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무의 민중 메시야론과 문제점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Ⅰ. 한국에서의 개인적 만남들

1975년 3월에 나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서울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의 안병무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동경에서 열릴 도시산업선교를 위하여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였는데, 이 강연에서 나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 동안의 전쟁 포로 생활 속에서 패전 민족의 한 사람으로 내가 개인적으로 얻었던 경험들을, 요한 밥티스트 멧츠와 내가 1960년대의 기독교-맑시즘의 대화를 통하여 발전시켰던 새로운 정치신학의 희망들과 결합시켰다. 그러나 신약성서 신학자 안병무의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와 오클로스(Ochlos)"라는 제목의 논문의 자극을 받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민중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나의 지인이었던 박봉랑 교수의 영접을 받고, 한국 민중신학의 공동 창시자인 서남동 목사를 연세대학교 영빈관에서 만나게 되었다. 위에 언급한 강연을 나는 먼저 한국신학대학에서 행한 다음, 다른 신학교들과 대학교에서 행하는 동안, 정보기관의 친절하지 못한 감시를 받았다.
안병무 교수와 나는 빠른 시일 내에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그를 방문하였으며, 그는 병원 치료를 받기 위하여 자주 튀빙엔으로 왔다. 귄터 바움(G nter Baum)과 함께 나는 1984년에 한국 민중신학자들의 논문들을 모아서 [민중, 한국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학]이란 제목으로 책을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그 당시 분열된 한국과 독일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민중신학은 아시아에서 나온 첫 번째의 해방신학으로서 제1세계에 비판적인 질문들을 제기하였으며, 서구의 기준에 따른 한국의 현대화가 초래한 많은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도전적인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1975년 한국은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착취하는 제3세계의 개발국가였다. 그러나 오늘에는 엄청난 외채를 짊어진 첨단 과학기술의 국가가 되었다.
신약성서에 대한 주석학적 발견이 새로운 교회 공동체 운동과 새로운 신학으로 발전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루터가 로마서 3:28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이로 말미암아 일어난 교회와 사회의 개혁운동 다음에 이와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안병무의 주석학적 발견은 한국의 민중운동에 대하여 신학적이며 실천적인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가복음에서 가난한 사람들인 민중은 - 그리스어로 ochlos라 불리움 - 그리스도와 그의 메시야적 사역에 있어서 결코 지엽적인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그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여 로마의 점령 세력에 의하여 십자가의 형을 받기까지 예수와 민중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그는 발견하였다. 예수는 자기를 민중과 동일화하였으며, 민중은 그의 "가족"이었다. 안병무는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이 인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거리로 나섰다가 투옥된 한국의 도시산업선교에 이러한 통찰을 적용하였다.
1960년대는 한국에 있어서 군사체제의 "개발독재주의" 시대였다. 도시산업선교는 이러한 사회를 위하여 교회들이 구성한 최초의 조직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의 목적은 협동조합과 노동조합,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그룹들 속에 민중들 자신의 조직을 건설하는 데 있었다. 이 때 안병무와 그의 친구들은 유명한 갈릴리 교회 곧 노동자들과 비판적 지식인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항상 경찰과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았으며, 자주 기습을 당하기도 하였다. 안병무 자신도 재판을 받고 2년간의 금고형을 받았는데, 이 재판에서 독일 개신교회 총회장 샤프(Scharf) 감독이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하였다. 갈릴리 교회를 세운 것은, 신약성서학자 로마이어(Lohmeyer)가 주장한 바 있는 "예루살렘 대 갈릴리"에 근거하여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갈릴리 교회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현대화시키는 도시 서울에 대하여 예수의 민중을 대변하고자 하였다. 안병무는 그리스어 ochlos를 한국어로 민중이라 번역하였다. 이 단어는 한국 민족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며, 인민이라 불리우는 무산계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지배 사회 속에서 고난 당하는 모든 하층민을 가리킨다. 이 사회에서는 수 백년 전부터 저항의 전통들이 이어져 왔다. 고통과 원망, 곧 한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되었을 때, 언제나 반복해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한 예가 1890년에 일어난 동학운동이다.
서울 빈민지역의 민중교회들이 한 것과 같은 독창적인 방법으로, 한국의 민중신학은 가난한 자들(민중)의 예수의 복음을 이러한 토착적인 저항 전통들과 결합시켰다. 민중신학은 그 이전의 "황색 신학"처럼 문화적으로 토착화 된 신학이 아니라, 한국의 고난 당하는 민중의 상황적 신학이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 전 세계의 하나님 나라 백성에 대하여 열려 있다. 민중신학은 한국 최초의 정치신학이다. 민중신학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과 결합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의 백성"이 아닌 "민중의 회중"으로 만들었다.


Ⅱ.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와 민중(ochlos)

양식사적 주석이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청중들에 대하여 항상 주의를 환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회적 성격에는 거의 주목하지 못하였다. 자유주의적인 해석학은 역사적 인물들에 관심을 가졌으며, 예수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탈사회화"(entsozialisiert) 시켰다. 그리하여 "예수의 사역"은 단지 그 자신을 위하여 있었다고 이해되었으며, 이러한 예수가 다른 개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양식사적 해석은 사회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양식사의 도움으로 예수의 이야기들은 그 이전의 해석학에서 나타난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예수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 예수와 함께 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예수가 병을 고쳐 준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예수가 위하여 일해야 할 사람들을 마가는 처음부터 "무리들,""많은 사람들,""백성"이라 불렀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단지 "예수의 활동을 위한 이름 없는 배경"으로, 스타의 등장을 위하여 배경에 서 있는 "합창대"와 같은 존재로 간주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하지만, 이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하지는 않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학자인 안병무에게 있어서 이 "무리,""많은 사람들,""ochlos"는 예수의 오심과 활동의 주요 목적이었다. 마가복음 1:22에서 "무리"가 언급되는데,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란 복수형으로, 나중에는 단수형 "ochlos"로(2:4) 나타난다. 마가복음에서 ochlos란 단어는 복수형과 결합된 것을 빼고 36번 나타난다. 이것은 마가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70인 역에 의하면 민중은 일반적으로 laos라 불리운다. laos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다른 민족들은 히브리어로 goyim, 그리스어로 ethne라 불리운다. 마가복음에서 ochlos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뜻하지도 않고 이방 민족을 뜻하지도 않는다. ochlos는 종교적인 정체성이 없으며 인종적 일치성이 없는 "민중"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민중(ochlos)은 누구인가?
예수의 주변에 모여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마가복음에서는 항상 ochlos라 불리운다. 이 무리는 "죄인들,"다시 말하여 유대 사회에서 배제되어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갈릴리에 사는 가난한 시골 사람들, 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am ha'arez), 요한복음 7장과 12장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율법을 지킬 형편이 되지 못하며,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버림받은 무리"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는 저주받은 자들이다"(요 7:49 참조). 이 사람들에 대하여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민중을 가르친다(막 7:14, 8:34, 5:10).
예수는 민중을 불쌍히 여긴다(막 6:34).
예수는 민중의 병든 사람들을 고친다(막 1:34 이하, 6:56).
예수는 민중을 먹인다(막 8장).
예수는 배에서 민중에게 설교한다(막 3:7 이하).
예수는 민중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선포한다(막 4:2 이하). 마태복음 5장에 의하면 산상설교는 "민중"을 향한 것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민중을"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고 부른다(막 8:34 이하).

예수는 민중을 자기의 "참된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 자신의 사명은 이 민중을 위한 것이다. 즉 "사람의 아들(인자)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막 10:45) 그의 피, 새 계약의 잔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부어진다(막 14:24).
그의 부활절 현현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여자들과 "갈릴리에 있는" 제자들 앞에서 일어난다(막 16:7). 예수는 자기가 "의로운 자들을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이해한다(2:16 이하). 여기서 사용된 "부르다"(kalein)는 말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단어이며(1:20), 그 밖의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선택하다"의 의미가 더 강하다.
결론 : Ochlos는 예수의 선교의 수신자이다. 그는 민중 때문에 왔고, 그의 메시야적 왕국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왕국이며, 그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사랑이다. 위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민중을 "가르친다." 그는 민중에게 토라를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산상설교의 메시야적 팔복과 그리스도의 뒤따름의 윤리(Nachfolgeethik)를 가르친다.
2. 예수의 육신적 가족이나, 육신으로의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의 백성이 아니라, "이름 없는 군중"이 예수의 백성이요 가족이다.
3. 오클로스는 "하나님의 백성,"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선택을 받은 가난한 백성들이다.
4. 하나님 나라의 병치유의 기적,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나누는 식탁의 사귐은 이 백성들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5. 그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날 때, 그는 이 민중에게 십자가의 뒤를 따르라고 부른다.
6. 그는 이 민중을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며 자기의 생명을 내어 준다.

그렇다면 사회사적으로 볼 때, 마가복음 당시 누가 오클로스였을까? 안 박사는, 마가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 복음서를 썼으며, 오클로스는 그 당시 고향이 없으며, 추방당하였으며, 권리를 박탈당한 백성, 곧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백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로마 제국 안에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 집이 없는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루살렘의 첫 번째 파멸과 바빌론 포로 생활 다음에, 쉐히나(Schechina) 신학이 생겨났는데, 이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 포로 생활로 떠나기 위하여, 시온에 있는 그의 거처를 버렸다. 주후 70년 이후의 유대인의 추방에 적용한다면 쉐히나 신학은, 선택하며 해방하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당하면서 그의 백성 가운데 현존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고난 당하며 동행하는 쉐히나는, 집없고 가난하며, 추방당한, 길 잃은 백성들 가운데 현존한다. 이 하나님은 집 없고, 추방당한 하나님이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거리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떠도는 하나님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가난한 백성 가운데서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쉐히나는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안 박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오클로스는 사회적 계층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 다시 말하여 예속된 사람들과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통치자들이 붙여준 개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볼 때 오클로스이다. 세리들은 유대교의 집권층과의 관계에서 볼 때 하층민에 속한다. "따라서 이 개념은 특별한 가치를 가진 말로 사용되거나 이데올로기화(Ideologisierung)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2. 불의한 자들과 힘이 있는 자들은 오클로스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오클로스는 조직화 되어 있지 않으며, 그러므로 권력집단으로 생각될 수 없다. 오클로스는 로마에 대항하여 이스라엘 국가를 위하여 싸우는 젤롯 당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를 건설하거나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3. 예수는 아무 조건 없이 오클로스의 편에 섰다. 그는 분명히 오클로스를 반로마 혁명 투사로 만들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미래에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는데, 이 미래는 이미 지금, 여기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려 주었고, 이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비젼으로 가득 채워 주었다. "예수는 고난 당하는 민중(ochlos)과 함께 (하나님의) 재림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Ⅲ. 메시야와 민중(minjung)

민중신학자들은 마가복음의 모형에 따라 예수와 "민중"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상호간에 이동이 가능하며. 그들의 특성도 서로 교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오클로스-민중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누구인가를 살펴 본 다음, 예수와 함께 오클로스-민중이 세계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버림받고 산산이 흩어져 있는 병든 민중의 눈으로 볼 때, 예수는 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금관을 쓴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며 고난 당하는 형제이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민중의 운명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형제로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는 자이지 결코 주인이나 상관으로서 그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예수이해를 통하여 민중의 고난의 경험들 속에서 예수를 실천적-해석학적으로 현재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우리 한 가운데 계신 예수"는 민중교회 목사들의 복음이 되었다. "고문을 당하는 죄 없는 대학생이 지명수배 된 그의 친구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이 때문에 죽음을 당할 때, 혹은 한 젊은 노동자가 그의 동료 노동자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희생할 때, 예수는 거기에 현존한다. 이와 같이 예수의 십자가는 현재적 실재이며, 세례를 받은 사람은 물론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은유적인 언어가 아니다. 이는 때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때로는 "민중"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실재이다. "예수"라는 이름이 단지 한 사람 개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의 사회적 역사와 교통 속에 있는 삶과 삶의 역사를 뜻한다면, 민중의 예수(the Jesus of the minjung)가 민중예수(minjung Jesus)로 바뀌는 것은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민중-그리스도론은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오직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의 배타적 "대리행위"의 그리스도론(Stellvertretungschristologie)이 아니라, 자기를 가장 작은 사람들과 동일화시키는, 함께 고난 당하는 하나님이신 형제의 포용적 "연대"의 그리스도론(Solidarit tschristologie)이다. 이 하나님이신 형제 즉 그리스도는 민중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와 자기 자신을 동일화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민중의 가장 작은 자들은 그의 공동체에 속하며 그의 현존을 나타낸다. 민중을 위한 예수의 대리행위는 민중과 예수의 연대성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모든 대리행위의 그리스도론은 연대성의 그리스도론에 근거한다. 이것은 민중 가운데서 살고 섬긴 예수의 삶과 활동에서 잘 나타난다. 이것은 특히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민중은 예수의 고난 속에서 예수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고난 당하며 죽어 가는 예수에 의하여 민중이 이해되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매일 일어나는 민중의 고난과 희생자들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상(像)은, 제1세계 사람들의 고통이 없는, 그러나 자주 의미를 잃어버린 삶에 나타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3세계의 신학은 어디서나 그 핵심에 십자가의 신학이 있다. 한국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상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민중과 비기독교인 민중에게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한국의 지배 종교인 불교와는 다른 대답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러한 방법으로 민중의 운명과 동일화 될 경우, 민중이 예수와 동일화되고 또 그의 사명(mission)과 동일화되며, 결국 민중이 메시야가 되는 것인가? 메시야가 민중에 속할 경우, 민중이 메시야가 되는가?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에는 사실상의 메시야니즘이 유행하고 있으며, 이 메시야니즘은 동학운동으로 소급된다. 널리 확산되어 있는 미륵(Maitreya) 불교도 "미래의" 세계를 "깨우치는 부처"로서의 메시야적 모습을 띄고 있다. 주체사상을 가진 북한의 "김일성 주의"는 하나의 명백한 지배 메시야니즘(Herrschaftsmessianismus)이었으며, 아직까지도 그러하다. 김일성은 자기가 맑스주의자라고 주장하였으나, 그 자신을 종교적 구원자와 인민의 아버지로 자칭하였다. 이 정치적 메시야니즘에 반하여 남한의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참된 메시야니즘을 제시하였으며, 이로써 "메시야적 정치"를 "정치적 메시야니즘"으로부터 구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중에 대한 성서의 원형을 갈릴리의 오클로스 안에서 찾아 볼 때, 우리는 그렇게 고무적인 인상을 얻지 못한다. 성서에서 민중은 이상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민중은 양면적이며 유혹 당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홀로 내 버려 두었다. 그러나 이것도 민중의 약점에 속할 뿐, 이것이 민중에 대한 도덕적 비판과 신학적 비판의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민중은 단지 민중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낭만적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와 인권을 위한 민중의 투쟁을 메시야적으로 과장하는 문제이다.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메시야의 해방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안에 있는 구원으로 이끌어간다. 민중의 필연적 해방은 이 백성을 그들 자신의 역사의 주체로 만든다. 이 역사적 해방 속에서 민중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그의 미래를 발견한다. 그러나 민중은 아직 거기에 있지 않다. 민중이 자유를 얻었을 때, 그들의 역사를 어떻게 형성할지는 아직 미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희망하는 한국의 통일은 미래의 세계의 생명으로의 부활이 아직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부활에 상응하며 부활을 가리킨다. 반면에 민중과 이산 가족들의 고통은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에 모순된다. 이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변증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궁극적인 것에 우리의 에너지를 쏟기 위하여, 우리는 궁극적인 것을 잠정적인 것과 동일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는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엄청난 실망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모든 해방신학이 끝까지 주장해야 하는 "오늘-여기서-우리가"는 잠정적인 것 안에 있는 궁극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 안에 있는 잠정적인 것의 이중의 현존(Pr senz)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해방신학의 현재적 종말론은 현실주의적 종말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Ⅳ.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은 누구인가?

서광선의 집에서 있었던 대화에서 안병무가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면서 요한복음 1:29의 "하나님의 어린 양"과 이사야 53장의 하나님의 종이 민중임을 시사하였을 때 나는 상당히 놀랐다. 제1세계의 죄는 누가 짊어져야 하는가? 제3 세계가 그것을 짊어질 수 밖에 없다. 지배자들의 착취와 폭력 행위를 누가 짊어져야 하는가? 민중, 곧 가난하고 버림 받은 백성이 그것을 짊어질 수 밖에 없다. "당신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십니다" 라고 찬송가를 부를 때, 우리는 현실적인 의미에서 민중을 눈 앞에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안병무는 말하였다.
이사야 53장의 상에 따라, 그리고 이 상을 통하여 나중에 형성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이야기에 따라 우리는 우리를 대리하여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말미암은 죄를 "짊어짐,"죄를 "도말하심"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지닌 구원의 의미를 인정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원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의지에 역행하는 가운데서 당하는 억압과 착취의 수동적 고난이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민중이 고난 당하는 백성일 뿐 아니라, 그의 고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리스도론에 관한 질문들이 제기되며, 그 민중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것을 민중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 당시 나는 안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 "하나님의 고난 당하는 종과 같이 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 민중이 그의 고난을 통하여 스스로를 구원한다면, 이 고난 자체를 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민중은 어떻게 투쟁할 수 있는가? 민중이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자 하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누가 민중에게 질문한 일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안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쓴 것처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 개인과 집단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사야 53장의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은 개인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인가? 서구의 신학자들은 그를 개인으로 이해하고자 항상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며, 고난 당하는 종을 개인으로서의 예수와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타당하지 않다......아시아에는 '개인'(Pers nlichkeit)이란 단어가 없다. '인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집단적인 것을 의미한다......예를 들어 '붓다'는 한 개인으로서의 사람 '싣다르타'(Siddharta)로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적인, 다시 말하여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집단적인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안 박사는 복음서에 기술된 예수의 삶의 이야기를 항상 오클로스의 "사회-전기"(Sozio-Biographie)로 해석하였다. 예수의 수난의 이야기는 "민중이 당하는 고난의 운명의 응축"이다: "마가는 예수의 수난사를 근거로 그 당시 민중의 고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거꾸로 예수의 고난은 마가 당시 민중의 운명 속에서 현재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석학적 통찰은, 서남동 교수가 말하였듯이, "예수"가 "민중에 대한 상징"임을 뜻하는가?

이와 같이 예수를 민중에 대한 상징으로 축소시키는(reduction) 것이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사야 53장이 말하는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은 집단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지 않는다. 고난의 종은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그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가 고침을 받은"(53:5) "하나님의 고난 당하는 종"은 신적인 존재(divine figure)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현대적 의미에서 "개인"도 아니고, 그 자신 속에 머물러 있는 개체적 "인격성"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백성으로부터, 백성과 함께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의 인격이다. 이에 대한 근거를 우리는 "우리-그"의 대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53:6). "그들의 죄를 지심으로써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그 의로운 분은(53:11),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죄를 "짊어지고" 백성들의 짐을 제거함으로써 속죄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다. "하나님의 고난 당하는 종"을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상으로 파악할 때, 이사야 53장과 예수의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집단적으로" 해석할 것인가의 양자 택일의 문제는 불필요하게 된다. 그 대신 연대(Solidarit t)와 대리행위의 관계가 등장한다. 연대와 대리행위는 너무도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타자와 함께 하는 현존(Mit-anderen-Dasein) 속에 있는 연대는, 타자를 위한 현존(F r-andere-Dasein) 속에 있는 대리행위에 대한 전제가 된다. 그 자신의 대리행위 없는 단순한 연대는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킬 뿐이다.
민중신학자들의 십자가 신학은 본훼퍼가 비밀경찰의 감옥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대해서 통찰한 것과 가장 가깝다: "성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무력하심과 고난을 시사한다: 고난 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와 줄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당하는 하나님의 고난을 함께 당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의 곁에 서 있다". 민중신학자들은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당하는 하나님의 고난"의 장소를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민중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민중교회들이 고통 속에 있는 민중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그의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 곁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의 화해를 위한 죄를 짊어지기 위하여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정의로운 세계의 자유를 위하여 민중과 함께 일어나기 위하여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속죄의 고난과, 극복되어야 할 백성의 고난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구분은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민중을 위한 관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독일에서 일어난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화를 통하여 기독교 신학자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유대인 배척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들을 무비판적으로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적용하는 일에 대하여 반성하게 되었다. 이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공관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들을 이스라엘의 사회적 이야기로 읽는 것을 배웠다. 예수의 이집트 도피, 이집트로부터의 귀향, 광야에서 지낸 40일, 겟세마네와 골고다 사이에 있었던 그의 추방의 경험 등에 관한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모델로 하여 구성되었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백성"도 예수의 칭호인 "사람의 아들"을 가리키는 말과 관련해서 해석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인자)이 우주적 하나님의 상으로서 세계의 제국들을 멸망시키고 인류의 희망을 성취시키는 존재라면, 다니엘 7장에서 말하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확실히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다. 독일의 비판자들이 -전형적인 독일적 방법으로- 의심하듯이, 이제 한국의 민중이 "새 이스라엘"로서 이스라엘의 자리에 등장하는가? 이 질문은 한국의 통일과 사회 정의를 위하여 한국이 "희년"(year of Jubilee)을 선포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제기되었다.
안병무는 그의 마가복음 해석에서 매우 분명하게 다음의 사실을 말하였다. 즉 그의 견해에 의하면 마가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고향을 잃어버렸고 권리를 잃어버린 팔레스틴의 주민들, 즉 먼저 유대인들과 그 다음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을 오클로스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laos는 고향 없는 백성 오클로스가 된다. 예수가 이 오클로스에 속한다면, 그는 유대인들과 그리고 이방인들과 함께 살며 양자를 위하여 존재한다. 기독교 교회가 "희년"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스라엘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일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찰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출애굽의 원형적 이야기에도 해당한다.
원칙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세계 각국의 모든 전통들이 일단 문서로 기록되면, 그것들은 보편화되며 모든 사람들을 향하게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가 어떻게 유럽에서 노자와 공자와 석가모니에 대하여 배울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아시아인들이 칸트와 헤겔의 문헌을 읽을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의 성서도 모든 민족들을 지향한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이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성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성서에 대한 "소유" 논쟁은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신앙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성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마가복음에서 예수와 백성(ochlos)의 관계를 통하여 규정되는 민중의 기독교적 이념은, 계급적인 교회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억압되었다. 1994년 이후로 유럽의 가톨릭 교회 내에서 "우리가 교회이다"라는 표어와 함께 교회 백성(Kirchenvolk)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제왕적인 사교직(司敎職, Episkopat)이 초기 교회에서 형성될 때부터, 교회는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이 "아래를 향하여" 다스리며 그리스도의 백성을 "교회 백성"(Kirchenvolk)으로 추락시키는, "위로부터"의 계급체제(Hierarchie)로 발전되어 왔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하나님의 백성을 분열시켰다. "평신도"라는 말은 본래 laos 곧 하나님의 백성의 한 지체를 말하는데, 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성직자"가 분리됨으로써 "잘 알지 못하는 자,""직권이 없는 자,""능력이 없는 자" 곧 "평신도"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철두철미 평신도"라는 말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뜻한다. 계급체제적 차원에서 "백성"은 "거룩한 통치,""목자들"을 통한 사목과 인도의 대상으로 생각될 뿐이다. 교회의 백성은 이 무신적이며 비기독교적인 소외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무관심과 침묵으로 반응하였다. "교회에 가야" 할 "강제성"이 사라진 이후로, 백성은 교회를 버리고 있다. 이리하여 교회 없는 백성과 백성 없는 교회가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소리 없는 쇠퇴를 말하며, 이 쇠퇴는 교회 자신이 야기한 것이다. "백성을 위한 교회"가 "백성의 교회, 백성을 통한 교회"로 될 때, 계급체제적 보호교회(Betreungskirche)가 다양한 참여를 가진 공동체 교회(Gemeindekirche)로 될 때, 교회와 백성의 오래 된 괴리가 극복될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평신도를 소외시키는 계급체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신교회는 목회자 귀족체제 혹은 신학적, 목회적 전문가 귀족체제(Expertokratie)가 되었다.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들을 피상적으로 관리해 주는 교회는 결코 어떠한 "백성의 교회"(Volkskirche)도 만들지 못한다. 또한 오늘 날 추구되고 있는 "백성을 위한 교회,""타자를 위한 교회" 혹은 "세계를 위한 교회"의 프로그램들도 백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를 위한"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교회와 백성을 분리시키고 백성을 목회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예수와 백성에게 상응하는 백성의 교회는 오직 교회 공동체의 혁신을 통하여 백성으로부터, 백성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의 기초 공동체들과 자유교회들 그리고 오순절 교회들은 이에 대한 좋은 예와 모범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백성의 관계에 대한 다른 형태를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교회의 개념을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자들 즉 신자들의 보이는 교회(manifeste Kirche)가 있고, 가난한 자들과 예수를 기다리는 자들의 보이지 않는 교회(latente Kirche)가 있다. 신자들의 보이는 공동체(Gemeinschaft)는 그리스도의 사도직(Apostolat)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곧 나의 말을 듣는 것이다"(눅 10:16).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는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여기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세계를 향한 그의 메시야적 파송에 복종하는 사도직 안에서 그가 실재적으로 임재(Realpr senz) 할 것을 약속한다. 이리하여 그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한 초대를 선포한다(고후 5:20).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자기의 공동체를 동일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실재적 임재는 공동체의 선포와 성례전과 친교와 봉사에 권위를 부여해 준다. 이것은 적극적 동일화(Identifikation)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수동적 의미의 그룹이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 곧 오클로스인데 그리스도가 이들 가운데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들을 방문하는 자는, 나를 방문하는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이것은 어린이들에게도 해당한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 18:5).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복되다고 축복한다. 하늘 나라가 이미 그들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백성의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들과 그리스도의 이 보이지 않는 친교를 교회론에 받아들일 때, 그 결과로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교회"가 다리를 놓아야 하는 커다란 긴장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가 계신 거기에 교회가 있다 (Ubi Christus - ibi ecclesia). 그리스도의 참 교회는 그리스도의 친교가 있는 곳에 있다. 신자들의 보이는 공동체와, 가난한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 즉 신자의 공동체와 가난한 사람들, 백성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린이들의 공동체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 그의 사도직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며, 가장 작은 자들은 교회가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말해준다. 숨어계신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백성의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들 안에서 기다린다. 계시된 그리스도(manifest Christ)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사도직 안에는 부활하였고 장차 올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면,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는 고난 당하며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