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론(神正論)에 대한 물음과 하나님의 고통


J. Moltmann , 이신건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고난의 경험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 한 편으로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무의미한 상황 속에서 의미를 묻는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허용하는가?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고난을 고통스러운 의식(意識)으로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고통을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한다. 인간은 그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가? 첫째 질문은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물음이다(신정론). 둘째 질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기 위한 신비적 물음이다.

신정론의 개념은 라이프니쯔(G. W. F. Leibniz)에게로 소급된다. 그렇지만 이미 스토아 철학자들이 신정론에 대한 물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다: Si Deus - unde malum(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만약 신이 악을 제어하기를 원하더라도 그럴 능력이 없다면, 그는 선하지만 전능하지는 않다. 아니면 만약 신이 악을 제어할 능력이 있더라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전능하지만 선하지는 않다. 하나님이 삶과 죽음을 지배하는 전능한 주로, 그리고 역사의 조종자(concursus generalis: 일반 협동)와 각 개인의 삶의 조종자(concursus specialis: 특별 협동)로 파악되는 한, 신정론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칸트(I. Kant)는 이를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는 신정론에 대한 물음을 "세계 안의 목적배치적(目的背馳的) 요소들로부터 이성이 제기하는 비판에 대항하여 최상의 세계원인의 지혜를 방어하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이해했다. 이로써 그는 계몽시대의 물리신학적 신증명을 전제했으며, 모든 신정론은 자연과학적으로 경험가능한 것의 초월적 조건 안에 놓여 있는 인간의 유한한 이성의 경계선을 넘어서기 때문에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을 이성에 근거해서 입증했다.

종교사와 철학사에서 우리는 항상 다시금 세 가지 해결책을 발견한다. 1. 첫째는 세계 안에서 서로 투쟁하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라는 이원론적 표상이다. 이 투쟁에서 인간은 선의 원리 편에 서야 한다. 모든 선은 신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악과 죄는 반신(反神)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이원론은 페르샤 종교, 마니교 그리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묵시문학에서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2. 둘째는 일원론적 표상이다. 오로지 선만 존재하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선하다. 악은 선의 결핍이거나 존재의 파괴이다. 악은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고, 오로지 존재부정의 가치만을 갖는다. 3. 셋째는 변증법적 표상이다. 악은 역사 안에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선에 봉사한다. 왜냐하면 선은 부정적인 것의 부정 안에서 그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상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역사신앙 안에서 발견되며, 특히 독일 관념주의의 역사이해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서적 전통, 특히 시편과 욥기, 비탄시와 공관복음서의 수난사 안에서 신정론에 대한 물음은 세계과정의 연구로부터 이론적으로 제기되지 않고, 하나님 신앙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실존적으로 제기된다.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라면, 왜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당해야 하며, 왜 불경한 자들이 잘 살아가는가? 하나님이 신실한 분이라면, 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백성의 폭력에 내맡겨지는가?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인의 십자가 형틀에서 죽도록 "버렸으며"(막 15, 34), 그를 "내어 주었는가"(롬 1, 32)? 우리는 성서에서 다양한 차원의 해답을 발견한다. 1.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전가한 악이 있다. 악한 행위는 악한 결과에서 이미 그 스스로 형벌을 받고 있다. 이러한 행위-결과의 상관관계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공의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악한 결과의 발생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만, 인간의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는 특별한 하늘의 징계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일시적인 저주와 영원한 저주를 받도록 "내어 버려진다"(롬 1, 18 이하)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을 버리는 자는 하나님에게 버림받는다. 이러한 생각은 구약성서의 역사서에서 그리고 마태와 바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 불의한 인간이 아니라 의로운 인간이 겪는 고난도 있다. 의로운 자의 고난에는 행위-결과의 상관관계를 적용할 수 없다. 욥기가 말하듯이, 죄없이 고난을 당하는 의로운 자의 하나님 신앙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꾸준한 항의 안에서만 견지될 수 있다. 하나님의 행동은 측량할 수 없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일이란 끈질긴 항의나 침묵하는 겸손(롬 9, 20)이다. 3. 끝으로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 자신도 겪는 고난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그의 계약을 통하여 그의 이름과 그의 영을 그의 백성 안에 거하게 한다. 이스라엘이 공격당하면, 하나님도 역시 공격당한다. 이스라엘이 박해당하면, 하나님은 그의 "내주"(쉐히나)를 통하여 친히 그 고난에 참여하며, 이스라엘과 함께 포로가 되어 떠난다. 계약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고난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함께 고난받는 하나님이 자신을 친히 구원하고, 백성의 해방을 통하여 자신을 영화롭게 할 바로 그 때에, 이스라엘은 구원받게 된다. 함께 고난받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랍비적, 카발라주의적 표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 안에서 하나님의 수난이 계시된다는 그리스도교적 표상 안에 그 병행요소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된다. 이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영원한 사귐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의 사랑의 아들을 뒤따라서 십자가로 향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내어 준 것"(롬 8, 32)은 그리스도가 자비롭고 함께 고난받으며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그의 고난은 신적인 고난, 다시 말하면, 연대하고 구원하는 고난이다.

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중세기의 플라톤 사상의 도움으로 신정론 문제를 풀려고 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선의 결핍이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을 선하게 창조했기 때문에, 악의 원인이 아니다. 도덕적인 악은 인간의 행위이고 그래서 죄다. 물리적인 악은 선을 위한 교육과 영혼의 정화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허용된다. 형이상학적 악(마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에 봉사할 수 밖에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하나님 변호를 인간의 법정 앞에서 후퇴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인간을 변호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불의한 죄인을 은총으로 의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의(義)를 창조적이고 의롭게 하며 조정하는 의로서 입증한다. 그 의는 의롭게 하는 의(justitia justificans)이지, 분배되는 (justitia distributiva)가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게 함으로써, 자신을 의로운 자로 입증한다. 용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고, 성화는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래서 부활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된다. 인의론(認義論)은 신정론 문제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대답이었다. 그들은 원래 상호적인 인의(justitifictio Dei activa et passiva)의 형태를 가졌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게 한다. 그리고 신앙하는 자들은 그의 판결을 옳다고 승인함으로써, 하나님을 의롭게 한다.

고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와 계몽주의의 시대에 와서 비로소 악과 고난에 대한 물음은 다시금 일반적 세계통치의 틀 안에서, 다시 말하면, "자연신학" 안에서 제기되었고, 다음과 같은 대답들이 주어졌다.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지만, 이를 용납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악을 조종하여, 분명히 악이 신앙하는 자들에게 선을 위해 이바지하도록 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그 한계선을 설정하고, 악은 세계의 마지막 때에 그의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히 극복될 것이다. 루터교회의 철학자 라이프니쯔(Leibniz)는 이 세계가 "가능한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라는 낙관주의적 표상을 이로부터 도출했다는 사실은 이해할 만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위하여 도덕적인 악을 허용하며, 물리적인 악을 인간의 교육과 정화를 위한 징계로서 사용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대한 이러한 경건한 신뢰와 계몽기의 이러한 낙관주의적 세계관은 1755년에 일어난 리스본의 지진 경험 때문에 무너졌다. 하루 밤에 만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대재앙은 무슨 신학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러한 일을 허용하는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인가? 아니 이 하나님은 도리어 잔인한 괴물이 아닌가? 이 세계는 그의 선하고 질서잡힌 창조물인가? 아니면 이 세계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혼돈인가?

18세기에 리스본의 지진과 함께 세계를 인도하는 선한 하나님과 세계의 조화에 대한 신앙은 깨어졌다. "하나님은 죽었다"가 범세계적인 신학의 붕괴와 유럽의 저항적 무신론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이라는 말하기 끔찍스러운 범죄와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20세기에는 인간의 자기신뢰도 깨어졌다. 1945년의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래로 인류는 그 마지막-시대로 접어들었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핵종말이 언제나 가능한 그러한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심각한 인도주의의 붕괴와 유럽의 허무주의를 대변하는 상징이다. 어떻게 우리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하나님에 대해 여전히 신뢰에 가득찬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히로시마 이후에도 인간에 대해 여전히 신뢰적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에 관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대화에서 중요하게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이다: 1. 의로운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변호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불의와 폭행의 역사에서 대답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물음은 결코 포기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물음은 하나님에 대한 물음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묻는 것은 "살해자가 궁극적으로 그의 희생자를 딛고 승리하지 않도록"(M. Horkheimer) 정의를 위해 외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정의를 위한 배고픔 안에서 존속한다. 2. 아우슈비츠 안의 신학, 다시 말하면, 희생자의 기도와 외침을 수용하지 않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쉐마 이스라엘과 주기도문이 낭송될 때, 하나님은 임재했다. 저 지옥에서 인간적으로는 아무 것도 희망할 수 없었을 때, 그는 고난의 동반자로서 위로를 주었다. 아우슈비츠의 말할 수 없이 끔찍스러운 고난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기도 했다. 3. 고난으로부터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이론적, 형이상학적인 대답을 줄 수 없거니와, 주어서도 안 된다. 욥처럼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자는 왜 자기가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지 격분하면서 종교적인 해명을 제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통 중에서 우리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신비적인 해답이 있다. 우리의 진정한 고난은 그의 고난이기도 하다. 우리의 슬픔은 그의 슬픔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통은 그의 사랑의 고통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하다고 말할 때, 고통의 여지를 갖는 그러한 완전한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고, 우리의 경배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고통 중에서 무감정하고 무관심한 하나님을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는 하나님이기도 하다: "슬픔의 쇳덩이 아래서/ 인간의 심장이 무너져 내릴 그 때에/ 하나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리는 똑같은 신음소리를 듣는다"(T. Rees: Abbot's Leigh, 2절). 언젠가 카타리나(Katharina von Siena)가 "나의 하나님, 나의 마음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있었을 때,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라고 소리치자, 그녀는 이런 대답을 들었다: "나의 딸아, 너는 내가 너의 마음 안에 있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느냐?"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자는 알든 모르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절규와 함께 외친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을 깨닫는 자가 즉시 느끼는 점은, 하나님이 저 하늘에서 신비하게 마주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의미에서 그와 함께 소리치는 인간적인 하나님이요, 그 자신이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때에 자신 안에서 부르짖고 자신을 대신하여 탄식할, 같은 감정을 지닌 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고난의 심연과 죄악의 지옥 안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영의 사귐을 가져옴으로써, 우리가 고통 중에서도 침몰하지 않고 여기서든 저기서든 고난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게 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위로이다.

 

참고문헌

G. W. F. Leibniz, Essasis de Théodicée sur la bonté de Dieu, la liberté de l'Homme et l'origine du mal, 1710; I. Kant, Über das Mißlingen aller philosophischen Versuche in der Theodizee, Werke ed. W. Weischedel, Frankfurt 1964, 105-124; A. Heschel, The Prophets, New York 1955; J. Hick, Evil and the God of Love, New York 1966; E. Wiesel, Die Nacht zu begraben, München 1986; P. Kuhn, Die Selbsterniedrigung Gottes in der Theologie der Labbinen, München 1968;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München 1972; B. Albrecht, Gott und das Leiden der Menschen, München 1976; D. Sölle, Leiden, Stuttgart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