받은 한, 이 말은 옳다.

더욱이 나는 전쟁 말엽에 "하나님의 고통"을 발견하고 이로써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넘어선 일본 신학자 카초 키타모리에게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발견하였다. 그 당시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도 역시 감옥 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내 책이 출판된 지 몇 년 후에야 나는 스페인의 철학자요 시인인 미구엘 드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에게서 "하나님의 근심"의 이론을 발견했고,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니콜라이 베르쟈예프(Nikolai Berdjajew)에게서 "하나님 안의 비극"의 표상을 발견했다. 나는 나의 책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년)에서 이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렇지만 나를 더 크게 놀라게 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에 영국에서 이미 하나님의 수난가능성에 관한 상세한 공개적인 논의가 있었다는 발견이었다. 친구 바론 폰 휘겔(Baron von Hügel)을 통해서 이를 알게 된 에른스트 트뢸취를 제외하고는 대륙의 신학은 온통 이 논의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이온 소브리노(Ion Sobrino)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심화시킬 때, 나의 십자가의 신학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론만으로가 아니라 직접 겪은 고통을 통해서도 형성된 그의 십자가의 신학으로부터 나는 배웠다.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며 고난당하는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의 번역된 글들을 통하여 나는 그들과도 친밀한 사귐을 나누었다. 놀랍게도 정교회 신학의 진영에서 나의 생각에 동의한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드미트루 스타닐로에(Dumitru Staniloae)와 게바르케세 마르 오스타티오스(Geevarghese Mar Osthathios)이다. 그들은 나를 매우 감동시켰다. 또한 십자가의 신비를 위해 특별히 수행하는 카톨릭 교회의 수도회와도 연결되었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겪는 하나님 경험에 대한 관심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한 비판은 "희망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일방성에 대한 비판이다. 몬댕(B. Mondin)에 의하면 이 책은 "일부러 그리스도의 한 가지 신비, 즉 십자가의 신비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로흐만(J. M. Lochmann)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나님은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만은 아니다." 이러한 "일방성"은 분명히 방법론이기 때문에, 나는 "희망의 신학"에 대한 논쟁서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이 책에 나타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방성'을 다른 신학자들, 다른 신학들과 갖는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의 인정과 표현으로 이해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 무엇을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빙점(氷點)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이 책은 비현실적으로 모든 측면을 다 포용하려고 하지 않는, 그래서 모든 방면에 영향을 주려고 하지 않는, 열린 대화를 위한 하나의 기여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한 논쟁서에도 나는 다시 한번 더 이 비판에 대한 나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일방성'이 미리 선택한 주제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나는 신학의 전체를 그때마다 하나의 초점으로부터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면 물론 지나친 강조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신학의 다른 교설들이 새롭게 조명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들로써 모든 면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신중하게 판단하고 지혜를 만족시키는 신학 교과서를 쓸 계획도 아니었다. 이 책들을 가지고 나는 그때마다의 정신적, 신학적, 정치적 상황에 대해 특별한 그 무엇을 말하려고 했고, 그 어떤 편을 들었다. 그것들은 시대로부터 시대를 위하여 쓰여졌고, 실로 현재적인 삶의 상황과 갈등 안에 있는 신학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는 시대를 초월하는, 순수하고도 정선된 학문적 이론의 의미를 배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론이 주어진 시간(카이로스)의 상황 안에 있는 신학보다 더 영원에 가까운 것만도 아니다. 지나간 20여 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고독한 학자로서가 아니라 신학운동과 신학논쟁의 참여자로서 느끼면서 신학활동을 했다. 이 사실은 내가 받은 영향들과 그에 대한 나의 반응들의 다양성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줄 것 같지만, 이 때문에 나의 신학을 연구하는 많은 박사후보들은 짜증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c)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출간된 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교회와 성령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 "이 일이 필요했는가?"라고 많은 친구들과 비판가들은 물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1. 십자가의 신학에 대한 연구는 나로 하여금 삼위일체론을 재구성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골고다에서 예수와 그가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나는 오로지 삼위일체론적으로만 파악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삼위일체론의 실질원리이고,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의 형식원리이다"라고 나는 그 당시에 요약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고난" 혹은 "천국의 보좌"라고 일컬어지던 중세기의 유명한 삼위일체론적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십자가의 횡목(橫木)을 손에 쥐고 있고, 여기에 죽은 아들이 걸려 있다. 그리고 성령은 죽은 아들을 일으키기 위하여 아버지 면전에서 한 마리의 비둘기의 형상으로 그에게로 내려온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려고 했던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나의 책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위일체(二位一體)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니케아 신경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하고 찬양하여야" 한다고 고백한 그 성령은 어디에 있었는가? 예수가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역사(歷史)와 이 하나님이 아들 예수와 함께 하는 역사(歷史) 안에서 성령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러므로 저 십자가의 신학이 이위일체론적 신학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에 따른 성령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 세미나와 박사후보 모임에서 성령론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그 여러 결과들을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년)에서 발표했다.

2. 다른 이유는 시대사적인 상황에 있다. 60년대에 서구 전체를 휩쓸던 학생소요가 끝난 후 서독의 개신교회는 적합성의 위기에 빠져들어 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사람들은 전통과 제도 속에서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그 어떤 것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질문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교회의 이러한 징조가 그 원천으로부터 자신을 갱신할 새로운 기회의 징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가 서 있던, 그리고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했던 갈림길은 다음과 같이 생각되었다: 개신교회가 자신에게 위기를 가져다 준 이 길, 즉 국가교회로부터 국민교회로 가는 길, 국민교회로부터 목회자가 국민을 위해 돌보는 교회로 가는 길 그리고 이 교회로부터 제도화된 이 사회의 종교로 가는 길을 계속 갈 것이냐, 아니면 교회가 아래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써 자신을 갱신하고, 백성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공동체(회중) 교회가 되느냐의 갈림길에 있다. 같은 시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회중교회"의 구상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교구가 변하여 공동체로 변한다!" 이 점은 라틴 아메리카의 바닥 공동체로부터 카톨릭 교회가 갱신되던 다른 현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자유로운, 함께 모인 공동체는 국가교회와 국민교회로부터 되찾지 못한 종교개혁의 약속이었다. 미국, 제3세계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의 자유교회를 방문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나는 개신교회가 "국민교회"로부터 공동체 교회"로 넘어가야 할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하려고 했다. 책을 쓰려는 실천적 이념은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에 관한 신학적 이념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서 새로이 성령을 경험하는 일이 없이는, 교회의 갱신이란 전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이 성령론의 관점 아래서 교회론과 성례론을 설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두 책과 같이 여기서도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의 초점에 맞추어 이해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론에서는 너무나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스라엘과 맺는 교회의 관계 안에서, 이 관계를 무시하지 않고 교회의 자기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또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예수의 민중"을 늘 주목하면서,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주목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자기이해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못지 않게 나는 성례론, 예배론 그리고 직무론에서 항상 교회의 사귐의 형태로부터 시작하고, 이를 지향하면서 그 이론들을 새롭게 전개하려고 애썼다.

다른 두 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찬성과 거부를 동반한 활발한 논쟁이 이루어졌지만, 이 책에 대한 반응은 또 다른 논쟁서가 나올 만큼 그다지 집중되지 못했다. 이 책은 교회일치운동을 강하게 지향하였기 때문에, 다른 종파들과 교파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리고 나는 침례교회와 정교회의 신학자들과 함께 성령론에 관해 새롭게 대화하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복음주의적 교회론, 프로테스탄트적 교회론과 개혁주의적 교회론의 종파적 윤곽을 더 이상 분명히 보진 못했던 것 같다. 나도 그러한 종파적 특수성을 더 이상 중요시하진 않았다.

1975년 이후로 나는 여러 모임에서 이 책의 실천적인 기본사상을 논의하였고, "새로운 삶의 스타일. 공동체를 향한 발걸음"이라는 소책자에서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직접 말해 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독일 개신교에서 나타난 일반적인 추세는 오래된 국민교회를 국민을 위한 종교적인 "구호교회(救護敎會)"로 계속 현대화하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물론 공동체로부터 시작해서 공동체를 향해 가려는 새로운 착안점은 수용되었지만, "공동체 교회"라는 표어가 가리키는 것과 같은 방향전환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일 개신교회는 목사가 돌보는 "교회 공동체"로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설문조사는 특히 대도시에서 교회라는 이 제도로부터 소리없이 빠져나가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교회를 종교적인 구호기구, 의미의 원천, 직업적인 생활동반자, 다시 말하면, 단지 소속되고 관리되는 기구로만 경험하다 보면, 교회는 공허해지고 교인들은 물이 새듯 빠져나간다. 여하튼 독자적인 결단과 능동적인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요구하는 자발적인 공동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교회의 미래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를 깨닫고 제때에 방향전환을 착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과 사람들은 좌절감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이 섬기는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그들로 인하여 더 큰 신뢰성을 갖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미리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세 책들이 서로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부작(三部作)"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약 우리가 이 세 책들을 동시에 보면, 내가 분명히 부활절과 희망으로부터 성금요일과 고난으로, 그리고 결국엔 오순절과 성령으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학의 빛을 모으는 초점들은 바뀌었다. 초점들은 매우 의미있게 바뀌었으므로 서로를 보충하며, 나로서는 불가피했던 그때마다의 일방성을 교정한다.

그런 후에 나는 신학을 하나의 초점에 모아서 요약하는 이러한 방법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고, 앞으로는 역으로 신학의 전체에 기여하기 위해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나의 논문들을 제공하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향전환은 단순히 이론적인 이유만을 갖지 않고, 시대사적이고 생애와 관련된 계기들도 갖고 있다.

 

2. 운동, 대화 그리고 갈등 속에서 형성된 신학

나는 이전의 "바르트 학파", "불트만 학파", "라너 학파" 등의 세대처럼 특정한 "학파" 안에서가 아니라 운동, 대화와 갈등 속에서 신학활동을 했다. 저러한 "학파들"에서는 스승에게 존재하는 사상적 출발점이 계속 전개되었다. 운동과 대화 속에 있는 우리 세대는 다른 것들, 생소한 것들, 심지어는 종종 적대적이기조차 한 것들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었고, 자신의 한계성을 경험하였으며, 새로운 문제제기를 받아들였고, 전통에서 전혀 선례가 없는 대답을 얻기 위해 씨름해야 했다.

1. 내게 중요했던 첫 큰 대화는 잘츠부르크(1965년), 헤렌힘제(1966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이렌밧(1967년)의 모임에서 가졌던 그리스도교-맑스주의의 대화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온 지도적인 맑스주의 철학자들과 서유럽과 동유럽에서 온 카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자들 간에 이루어진 이 대화는 단 한번 이루어진 대화로서 내게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대화모임은 카톨릭의 바울 협회(Paulus-Gesellschaft)가 주관한 것이었고, 마리엔밧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모임에는 체코의 학술원도 함께 했다. 그 당시 유럽의 정치적, 정신적 상황은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를 위해 문호를 개방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에른스트 블로흐와 프랑크푸르트 학회가 이른 바 신맑스주의를 확산시켰다. 혁명을 생각하는 신학자들과 종교적으로 질문하는 맑스주의자들이 대화를 위해 서로 만났다는 사실은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 이들은 정직했고, 선전구호나 선교열정도 없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장점을 진지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비판하려고만 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당파적이고 종파적인 대답을 주고받는 것보다 더 포용적인 열린 질문들을 늘 주고받았다. 공산주의 제도의 옹호자들과 교회제도의 옹호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할까 염려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서로 대화한 경험을 한 후에 양측은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대화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특성을 유지한 채 도전을 받았다. 추상적 정체성은 구체적 형태로 변했다.

1968년 가을에 바르샤바 조약군이 체코슬로바키아로 진주함으로써, 희망에 찬 이 그리스도교-맑스주의의 대화는 강압적으로 중단되었다. 맑스주의 진영에 속한 우리의 많은 파트너들은 직장을 잃었고, 정당에서 축출당했으며, 조국을 떠났다. 그 이후로 동유럽은 오래 동안 늘 주장을 번갈아 내어놓을 따름이었다. 모스크바는 이전부터 항상 그리스도교인과의 "이데올로기적 대화"를 반대해 왔다. 모스크바는 그러한 대화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1977년에 '개신교 신학의 최근 동향에 대한 비판'이라는 가라드챠(W. I. Garadza)의 책(Snanije 출판사)이 나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책은 "희망의 신학"을 폭넓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 목적은 이 신학을 "반공주의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워 이 신학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몰트만은 이른 바 '세계관적 대화'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 안에 반혁명을 부추겼다. 나중에 그는 이 대화가 실패한 것을 늘 애석하게 생각했다." 우리의 대화가 결코 반혁명이 아니었고, 당연히 장갑차와는 세계관적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저자는 침묵하고 있다.

60년대의 그리스도교-맑스주의의 대화의 결과로 유럽에서는 정치신학이 생겨났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1966년에 이 새로운 신학에 붙여진 이름을 논의로 끌고 갔다. 우리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한 생일날에 튀빙엔에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블로흐 덕분에 종파를 넘어선 우정을 나누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정치적 차원을 발전시키는 일에 함께 협력할 수 있었던 사실에 대해 감사한다. 메츠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유화를 극복하는 일과 교회의 비판적, 해방적 기능을 다시 깨닫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는 시민종교와 정치종교를 그리스도교적으로 비판하는 일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우리의 의도는, 그 이후로 우리가 늘 거듭 비판받듯이, 교회를 "정치판으로 만들자"는 게 아니고, 교회정치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치를 "그리스도인답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새" 정치신학은 국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1922년에 착수한 "옛" 정치신학(1934년)에 반대하는 입장을 힘겹게 주장해야 했다. 그는 역사 상 국가를 지탱하는 모든 정치적 개념들은 세속화된 신학개념들이라는 점과 한 시대의 신학적 패러다임과 정치적 패러다임 간에는 항상 하나의 상응관계가 있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런 후 슈미트는 친구와 적이 생존투쟁 하는 "비상상태" 중에는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옹호하기 위해 그 자신의 국가론을 전개했다. 하지만 "새" 정치신학은 이러한 종교정치를 배격했고, 사회 안의 교회라는 주제로부터 출발했다. 이전의 교회정치 신학은 사회 안에서 교회의 재산을 보존하고 교회의 힘과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일에만 온통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자신의 근원을 두고 있는지, 또 거기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지를 물음으로써,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를 철저한 제자도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이러한 교회정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곧바로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넘어서서 예수의 민중,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사귐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자처하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예수의 민중 안에서, 그 민중 옆에서 그 사회적인 자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이 요구하고 기대되는 바로 그곳에서 "사랑 안에서 활동하는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신학은 유럽의 경계를 넘어서는 신학 안의 한 "운동"이 되었다. 매우 일찍부터 정치신학과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서로의 심화에 기여하였다. 처음에는 "혁명신학"이, 그 다음에는 "해방신학"이, 그리고는 "민중신학"이 서로의 심화에 기여했다. 제3세계 국가의 도처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정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싸울 동기를 주는 지역적, 상황적, 정치적 신학들이 생겨났다. 이처럼 정치신학들의 지평이 심하게 교체됨으로써, 제3세계의 민중들과 교회들이 경험하는 고난과 희망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신학계에도 알려졌다. 분단된 이 세계 안에서의 신학의 "일치"는 이제 더 이상 유럽중심적으로, 로마로부터 혹은 세속적인 권력기구들로부터 보증되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중심지가 생겨난다. 이 탈중심화는 실로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고 갈등을 극복하는 관계들의 새로운 교회일치적 그물망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짤막하게나마 정치신학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자 한다. 종래의 개신교의 신앙론이 정치신학을 비판하는 초점은 이 신학이 사랑 안에서 활동하는 신앙(fides caritate formata)에 착안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비판은 "새로운 공로로 인한 의(業)"로부터 시작해서 "신앙의 도덕화"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려는 유토피아적 시도"에까지 미친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겨나는 신앙(fides verbo Dei formata)에서 출발하는 복음적 신앙론이 제기된다. 나는 정치신학의 운동과 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운동들 안에서 일찍이 분명한 정치적 도덕주의와 성실한 사회주의적 경건주의의 압력을 감지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1971년에 미학적인 신학 - "처음으로 해방된 창조물"(Die erste Freigelassenen der Schöpfung) - 의 구도로써 정치신학에 대한 나의 기여를 조정하려고 했다. 이 책에서 나는 의롭게 하는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말씀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신앙과 사랑 안에서 활동하는 신앙 간에는 진지한 대립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오직 신앙'은 신앙이 없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꼭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신앙의 두 측면의 일치성은 내게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이 일치성만이 새로운 정치신학,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범교회적 특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2. 내게 중요했던 다른 두 대화를 나는 여기서 짤막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내가 1963년 이래로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를 위한 위원회의 회원으로 참여한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와 내가 뒤늦은 1976년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유대교-그리스도교의 대화이다.

교회일치적 대화, 특히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대화를 통하여 나는 교파적으로 분리된 우리의 교회들이 수행하는 교파신학들은 오직 미래적이고 공동적인 에큐메니칼 신학을 위한 단계들로만 간주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교리와 실천에서 획일적인 세계교회를 꿈꾸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서로 다른 교회들의 성만찬적 사귐을 약속하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나 개인의 생활 속에서도 주님의 식탁으로 오라는 초대를 따르고 있다. 이 성만찬적 사귐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각자의 신학은 다른 교회의 신학을 함께 논의하는 공개적인 사귐을 갖게 된다. 다른 교파신학의 문헌과 책을 읽는 것은 더 이상 분리하는 요소를 발견하기 위함이 아니고, 공동적인 요소를 찾기 위함이다. 각자의 전통은 다른 전통과의 교회일치적 사귐 안으로 들어간다. 각자의 신학 전체는 오로지 하나의 더 큰 전체의 일부로만 인식되며, 그 한계선은 극복된다. 정교회 신학과 관련시켜 볼 때, 이 과정은 내게 특별한 흥미를 가져다 주었다. 나는 특별히 이 신학의 개방을 위해 기여한 특히 루마니아의 정교회 신학의 아버지 두미트루 스타닐로에(Dumitru Staniloe)에게 감사드린다.

1세기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분리되면서,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 첫 분열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운동과 에큐메니칼 신학은 결국 처음으로 되돌아갈 것이며, 이스라엘과 유대교 사상과의 대화 속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표현될 것이다. 우리는 이 분열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역사 안에서 비록 분리되었으나 나란히 길을 가면서 사귐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신학에서 카톨릭과 정교회의 문헌들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문헌들도 참조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틴 부버가 적절히 말한 대로, 다 함께 "하나의 책과 하나의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3. 운동 속에서 형성된 신학은 그 한계성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운동들은 역사 속에서 매우 빨리 오가고 또 바뀌기 때문이다. 서퍼(Surfer)처럼 늘 마지막 파도를 타려는 자는 곧장 물살에 휩쓸려 버리게 된다. "상황 속의 신학"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만, 한계성을 노출하고 분계선을 긋기 마련이다. 늘 상황만을 바라보는 자는 그의 텍스트를 시야에서 잃어버리며, 그것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나는 정치신학의 "운동"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대화와 갈등 중에서 나를 노출시키고 낯선 경험을 받아들이며 나의 한계성을 깨닫는 법을 배웠다. 정치신학이 해방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억압당하는 자들의 신학이 되어 갈수록, 나의 한계성도 더 많이 의식되었다. 제임스 콘(James Cone)은 종말론적 신학과 정치신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미국에 사는 그의 동포를 위하여 "흑인신학"을 구상했다. 나는 그의 관심사안을 후원하였고, 번역과 서문을 통해서 독일에도 이를 소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 자신이 흑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대해도 마찬가지다. 이 신학을 듣기 위하여, 이 신학 안에서 표현되고 있는 가난한 민중의 외침을 듣기 위하여, 그래서 유럽신학이 제1세계에 요구되는 회개를 표현하기 위하여 유럽인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인이 스스로 억압당하는 자들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그들과 연대할 수는 있지만, 그들과 같은 자들이 될 수는 없다. 1977년에 멕시코 시티에서 개최되었던 흑인신학자들과 해방신학자들과의 한 모임이 끝난 후, 나는 이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여성신학은 남성적인 신학의 한계성을 지적한다. 다시금 여성신학을 듣기 위하여, 남성적인 신학의 한계성을 깨닫기 위하여, 그래서 다같이 이 한계성을 언젠가 극복할 수 있기 위하여, 남자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7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이런 깨달음이 처음에는 내게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결국엔 나를 자유롭게 했다. 바라건대, 나의 이런 행동이 앞에서 거론한 운동으로부터의 생산적인 결별이었으면 한다. 나는 오래 동안 그 운동에 몰두하였고,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그 내용을 알리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나 자신의 일처럼 하진 않았다. 나는 흑인이 아니고 백인이다. 나는 억압당하는 자가 아니고, 도리어 그 반대편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남자이고, 그래서 남자처럼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과 나의 한계성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이 한계성을 넘어서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내 자신의 한 부분을 전체로 확장한다고 해서, 이 한계성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듣고 말하며 주고 받는 상호교류의 더 큰 사귐을 인정하고, 이런 사귐을 나누기 시작할 때에만, 우리는 이 한계성을 넘어설 수 있다. 1980년 이래로 나의 조직신학을 위한 기여들의 시리즈를 내기 시작함으로써, 나는 바로 이러한 노력을 하였다.


3. 전체 신학에 대한 기여로서의 한 부분

나의 신학에 대한 조직신학적 기여들의 시리즈에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요한 개념들과 이론들의 상관성이 분명한 체계적 과정 속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기여들"이라는 말로써 내가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순수하고 보편적인 이론의 전 체계나 교리를 의도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체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의 더 큰 대화의 사귐에 참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말은 또한 저자 자신의 입장과 문헌들의 제약성과 한계성을 실제적으로 평가하려는 표현이기도 하다. 저자는 모든 것을 말하거나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체를 설명하려고 자처하진 않는다. 도리어 저자는 자신의 전체를 신학의 더 큰 사귐의 일 부로서 이해한다. 저자는 그 자신의 것으로써 신학을 위해 기여하려고 한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년)에서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의 문화권에서 자리잡은 이래로 완결되지 않았던 그리스도교적 신론의 오래 묵은 문제를 끄집어내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trinitas)과 하나님의 통치(monarchia)의 관계이다.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고 성령과 함께 한 역사를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와 인간의 구원의 역사를 선포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증명하듯이, 깊은 일치성과 분명한 상이성의 역사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세 주체들이 살아 있는 일치성을 이루는 역사이다. 그 일치성은 살아 있는 일치성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요 17, 21)가 말하듯이, 인간에 대해 열려 있고 인간을 초대하는 일치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오로지 한 주체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과 하나님의 통치의 유일성은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내가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은, 서방교회의 신학, 특히 칼 바르트와 칼 라너의 최근의 구상들에서 볼 수 있는 일신론적이고 양태론적인 경향과 비판적으로 논쟁하는 가운데서 신적인 위격들의 "일치성", 그 상호적 침투와 내주를 강조하는 순환론적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기 위함이며, 또한 하나님 관계(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친구) 안에 있는 인간의 자유의 역사의 층들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통치(나라)론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체계와 교의학에서 하나님 이해가 항상 인간이해, 세계이해의 척도가 되어 왔기 때문에, 나는 매우 추상적이고 낯선 주제처럼 여겨지는 이 삼위일체론으로써 나의 기고논문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하나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그려냈다. 이 일로 인해 실천적인 사람들과 정치신학자들은 종종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정교회 신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은 이를 주목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할 경우에 사귐, 상호관계, 순환의 개념이 전면에 나오고, 이 개념이 일방적인 통치(지배)의 개념을 취하여 이를 상대화하고 제한한다면, 인간 상호 간의 관계규정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규정도 역시 변하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창조물 안에 계신 하나님"(1985년)에서 나는 삼위일체론의 결과를 처음으로 끌어내었다. 삼위일체론적인 상호순환의 개념은 생태학적 창조론과 상응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지 그의 창조물을 바라보고만 있지 않고, 동시에 그의 영원한 영을 통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고, 만물을 침투하며, 그의 내주를 통하여 창조의 사귐을 이룩한다. 바로 이로부터 만물의 상호관계를 더 이상 기계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세계의 "초석"은 이른 바 "소립자(素粒子)"가 아니라 그 상관관계들의 공명(共鳴)이다. 삼위일체론적인 상호순환의 개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상응한다. 남자와 여자의 상호적인 사귐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사귐에서도 하나님과 일치하는 존재와 생활이 인식될 수 있다. 끝으로 정신과 육체의 관계도 더 이상 일방적인 지배와 섬김의 관계로 파악될 수 없다. 정신과 육체는 인간의 살아 있는 형태 안에서 상호 간에 서로를 침투하며, 비록 늘 서로에게 복종하지는 않지만, 항상 서로에게 말한다. 삼위일체론적이고 생태학적인 이러한 창조론의 목표는 안식(사바트)의 이론, 휴식의 이론, 방해하지 않는 존재인정(Sein-Lassen)의 이론이다. 이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창조를 완성하며, 인간은 창조의 축제를 거행한다.

그 이후의 신학에 대한 기여들은 그리스도론, 성령론 그리고 종말론이며, 마지막으로는 신학의 기초와 방법론에 대한 성찰이 될 것이다.

"나의 신학의 구상"을 표어로 요약하자면, 나는 최소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리라: 나는 성서적인 근거를 갖는 신학, 종말론적인 방향을 갖는 신학, 정치적인 책임을 갖는 신학을 하려고 노력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나의 신학은 분명히 하나님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며 기뻐하는 신학, 항상 놀라는 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