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와 가해자를 위한 정의(正義)

J. Moltmann , 이신건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1.죄인의 칭의: 추상적인가 구체적인가?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바울의 칭의론에 근거해 있다. 이 칭의론의 전제는 죄의 보편성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 23).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바울이 로마서 2장과 3장에서 설명하듯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그리스인들)을 말한다. "영광"이란 원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과 결합된 신적인 영광을 말한다. 바울처럼 종교개혁자들은 원죄(peccatum originale)로 인하여, 그리고 그 이래로 "사람의 불신앙적 생활과 불의"가 세계 안으로 들어왔고, 이것이 그의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즉 그의 사랑의 손상을 야기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구원하고 의롭게 하는 복음도 이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으로 모든 죄인들에게 임하고, 그들을 신앙으로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기"(롬 3, 24)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義)에 관한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은 죄의 실제적 보편성을 전제하며, 구원의 보편성이라는 목표를 의도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 18). 이것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난"(롬 4, 25)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리적인 행위로 보는 속죄양 그리스도론 안에서 그리스도론적 근거를 갖는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죄인들"이 구체적이고도 사회적으로 언급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불의 가운데 사는 "죄인들과 세리들"이다. 이들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에 율법 밖에서 권리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억울한 자들, 가난한 자들과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다. 공관복음서의 비유들이 가리키듯이, 예수는 항상 사람들의 갈등상황 안으로 들어간다: 건강한 자들 - 병든 자들, 부자들 - 가난한 자들, 남자들 - 여자들, 바리새인들 - 세리들, 선한 자들 - 악한 자들, 범죄자들과 희생당하는 자들. 이러한 갈등에서 한 부류의 사람들은 늘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의존되어 있다. 가난한 자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자는 부자들이다. 장애자들을 장애자로 만드는 자는 건강한 자들이다. 약한 사람들에게 죄인의 낙인을 찍는 자는 선한 사람들이다. 대체로 가진 자들이 집착하는 것과 가지지 못한 자들을 배타적으로 갈라놓는 것은 "소유물"이다. "소유물"은 돈일 수도 있고, 건강과 능력일 수도 있고, 정의와 선함을 의미할 수도 있고, 남성됨을 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항상 권력이다. 그러한 생명의 선물들이 "소유되는" 곳에서는 항상 노동과 재산과 생명의 기회를 둘러싼 무자비한 분배투쟁이 일어나며, 이 투쟁에서 자기의 것은 항상 "선한 것"이고, 다른 것은 늘 "악한 것"이다. 오로지 친구와 원수의 관계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 밖엔 없다. 여기서 악마가 출현하며, 그 마지막은 살상이다.

인간의 죄의 구체적인 역사는 가인의 형제살인(창 4장)과 "강포"(창 6장)로 인한 부패의 지구적 확산과 함께 시작된다. 에덴 동산의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행위(창 3장)는 물질적 역사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설화와 신화의 영역에 속한다. 낙원 타락의 신화는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에서만큼 그렇게 근본적인 의미를 준 적은 전혀 없다. 유대교는 여기로부터 원죄론을 전혀 이끌어내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의로운 행동과 평화를 위한 능력을 발견하기 위하여 불의와 폭력의 역사를 죄로 간주한 것은 중요하다.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보편적인 죄개념의 약점은 보편적인 집단죄가 구체적인 죄를 보지 못하도록 하며, 실로 구체적인 죄를 변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죄의 보편성은 모든 고양이들이 검게 보이고 대량학살수단의 사용조차도 더 이상 대단할 것이 없게 되는 그런 밤으로 이끈다. 죄를 합리화하고 "타락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의 죄론을 악용한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교의 선언서들에서 인식될 수 있다. 만약 한 집단이 다 함께 범한 범죄나 다 함께 실천하지 못한 구조행위로 인하여 죄인이 되면, 구체적인 집단죄가 생겨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죄를 보편적인 죄 안에 숨겨버리며, "우리가 모두 많든 적든 죄를 지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변명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지워져 있다는 보편적인 "비극적 연루성" 안에서 구체적인 죄를 신화화한다. 이러한 변명은 저항하는 사람들과 죄없이 폭력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 앞에서 무너진다. 이들은 우리가 무엇을 실천하지 않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 볼 것을 강요하며, 어디서 우리가 죄를 지었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백할 것을 강요한다. 여기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이 되어버리는 사람은 자신을 합리화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드러낸다. "그리스도교 현실주의"(라인홀드 니버)라고도 대변되는 개신교의 죄의 비관주의는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의롭게 하는 신앙의 결론은 도리어 은총의 낙관주의다. 왜냐하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기"(롬 5, 20)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죄의 보편성 이론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한계를 넘어서는 연대성에 대한 인식으로도 인도할 수 있다: "모두가 모두에게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 잘못이 있다"(도스토예프스키). 그렇다면 특별한 범죄자들은 우리가 동정해야 할, 우리 중에서 "운이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의 누구나 다 똑같은 범죄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기를 중지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책임을 떠맡는다.

죄와 죄의 용서에 대한 바울의 해석과 공관복음의 해석은 서로 대립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칭의론에 대한 보편적 해석과 구체적인 해석 혹은 형이상학적 해석과 정치적 해석도 서로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양자는 상대의 근거가 되고 서로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그는 정의를 상실한 자들에게 그들의 의를 가져다 주며, 불의한 자들을 회개로 이끈다. 만약 하나님이 공의를 위해 창조적인 영을 보냄으로써 죄인을 죄의 보편적인 힘으로부터 해방시킨다면, 경제적인 불의, 정치적인 억압, 문화적인 소외와 인간적인 낙담으로부터의 해방은 정당화된다. 만약 죽음을 하나님의 온 창조로부터 추방할 영원한 생명이 존재한다면, 이미 여기서 생명을 위해 봉사하고 죽음에 저항하는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과 오늘 날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해방신학은 서로 대립될 필요가 전혀 없고, 오히려 서로를 교정해 주고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인 주장은 종교개혁사의 수정(修正)을 전제한다. 토마스 뮌처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동지로 인정되어야 하고, 독일의 농민전쟁에서 루터가 잘못 판단한 일은 수정되어야 한다. 진정한 종교개혁적 칭의론은 억울한 자들과 그리고 불의한 자들을 해방시키는 신학이다. 칭의론을 가해자들과 그들의 실제적인 죄의 용서에만 일방적으로 제한하였기 때문에, 개신교사상은 희생자들의 고난과 그들의 수동적인 죄 그리고 구원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당파성"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2. 희생자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개신교 신학이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와 "정의를 행하는" 의 간의 유비(類比)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약성서를 구약성서와 날카롭게 구분한 것에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대로 죄인의 칭의가 세계 안의 하나님의 의의 계시라면, 구약성서에서 정의를 상실한 자들에게 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또 하나님의 의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행하는 의도 확정하는 의(justitia distrivuta)가 아니라 창조적인 의(justitia justificans)이다.

"압박을 당하는 자들에게 의로운 일을 행하는"(시 146, 7; 103, 6)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를 위해 의로운 일을 행하는"(신 10, 18; 시 82, 3; 사 1, 17) 하나님이다. 메시야가 오면, 그가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다"(사 11, 4). 하나님이 그의 신()을 그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는 "이방에게 공의를 베풀"(사 42, 1)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성신(聖神)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의(義)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 15 이하). 이것은 한 편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한 하나님이 폭행을 스스로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의 편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정의는 하나님의 일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이 약한 자들과 상처입기 쉬운 자들을 친히 보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을 해치는 자는 하나님을 해치는 자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노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眷顧)하려니와"(사 66, 2). 우리는 매우 연약한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이러한 편들음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우선적 당파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가난한 자들"이란 폭행의 희생자들이라는 점과 하나님의 이러한 "당파성"이 가장 작은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동정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분명히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일은 하나님에게도 가해지는 일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세계의 심판자인 인자(人子)는 그의 가장 작은 형제들과 자매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에게도 행해진다. 하나님은 힘없는 자들의 힘이듯이, 친히 억울한 자들의 정의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불의를 친히 당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놀라운 피조물 안에서 몸소 경험한 내용에 따라서 심판할 것이다. 하나님은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 권리를 상실한 자들과의 연대성을 통하여 그들에게 정의를 행한다.

이어서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형상을 보게 되면, 이러한 인상은 더 강해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53, 4). 이것은 병든 자들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 안에서 메시야 자신이 병든 자와 고난을 당하는 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친히 세상의 고난을 진다. 그 자신이 폭력의 희생자이다. 이러한 깊은 연대성의 근거 위에서 그의 대리행위가 주장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53, 5). 그는 세상의 고난을 지는 자로서 이 고난이 야기하는 세상의 죄도 담당한다. 이렇게 죄를 "지고" 담당함으로써, 그는 폭행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속죄를 행하며, 폭행자들을 회개로 이끌고, 그래서 정의로 이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형상은 그리스도교의 수난사를 각인했으며, 원초적인 그리스도론의 기초가 되었다. 우리는 이 형상으로써 죽음과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길에서 다시금 연대(連帶)의 그리스도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메시야적 아들은 상처입기 쉽고 죽어야 할 우리 존재의 조건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며, 우리처럼 하나의 인간이 된다. 그는 비폭력적인 수난의 길을 간다. 그는 불의와 폭행, 배반과 부인, 하나님과 인간의 버림을 지고 담당하며, 로마인의 십자가에서 죽는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가난한 자들과 상처입기 쉬운 자들, 민중(오클로스)과 약한 피조물들의 고난이기도 하다. 폭행자들은 예수의 운명 안에서 그들의 운명을 다시금 겪고 발견한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자신들을, 그리고 자신들의 곁에서 예수를 발견하다. 고난을 지는, 고문당하고 살해당하는 그리스도는 가해자들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편에 서 있다. 그는 친히 희생당하는 자들 가운데서 희생자가 된다. 버림받은 그리스도는 시련을 당하고 하나님 때문에 절망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시련을 당하는 자이다. 그는 이스라엘, 인류와 자연의 수난사에서 이름 없는 수 백만의 순교자들 가운데 있는 신적인 순교자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수만의 배타적인 고난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몸과 영혼에서 연대적으로 함께 나눈,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고난이다(히 2, 16-18; 11, 26; 13, 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앞으로 고난당할 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하는(골 1, 24) 자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함께 고난당하는 그러한 자들을 위해 열려 있고, 그의 이름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순교자들의 고난, 상처입기 쉬운 모든 피조물들에게 닥칠 미래의 묵시적인 고난을 위해 열려 있다.

루터는 초기에 동형 - 그리스도론(Conformitas-Christologie)의 형태로 이러한 연대의 그리스도론을 대변하였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과 자매들 중에서 처음 태어난 자이다. 그는 그들에게 모범적 인간이며, 그들이 생활경험과 고난경험을 통하여 같은 모습이 되는(롬 8, 29) 그러한 원형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제로서 우리의 고난을 경험하고 고난을 겪었기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 그의 형제됨을 경험하게 된다. 형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이다. 그는 고문당한 자들 가운데서 고문당하는 자요, 폭력의 희생자들 가운데서 불의하게 고난당하는 자요, 버림받은 자들 가운데서 버림받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에 의하여 우리도 그의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들과 자매들이 된다. "오직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가 있다"고 디트리히 본회퍼는 게쉬타포의 감옥에서 썼다. 실제로 고난당할 수 없고 함께 고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은 우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본회퍼가 시를 읊은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 "주 그리스도"의 표상에 반해 "형제 그리스도"의 사상은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 있는 깊은 사귐과 상호관계를 표현한다.

인류의 폭력사의 희생자들과 함께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연대성은 희생자들을 위해 의미를 갖는가? 만약 그가 단지 또 하나의 희생자일 뿐이라면, 그의 고난은 아무런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고후 5, 19), 그리스도는 그의 수난을 통하여 이 세상의 수난사 안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사귐과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 주며, 하나님을 폭행의 희생자들과 동일시한다. 반대로 여기서 희생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과 동일시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며, 인간으로서 정의를 박탈당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에게서 정의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를 통하여 "이 땅에서 배척당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세계심판 날에 주체들이 될 것이다: "너희가 가장 작은 자들에게 행한 것은 바로 나에게 행한 것이다."


3. 가해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인간이 인간과 약한 피조물들에게 가하는 폭행은 죄요, 생명에 대한 범죄다. 폭행은 항상 두 측면을 갖고 있다. 한 편으로는 폭행자가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 희생자가 있다. 한 편으로는 머리를 쳐드는 주인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천대받는 노예가 있다. 한 편으로는 빼앗는 착취자가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빼앗기는 피착취자가 있다. 폭행은 두 측면에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생명을 파괴한다. 한 편으로는 악한 행위를 통하여, 다른 한 편으로는 고난을 통하여 그리한다. 폭행자는 비인간적이 되고, 불의하게 된다. 희생자는 비인간화되고, 정의를 박탈당한다. 폭행은 이와 같은 두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방법은 두 측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피억압자를 억압의 고난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억압자를 억압의 불의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창조하는 해방과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폭행이 사라지고 정의가 수립되는, 인간들 간의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의 불안이 없는 열려진 사귐이야말로 목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억압당하는 자들을 해방시키고 정의를 박탈당한 자들에게 정의를 행하는 것은 많은 상황에서, 특히 폭행의 희생자들에게는 자명하다. 폭행자들을 그들의 불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대개의 경우에는, 특히 불의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폭행자들에게는 자명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으키는 희생자들의 고난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눈이 멀어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써 자신들의 불의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의를 행하고 불의하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저지른 불의를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되돌려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불의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불의는 이미 저질러진 것이다. 그 어떤 더 나은 미래도 과거의 고난을 "보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어찌 우리가 죄책감으로 눌린 과거를 가진 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고대의 모든 민족들의 정의표상에 따르면, 상처난 정의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속죄가 필요한데, 그것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희생자에게, 그 다음에는 가해자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희생자와 가해자가 다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게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의 경험이 없는 죄책은 죄책의 억압, 불의의 변상과 불의한 행위의 재발강박증으로 이끈다. 죄책의 용서가 없이 죄인은 살아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정의의 회복이 없는 화해란 존재할 수 없듯이, 속죄가 없는 죄책의 용서란 없다. 속죄란 무엇인가? 누가 속죄를 행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가해자들에게 그리고 가해자라는 긴 그늘에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자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는 해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해답에 접근해 나가려고 한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관해 알고 있는 독일인으로서 해답을 추구하려고 한다. "속죄"에 대해 질문할 때, 우리는 가해자들과 그들의 그 후손들을 자기멸시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정의롭게 살 수 있게 해 주는 하나의 힘에 대해 질문한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죄책감은 가해자의 마음을 짓누르며, 그의 자존심을 파괴한다. 그 결과는 자기합리화가 아니면 자기파괴이다. 이로부터 "속죄양 신드롬"이 생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실패를 전가시킬 수 있고 그래서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할 "죄인"을 찾는다. 사람들은 불의와 폭행에 대한 죄책감을 지닌 채 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책감은 억압으로도 전가(轉嫁)로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옛적부터 일컫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망가뜨렸다." 비록 사람들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스스로 부정한 그러한 생활을 긍정할 힘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속죄는 인간의 가능성인가? 많은 민족들의 종교에서는 신들이 인간의 불의와 폭행으로 인하여 진노한다고 표상되고 있다. 신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런 표상의 배후에는 인간의 불의로 인하여 파괴되고 오직 이에 상응하는 희생제사를 통하여서만 치유될 수 있는 보편적인 세계의 조화라는 표상이 있다. 그러므로 악은 악으로써 보응되어야 한다. 이것은 복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세계질서의 회복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의 제의와 신학에 따르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백성 가운데 있는 불의와 계약파괴로 인하여 상처를 입는다. 하나님의 계약동료,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폭행은 항상 하나님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이러한 진노는 하나님의 얼굴의 숨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 신적인 영의 힘의 소멸에서 경험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하나님의 상처입은 사랑과 다르지 않다면, 하나님은 그 사랑의 고통을 지고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과 폭력을 행한 자들을 계속 사랑하기 때문에, 또 그런 한에서, 하나님은 불의와 폭행을 그의 사랑에 대한 상처로서 앓는다. 실로 그의 사랑은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을 "견디어 냄으로써", 그의 진노를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그의 백성의 죄를 "지는 행위"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이 이처럼 죄를 "진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1.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친히 제정하는 속죄의 희생제사: "속죄양"에게 백성의 죄가 전가되며, 그것은 이 죄를 "지고" 광야로 "사라진다".

2. 고난받는 하나님의 에 관한 예언자적 환상: 그는 대리적 고난 속에서 백성의 죄를 "담당한다".

3.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신학적 이해: 하나님의 자비로 인하여 죄인은 의로운 자가 된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은 친히 그의 백성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바친다. 속죄가 없다면, 죄로부터의 해방도 결코 없다! 그러나 죄인이 아닌 자만이 속죄할 수 있다. 속죄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가능성이다. 속죄는 인간의 죄책을 하나님의 고난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인간의 죄를 "짐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실현된다. 죄인이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고통을 친히 감당하는 하나님은 속죄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기도는 정당하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당신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죄를 지는 것과 담당하는 것을 전제한다. 탈선하고 망가진 생활은 하나님의 자비로 인하여 죄로 인한 죽음에서부터 정의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은 세상의 수난사의 역사만이 아니라 인간의 불의의 역사도 지고 간다. 그는 희생당한 자들 가운데서 희생당한 자로서 그것을 진다. 인간은 책임을 져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변호할 수는 없다. 모든 자가 제 각기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성에 대한 현대인의 통찰은 속죄행위와 배상만족, 속죄배상과 속전에 대한 옛 표상을 진부하게 만든다. 물론 나는 내 죄값을 치를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죄인인 나를 떨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잘못과 죄는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그의 존재와 관련된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죄를 스스로 "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눅 18, 13)라고 고백한다. 내가 "가진" 죄는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죄인인 내가 살고자 할진대, 나는 "용납되어야" 하며, 거듭나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죄의 신학을 객관적이고 법률적인 개념들로부터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개념들로 옮겨 놓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이해에 따르면, 로마인에 의한 예수의 폭력적인 구속, 고문과 십자가형 안에는 이 외형적이고 인간적-비인간적인 처지가 상상케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한 드라마가 반영되어 있다. 아들의 고난과 죽음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가 제공되며, 하나님에 의하여 세상의 화해가 성취된다. 이미 첫 유대-그리스도인의 공동체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제사로 이해했으며, 의롭게 하는 복음에 대한 믿음 안에서 죄의 힘과 죄의 충동으로부터의 큰 자유를 경험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속죄의 죽음에 근거하여 불의, 폭행과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과 단절했으며, 생명에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했다(롬 6, 12-14. 19-23). 그들은 세례의 상징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났음을 느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어떻게 속죄라고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볼 때에만, 그의 죽음을 세상의 죄에 대한 속죄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맥락에서 항상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신적인 고난이며,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죽음에 떨어진 모든 죄인을 위하여 대리적으로 감수한 죽음이라는 결과가 생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의 대리적인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랬다든지, 하나님이 마치 가학증세자처럼 그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거나 못박히도록 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릇되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복수의 하나님이나 신적인 형벌집행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한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전적으로 모순된다. "십자가가 속죄인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속죄하는 그리스도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죄많은 세상의 화해를 위한 속죄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난의 형태이다. 인간의 불의와 폭행 때문에 상처입은 하나님의 사랑이 고통을 담당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했고,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자비로 변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속죄"라고 말할 수 있는 고난을 받았다면, 그것은 어떤 고난인가? 그것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고통을 세계사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살해당한 많은 자들과 함께 나누었다. 그의 특별한 하나님 고통은 겟세마네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응답되지 않은 것이요,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를 정도로 비교할 수 없는 그의 가까움을 경험했기에 자신을 메시야적인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한 그가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고통을 받음으로써, 그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통을 경험하고 받아들인다.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의 고난은 속죄하는 하나님의 고난 안에서 변형되는 인간의 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그 경험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제한할 수 없다. 젊은 시절의 루터가 그의 십자가 신학에서 아주 힘주어 강조했듯이, 그것은 지옥의 경험이다. 바울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 5, 2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갈 3, 13).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버림받고 저주받고 정죄받은 아들이 달려 있다. 그가 거기에 "우리를 위하여" 달린 것은 우리가 평화를 얻기 위함이다. 그의 상처로 인하여 우리는 치유된다. 여기에는 "이 땅의 저주받은 자들"과의 그리스도의 연대성보다 더 큰 것이 있다. 여기에는 이 땅의 죄, 불의와 폭행을 위한 하나님의 속죄가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죄 안에서 하나님의 고통이 계시된다. 하나님의 고통 안에서 그의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 반항하는 세상을 극복하는 그의 불굴의 사랑이 계시된다. 반항의 반항, 다시 말하면, 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항의 고통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은 반항하는 이 세상을 화해시킨다. 그는 그의 사랑의 고통을 죄인의 속죄로 "조제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인들의 하나님이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죄인들의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에게로 향한다.

만약 우리가 죄와 속죄를 이렇게 인격적으로 그리고 관계론적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속전, 속죄제사, 배상 등과 같은 충분하지 못한 희생이론의 상들과 결별하게 된다. 객관화된 우리의 많은 죄(複數)는 객관적인 속죄행위를 통해 보상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은 생명에 저항하는 죄인으로서 의롭게 되어야 하며, 생명을 돌려 받아야 한다. 이 일은 하나님의 속죄하는 사랑으로부터 일어난다. 결국엔 아벨라드(Abelard)가 옳고, 안셀름(Anselm)은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대리행위(代理行爲) 안에서 하나님의 대리행위가 계시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 31-39절의 신앙고백의 노래에서 말했듯이("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다"는 사실이 확실해진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하고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할 때에만, 세상을 위해 속죄하는 하나님의 대리행위의 비밀이 비로소 풀린다. 고난당할 없는 하나님(Deus impassibilis)이든 보복의 하나님이든, 외부로부터 끌어 온 하나님의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리행위의 능력은 아버지, 아들과 성령이 영원히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는 그러한 영원한 사랑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의 고난과 죽음 안에서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를 친히 담당한 그 사랑은 영원히 존재하는 바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 16)라는 구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 16)는 구절을 전제한다. 영원한 사랑은 오로지 다른 대상들을 지향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의 각 위격들은 서로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며, 서로에게 응답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다른 사람들, 죄인들, 반항하는 사람들, 원수들을 위한 사랑이 존재한다.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적인 헌신은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세상 안에서 희생한 그리스도의 헌신 안에서 계시되며, 그를 신앙하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의와 폭행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속죄가 이루어지는가? 이 속죄는 아버지의 자비로부터,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아들의 대리적인 고통을 통하여, 성령의 해방적 능력 안에서 나온다. 이것은 아버지의 고통으로부터 솟아 나오고 아들의 고난에서 계시되며 생명의 영 안에서 경험되는 하나의 유일한 사랑의 운동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하나님이 된다. 그의 의는 불의한 자들을 의롭게 한다.

서방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속죄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근거해 있지, 그의 부활에 근거해 있지는 않다. 그의 부활은 철저히 하나님의 공개적인 인정이나 하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사건으로만 이해되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부활했다(롬 5, 17)는 바울의 그리스도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죽은 자로서만이 아니라 더욱이 부활하고 하나님(하나님의 우편)에 오른 자로서 "그는 우리를 대변한다". 우리의 생활에서도 과거와 함께 살 수 있기 위하여 지나간 죄책을 단지 속죄하기만 하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것이 못된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고후 5, 17) 더 이상 과거가 기억될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것이 창조되어야 한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계의 새 창조의 시작으로서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죽음이 더 이상 없으니..."를 뜻한다. 정의 안에서의 만물의 새 창조의 시작은 죽은 자들에게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에스겔 37장이 이스라엘 역사의 죽음의 골짜기에서 미리 보았던 대로, 이 새 시작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는 "아우슈비츠"의 죽은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가? 그러므로 동방교회는 부활절 축제 때에 사죄를 선포했고, 부활을 위대한 화해축제로서 축하했다.

 

부활의 날.

이 축제의 날에 빛이 임하사,

우리가 서로 껴안게 되누나.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부활 때문에 우리는 모두 용서하리라.

그리고 우리는 다함께 외치노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도다.

그는 참으로 살아나셨도다.

 

4. 상황과 구조를 위해 정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불의의 세상에서 한 편으로는 희생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가해자도 있다. 양자 사이에는 한 편으로는 희생자를 만들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가해자를 만드는 정치적인 상황과 경제적인 구조도 있다. "죄"란 단지 한 편의 사람들이 행하고 다른 편의 사람들이 당하는 것만이 아니다. 비써트 후프(Visser't Hooft)가 인종차별적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법안을 칭한 것과 같은 "이교적인 구조들"도 있다. 독재적인 경찰국가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구조적인 죄"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부자들을 더 부자가 되게 만드는 하나의 세계경제질서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질서를 초인격적인 "죄의 권세"로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희생자도, 이익을 누리는 자도 이 질서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불의체제의 초기증상에 저항하지 않으면, 이것은 모든 체제를 죽음으로 이끄는 분명한 "자율적 법칙성"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악순환"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약하고 변하기 쉬운 피조물들이 죽다가, 나중에는 강한 것들도 멸망한다.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린이들이 죽다가, 나중에는 부자들도 죽는다. "처음에는 숲이 죽다가, 나중에는 인간이 죽는다." 현대 사회의 거대한 프로젝트 안에는 환경, 대기와 땅의 점진적인 파괴를 통하여 대부분의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인류를 생태학적인 죽음으로 이끌어 갈 경향성과 법칙성이 존재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사막은 늘어나고, 숲은 줄어들며, 온실효과는 더 커지고, 오존구멍은 점점 더 넓어진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악순환과 죽음의 나선운동(螺旋運動)의 가해자요, 그 희생자이다. 강자들과 부자들이 당분간은 이런 대가를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떠맡길 수 있겠지만, 결국엔 그들도 희생자가 되고 만다. 위와 같은 현상들은 알려져 있고 명약관화하다. 여기서 구조적인 죄와 하나님의 평화를 창조하는 의의 개념이 중요해진다.

1. 구조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끊임없는 폭행으로부터 폭력적인 사회가 생겨난다. 중단되지 않는 착취로부터 의존적인 식민지가 생겨난다. 무사려한 낭비로부터 생태학적인 위기가 생겨난다. 인간의 폭행죄로부터 폭력상태가 생겨난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젖어 살아간다. 첫 번째 죄는 자유로부터 저질러진다. 두 번째 죄는 습관으로부터, 그리고 세 번째 죄는 내적인 강요, 즉 부자유로부터 저질러진다. 이것은 마치 마약중독증과 같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적절하게 설명한 대로, 죄를 짓지 않을 없음(non posse non peccare)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로부터 사회적, 구조적 차원에서 그 나름대로 인간을 지배하고 강압하는 증상이 생겨난다. 악의 열매들은 인간의 머리 위로 자라나서, 인간을 지배하고 파괴하기 시작한다. "구조적인 죄"는 자립적인 죄인데, 이것은 더 이상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인간 위에 군림하는, 마치 객체화된 것과 같은 강압적 폭력이다. 이것은 우상숭배, 주물숭배, 신성화된 허무주의의 형태를 띤 죄다. 이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비록 그가 선을 행하려고 해도, 죄의 공범자(共犯者)가 되고 만다. 독일 나치즘의 독재체제 안에서 얼마나 많은 개인적인 선이 행해졌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악, 전쟁의 연장과 유대인 박멸에 기여했다!

구조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단지 반쪽 진리일 뿐이다. 인간은 구조들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이것은 다른 반쪽 진리이다. 인간은 단지 자신의 상황의 생산자일 뿐만 아니라 그 생산물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이 점은 모든 구조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불의하고 사악한 구조들은 인간에게 악을 행하도록 강요한다. 왜냐하면 적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문과 죽음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의롭고 선한 상황이 인간을 자동적으로 선하게 만들진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인간이 선과 정의를 위한 자유를 사용할 것인지 아닌지는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것은 독재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악한 독재주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선한 독재주의가 존재할 순 없다. 인간은 불행의 큰 원인들을 줄일 순 있고, 아마도 그 중에서 많은 것들을 제거할 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순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동일한 불행은 단연 존재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동일한 행복은 존재하지도 않고, 다행히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2.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유비(類比)를 필요로 하고, 유비의 능력이 있다. 이렇게 칼 바르트(K. Barth)는 정치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설명했다. 정치적인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의와 상응할 수도 있고, 저항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제도화된 불의를 "구조적인 죄"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이 세상"에 대한 저항으로 경험한다. 오늘 날 제3세계의 부채(負債)의 위기는 하나님의 나라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 위기의 희생자들과 함께 하며, 정의를 박탈당한 자들을 위한 정의의 창조를 향해 소리친다. 연대적인 그리스도는 가장 작은 형제들과 자매들과 함께 한다. 하나님의 의는 이 위기를 제공한 자들과 이 위기로부터 이익을 누리는 자들을 불의로 내몰고,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고난을 통하여 이들을 회개하는 신앙으로 해방시킨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자는 이 불의한 세상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는 억압적인 체제의 요구와 보상에 대해 "죽은 자"와 같다. 그는 구조적인 폭력의 법칙들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 자는 불의한 세상과 결별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그는 더 이상 그의 계급, 그의 성(性) 혹은 그의 소유물 때문에 의롭진 않다.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자가 행하는 것은, 인종주의의 척도에서 볼 때는 "인종보호법 위반"이고, 자본주의의 척도에서 볼 때는 "계급배신"이다. 그는 희생자의 편을 들며, 가해자와 결별한다. 이렇게 행하는 자는 종종 "자신의 백성 중의 이방인"이 된다. 희생자와의 연대성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계급과 민족에 대한 충성심을 포기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쉽사리 "무인도"로 떠내려가게 된다. 그는 스스로 사회의 언저리로 밀려나서 영향을 미칠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실현되지 못한 급진주의는 종종 하나의 사춘기적인 생활거부에 그칠 수도 있다. 더 나은 정의를 위한 구체적인 행보는 선한 마음가짐의 순수성보다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인격적인 정체성은 분명히 언제나 저항과 적응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내적인 척도이다.

3. "구조적인 죄"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의가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할 때, 그들의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1과 2에서 말했다시피, 하나님의 의는 창조적인, 정의를 창조하고 의롭게 하는 의로서 경험된다. 하나님은 정의를 박탈당한 자들에게 정의를 창조하고 불의한 자들을 정의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는 의롭다. 그는 폭력을 당하는 자들에게 정의를 창조한다. 그는 그의 의를 통하여 구원한다. 이 의를 통하여 하나님은 모두가 누리는 평화(샬롬)를 창조한다. 이 평화는 또한 참된 생명을 뜻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