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가부장적으로 말할 것인가, 비가부장적으로 말할 것인가?

J. Moltmann , 이신건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1. 하나님 아버지의 퇴위(退位)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라고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이 천년 동안 사도신경으로써 신앙고백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가부장적 사회의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지배와 남자의 대중생활지배를 고백하는가, 아니면 가난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 그리고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을 가져온 나사렛 예수의 독특한 아바 비밀에 동의를 표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무상한 존재들이 하늘에 가득한 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고백하는가, 아니면 예수의 영에 충만한 자들의 아바 비밀에서 바울이 들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동의를 표하는가? 문제는 다음과 같다. 성서의 하나님은 단지 가부장 시대의 원시적인 하나님의 확장된 현시(顯示)에 불과한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다른 하나님, 인간의 인간지배가 폐기되기 때문에 더 이상 부권사회도 모권사회도 존재하지 않을 메시야 시대의 공동의 자유로 남자들과 여자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인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 관해 비가부장적으로, 다시 말하면, 복음에 적합하게, 여자들과 남자들을 해방시키도록 말하려는 의도를 벌써 표현하고 있다. 끝으로 이러한 신학적 의도는 비가부장적인 아버지됨과 개방적인 인간의 동일성으로 해방된 남자됨에 대한 실천적인 관심과 결합된다. 하늘과 땅의 가부장제도에 대한 여성신학의 저항은 당연히 남자들도 지배로부터 사귐으로 전향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더 이상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나는 '주기도문'으로써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다"라고 많은 여자들은 말하는데, 이들은 교회와 국가, 종교와 정치에서 남자들의 가부장적 지배가 얼마나 자기들을 의존적이고 비성숙하고 유아적인 아내의 역할로 추방했으며, 가부장적 문화의 남성위주적인 언어들이 얼마나 자기들의 경험세계, 감정세계와 표현세계를 그 자신들의 인간적인 자아로부터 소외시켰는지를 발견한다.

인간들의 지배형태들은 항상 그 마지막 정당성을 종교에서 구했고, 또 발견하기도 했다. 신상들은 마지막 희생에 이르기까지 경배되었다. 신상들은 이를 경배하는 남자들의 존재와 사귐의 모습을 띠고 있다. 존재의 바탕이 되는 지식은 의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항상 종교 안에 뿌리내리고 있고 종교를 통하여 정당화된 것은 뒤집을 수 없도록 견고한 것이 되어 있었다. 종교모독은 가장 무거운 범죄로서 처벌당했다. 신들을 비방하고 모독하는 자들은 한 사회의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 그러기에 많은 사회에서 여성주의자들의 저항은 "신모독"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문화에서 하나님을 "주(主)와 아버지"로 경배하는 종교적 전통은 가족에서 아버지의 지배를, 그리고 국가에서 영주 아버지(Landesvater)의 지배를 정당화해 왔다. 이것은 종교에서 남성 사제들과 목사들이 아버지와 같이 지배해 온 사실과 꼭 마찬가지다. 만약 한 종교사회의 종교적 상징들과 한 사회의 기본가치의 표상이 순전히 남성적으로 규정된다면, 여자들은 오로지 남자들의 중재를 통해서만 그들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남성적인 표상을 통해서만 종교와 사회의 생활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가부장 사회에 대한 여성신학자들의 저항은 여자가 그 자신의 자아로 해방되는 데 불가결한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저항이 없다면, 남자가 가부장 사회에서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것에서 해방되는 일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어떤 표상들이 여자를 소외시키는가? 단지 하나님을 "주와 아버지"로 표상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의 의미를 예언자, 사제, 왕, 주와 심판자와 같은 남성적인 기능으로 표상하는 것만은 아니다. 바울 이래로 교인들을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이미 그랬다. 이 말은 본래 포괄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으나, 배타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역시 바울 이래로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아들됨"이라고 표상한 것도 그랬다. 이것도 사실은 당연히 포괄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으나, 여자들을 소외시키고 말았다. 여자들은 "형제들"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신자들의 "형제됨"으로부터 제외되어야 하는가? 여자들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들을 "아들들"로 느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들"을 그들의 머리들로 섬겨야 하는가? 비록 오늘날엔 이런 남성적인 개념들의 어법이 배타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드물다고 하더라도, 포괄적인 어법도 적지 않게 비하적인 의미를 갖는다. 모든 포괄적인 언어는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적이다. 이것은 다른 자를 장악하고, 그 다른 자가 스스로 그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래서 이러한 남성적-성적 언어와 이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시대적으로 수용된 외피로 여겨 벗길 수 있을지,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이런 것들과 함께 서고 넘어지는 것인지 비판적 질문이 제기된다. 그리스도교는 여자에게도 정체성 확립의 가능성을 제공하는가?

그렇지만 가부장적인 하나님의 상징의 퇴위(退位)는 실로 다른 측면도 갖고 있다. 남자의 개인적인 가부장 지배, 이른 바 "아버지의 폭력"이 법률적으로, 사회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이미 배척당하기 시작하는 사회에서도 가부장적인 하나님의 상징에 대한 저항이 의미 있는 것인가? 여성신학자들의 저항은 아마도 비틀거리고 이미 죽어 가는 우상들만을 죽이는 것은 아닌가? 알렉산더 미첼리히(Alexander Mitscherlich)가 이미 1963년에 예견했듯이, 만약 우리가 "아버지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중에" 있다면, 종교 내의 하나님의 상징을 탈부권화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겠으나, 실제적 상황의 변화를 단지 뒤따라가기만 하는 의식변화이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더 이상 전적으로 개인이 지배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관료적으로 그리고 익명적으로, 다시 말하면, 책임 없이 그리고 "유한책임을 지고" 지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사회는 "아버지 없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더 이상 군주와 귀족에 의해 당당히 지배되지 않고 의장, 이사회, 위원회와 컴퓨터에 의해 단지 경영되기만 하는 세계에서 아버지 형상들에 대한 저항은 시대착오적이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이 형상들 자체가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오디푸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아버지가 없었다. 현대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적 및 가정적 폭력을 객관화하는 것은 낡은 인격묘사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단지 교회와 종교적 표상사회에서만 낡은 상황과 진부한 상징들이 여전히 지탱될 뿐이다.

현대의 가정의 상황을 들여다 보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가장"(家長)을 보기가 흔치 않다. 왜냐하면 남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가정에서 사라져 버렸고, 집 밖에서 일하며, 아내와 자녀들을 지배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미 더 이상 그들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날 가정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들은 전능한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무능한 자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가정주부들이 불평하며 제시하는 부끄러운 증언, 즉 부부와 가정 내의 다양한 남성적 잔인성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설명한다.

이러한 남자들에게 아버지 하나님과 가부장 사회의 권력에 대한 여성신학자들의 저항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이들은 자신들이 실제로는 무능하다고 느끼며, 처음에는 공격당하는 모든 자들처럼 공격적 태도로 반응하다가, 그 다음에는 방어할 수 없는 모든 자들처럼 의기소침하게 반응하며, 마지막으로는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자들처럼 체념하며 반응한다. 그 결과로 생겨날 수 있는 일은, 남자가 그렇지 않아도 전혀 행사할 수도 없는 건방진 고압적 권력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그의 참여능력과 책임자세를 상실하는 것이다.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점점 더 커지는 남자들의 무책임성과 자아도취적인 자기몰두의 유아적 놀이방식으로의 퇴행은 현대사회의 탈부권화의 슬픈 부수현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지배요구가 없는 남성과 권력욕과 무능감이 없는 아버지가 되는 용기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하늘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에 관해 비가부장적으로 말하는 법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되는 것과 아버지라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자녀들의 자의식과 자립심을 발전시키는 데 무슨 의미를 갖는가? 시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생각에 따르면, 초자아(超自我)의 형성은 자녀가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만약 아버지가 없고, 자녀들이 오로지 어머니와만 함께 말을 주고 받아야 한다면, 어떤 종류의 의식이 형성되는가? 현대의 임상연구는 "우울증세"( H. Tellenbach)가 생겨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남자들의 "마마보이 증세"의 형성도 어머니와의 떨어지지 못한 결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는, 비록 생물학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어머니, 자녀, 아버지의 "구조적 삼각형"은 본질적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구조의 불가결한 구성원이다." 이점은 아들의 발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딸의 발전을 위해서도 분명히 타당하다.

 

2. 가부장 지배의 종교

"가부장 사회"란 유사(有史) 시대 초엽에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거의 보편적으로 그 이전의 모계사회의 생활형태를 억압하고 폐기시킨 남성들의 지배질서, 소유질서 그리고 계승질서를 말한다. 가부장 사회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안정시키는 특정한 종교를 포함하고 있다. 거룩한 권력은 남성적 상징들, 대개는 아버지 상징들에 의해 대변되며, 남성적 왕과 사제에 의해 중재된다. 어떤 남성적 상징들로써 신성(神性)이 파악되든지 상관없이, 이 상징들은 신성을 가족 내의 아버지 권력, 지배자의 정치권력 그리고 종교 내의 사제의 권위의 원천으로 만들었다.

가부장 사회의 종교들이 관철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종교적으로는 일신론의 경향이 생겨났고, 정치적으로는 군주 지배의 형성이 이루어졌다. 땅 위의 한 지배자는 하늘의 한 하나님과 상응한다. 만약 이 일신론이 배타적으로 대변되면, 그와 상응하는 정치적 지배는 제국주의적 경향성을 갖게 된다: 한 하나님 - 한 율법 - 한 세계. 이와 상응하는 것은 한 지배자 - 한 의지 - 한 인류이다. 한 지배자의 종교적 정당화는 어디서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그가 탁월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까지 이루어졌다. 페르시아, 바벨론과 에집트의 초기 정치적 종교들은 이미 그러한 구조들을 보여준다. 이런 구조들은 로마, 비잔틴과 모스크바의 그리스도교적 신정체제의 표상들 안에서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다. 절대군주 시대에 이런 구조들은 프랑스의 태양의 왕의 궁정에서 그리고 더 작은 유럽의 군주지역에서 다시금 복귀하고 있다. 시간적 차이와 구조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지배는 항상 신적인 지배와 계급적으로 상응하고 있다. 이 생각은 그 자체로서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특징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 생각이 역사적인 그리스도교에서 대변되었던 한,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형태의 가부장 지배의 종교이다. 징기스칸도 한국에서부터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문화를 파괴했던 그의 몽고의 세계지배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당화했다: "하늘에는 오로지 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땅에는 하나님의 아들, 한 지배자 징기스칸 외에는 아무도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은 로마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사절에게 준 그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군주적 일신론은 정치적 지배만이 아니라 가족 내의 "아버지의 폭력"에서도 그 상응요소를 갖고 있다. 우리는 "전능자 어머니", "어머니 땅",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의 예배에서 모권적 문화의 흔적들을 거의 어디서나 여전히 발견하게 된다. 이 모권사회적 문화는 범신론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신은 영원히 생산적인 생명으로 이해되었다. 개체의 생명현상은 거대한 어머니와 같은 생명의 강에서 생겨나서, 거기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다시 거기로 되돌아간다. 하늘, 땅과 지하세계를 가득 채우는 삼차원적인 여신의 풍만하며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서 생명과 죽음은 하나이다. 출생제의와 매장제의는 지금도 종종 이런 옛 표상들의 일부를 보여준다. 오늘 날의 모권사회 연구는 항상 거듭 이러한 생명의 범신론이 모권사회의 종교였음을 지적한다. 그에 반해 군주적 일신론은 부권사회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델피와 올림피아와 같은 그리스의 성소들에서 우리는 올림포스의 신들과 함께 있는 "전능자 아버지 제우스"가 어떻게 저승의 권세를 갖는 "땅 어머니" 가야(Gaja)를 억압했는지를 아직도 알 수 있다. 델피에서 아폴로의 사제는 뱀을 죽였는데, 땅 어머니는 이 종교범죄의 죄값을 치른 후에 그 자리에 그 자신의 성전을 세우기 위하여 이 뱀을 통해서 피티아(Pythia)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로써 원칙적으로 남자의 지배가 정당화된 셈이다. 신은 더 이상 뱀과 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영과 남자를 통해서 백성에게 말을 건다. 바로 여기서부터 가정 내에서의 아버지의 가정사제적 신분이 생겨난다. 이와 함께 권위와 재산의 남성적 계승도 정당화된다. 남자는 생명의 씨를 주는 자로 이해된다. 옛날의 "모권적인" 모계적 계승 대신에 아버지가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부계적인 계승이 등장한다. 이것을 다시 확고히 하기 위하여 언제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여자를 가족 안으로 감금시키는 일이 없이는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그 결과는 여자의 권한박탈과 노예화였다.

오늘 날에도 남독일 지역에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무 총리가 흔히 "영주 아버지"(Landesvater)라고 불린다. 이런 시대착오주의는 정치 권력을 가부장적 권력에서 도출하던, 기이하지만 현대 이전의 유럽에서 전형적이던 현상을 지시한다. 로마 가정의 아버지(pater familias)는 가정 내에서 군주적인 지배의 신분을 소유했다. 그는 법적으로 가족단위에 속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한적이고도 일평생 계속되는 권력을 행사했다. 다 성장한 아들들도 힘있는 아버지(patria potestas)에게 복종했다. 이것은 지중해 지역에서는 분명히 독특한 것이었다. "그러나 특히 현대인에게 생소한 것은 그의 권력이 형벌권과 사형권을 포함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권세(vitae necisque potestas)를 소유했다." 물론 로마 가정의 아버지의 절대권력을 조상 전통의 중시와 인간성의 미덕을 통하여 완화시키려는 많은 시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 황제의 시대에까지 가족 내에서 그의 군주적 신분을 유지했다.

로마 가정의 아버지는 고대 로마의 아버지 신들과 후대의 신들의 아버지와 종교적으로 서로 상응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가정에서 사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Pater)는 고대 로마에서 위대한 신들을 일컫는 제의적 이름이었다. 주피터라는 이름 안에도 그런 요소가 있다. 그래서 제의 공동체는 아버지 신의 권위와 보호 능력 아래 있었다. 이 제의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와 하나였기 때문에, 정치 지배자는 사제왕 혹은 사제 아버지로 여겨졌다. 그는 최고의 사제(Pontifex maximus)로서 정치 공동체에서 가정의 아버지의 신분을 소유했다. "국가 가족"은 "국가 아버지"의 권력 아래 있었다. 그렇지만 주전 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영주 아버지"(pater patriae)라는 공식 명칭이 수여되었다. 그런데 이 명칭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로마 황제의 명칭이 되었다. 이 명칭에는 한편으로는 신하들의 평화와 보호의 기대가 담겨지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고대의 군주의 서(書)들은 황제에게 온유(clementia)의 미덕과 그의 백성을 위한 보호의무를 권고했다. 그리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권세(potetas vitae necisque)도 주어졌다. 그의 지배는 아버지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성애는 무제한적인 지배이기도 하다. 즉 그는 전능한 아버지(pater omnipotens)이다.

대략 이른 바 "콘스탄틴 시대"의 초엽에 락탄츠(Laktanz)의 저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하여"를 통하여 로마의 아버지 표상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에게로 옮겨졌다는 사실이 지적된 것은 옳은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신개념과 로마의 신개념이 이처럼 혼합됨으로써, 유럽의 그리스도교사는 근본적으로 가부장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다. 즉 한 하나님은 "주"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에 의해 정당화되고 그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정치적-가정적 지배는 아버지들의 지배이다. 그래서 락탄츠는 예를 들어 세네카가 확산시킨 온화하고 자비로운 철학적인 하나님의 상에 맞서서 심판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서적 언어와 함께 로마의 전능한 아버지 하나님의 상에 나타난 주의 역할을 동시에 부각시키려고 했다. 사랑하는 하나님과 진노하는 하나님은 마르키온이 주장한 대로 서로 다른 두 신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의 아버지 역할과 주 역할이다. 이러한 그의 이중적 구조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두려움과 사랑의 대상"이다. 그는 아버지의 권세와 주의 권세(duplex potestas: pater et dominus)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그의 종(filius et servus)이기도 하다.

"그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주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며, 그는 자비롭기 때문에 경배해야 하며, 그는 강하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 그 안의 두 인격들은 경배받아 마땅하다. 진정 어린이와 같은 경외감을 갖고 그의 영혼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자가 누구랴? 아니면 만물의 지배자로서 모든 것에 대한 진정한 권세를 가진 자를 우습게 여기고 벌받지 않을 자가 누구랴? 만약 우리가 그를 아버지로 여기면,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향유하는 빛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장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세상의 거처로 들어왔다. 만약 우리가 그를 주로 여기면, 그는 우리를 헤아릴 수 없는 선물들로써 살찌우고, 우리를 보존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주 하나님과 하나님 아버지로 생각하는 로마의 이중개념이 서방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의 상(像)을 규정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든 것보다 먼저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할" 자의 이름으로 그의 계명들은 경배되었으며, 그에 대한 순종이 더 첨예하게 요구되었다. 그는 장례식에서 언급되는 대로 "생명과 죽음의 주"이다. 실로 그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권세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예수가 그처럼 친밀하고 신뢰하는 태도로 "아바"라고 부르고 그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부를 것을 가르쳤던 하나님인가? 만약 "주"라는 하나님의 상과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상이 혼합되어 버린다면, 결국에는 "야훼"와 "주피터"가 혼합되어 버려서 종살이에서 해방시킨(제1계명) 주와 모든 것을 신비스럽게 다스리는 높은 하늘의 주가 더 이상 구분할 수가 없게 되지 않을까? "주 우리 하나님, 사랑하는 하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교회의 기도문은 "주"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써 동일한 한 하나님의 인격을 뜻하는 것 같다. 그 반면에 사도 바울의 모범에 따르면,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아버지됨과 그리스도의 임무로서의 해방시키는 통치를 비판적으로 구분했고,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로마의 문화권에서 이루어지던 가장모델의 정치지배로의 이전(移轉)은 그리스도교에서 특히 교리문답의 제4계명, 다시 말하면, 성서에 언급된 제5계명의 정치적 해석을 통하여 확산되었다. 가부장적인 관헌표상(官憲表象)과 신하정서(臣下情緖)의 이러한 각인현상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백성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십계명의 해석사(解釋史)에서 중요시된 경향은 단지 가정행정과 국가행정의 유비(類比)만이 아니라 가정의 아버지의 권력으로부터 국가권력을 도출해 내는이다. "대교리문답"(1529년)의 제4계명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루터주의적 국가들에게 표준적인 권위를 갖게 되었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명령하고 통치하는 윗분들에 대한 순종도 이 계명에 속한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 관헌이 생겨나고 다른 모든 것들도 확산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혼자서 그의 자녀를 교육할 수 없을 때, 그는 그를 가르칠 가정교사를 붙여준다. 만약 그가 너무 약하면, 그는 그의 친구들과 이웃들의 도움을 받는다. 만약 그가 사라지면(죽으면), 그는 명령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행정과 이를 위해 조정하는 권한을 넘겨준다. 또한 그는 가정행정을 위하여 하인들, 남종들과 여종들도 거느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주인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자들이 부모의 역할을 하며, 그로부터 통치할 능력과 권력을 취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행정직에서 아버지의 직책을 수행하고, 그들의 백성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보인다면, 그들도 성서에 따라서 모두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것은 옛적부터 로마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가정에서 주인과 부인을 가정의 아버지와 가정의 어머니(patres et matres familias)라고 불리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그들의 영주들과 제후들도 그들을 온 나라의 아버지(patrtes patriae)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하는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거나 최소한도 그렇게 여기고 존경하지 않는 것은 크나큰 수치이다."

물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루터가 여기서 가정의 아버지와 가정의 어머니를 동등한 권리를 갖는 자로서 나란히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정의 권력을 정치권력에 이전할 때, 어머니(matres)는 여전히 어정쩡한 입장에 있다. 더욱이 그는 중세기에 여러 번 이미 깨어진 가정적, 정치적 및 종교적 가부장주의를 다시금 불러들였다. 실로 "부모 관헌으로부터" 모든 다른 관헌이 확장된다는 사실은 자연법 상 가정이 국가보다 앞선다고 특별히 지적한 그의 입장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루터의 해석에 따르면, 가정과 정치의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권에 대한 단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칼빈(Calvin)은 제5계명을 사실 이와 비슷하게 해석했지만, 부모를 오직 "주 안에서"만 순종해야 하고 또 순종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만약 여러분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도록 잘못 인도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여러분을 당연히 부모로 여기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에 대해 순종하지 않도록 유혹하는 나그네로 여겨야 한다. 제후들과 주인들 그리고 우리보다 높은 모든 신분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이와 같이 동일하다."

루터와 칼빈의 차이점은 종교적인 아버지 개념의 정치적인 기능의 첫 번째 양면성을 나타낸다: "하나님 아버지"는 가정과 국가의 아버지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항상 순종하고 신뢰할 만한 하인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또한 가정과 국가의 아버지의 권력을 비판하는 일에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관헌의 진정한 파숫군이 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앞에서 언급한 자연적인 관헌들을 통하여 계시한다면, 순종하는 긍정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모세를 통하여 그리고 예수를 통하여, 다시 말하면, 성서를 통하여 계시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비판의 파수직과 긴급한 경우에서의 저항의 의무는 신적인 권리이다.

장 보댕(Jean Bodin)에게서는 이전에는 "고조부적"(高祖父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루터의 "정치적 가부장주의"가 근대의 절대주의로 변천하고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보댕은 리용의 로마법의 교사였다. 그는 그의 "Les six livres de la Republique"(1576 초판)에서 로마의 가정부권법에 입각하여 국가 권력의 절대주의적 이해의 기초를 놓고 있다. 루터의 경우와 같이 보댕의 경우에도 가정은 공동체의 원천과 기원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가정의 결합을 통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가정관리는 공동체 내의 최고권력의 모범이다. 그러나 가정의 아버지는 가정의 주인으로서 가정관리를 올바르게 수행한다. 그에게는 마땅히 - 이로써 보댕은 고대의 로마법에 의존한다. -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권세가 주어진다. 그래서 이에 상응하는 국가권력은 당연히 시민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법"을 소유하며, 그 지상권세의 전능한 원천인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변명할 필요가 없다. 보댕은 최고의 국가권력을 정의할 때, 아버지와 보호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주와 권력의 측면을 더 강조한다: "Majestas est summa in cives ac subditos legibus soluta potestas"(통치자는 시민과 노예를 향해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최고의 권력을 갖는다.). 최고의 국가권력은 보편타당한 법에 복종하지 않고, 오로지 그 권력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법과 자연법에만 복종한다. "princeps legibus solutus"(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지배자)라는 명제는 곧바로 유명한 말이 되었고, 법을 초월하는 절대주의적인 국가권력을 초래했다. 이 절대적 주권은 하나님에게 호소한다고 해서 제한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배자도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이론을 통하여 그의 무제한적인 권력을 하나님의 자비와 율법에 묶어 놓으려던 위그노파 사람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베르사이유 궁정이 명백히 가리켜 준 바와 같이, 하나님의 전능과 영광을 모방하는 것이 더 매력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두 국가이론 즉 정치적 가부장주의와 종교적-정치적 절대주의는 사라졌다. "아버지됨" 대신에 "자유"와 "평등"과 함께 "형제애"가 등장했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정치적인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의 아버지" 이데올로기가 전이(轉移)의 논리를 쓰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난받았다. 아버지는 물론 아들 앞에 있지만, 국가는 항상 제후들 앞에 있다. 제후가 국가로부터 그 생존을 보장받는 것이지, 그 반대로가 아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어머니의 은유들을 분명히 수용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정부"로부터 "조국과 같은 정부"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선언했는데, 이것은 완전히 프랑스 혁명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행복추구와 같이 백성을 향한 행복추구의 원리 위에 세워진 한 정부, 다시 말하면, 신하들이 무엇이 자신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하거나 해로운지를 구분할 수가 없는 미성숙한 어린이들로서 오로지 수동적으로 행동할 수 밖엔 없기 때문에, 행복하기를 원하려면 오로지 국가의 어르신네의 결정만을 따르고, 또 그 어르신네가 원하듯이 오로지 그의 자비만을 의지하는 그러한 아버지와 같은 정부(imperium paternale)는 가장 거대한 생각가능한 독재주의(결국엔 아무런 권리도 없는 신하들의 모든 자유를 제거하는 헌정)이다. 오직 권리를 누릴 능력을 갖는 사람들만을 위하여, 또 지배자의 행복추구와 관련해서도 생각될 수 있는 정부는 바로 아버지와 같은 정부가 아니라 조국과 같은 정부(imperium, non pateranle, sed patrioticum)이다. 다시 말하면, 오로지 국가의 권리를 공동의지의 법으로써 보호하고 국가가 법을 자기 마음대로 무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국가 내에서 (이 국가의 어르신네도 포함하여) 각자가 공동체를 어머니와 같은 으로 생각하거나 국가를 아버지와 같은 땅으로 생각하는(그는 바로 이로부터 그리고 이 위에서 생겨났고, 여기에 그 자신도 역시 귀중한 보증금을 남겨 놓고 떠나야 한다.) 사고방식은 애국적이다. 권리를 누릴 능력을 갖는 존재인 한, 공동체의 한 일원인 그 사람에게는 이 자유의 권리가 주어진다."

마지막으로 독일 계몽주의의 신화도 중앙 유럽의 정치적 가부장주의 전통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 "계몽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지고 있는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인도가 없이는 그의 오성(悟性)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라고 칸트는 1783년에 강령과 같이 설명했다. 이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표상들인 "후견인"과 "미성숙", "성숙해짐"과 "해방"은 가족생활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어린이들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칸트가 "백성의 후견인"과 "이성의 공개적인 사용"을 위한 계몽된 "용기"에 관해 말했을 때에 행했던 것과 같이, 만약 이렇게 표출된 세대의 문제가 공적인 생활로 이전된다면, 계몽주의는 정치적 가부장주의의 영향권 안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셈이다. 현대인들의 "성숙해짐"의 철학과 신학은 다른 계몽 전통과 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나라, 예를 들면 영국과 같은 나라들의 언어로는 도무지 번역할 수 없다. "성숙"을 위한 힘겨운 노력이 가부장주의 사회 내의 투쟁인 것은, "해방"을 위한 의지가 항상 여전히 "아버지의 권력"을 전제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다.

백성은 "성숙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성은 "비성숙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백성은 지배당하고 억압당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백성은 자신을 해방시키며, 그 자신의 손에 그의 운명을 맡긴다. "세상"이 어린이와 같은 적은 결코 없었기 때문에, 세상은 "성숙한 세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의 시대"에 관한 발언은 빗나간 것이다. 개인의 성장의 은유들을 문화사와 세계사에 적용하는 것은 이전에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류의 교육"을 꾸며대는 것이다.

 

3. "아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통계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구약성서에서 8번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신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 자신에 의하여 170번이나 "아버지"라고 지칭되고 있다. 십자가 상의 죽음의 절규를 제외하면 - 시편 22편: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예수는 하나님을 항상 오로지 "아바"라고만 불렀고, 하나님을 항상 오로지 "나의 아버지"라고만 말했다. 이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선포한 하나님의 계시된 이름을 지시한다. 이러한 계시된 이름들 안에는 여러 층들이 구분될 수 있다. 또한 예수의 생애와 행동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아바"로 계시된 기능도 분명히 인식될 수가 있다.

A. "아바": 예수가 이러한 신뢰로 가득한, 친밀하고 부드러운 어린이 말로써 하나님을 불렀다는 사실은 비교적 새로운 점이며, 그의 사신(使信)에 속한다. 이 말은 아람어이고, 어린이가 중얼거리는 하나의 언어형태이다. 이처럼 어린이들은 그들이 본래 신뢰하는 인물을 마마, 파파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의 은밀한 근원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표현한다. 그들의 원래의 감정 모형에서는 어머니든 아버지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만약 우리가 아바 말 안에서 표현되는 어린이의 근본신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아버지보다는 오히려 어머니에게 도달할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친히 이 이름으로 불렀을 때, 강조점은 분명히 아버지 하나님의 남성됨이나 주의 존엄성에 놓여 있기보다는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그의 전대미문의 가까운 관계에 놓여 있다. 아바 이름은 예수와 하나님 간의 관계의 내적인 핵심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아바와 같은 친밀함이야말로 예수의 삶과 행동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까움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은 "아바,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의미하고, 그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오직 그의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나라의 현존 안에서만 부를 수 있다. 예수의 아바는 어머니와 같이 버림받은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언젠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내실"(계 21, 4) 하나님이다.

예수의 생애에서 아바의 깨달음과 그에 대한 기도는 무슨 기능을 하는가? 우리는 예수가 언제 그리고 어떤 기회에 그의 계시와 소명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세례를 생각할 수 있다. 여하튼 그의 소명은, 그의 선포가 증명하듯이(눅 4, 18 이하), 일종의 메시야적 소명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돌입하는 가운데서 메시야 시대, 종말시의 희년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그가 행하는 표적과 기적은 메시야적인 시대전환의 표적과 기적이다. 메시야 시대에는 하나님 자신이 가까이 온다. 예수는 이 가까옴으로부터 살고, 그 안에서 기도하며,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아들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시 2, 7)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 아바의 아들로 이해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11장 27장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바"로 표현되는 하나님 경험은 자신을 이 아버지의 아들로 경험한 예수의 자기경험을 각인한다. 그의 행동에 나타난 그 결과는 기록보도에서 더 분명히 인식될 수 있다. 그는 "그의 제자들", 그의 모친과 가족을 떠나며, 그의 하늘의 아버지, 아바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 마가복음 3장 31-35절 병행절에서는 그가 그의 모친과 형제들을 냉정하게 물리친 이야기가 보도된다.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에 대한 그의 가족의 판단은 바리새인들의 판단과 똑같다: "그가 미쳤다"(막 3, 21). 그는 단지 그의 모친과 형제들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의 공식적인 결별을 선언한다. 그의 모친을 생각할 때, 이것은 이전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어머니를 가진 자는 유대인이다. 그의 모친과의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예수는 그의 유대인적 연관성과 약속의 연관성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샬롬 벤-코린(Schalom Ben-Chorin)이 여기서 제5계명의 분명한 파기를 보았던 것은 옳다. 이것은 또한 예수 시대의 유대인 중의 의로운 자들의 인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벤-코린의 지적을 따른다면, 우리는 신명기 21장 18-21절에 직면하게 된다: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그 부모들이 잡아 가지고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성읍의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이게 해야 한다. 부모들은 장로들에게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20절)고 말해야 한다. 이 장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로 끝맺는다. 실로 신약성서의 예수 이야기는 제5계명에 관한 이 신명기 구절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예수는 가족적 유대(紐帶)와 이 약속사적 계보(約束史的 系譜)의 유대 대신에 무엇을 제시하는가? 그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 12, 50)의 뜻을 행하는 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새로운 공동체를 인식한다. 여기서 문제가 중요한 것은 가난한 백성(오클로스)이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라오스)만은 아니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래로 인정되어 온 하나님의 토라의지가 아니라 예수를 통하여 계시되는 하나님의 메시야적 뜻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예수의 아바 관계 안으로 수용되는 이 메시야적 공동체는 전이된 의미에서 단지 "형제들과 자매들"만이 아니라 "어머니들"도 포함한다. 이 공동체는 단지 형제와 같이 그리고 자매와 같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를 뒤따르는 여자들과 남자들은 메시야적 공동체 안에서 그들이 자연적인 가정에서 버렸던 모든 것을 재획득한다. 그것은 바로 형제들, 자매들 그리고 어머니들이다. 그렇지만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에 종종 간과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田土)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받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으리라"(막 10, 29-30).

누구든지 자신이 버린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현세에서 풍성한 배상이 주어질 것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배상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다음을 의미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즉 새로운 가족 안에서는 가부장적 지배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오로지 어머니, 형제 그리고 자녀의 신분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니라"(마 23, 9). 하나님의 아바 가까움은 이 새로운 공동체를 분명히 너무나 가득 채우고 침투하기 때문에, 이 땅의 아버지의 기능과 권위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가부장적 지배는 하나님의 아버지와 같은 가까움과 명백하게 모순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가 자신의 주위로 불러 모았던 몌시야적 공동체는 실로 하나의 "대조사회"(對照社會)이다. 이 공동체는 그 당대의 가부장적 사회와 모순된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어머니, 아버지, 자매와 형제 개개인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새로운 메시야적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예수의 어머니도 교회 안에서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신앙의 자매로서 나타난다(행 1, 1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의 또 다른 귀결(歸結)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이 신앙은 누가복음의 십계명 해석에서와 같이 인간적인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않다. 또 이 신앙은 칼빈의 제5계명 해석에서와 같이 단지 비판적인 것만은 아니다. 제5계명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그의 행태를 통해 볼 때, 모든 인간적인 아버지의 권위를 폐기시킨다. 하나님은 유일한 아버지이기 때문에, 예수의 사귐은 "아버지들의 종말"이다.

하나님의 "아바" 비밀은 그의 출신적 유대를 부수고, 그를 전적으로 메시야 나라의 미래로 향하게 한다. 아바를 도입함으로써, 예수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의 사회적-종교적 유토피아, 즉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의 유토피아로 간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5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예수의 아람어 기도문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리스도 공동체의 기도문으로 인용한다. 이것은 아마도 카리스마적인 자들의 기도문이었던 것 같다. 메시야 예수를 믿는 자는 그의 친밀한 하나님 관계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수처럼 그리고 예수와 함께 그는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그 결과는 비슷하다. 많은 형제들과 자매들 중에서 "처음 태어난 자"와의 사귐 안에서 믿는 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해한다. 예수처럼 그리고 예수를 뒤따르면서 그들은 가족, 신분 그리고 문화 안에 있는 낡아빠진 출신의 세력들과 결별하고, 메시야 나라의 미래로부터 살아간다. 그러므로 아바 부름은 하나님의 메시야적 백성 안에서 자유의 최상의 표현이 된다.

B. "나의 아버지": 예수가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아바"에 관해 말하지 않고 이보다 더 형식적으로 "아버지"에 관해 말한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 발언에 어떤 거리감을 이끌어 들인다. 아바 부름에서는 중요하지 않는 아버지의 남성적 규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에 관하여 제3인칭으로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그리고 절대적으로 "나의" 하나님에 관해 말한다. 그가 하나님의 가까움과 그의 나라를 선포할 때, 그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그의" 하나님이다. 그는 보편적인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며, 또한 항상 이미 "우리의 아버지"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완전히 배타적으로 이 아들 예수의 아버지, 그의 나라의 메시야의 아버지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다른 그 어떤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아들 예수에 의해 이 아버지의 아버지됨과 그의 나라가 계시되는 셈이다. 이 아버지의 "아버지됨", 그의 "지배"와 "나라"로 이해될 수 있는 바로 그것은 오로지 아들을 통해서만 규정된다. "아들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본다"(요 14, 9). 이로써 아버지에 이르는 다른 모든 길들은 배제된다. 오로지 아들 예수의 사귐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이를 수 있다. 이 배타적 품사(品詞)는 모든 가부장주의를 배제하고, 중요한 해석으로서 오직 메시야적인 요소만을 확증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이르는 것은 가족적, 정치적 및 종교적 권위들을 빌려서가 아니라 오로지 아들의 사귐과 메시야 시대의 영 안에서만이다. 이것을 더 강하게 강조하자면, 예수가 "나의 아버지"라고 선포하는 하나님은 우선은 오직 그의 하나님이지, 우리의 하나님도 우리의 아버지도 아니다. 예수의 선포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의 헌신을 통해서 비로소 그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가 된다.

예수가 그의 아버지와의 사귐 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마태복음 11장 27절의 배타적인 계시말씀의 인용은 전형적인 것이고, 전 복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의 아버지는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헌신을 통하여 참으로 "고아들과 과부들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이미 구약성서에서 그렇게 칭해질 수 있었다(시 68, 6).

C.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것은 특히 바울이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에 사용하던 표현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 표현은 대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롬 15, 6; 고전 1, 3; 고후 11, 31; 엡 3, 14 등)를 의미한다. 우리가 이 신학적 표현을 분석해 보면, 여기에 예수가 그의 아버지와 맺는 배타적인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자신, 그의 메시야됨(그리스도)과 그의 통치(키리오스)에 의해 규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예수의 아버지이지, 그 다른 누구의 아버지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예수의 통치를 통하여 예수의 아버지와의 사귐 안으로 들어간다. 예수가 우리의 주가 된다면, 그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된다. 바울에 의하면 이 결합을 창조하는 "예수의 통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예수의 메시야적인 파송, 아버지가 세상의 화해를 위해 아들을 버리는 제사장적인 희생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예수의 왕적인 고양(高揚)과 변모(變貌) 안에서 이루어진다. 메시야 예수의 통치영역 안에서 예수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며, 만물 위의 아버지가 된다(롬 1, 7; 갈 1, 1; 엡 4, 6). 이처럼 확장되는 지평의 마지막에서 그는 드디어 "영광의 아버지"(엡 1, 17)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모든 왕국들, 관헌들과 권세들 그리고 죽음이 폐기되는 영광의 나라야말로 그에게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D. 요약

1.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후대의 신학적 표현은 예수의 "나의 아버지" 진술을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또 이것은 다시금 예수의 메시야적인 소식의 해방시키는 핵심인 그의 아바 비밀을 보존하고 있다. 이 표현이 가능케 하는 실천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라 예수의 아바 기도의 신뢰성과 친밀성이다. 이런 확신은 물론 원시 그리스도교의 전승과정과 배치된다. 마태는 "주기도문"에다가 "하늘에 계신"이라는 어법을 추가했고, 이로써 하나님의 "아바" 가까움에 거리감을 가져왔다. 바울은 로마와 갈라디아의 교회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는 것을 아직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곧바로 이 기도문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서 사라져 버렸고, 거리감을 주는 호칭에 여지를 마련해 주었음이 분명하다. 히브리어 "아멘"과 "할렐루야"는 수용되어 오늘 날까지 정착된 반면에, 기이하게도 "아바"와 함께 원시 그리스도의 "마라나타"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지적하는 점은 예수의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아바"가 표현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까움과 그의 나라의 가까움이 서로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재림의 지연과 더불어 우리는 분명히 다시금 공간적이고도 시간적인 거리감을 깨닫게 되었다. 감독은 "교회의 아버지"로서 등장하여, 이 거리감을 중재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심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은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도 진행되었다. 발원지로 가려는 자는 전통의 강을 거슬러서 헤엄쳐야 한다.

2. 예수의 아바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분명해지는 점은, 하나님은 그리스도교적 방식에서, 다시 말하면 메시야적 방식에서 가부장주의적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삼위일체적으로만 아버지로 이해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론의 형성은 항상 가부장주의적 지배표상이 배제된 이러한 자녀신분의 관계를 표현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삼위일체론은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비판적 신론이다. 삼위일체론은 자녀를 아버지에게 그리고 아버지를 자녀에게 묶어 주며,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의 행동과 운명 안으로 이끌고 간다. 그에 반해 아버지 하나님이 가부장주의적으로 생각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아들과 그의 본질적 결합은 폐기되거나 예수의 아들신분은 부정된다. 그러나 만약 예수의 아들신분이 배격된다면, 예수의 아버지, 아바도 배격된다. 만약 삼위일체론이 폐기된다면, 하나님의 개념이 이슬람화할 뿐만 아니라 예수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되고 만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로부터 분리된다면, 그 때에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개념 안에 오로지 지배역할만이 남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표상이 시민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지상의 온갖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3. 그렇지만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의 실천적 결론을 생각할 때, 신약성서는 전혀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공관복음서에서 명백히 가부장주의적 가정윤리인 사도적 가훈(家訓) 윤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이미 지적한 대로, 반(反)가부장주의적 대조윤리(對照倫理)인 그리스도 추종(제자)의 윤리를 제공한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윤리의 토대는 전통적인 성직계급적 이론형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고,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며,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고전 11장). 그러나 추종(제자)의 윤리는 예수의 생애와 메시야적 파송에 맞춰 형성되었다. 그 기본노선은 산상설교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 48). 원수사랑의 계명도 이런 동기에서 주어졌다. 예수가 사용한,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는 해"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는" 비의 비유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비밀을 나타내는 태고적의 모계사회의 비유들이다.

지금까지의 신학적 발전에 따르면, 추종(제자)의 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계시로부터 파생한 진정한 결론이다. 추종의 윤리는 삼위일체론적 아버지 이해와 상응한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교적인 가훈의 가부장주의에서 볼 때, 아무리 교회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주 안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예수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

 

4.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까움 안에서 사는

예수의 아바 비밀은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을 표현한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과 비천한 자들에 대한 이 나라의 개방성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는 친숙한 말을 통해서 가장 강하게 표현된다. 예수와 사귐을 나누었던 여인들은 이 점을 즉각 깨달았다. 그들은 그의 가까움 안에서 육체적으로 치료받고, 일으킴받고, 존중받고,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까움은 메시야 나라의 가까움이요, 그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친밀한 가까움이었다. 하나님의 통치와 나라는 구원하고 해방하는 힘으로 경험되었다. 예수의 아바와의 친밀한 사귐은 그 나라의 축복의 핵심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여인들이 자신들을 예수,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아버지와 일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진술의 진정한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아버지 개념 안에 있는 여러 층들을 항상 거듭 통과해 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수 세기 동안 정착되어 내려온 가부장주의적인 하나님 진술과 가부장주의적인 여성억압의 여러 층들을 통과해 가면서, 우리는 먼저 남성적-성적(性的)인 어법들을 극복하고, 이를 그리스도적-메시야적 어법들로써 대체하여야 한다.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도" 없고, 모두가 "하나이고 약속대로 다함께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갈 3, 28. 29)라면, 이점도 언어로써 표현되어야 한다. 남성적인 어법은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언어를 임의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어는 언어공동체에 의해 지탱되고 각인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의 그러한 언어공동체이다. 당대 사회의 형태들에 적응하면 할수록, 교회는 바로 그만큼 복음의 해방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예수와 그의 복음으로부터 나오는 해방의 힘을 자신의 사귐을 통하여 나타내고 또 주변 사회와 대조적으로 살면 살수록, 교회는 바로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가부장주의적 사회에서 이 자유의 경험은 우선 하나님의 모습을 교정하고, 그에 따라서 아버지의 권위를 사랑의 가부장주의로 조정하는 결과도 낳았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강조되는 한, 그리스도교적인 가부장주의, 다시 말하면, 자비와 사랑에 의해 위로부터 아래로 순화되는 부권주의(Paternalismus)가 생겨났다. 그러나 자비와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선시되는 한, 아버지의 지배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개념의 탈신정주의화(脫神政主義化)와 아버지의 권위의 민주화가 생겨났다.

가부장 사회의 하나님 아버지와 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은 바로 예수 자신 때문이었고, 또 지금도 그러하다. 그를 바라보고 그와 함께 "아바"를 부르는 자는 가부장주의의 법칙과 권력관계와 결별했다. 아버지의 일방지배와 여자와 어린이의 종속 대신에 예수의 여자친구들과 남자친구들의 메시야적인 연대공동체가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권력이 정당하게 분배된다.

오늘 날의 "아버지 없는 사회"에서 이 신앙의 경험은 -가부장주의적인 부성애의 형성을 야기한다. 이 부성애는 나누고 참여하고 자비로우며 책임적인 사랑 안에서 지배주장이나 소유권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탈인간화하고 또 이로 인해 점차로 책임감을 상실해 가는 사회에서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의 경험은 남자들을 비가부장주의적인 부성애로 인도한다. 이 경험은 남자들로 하여금 권력주장과 소유권을 관철하지 않고,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 경험은 남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부성애 안에서 모성애적인 속성들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이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물러나 자녀들의 친구가 될 자세를 갖고 있다. 이들은 자녀들 속에서 자기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들 속에서 자녀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녀들과 함께 걷고, 자녀들을 위해 존재하며, 자녀들이 스스로 변해 가는 그대로 그들에게 미래의 가능성과 변화의 능력을 허용할 자세를 갖는다. 끝으로 이런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영원히 연장하길 원하지 않고, 잠시 동안 필요한 그들의 대리행위(代理行爲)를 포기하길 원한다. 이들은 언제나 자녀들을 위해 존재하려고 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언젠가 자녀들과 함께 삶을 즐기기 위하여 자녀들을 위해 책임을 지려고만 할뿐이다.

남자도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가부장주의의 기형화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길을 가다 보면, 남자도 문지방 아래서만 겨우 존재하는 까마득한 과거의 모계사회의 독특성과 장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무책임적인 어린이의 나라로 되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인간의 진정한 미래는 부계사회와 모계사회의 너머에 있다. 이 미래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