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기획(企劃)에서 본 신학

J. Moltmann : Gott im projekt der modernen Wel(이신건 옮김) 중에서

 

신학은 오직 하나의 문제, 즉 하나님만을 다루고 있다. 이 말은 단순하지만, 사실이다. 우리가 신학자가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희망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첫 번째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존재의 주체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 안에, 우리의 문화 혹은 우리의 교회 안에 계시지 않다. 하나님은 그분의 현존 안에, 그리고 그분의 나라 안에 계신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교회, 문화와 종교가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있다면, 그분의 진리 안에 있는 셈이다. 하나님을 위한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신학이다. "건강하고 알찬 모든 해방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신학 안으로 포괄된다"고 구스타보 구티에레츠(Gustavo Gutiérrez)가 말하였다. 이것은 온갖 형태의 정치 신학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신학으로서 공적(公的)인 신학일 수 밖에 없다. 즉 신학은 사회의 공적인 사건들에 참여한다. 신학은 공적으로, 비판적으로, 예언자적으로 하나님에게 호소한다. 신학은 공적으로, 비판적으로, 예언자적으로 하나님을 희망한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공공성(公共性)은 신학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공적인 신학은 제도적으로 교회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고, 공적인 학문 전당 안에 자리잡을 필요가 있다. 이 자유는 오늘날의 무신론자들과 근본주의자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현대 세계에서 철저히 신학적인 과제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인 과제이기도 한 하나님 나라의 과제를 오늘과 내일에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대 세계"의 암시적 신학(暗示的 神學: Implizite Theologie)을 이해하는 것과 "현대 세계"의 탄생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바로 그래야만 현대 세계의 활력과 그 탄생의 결함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세계"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자식이다. 첫 장에서 나는 현대 세계가 메시야적 희망의 영으로부터 탄생하게 된 과정을 묘사할 것이다.

탈현대성(Postmodernity)의 문제는 비단 현대의 다원주의(Pluralismus)만은 아니다. 현대성이 현대성의 비극(Submodernity)으로 양극화(兩極化)한 것도 문제다. 그러므로 나는 두 번째 장에서 현대와 현대의 비극 간의 모순 혹은 현대 세계의 종말을 다룰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현대에 수행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과제를 새롭게 규정하려고 한다. 세 번째 장에서 나는 생명의 영으로부터 세계가 다시 태어난 과정을 다룰 것이다.

 

1. 현대 세계가 메시야적 희망의 영으로부터 탄생한 과정

현대 세계가 주창하는 "새로운 시대"는 계몽주의 이전 최소한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기원을 갖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Conquisita, 즉 1492년 이래로 진행된 아메리카의 발견과 정복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들이 과학-기술적으로 자연을 정복하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1.1492년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한 초석이 놓여진 해다. 상당히 주변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던 유럽이 그 당시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492년은 유럽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대륙들을 힘으로 장악하기 시작한 해였고, 헤겔(Hegel)의 말대로 하면, 현대성이 탄생하던 시간이었다. 스페인 사람들과 포르투칼 사람들, 그리고 영국 사람들과 네델란드 사람들은 미국에서,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시베리아에서 각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발견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발견한다"는 것은 숨겨진 것을 밝혀낸다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항상 낯선 것을 소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낯선 것에는 발견한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다. "아메리카"는 인식된 것이 아니라 소유되었으며, "발견한 사람"의 뜻에 따라 형성되었다. "아메리카"는 "유럽식 사고의 고안"이라고 멕시코의 역사가 에드문도 오고르만(Edmundo O'Gorman)은 말하였다.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고안하였기 때문이다. 아츠텍과 잉카 사람들의 고유한 생활과 문명은 오늘날까지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다르고 낯설다 이유로 억압되었으며, 점령자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섬과 산, 강은 오랫동안 토착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콜롬부스에 의해 스페인적인 이름과 그리스도교적인 이름의 세례를 받았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점거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발견된 민족들"의 언어를 금지하고 억압한 것에도 적용된다. 그 밖에도 "주인이 없는 보물", "무인도"와 "광야"의 신화는 강탈과 식민, 정착을 정당화하였다. 아메리카의 정복과 함께 유럽의 그리스도교도 세계의 지배자로 나섰다. 유럽의 그리스도교가 영혼을 정복한 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제국을 위한 것이었다. 결단의 문제는 "신앙이냐 불신앙이냐"가 아니라 "세례냐 죽음이냐"였다.

2.자연에 대한 과학-기술적 정복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또 다른 초석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kloaus Kopernikus)이삭 뉴턴 경(Sir. Issak Newton) 사이의 기간 동안 새로운 학문은 자연을 탈마술화(脫魔術化)하였고, 그 때까지 "세계의 영혼"이라고 불리던 신적인 신비를 자연으로부터 박탈하였다. 이리하여 "어머니 땅"과 위대한 생명을 경외하는 모든 금기(禁忌)도 사라졌다. 프란 시스 베이컨(Francis Bacon)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res)의 성차별주의적인 언어가 말하듯이, 자연과학은 인간에게 "어머니 땅과 그 딸들"을 데려다 주는데, 인간이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남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발견"이 이루어는데, 오늘날까지 발견은 발견자의 이름을 가지게 되고 노벨상으로 포상된다. 이런 자연과학적 "발견"도 우리의 무지(無知)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우리의 힘 안으로 인도하고 우리를 그 주체로 만들기도 한다. 베이컨(Bacon)이 말하였듯이, "새로운 과학 수단"(Novum Organon scientiarum)은 "발견의 예술"(ars inveniendi)이다. 자연과학적 이성(理性)은 "도구적 이성"인데, 여기서 이성은 사용하고 지배하려는 관심에 이끌리면서 사물을 인식한다. 이성은 지각 기관이었던 고대의 수용적 이성을 억압하였으며, 경험의 지혜 가운데서 이성을 포착하였던 고대의 프로네시스(phronesis)를 억압하였다. 칸트(Kant)의 "순수이성비판"에 따르면, 현대의 이성은 자연에게 "자신의 물음에 답변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낸 것"만을 볼 뿐이다(2판의 머리말). 자연에 대한 이러한 "강요"는 "도구"라고 일컬어졌으며, 18세기에는 종종 고문 속에 이루어지는 심문과 비교되곤 하였다.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표어는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자연과학적 지식은 자연과 생명을 지배하는 힘이다. 자연과 학과 기술로부터 유럽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지식을 획득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식민지의 자원들로써 온 세계에 편만한 문명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문명의 기원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프랑크푸르트와 시카고, 싱가포르에서도 문명은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자연과학과 기술의 승리를 통하여 승리한 하나님의 종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며 확장되어가는 서구 문명은 자신의 세계를 "그리스도교의 세계"라고 불렀으며, 19세기에는 자신의 시대를 "그리스도교의 세기"(The Christian Century)라고 불렀다. 이런 이름을 갖는 잡지가 오늘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현대 유럽의 세계 발견을 동기화하였는가? 그것은 "신세계(新世界)"의 환상이었다. 콜롬부스는 분명히 하나님의 정원 에덴(Eden)만을 찾아 다녔던 것이 아니라 황금 도시 엘도라도(Eldorado)도 찾아 다녔다. "하나님"과 "황금"은 정복의 가장 큰 동기였다. 콜롬부스와 다른 사람들이 찾아 다녔던 황금 도시는 단지 개인의 횡재(橫財)에만 이바지하였던 것은 아니다. 콜롬부스는 자신의 황금 추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명분까지 내세웠으며, "노아의 방주를 시온으로 가져올 자가 스페인에서 나올 것이다"는 요하힘 폰 피오레(Joachim von Fiore)의 예언에 호소하였다. 왜 하필이면 예루살렘인가? 예루살렘은 천년왕국의 수도(首都)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콜롬부스는 지상 낙원도 신봉하였다. 오늘날 베네주엘라에 위치해 있는 물결 모양의 언덕을 보자, 그는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1498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지상 낙원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외치며 정복하고 이주하였던 그 이후의 많은 미국인들처럼, 혹은 미합중국의 인장(印章)에 새겨진 "신세계"(Novus ordo seclorum)라는 말을 종종 내뱉는 미국인들처럼 콜롬부스도 자신의 사명을 메시아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아메리카"는 유럽의 유토피아적 환상을 늘 깊이 각인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실례로는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여행기를 잘 각색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Utopia, 1516년)와 잉카의 태양 도시를 흉내낸 캄파넬라(Campanella)의 태양의 도시 (Civitas Solis, 1623년)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현대 문명을 동기화하였는가? 그것은 "현대"의 환상이다. 유럽의 다양한 세계 정복에 동기를 주고 방향을 제시한 해석의 틀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래와 함께 성도들이 천년 동안 통치할 것이고, 모든 민족을 심판할 것이며,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인류의 마지막 황금기가 될 것이라고 믿는 천년왕국의 희망이다. 북아메리카에 정착하여 인디안을 "아말렉 족속"이라고 하여 말살하였던 이주민 조상들과 경건한 정착인들이 천년왕국주의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특별히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유럽인들과 최근에는 아시아인들이 이민을 통하여 미국을 창조하였고, 그들의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미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아프리카 출신 아메리카인들은 노예살이와 해방 운동을 통하여 이에 기여하였다. 토착 아메리카인들, 유럽 출신 아메리카인들, 아프리카 출신 아메리카인들, 아시아 출신 아메리카인들의 땅은 한 민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민족들이 정착하는 곳이 되고 있다. E pluribus unum(여러 민족들이 하나의 민족이 되었다). 미국은 인류를 보편적으로 대변하는 유일한 현대적 실험장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위험도 갖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모든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 조상들의 메시아적인 신앙"을 고양한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철학은 지금도 항상 "미국의 천년왕국적 역할"을 잘 인식하고 있다. 미국은 "죄없는 나라"(the innocent Nation)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세주 나라"(the redeemer Nation)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천년왕국 적인 마지막 희망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하지만 현대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시대 예언이 생겨났다: 이제 성취의 때다. 이제 이 희망은 실현될 수 있다. 세속화는 "세계화"가 아니라 종교성의 실현을 뜻한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요하힘 폰 피오레 의 환상에 따라 현대(modern times)가 "새 시대"(Neu-zeit)로 번역되었다. "고대" 와 "중세" 다음의 "새 시대"는 역사의 마지막 시대, 우리 안에 있는 영의 "제3시대"다. 이 시대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 이제 세계사는 "완성된다". 이제 인류는 완전해진다. 이제 모든 분야에서 중단없는 진보가 시작된다. 이 현대적인 인류 문명에 대해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면, 이 문명은 바로 "역사의 종말"이다. 그리고 역사 이후의 시대, 역사가 없는 시대(Posthistoire)가 시작된다.

이제 온 민족들에 대한 성자(聖者)들의 통치가 실현된다. 이제 땅에 대한 인간의 통치가 회복된다. 자연과학과 기술은 원죄(原罪)로 인하여 상실하였던 것, 즉 땅에 대한 지배권(dominium terrae: 프란시스 베이컨)을 인간들에게 되돌려 준다. 이제 지금까지 어린이와 같았던 인간들이 성숙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자신의 탓으로 생각한 미성숙(未成熟)에서 벗어나서 이성(理性)을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계기를 "계몽주의"가 마련하였기 때문이다(임마누엘 칸트). 인간은 선하며, 도덕적으로 점점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계몽기의 이러한 인간적 낙관주의는 철저히 천년왕국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선(善)이 무한히 퍼져나갈 수 있도록 " 이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천년 동안 결박될 것이다."

레씽(Lessing)의 글 "인류의 교육에 관하여"(1777)는 독일 계몽주의의 토대가 되었는데, 이 글은 철저히 메시야적인 특징을 지닌다. 레씽이 주창하였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요하힘(Joachim)이 약속하였던 성령과 인류 완성의 "제3시대"였다. 모든 이성적인 인간들이 "역사에만 의존하던 교회적인 신앙"에서 "보편적인 이성적 신앙"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이런 신앙 속에서 모든 인간은 교회의 중재가 없어도 스스로 진리를 깨달으며, 교회의 지도가 없어도 선을 행한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서 선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역사의 진보로 탈바꿈하였다. 임마누엘 칸트에 의하면, 인류에 대한 열정 -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 을 갖고서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던 프랑스 혁명이 인류의 더 나은 발전을 상징하는 "역사의 표지"(signum rememorativum et prognosticon)가 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도 자신의 천년왕국을 가질 수 있음을 사람들을 알고 있다"고 그는 공언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류가 영원한 평화를 보장할 국가 연합(Foedus Amphictyonum)으로 완전한 시민적 결속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유엔의 인권 선언과 정책이 인류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 이념이다.

현대의 메시야 사상을 들여다보면, 칸트가 "무엇이 우리를 근원과 하나가 되게 하는가?"라는 질문이나 "무엇이 내게 영원을 보장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종교적인 질문으로 여긴 이유를 알게 된다. 우리가 희망해도 되는 미래만이 역사 안의 생활과 모든 역사적 경험과 행동에 의미를 준다. 현대인들이 희망하는 미래는 그들에게 역사적인 초월(超越)을 달성하기 위한 초월(超越)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2. 현대와 현대의 비극 간의 갈등 혹은 현대 세계의 종말

우리가 지금처럼 진보 신앙에 젖어서 현대 이전(Vormodern)에서 현대로, 그리고 현대(Modern)로부터 "현대 이후"(Postmodern)로 질주하기 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현대의 비극(Submodern) 아래서 희생당하고 있는 현대의 희생자들을 깨닫는 것이 현실적이다. 역사의 아름다운 메시야적인 상층부는 혐오스러운 묵시적인 하층부를 갖고 있다. 유럽 민족들의 승리에 찬 진보는 착취를 당한 다른 민족들의 후퇴를 낳았으며, 이성(理性) 문명의 건설과 더불어 현대인의 몸, 감정과 감성이 억압되기 시작하였다. "제3세계"의 고난의 역사가 없다면, "제1세계"의 승리의 역사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비교해 보고, 같은 시대를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루터가 1517년에 비텐베르크의 교회에 그의 개혁 문서를 붙인 후 독일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헤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és)는 멕시코 (Tenochtitlán)로 항해하였다. 루터가 보름스(Worms)의 제국회의에 의해 교회와 제국으로부터 추방을 당하였을 때, 코르테스는 1521년에 아츠텍 마을을 점령하였다. 레씽(Lessing)과 칸트(Kant)가 계몽주의적인 책들을 출간하였을 때, 해마다 수 천명의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팔려나갔다. 현대 세계의 공장들이 세워질 때마다 늘 이 땅은 파괴를 감수하였다. 독일, 영국 중부, 펜실베니아와 시베리아의 황폐해진 산업 지역들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현대 세계의 진보는 오로지 다른 민족들의 희생, 자연과 다음 세대들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만약 실제로 일어난 희생을 돈으로 지불해야 했다면, 언급할 만한 진보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현대 세계의 삼분의 일(1/3)만이 현대적인 "제1세계"이고, 그 삼분의 이(2/3)는 현대적인 "제3세계"이다. "새로운 시대"는 현대와 현대의 비극(Submoderne)이라는 양면성을 낳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빛 속에서 살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빛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가해자들의 기억은 언제나 짧고, 그에 반해 희 생자들을의 기억은 길다. 제3세계 국가들의 억압을 당하는 백성들, 착취를 당하고 벙어리가 된 지구로서는 새로운 시대의 메시야 사상이라는 것이 자신들을 멸망시 키는 묵시사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누어진 인간 세계가 불가분리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어떤 인간의 문화도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뿐인 지구의 생태계(生態系)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제3세계"의 멸망은 "제 1세계"의 멸망도 초래하며, 지구의 파괴는 인류의 멸종도 초래한다.

1. 경제적 종말: 현대 세계의 시작과 함께 "제3세계"가 생겨났다. 실로 현대에 와서 진행된 아프리카인들의 대량적 노예화와 아메리카 지하 자원의 착취는 "제1 세계"의 건설과 진보를 위한 노동력과 자본의 바탕이 되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대륙을 넘나든 거대한 삼각 무역은 유럽의 부를 창출하였다. 노예들이 아 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실려갔고, 금과 은, 그 다음엔 설탕, 목화, 커피, 담배와 고무가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팔렸으며, 공산품과 무기가 아프리카로 넘어가곤 하 였던 것이다. 대륙을 넘나든 이러한 대무역에서 서유럽의 산업화를 위해 투자될 자본이 생겨났다. 이런 무역은 사람 장사를 통하여 서부 아프리카의 문화와 부를 파괴하였고, 단일 문화를 통하여 중부 아프리카 남부 아프리카의 토착적인 생존 경제를 파괴하였으며, 모든 민족들을 유럽 발전의 희생물로 만들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과거에 노동력과 자연 자원의 직접적인 착취 대신에 빚을 이용하는 장사가 등장하였다. 지금도 자본이 이른바 "개발국가"에 투자될 때, 많은 이자가 산업 국가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이제는 생산 자동화 때문에 산업은 점차로 임금과 가난한 국가들의 싼 노동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점점 더 많은 아프리카 와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이 산업 국가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다. 더 이상 필요가 없는 사람들과 시장들이 계속 늘어간다. 착취를 당하는 "제3세계"는 쓸데 없는 "배후 세계"(Hinterwelt)가 되어가고, 그곳의 사람은 "남아도는 사람"(surplus people)이 되어간다. 로버트 카플란(Robert D. Kaplan)이 그의 논문("Atlantic Montly", 1994년 2월호)에서 매우 감명깊게 썼듯이, 우리는 이런 과정의 극단적인 첫 조짐을 망각된 대륙, 아프리카의 "다가오는 혼란"(coming anarchy)에서 본다. 서아프리카의 국가들은 해체되고 있으며, 통치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있다. 국가는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다. 지구 생태계의 파괴는 사람들을 거대한 도시의 빈민가(Slum)로 내몬다. 말라리아와 에이즈(Aids)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삶의 주변으로 밀어낸다. 전염병들이 되살아난다. 거대한 빈곤의 물결이 일어나 부강한 국가들 안으로 밀려들어간다. 부강한 국가들은 새로운 "철의 장막"으로 밀려드는 무리를 막는 요새(要塞)로 변한다. "유럽 요새", "일본 요새", "미국 요새"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새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예언한 "문명 충돌"이 아니라 부강한 국가들을 위협하는 빈곤의 행진과 굶주림과 질병에 쓰러지는 넘치는 인구다.

2. 생태적 종말: 현대 세계의 시작은 또한 "자연의 종말"(The end of Nature)이기도 하다. 현대 세계는 과학적 발견과 자연의 기술적 지배로부터 생겨났고, 오늘날에는 이전보다 더 많이 이에 의존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아는 바대로, 과학-기술적 문명의 확산은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식물과 동물을 멸종시키고 있다. 탄산 가스와 메탄가스로 인하여 다가올 수십년 동안 지구의 기후를 크게 바꾸게 될 "온실 효과"가 생겨난다. 화학 비료와 온갖 종류의 살충제로 인하여 땅은 오염된다. 삼림은 베어지고, 들판은 가축으로 넘쳐나며, 사막은 점점 더 커진다. 지난 60년 동안 세계 인구는 네배 늘어났고, 다음 세기에는 80억 내지 100억에 이를 수 있다. 이에 따라 식량 부족과 쓰레기 배출도 늘어날 것이다. 1950년에는 인구의 29 퍼센트가 도시에 살았다면, 2,000년에는 46,6 퍼센트로 불어날 것이다. 생태계는 균형을 상실하였고, 지구와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은 서서히 밀려오는 이 위기를 "환경 오염"이라고 부르며, 기술적인 해결을 모색한다. 하지만 정말로 심각한 것은 현대 문명의 거대한 구상 전체의 위기다. 인간의 자연 파괴는 인간과 자연 간의 파괴된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약 이 사회의 근본 가치들을 새롭게 바꾸지 않는다면, 만약 자연과의 사귐 가운데서 새로운 삶의 실천을 일구어내지 않는다면, 만약 인간이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고 대안적인 경제 체제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위기적인 사태와 경향에서 지구의 생태계적 붕괴를 예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떤 관심과 가치가 현대 문명을 지배하고 있는가? 그것은 분명히 현대인들로 하여금 자연과 그 자신의 육체적인 본성을 지배하는 권력을 갖도록 충동하는 권력을 향한 의지이다. 인간의 권력 증대와 권력 공고화는 앞을 향한 진보를 추동한다. 이 진보는 경제적, 재정적, 군사적으로 항상 양적으로만 계산되며, 진보의 대가는 자연에게 전가된다. 유럽에서부터 출발하는 현대 문명은, 자연과 다른 나라들을 바라볼 때, 하나의 팽창 문명이다. "전근대" 사회 혹은 지금은 "저개발" 사회라고 불리는, 유럽 바깥의 초기 사회가 높이 평가한 자기 절제와 문화와 자연 간의 균 형 보존의 지혜는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 "서구적" 생활 수준에 도달하려고 하는 나라들, 예를 들면 한국과 중국에서도 이런 지혜는 사라져간다. 이런 지배 문명의 건설과 확장은 가속화하며, 이런 속도에 비례하여 모든 나라에서 생태계 재앙도 늘어난다. 바로 이로부터 오늘 우리가 내려야 할 결단의 질문이 생겨난다: 산업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자연의 종말"이 될 것인가, 아니면 산업 사회에 저항하면서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가? 생명권(生命圈)은 인간의 기술권(技術圈)의 필요불가결한 토대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생명권이 없어도 좋을 만큼 기술권은 확장될 수 있는가? 우리는 자연을 우리 인간으로부터 보호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지구를 하나의 인공적인 세계, 예를 들면 유전자 조작에 의해 적응력을 갖춘 인간들이 살 수 있는 우주선과 같은 세계로 다시 건설해야 하는가?

3. 하나님 위기(J. B. Metz): 현대 세계의 모순 때문에 현대인들 사이에 신뢰의 위기가 깊어졌다는 사실은 이해할 만하다. 아직도 미래가 있는 지를 알지 못하면, 시간에 대한 신뢰는 사라진다. 만약 지구가 쓰레기 더미로 변하면, 지구에 대한 신뢰는 사라진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현대의 대량 살상 때문에 무너졌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종교적 불안만은 아니다. 물론 종교적 불안 상품들도 상당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깊은 의 미에서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확실성의 상실이다. 바로 이를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는 1886년에 다음과 같이 예언자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은 최근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다." 내 부친의 세대는 가장 진보한 그리스도교적인 유럽 민족들이 서로를 도살하였던 제1차 세계대전의 "기술전"(技術戰) 속에서 바로 이를 경험하였다. 내 세대는 수백만의 유대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기술적인 방법으로 살해되었던 "아우슈비츠"의 엄청난 경악과 참을 수 없는 죄책감 속에서 이를 경험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진보가 "제3세계" 민족들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자문한다. 현대의 기초를 놓았던 사람들은 온 인류의 영광스러운 새 시대를 생각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엄청난 불행의 바다 위에 떠 있는 행복의 섬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앞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의 현대적인 생활 방식이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제3세계"에서 혼란(Anarchie)이 증가함에 따라 "제1세계"에서는 무감정 (Apathie)이 증가한다. 소외와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인 냉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냉대의 표현이다. 현대 세계를 조종(操縱)하는 사람들의 냉소주의(冷笑主義)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멸의 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초래하였던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우리가 미래 세대들에게 떠넘기는 잘못에 대해서도 우리는 초연하다. 그것을 보고서도, 우리는 동요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아도,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마비된 사람과 같다. 아는 것은 더 이상 우리의 힘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의 무능(無能)만을 드러낸다. 이처럼 증가하는 무감정이 개신교인들이나 카톨릭 신자들, 그리스도인들이나 이슬람교인들, 유럽인들이나 비유럽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점점 더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객관적인 하나님 소외(Gottesferne) 위에 새워질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시며, 우리와 동떨어져 계신다.

현대의 "발견들"과 구상들을 처음부터 가능하게 한 인류의 위대한 꿈들은 필요하지만 불가능한 꿈들이었다. 이 꿈들은 사람들을 지나치게 몰아갔다. 멕시코는 "엘도라도"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정원 "에덴"은 베네수엘라에 있지 않았다. 미국은 메시야적인 의미의 "신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현대는 메시야적인 의미의 "새 시대"가 되지 않았다. 학문적인 발견과 자연에 대한 기술적인 지배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지 않았다. "계몽주의"의 휴머니즘 이상은 인류를 도덕적으로 개선하지 못하였고, 역사를 완성하지도 못하였다. "역사의 종말" 다음에 올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의 그림들은 역사의 비극을 심화하였을 따름이며, 인류를 종말에 이르게까지 하였다. 현대 세계의 구상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지 우리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이것은 자주 호소되는 "방향 상실의 위기"다. 이러한 현대적 구상에서 우리의 생각과 활동이 생명에 기여할지 아니면 죽음에 기여할지 우리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이것은 종종 거론되는 "의미의 위기"다.

 

3. 현대가 생명의 영으로부터 다시 탄생하는 과정

현대의 환상은 불가능하지만 필요한 환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휴머니즘적 사상과 인권의 보편성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곧 야만주의(野蠻主義)다.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곧 지속적인 전쟁이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의 나라에 대한 희 망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곧 다신론(多神論)과 무질서(Chaos)다. 현대의 구상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구상이 실패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새롭게 고안해야 하는가?

1.개선주의(凱旋主義)와 천년왕국주의가 없이 하나님을 희망하기: 현대의 하나님은 "오고 계시는 하나님"이다. 약속의 책과 복음서에 따르면, 성서의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장차 오실 분"(계 1,4)이며, 그분의 나라에서 비로소 자신의 신성(神性)을 완전히 드러내실 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어디서 벌써 오고 계시는가? 어디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분명히 깨닫게 되고, 바로 그래서 그분과 자신에 대한 확신 속에서 살고 행동할 수 있게 되는가? 현대의 메시야니즘(Messianismus)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땅을 통치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민족들을 심판할 것이다. 이러한 메시야니즘의 꿈은 민족들에게 악몽(惡夢)이 되었고, 당사자들에게는 과도한 짐이 되고 말았다. 이 꿈은 차가운 절망, 즉 "하나님 콤플렉스"로 끝난다. 하지만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통치 가운데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난 가운데서 그분의 살리는 영을 통하여 임재하신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능력 가운데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가운데서 강해진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깊은 곳에서 올라온 짐승들"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고, "바벨론"의 우상들과 율법들을 예배하는 것과 민족들을 희생시킨 대가로 "바벨론"과 함께 번영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일이 일어난다. 천년왕국 전에는 순교가 있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들만이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딤후 1,12). 현대의 메시야니즘은 고난 속에서, 저항 속에서, 박해와 순교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미래를 건너 뛰었다. 이로부터 "바벨론"이 그리스도교화하고 그 자체로서 "천년왕국"이라고 선언되는 놀라운 현상이 생겨났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1989년 에 프란시스 후쿠야마(Fancis Fukuyama)가 "모든 것들의 세계적인 시장화(市場化)와 자유-민주주의"를 "역사의 종말"로 칭송하였을 때도, 그는 바로 이것을 생각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신학적으로 다시금 묵시적인 "아마겟돈"으로부터 그리스도교적인 "골고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승리한 것은 친구-원수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선언하였던 묵시적인 아마겟돈 속에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골고다 위에서였다.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곳에서 역사 안에 임재하신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분은 어디서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는가? 그분의 영원한 나라가 돌입하기 전,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세키나(Schkhina) 안에 임재하신다. 주전 587년에 첫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의 특별한 성전 "내주"(內住)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대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의 세키나는 포로살이 안으로 들어갔으며, 이스라엘의 고난을 함께 겪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길동무가 되시 며, 고난의 동료가 되신다. 복음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영원한 지혜는 예수 안에서 "말씀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이것은 신약성서의 세키나 신학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면, 그분은 또한 우리와 함께 가신다. 만약 그분이 우리와 함께 가신다면, 그분은 또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신다. 만약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신다면, 그분은 이 세상에서 포로살이를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확신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절대자를 우리와 같은 것 안에서 인식하려는 경향성을 언제나 갖고 있다. 우리와 같은 것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우리에게 낯선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것을 사랑하고, 낯선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사회적인 자기의(自己義)의 형태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천년왕국주의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으시고, 우리는 하나님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고, 하나님은 승리하는 우리 편에 계신다. 아메리카도 바로 이처럼 "재발견되었다."

만약 하나님을 "전적인 타자"(Karl Barth)로서 다른 것과 낯선 것 안에서 생각하고 인식하려고 한다면(Levinas),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만약 다른 자들과 낯선 자들을 더 이상 우리와 동화(同化)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고유성(固有性)을 향해 마음을 열고 마음을 돌이켜 그들과 함께 다른 자들의 새로운 사귐을 가지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자들과 낯선 자들을 생각하고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 다른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 정의의 형태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과 다른 자로서 받아들이셨고 그분에게 낯선 자로서 의롭게 하셨음을 아는 것을 전제한다.

만약 하나님을 세계를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희생을 당하신 분으로서 우리 자신의 폭력의 희생자들 안에서 생각하고 인식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희생을 당한 자들 안에 계시는 희생자 하나님, 그분은 바로 우리를 거리의 아이들의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다. 오스카 아눌포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가 이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권력자들에게 저항하였고, 살해를 당하였다.

"하나님은 죽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죽였다."라고 니체는 주장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을 죽였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폭력의 희생자로 만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죽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낯선 자들을 배척하고 몰아낼 때, 우리는 하나님을 죽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낯선 자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 대신에 죽음을 선택하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 다른 많은 생명체들의 죽음을 감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죽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생명을 침해하는 자는 하나님을 침해한다.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온 생명, 모든 생명, 공동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2.현대의 인류 구상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고백과 "자유, 평등, 형제애/자매애"는 함께 속한다는 고백과 함께 시작되었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개인의 자유가 국가의 권력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다는 인권과 헌법의 이 약속은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시민 운동과 더 많은 해방 운동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이 구상에는 오직 몇 사람들만이 자유롭게 창조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자유롭지 않게 창조되었다는 반대 주장은 없다. 물론 자유로운 자들과 자유롭지 않은 자들의 사회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 사회는 더 이상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에 반해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는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가 현대의 이 요구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고, 정당 독재 안에서 이 요구를 매우 추하게 변질시켰기 때문에 그 누구도 모든 사람들의 "평등"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적어도 경제적 평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의 근본적 인 평등이 없다면, 각 개인들의 보편적인 자유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이 없다면, 자유도 보편화할 수 없다. 확실한 경제적인 평등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평등을 말하는가?

평등의 사회적인 개념은 정의(正義)다. 만약 정의로운 사회적, 정치적인 관계들이 없다면, 사람들과 민족들 간의 평화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의 윤리적인 개념은 대성(連帶性), 형제 사랑과 자매 사랑이다. 휴머니즘은 매우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이를 Philadelphia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순전한 이상주의(理想主義)인가?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솔직한 현실주의(現實主義)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나라들마다 "비교가능한 생활 조건들"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21세기의 많은 난민 행렬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통일된 독일은 하나의 작은 예가 된다. 수많은 독일인들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동독에 서독과 같은 생활 조건들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 일은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은 것은 유럽 연합에도 해당한다. 서유럽을 향한 동유럽의 이민 운동을 저지하려면, 동유럽을 생활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남-북의 갈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백만 난민들의 압력을 새로운 철의 장막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신들의 나라에 비교가능한 생활 조건들을 회복하는 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사회적 임무는 바로 "평등"이다. 평등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우리의 희생자들에게 보상하는 행위로부터 이루어진다.

3.끝으로 우리는 현대 사회와 현대인의 종교의 생태적인 혁명 앞에 서 있다. 19세기와 20세기는 경제적인 시기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경제가 모든 관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는 생태적인 시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 유기체가 어디서나 존중되어야 할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지구 경제"가 될 것이며(Ernst v. Weizsäcker), "세계 정치"는 "지구 정치"가 될 것이다. 인류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인간의 경제는 지구 생태계와의 조화를 통하여, 그리고 땅과 물, 공기에 가해진 상처의 회복을 통하여 생명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이러한 생태적인 개혁을 위하여 우리는 새로운 영성과 새로운 신학 구조를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의 지배자 심성과 착취자 심성은 새로운 우주적인 영성을 통해 해체될 것이다. 에르네스토 카르데날(Ernesto Cardenal)의 웅장한 "Cantico Cosmico"는 하나의 새로운 영적인 세계의 놀라운 개명(開明)이다. 우리는 자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내재(內在)를 재발견할 것이며, 모든 피조물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예배할 것이다. "그 어떤 피조물도 자신 안에 하나님 을 모시고 있지 않을 만큼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Thomas von Aquin). "하나님의 영은 온 땅에 가득하다"(지혜서 1,7).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모든 생명체들을 보존하며, 생명을 촉진하는 사귐 안에서 생명체들을 하나로 묶는다.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Pico della Mirandola)으로 선언하였던 서양의 인간중심주의를 버리게 될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만물의 척도는 모든 생명체를 사바트(안식년)의 창조 축제로 초대하기 위하여 온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만약 현대의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한다면, 우리는 억압되어 온 인간의 몸의 차원들과 그 감각들도 다시 해방시킬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이해와 의지의 주체" 그 이상이다. 만약 이해와 의지를 몸과 그 감각적 인식으로 다시 통합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문화도 지구 유기체의 자연 안으로 다시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중단하는 것이 나은지를 알 수 있기 위하여 현대 학문의 도구적인 이성(理性)을 지혜, 소피아(Sophia)프로네시스(Phronesis) 안으로 다시 통합하는 것도 중요하다.

서양의 학문-기술적 문명의 구상은 인류의 숙명(宿命)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지금처럼 계속하다가는 보편적인 파국에 빠질지도 모르며, 이러한 대(大)기획으로부터 물러나지 못하여 세계가 우리가 없이 멸망할지도 모른다. 실로 남은 일이란 오직 현대 세계의 근본적인 개혁일 따름이다. 현대 세계를 새롭게 설계해 보자!

우리에게 아직도 시간이 있을까?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만약 우리의 시간이 이미 다 끝났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아직도 시간이 많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해결되지 못한 모든 문제들을 다음 세대에 떠넘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있으며, 또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온 인류의 미래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우리는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여전히 신실하시며 피조물이 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