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와 그의 자비의 능력


J. Moltmann , 이신건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1. 하나님은 누구의 아버지인가?

하나님을 위해 "아버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근거를 갖고 있다. 1. 하나는 가부장주의적 세계이해이고, 2. 다른 하나는 삼위일체론적인 그리스도 이해이다. 성서적 전통에서 아버지라는 하나님 이름은 한편으로는 그의 통치의 선하심과 돌보심의 표현으로서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생하신" 아들, "처음으로 난 자"와 맺는 그의 관계의 지칭으로서 언어적으로 사용된다.

사도신경은 두 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한 번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리하고, 다른 한 번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힌 죽임당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한다. 성서에서 아버지 이름이 두 가지로 사용되었고 또 사도신경에서 아버지가 두 번 언급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념이 신학적으로 모호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지칭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가 전능한 창조자와 만물의 주님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처음 태어난 자"로서 우리 모두의 형제가 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기 때문인가? 첫 번째의 경우에는 시선이 피조물과 노예의 의존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위를 향하다가, 두려운 대상인 주-하나님 앞에서 "전능자-하나님"의 신뢰를 일으키는 모습들을 추구한다. 아버지 하나님은 여기서 언어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지 전이된 의미만을 갖는다. 두 번째의 경우에는 시선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다"(요 14, 9)라고 스스로 말한, 많은 형제들과 자매들 중에서 "처음 태어난 자"를 향한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와 그의 형제적 사귐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의 아버지"가 되며, 오직 그의 사귐 안에서만 하나님의 자녀신분은 경험된다. 이 자녀신분의 덕택에 우리는 예수처럼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아버지 이름은 언어적인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출생적인 관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경우에 아버지 이름은 친구와 같은 지배를 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사랑의 기원관계이다. 하늘의 "주-하나님"으로 이해되는 아버지는 고난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지만, 그는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들의 아버지"로 이해되는 아버지는 아들의 운명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아들이 있는 곳이라면, 아버지도 거기에 있다. 만약 아들이 고난받으면, 아버지도 함께 고난받는다. 만약 아들이 기뻐하면, 아버지도 기뻐한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왔으나,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의존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상호 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른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 안에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 14, 10 이하). 그리고 요한복음이 말하듯이, 이들은 상호 내주(內住)로 인하여 "하나"이다. 실로 하나님은 누구의 아버지인가? 그는 "만물의 아버지"이고 그러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한가, 아니면 그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고 그러한 자로서 "우리의 아버지"와 아버지와 같은 만물의 창조자이기도 한가? 이 문제에서 하나님의 "지배"에 대한 이해가 결정된다.

 

2. 가부장주의적 하나님

가부장주의적 사회질서는 가정에서 남자에게 모든 권위를 부여한다. 아버지는 그의 아내와 자녀들의 주(主)이고 소유자이다. 아버지는 자유롭지만, 아내와 자녀들은 그렇지 않다. 그는 "가정의 아버지"(pater-familias)로서 그의 가족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갖고 있고, 그들의 가장 높은 권위이다. 그는 자녀들을 낳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에게 속해 있지, 어머니에게 속해 있진 않다. 그는 아내와 가족의 머리이다. 이들은 그를 섬겨야 하고, 그를 존경해야 한다.

그 다음의 사회 단계에서는 "아버지의 나라"가 정치적으로 국가의 우두머리, 영주, "pater-patriae"를 통해 다스려진다. "국가의 아버지"는 정치적 차원에서 가부장주의적인 가족관계를 재현한다. 그는 내부를 향해서는 엄격하고 자비롭게, 외부를 향해서는 위엄과 능력으로 다스려야 한다. 그에 의해 통치되는 자들은 자신들을 그의 "신하들"로 이해한다. 그는 신하들에 대한 권리를 갖지만, 신하들이 그에 대한 권리를 갖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그의 순종적인 "국가의 자녀들"에게 그의 "은총"을 아끼지 않을 것을 기대한다.

종교적 차원에서는 성숙하지 못한 백성이 교회적으로 목사-주(主)와 영적인 "아버지들"을 통해 보살핌을 받는다. 교회의 구조에서도 목사-"자녀들"에서부터 목사들, 감독들과 총대주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거룩한 아버지"로 이어지는 가부장주의적 가족관계가 형성된다. 권위와 권리는 위로부터 나오며, 아래 사람들에겐 순종, 의존과 의지가 지배한다.

결국에는 가족적, 정치적 및 교회적 피라미드들이 하늘의 가장 높은 권위, 즉 주-하나님, 전능자-아버지를 가리키는데, 바로 이로부터 이 피라미드들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주와 소유자로서 충만한 권위를 소유하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만물 위에 뛰어난 그는 두려움과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부장주의적 세계질서 -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아버지, 국가의 아버지, 가족의 아버지 -는 하나의 일신론적(一神論的) 질서이지, 삼위일체론적 질서가 아니다. 이 아버지 종교는 개인 안에서 초자아(超自我)를 생성시키는데, 무신론자들은 바로 이에 맞서서 지금 반항하고 있고, 과거에도 반항했으며, 앞으로도 반항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은 이에 맞서서 자유와 자율적 책임감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위대한 세계의 주가 통치하는 곳에는, 자유를 위한 여지는 전혀 없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를 위한 여지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아버지라는 하나님 이름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이름이 나오는 곳에서, 이것은 "주"의 동의어로서 사용되며, 이스라엘이 세계의 창조자, 역사의 주 그리고 자신을 선택한 계약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그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표현한다(신 32, 6; 사 63, 16; 렘 31, 9). 계약의 관계는 너무나 친밀하게 이해되었기 때문에, 계약의 하나님은 "아버지"로, 그리고 계약의 백성은 "독생자"로 불릴 수 있었다. 호세아는 심지어 은밀한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바울도 이스라엘이 "자녀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롬 9, 4). 비록 이스라엘이 가부장주의적 질서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을 특정한 성(性)에 고정시켰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십계명은 남자들의 계명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두 성을 통하여 표현된다(창 1, 27).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는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도 설명된다(사 66, 13). 주이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이" 그리고 "어머니와 같이" 행동하며, 그의 "독생자" 이스라엘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신약성서에서는 무엇보다도 바울의 머리의 신학(Kephale-Theologie)에서 가부장주의적 질서가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다"(고전 11, 3; 고전 3, 22-23; 엡 5, 23; 히 12, 5-10 참조). 머리의 신학은 머리-몸 관계의 가부장주의적 위계질서를 전제한다. 비록 이 질서가 그리스도의 섬김을 통해서 수정되긴 하지만, 이 질서는 여전히 유지되며 그것을 통해 더 고정된다. 머리의 신학도 일신론적으로 사고한 것이지, 아직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사고한 것은 아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은 여자 안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방식으로 남자 안에서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원천과 종국이듯이, 남자도 여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3. 아버지로부터의 아들의 탄생

삼위일체적 아버지 이해는 공관복음서 구절에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 27). 요한의 신학은 아버지와 아들의 배타적인 일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 구절을 주석하는 것이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본다"(14, 9).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이다(10, 30).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됨은 아들과 맺는 그의 관계를 통하여 배타적으로 규정된다. 그러기에 그의 아버지됨은 오로지 아들의 역사 안에서만 계시되며, 아들과의 사귐 안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영을 통하여 경험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아버지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가부장주의적인 아버지 종교를 잊어야 하며, 독생한 형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 이해에서 하나의 신학적인,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론적인 이름이지, 일반적으로 종교적, 정치적 혹은 우주론적인 표상이 결코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라면, 그는 오로지 아들됨의 영 안에서만, 다시 말하면, 자유의 영 안에서만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롬 8, 15; 고후 3, 17). 영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저 아버지 종교의 세계 가부장과 실천적으로 구분시킨다.

만약 세계의 창조와 아들의 출생이 분명히 구분된다면, 아버지의 개념 안에 있는 이중성은 제거된다. 창조로부터 생성되는 것은, 언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들 간의 아버지 관계가 결코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계사로부터 전적으로 인식된다면, 창조와 섭리로부터 하나님은 오로지 "주"로 인식될 뿐이다.

그의 아들에 대한 관계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언어적으로 "아버지"로 불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은 아들과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그의 파악불가능한 전능으로부터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아버지로서 하늘과 땅을 창조한다.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아버지라는 하나님 이름은 아들 예수와 풀 수 없이 결합된다.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를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리스도화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론은 아버지를 아들의 운명 안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이 오직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면, 이 과정은 당연히 "출산"이나 "탄생"으로 표상될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아버지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아들을 출산하고 탄생시키는 아버지는 결코 "남성적인" 아버지만은 아니다. 그는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이다. 그는 단성적(單性的)으로 남자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양성적(兩性的)으로 혹은 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유일하게 출산된 그의 아들의 부성적인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게 탄생된 그의 아들의 모성적인 아버지이기도 하다. 바로 정통주의의 교리 전통이 여기서 가장 정교한 진술을 하게 된다. 톨레도 공의회(675년)에 따르면, "아들이 무로부터나 어떤 실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체(母體)로부터(de utero patris), 다시 말하면, 그의 존재로부터 출산되거나 탄생되었다(genitus vel natus)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상의 근거는 아마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구약성서의 전승 속에 있는 것 같다. "rahm"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궁(rächäm)을 뜻하기도 하고, 수태할 수 있는 여자의 몸 안에 위치한 대단히 고통스러운 자비(rachämin)의 감정을 뜻하기도 한다. 또 다른 병행절에서는 내면적인 것, 고통 중에 오그라드는 내장을 뜻할 수도 있다. 자비는 어머니의 감정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자비는 결코 유순한 마음이나 감정적 행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의 고통과 같은 그러한 창조적인 사랑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비는 동정이나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인한 당황보다 더 큰 것을 뜻한다. 자비는 연대감도 넘어선다. 자비는 죽어 가는 자들을 살리고 사로잡힌 자들을 자유케 하며 포로된 자들을 풀어 주는 고통을 나타낸다. rachämin을 라틴어로 misericordia로 번역함으로써, 마음은 인간의 중심으로 여겨졌다. 다른 사람들의 비참함은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며, 마음은 참여하고 나누는 사랑으로 점화한다. 강한 참여의 요인들은 보존되겠지만, 생명을 잉태하는 자비의 능력은 상실된다. 만약 고대 공의회의 선언에 따라서 아들이 아버지의 모체로부터 나온다면, - "시간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면", - 그는 아버지의 영원한 자비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버지됨은 생명을 잉태하는 이 자비와 다름이 없다. 만약 우리가 신약성서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의미는 바로 하나님이 생명을 잉태하는 자비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무궁무진하고 창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랑은 무궁무진하게 잉태하고 자비를 베푸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 양성적인 진술의 또 다른 귀결은 가부장주의적인 일신론에 대한 거부일 수 밖에 없다. "하늘 아버지"의 일신론은 부계사회의 종교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것은 마치 추측컨대 "어머니 땅"의 범신론이 그 이전의 모계사회의 종교였던 것과 같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와 하나님의 잉태하는 자비에 대한 진술로써 하나님 이해 안에 있는 일방적인 남성적 비유어들을 극복하는 첫 실마리를 제공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모계사회적인 표상으로 넘어가자는 것은 아니다. 종속이나 우월권이 없는 여자들과 남자들의 공동체로 인도하려는 것이 그 진정한 의도이다. 인류의 처음 태어난 형제와의 사귐 안에서 여자들과 남자들은 하나이며, 다같이 약속의 유업을 물려받을 상속자들이다(갈 3, 28 이하). 성차별주의와 계급지배로부터 해방된 인류의 공동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나는 형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자비의 고통

고대의 삼위일체론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침해할 수 없는 통치자의 모습과 혼합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신론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고난불가능성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현대의 삼위일체론적 기획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으로부터 출발하여, 침해할 수 없는 통치자의 모습과 함께 하나님의 무감정의 공리(公理)도 극복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가장 깊은 근거는 영원한 사랑인 하나님의 열정(Pathos)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의 아들의 고난과 죽음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이전에는 배격된 하나님 고난이론과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의 진술들을 다시금 수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난당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인하여 신학적인 가부장주의는 극복되는가?

아브라함 헤쉘(Abraham Heschel)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과 이스라엘과 함께 겪는 그의 고난을 해석하기 위하여 그의 "하나님의 열정의 신학"을 발전시켰을 때, 그는 하나의 양극적인 하나님의 개념을 구상해야 했다. 하나님은 자유롭고 그 어떤 숙명에도 종속되지 않지만, 그의 열정을 통하여 계약 안에서 이스라엘과 단단히 묶여 있다. 그의 내주(內住: schechina)를 통하여 전능한 자는 그의 백성의 고난을 나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는 스스로 그의 백성의 편에 선다. 그는 함께 백성의 고난을 당한다... "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의 열정(Theopathie)의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구분"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여기서 그 폭넓은 고난의 능력 안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사상은 영국의 신학에서도 하나님의 "고난가능성"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님이 소유하고 있고 그의 아들 안에서 계시한 전능은 고난당하는 그리고 동고(同苦)를 통하여 자비를 베푸는 사랑의 전능이다. 골고다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가 계시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사랑은 고난을 당할 수 있다. 사랑의 고난가능성은 자기희생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자기희생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이다. "그것은 결국 항상 십자가이다. 실로 하나님은 전능한 자가 아니라 한 아버지의 근심과 한 아버지의 무능을 겪는 아버지이다. 이 근심과 무능 가운데 사랑의 능력이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 - 영광스러우며, 고난당하며, 십자가에 못박힌."

"하나님의 근심"(congoja)의 표상을 인상깊게 설명한 자는 스페인 종교철학자 미구엘 드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다. 그리스도의 고뇌 안에서 온 세계의 고통이 드러난다. 그 안에는 또한 세계의 고통을 친히 수용하는 "하나님의 근심"도 계시된다. "골고다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통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무한한 고통도 반영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고통당하는 자로 계시한다. 고통당하는 자로서 그는 함께 고난당한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그는 측량할 수 없는 그의 고통으로써 모든 고통을 덮는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자로서 그는 우리도 함께 고난당할 것을 요구한다.

끝으로 우리는 니콜라이 베르쟈예프(Nikolai Berdjajew)에게서 상세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안의 비극"의 신학을 보게 된다. 그는 인류의 자유의 역사를 피조물의 자유를 원하기 때문에 고난당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수난사(受難史)로 이해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중심에서 생겨나서 골고다에서 완성되는 하나의 유일한 운동이다. 하나님의 수난은 인류의 자유의 비극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사상들을 받아들여서 삼위일체론적으로 더 정확하게 세분화해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죄많은 이 세상에 아들을 보낸 사건 안에서 아버지는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는 세상의 죽음의 숙명을 위해 자신을 개방한다. 십자가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채 죽음의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맛보며, 그 안에서 아들에게 버림받은 고통을 당한다. 아버지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상응한다. 우리가 죄의 자기폐쇄성으로부터 해방받은 것과 고난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온 삼위일체의 자비로부터, 즉 아들의 죽음으로부터, 아버지의 근심으로부터 그리고 영의 인내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의 세상의 숙명에 개입하고, 그의 피조물들을 그의 은밀한 사랑의 생명 안으로 받아들이며, 이들에게 그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고난당하고 자비를 베푸는 그의 사랑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해방시킨다. 하나님다운 것은 자비이지, 가부장주의가 말하듯이, 권능과 초능력, 전능이 아니다. 이 자비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이러한 의미에서 전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고통 안에 있는 여성적 요소를 종종 피에타, 즉 죽어 가는 아들을 품에 안고서 고뇌하는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보아 왔다.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을 인간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며, 그 고통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시작이 아닌가?

 

5. 지배와 자유

삼위일체론에 의한 일신론의 극복과 십자가의 신학에 의한 무감정한 하나님의 극복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의 지배와 인간의 종살이는 이를 나타내는 유일한 상들이 될 수 없다. 자비를 베풀고 고난당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자유는 더 깊이 체험된다. 하나님이 "주"로 신앙되는 곳에서는, 자유는 하나님의 종의 신분으로 체험된다. 가장 높은 분의 종이 되는 자는 물론 이 높은 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긴 하겠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유롭다. "우리는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에게 더 순종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아버지"로 신앙되면, 자유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안에서 체험된다. 자신을 하나님의 딸이나 아들로 이해하는 자는 하나님의 가족의 동등한 권리를 갖는 지체이다. 그가 한 주인의 말씀에 귀기울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딸이나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아버지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은 자녀들에게도 속해 있다. 끝으로 영 안에서는 아들관계마저도 넘어서는 자유가 체험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친구의 신분이다. "하나님의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는 더 이상 하나님 "아래" 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산다. 이들은 하나님의 근심과 기쁨에 참여한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요 17, 21).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고난을 하나님 안에서 이해하도록 하며, "세계 안에서 겪는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한다. "하나님 안의 생활"은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인식과 더불어,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 안의 하나님의 메시야적 고난에 참여하는 제자의 길 속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우리를 위로하는 인식 속에서, 그리고 이렇게 우리를 자유케 하는 실천 속에서 고대의 가부장주의적인 "전능자 하나님"의 표상들과 "지배자-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상들은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