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형제로서 말하기

J. Moltmann , 이신건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1. 비판적 질문들

고전적인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여기다가 "그 외아들"(unigentium)을 덧붙인다. 이 그리스도 고백은 종종 몰이해와 반박에 부딪친다. 이것은 오늘 날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난 일이 아니다. 나는 세 가지 이의(異意)를 언급하고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1.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을 거쳐 하늘로 올라간 이 하나님의 아들은 참 인간이었는가, 아니면 "우리의 지상적 육체와 피"를 단지 걸치기만 한 천상적 존재였는가? 이 하나님의 아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찬양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에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 하나님에서 나온 참 하나님, 창조되지 않고 태어난, 아버지와 하나인 존재"는 유대인 나사렛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저 나사렛 예수는 자기 자신을 이런 빛 안에서 보았는가? 그는 이 형이상학적인 빛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겉모습만으로는 우리가 그를 알아볼 수 없게 되는가? 그래서 사도신경은 그의 생애와 활동에 관해서는 전혀 할 말이 없는가?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되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신분은 그의 영원한 신적인 본성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의 아들신분은 그의 생애에서 인격(Person)을 형성하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간적 본성은 인격성(Personalität)을 갖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영원한 신인(神人)을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Persönlichkeit)과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현대 개신교 신학은 200년 동안이나 진실한 의지로써 진지하게 이 질문을 철저히 성찰해 왔다. 이 신학은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의 아들과 역사적인 예수를 공통분모로 묶는 데 성공했는가? 교리적으로 하늘로부터 온 신인을 말하거나, 아니면 역사적으로 나사렛에서 난 하나님의 인간을 말하는 딜레마만이 남지 않았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신이 된 하나님의 로고스인가, 아니면 영으로 충만한 인간인가?

2. 비록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고백으로 인하여 억압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그래도 새로운 이의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하나님의 아들은 한 남자가 아닌가? 이로써 첫 창조보도에 따르면 남자들과 동등하게 그리고 다같이 "하나님의 형상"인 여자들은 뒤로 밀려나는 게 아닌가? 니케아 신경이 찬송한 하나님의 "인간되심"은 단지 하나님의 남자되심에 불과했는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한 여자가 정신적으로 한 남자가 되지도 않고 남자의 사고방식에 얽매이지도 않고서 남성적인 구원자에게 다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남성적으로 이해되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신분을 처음으로 문제삼은 것은 결코 현대 여성주의자들의 항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남자되심이라는 이런 이교(異敎)로 이끌었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이런 오해를 낳은 것은 도리어 천 여년 동안 여자의 서임을 반대했던 남자의 주장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기 때문에, 예수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 사제가 아닌 남자 사제만이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다. 로마-카톨릭 교회와 정교회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신분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러나 마르다(요 11, 27)와 베드로(막 8, 29)가 예수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을 때, 그들은 이런 남성주의와 여성배제를 생각했던가?

3. 이와 못지 않게 현 세대에서는 별반 의식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중대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신분에 대한 또 하나의 이의가 있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신분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그리스도 신앙과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사람들은 즐거이 "아들의 종교"라고 부른다. 그들에게서 중심이 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그리스도 신앙에 충실해야 한다고 느끼는 공동체는 자신을 즐거이 "형제단"과 "형제"-공동체라고 불렀으며, 형제적이고 자매적인 생활형태를 발전시켰다. 형제관계 안에서, 자매관계 안에서 그리고 오늘 날에는 형제-자매관계 안에서 그들은 그들의 "맏형" 예수와의 친밀한 영적인 사귐을 발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과의 형제적 결합 안에서 평등과 자유를 발견한다. 다같은 하나님의 자녀신분 안에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것은 신약성서와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연유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현들과 함께 동시대인들의 횡적인 결합은 세대들의 종적인 결합에 비해 우선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발적인 사귐이지, 자연적인 사귐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등하고 자유로운 형제들과 자매들의 자발적인 사귐 안에서는 부모들과 자녀들의 자연적인 사귐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과의 자발적인 사귐 안에서 나는 내 조부의 "형제"가 되는가? 내 딸은 세례를 통하여 내 "자매"가 되는가?

"아들의 종교"의 형제관계는 "아버지의 종교"의 가부장주의와 꼭 마찬가지로 학파를 이루었다. 그리스도인들의 형제단은 "옛 세계"의 부성적인 전통의 힘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미국 필라델피아에 정착했다. "새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이메이슨 결사단의 인도주의는 옛 봉건사회의 신분과 계급을 깨뜨리고, 시민적인 "기쁨에 바치는 노래"를 선포했다: "모든 사람들은 형제들이 되리라..." 현대의 민주주의적인 국가형태는 프랑스 혁명의 원리 "자유 - 평등 - 형제애"에 근거해 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사람들은 형제들이 된다"는 것을 말 그 뜻대로 받아들인다면, 여자들, 어머니들, 아버지들과 자녀들은 배제된다. 여자들은 자발적인 "자매관계"의 횡적인 결합을 통하여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부모들과 자녀들은 그렇게 되지 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인 형제관계와 자매관계를 일방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세대들 간의 계약"을 무효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실제적인 위험이다. 만약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자녀신분을 나타내는 패러다임이라면, 그의 가족과 어린이 멸시에 대한 그의 거부는 그의 교회를 위해 표준적인 잣대가 되는가?

2. 하나님의 자녀신분의 안에 있는 예수

만약 우리가 복음서에 따라서 예수의 사화(史話)들을 추적해 본다면, 우리는 먼저 예수의 성령세례를 목도하게 된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이 하셨다"고 사도행전 10장 38절은 요약한다. 이것은 예수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을 말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예수는 비할 바 없는 영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의 모습으로 그에게 내려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은 그 안에서 그의 쉐히나, 그의 영속적인 임재를 발견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들과 예언자들의 경우와 같이 일종의 "기름부음"이지만, "한량없는"(요 3, 34) 기름부음이다. 예언자 이사야의 메시야 약속(사 61, 1이하)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메시야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공의, 자비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의 자비 경험과 하나님의 영 경험은 본질적으로 함께 속한다.

이 영 경험과 함께 예수에게는 하늘이 열린다. 그는 하나님과 메시야적 자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와 사랑하는 아버지, 친밀한 아바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 이 자녀-아바의 관계는 아버지-아들의 관계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밝히는 점은, 강조점이 예수의 남자됨이 아닌 그의 자녀됨에 놓여 있으며, 하나님의 아버지됨이 아닌 그의 말할 수 없는 가까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메시야적 자녀 예수와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 아바 간의 상호관계는 처음부터 배타적인 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는 항상 "내 아버지"라고 말하며, 그에 따라 자신을 그의 유일한 자녀로 이해한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 27).

이 이야기에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신분을 성령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는 아들을 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이 예수의 하나님 관계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자녀신분을 받으며, 그처럼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롬 8, 15)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님의 영 안에서 일어난다. 이 원래의 영-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아들됨과 하나님의 아버지됨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토대이다. 그렇지만 이 관계는 예수가 30살 때에 세례받으므로써 시작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로부터 양자적(養子的) 그리스도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견해로는 예수가 세례 요한 이후 처음으로 영이 충만한 인간이었고, 그와 똑같은 많은 형제들과 자매들 중의 장자였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자기 자신들을 그의 "자녀들"로 알고 있는 모든 신앙인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예수는 영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복음의 서언에 나오는 로고스-그리스도론과 나중에 이로부터 발전된 두-본성의 그리스도론에 맞서서 이 양자적 영-그리스도론을 내세웠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강요하는 하나의 양자택일인가, 아니면 예수를 인간이 된 하나님이 아니라 영이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는 현대의 자유주의적 개신교사상의 반영인가? 나는 이 양자택일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고 믿지 않는다.

1. 공관복음의 영-그리스도론도 신앙인들의 하나님 관계에 반해 예수의 하나님 관계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자녀신분은 신앙 안에서 은총으로 경험된다.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의 자녀신분을 전제하되, 패러다임으로서가 아니라 이 은총의 원천으로서 전개한다. 그의 자비를 통하여 예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열어 보이며, 사람들을 그의 하나님 관계 안으로 받아들인다. 만약 우리가 은총으로 인한 하나님의 자녀신분을 달리 표현하되, 나그네를 자녀로 혹은 불경한 자를 하나님 사랑의 수혜자로 받아들이는 은혜로운 "입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그 근거와 원인인 예수의 하나님의 자녀신분도 그 자체로서 단지 일종의 입양일 수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예수의 하나님 관계를 배타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입양적인 하나님 관계에 반해 출생적인 하나님 관계라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우연한 하나님 관계에 반해 본질적인 하나님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2.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그리고 하나님의 영 안에서 경험된 예수의 하나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다. 예수는 사랑하는 아버지 아바와 관계를 맺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 예수와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상호관계에서 논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수관계예수의 하나님 관계보다 앞선다. 왜냐하면 전자가 후자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이 예수 위에 "머물고" 그 안에 거하는 사실로 인하여 영속화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러한 예수관계가 하나님 자신처럼 신적인 것이며, 그것이 예수가 세례를 받던 그 시간적 순간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공관복음의 전승은 예수의 성령세례와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예수가 단지 "성령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령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말하기 위하여 그것은 성령으로 인한 예수탄생으로 되돌아간다. 예수가 성령세례를 받은 때가 세례 때이든, 혹은 어머니의 몸에 있을 때부터이든, 혹은 이미 수태부터이든, 그 시점을 고정시키기에는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 전승사에서 분명히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의 사람들이 현대적인 방식에서 직선적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시간의 심층차원 안에서 영원을 염두에 두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은 사람들에게서는 시간적으로 경험된 카이로스를 의미한다. 하나님에게서 그것은 그의 "영원한 현재"이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 43)는 십자가 상의 말씀도 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오늘"은 수난절과 관련된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도 예수가 이 날에 "낙원으로" 갔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그는 음부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이 "오늘"도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더 나아가 성령 안의 예수탄생으로부터 예수가 영 안에서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선재(先在)했다는 요한복음 서언의 주장으로 역추론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우리가 - 어떤 시기에 있었든지 상관없이 - 예수의 영 경험을 하나님 경험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경험을 하나님의 경험으로도 이해한다면, 그 우연적인 내재성 안에는 영원한 초월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말하자면 이 영 경험의 더 깊어지는 층들을 발견한다. 예수가 하나님과 맺는 아바 관계의 바탕에는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녀와 맺는 예수 관계가 놓여 있다. 하나님의 이 예수 관계는 하나님 자신처럼 신적인 것이다. 이것은 영원부터 예견된 것이다. 아들의 선택, 그의 파송, 그의 희생, 그의 부활과 승천 안에서 하나님의 시간적 결의(決意)가 아니라 영원한 결의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아버지의 임의적인 행위가 아니라 본질적인 행위이다.

하나님과의 아바관계를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관계 안으로 자란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 관계를 통하여 그는 영원부터 그에게 속한 역할 안으로 자라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의 역사는 그의 "메시야 비밀"의 역사로서 이야기된다. 그의 신적인 비밀은 그의 수난, 죽음과 부활 안에서야 비로소 분명히 그 자신에게도 풀린다. 그러므로 원시 그리스도인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신분을 인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부활한 자의 부활경험에 의존한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하나님 관계와 하나님의 예수관계를 구분한다면, 그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신분과 그의 역사적 하나님 경험을 서로 대립시킬 수 없다.

3. 이와 못지 않게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에 관해 말한 메시지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 본질적인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통찰은 분명히 아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한, 그리고 병든 자들의 치유와 소외된 자들의 용납을 통하여 가까이 왔다고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용어 그대로 "왕의 통치"가 아니라, 1. 예수의 아바 하나님의 통치이며, 2. "주"(主)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살리게 하는 하나님의 자비의 세계이다. 버림받고 병들고 죽어 가는 백성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공의를 계시한다. 이사야 11장 4절에 따르면, 메시야는 연약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억눌린 자들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공의를 온 땅에 확산시킬 것이라고 한다(사 61, 1 이하와 눅 4, 18도 참조하라).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과 격리당하는 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로부터 그가 계시한 하나님만을 추론하지 않고 하나님 안의 그의 기원까지 역추론해 본다면, 그가 영 안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 아바로부터 경험한, 그리고 그가 삶과 죽음 속에서 응답한 그 사랑 자체는 이미 생명을 잉태하는 자비의 형태를 가졌을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따르면, "아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불러서 그들을 편히 쉬게 함으로써(마 11, 28) "계시하는" 것은 상호 간의 인식, 다시 말하면, 상호 간의 사랑이다.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점은 아들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품"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며, 아버지의 이 창조적인 자비가 아들을 통해 넘쳐 흘러나와 잃어버린 피조물들을 모으며, 죽어 가는 피조물들을 새롭게 잉태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예수의 삶에서 이 넘쳐나오는 하나님의 이러한 자비를 인식할 때,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의 모태로부터 태어난다는 표상은 그 별난 특성을 잃게 된다.

3. 외아들 - 장자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신분 안에서 두 차원, 즉 그의 하나님 관계와 인간관계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구분은 "하나님의 외아들"과 "여러 형제들 중의 장자")라는 어법에서 가장 잘 인식할 수가 있다.

"외아들"은 하나님의 하나의, 유일한, 영원히 사랑받는 아들이다. 아버지가 세상에 보내고,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에 내어 주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고, 아버지에게 나라를 넘겨 주어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기까지 아들을 그의 나라의 우편에 앉힌다는 사실은 오직 그에 대해서만 말해진다. 배타성(排他性)의 범주는 - 우리가 항상 아들과 아버지의 일치를 이해할 때처럼 - "외아들"이라는 표현과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점은 예수에게만 해당되는 것, 많은 사람들을 위한 한 사람이다.

그에 반해 "여러 형제들 중의 장자"가 뜻하는 것은 예수를 많은 사람들과 결합시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외아들"이 행하고 고난당하는 일은 유일회적인 일이다. 장자가 행하고 고난당하는 일은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고,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수백 번 반복된다. 포괄성(包括性)의 범주는 "장자"와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가 그에 속한 자들과 함께 경험하고 그리고 그들이 그의 사귐 안에서 경험하는 것을 표현한다.

만약 오로지 "외아들"만이 강조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술어는 예수를 인간 너머의 하나님까지 높이 들어올리며, 부당하게 그를 신격화한다. 만약 오로지 "장자"만이 강조된다면, 예수는 다른 많은 사람들 중의 첫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의 삶과 죽음의 특수성과 유일회성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신분 안에서 두 차원이 구분될 때만, 예수의 신격화도, 예수 인본주의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교리적 두-본성론이 "그리스도의 신성"이라고 표현했던 그것은 실제로 예수를 배타적인 아버지의 "외아들"로 나타내려는 게 아닌가? 그것이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이라고 불렀던 그것은 실제로 예수를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로 나타내려는 게 아닌가? 왜냐하면 그것이 말하려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는, 형이상학적으로 서로 다른 두 "본성"이 아니라, 구분가능한 두 관계, 즉 아버지에 대한 그의 배타적인 기원관계와 그에게 속한 자들에 대한 그의 포괄적인 친교관계이기 때문이다. 그의 하나님 관계는 사랑받는 아들이 그의 아버지와 맺는 관계이다. 그의 세계관계는 그에게 속한 자들의 사귐(롬 8, 29)과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골 1, 15) 그의 근본적인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배타적인 아들신분이 없이는 그의 포괄적인 형제신분도 없다. 그러나 그의 배타적인 아들신분은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그의 열려 있는 형제관계가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조건과 원천이다.

"독생(獨生)한"이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종종 이루어지는 "형상" 개념과의 결합은 아버지의 독생한 아들(외아들)이 또한 형제들과 자매들의 원형(原形)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신앙 안에서 그와 "같아지게" 되며, 그의 사귐 안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와 함께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는 상속자가 된다.?이것은 또한, "같아짐"이라는 표상과의 결합에서 인식할 수 있듯이, 신앙인들이 아들의 파송과 수난 안으로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앙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 죄인들의 칭의와 병든 사람들의 치유를 위한 그의 메시야적 파송에 참여한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묵시적인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 그리고 그의 형제들과 자매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들의 고난에도 참여한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세상 안의 하나님의 고난"에 대한 참여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더 많이 각인하면 할수록, 그들은 장차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변모한 그리스도의 몸과 같아질 것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된다(빌 3, 21). 배타적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와 연대하는 "형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들의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실존을 수시로 나타내는 독특한 두 차원이다.

4. 영원한 아들

발전된 삼위일체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갖는 독특성과 그와 하나님의 사귐의 깊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특히 "외아들" 개념의 해명에 집중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본성을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을 삼위일체론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아들과 아버지의 일치와 차이가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구성된다는 원래의 영-그리스도론은 하나의 다같은 신적인 본성의 삼위일체론적 구분 , 즉 한 본성 - 세 위격(una substantia - tres personae)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패러다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그리스도론을 위해 중요하게 된 세 가지 규정이 이루어졌다.

1. 아들은 아버지의 하나의, 영원부터 출생되고 탄생되는 아들이다. 출생적 은유는 그가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고 위격의 속성을 제외하고는 아버지와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것이지, 아버지에 의해 창조된 것은 아니다. 출생적 은유는 아들 이름을 배타적으로 신학적인 개념,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론적인 개념으로 만든다.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그의 아들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지, 그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자기실현의 과정이 아니라, 그가 자비롭게 그리고 희망으로써 창조물을 보존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세계와 그리고 그 역사와 구분된다. 아들의 신성이 부각되는 것은 그를 신격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거꾸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 안에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귐이 인간에게 개방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외아들과의 사귐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영으로부터 거듭나며,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외아들과의 사귐 안에서 파괴된 우주가 화해되고 재창조되며 변모된다. 아버지로부터의 아들의 영원한 출생과 탄생에 관한 삼위일체론적 진술은 인간과 우주 세계를 포함하는 구원론의 근거가 된다. 그렇지만 영원한 아버지의 외아들의 배타적 규정으로부터 인간들과 모든 피조물들의 장자로 이행하는 것이 두 영역에서 필수적이다. ?

2. 출생시키고 탄생시키는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지만, 그의 부친신분을 나누진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들은 둘째 아버지가 될 것이며, 사랑의 인격적인 교환관계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영원한 아버지와 아들은 신적인 본질 안에서 일치한다. 양자는 자신들을 구분하고 일치시키는 신적인 사랑 안에서 상이하면서도 일치한다. 양자는 서로 위격적으로 다르지만, 본질 안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자아(自我)가 아니라, 그의 영원한 대면(對面)으로서 아버지의 타자(他者)이다. 이 점은 다른 면에서 영원한 아버지에게도 해당된다. 오직 이들의 일치성과 타자성을 다함께 생각할 때만,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는 일치하지만, 하나는 아니다. 위격적인 타자성과 타자성 안의 일치성을 구성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관계 안에서 더 나아가 아버지의 생산적인 사랑과 아들의 응답적인 사랑을 구분해야 한다. 실로 양자를 결합시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사랑의 끈"(vinculum amoris)이다. 이것은 이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적인 사랑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부름과 응답의 화합 안에서 서로 상응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출생적 은유들은 아버지-어머니의 사랑과 어린이의 사랑 사이의 유비(類比)를 통해 이를 표현한다. 아버지의 속성과 아들의 속성 간의 이 차이는 성령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서방교회처럼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든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든 결국 똑같은 말을 하는 셈이고, 성령을 위한 아버지의 의미와 성령을 위한 아들의 의미 사이를 구분하지 않는 셈이다. 성령의 기원을 이중적으로 말하는 "와"는 성령에 대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차이를 무시한다. 이것은 더 이상 구분할 줄 모르는 좋지 않는 신학이다.

3. 아들의 출생/탄생은 아버지의 영원한 본질로부터 이루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성이 없는 신성 안의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삼위일체성을 배제한다면, 그 어떤 신적인 본질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삼위일체성은 신성이고, 신성은 삼위일체성이다. 이것은 항상 그리스도교 신학의 성패를 좌우하는 전제이다. 그러므로 아들과 아버지는 다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구조에 속한다. 아들이 없는 영원한 아버지의 신성은 그리스도교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인식할 수 없고 지칭할 수 없으며 늘 초월하는 한 하나님을 말하는 단순한 유신론은 그리스도교적으로 불가능하다. "항상 더 큰 하나님"(Deus semper major)은, 물론 피조물과 그 창조자를 비교할 경우엔, 하나의 의미있는 진술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론을 생각할 경우에, 이것은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는 단순한 종교적 가부장주의도 역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 관계와 그리스도교의 "아들의 종교"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은 모든 하나님 사상을 예수 위에 세운다. 이것은 원래부터 그리스도를 신격화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그리스도화한다. 예수 때문에 하나님은 신앙된다. 우리의 형제가 된 아들 때문에 아버지는 부름의 대상이 된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본다"(요 14, 9)는 말은 신학개념들의 출발점과 종착점으로 간주된다는 개념에도 적용된다.

4.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룰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오직 그리스도만이고, 왜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인가? 왜 "삼위일체 중의 어떤 한 분"이 아니고 오직 아들만이 인간이 되었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 인간이 된 것에는 어떠한 신적인 동기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질문이 관념적으로 들리긴 하겠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어떤 우연한 대답이나 자의적인 대답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의 차이점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출생-탄생시키는 아버지의 사랑이 응답하는 아들의 사랑에 비해 더 큰 잠재적 비중을 갖는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말하자면 생산적인 사랑 안에는 응답적인 사랑에 비해 더 큰 가능적 분량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생산적인 사랑은 아들의 응답에 대꾸하고 그의 응답적인 사랑에 화답하는, 그리고 이를 통해 아버지의 기쁨을 충만케 하는 또 다른 응답에 대해 열려 있는 것 같다. 하늘과 땅에 수많은 피조물들을 창조함으로써,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영원히 출생-탄생시키는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의 형태를 취한다. 아들과 또 그의 응답적인 사랑 때문에 이 사랑은 아들의 형상대로 창조되는, 그리고 아들과의 사귐 안에서 창조자의 사랑에 응답하는 피조물들을 생성시킨다. 아버지가 그의 생산적인 사랑 때문에 아들을 통하여 아들을 넘어서 피조물의 충만 안으로 들어간다면, 아버지의 외아들은 피조물보다 먼저 난 자(골 1, 15)의 형태를 취하며, 피조물의 형상과 모형(패러다임)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진장한 사랑의 선언이다. 그렇다면 또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응답하고 영광을 돌리는 아들의 사랑에 화답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빌 2, 11). 모든 피조물들은 영원한 생명의 무진장한 샘의 주위를 휘돌면서 창조자를 찬양한다(히폴리트). 물론 이것은 옛 창조의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가 아직은 누릴 수 없거나 어쩌다가 누릴 수 밖에 없는 만물의 재창조의 기쁨을 나타내는 비유들과 은유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 있는 하나님 경험에 대한 응답으로서 새로운 생활의 출발점이다.

5. 장자

그리스도의 형제신분의 차원은 그의 아들신분에 비해 충분히 전개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의미는 신앙고백서들 안에서는 존칭으로써 표현되었고, 신학전통 안에서는 그의 통치의 개념들로써 표현되었다(예언자, 사제, 왕).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은 신앙인들이 칭의와 성화, 소명과 중생의 경험을 통하여 더욱 더 깊이 참여하게 되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그러므로 개신교 정통주의는 이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일치로 인도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에다가 신비적 일치(uio mystica)를 덧붙였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 20). 자유주의적 개신교와 카톨릭 현대주의는 그 대신에 윤리적으로 이해되는 그리스도의 모범성(模範性)과 표준성(標準性)을 제시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고 그러기에 원형적 인간이다. 그를 윤리적으로 뒤따르는 삶은 그와의 의지의 사귐으로 인도한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로마서 8장 29절에 따라서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로부터 출발하고,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아들의 "형상"의 "본받음" 안에서 본다면, 윤리적인 요소와 신비적인 요소는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많은 형제들과 자매들의 장자는 단순히 이들을 위한 원형이나 표준 이상이다. 그는 이들을 위해 모범적인 인간이다. 이러한 모범자-사상은 이미 루터의 그리스도론에서도 본질적이었다. 그 결과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똑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 Christi)이 아니라, 인간이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이 되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의 동형(conformitas Christi)이다. 모방의 시도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시련, 고뇌와 슬픔의 경험을 통하여 인간은 시련받고 고뇌하고 하나님을 향해 절규한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제로서 우리의 고난을 경험하고 겪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난 중에서 그의 형제됨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성례전적인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가 아니며, 윤리적인 "우리 앞의 그리스도"도 아니고, 형제적인 "우리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이전과 이후에 경험하고 겪었던 것을 경험하고 겪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수난은 그의 백성의 수난사와 전 인류의 수난사의 한 부분이고, 그것에의 참여이다. 골고다 위의 그의 십자가는 이런 의미에서 오직 불의와 폭력의 역사 안에 있는 수백만의 십자가들 중의 하나로서 서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연대성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가 버림받은 자들 중에서 버림받은 자가 되고, 시련을 겪은 자들 중에서 시련을 겪은 자가 되고, 고문당한 자들 중에서 불의하게 고난당하는 자가 되며, 죽어 가는 자들 중에서 죽어 가는 자가 된 것은 그들의 형제로서 그들과 함께 있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를 인식하고 신앙하는 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삶과 고난의 경험들을 통하여 그와 같은 형상이 된다. 우리의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의 형제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의 고난 가운데 있는 그의 형제들과 그의 자매들로 만든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세계 안의 하나님의 고난"이다.

"주 그리스도"라는 사상에 반해 "형제 그리스도"라는 표상은 순종과 예속 대신에 더 깊은 사귐의 사회적 상호관계를 표현한다. "모범자 그리스도"라는 사상에 반해 이것은 삶과 죽음에서 경험하는 사귐을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형제됨은 신앙인들과 그를 뒤따르는 자들의 영역을 넘어서 가장 약한 자들, 굶주리는 자들, 포로된 자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도 미친다.

그리스도의 형제됨은 오늘 날 연대성(連帶性)이라고 불리는 그것도 포함한다. 연대성은 사회주의만이 아니라 카톨릭 교회의 사회론의 기본가치이기도 하다. 연대적이라는 것은 함께 고난당하는 것과 서로 짐을 같이 지는 것을 뜻한다. "고통을 나누면 반으로 준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고통의 전부를 나누어서 모두가 그 일부분을 감당한다는 것만을 뜻하진 않는다. 이 말은 고난 중의 고독은 고난 중에서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고난 중에 홀로 내버려져 있진 않다는 것도 뜻한다. 연대성은 단지 함께 짐을 지고 함께 돕는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고뇌와 슬픔 가운데서 함께 있는다는 것, 실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 있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연대성은 실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더불어 산다는 것을 뜻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정함으로부터 생겨나는 그러한 공동체성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산다는 것은 동지애를 갖고서 노동한다는 것을 뜻하고, 생존경쟁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고립화에 저항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끝으로 연대적으로 산다는 것은 억압과 이 억압을 가능케 하는 분열에 맞서서 다함께 투쟁한다는 을 뜻한다. 연대성은 힘없는 자들의 힘이며, 민중의 힘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됨과 이웃사랑이라고 일컫는 것은 오늘 날 고난 중의, 생활 중의 그리고 투쟁 중의 연대성 경험을 통해 완전히 새로이 이해된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창조하지 않았던 가치들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날의 민중의 경험의 빛 안에서 그 자신들의 가치를 새로이 파악해야 한다.

교회는 일찍부터 자신을 "형제들의 공동체"로 이해해 왔다. 모두가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경험은 이 형제됨의 근거였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처음부터 남자들과 여자들이 세례를 받았고, 여자들에게 세례를 시행하는 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상은 여자들과 남자들을 포함했다. 그래서 비록 1934년의 바르멘 신학선언의 테제 3에서는 자매들이 간과되었거나 형제신분 안에 함께 포함되긴 했지만, 오직 "형제들과 자매들"로 구성된 공동체라는 말만이 의미가 있는 말이다. 비록 주교, 총대주교와 교황의 성직계급 안에서 가부장주의가 관철되긴 했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항상 모든 신앙인들이 형제와 자매가 된다는 평등한 반대운동이 있어 왔다. 그렇지만 이 운동은 가부장주의적 성직계급 안에서 남자 수도회와 여자 수도회를 통해 길들여지거나, 분파적 공동체로서 배척당했다. 성직계급은 한 세례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다같이 주어진 것을 실제적으로는 폐기시켰고, 평등 대신에 불평등을, 자유로운 자들의 동의 대신에 부하의 순종을, 계약 대신에 전통의 힘을 내세웠다. 제도화된 교회 안에서 "형제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개 단지 동일한 지위와 같은 계급 위에서만, 즉 주교들의 형제관계로서, 직무동료들의 형제관계로서, 같은 생각을 지닌 각성된 자들의 형제관계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프랑스 혁명은 모두가 다같이 형제라는 바탕 위에서 자유와 평등을 요구했다. 1776년에 발표된 식민지 버지니아의 독립선언에서도 이미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다". 그것은 이들이 "형제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전통에서부터 형제애(fraternité)가 셋째 원리로서 혁명 안으로 들어 왔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아마도 그 기원은 그리스도교의 수도회들과 공동체들뿐만 아니라 프리메이슨 비밀 결사원에도 있는 것 같다. 모두가 다같이 형제와 자매라는 사상이 교회에서는 세례에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신분에 근거를 두고 있고, 예배 공동체 안에서는 영원한 (sub specie aeternitatis)으로 인정되는 반면에, 프랑스 혁명을 통해 그것은 모두가 다같은 인권을 갖고 있다는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평가가 인간의 공동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1. "형제관계"와 "자매관계"를 통하여 한 세대 안의 모든 사람들의 사귐이 강조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형제들"이 된다면, 지구의 다른 지역들에서 동일한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들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형제들과 자매들의 공모(共謀)로 인하여 부모들과 자녀들의 세대 간의 연결성은 억압되거나 심지어 깨어지기도 한다. 세대 간의 연결성이란 동일한 공간에서 다른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했다. 과거는 전통을 통하여 현재에 영향을 준다. 미래는 희망을 통하여 현재 안으로 파고 들어온다. 자녀와 유산상속에 대한 기대와 마찬가지로 조상숭배와 경로(敬老)와 전통준수는 시대를 통과하면서 이러한 사귐을 규정한다. 북아메리카의 인디안 종족들은 조상의 임재 안에서 그리고 미래의 일곱 세대들을 예견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다. 현대 사회를 형제관계와 자매관계의 횡적인 결합 위에 세움으로써, 이미 사회학적으로 자주 설명되었던 것과 같이, 이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전통단절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자신의 기원(起源) 위에 세워지지 않는 한 사회는, 자주 주장되었던 것처럼, 아직도 미래를 지향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이다. 자유롭고 동등한 "형제들과 자매들"의 사회는 정의 상(定義 上) 그 부모들은 물론이고 그 자녀들에게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이다. 이 사회는 단지 자기 자신의 현재만을 의식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이 사회는 부모들과 자녀들의 희생 위에서 사는 사회가 될 위험성을 갖는다.

2. 그리스도교 형제단, 형제 교회, 함께 사는 형제들, 형제연맹, 형제들의 집 등에서는 부모들과 자녀들도 있었고, 종종 가부장주의적인 생활질서가 있었다. 자유롭고 동등한 형제관계는 하나님 앞에서 성령 안에서 경험되고, 신앙인들의 사귐 안에서 영위되며, 사랑 안에서 실천된다. "성도들의 사귐"은 시대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 안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포함한다. 이런 인식은 세대들의 계승 속에 있는 차이점을 필연적으로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차이점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형제들의 이런 사귐이 단지 시간적으로만 이해되는 현재에서 영위된다면, 그리고 만약 이 형제들이 독신으로 산다면, 세대들 간의 연결성은 깨어진다. 배타적으로 이해되는 형제관계는 사람들의 세대적 계승을 현재에서 마감하는 종점이며, 그러기에 인류를 현재에서 끝장내는 묵시적 종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독신으로 맺어지는 형제관계에서는 인류가 자손을 번식할 수 없게 될 것이며, 그 미래를 포기하게 된다.

만약 이런 상황이 종교적 공동체로부터 현대 사회로 이전되면, 현 사회에서는 오로지 "형제들과 자매들"만이 인정받을 것이며, 어머니들과 아버지들, 아들들과 딸들의 인권은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 사회는 인류의 묵시적 종말이 될 것이다. 현대의 경쟁사회는 25살부터 45살 사이의 경쟁력이 있는 사람들을 우대한다. 현대의 출세문화는 부모들이나 자녀들과는 아무런 세대적 문제가 없는 그런 자들, 다시 말하면 자녀를 낳지 않는 여자들과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 남자들을 장려한다.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자들과 항상 노동할 수 있는 자들이 늘어간다. 현대 사회의 더 나은 출세문화는 온통 가족을 미워하도록 편성되고, 세대를 망각하도록 구상된다.

아무리 연대적인 형제관계와 연대적인 자매관계가 사람들 사이의 더 많은 자유와 더 나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오직 형제관계와 자매관계만을 주장하는 것은 인류에게 치명적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