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축복
희망의 신학과 생명의 충만한 복음

영산 국제신학심포지움 발제(2004년 6월 3일 여의도 CCMM 빌딩)

 

 

 저는 이번 2004 영산 국제 신학심포지움의 초청을 큰 기쁨 속에서 수락하였습니다. 올해는 조용기 목사님과 여의도 순복음교회만이 아니라 제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40년 전에 저의 "희망의 신학"이 처음으로 출간되어 온 세계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를 감사하게 만드는 것은 성공 그 자체가 아니라, 그처럼 많은 교회들과 신학자들이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저와 함께 길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우리는 다른 전통들로부터 자라났고 상이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 모두를 연결하는 동일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Parusie)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출신은 아주 다르지만,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저는 조 목사님을 1995년 9월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제자인 박종화 박사와 함께 제가 그를 방문했고, 우리는 아침 7시부터 10시까지 긴 아침식사와 함께 대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신학적 대화 가운데 저는 조 박사님을 박식하며 깊이 있게, 그리고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강의에서 그를 기독교 신학자로 진지하게 다루며, 그의 순복음 신학(Full Gospel Theology)에 대해 논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서방 신학자들처럼 그의 메시지와 교회와 한국 국민들에 대한 그 영향력을 단지 외부로부터 종교사회적으로 관찰하지 않을 것이며, 하비 콕스처럼 "기독교적 샤마니즘"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조 목사님은 뛰어난 기독교 신학자로서 전 세계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질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성경적인 복음 아래 서 있고, 스스로를 그것에 의해 평가받고자 하는 기독교적 교회입니다.

하지만 제가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허락하십시오. 1995년 우리의 첫 대담 중에 우리는 우리 삶의 진행들과 신앙의 경험들 가운데 놀라운 유사점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비기독교적인 불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후기독교적인 세속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조 목사님은 17세의 나이에 병들었습니다. 그는 결핵병을 얻게 되었고, 이 질병은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데려갔습니다. 이 죽음의 경험 가운데 그는 성경을 읽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개인적인 구주로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그보다 10살이 많습니다. 17세의 나이에 저는 1943년 7월 저의 고향 도시인 함부르크(Hamburg)를 불의 폭풍 가운데 파괴하였던 영국 공습의 폭탄세례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4만 명의 사람들, 여자들과 아이들이 저 밤들의 어둠 가운데 죽었습니다. 제 옆에 있던 제 친구를 찢어버린 폭탄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저를 무사하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제 주위에 무더기로 죽어가던 그 밤에 저는 지옥의 문턱에 있었고,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분을 발견하기까지는 2년의 시간이 더 흘러야 했습니다. 전쟁 말엽에 저는 포로로 붙잡히게 되어, 어둡고 춥고 희망이 없는 전쟁포로수용소로 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서 성경책 한 권을 받았고, 먼저 구약성경의 탄식시편들을 읽었습니다. 그것들은 저의 절망을 표현해 주었고, 하나님을 향한 제 갈망을 강화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마가복음을 읽게 되고 예수님의 죽음의 외침(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기서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살던 저를 찾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크리스챤이 되었고, 기독교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저를 먼저 발견하지 않으셨다면, 제가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전쟁포로수용소에서 3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 그 희망의 힘으로 살아남았고, 제 동료들 중의 많은 이들처럼 슬픔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다.1) 조 목사님은 그의 사역을 한국전쟁 이후 한국 백성의 "한"(HAN, 恨) 속에서 시작했고,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제 생활을 제2차 세계대전과 파괴된 독일에서의 전후시대의 "한"(恨) 속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신학과 오순절운동은 하나의 공통된 영적 뿌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블룸하르트(Blumhardt) 부자(父子)의 이름과 연결된 독일의 각성운동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 각성운동은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가 경험한, 한 작은 슈바르츠발트 마을에서의 치유와 축귀와 함께 시작되었고, (튀빙엔 근처의) 받볼(Bad Boll)에서 아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의 예언적이며 치유적인 활동 속에서 지속되었습니다.2) 블룸하르트에게서 "치유와 소망"은 "기도와 깨어 있음",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림"과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여 달려감"처럼 하나의 전체를 이루었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를 최초의 "희망의 신학자"라고 불렀고 , 젊은 시절에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3)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칼 바르트와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Eduard Thurneysen)의 변증법적 신학과 스위스의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와 헤르만 쿠터(Hermann Kutter)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정신적인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의 오순절 신학자들 중에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진취적 소망의 추종자들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4) 이것은 하나의 능동적이고 삶을 변혁하며키그리스도의 미래를 선취하는 소망의 경험입니다.

조 박사님을 신학자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저는 제 강좌에서 제게 보내졌던 그의 저술들에 근거하려고 합니다:

1. 순복음의 7대 신학적 기초들 (The Seven Theological Foundations of the Full Gospel)

2. 삼중축복 (The Threefold Blessing)

3. 오중복음 (The Fivefold Gospel)

4. 재림(강림)의 복음 (The Gospel of the Advent)

저는 그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보충하고 더 전개할 것입니다. 저는 조 목사님이 본국과 전 세계에서 그의 사역을 통해 섬기며, 우리가 믿음과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생명의 충만한 복음이 총체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건의하고자 합니다. 저는 희망의 신학에 대한 저의 경험들로부터 말하는 것이며, 순복음의 이해를 위해 적게나마 기여하고자 합니다. 복음의 풍성함은 우리의 제한된 이해보다 큰 것입니다. 저는 4개의 단락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1.  "갈보리 십자가"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믿음은 모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안으로의 부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한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중심적 의미를 강조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간들에게 미치는 첫 번째 영향은 하나의 새로운 소망으로의 거듭남입니다(벧전 1:3). 이 소망 속에서 우리는 소생하게 되며, 하나님의 다가오는 영광을 우리 앞에서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일 뿐 아니라, 우리 역시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소망이라는 사실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거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십니다.

3.  성령의 생명력(카리스마타)은 부활하신,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와 세상 속으로 보내집니다. 그것은 "내세의"(히 6:5) 생명의 힘들입니다. 이 미래는 어떻게 나타나며, 어떤 "세계"가 우리를 기다릴까요?

4.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더 잘 이해하고, 성령의 은사적 경험들을 향해 우리 자신을 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강림-종말론을 필요로 하며, 세대주의-종말론을 떠나야 합니다. "예수는 오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와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강림의 복음"(The Gospel of Advent)입니다.

 

1. 그리스도의 부활 - 기독교적 소망의 기초와 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5) 마나약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며,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아무 소망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4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을 위해 그토록 중심적일까요? 왜냐하면 그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그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예수를 세상의 주인과 구세주로 만드시며, 스스로를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계시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때문에 예수를 신뢰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분리하는 자는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은 그의 죽은 아들을 성령의 신적인 권능을 통해 영원한 생명 안으로 다시 살리십니다. 그리스도-공동체 속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을 창조하고 치유하는 힘으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시작으로 경험합니다. 부활 신학의 기초 위에 서 있지 않고는, 그 어떤 좋은 오순절 신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순복음(Full Gospel)의 7대 신학적 기초들"에 [추가적으로] "순복음"의 신적인, 그리고 소진함이 없는 근원인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한 가지 항목을 집어넣을 것을 추천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이 원천을 잠시 살펴봅니다. 비록 누가가 그리스도의 역사를 상징적인 시간의 간격들을 가지고 차례차례로, 즉 성(聖) 금요일 - 삼일 후의 부활절 - 40일 후의 승천 - 50일 후의 오순절의 순서로 이야기합니다만, 이것은 구원의 한 가지 유일한 비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안으로 오십니다. 그는 십자가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는 소생함을 받으시며, 신적인 통치의 주님 자리에 앉게 되고, 성령의 생명력을 세상 안으로 보내십니다.

우리가 여인들과 예수 제자들의 부활 신앙을 더 정확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로마인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여인들과 갈릴리로 도망간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이 현현들은 그들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주님이 당했던 것과 같은 박해와 죽음을 예상해야 했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의 현현 속에서 명백히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발견했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빈 무덤은 그의 부활에 대한 증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도 비워졌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귀환과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 부활에 대해 선포한 사실은 빈 무덤에 대한 증명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그들에게 무덤 속에 있는 예수의 시신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들은 그의 부활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속에 나타나신 것을 경험했던 여인들과 제자들은 부활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요한복음 20:22에서 "성령을 받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부활절과 오순절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바로 그 순간(카이로스)과 일치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과 부활의 영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더 이상 보지 않고, 우리의 믿음은 복음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만, 그리스도의 인식과 영의 경험은 분리될 수 없도록 서로 함께 속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기적을 인식한다는 것은 2000년 전의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을 지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아, 그렇구나" 또는 "O.K."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부활의 능력에 사로잡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켜서 단지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죽음의 세상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의 종말론적이 역사를 열어주며, 모든 사람들을 이 하나님의 미래로 초청하는 하나의 실존사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관계되는 하나의 단순히 개인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와 영원한 생명의 인도자가 되기 위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을 입었습니다(고전 15:20). 죽은 자들로부터의 그의 부활은 처음부터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교회의 부활절 예식 속에서 아주 잘 표현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모든 것이 이제 빛으로 충만하도다.

      하늘과 땅 그리고 죽음의 제국.

      온 피조 세계가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환호하도다."

정교회의 부활절 아이콘은 이것을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양 손에 아담과 하와를 붙잡고, 그들과 함께 온 인류와 모든 탄식하는 피조물을 죽음의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의 승화된 세상 안으로 끌어당기십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빛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의 수난과 죽음의 구원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조 박사님은 여기서 이중적 의미를 보고 있는데, 그것은 훌륭합니다. 1.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그의 피를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2.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의 영혼만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병의 저주로부터 우리의 육체도 치유하고 우리를 축복하기 위하여 "우리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제5항). 이것은 참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눈은 가장 먼저 그의 백성의 질병들을 향했고, 그는 질병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압도적인 능력으로만이 아니라 그의 고난을 통해서도 질병을 치유하셨습니다. "그의 상처들을 통해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마 8:17).

저는 두 가지 측면들을 추가하고자 합니다. 1.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그림자 속에 있는, 즉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밤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적인 형제도 되었습니다. 6) 십자가에서 죽음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는 이 어두움 속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져오시고,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의하면 "배고픈 자들, 목마른 자들, 병든 자들, 나그네 된 자들, 옥에 갇힌 자들", 한국어로 민중이 바로 그들입니다. 2.그리스도는 단지 자기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절대적인 그리고 우주적인, 영원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음부강하의 교리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활 속에서 그는 이 영원한 죽음을 정복하셨고, 지옥의 문들을 열어 젖히셨습니다. 바울은 첫 기독교적 부활절 찬송을 인용하면서 환호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 ...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이 삼중적인 구속을 우리는 이미 시편 103:3-4에서도 발견합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그의 부활의 빛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다시 소생하셨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로마서 14:9에 따르면 그의 목적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7)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단지 살아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사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들을 분리하는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은 자들이 현대적, 서방적인 의미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동양적인 의미에서 "현존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산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미래에 대한 소망을 열어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과거의 사람들과 관련되며, 그들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대단히 오래되었고 아시아에서는 지금도 매우 왕성한 조상숭배 위에 비취는 새로운 기독교적인 빛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신 그의 부활의 빛으로 채우기 위하여 "죽은 자들의 세계 속으로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죽음의 밤은 부활의 아침의 고요함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조상들에 대해 생각하는 자는 회복될 수 없는 그들의 과거 대신에 기다려야 하는 그들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 이유는 - 기독교적 시각으로 볼 때 - 조상들이 더 이상 신화적인 기원의 빛 안에서 그 기원에 후손들보다 더 가까이 서 있는 자들로 나타나지 않고, 조상들과 후손들이 죽은 자들의 공통된 부활이라는 빛 안에서 나타나며 "내세의 생명"에 대한 소망이 양자[조상들과 후손들]를 모두 포함하는 데 있습니다. 조상들과 우리가 가지는 사귐은 하나의 놀라운, 위로를 주는 소망의 교제입니다. 부활의 소망 안에서 시간들과 죽음을 넘어서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동알한 영원한 현재가 이미 여기서 생겨납니다.

 

2. 산 소망으로 거듭남

오순절 신학은 정당하게도 "거듭남"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부에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위한 개인적인 중생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번째 영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8) 이것은 소망이,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를 완전히 소생시키는 소망이 우리 안에서 태어나는 사건입니다. 베드로전서 1:3에 그 내용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영은 "부활의 능력"이요, 영원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신자들이 그들의 영혼과 육체에서, 개인적으로 또 다른 이들과의 사귀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우주적이며 탄식하는 온 피조 세계를 포함합니다. 부활의 소망과 함께 "온 삼라만상의 봄"(Hildegard von Bingen)이 시작됩니다. 부활의 힘에 사로잡힌 우리는 길고 추운 겨울이 지난 후에 꽃들과 나무들처럼 원기왕성하게 되며, 사랑 안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슬픔과 냉담에서 깨어납니다. 생명을 향한 예기치 못했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게 됩니다. 우리를 과거에 예속시킨 죄들이 용서함을 받습니다. 삶을 억누르고 파괴하던 병들이 치유됩니다. 우리는 "마치 갓 태어난 아이들"과 같으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흥분된 기대를 가지고 삶을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깨어나는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가지신 큰 소망에 대한 하나의 작은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소망이 됩니다. 우리는 예정되었던 그 존재, 즉  땅의 피조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창 1:26-28) 속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 아들들과 딸들이 되고, 성령의 사귐 속에서 하나님의 친구들이 됩니다.

소생하게 하는 이 소망이 우리 안에서 깨어나는 곳이라면, 그 어디서든 갈등도 시작됩니다. 바울이 일컬었던 "영"과 "육체" 사이의 싸움,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과 "죽음" 사이의 싸움, "빛"과 "어둠" 사이의 싸움, 즉 죄와 질병과 죽음의 소멸하는 시대와의 싸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다가오는 시대 사이의 싸움이 바로 그것입니다].9) 조 박사님은 이 싸움을 "영적 행복(Well-being)의 축복"에 관한 그의 진술들 중에서 3번 째로 묘사하였습니다. 저는 "몸을 파괴하는 길(The Way to destroy the Body)"이란 표제가 영어로 오역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성경의 언어의 관용에 따르면 "몸"(soma)이 아니라 "육체"(sarx)를 말합니다.10) 그러므로 "영"(pneuma)도 "영혼"(nous)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묵시적 사상가였으며, 세상 역사에 관하여 두 가지 시대[지나가는 악한 시대와 오는 선한 시대]를 생각했습니다. 이것들은 개인의 삶 속에서 "육체"와 "영" 또는 "육체에 의한 삶"과 "영에 의한 삶"으로 구체화됩니다. "육체에 의한 삶"이란 실패한 삶, 죄와 타락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키르케고르)입니다. "영에 의한 삶"은 은혜 안에 있는 삶, 온전히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생동하는 삶,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 있는 삶입니다. "육체"와 "영"은 항상 영혼과 몸, 그리고 인격 개개인과 공동체 속에서의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영혼이 몸보다 결코 더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 혹은 개개인이 공동체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죄의 기원은 이른바 몸의 낮은 충동이 아니라 전(全) 인간의 방향성 상실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욕과 탐욕, 시기와 미움은 인간과 인간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육체에 의한 삶"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달리 참된 삶의 기원은 인간의 영혼이나 의지가 아니라 삶 전체의 새로운 방향설정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에 의한 삶이란 "사랑 안에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 속으로 오심으로써, 이미 여기서 그리고 지금, 잘못된 삶 가운데 참된 삶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떠오르는 태양 빛과 물러가는 저녁 그림자 사이의 갈등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조 박사님이 전개하신 대로, 싸움은 개인적인 삶 속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나 탐욕, 미움과 두려움은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는 힘이기도 하므로 - 자본주의 속에서의 탐욕, 테러리즘 속의 증오, 그리고 안보 정치 속에 나타나는 두려움 -, 싸움은 공개적인 삶 속에서도 계속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영"과 "육체", 두려움과 희망,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내적 전투 속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은 우주적이고 종말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촉진하며 이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날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싸움을 설명하는 하나의 격언이 있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더 이상 밤의 그림자들과 싸워서는 안 되고, 그 대신에 그림자를 몰아내는 빛에 의지해야 한다. "어둠은 빛의 침투에 대항할 수 없고, 단지 빛이 양보할 경우에만 빛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따름이다"(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3. 미래 세계의 힘

오순절 운동은 성경의 모델에 따라 은사적인 공동체를 다시 발견했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교회 공동체는 은사적인 공동체입니다, 단지 그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믿음을 가진 모든 기독교인들은 은사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임무를 발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은사들은 성령의 에너지들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

은사들은 하나님 은혜의 선물들이며,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임무들과 항상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들을 섬김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므로 은사적인공동체는 항상 섬김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조 박사님이 "삼중 축복"에서 설명한 것처럼 은사들은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들입니다. 은사적이며 섬김지향적인 교회 공동체는 축복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후 사람들은 항상 그들이 다른 이들을 위한 복이 되기 때문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내가 ... 네게 복을 주어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2). 축복받은 교회 공동체들은 주변세계 안으로,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축복의 강물을 흘러 보냅니다.

저는 여기서 단지 하나의 질문으로 제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힘들과 임무들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합니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불"과 "초자연적인 은사들"이거나, 또는 "내세의 능력"(히 6:5)과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종말론적인 해석을 추천합니다.11)

만약 우리가 사도행전 2:2-4이 시사하는 것처럼 은사들을 "초자연적인 선물들"로 이해한다면, 단지 방언과, 예언, 신유아 같이 비범하고 놀라운 현상들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일방적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서 사랑의 자연적인 행위들도 은사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장과 13장 참조): 각 자, 주께서 그를 부르신 그대로(고전 7:17).

만약 우리가 은사들을 "내세의 능력"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단지 "하늘로부터 오는 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래하는 날의 아침 노을의 첫 광채이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미래가 우리의 현재를 지배하게 되며, 우리는 오시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에 우리 자신을 개방합니다. 미래의 이와 같은 힘들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날에 성취할 것을 이미 여기서, 그리고 오늘 선취합니다. 여기서 은사들은 세상을 정의와 평화 속에서 재창조하는 힘들입니다. 비록 우리의 힘들이 이 세상의 힘있는 자들의 권세에 비해 작을지라도, 우리는 미래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도래하는 나라의 이름으로 행동합니다.

은사들이 미래 "세계"의 힘들이라면, 그것들은 이미 여기서 세상의 모든 영역들 안으로 - 개인적이고 사회적으로, 경제적이고 정치적으로, 문화적이고 환경적으로 -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이 지평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만약 여기서,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경험되는 카리스마타, 은사들과 생명의 힘들이 이미 "내세의 능력"이라면, 이 "내세"는 어떤 모습일까요? 미래의 세계는 하나의 완전히 은사적인 세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한 세계, 한없는 생명력으로 충만한 세계, 모두를 위해 넉넉한 세계, 생명의 낙원, 정의의 도시입니다. 영의 축복 속에서 우리는 이미 여기서 이 모든 것들과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강림에 대한 기대로 우리를 채워줍니다.

 

4. 강림(Advent)의 복음과 강림-종말론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모든 기독교 종말론의 기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사도 바울의 큰 부활장[고전 15장]을 강림의 복음과 종말론적인 사고를 위한 선포의 기반으로 삼을 것을 추천합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하나의 독특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먼저는 ...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15:23-28). 이 변형의 과정은 모든 것을 영원한 생명 안으로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15:22)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세 가지 의견을 진술합니다.

1. 모든 것을 변형시키고 변용시키는(빌 3:21) 이 종말론적인 과정의 역동성은 세계사의 시간       의 흐름으로부터가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2. 널리 쓰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용어는 좋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리고 우리가 그 어디서나 그의 임재를 느낀다면, 왜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야" 한다는 말입니까? "parusia"라는 헬라적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단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뜻하는 라틴어는 "Advent"이며, 독일어는 "Zukunft"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의 "재림" 대신에 "그리스도의 강림(Zukunf)"에 대해 말할 것을 제안합니다. 고대 교회의 시대로부터 칼 바르트에게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삼중적인 강림에 대해 즐겨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는 육체로 오셨다 - 그는 영으로 오신다 - 그는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다." 이에 대해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구세주는 오고 계십니다. 그분은는영원 속의 한 장소에 고요히 앉아 계시다가 갑자기 내려오실 특별한 시점을  기다리시는 게 아니라, 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강림은 우리가 끊임없이 바라보고 매일 기다릴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미래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그분을 기다린다는 그 점에서 바로 현재이기도 합니다."12)  만약 예수가 오고 계시다면, 그는 그의 미래로부터 매일 우리의 현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들 속에서 우리는 그분을 기다립니다.

3. 신학적인 시간 이해에 관해서는 미래(Futur)와 강림(Advent)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강림은 우 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미래가 현재로 바뀌며, 현재가 과거로 바뀝니다. 미래는 크로노스(Chronos: 연대기)의 시간 형태(Zeitform)입니다. 이 허무한 시간은 죽음의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한 기독교적인 소망은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이 아니라 오직 강림의 시간 개념으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영원의 현재는 시간도 변화시킵니다. 크로노스가 아이온(Aion:세대)로 바뀝니다. 그리고 아이온은 영속적인 현재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온다면, 시간은 마치 멈추는 듯합니다. 즉 시간은 영원으로 변화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시간에 종속된 분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주님이십니다. "이미 벌써"와 "아직 아니"를 말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 속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언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적인 종말론"은 모든 종말론의 끝입니다.13)

이제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피터 알트하우스(Peter Althouse)가 입증한 대로 세대주의는 원래 오순절 신학의 한 부분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몇사람들에 의해 채용되었습니다. 세대주의는 종말론적인 방향성을 갖는 세계사의 질서를 말합니다. 가장 잘 알려진 구분은 일곱 세대의 구분입니다. 이것은 랍비들이 일곱 창조의 날들을 세계사의 일곱 시대들에 적용한 것에서 유래하며, 따라서 원래 기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는 다음과 같이 계산합니다: 1. 순결의 시대. 이것은 타락과 함께 끝납니다, 2. 양심의 시대. 이것은 대홍수와 함께 종결됩니다, 3. 통치의 시대. 이것은 바벨탑의 건설과 함께 끝납니다, 4. 언약의 시대.이것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로 끝납니다, 5. 율법의 시대.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것과 함께 종결됩니다, 6. 은혜의 시대.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끝나게 될 것입니다, 7. 그리스도의 왕국.14) 아직도 구약성경의 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장차 그 성취를 경험할 것입니다.

또 다른 도식은 요아힘 폰 피오레(Joachim von Fiore)로부터 유래하며, 세계사의 세 가지 시대들을 계산합니다. 초기 오순절 운동은 분명히 웨슬리안 신학자인 존 플래처(John Fletcher)의 삼중 세대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도식에 따르면, 아버지의 시대는 아들의 시대로 인도하며, 아들의 시대는 영의 시대로 이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완성됩니다. 이 도식에서는 기독론, 성령론과 종말론이 일곱 세대의 도식보다 내적으로 더 훌낫게 연결됩니다. 이 도식의 역동성은 시대의 경과로부터 나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이 도식은 아버지와 아들을, 그리고 아들과 성령을 쉽게 분리할 수 있고, 그리하여 신적인 삼위일체를 역사적인 진보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림의 복음은 마지막 심판의 기대를 기쁜 소식으로 만들어야 하며, 그것을 더 이상 협박의 메시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기쁨으로 기다려야 하며,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자이신 예수를 심판자로 더 분명히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과 모든 사람들과 이 모든 세상을 그의 심판에 더 잘 맡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스스로 선포하셨던 구원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통하여 어둠의 힘을 물리치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최종 이전의 것입니다. 최종적인 것은 만물의 새 창조입니다(계 21:4.5). 새 창조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 위에서만 영원히 존속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공의는 어디서든 관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최후 심판의 의미입니다. 심판과 새 창조는 우리가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변형과정의 양면입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심판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무엇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지 멸망시키려 하지 않고, 무엇보다 구원하려고 한다. 그것은 단순히 폐기하려고 하지 않고, 무엇보다 성취하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을 멸망시키는 무(無)와 악한 세계의 해체이다 .하지만 그것은 피조 세계를 구원하고 성취하는 긍정(Ja)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15)

바울이 고린도전서 3:13-15에서 말한 대로, 모든 개개인에게 그리스도의 심판은 행위에 따른 심판입니다. 심판의 목적은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죄악은 선고를 받지만, 죄인은 구원을 얻습니다. 심판에 관한 사도 바울의 표상은 그의 칭의론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을 기쁨으로 기다리며, 그것을 강림의 복음의 목적으로 선포합니다.

최종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까요?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소망할 수 있고,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소망의 고백"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그 무엇인가를, 그리고 그 누군가를 포기하신다고 오늘이나 영원이나 결코 말할 수 없다 ... 마지막은  다음과 같을 수 밖에 없다. 보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악들을 지신 자로서 오신다. 예수께서는 심판하실 수는 있지만,  영원히 멸망시키실 수는 없다. 이것을 나는 가장 깊은 지옥 아래서도 선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16)

제게도 이것은 "그리스도의 강림의 순복음(Full Gospel)"입니다.

 

1. Ein  Ringen mit Gott, in: J. Moltmann, Die Quelle des Lebens. Der Heilige Geist und die Theologie des Lebens, Guetersloh 1007, 11-18 (한국어로도 번역)을 보라.

2. L. Ragaz, der Kampf um das Reich Gottes in Blumhardt, Vater und Sohn und weiter!, Zuerich 1922.

3.  K. Barth, D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19. Jahrhundert, Zuerich 1947, 590.

4.  P. Althouse, Spirit of the Last Days. Pentecostal Eschatology in Conversation  with Juergen Moltmann. With a Foreword by Juergen Moltmann, T. & T. Clark International London/New York 2003.

5. J. Moltmann, Der Weg Jesu Christi. Christologie in messianischen Dimensionen,      Muenchen 1989 (한국어로도 번역).

6.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Das Kreuz Christi als Grund und Kritik christlicher Theologie, Muenchen 1972 (한국어로도 번역).

7. J. Moltmann, Ahnenverehrung und Auferstehungshoffnung, in: Orientierung, Nr. 12, 67. Jg. Zuerich 30. Juni 2003, 141-144 (한국어로도 번역).

8. J. Moltmann, Der Geist des Lebens. Eine ganzheitliche Pneumatologie, Muenchen      1991 (한국어로도 번역).

9.  Moltmann, Quelle, Kap. VII. Neue Spiritualitaet des Lebens.

10. K.-A. Bauer, Leiblichkeit - das Ende aller Werke Gottes, Tuebingen 1971.

11. Moltmann, Geist des Lebens, Kap. IX: Die charismatische Kraefte des Lebens,       195-212.

12.  Ragaz, Der Kampf, 148.

13. 저는 강림-종말론을 J Moltmann, Das Kommen Gottes. Christliche Eschatologie, Guetersloh 1995 (한국어로도 번역)에서 상세히 전개하였습니다. Im Ende - der Anfang. Eine kleine Hoffnungslehre, Guetersloh 2003도 참조하시오.

14. Althouse, Spirit, 23-24. Moltmann, Das Kommen: Eschatologische Zeitordnung der Geschichte, 161-168도 참조하시오.

15.  Ragaz, Der Kampf, 153에서 인용.

16. J. Harder, Christoph Blumhardt. Ansprachen, Predigten, Reden, Briefe 1865-1917, Band 2, Neukirchen 1978, 131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