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신학자 몰트만

이신건

 

1. 여는 말

 

오늘날 살아 있는 개신교 신학자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신학자를 손꼽아 보라면 서슴지 않고 몰트만(J.Moltmann) 교수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지금 독일 남부의 유명한 대학 튀빙겐(Tuebingen) 에서 조직신학과 기독교 윤리학을 강의하면서 세계 도처에서 몰려오는 많은 박사 지망생들의 논문을 지도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매우 바쁜 일과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의 대학과 기관의 초청을 받아 강의, 강연을 실시하고 당면 문제에 관한 자문에 응하기 위해 수시로 국경을 넘나든다.

그의 이름을 듣는 사람들은 그의 신학에다가 제 나름대로 이런 저런 꼬리표를 갖다 붙인다. 희망의 신학, 정치 신학, 해방신학, 삼위일체적 종말론의 신학 등등, 어떤 이들은 그에게서 위험한 진보적 현대적 신학 경향을 우려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가 고루한 정통주의, 보수주의로 회귀하고 있다고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그는 적응에 능란한 '현대주의'와도 상관이 없다. 그는 교회 전통에 깊은 애정을 보내 면서도 단지 그것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려고만 하지 않고 그것을 새롭게 말해 보려고 애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에게 '신보수주의' '보수적 혁명'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싶어한다. 그는 독자적으로 새로운 신학의 수로를 터놓았다기보다 오히려 교회 전통의 메마른 수로에 활기찬 물을 공급하여 목마른 현대인의 심정을 적시고 새로운 활력과 동 력을 제공한다.

그는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통의 두꺼운 담 안에서 안주하여 죽은 언어들을 고루하게 내뱉는 '교조주의자'도 아닐 뿐더러, 그렇다고 현대인의 질문과 사상에서 해답을 찾아 성서의 증빙 문구들을 이에 꿰어 맞추는 상황적 '적용 신학자'도 결코 아니다. 그의 신학 방법은 인간의 질문에다가 계시의 답변을 계시하는 틸리히(P.Tillich)의 '상관의 방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칫 질문의 형식이 답변의 구조를 유도해 내는 위험에 빠질 수 있는 틸리히의 방식을 뒤따르진 않는다. 그가 성서적 계시의 답변을 중시하는 점에서는 바르트(K.Barth)의 제자임을 보여주지만, 구체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회퍼(D.Bonhoeffer)의 자극도 받고 있다. 그는 성서적 계시와 구체적 현실의 질문 사이를 왕래하면서 고루한 전통의 언어를 살아 있는 언어로 되살려서 오늘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오게끔 하려고 애쓴다.

그는 어떠한 신학을 시도하는가?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신학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성서적 근거를 갖는 신학', '종말론적 방향을 갖는 신학', '정치적으로 책임적인 신학'으로 숙고하려 시도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는 인류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신학, 하나님에 대한 기쁨을 간직하는 신학, 항상 놀라는 신학을 수행하려는 태도를 꾸준히 보여 주려고 한다. 그는 항상 책임적인 응답을 하는 신학자이기를 원한다.그는 탁월한 전통의 해석가인 튀빙겐의 윙엘(E.Juengel) 교수와는 대조적으로 책상의 신학자이기보다는 고통당하는 세계의 현실에 시선을 맞추고 이에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신학자이기를 원한다.

 

2. 몰트만의 생애

몰트만은 1926년 4월 8일 함부르크의 자유스러운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학과 원자물리학을 전공하길 원했고, 성서보다는 문학 작품을 더 즐겨 읽었다. 그러나 그가 17살이 되던 해에 함부르크가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목도했고, 18살에 전쟁에 참여하여 이듬해에 전쟁 포로가 되어 벨기에, 스코틀랜드에서 3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삶의 확실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 동안 그는 기독교적 삶 속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했고, 이 경험은 그에게 절망과 자포자기를 이겨내는 생명력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생명력을 허락한 능력을 파악하기 위하여 신학 공부의 문을 두드렸다.

이러한 전쟁 체험은 일평생 그의 신학이 연대적, 현실적 특징을 갖도록 방향 지워 주었다. 개개인이 경험하는 삶의 상황은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적, 집단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음을 그는 자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찢기고 죽임 당한 수많은 인간 들을 보면서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자는 결코 신학에서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로 개인적 관심만을 가질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는 괴팅켄(Goettingen)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브레맨-바써호스트(Bremen-Wasserhorst)라는 작은 마을에서 5년 동안 목회하면서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는 논문을 완성했다.

그 이후 그는 부퍼탈(Wuppertal), 본(Bonn)대학에서 교수하였고, 1967년 이래로 지금까지 튀빙겐에서 정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 그는 많은 나라의 대학에 초빙되어 객원 강의와 강연을 행했고, 지금까지 8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의 부인 벤델(E.Wendel)여사도 신학 박사로서 여성 신학을 주도하고 있으며, 두분 사이에 세 딸을 두고 있다.

 

3. 몰트만 신학의 발전 단계

몰트만의 신학 작업은 세 단계의 편력을 거치면서 수행되고 있다.

첫 단계는 전체의 신학을 하나의 관점 하에서 해명한 시기이다. 그에게 일약 세계적 명성을 안겨 준 [희망의 신학](1964년)은 본래 그 당시 활발히 논의되던 약속과 역사에 관한 토론에 대해 그의 입장을 제시하기 위해 착수된 것인데, 무신론적 신마르크스주의자 블로흐(E.Bloch)의 [희망의 원리](1960년)에 의해서도 큰 자극을 받았다.

블로흐의 저서와의 해후를 통하여 그에게 즉각 떠오른 질문은 "왜 기독교 신학은 그 자신의 가장 본래적 주제인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오늘날 기독교에서 초대 교회의 희망의 영이 어디에 남아 있는가?"였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몰트만이 블로흐의 철학을 계승하거나 기독교적으로 각색하려고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블로흐가 "무신론이 없이는 메시야적 희망도 없다"고 말하면서 사회적 유토피아를 철학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면, 볼트만은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살리셔서 세계의 미래의 주님으로 삼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희망, 성서의 하나님 신앙에 기초한 기다림을 중시했고, 그 토대 위에서 정의 유토피아를 기대했다.

그에 의하면 종말론적 희망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매체요, 모든 음들중에 주조음이며, 새날의 여 명의 빛이다. 그리고 희망에 사로잡힌 신앙은 물의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저항하기를 시작한다. 종말론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영혼이 구원받는 것, 시련받는 양심이 위로 받는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정의의 희망의 실현, 인간의 인간화, 인류의 사회화, 전 피조물의 평화이기도 한다.

1983년에 교황 바오로 2세가 니카라과를 방문하여 사제들에게 정치적 해방에 참여하지 말고 백성들을 영생을 위해 준비시킬 것을 권고했을 때, 몰트만은 그것이 그릇된 양자택일이라고 했다. 그는 말했다. "나 는 영생을 믿기에 백성들의 삶에 개입한다. 나는 치명적인 억압 권력에 맞서 싸우는 백성들의 저항에 참여하기 때문에 부활을 희망한다. 여기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을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리 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시키신 것을 나누는 자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년)은 희망의 다른 측면, 즉 부활한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임을 회상적으로 고백하는 측면에 주안점을 맞추었다. 성공과 행운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의 고난에 눈이 어두운 문화 속에서 실패하고 고난당한, 수치 속에서 죽어간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계신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의 눈을 진리로 돌리게 할 수 있다고 몰트만은 확신했다. 그는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해석했고, 정치적 권세의 우상, 율법주의적 교권 체계, 하나님 없는 인간의 버림 받음을 폭로하고 죽어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고난받으시는 하나님의 고난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무감정한 하나님 대신에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격정, 하나님의 수난을 내세웠다. 그는 본회퍼처럼 "오직 고난당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아들의 고난을 통해 인류의 고난에 참여하시고 이에 항거하시는 사랑의 하나님만이 성서적 하나님임을 주장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년)를 통해 몰트만은 십자가의 신학에서 해명된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의 역할이 적절히 강조되지 못했음을 깨닫고 성령론을 교회 갱신의 실천 이념과 결합시키려고 했다. 교 회의 전통과 제도가 점점 더 그 적합성을 상실하는 위기 속에서 교회 갱신의 기회를 간파한 그는 새로운 성령 체험이 없으면 교회 갱신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성령론의 관점에서 성례론, 예 배론,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을 새롭게 제시했다. 그리고 교회의 미래는 제도적, 목회적 교회가 아니라 자기 결단과 능동적 참여에 근거한 자발적 공동체에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확신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 는 공동체 운동에서 아래로부터 나오는 갱신적 힘을 발견한 데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몰트만 신학의 둘째 단계는 하나의 관점 아래서 신학을 약술하는 방법 을 중지하고 마르크스주의, 카톨릭 신학, 동방교회의 신학 및 유대교와의 대화 속에 놓고 다른 경험을 청취하는 법을 배웠다.

셋째 단계는 대화의 한계를 느끼고 이제는 정직하게 자신의 것을 가지고 신학에 기여하고자 새로운 주제에 몰두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년)에서 그는 서구 신학의 독재론적, 양 태론적 유일신론을 배척하고 삼위일체의 통일성, 상호 교통과 내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는 사회적 삼위일체들 전면에 부각하고 일방적인 지배의 개념을 상대화, 제한하려고 시도했다. [창조 세계 속의 하나님](1985년)에서는 생태학적 창조론이 제시되었다. 여기서 몰트만은 영원한 영을 통하여 창조물 속에서 내주, 관통하시면서 교제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의 새로운 이해, 모든 지배 - 봉사의 구조를 상호 대화의 구조로 변화시키는 신학적 인간학을 제시했다. 어언간 60세를 넘긴 그는 조직신학의 전체 주제에서 미흡했던 부분, 특히 기독론, 종말론 및 신학 방법의 기초를 체계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4. 맺는 말

몰트만 교수는 특히 한국과 인연이 깊은 분이다. 한국을 여러 차례 다녀갔고 또 한국 학생들을 지도하여 여러 명의 박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는 암울한 유신 독재의 시기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희망과 정 치적 책임적 삶의 근거를 제시하여 격려를 주어 왔고, 제3세계의 고통받는 백성들과 함께 한국 백성의 고난에 깊은 정신적 연대감을 표시 함으로써 위로를 주어 왔다.

그의 책임적인 응답의 신학은 몰역사성, 내세성, 개인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를 각성시키는 예언자적 충격을 주어왔고, 종말론적 희망에 투철하면서 역사에 책임지는 교회, 고난 속에서 제자도를 실천하는 교회, 항상 갱신되어야 할 교회, 민주화 인간화 정의 실현에 투신하는 교회를 독려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기독교의 그 어떠한 유산도 쉽게 내버리지 않고 거기에 활력을 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서 한국 교회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려고 한다. 한국 교인의 활기찬 모습, 정치적 항거와 고난, 한국 교회의 영성을 그는 높이 평가한다. 그의 신학은 직접, 간접적으로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에 영향을 미쳤고, 또 이 신학들로부터도 도전과 자극을 받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의 민중 신학을 유럽에 소개할 뿐만 아니라 솔직하고 분명한 비판도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