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귐" : 삼위일체적 성령론


J. Moltmann , 이신건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1. 성령의 사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실지어다"라고 오래되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교회의 축복문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사귐"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이 문장을 수용한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인간들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오는가? 그는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안으로 받아들이는가? 성령과 관련해서는 어째서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복종"을 말하지 않고, "사귐"을 강조해서 말하는가?

"사귐"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우리가 즉각 말할 수 있는 점은, 사귐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자유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사귐"은 사람들을 복종시키지 않고, 자신에게로 인도한다. "사귐"이란 서로를 위한 개방성과 서로에 대한 참여와 서로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사귐은 한 사람의 소유와 존재의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행위이다. 이것은 우리와의 사귐 안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성령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적 사귐 안에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성령의 사귐의 경험에 대해 열려 있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분명한 축소와 협소화를 인식하고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단지 서방교회의 성령론, 그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개신교의 성령론의 문제점을 다룰 것이지만, 여기에는 그리스도교의 일반적인 문제점들도 놓여 있다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신학의 초기부터 설명되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과 통치, trinitas와 monarchia의 관계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통치는 오직 유일한 주체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가 있다. 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는 오직 복종의 태도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에게 아들도 복종해야 하며, 아들에게 성령이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서 하나의 유일한 사귐이어서, 이 사귐 안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똑같이 경배되고 찬양된다"(니케아 신조). 다른 이들과 "함께 똑같이" 경배되는 이는 다른 이들에게 종속될 수 없다. 그는 동일한 영원한 위엄과 동일한 신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다. 고대교회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신학논쟁은 군주론적인 일신론과 삼위일체적인 사귐에 대한 신앙 사이의 갈등 때문이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관심사는 아들의 격하가 아니라 한 하나님의 우월한 군주적 통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들을 종속시켰다. 성령주의자들(Pneumatomachen)의 관심은 영의 격하가 아니라 한 하나님의 유일한 군주적 통치의 방어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을 아들에게 종속시키고, 아들을 아버지에게 종속시켰다.

고대교회의 공의회 결정이 있은 후에도 우리가 서방교회의 전통에서 참조한 것은 항상 하나의 군주론적 성령론, 다시 말하면, 종속론적 성령론이었지,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하며, 그의 통치의 결과는 영이다. 한 하나님의 군주론적 세계통치 안에서 영은 그의 통치의 결과, 그의 객관적 계시의 주관적 측면, 그의 외적인 말씀과 성례전(사크라멘트)의 내적인 열매와 다름이 없다.

만약 이러한 견해가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한 유일한 관점이 되면, 성령론의 협소화와 축소가 생겨나며, 이것은 당연히 항상 더 강하게 비판받아 왔다. 이러한 군주론적 삼위일체론의 일방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안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니케아 신경에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아들로부터)를 삽입한 일은, 서방에서의 그 영향사를 고려해 볼 때, 분명히 지지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또한 과대하게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필리오케가 서방의 교회와 신학의 모든 오류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이것의 누락이 동방의 모든 미덕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필리오케를 통하여 성령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약점이 주어졌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서열보다 낮다. 성령의 본질은 오로지 아버지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통해서도 규정된다. 이 질서를 통하여 아들과 영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형성된다. 이 관계는 더 이상 상호 간의 관계로 이해될 수 없다. 만약 영이 아들로부터도 나온다면, 아들은 영으로부터도 나올 수가 없다. 만약 필리오케를 통하여 삼위일체의 원래적인 관계가 아버지-아들-영의 질서에 고정된다면, 구원사에서의 그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인간이 된 아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인간이 된 아들은 사도적인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임재한다. 성령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도적 전통에 따라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활동하는 것일 뿐이다. 이로부터 먼저 직무에 관해 말한 다음에 영에 관하여 말하고, 먼저 성서에 관하여 말한 다음에 신앙에 관하여 말하는 실제적인 순서가 생겨난다. 이러한 질서는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 영의 감동, 느낌, 환상과 꿈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점은, "필리오케가 성령을 그리스도에게 종속시킨다는 사실, 그것은 성령을 '비인격화하는' 경향으로 기운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성령을 교회에 종속시키는 일도 촉진할 수 있어서, 이로 인해 교회가 권위주의적인 제도주의로 경직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일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서방에서 중세기에는 "직무교회"와 "영적 교회" 간에, 종교개혁 시대에는 성서에 매여 있는 신학과 자유로운 성령의 신학 간에, 근세에는 말씀신앙과 열광주의 간에 논쟁이 생겼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미 삼위일체의 원래적인 관계에서 "아들과 성령의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을 인정한다면," 이런 잘못된 양자택일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은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안에서 보고 종속 안에서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필리오케를 탈락시키고, 성령론에서 영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시작한다면, 아들과 영의 상호관계는 생각될 수 있고, "아버지와 아들과의" 영의 사귐은 즉시 이해된다.

성령의 삼위일체적 사귐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을 규정하는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다. 터툴리안(Tertillian)은 하나의 동질적이고 신적인 본질의 단일성으로부터 출발했다: 한 실재 - 세 위격(una substantia - tres personae). 그가 신적인 위격들의 삼중성보다 한 신적인 본질을 앞세운 것은 서방교회의 전통에서 오래 동안 자명한 것이었다. 유럽의 근세가 시작됨과 함께 주체성의 형이상학이 본질의 형이상학을 대체하자, 하나님은 더 이상 단지 최고의 실재로만이 아니라 또한 절대적 주체로도 이해되었다(피히테, 헤겔).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은 더 이상 단지 신적인 실재의 동질성에만 있지 않고, 하나의 신적인 주체의 동일성에도 있다. 이로부터 근세의 삼위일체론의 명제가 생겨났다: 신적인 주체 - 다른 존재양식. 이 명제와 함께 하나님의 단일성이 하나님의 위격들의 삼중성보다 우선시된다.

만약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은 단지 하나의 동질적이고 신적인 실재나 동일한 신적인 주체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세 위격들의 유일독특한 사귐에 있다.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다같이 신적인 통치의 신적인 본질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선행하는 것은 바깥을 향한 그들의 삼위일체적 단일성, 이들의 실재적 단일성과 그들의 주체적 단일성이다. 독일적 표현 "Drei-einigkeit"(삼-일체)는 원래 단수적 단일성 안에 있는 세 위격들-하나의 사귐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단일성 개념보다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의 단일성 개념을 먼저 생각한다. 신적 위격들인 아버지, 아들과 성령은 서로와 맺는 그들의 관계 안에서 또한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고, 매우 친밀하게 서로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을 통하여 그들의 완전한 삼위일체적 단일성을 형성한다. 순환(Circumincessio)과 변용(Perichoresis)이라는 고대의 사상은 세 위격들이 그들의 상호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이러한 유일독특한 단일성을 묘사한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이러한 단일성을 "사귐"(koinonia)라고 부른다면, 이로써 우리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결합시키는 것을 표현한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귐은 사람들이 서로와의 사귐 안에서 갈구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예감하기만 하다가 신비한 일치의 순간에 멀리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특별하고 비교할 수 없는 하나의 사귐이다.

그렇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은 아들이 말하는 그 사건 안에서 참으로 계시된다: "아버지께서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 21).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은 이처럼 열려 있고 서로를 초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께 경험하는 성령의 사귐 안에서 복사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리고 이 참된 인간의 사귐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참여시킨다: "저희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참된 인간의 사귐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상응할 것이며, 땅 위에서 그의 모습이 될 것이다. 참된 인간의 사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귐"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과 상응하는, 그리고 하나님 자신에게 참여하는 사귐을 가져다 준다. 군주론적, 종속론적 성령론이 어떻게 규정되든지 간에, 이 삼위일체적 성령론은 그 기원과 목표이다. 우리는 이제 "성령의 사귐"을 그리스도교 교리의 세 중심적 내용, 즉 인간론, 교회론과 성서론에서 설명하려고 하며, 그래서 군주론적, 성찬론적 및 찬미론적 삼위일체 개념의 통일성에 대한 고찰로써 끝맺으려고 한다.

2. 삼위일체적 인간론: 사회적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있는 인간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유비들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몸을 지배하는 영혼의 유비남자와 여자의 통전적인 사귐의 유비, 즉 개인적 유비와 사회적 유비이다. 전자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서방에서 심리적 삼위일체론을 형성하게 하였고, 후자는 동방에서 일종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형성하게 하였다.

나치안츠(Gregor von Nazianz)는 원초적인 핵가족인 아담, 이브와 셋 안에서 땅 위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비와 형태를 발견했다. 인간의 개체 그 자체가 아닌 인간 공동체의 이 원세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상응한다. 이 세 인격들도 하나의 육체와 피로 이루어져 있고, 하나의 가족을 형성한다. 남자, 여자와 자녀의 원초적인 인간의 공동체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을 재인식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회적 삼위일체와 논쟁했으며, 이를 배격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남자가 여자를 발견하고 여자가 아기를 낳았을 그 시점부터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논박했다. 그러나 성서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를 말할 때, 개별적인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창조 이야기에서는 셋에 관한 언급이 아직 나타나지 랧는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자는 바울인데, 그는 고린도전서 11장 7절에서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말하지만, 여자는 단지 "남자의 영광"이라고만 말한다. 이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끌어 낸 결론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이긴 하지만, 그것도 여자가 남자와 함께 인간적 본성을 공유하는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훼 기자의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의 "배필"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자신 혼자로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그에 반해 남자는 그 자신 혼자로서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1.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자질을 갖는 것이고, 그래서 성(性)과 무관한 것이라는 점과, 2. 여자는 오로지 그의 머리인 남자 아래서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미하엘 슈마우스(Michael Schmaus)는 이것을 하나의 "사려깊고 풍부한 영성을 갖는" 문제해결로 여겼다. 그렇지만 이 해결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영성"이 없는 해결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령의 사귐"이 없는 해결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아담, 이브와 셋의 원초적인 핵가족의 상은 오해될 수 있고, 타락을 전혀 모르는 사제문서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또 가족신분은 인간이 갖는 하나님의 형상을 뒷받침하는 권위있는 척도가 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 개인주의가 도출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론적 삼각형은 모든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간은 남자가 아니면 여자이며, 그 부모의 자녀이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의 해체할 수 없는 사회성을 표현하며, 부모와 자녀는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해체할 수 없는 세대성을 표현한다. 하나는 공간 안의 인간적 사귐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 안의 인간적 사귐이다. 만약 전체적이고 현실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규정된다면, 전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사귐, 즉 성의 사귐과 세대의 사귐도 그렇게 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으로 축소시켰다. 몸을 지배하는 영혼은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님과 상응한다. 영혼은 인간 안에서 가장 선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몸보다 고상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몸을 생기있게 하고 지배하며, 몸을 자신의 도구로서 이용한다. 영혼은 몸의 형상이다(anima forma corporis). 영혼은 몸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몸은 영혼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혼은 인간 안에서 하나님과 유사한 측면이다. "이성적인 영이라고 불리는 그러한 피조물보다 더 강한 것은 전혀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언했다. "만약 네가 영 안에 있다면, 너는 중간에 있다. 만약 네가 시선을 바깥으로 돌린다면, 거기엔 몸이 있다. 만약 네가 시선을 위로 돌린다면, 거기엔 하나님이 계신다." 오로지 몸을 지배하는 영혼만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복종하는 몸은 단지 하나님의 흔적(vestigia Dei)을 나타낼 뿐이다. 영혼은 모든 개별적 인간 안의 주체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그 자신으로서 이 땅 위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른 바 "심리적 삼위일체론"의 내용이다. 영-인식-사랑을 통하여 인간적 주체는 신적 주체와 상응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유비는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의 외적인 세계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은 지배자로서 세계와 관계를 맺듯이, 영혼도 몸과 그러한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이 세계를 소유하듯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소유한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들은 복사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외부를 향해서 항상 분리되지 않고 통일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하나님 개념에 나타난 군주론적 일신론은 인간론에서 개인주의를 초래했다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가 인간적인 하나님의 형상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인격들의 사귐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격이 신적인 위엄을 얻게 된 것이다.

인간학에서 비판적인 질문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제기된다: 만약 인간의 몸이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에서 말한 것과 같이, 어떻게 몸이 "성령의 전"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 시대에 이루어진 한 가지 논쟁을 수용하려고 한다.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몸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전 인간(totus homo)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요한 칼빈(Johannes Calvin)은 이 질문에 대해 우선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본성을 갖는다(spiritualis).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영혼만이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에 각인되어 있다. 영혼은 하나님의 거울이다. 몸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지 않는다. 이로써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중세기적 전통만을 반복한 셈이다. 그런 다음에 그는 성서적 전통을 따르면서 창조와 구원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구분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구원된다.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서 신앙인은 육신이 된 말씀, 그리스도의 형상이 된다. 그리고 그의 몸은 "성령의 전"(고전 6, 13 이하)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구원과 완성의 과정 안에서 "몸과 영혼으로"(tam in corpore quam in anima)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성령의 사귐" 안에서 전인(全人)이 몸, 혼 그리고 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인간은 구원하고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몸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몸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화롭게 할 것이다. 미래의 세계에서 이루어질 "몸의 부활"과 "새 땅"을 기다리는 자들은 불멸의 영혼이 사멸할 몸을 억압하고 복종시킬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몸과 영혼은 벌써 여기서 생명을 창조하는 영의 인도를 받아 사귐을 나누고 있다.

만약 몸을 가진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그는 또한 남자여자의 성적 구분 안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제문서의 창조보도에서 하나님이 이 땅에 그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로서" 창조했다면, 남자와 여자의 이러한 원래적인 구분과 사귐이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과 무관한 영혼이나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인간의 인격적인 사귐이 하나님과 상응하고, 그의 영원한 존재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불가피하게 다시금 그리스 교부들의 사회적 하나님의 형상 사상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사회적 유비를 완전히 배격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으로 축소시켰지만, 몸으로부터 완전히 후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자가 갖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신의 "머리"이고자 하는 남자의 지배로 축소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이듯이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하는 바울의 머리의 신학(고전 11, 3 이하)을 따랐다. 하나님 - 그리스도 - 인간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신학적 계급주의는, 고대 교회의 개념들에 의해 판단하건대, 아직도 삼위일체론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신학이다.

만약 전 인간,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사귐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 형상은 단지 그의 지배의 형상만이 아니라 그의 내적인 본질의 형상으로도 이해된다. "성령의 사귐" 안에서 인간의 사귐은 아버지, 아들과 성령의 유일독특하고 비교할 수 없는 사귐과 상응한다.

 

3. 삼위일체적 교회론: 형제자매의 공동체

신학적 교회론은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직무의 권위를 세우는 데 중점을 두어 왔다. 하나님의 백성의 사귐을 세우는 일은 그 뒷전으로 까마득히 밀려났다. 모여진 공동체는 종종 직무의 영향으로만 간주되었다. 이 공동체가 존재하고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말씀과 성례전의 직무 덕택이다. 이런 생각은 전 공동체에 부어지는 성령의 은사들을 과소평가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생각은 "카리스마적(은사적) 공동체"를 한 직무의 카리스마(은사)로 축소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경험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이미 그 자체로서 카리스마적 공동체이다(고전 12; 롬 12, 3이하; 엡 4, 7). 교회는 카리스마적 구조를 갖고 있다. 직무의 권위를 신학적으로 세우는 일은 종종 지나칠 정도로 공동체의 존재를 무시해 왔다. 나는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발전시켜서 앞에서 언급한 교회개념의 일방성을 초래한 군주론적인 감독직 이론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군주론적인 감독직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한 감독 - 공동체.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 그리스도 - 공동체.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대변하듯이, 감독은 공동체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대변한다. 물론 이것은 공동체의 일치를 보장하기도 하지만, 영을 직무에 종속시킨다. 그래서 공동체는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자발적인 카리스마적 공동체가 형성될 수가 없게 된다. 즉 공동체는 교회의 직무행위의 수용자가 된다. 하나님 - 그리스도 - 베드로 - 교황 - 감독(주교) - 사제라는 노선 위에서 교회의 권한을 구원사적으로 도출함으로써, 동시에 자발적인 카리스마적 공동체가 과소평가되고, 또 그래서 "우리 모두와 함께" 하는 "성령의 사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에 빠지게 된다.

카리스마적 공동체는 군주론적인 감독직이나 교황적인 보편적 감독직 안에서야 비로소 일치를 이루는 게 아니라, 요한복음 17장 20절 이하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이 초대하는 아들의 아버지와의 사귐 안에서 이미 일치를 이룬다. 공동체의 일치는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적 사귐이다. 공동체는 이를 모방하고 이에 참여한다. 삼위일체와의 그리고 삼위일체 안의 이 사귐은 제자들의 공동체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귐은 예수의 기도에 근거해 잇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예수가 아버지에 의해 높이 들렸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공동체는 "생활로 실천되는" 삼위일체이다. 공동체 안에서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과 상응하는 상호 간의 사랑이 실천된다. 만약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무시한다면, 앞에서 말한 대로 교회의 직무를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세우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서두에서 비판한 성령이해의 축소와 협소화가 극복되려면, 군주론적인 감독직의 성령론이 하나님의 공동체 전체의 삼위일체적 성령론 안으로 포용되여야 한다.

성령의 사귐 안에서 지배나 종속의 질서가 없는 인간들의 사귐, 사랑에 의해 해방된 남자들과 여자들의 사귐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귐을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래되었지만 종종 억압되고 자주 망각된 성령론적 사상, 즉 성령의 모성직을 다시금 받아들이는 게 유익할 것이다.

진첸도르프 백작(Graf Zinzendorf)이 1741년에 최초의 미국의 형제 공동체와 자매 공동체를 설립했을 때, 그는 성령의 모성직에 대한 인식도 동시에 설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우리의 참 아버지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의 참 어머니이시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의 독생자는 우리의 참 형제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분명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사랑하시지 않을 수가 없다. 아들, 우리의 형제는 분명히 영혼을 자신의 영혼과 같이 사랑하시고, 몸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몸 중의 몸이고, 우리의 뼈는 그분의 뼈 중의 뼈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랑하시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성령의 모성직 이론이 삼위일체를 아버지, 어머니와 자녀를 가진 하나의 "신적인 가족"으로 잘못 생각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선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성적 본성에 온당하게 걸맞은 하나님의 모성적 본성이다. 이것은 모성적 성격하나님의 형상의 가치 안으로 온전히 그리고 독자적으로 통합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단지 "형제의" 공동체만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공동체를 모으게 한다.

진첸도르프가 이러한 인식에 이른 것은 그 시대에 바로 곳프리트 아놀트(Gottfried Arnold)에 의해 새로 번역된 마카리오스(Makarios)의 설교에 의해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카리오스의 유명한 50편의 설교는, 잘 알다시피, 동방 정교회의 신비주의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에집트 광야의 교부 마카리오스가 아니라 메쌀리아나(Messaliana) 추종자들의 시리아 지도자, 메소포타미아의 시메온(Symeon)이다. '시메온 새 신학자'(Symeon der neue Theologe)는 그의 영향을 받았다. 역사적인 마타리오스는 시리아와 유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들의 신학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함을 역사적 연구들은 지적한다. 히브리어와 시리아어는 이미 성령을 "하늘의 어머니"라고 부르기 쉽게 해 준다. 왜냐하면 루아흐(ruach)와 루호(ruho)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복음서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곧바로 나의 어머니 성령께서 나의 머리카락 하나를 붙잡으시사 거대한 산 타보르로 나를 인도하셨다." 그렇지만 마카리오스/시메온은 성령의 모성직을 위해 두 개의 본질적인 신학논증을 전개한다. 1. 그는 요한복음 14장 26절을 이사야 66장 13절과 함께 해석한다: 성령은 "어머니가 위로하듯이 너희를 위로할" 보혜사, 약속된 위로자이다. 2. "새로 태어나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영으로부터 새로 태어난다(요 3, 3-6). 그러므로 신자들은 "영의 자녀들"이다. 영은 그들의 "어머니"다.

성령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실로 시리아로부터 유래한다.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치는 바실리우스(Basilius)에 반해, 그리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의 끈이라고 가르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반해, 시리아 교부들과 후기에는 에디오피아 교부들도 삼위일체적 성령론에 대한 논쟁 안으로 성령의 모성(母性)과 그의 모성직과 "가족"의 상을 이끌어 들였다. 이 사상은 하나님 상 안에 있는 가부장주의와 교회에서의 남자지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 이하에서 동일한 세례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동일한 종말론적 상속권을 근거로 하여 바라보았던 것과 같은, 여자들과 남자들의 해방된 형제자매적 공동체를 정당화하는 데 유용하다.

어머니 상은 다른 상들보다 더 분명하게 성령의 인격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어머니 상은 삼위일체의 유일독특한 사귐을 다른 성령 표상들보다 더 잘 이해시킬 수 있다. 그 외에도 성령을 의미하는 비둘기의 상징도 여성적인 본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방향으로 지시한다. "성령의 사귐"은 그 여성적, 모성적 속성들 안에서 구원하고, 해방시키며, 연합한다.


4. 삼위일체적 성서론: 성령 안에서의 성서의 성취

개신교회는 자신을 성서의 교회로 이해한다. 교회는 말씀의 피조물(creatura verbi)이다. 개신교 신학은 성서를 규정하는 규범(norma normans)으로 인정한다. 개신교 신학은 "말씀을 따르는" 신학이다. 그 어떤 다른 교회도 개신교회만큼 성서원리를 강조하고, 모든 것을 성서의 비판 아래 두는 교회는 없다. 그렇지만 이 전통 안에서도 성령론에서 축소와 일방성이 생겨났다. 이것은 진정하게 이해된 성서원리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극복될 수 있다.

종교개혁 이후의 고대 프로테스탄트적 성서 축자영감론은 구약원전의 맛소라식 구두점 찍기에 이르기까지 프로테스탄트적 성서주의(Biblizismus)와 복음주의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us)를 낳았다. 성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고, 그래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문자 밖이나 문자를 넘어서서 성령의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는 "완전한", "남김없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모든 하나님의 일을 규정하는 권위이다.

이런 고대 프로테스탄트적 성서론에는 어떤 성령론이 존재해 있는가?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말씀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한다. 이 영원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었다. 이것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안에 문자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문자적 기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성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고도 충분히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를 형성케 한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은 축자영감이라고 불린다. 말씀과 성례전은 교회 안에서 "성서에 따라" 집행되어야 한다(CA Ⅶ).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정당화의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 하나님의 말씀 - 성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는 칼 바르트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문자화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사이를 세분화할 수 있다. 성서의 감동을 위해 성령을 언급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의 활동을 요약하자면, 말씀이 마리아 안에서 육신이 될 때와 같이, 말씀이 성서 안에서 문자가 되고, 또 말씀이 인간의 마음 속에 받아들여질 때도, 그가 활동할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령론이 종속론적 성령론이라는 인상을 떨칠 수가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의 활동과 다름이 없다. 군주론적인 방향을 갖는 것도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통치한다. 그의 성서는 규정적 권위를 갖는다. 성서는 무조건적인 인정과 순종의 태도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실로 성서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한다.

이 군주론적 성령론을 포괄적인 삼위일체적 성령론 안에서 지양시키고, 이 안에서 그 진리를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는 찬미론적 성령론을 목표로 삼아 우선 이를 보완한다. 성서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만이 아니라, 또한 인간의 응답의 증언이기도 하다. 성서는 단지 인간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증언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들의 역사의 증언이기도 하다. 말씀에는 응답이, 약속에는 소망이, 복음에는 신앙이, 심판의 말씀에는 탄원이, 하나님의 침묵에는 인간의 절망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는 인간의 감사가 따라온다. 성서를 당사자들의 신앙의 증언으로 해석하는 대응적 행위, 다시 말하면, 실존적 해석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하는 행위와 모순될 필요는 없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자신들의 역사에서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성령의 활동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며, 모든 고난의 경험을 탄원하듯이 모든 생활의 경험에 대해 감사드린다. 이런 넓은 의미에서 성서는 인간들의 응답의 증언이요, 그런 점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또한 탄식하고 감사하는 하나님의 영의 계시이기도 하다. 성서 자체는 단지 계명일 뿐만이 아니라 기도이기도 하며, 선포일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이기도 하며, 회상일 뿐만이 아니라 소망에 넘치는 환상이기도 하다.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인간들에게 말씀하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하여 인간들도 하나님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 보낸 자, 즉 하나님이 세계의 주로 삼은(히 1, 2) 아들을 성서가 증언하는 한, 계시론자들의 관점에서 성서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마지막까지 타당한 선포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찬미론자들의 관점에서는 성서는 성령의 무제한적인 부요함과 "모든 육체에 부어질", 아직도 남아 있는 그의 능력의 경험에 대해 열려 있다. 계시론자들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는 궁극적인 그리스도, 독생자에 집중된다. 그러나 찬미론자들의 관점에서는 찬양하는 응답은 온 창조물, 땅과 하늘에까지 펴져 나간다(빌 2, 10 이하).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하면, 성서는 영광의 나라의 미래에 대해 닫혀 있으며, 성서를 성령론적으로 이해하면, 성서는 그 나라의 미래에 대해 열려 있다. 이것은 아무런 모순이 아니다. 그렇지만 성서의 축자영감론이 영감은 성서의 종결과 함께 완료되었다는 인상을 일으키는 한,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이 이론 때문에 가려진다. 하지만 실제로 성서의 영감(Inspiration)은 영의 문자화(Inverbation)이기도 하다. 이것은 교회와 마음 안의 내주(Inhabitation)를 목표로 한다. 또한 성령이 새로운 창조의 능력이라면, 이것은 다시금 하늘과 땅의 혁신(Innovation)을 목표로 한다.

만약 우리가 두 관점을 다 함께 포용한다면, 성서를 그 자신에 의해 약속되었기 때문에 그 자신에게 속한 미래로부터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를 "성서의 중심"이라고 불렀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서의 미래"라고 불리어야 마땅하다. 성서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지시한다. 이 역사는 오고 있는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성화의 능력을 중재하며 영광의 날에 창조물을 보존하고 정돈하는 영의 역사이다. 성서는 그 자체 안에서 닫혀 있는 하늘의 교리체계가 아니라, 그 자신의 성취에 대해 열려 있는 약속이다. 성서는 문자가 된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미래의 보증금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성서적인" 설명은 역사에서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 설명은 "성서가 응하여졌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그 미래가 도래할 때까지 타당하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성서는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성서는 자신을 넘어서는 역사에 대한 역사적인 증언이다. 이 사건 안에서 영광의 나라의 미래는 이미 사건화되었고, 도래하였다. 그러므로 성서성령의 경험 안에서 성취되기 시작하고, 오고 있는 영광의 나라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성서에 의해 증언된 그리스도의 역사의 목표(finis historiae Christi)는 1. 신앙 안에서의 칭의요, 2.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의 성화요, 3.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영화이다.

우리는 찬미론적 성령론을 위하여 고대 프로테스탄트적 성서론의 종속론적 성령론을 보완할 수 있으며, 양자를 삼위일체적 성령론 안으로 수용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개신교회의 성서원리의 준거적 역할과 비판적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성서의 기능을 삼위일체의 포괄적 역사 안에서 설명하는 하나의 성서론을 갖게 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서와 영을 통하여 그의 창조물을 그의 나라로 인도하며, 그 창조물에게서 자신을 영화롭게 한다. 성서의 은사, 그 "인내와 위로"(롬 15, 4)는 "성령의 사귐"의 한 부분, 그 안에 있는 최상의 부분이다. "성령의 사귐" 안에서 성서신학 저술가들과 교회에 대한 순종의 관계는 -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다면 - 그에 대한 우정의 관계로 변한다.

 

5. 삼위일체적 찬미론(讚美論): "아버지와 아들과의" 영의 사귐

우리는 신학전통으로부터 두 개의 삼위일체론의 형태를 알고 있다. 하나는 군주론적 삼위일체론이고, 다른 하나는 찬미론적 삼위일체론이다. 끝으로 우리는 구원사의 인식으로부터 생기는 삼위일체의 두 질서를 영원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찬미론 안으로 수용하는 일을 시도하려고 한다.

삼위일체의 군주론적 형태는 하나님의 모든 활동에서 계시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창조한다.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을 보낸다. 아버지는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능동성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아들을 통하여 중재되고, 성령 안에서 효력을 끼친다. 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행동을 목표로 이끈다. 여기서 성령의 고유한 행위는 그 자신의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을 현실화하는 데에 있다. 아버지가 행하는 모든 일은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신적인 행동은 그 절정에서 성령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관점에서는 영의 위격성이 전혀 인식될 수 없다. 만약 그가 신적인 활동의 결과와 신적인 행동의 목표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의 능력을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 비해 아무런 능동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에 의해 세상으로 파송된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순전히 수동적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그의 생존을 부여받고, 아들로부터 그의 파송을 받으며, 그 자신의 편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서방교회와 특히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이런 형태의 삼위일체를 너무나 자주 유일한 형태로 삼았다. 창조, 계시, 파송과 성화의 빛 안에서 모든 능동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교회는 그 파송에 대해 순종함으로써, 이러한 능동성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자신을 계시하고 파송하는 하나님을 뒤로 하고, 세상을 그 선교영역으로서 앞에 대한다.

삼위일체의 찬미론적 형태는 방금 설명한 삼위일체의 군주론적 형태를 바로 뒤집은 것이다. 비탄의 탄식 안에서, 감사 안에서, 아버지를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중에서 모든 능동성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활동의 목표가 달성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며 축복할 때까지 성령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와 함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사귐" 안에서 하나님의 활동만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또한 감사를 통하여 이미 그 목표를 실현하기 시작한다. 영의 능력으로 우리는 아들의 형상 안에서 아버지를 인식하고,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부르며, 아들 때문에 아버지를 찬양한다. 삼위일체의 찬미론적 형태 안에서는 능동성이 영으로부터 나오며,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와 함께 아버지에게 도달한다. 아버지는 영 안에서 갱신된 창조물의 찬양을 받는다. 여기서 성령은 단지 이 찬양의 창조자만이 아니다. 그는 아들을 통하여 온 창조물을 아버지와 결합시킨다. 만약 우리가 신학적으로 이러한 찬미의 운동 안에서 사고한다면, 우리는 말하자면 하나님을 우리 앞에서 대하며, 세상을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대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세상 앞에서 단지 하나님만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세상도 대변하며, 온 창조물을 대변하면서 감사하고 찬양한다.

삼위일체의 두 형태는 구원의 역사에 속한다, 양자는 특별한 노선 위에서 그리고 목표지향적인 질서 안에서 삼위일체를 지시한다: 아버지 - 아들 - 영 그리고 영 - 아들 - 아버지. 삼위일체의 군주론적 형태 안에서 영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종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영은 그들의 활동이다. 삼위일체의 찬미론적 형태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영은 아들과 아버지에게 종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들을 영화롭게 한다.

삼위일체의 두 형태는 니케아 신조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써 암시한 삼위일체적 찬미론에 의해 지양되고 초월된다: ". . .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동일하게 경배되고 찬양받는." 경배와 찬양은 분명히 경험된 구원과 표현된 감사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를 넘어선다. 경배와 찬양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기 자신 때문에 사랑받고 찬양받는다.

삼위일체적 찬미론과 함께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하나님을 보는 것(visio beatifica)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적 찬미론은 구원의 역사를 넘어서 삼위일체 자체의 영원한 존재를 바라본다. 삼위일체의 이러한 영원한 존재 안에서 영은 더 이상 그 시간적 질서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뒤에 혹은 아래 나타나지 않고, 그의 영원한 사귐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나타난다.

군주론적 형태 안에서 삼위일체는 창조물과 구원에 대해 자신을 개방시킨다. 찬미론적 형태 안에서 삼위일체는 구원받은 창조물을 그의 영광 안으로 받아들인다. 삼위일체적 송영론 안에서 삼위일체는 그의 영원한 완전성 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하나님 찬양 안에서 모든 삼위일체적 성령론은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