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여 오소서,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소서"


J. Moltmann , 이신건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1. 깊은 곳에서 나오는 외침

세계교회협의회 제7차 대회의 주제는 하나의 기도이다. 이것은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외침이요, 위협받고 생명에 목마른 피조물로부터 들려 오는 영의 숨결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모든 경험의 시초에는 피조물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외침이 있다. 에집트에서 고문당하는 이스라엘의 아우성이 있다(출 3, 7). 로마의 십자가 상에서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외침이 있다(막 15, 34). 그리고 하나님은 고난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외침을 듣는다. 그는 그의 백성을 종살이로부터 약속의 땅의 자유로 인도한다. 그는 그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다가올 세계의 생명으로 인도한다. 오늘 날의 파괴당한 이 지구 세계로부터 살기 원하지만 죽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탄식소리가 하나님에게로 올라간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 22). 피조물은 시간의 힘 아래 고통하고, 죽음의 권세 아래서 죽어 가며, 영원한 영의 임재를 향해 소리지른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이 임재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고, 계속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괴당한 이 지구 세계로부터 오늘 날 하나의 기다림이 일어난다. 그것은 해방시키고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향한 부름이다. 이 외침 안에서 위협당하는 피조물은 벌써 하나님의 영의 도래를 위해 자신을 개방시킨다. 구원받지 못한 온 땅에 슬픔도 있지만, 또한 기다림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능력을 향한 이 탄식과 외침 안에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는"(롬 8, 26) 이 영 자신의 도래도 이미 느낄 수 있다. "성령이여 오소서" - 혹은 중세기의 찬송: "오소서, 창조자 성령이여"(Veni creator Spiritus) -와 같은 기도는 죽어 가는 피조물의 죽음의 아우성을 표현하며, 영의 숨결 속에서 자유와 생명을 향해 소리친다.

피조물은 어떤 고통으로부터 그 창조자를 향해 소리치는가? 그것은 두 가지 고통이다. 그것은 인간에 의한 무자비한 점진적인 자연파괴이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런 공격이 야기하는 자연 자체의 파괴가능성의 고통이다. 지구라는 자연은 오늘 날 점점 더 인간의 문명에 의한 지배와 착취에 굴복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지상적 피조물들, 식물들, 동물들과 인간들이 허무함, 시간의 힘과 죽음의 권세에 굴복당하기 때문이다. 피조물들이 깊은 곳으로부터 생명을 향해 소리치는 것은 두 측면을 갖고 있다. 한 측면은 인간이 아닌 자연이 인간의 폭력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다른 한 측면은 자연과 인간이 시간과 죽음의 폭력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오늘 날 "생태계의 위기"와 그러한 경향성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일반적으로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것을 언급해야 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기술문명의 확대는 매 년마다 더 많은 종류의 식물들과 동물들을 회복할 도리가 없도록 멸종시키고 있다. 이것은 공기와 땅을 오염시키고, 기름진 땅을 황야로 변질시킨다. 점점 더 빠르게 진행되는 자연의 이러한 파괴는 주로 산업국가로부터 생겨난다.

이와 동시에 인구도 증가한다. 인구는 몇 세기 동안의 기나 긴 균형 후 지난 60년대 동안 4배로 증가했고, 2000년대 초엽에는 100억이라는 숫자에 이를 것이다. 인류의 생활수단과 에너지 욕구는 자원이 감소하는 속도 만큼 급속히 증가한다. 인구의 증가는 주로 제3세계의 국가들로부터 생겨난다.

불법과 폭력은 인류를 제1세계와 제3세계로 갈라놓았고, 제3세계의 인류와 환경에 파괴적인 재앙을 초래했다. 백성들의 자연적 생활토대의 착취가 과오로 변하고, 또 이 과오가 남용으로 변하는 하나의 악순환 속으로 인류는 빠져들었다. 인간 문명의 확산은 이미 지구의 우주적인 생활조건의 한계에 도달했고, 다음의 몇 세기 동안 지구의 기후대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온실효과"가 증명하는 대로, 이 생활조건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이 지구 위의 생활은 미래에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먼저 창조 공동체의 가장 약한 지체들, 식물들과 동물들이 죽고 나면, 그 다음엔 인간들도 죽는다. 먼저 어린이들이 죽고 나면, 그 다음엔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이 죽는다.

우리는 대기 속으로 올라간 독과 땅 속으로 스며든 독을 더 이상 거두어들일 수 없고, 이 독이 가하는 손해를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지구 위의 인간의 생존이 미래를 가질 것인지 아니면 불가피하게 과거로 변해 버리고 말 현재만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인구폭발을 통제할 수가 없고, 또 많은 백성들이 분명히 이를 전혀 통제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제3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는 미래의 생존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고, 더 짧아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여 생명을 창조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도록 만드는 지구적 생명체의 현실적 고통이다. 이것이야말로 저 지구의 더 약한 생명체들로 하여금 우리 인간들과 함께 그리고 우리를 대변하여 생명의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도록 만드는 죽음의 고통이다. 하나의 창조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 날 더 이상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희생당하는 자들과 가해자들의 고난의 공동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아닌 자연 그 자체가 연약하고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에 의한 이러한 자연파괴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파괴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고 스스로 죽지 않게 된다면, 인간의 자기파괴도 없을 것이다. 분명히 지구의 피조물들은 창조자가 "보기에 매우 좋았더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태초의 건강한 상태에 더 이상 있지 않고, 파멸의 권세에게 장악당했다. 분명히 오늘의 피조물은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완성의 상태에 있지 않다. 분명히 지구의 피조물은 시간의 힘과 죽음의 권세 아래 떨어졌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를 "종노릇하는 피조물"이라고 불렀다(롬 8, 21). 우리가 오늘 날 경험적으로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 이상 원래의 창조도 아니고, 새로운 영원한 창조도 아니다. 지금 지구의 피조물은 슬픔에 잠겨 있다. 이 피조물은 영속적이고 복된 생명을 향한 하나의 갈구로 신음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창조의 겨울을 지내듯이 살고 있으며, 새 창조의 봄을 기다린다. 그러한 "온 창조의 갱신"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단지 우리 인간들이 자연과 우리 자신들에게 가한 그러한 파괴의 극복만이 아니라, 이 지구의 피조물의 현재적 조건들, 자연의 파괴가능성과 인간의 파괴능력의 변혁이기도 하다. 온 피조물은 시간의 힘과 죽음의 권세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 인간들이 악을 행하는 습관을 버리려고 하고, 죽음을 더 이상 맛보지 않으려고 한다면, 새로 태어나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과 우리 인간들도 이러한 "우주의 거듭남"(마 19, 28)을 목마르게 갈구한다.

왜 죽어가는 모든 것들과 폭력의 희생자들은 "성령"을 향해 소리치고 아우성치는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메시야적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통하여 그의 영의 능력으로써 만물을 창조했다. 창조주는 그의 영을 통하여 그의 모든 피조물들 안에 임재한다. 그는 그의 영의 능력으로써 창조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의 영 안에서 피조물들은 살게 될 것이며, 그의 영이 없다면, 그들은 파멸한다(시 104). 그의 영원한 영은 만물 안에 있는 원동력이요, 생명의 영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안에는 생명을 향한 열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을 향해 소리지른다. 왜냐하면 오직 이 영 안에서만 그들은 살 수 있고, 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하지만 계속 존속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을 존속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현존을 갈구한다.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파괴당하는 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마치 어린이가 어머니를 향해 소리치듯이, 성령을 향해 소리친다. 그러므로 성령은 니케아 공의회가 말하는 것과 같이 "해방시키는 주"와 "살리는 어머니"(Dominum et vivificantem)라고도 불린다. 만약 우리가 지구의 피조물들과 함께 성령의 오심을 기다린다면, 다음의 두 가지를 기다리는 셈이다: 불법과 폭행으로부터의 해방과 시간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2. 하나님의 안의 창조

그리스도교의 창조이해에 따르면, 창조는 삼위일체적 과정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써 창조한다.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나님을 통하여" 형성되며, "하나님 안에서" 존재한다. "이 존재들을 창조하는 순간에 선행하는 원인인 아버지와 창조하는 자인 아들과 완성하는 자인 영을 보라. 그러므로 섬기는 영들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되고, 아들의 활동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며, 영의 도움으로 완성된다."고 벌써 바실리우스(Basilius)도 말하였던 것이다. 서방교회의 전통은 창조주 하나님을 그의 피조물인 세상과 구분하고 그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래 동안 단지 첫 관점만을 강조해 왔다. 이 전통은 자연으로부터 그 신적인 비밀을 박탈했으며, 세속화를 통하여 자연을 탈신성화에 내맡겼다. 그러므로 온 피조물을 창조주에 대한 경외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피조물 안에 있는 창조주의 내재성(內在性)을 재발견하는 일이 오늘 날 중요하게 되었다. 이에 가장 잘 기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창조"라는 그리스도론적 창조개념과 "하나님의 영 안의 창조"라는 성령론적 창조이해이다.

시락서 8장 22-31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딸, 지혜를 통하여 세상을 창조했다.

 

주님은 그의 행로의 처음부터 나를 가지셨다.

그가 뭔가를 창조하시기 전에, 내가 있었다.

나는 땅이 있기 전에, 태초부터 영원히 임명되었다. .

그 때에 나는 그의 곁의 장인(匠人)이었으며,

매일 즐거워하고 항상 그 앞에서 뛰놀았고,

그의 마당에서 놀았으며,

어린 아이들을 즐거워했다.


지혜문학에 따르면, 이 창조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불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뜻하는 것은 언제나 만물 안의 하나님의 세계내재적 임재이다. 만약 만물이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면, 그 다양성보다는 초월적 일치가 앞서는 셈이다. 만약 만물이 하나님의 지혜를 통하여 창조된다면, 그 다양성의 바탕에는 내재적 일치도 놓여 있는 셈이다. 지혜를 통하여 서로 함께 존재하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들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부활신앙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창조한 지혜로도 보았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골로새서가 가르치는 바 대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우주적 지혜를 재인식했다. 그리스도는 세계의 신적인 비밀이다.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자는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도 찬양하며,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그를 찬양한다.

 

나는 만물을 비추는 빛이다.

나는 만물이다. 만물은 나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만물은 내게로 되돌아온다.

나무 한 토막을 베어 보라. 내가 거기에 있다.

돌멩이 하나를 집어 보라. 그러면 나를 느끼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도 있다. 창세기 1장 2절에 따르면, 말씀을 통한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영의 진동 에너지가 있었다. 하나님은 명령하고 구분하며 판단하는 그의 말씀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만물은 "제 각기 그 종류에 따라" 개별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살리는 그의 영의 호흡 속에서 말한다. 창조의 공동체를 볼 때, 말씀과 영은 서로를 보완한다. 말씀은 세분화하고 차별화한다. 영은 결합하고 일치를 형성한다. 인간의 언어에서처럼 말은 서로 다르지만 동시적인 호흡 중에 전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이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개개의 피조물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하나님은 온 피조물을 통하여 호흡한다." 내가 여기서 "창조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창조 전체는 하나님의 영의 호흡을 통하여 지탱된다.

창조주는 말씀과 영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그의 피조물에게 알리며, 솔로몬의 지혜서 12장 1절이 말하듯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주님, 당신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주님의 불멸의 영은 만물 안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단지 "그의 손으로 지은 작품"만은 아니다. 창조는 간접적으로 중재하는 하나님의 임재이기도 하다. 만물이 창조된 것은 모든 피조물들의 "공동의 집"이 되어,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들과 함께 살고 그의 피조물들이 그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함이다. 이 점은 성서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의 비유로써 표현된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 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사야 66장 1절 이하를 인용한 사도행전 7장 48절 이하)

 

요한 계시록 21장 1-4절에 나오는 만물의 새 창조의 환상도 하늘의 예루살렘의 모습과 함께 종말에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고 안식할 수 있는 성전이 된다는 표상을 갖고 있다. 태초의 창조로부터 하나님의 영은 어디서나 임재하며,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유지하고 양육하며, 만물에 생기를 준다. 그의 능력과 지혜는 만물 안에서 활동하고, 만물을 지탱하고, 만물에 생명과 운동을 준다. 예언자들과 묵시가들의 희망에 따르면, 만물의 새 창조는 하늘과 땅을 하나님의 거처가 되게 함으로써, 이 곳에서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안식을 취하며, 그의 집안 식구들인 피조물들로 하여금 그의 영원한 생명과 그의 영원한 기쁨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만물 안에 거하고 만물이 하나님의 거처로 준비한다는 이러한 견해로부터 우주적인 하나님 찬양과 만물 안의 하나님 찬양이 생겨난다.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행하는 것은 대리적으로 온 우주와 관련된다. 이미 솔로몬의 성전도 소우주로서 대우주를 대변하고 그와 상응하기 위하여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한 우주의 척도에 맞춰 건설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임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만물의 새 창조 안에 임재하는 것의 전조(前兆)와 시작이다. 교회는 그 설립과 본질에서부터 우주를 지향한다. 교회를 단지 인간 세상에만 제한하는 것은 위험한 현대의 협소화(狹小化)였다. 그러나 만약 교회가 우주지향적이라면, 지구 피조물의 "생태학적 위기"는 그 자신의 위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구의 이러한 파괴로 인하여 "살 중의 살과 뼈 중의 뼈"가 파괴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더 약한 피조물들이 죽어 간다면, 온 창조의 공동체도 고난을 당하는 셈이다. 만약 교회가 자신을 창조의 대변자로 이해한다면, 더 약한 피조물들의 이 고난은 자신 안에서 분명한 고통이 된다. 그리고 교회는 이 고통을 공개적인 저항 속에서 외치면서 드러내어야 한다. 비단 우리 "인간의 환경"만이 고난을 당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환경"으로 결정된 피조물도 고난을 땅한다. 창조에 대한 회복불가능한 침해는 신성모독이다. 그 결과는 가해자들의 자기추방이다. 허무주의적인 자연파괴는 실천적 무신론이다.

3. 성령을 통한 창조의 보존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의 임재에 의존해 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 29 이하). 그리스도교 이해에 따르면, 세계는 무로부터(ex nihilo) 창조되었다. 이로부터 생기는 결과는 세계가 항상 무존재에 의해 위협당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창조주는 그의 피조물을 항상 견고하게 하고, 파멸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한 것을 보존한다거나, 창조주가 매 순간마다 그의 피조물에게 그의 원초적인 긍정을 반복한다고 표현된다. 앞의 것은 세계의 보존(conservatio mundi)의 표상이고, 뒤의 것은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의 표상이다. 그렇지만 두 표상은 일방적으로 태초의 창조와 관련되며, 아직 만물의 새 창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한다. 그러나 태초의 창조와 그 보존은 하나의 목표에 기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서의 창조의 완성이다. 그러나 창조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갈구한다. 이를 위하여 창조된 것은 보존된다. 계속적 창조는 이 목표로 방향지워진다. "태초의 창조"(창 1, 1)는 이 종말을 생각하게 하고, 고난당하는 모든 피조물들의 갈망은 이 종말의 도래를 기다린다(롬 8, 19 이하). 세계 안의 하나님의 현재적인 활동에 대해서 말하려는 자는 이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의 완성을 위하여 그것을 보존한다. 파멸로부터 피조물을 보존하는 모든 행위는 그 미래에 대한 희망의 행위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침마다 새롭다"(애 3, 23)고 말한다면, 우리는 해가 돋을 때마다 새 창조의 서곡을 인식하게 되는 셈이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 5).

하나님은 어떻게 그의 피조물을 보존하는가? 그는 인간의 죄와 우주적 혼돈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의 생명의 영을 보존한다. 그는 그의 인내를 통하여 이를 보존한다. 왜냐하면 생명에 저항하는 요소들을 참아 냄으로써, 그는 그의 피조물에게 생명을 위한 시간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의 오래 참음은 그의 피조물에게 공간을 허락한다. 창조의 보존자가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참는"(고전 13, 7) 한, 그는 전능하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며,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전향하도록, 그리고 그의 영원한 나라로 귀향하도록 유인한다. 만약 우리가 창조의 기적을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의 전달로 이해한다면, 창조의 보존의 기적 안에서 이 사랑의 무진장한 열정을 발견할 것이다. 이 두 기적 안에서 자신의 피조물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희망이 표현된다. 창조의 수난사(受難史)는 하나님의 수난사이기도 하다. 그의 피조물이 생명으로 돌아오는 전환의 역사는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기뻐하는 기쁨의 역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내재적인 영을 통하여 그의 피조물의 운명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피조물의 탄식과 신음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영이 탄식하고, 신음하며, 구원을 향해 외친다. 자신의 내재하는 영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물과 함께 고난당하는 하나님은 피조물의 확고한 희망이다. 이 희망은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며. 이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종노릇하는 피조물"(롬 8장)에 대한 바울의 언급과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골 1장)에 대한 그의 강조는 오늘의 현실이 더 이상 태초의 창조도 아니거니와 새 창조도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사람들이 태초와 완성 사이의 이러한 불완전한 창조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오직 인간과 다른 지구의 피조물들 간의 고난의 사귐이다. 창조의 공동체는 이러한 상태에서 고난의 공동체이다. 만약 자연이 인간 세상의 한 부분이 된다면, 구원받지 못한다. 만약 인간도 자연으로 되돌아가면, 구원받지 못한다.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에서 구원이 존재한다면, 오로지 만물의 화해와 새 창조에 대한 공동의 희망 가운데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만물의 새 창조는 모든 생명체들이 다시 푸른 색을 띄고 열매를 맺게 되며 생명의 흐름을 안고 있는 얼음이 부서지는 봄과 비슷하다. 그리스도교의 많은 성탄절 축제와 부활절 축제는 새 창조를 궁극적이고 영원한 창조의 봄으로 묘사한다.

이것이 오늘 날의 생태학적 논의를 위해 갖는 의미는, 우리가 인간의 환경 안에서 독자적인 자연을 발견하고, 독자적인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탄식하는 피조물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환경"이라는 표현은 인간중심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이란 단지 인간과 관련맺는 자연일 뿐이다. 환경은 인간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되는 자연이다. 만약 우리가 온 자연을 단지 자신의 "환경"으로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바로 자연의 독자성을 완전히 폐기시키는 것을 의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연의 탈신성화 다음에는 자연을 인간의 환경으로 격하하는 일이 뒤따라온다. 이러한 관점에서 "환경"은 명백하게 공격적인 개념이다. 자연은 이에 대해 불쾌하게 반응하고 반대혁명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환경" 배후에서 자연을 자신의 권리를 갖는 한 주체로 재발견하는 것은 생명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모든 형태의 생명은 인간을 위한 그 가치와는 무관하게 유일독특한 것이며,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1982년의 유엔의 "세계 자연헌장"이 정당하게 말하였다. 인간의 문화는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환경은 자연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자연의 법칙과 리듬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 식물들, 나무들과 동물들의 자연적인 환경을 배려해야 한다. 자연이 갖는 그 자신의 권리들이 존중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창조라고 부르는, 자연의 내적, 신지향적(神指向的) 측면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연"은 창조의 현재적, 내재적 측면이다. 창조는 자연의 초월적 측면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자연적 존재는 내재적 초월성을 갖고 있으며, 초월성은 모든 자연적 존재 안에 내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생활의 공간과 그 동반자인 현실을 "창조"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자연을 인간의 환경으로 뒤바꾸고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의 표현이 되는 셈이다. 저항은 피조물이 그 현재적인 자연상태로부터 새로운 세계의 영원한 봄으로 해방되는 것을 기다리는 희망으로부터 생겨난다. 이것은 단지 자기 자신의 생활토대를 허무는 인류의 생태학적인 자기파괴에 맞서는 저항일 뿐만 아니라, 그 허무함의 종살이와 그 슬픔에 맞서는 저항이기도 하다.

 

4. 성령을 통한 만물의 창조

만물의 궁극적인 새 창조는 매일마다의 창조의 보존을 훨씬 넘어선다. 이를 통해 극복되는 것은 단지 파괴만이 아니라 파괴 가능성이기도 하고, 단지 인간의 폭력에 의한 죽음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사멸 가능성이기도 하다. 현재의 창조의 근본적인 조건들이 변화된다. 피조물은 시간의 힘으로부터 영원의 현재로 해방되고, 죽음의 권세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해방된다. 어디서나 혼돈과 파멸에 의해 위협당하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완전히 보호받는다.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병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그리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가져 왔을 때, 그는 이 만물의 새 창조를 선포한 셈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을 생각해 볼 때, 이 만물의 새 창조는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극복한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을 새 창조의 첫 날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이 날은 빛의 새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 6)이다. 목격자들의 보도에 의하면, "부활현현"은 새 창조의 첫 날의 우주적인 빛 안에서 일어났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일찍부터 부활의 날을 "여덟 째 날", 다시 말하면, 새 창조의 첫 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역사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새 세계의 시작으로 파악했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눈물이 씻겨질 것이고, 더 이상 죽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동방교회의 부활예배는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모든 것들, 하늘, 땅과 죽음의 나라가

빛으로 가득 찼도다.

온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도다.

피조물은 그 안에서 세워졌도다.

 

파울 게하르트의 부활절 복음성가는 같은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양, 지구, 모든 피조물들,

이전에 슬퍼하던 모든 것들이

오늘 이 날을 즐거워한다.

세상의 임금들이 땅에 엎드려졌기에.

 

그리스도교의 부활 축제가 봄 축제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자연의 봄은 만물의 새 창조의 영원한 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또 그리스도교의 오순절 축제가 여름의 시작과 맞아떨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즉 자연이 푸르게 되고 꽃들이 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숨결 안에서 온 피조물들이 영원히 생기를 얻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죽은 자들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에게서 일어난 죽음의 파멸과 함께 허무하고 사멸하는 만물의 새 창조라는 종말론적인 과정이 시작된다. 지구 피조물의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창조주 영"을 향해 소리치는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육체의 부활과 자연의 부활도 기다린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태어남으로써, 우리는 온 우주의 다시 태어남도 기다린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아무 것도 상실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영화(榮華)된 형태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만물의 새 창조의 영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폭력과 우주의 혼돈의 극복을 기다린다. 이를 넘어서 우리는 시간의 힘과 죽음의 권세의 극복을 기다린다. 끝으로 우리는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는" 영원한 위로를 기다린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과 또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귐의 춤을 추며 영원히 기뻐할 날을 기다린다.

여러 가지 비유들로써 우리는 우리가 갈망하는 만물의 이런 새 창조를 표상하려고 하였다. 만물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는 부정적 요소들의 부정 안에서 강하다: "하나님은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 4). 그러나 만물은 긍정적 요소들 안에서 약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처럼 상처받는 생명 가운데서 아직은 그런 경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 긍정적 요소의 선취(先取)가 없다면, 우리는 부정적인 요소의 개념들을 전혀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당한다. 우리는 살려고 하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남아 있기를 원하지, 사라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사랑, 생명, 영속성에 대한 긍정적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만물의 새 창조에 대한 희망의 표상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돈과 죽음의 세력을 몰아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는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구상의 불의와 폭행을 몰아낼 "하나님의 의"를 희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피조물들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의 다시 태어남을 희망하려고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엄청난 매일의 죽음 때문에 절망하고 말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상처당하기 쉽고 죽어 가는 이 생명에 대한 사랑이 다시금 태어난다. 이 사랑은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단 하나의 피조물에 대한 희망이라도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지 않았을 것이다. 희망에 근거한 사랑은 확산하는 체념의 병을 퇴치하는 가장 강한 약이다. 수많은 피조물들의 죽음을 감수하는 현대인의 냉소주의는 죽음의 동맹군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저항하는 백성들"(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고통의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을 향해 소리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피조물을 유지하는 영을 향해 소리지르고, 만물의 새 창조의 영을 기다린다. 깊은 곳에서 나오는 우리의 외침은 하나의 생명의 표징 - 하나님의 생명의 표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