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신정론

 

김동건(영남신대)

 

I. 들어가는 말

 신정론(theodicy)은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의’(justification of God)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의미한다. 이 주제는 신에 대한 명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과 악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왜 무고한 자가 고통과 수난을 당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선하시며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왜 이런 고통을 허용하는가? 이런 질문을 신학이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기독교인은 성서에 근거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고통과 이유 없는 죽음들이 설명되지 않으면,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의(義, justice)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결국 의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게 되고, 이 가치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된다. 이 새로운 가치나 의(義)의 개념은 인도주의에 뿌리를 둘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새로운 가치와 의(義)의 ‘근거’를 찾아 적용하면, 세상은 이 새로운 근거에 의해 이해된다. 이 세상은 새로운 가치와 질서에 의해 해석되고, 이 질서에 따라 새로운 의와 선의 개념이 자리한다. 성서에 근거한 하나님에 의한 세상 이해가 의미를 잃고 다른 근거에 의해 이 세상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고 그를 향한 믿음은 상실된다. 따라서 신학은 신정론에 관한 물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몰트만의 신정론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신정론의 흐름을 간략하게 보자:

종교철학과 일부 기독교의 흐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답변이 있다. 이는 두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이원론적(dualistic) 개념으로 신정론의 문제에 답했다. 이 세상에는 선의 원리(principle)와 악의 원리가 함께 상충하면서 존재한다. 선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고, 악은 악신(anti-God)에게서 나왔다. 인간은 이 세상을 살 동안 어느 편에 설지 결단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일원론적(monistic)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단지 선(善)만이 존재를 가진다고 믿는다. 악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거나, 선의 부정으로만 존재한다. 악은 오히려 선이 드러날 수 있도록 봉사하는 기능을 가질 수도 있다.

성서의 전통에서는 구약의 욥, 시편, 애가 등이, 신약에서는 예수의 수난이 신정론과 연관되어 질문되었다. 대체로 답변들을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고통과 악은 인간에 의해 야기된다. 인간이 타락할 때부터 악은 인간 역사와 함께 한다. 이것을 죄라고 부른다. 이 죄 때문에 악한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소욕에 따라 마음대로 악을 행하도록 버려두었다. 따라서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고, 오히려 악은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있다. 둘째, 하나님으로부터도 비롯되지 않고 인간의 사악에서도 비롯되지 않은 참으로 억울한 의로운 자의 고통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인간은 하나님께 항의할 수는 없다(롬 9:19-20). 그는 단지 더욱 겸허히 자신의 의를 지키면서 더 큰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임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셋째, 어떤 경우는 고통과 시련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많은 시련과 고난을 주셨다. 그러나 고난을 받을 때는 몰라도 이런 고난은 하나님의 연단이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신학사에서도 여러 답변들이 있어 왔다. 교부 중에는 이레내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견해가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공통되는 것은 아래와 같다. 악은 존재가 없으며 선의 결여이다. 그러므로 악은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파생되지 않았다. 도덕적인 악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 인간의 자기선택이다. 이 세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 따라서 육체적인 고통과 병은 인류를 정화하고 연단하는 신성한 수단이다. 형이상학적인 악도 하나님의 크신 섭리에 속하며 결국은 이 섭리가 드러나는데 일조를 한다. 종교개혁가들에게서는 신정론이 직접 다루어지기보다는 다른 형태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그들에게는 죄된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다고 일컬어질 수 있는지의 문제인 ‘인간의 의’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어떻게 의롭다고 칭해지는 지와 결부되었다. 하나님은 은총으로 죄인을 의롭다고 칭해 줌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신다. 인간과 피조물을 의롭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정당성을 보였다. 종교개혁가들 이후에는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신정론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이 견해는 하나님이 악을 용인하지는 않았지만 이 악을 통해서도 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을 조종해 선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며, 역사의 마지막에 악을 최종적으로 극복해 없앤다. 18세기에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신정론의 문제를 낙관론적인 견지에서 논했다. 요지는 하나님은 도덕적 악을 인간의 자유에 맡겨 두었고, 육체적인 고통과 질병을 심판이나 교육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18세기는 계몽운동의 시기로서 인간과 역사에 대한 낙관론적 분위기가 신정론에도 적용되어 진지하고 심각한 논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8세기말, 1755년에 리스본의 지진으로 수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자 더 이상 낙관론적인 신정론은 설득력을 잃었다.1)

20세기가 되면서 신정론은 심각한 양상을 맞는다. 지금까지의 신정론으로는 답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정론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된 것은 20세기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특히 2차 대전을 겪은 후 서구에서는 소위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라는 용어가 생겼는데, 이는 20세기 초반까지의 역사에 대한 순진한 낙관론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2차 대전을 겪으며 그동안 신학이 간과한 인간 내부에 숨겨진 인간의 악독과 한계가 노출되었고, 기독교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안이하게 믿던 기독교는 깊은 좌절을 맛보았다. 2차 대전은 신부재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냈고, 이는 곧 60년대의 신죽음의 신학의 배경이 된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결코 아우슈비츠 이전의 신학과 같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신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우리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던 의로운 자들이 고통받는 이유와 악의 문제에 답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신정론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이래 계속 논해졌으나 명료한 결론들을 얻지는 못했고, 답변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과거 신정론에 대한 질문의 핵심은 ‘왜 무고한자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가?’였다. 이 질문은 동시에 ‘어디에서 악이 기인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무고한 자의 죽음은 대체로 사악한 악독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신정론은 이와 같은 질문에 답변을 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경험은 신정론에 새로운 질문을 추가했다. 이 질문은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20세기의 재난과 희생이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커지면서, 신학적으로 묵과할 수 없는 소위 ‘과도한’ 고통과 죽음의 현장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극단적인 고통의 경험을 겪으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은 이제 바라지 않으며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다: 하나님은 고통의 현장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다른 말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죽음으로 신음할 때 그 기도를 듣고 있는가? 이 질문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아직 신앙을 잃지 않은 자들이 던지는 최후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현대 신정론이라고도 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몰트만의 신정론을 분석하는데 있다. 몰트만은 20세기에 대두된 신정론의 문제를 좀더 새로운 각도에서 논의하였다. 본 논문은 몰트만의 신정론을 통해 위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답변을 찾아보고, 신정론이라는 주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기를 희망한다.

 

II. 기독론에 위치한 신정론

몰트만은 신정론에 대한 체계적인 글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신정론은 항상 중요한 주제였고, 특히 그의 초기 중요 저작들에는 신정론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 몰트만은 2차 대전에 참여했다가 전쟁포로 생활을 하면서 고통과 희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고, 그가 체험한 희망의 힘과 고통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60년대와 70년대의 중요한 그의 신학적 모티브가 된다.2) 몰트만의 저작은 크게 초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를 대표하는 것은 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희망의 신학?(1964),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이다. 이 논문에서는 신정론에 대한 논의가 많은 초기 3부작을 중심으로 하고 후기 저작들을 필요한데로 참고하려 한다.

몰트만은 의로운 자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자주 언급하지만, 신정론을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그의 신정론은 기독론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기독론 이해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그는 신정론을 기독론적으로 답변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신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신학적 토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그의 십자가와 부활 이해를 차례대로 본 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함께 다룸으로 자연스럽게 그의 신정론에 접근하겠다. 본 논문에서는 포괄적인 몰트만의 기독론을 다루는 것은 아니고 신정론의 답변에 필요한 만큼 살펴보겠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몰트만의 십자가 이해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희망의 신학? 다음에 나온 두 번째 중요 저작인데, ?희망의 신학?이 부활에 초점이 있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초점이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십자가 해석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몰트만의 계획은 더 큰 것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학’이라는 기독론적 신학의 체계를 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몰트만은 20세기 초반 이후 진행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의 문제, 이 양자가 가지는 불연속, 일방적인 도그마의 그리스도의 문제 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십자가를 역사적으로만(사실적 논구), 혹은 신학적으로만(해석의 문제)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3) 그는 예수의 십자가를 다루는 근본 원칙으로 두 가지를 고려한다: 하나는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하지만 십자가의 역사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는 십자가가 가지는 대속적 의미와 신학적 해석에만 치중할 때 상실하게 될 십자가의 사실성을 염두에 둔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를 예수의 생애와 분리해서 다루지 않는다. 이는 예수의 죽음과 십자가를 예수의 생과 분리해서 이해할 때, 예수의 생애라는 역사성이 상실되어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접근할 때 십자가라는 역사적 과제를 예수의 생애라는 틀 안에서 신학적으로 다룬다.4) 이런 원칙 위에서 몰트만이 이해한 예수의 죽음을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5)

첫째, 예수의 죽음은 종교적 차원을 가진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은 율법과 전통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예언과 묵시문학의 배경에서 보아도 새로운 것이었다. 예수의 출현은 유대교의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6) 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마지막 심판 때에 죄인의 심판자요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자로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죄인들에게 은혜로 복음을 선포하고 세리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는 유대 율법 속에 근거되어 있는 희망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유대교의 전통과 상당히 이질적이었고, 세례 요한과도 달랐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예수의 선포 자체는 세례 요한과 유사하다. 그러나 예수의 선포와 세례 요한의 선포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는 회개를 통하여 성취된다. 반면 예수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죄인들과 가난한자에게 자기를 내어줌으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행해야 할 전제 없이 예수의 선포와 함께 온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에도 제한 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로서 온다. 이런 점에서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 회개운동을 일으켰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자신을 통해 성취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7)

예수의 복음 선포는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표상과도 사뭇 다르다. 예수의 복음은 의로운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불의한 자에게는 심판을 선포하는 묵시문학적 의(義)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예수의 선포는 당혹스럽게도 죄인과 불의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은혜로 약속하여 주는 반면, 소위 의롭다고 칭해지는 자들을 심판한다. 이는 전통적인 율법 이해를 가진 많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유대교와의 충돌은 예수의 생애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선포 자체가 불합리와 모순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종교인들과 갈등을 야기했다. 예수는 처음부터 군중들의 환호 뿐 아니라 증오와 반대도 동시에 받았다. 이런 면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믿던 하나님에 대한 ‘모독자’였다.8)

둘째,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 차원을 가진다.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을 당시 권력과의 관계에서 생각한다. 몰트만은 예수가 당시 하나님 모독자에게 가해지는 투석 사형이 아니라 로마 점령군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은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십자가 형벌은 국가 모반에 대한 형벌이었지 일반적인 형벌이 아니었다. 몰트만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있었던 로마 점령군과 민중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상태로 있었던 정치적 상황을 배제하고 예수의 처형을 이해할 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예민한 역사적 상황에서 공공연히 활동했으며 상당히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는 것을 정치적 측면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9) 몰트만은 예수와 열혈당과의 공통점을 6가지로 정리한다.10) 또 열혈당과의 차이점 5가지를 제시한다.11) 그는 예수와 열혈당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예수와 정치적 상황과의 관계를 다시 5가지로 정리한다. 요점은 이렇다: 예수는 열혈당과 차이가 분명히 있었고 정치적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정치적으로 위협적이었고 ‘선동자’였다.12) 몰트만은 종교적 행위가 정치적 영향을 줄 수 있고,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종교와 정치가 현실적으로 분리되지 않음을 주장한다. 이는 초기 교회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이에 따른 황제 숭배의 거부가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로마 권력에서는 정치적으로 전달되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정치적 죽음을 당했다. 몰트만은 이것을 예수의 복음이 가지는 ‘정치적 차원’이라고 말한다.13) 예수 죽음의 두 번째 차원은 ‘선동자’로 규정된 정치적 차원이다.

셋째, 예수의 죽음에는 신학적 차원이 있다.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을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 몰트만은 위의 두 차원만으로는 십자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는 먼저 예수의 죽음을 소크라테스, 스토아 철학의 현자들, 그리고 기독교의 순교자들과 비교한다. 예수의 죽음은 다른 어떤 죽음과도 다르다. 예수는 철학자들처럼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고, 순교자들처럼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의 죽음은 전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었다.14)  몰트만은 복음서에 나오는 수난기사들을 분석한 후, 예수는 가장 처절한 경악을 나타내며 죽었다고 본다. 예수는 십자가 앞에서 떨고 낙담했으며, ‘하나님, 당신은 왜 날 버리십니까?’라고 절규를 외치며 죽어갔다. 몰트만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깊이 버림을 받았고 그것을 표현하며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생애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예수는 유대교의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선포했고, 율법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에게 은혜로 오시는 하나님을 선포했다. 다른 하나는,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는 계약이나 제사, 율법을 통해 중재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직접적인 사귐이 가능한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예수는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 속에 있었고, 전적인 신뢰를 넘어 서로 일치 속에 있었다. 율법과 심판이 아닌 은혜의 하나님, 예수가 감히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는 버림을 받은 것이다. 십자가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 속에서 그는 죽어갔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한 저주받은 죽음으로 내던져졌다.15)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십자가를 생각할 때 예수의 죽음은 다른 어떤 죽음과도 유비되지 않는다. 어떤 영웅적인 죽음이나 순교자의 죽음과도 다르다. 이것은 인간적인 실패와 좌절 이상의 어떤 것이다. 몰트만은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왜 죽었는가?’라고 질문하면서, 예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외침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던 하나님에게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소송을 의미한다. 이 사실을 다른 의미에서 보면, 십자가에서 고뇌에 빠진 것은 예수뿐만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고 하나님과 일치 속에서 살았다. 예수는 아버지 자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외침은 동시에 ‘나의 하나님, 왜 당신을 버리십니까’라는 외침을 의미한다. 예수의 버림받는 상태인 십자가는 오직 아버지와 예수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16)

몰트만은 이렇게 예수의 죽음을 세 가지 차원으로 이해했다. 예수는 신성 모독자로, 정치적 선동가로, 그리고 아버지께 버림받은 자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죽었다. 다음 장에서 부활에 대한 몰트만의 이해를 정리한 후, 3 장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연결해 신정론의 입장을 보겠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몰트만의 예수 부활에 대한 이해는 그의 첫 번째 주요 저서인 ?희망의 신학?에 잘 나타난다. 몰트만은 이 책을 통해 예수의 부활만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학의 중요 체계가 되는 신학의 종말론적인 뼈대를 세우려고 시도하며 그 토대를 부활로 잡고 있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 기독교의 선교, 기독교인의 실존, 나아가 전 교회의 성격이 종말론적으로 지배되어 있다고 말하며,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한다.17) 몰트만에게 ‘종말’은 미래의 문제를 의미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비추어 기독교와 현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장차 닥칠 미래의 목표로부터 다루어져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미래의 일을 밝히는 종말론은 세상 끝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시작이다.

그러면 기독교의 시작, 종말론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몰트만에 따르면, 기독교의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를 의미하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을 그리스 문화의 진리의 나타남(epiphany)과 유비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의 약속의 역사와 관련해서 하나의 예표로 이해해야 하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계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18) 몰트만에게 부활 사건을 규정짓는 두 개념은 약속과 계시이다. 그 의미를 보자:

몰트만은 부활 이해의 핵심이 되는 ‘약속’의 개념을 구약에서 찾아온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무수한 ‘나타남’들이 있다. 구약의 나타남들은 특정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 나타났고, 각 나타남은 고유의 특수한 상황을 가진다. 그럼에도 이들 나타남들은 나타난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다른 말로, 나타남들은 그 나타남의 장소나 시간을 제식화 하지도 않고, 그 나타남이 일어난 특수한 상황이나 사람에게 귀속되지도 않는다. 이 나타남들의 의미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19) 몰트만은 이 약속의 의미를 일곱 가지로 해석하는데, 내용적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약속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현실을 알린다. 약속의 선포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지시한다. 그러므로 나타남의 의미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타남에 담겨 있는 약속에 있고, 또 그것이 지시하는 미래에 있다. 둘째, 약속은 그것을 들은 인간을 미래를 향하게 하고. 미래의 성취를 위해 희망하게 한다. 그러므로 약속을 통해 규정되어지는 역사는 ‘순환’이 아니고, 미래의 희망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며 인간을 희망을 향한 존재로 낙인찍는다. 세 번째, 약속은 미래의 성취를 전제한 것이므로 아직 현재에 발견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를 약속한다는 것은 현재와는 다른 어떤 것을 약속하는 것이므로, 미래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모순’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약속의 선언은 미래와 현재 사이라는 긴장을 지닌 중간의 장소를 만든다. 이는 동시에 인간에게 미래를 향한 복종과 불복종, 희망과 포기에 대한 특수한 자유의 영역을 마련한다. 넷째, 약속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이의 성취도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약속과 성취의 도식을 역사적 필연성으로 도출할 수 없고, 역사적 도식으로 법칙화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약속의 성취의 주체는 하나님이므로, 인간은 단지 성취하는 분의 진실과 성실함을 믿음으로 성취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 약속과 성취는 과거 역사의 법칙에서 확인할 수 없다. 약속과 성취는 항상 놀라움과 새로움의 요소를 가지면서 미래를 향해 열려 있으며, 기대와 확신 속에서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변화한다.20)

몰트만은 ‘계시’도 약속과 연관해서 이해한다. 계시는 현존하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다. 계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약속의 성격을 가진다. 따라서 결정적인 계시 사건인 십자가는 일반 역사의 경험에서 얻어진 이해력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약속으로서의 계시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로부터 현실을 선포한다. 그것은 현존하는 주어진 현실에 대한 이해와 불일치 속에 있다. 따라서 계시 사건에 비추어진 미래는 단순히 이 현실에 내재하는 미래적 요소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계시는 현존하는 현실을 해석하고 드러내어 그것에 대한 인간의 동의를 일으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의 빛에 비추어 지금 현존하는 현실과의 모순을 보여주어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그리스도의 미래를 보여준다.21)

이런 약속과 계시라는 바탕 위에서 몰트만은 부활을 이해한다. 십자가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이고, 하나님마저 포함하는 절대적인 허무, ‘하나님 없음’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며 버려진 하나님의 신성 자체가 다시 드러나심이며 전적인 허무를 진멸하는 새로운 ‘전체성’의 경험이다. 부활의 희망은 하나님의 미래와 모든 역사의 미래를 향한 출발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종말론적인 미래가 시작된다. 부활이 가지는 종말론적인 성격 때문에 몰트만은 부활 사건을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부활로서의 부활 사건은 결코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으로는 처음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만이 파악될 뿐이다”.22) 이는 몰트만이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역사의 한 특정 시점에서 일어난 역사 내에 종속되는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활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일어났지만, 그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미래가 드러나는 종말론적인 특징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적 경험으로 부활을 이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다가올 미래의 종말론적인 빛에 비추어 지금 역사를 진단하고 보여준다. 몰트만은 이렇게 표현한다:

기독교 종말론은  인간과 세계를 빛으로 데려올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반대로 그리스도를 조명하는 세계사와 시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선한 의지로 그리스도를 조명하는 인간에 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을 세계사와 묵시문학적 사건들 중 하나로 분류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미래와 다시 오심을 날짜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은 그를 밝히 드러내 주지 못하고 역사도 그를 판단하지 못하며, 반대로 그가 시간을 밝혀 준다.23)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과 인류의 미래를 확증하는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미래를 의미하며, 이는 곧 우리에게 현재와 다른 미래를 약속한다. 기독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오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약속이 성취될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수 있다.24)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미래이며, 하나님의 미래이며, 동시에 미래를 확신할 수 있는 예표이다. 부활을 일으킨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기독교는 지금 현실과 상반되는 미래를 희망할 수 있다. 현재 역사의 어떠한 요소로도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미래를 우리는 희망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희망은 가능성이 없는 것에서 기다리는 희망이라는 의미에서 ‘희망에 반한 희망'(hoping against hope) 이라 할 수 있다.25) 기독교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토대를 둔 현실과의 모순 속에서 가지는 희망이다.

3.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신정론 이해

몰트만은 어느 신학자보다 신정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이다. 몰트만은 자신의 주요 저작들에서 부분적이긴 하지만 자주 신정론에 관해 언급하고, 최근 문학분야에서 제기된 ‘이유 없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다루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신정론에 대한 신학적 답변은 기독론적인 토대에서만이 제대로 이해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이해는 몰트만의 종말론적 신학의 토대를 이룰 뿐 아니라 그의 신학의 일관된 관점을 유지한다. 몰트만이 변증법적 관계라고 부르는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 내면에는 몰트만이 신정론에 답변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몰트만은 십자가와 부활이 가지는 근본 관계를 ‘모순’으로 본다.

몰트만은 신정론의 답변을 고대부터 내려온 신학적 문제보다는 근대에 있어 온 몇몇 문학가들에 의해 첨예화된 문제들에서 시작한다. 도스토예프스키26)와 까뮈27)가 제기한 문제의 요점은 이유 없는 고통과 죽음이 난무하는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라 믿을 수 없고, 이 세상의 창조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겠다는 분명한 ‘저항’을 표시했다. 또 아우슈비츠를 직접 겪은 비이젤은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이유 없이 교수형에 달릴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는지 반문한다.28) 비에젤의 문제제기는 서구에서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대해 몰트만의 대답은, 하나님은 죽음의 현장에서 함께 수난 당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기간에 고난받고 수난 받는 이들과 함께 했다는 것을 넘어서는 말이다. 몰트만이 이렇게 답변할 수 있는 이유를 보자. 예수는 하나님의 내어줌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겪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전적인 허무와 하나님 없음의 고통을 당했다. 십자가에서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외침은 하나님을 향한 ‘저항’의 절규였다.

시편 22편에서 해석되는 바와 같이 예수의 부르짖음은 자기 연민이나 개인적인 고통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부름, 곧 법적인 소송이다. 그러나 시편 22편의 기자와는 달리, 예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했듯이 계약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자신, 곧 아버지를 위하여 중재하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성실성에 대해 특별한 방법으로 고발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과 함께 문제에 빠진 것은 그의 개인적 실존 뿐 아니라 그의 신학적 실존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선포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버려짐과 함께 예수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성과 그의 아버지의 부성(父性)이 궁극적으로 위기에 처했다. 이와 같은 사태를 고려할 때, 십자가의 고뇌 속에 처한 것은 예수 자신만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예수가 살았고 말했던 자, 곧 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29)

위 인용은 몰트만이 죽어가는 자와 함께 하나님이 현장에서 함께 고통 당한다는 신정론의 논지의 뼈대가 된다. 그는 먼저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주장한 후, 이를 토대로 하나님이 지금도 이유 없이 죽어가는 자들의 현장에 오시고 그들과 함께 고통 당하신다고 대답한다. 즉, 그의 신정론의 핵심은 예수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신 자로서,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예수와 함께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한다.30)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가난하고 압제받는 자들과 함께 할 때, 은혜로 오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즉 그의 공생애 기간에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 속에 있었다. 동시에 하나님은 완전한 일치 속에서 예수의 선포와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하나님은 그냥 있지 않았다. 그가 예수 안에서 활동하신 것처럼 아들이 수난을 당할 때, 아버지 자신이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로 인하여 고통 당한다. 아들의 죽음 속에서 죽음은 하나님 자신에게로 오며, 아버지는 버림받은 인간에 대한 예수의 사랑 가운데에서 아들의 죽음을 고통 당한다.31) 몰트만은 이것을 내어준 아버지와 내어줌을 받아들인 아들 사이의 내적 의지의 일치성이라 표현한다. 다시 정리해 보자.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성은 아버지와 아들의 분리를 변증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가장 깊은 일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즉 아버지와 아들이 분리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일어났다. 십자가에서의 분리는 너무나 깊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 없이’ 죽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의 분리를 통해 그들은 완전한 일치 속에 들어갔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아들을 내어줌과 아들이 스스로를 내어줌으로 아버지의 내어줌을 받아들임에는 완전한 일치가 있다. 이 일치성 속에서 아들이 죽음의 고통을 겪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고통 당한다.32) 몰트만의 이런 진술은 신정론에  대한 답변은 되지만, 신학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떻게 영원하신 신성인 하나님이 육체를 가진 인간처럼 고통을 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고난을 당했다면 성부수난설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몰트만의 입장을 보자:

첫째, 몰트만은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믿는다. 그에 따르면, 전능하기만 하고 고통을 받을 수 없는 신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이런 신은 무력함과 무능함을 경험할 수 없는 신이기 때문이다.33) 그러므로 고통을 겪었다고해서 신의 완전성이 훼손 당하지 않는다. 나아가 고난받을 수 없는 신은 ‘참여’할 수 없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보다도 불쌍한 존재이다. 고난과 불의는 그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는 무감각하여 어떤 것도 그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고통받을 수 없는 자는 사랑 받을 수도 없다. 고난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은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면 그는 단지 사랑없는 부동의 원동자(原動者)로서의 신일 분이다.34) 따라서 몰트만에게 하나님이 고난 당한다는 사실은 그의 완전성과 전능함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째, 성부수난설 문제에 대해서 몰트만은 먼저 유일신론적인 사고나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기초한 양성론적 틀은 예수의 십자가 이해에 적합하지 않음을 상술한다. 그는 그대신 기독교의 가장 특징인 삼위일체론적인 접근만이 가능함을 주장한다. 몰트만은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표현한 ‘내어주다’는 단어에 관심을 기울인다(롬 1: 18이하, 8: 31-32). 즉 성부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는데, 이로서 그는 내어주는 아버지가 됨으로 그 자신을 버린다. 성부는 아들을 버림으로 자신을 버렸지만, 성부가 아들을 내어주고 버린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자신을 내어주고 버린 것은 아니다. 예수는 버림받은 상태에서 죽음을 경험하지만, 성부는 무한한 아픔 속에서 아들의 죽음을 고통 당한다. 성부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할 때, 아들과 분리되는 죽음의 고통을 당했다. 성부가 아들의 죽음을 고통 당한 것은 아들의 죽음만큼 큰 것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십자가에서 함께 고통을 당했지만, 그들이 가진 고통의 종류는 다르다.35) 즉, 아들은 아버지의 버리심을 통해 죽음을 당했고,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아들의 죽음’을 고통 당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간단히 성부수난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죽음’이라 말할 수는 없다.

위에서 본 것처럼, 몰트만은 우리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도 함께 고통 당함을 십자가의 신학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몰트만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런 토대 위에서, 신정론을 부활과 연결시킴으로 우리들을 ‘자발적 수난’으로 요청한다. 윗 장에서 보았듯이, 부활은 십자가와 극단적인 모순을 일으킨다. 십자가가 완전한 허무, 죽음, 신 없음이라면 부활은 새로운 생명의 현실, 전체성, 신의 임재이다. 몰트만은 부활을 하나님의 미래이고 우리의 미래의 확증으로 본다. 그는 이것을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완전한 절망과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이 미래는 장차 올 것의 단순한 미래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선취된 현실이기도하다.36) 그리스도의 미래는 우리에게 희망을 의미한다. 이 희망은 지금 이 현실의 가능성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고, 약속을 성취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희망이다. 하나님에 의해 실현될 미래의 현실은 지금 현재 우리가 속한 역사의 현실과는 모순된다. 하나님의 약속과 미래의 희망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둘러싼 부조리의 현실과 조화되지 않도록 한다.37) 우리는 현재의 가능성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희망을 통해 현재의 잘못과 모순에 대항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울부짖은 절규는 이 현실에 굴복하거나, 개인적인 죽음으로 순종하며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는 죄된 현실에 저항하였고,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저항이었으며, 그는 ‘저항하는 하나님’이었다.38) 이는 오늘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부조리와 모순의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보여준다. 만약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미래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는다면, 기독교인은 현재의 모순된 현실을 극복되어야 할 현실로 보게 되고 이 현실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과 그리스도의 미래가 주는 희망이 지금 모든 고통과 악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나 마지막날 하나님이 악을 완전히 물리치실 것이라는 ‘희망’이,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향한 ‘사랑’이 그들과 연대하게 한다.39) 고통받는 자들과 연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오늘의 순교자의 길이다.40) 이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고통에는 이유를 알수 없는 고통과 스스로 받아들인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고통받는 자와 연대 속에서 겪는 고통을 자발적인 고통이라 할 수 있다.41) 여기서 한번 더 부활은 자발적 고통의 확증이 된다. 우리가 자발적 고통에 스스로를 헌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새로운 미래를 반드시 실현시킨다는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을 통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함과 신실함이 확증되었다.

 

III. 평가와 정리

1. 몰트만이 신정론을 다른 주제와 분리하지 않고 기독론 구조 안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그의 신정론은 굳건한 신학적 토대를 가진다. 전통적으로 신정론이 자주 단순히 악의 근원, 고통의 이유 등을 독립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단편적인 답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뿐 아니라 포괄적인 이해를 결한다. 몰트만의 신정론은 신학적인 토대를 가질 뿐 아니라 기독론과의 연결 속에서 구조적으로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

 2. 지금까지 신정론에 연관된 많은 질문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 질문들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째는, 신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이다. 이유 없는 고통과 죽음의 현실에서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고통의 현실을 못본척 그는 부동(不動)의 신으로 존재하는가? 이는 고통의 현장에 ‘신이 임재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두 번째는, 고통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즉 고통을 받는 당사자가 아닌 다른 기독교인들은 이 고통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응답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세 번째는, 이유 없는 죽음을 겪는 당사자가 신을 향해 ‘왜’라고 던지는 질문이다. 이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죽어가는 이유를 스스로 알지 못하면서 신에게 외치는 소리이다. 이 세 종류의 질문에 따라 몰트만의 신정론을 다시 간략하게 살펴보자:

첫째 질문은 고통의 현장에 대한 신의 임재 여부를 묻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몰트만은 예수가 몸소 십자가를 겪었고, 성부도 성자와 함께 죽음의 고통을 겪는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유 없는 고통으로 죽어가는 현장에서 하나님도 함께 고통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몰트만은 아우슈비츠에서 한 어린이가 교수형을 당할 때, 하나님도 함께 교수형의 고통을 당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42) 나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몰트만의 답변은 설득력을 가진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성부의 고통을 삼위일체적으로 해석함으로 성부수난설에 빠지지 않은 것도 신학적으로 볼 때 긍정적으로 보여진다.

두 번째 질문은 고통의 현실을 마주한 기독교인들의 질문이다. 몰트만은 이 질문에 대한 먼저 예수의 십자가에서 시작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신 부재와 어두움의 현실에 혼신의 힘으로 저항하며 죽어 갔다. 이는 어두움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저항이었고, 잘못된 현실에서 인간을 해방하시려는 행위였다. 나아가 몰트만은 부활을 미래에 다가올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시킴으로 신정론을 희망과 연결시켰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믿고 희망으로 이 현실의 부조리에 대항하도록 부름 받는다. 약속을 성취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인들이 고통을 감내하며 수난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그들은 기쁘게 ‘자발적 고통’에 참여한다. 나는 몰트만이 고통의 현실을 마주한 기독교인에게 고통의 이유를 설명한데 그치지 않고, 고통의 현실을 희망으로 극복하도록 방향을 설정한 것은 신정론 논의에서 진일보 한 것으로 평가한다. 몰트만의 이런 신학적 입장은 프락시스를 강조하는 유럽의 정치신학과 남미의 해방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프락시스를 강조하는 이러한 측면은 몰트만의 전 신학에 걸쳐 나타나고 유지된다.

세 번째 질문은 고통의 당사자가 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 경우 고통의 ‘양’이 상당히 중요하다. 만약 고통의 양이 어느 정도라면, 신정론에 대한 과거의 답변처럼 고통을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 논문 서문에서 밝혔듯이, 20세기 이후의 신정론의 질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고통의 양이 과도한 경우가 문제가 된다. 수백만이 가스실에서 죽고, 민족과 종교간의 반목 속에서 일어나는 대량학살, 제 1세계의 풍요에 반해 제 3세계에서 집단 아사의 현장에서 극단적인 고통을 겪는 당사자들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신에게 질문할 때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몰트만의 신정론은 이 문제에 대해 답변을 주지는 못한다. 물론 몰트만도 이 문제를 고려했겠지만 그에게서 직접적인 대답을 찾기는 어렵다. 나는 이것이 몰트만의 신학적 한계라기보다는, 극단적인 어려움을 직접 겪지 못한 제 1세계 신학자가 갖는 하나의 문화적 한계라고 생각한다.

3. 위의 세 번째 질문과 함께 신정론의 위치를 잠시 살펴보는 것으로 본 논문을 마무리하겠다. 고통의 당사자를 향하는 세 번째 문제는 답변이 대단히 어렵다. 답변이 어려운 것은 두 가지 정도의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신앙적인 것인데, 과도한 고통 속에서도 은총을 체험하며 신앙적 자세를 가지는 사람에게는 신정론이 문제가 안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킨 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문제는 신정론에 대한 답변이 고통 중에서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가지기가 대단히 어렵다. 다른 하나는 실제적인 것인데, 고통의 당사자에게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답변은 현실적 한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고통 속에 있는 자에게는 일차적으로 그 고통의 원인이 해소되기 전에는 어떤 것도 답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어려움과 한계를 인지하면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약간의 방향을 잡아보자.

먼저, 고통의 당사자가 신앙을 상실하며 던지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기서 소브리노의 신학을 원용해 본다. 소브리노는 남미에서의 극단적인 고통과 신학적 통찰을 잘 조화시켰다. 그는 선량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현장을 많이 경험했다. 극한 고통과 죽음에 임한 기독교인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갈 때 하나님이 함께 계셨는가’였다.43) 이 질문은 위에서 언급한데로 아우슈비츠 이후 일반화되었고, 몰트만 역시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잘 답변했다. 우리는 이 질문을 신을 향한 직접적인 질문이라는 범주로 첫 질문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 같은 질문을 세 번째 질문의 범주에서 다시 다루는가? 이유가 있다. 같은 질문이지만, 이를 소브리노가 다룰 때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즉, 세 번째 범주에서) 답변이 되는 듯하다. 죽어가는 당사자들에게 소브리노는 뭐라고 답변하는가? 그는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고통을 당했다’고 대답한다. 이 대답 역시 몰트만과 같은 대답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소브리노는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이 처음에는 하나님께 고통의 상황을 제거해 주기를 기도하다가, 긴 고통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죄없이 죽은 예수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했다면 이는 곧 하나님이 자신들의 고통에도 함께 한다고 믿었다. 또 소브리노는 어떤 해방신학자보다도, 남미의 그 누구보다도 고통의 현장을 떠나지 않으면서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했다. 소브리노 자신이 고통 속에 있는 그들과 동일시 속에 있었다. 즉, 몰트만과의 차이점은, 몰트만은 먼저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를 신학적으로 논증해야 했고, 다시 예수와 현재 고통 중에 있는 자들과의 일치를 신학적으로 논증해야 했다. 그러나 소브리노에게는 이런 해석학적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예수, 고통받는 자들, 소브리노 자신이 같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일치 속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가는 자들과 소브리노의 대화는 동시성 속에 있었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고통받았다’는 대답과 동시에, 그들은 지금 그들과 함께 고통받는 그리스도와 일체감을 가졌다. 고통으로 죽어가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현재적으로 임했다.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품속에 있는 것을 알았다. 무고하게 죽은 친구와 교인들을 붙들고, 소브리노가 눈물 속에서 ‘예수가 여기 죽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44)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소브리노와 ‘그의 친구들’은 고통의 당사자였지만 최소한 그들은 신앙을 상실하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질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시성’이라는 하나의 실마리를 가진다. 고통의 당사자가 예수와 동시성을 가질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고통의 현장에서 목회자와 고통의 당사자가 어떻게 동시성을 가질 수 있고, 또 예수와는 어떻게 동시성을 가질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이는 자신의 삶의 정황 속에서 마주해야 할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풀어야 할 각자의 과제이다.

다음으로, 이유 없는 수난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겪는 실제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 문제는 단순히 말로 할 수 있는 대답의 한계를 넘어선다. 무고한 자가 가스실에서 죽어 가면서 ‘하나님, 왜입니까?’ 라고 질문할 때, 그를 당장 그 가스실에서 나오게 해주는 것 외에 다른 답변을 찾기 어렵다. 굶주린 자에게는 일차적으로 빵이 가장 훌륭한 대답이 되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여기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억울한 고통과 죽음을 기독교인들이 줄일 수 있다고 간접적으로 대답해 본다. 나는 원인을 알든 모르든, 무고한 자들의 고통과 죽음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화에서 오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이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신정론을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신정론을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 보자. 먼저 신을 향한 질문들이 신정론의 주제인지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고통의 현장에서 ‘왜’라고 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의 답변 여부에 따라 신의 정당성이 확보되며, 이 주제는 신정론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나는 이 질문이 과연 신을 향한 질문인지 재고하고 싶다. 신정론의 질문들에는 신은 전능하며, 선하시며, 모든 사물의 근원이 되시는 제 1원인이라는 신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선하신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잠재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이는 신이 선하므로 피조물과 그의 세계도 당연히 선해야 한다는 논리가 당위성을 가질 때만 유효한 논리이다. 그런데 신이 선하다는 것과 신이 만든 창조세계가 같은 정도로 선해야 한다는 것이 신학적으로 전제되고 논증될 수 있는가? 지금 이 세상은 모순과 부조화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부조화의 현실이 신에게서 기인했다고 볼 수 없다. 사랑의 하나님,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한 예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생각하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 하나님께로 비롯되었다는 것은 성서의 정신 어디와도 맞지 않는다. 악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예수가 죄된 세상에 오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우리의 죄를 극복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죄된 세상을 그냥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악이 극복될 새로운 미래를 몸소 약속하신 예증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악을 용인하지도 않았고 악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악은 하나님과의 원관계를 상실한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악독과 사악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생겼으며 이에 따른 고통과 시련은 현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굴레로 남아 있다(롬 1: 18-25). 인간의 악독에서 비롯된 모든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맡기는 것이 그의 전능함에 대한 고백인가? 술취한 운전자에 의해 한 어린이가 죽었을 때, 자신의 이익과 탐욕에 의해 무수한 사람이 희생될 때, 질병으로 죽음의 고통에 시달릴 때, 이의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돌린 후 신의 정당함을 변호해야 하는가? 많은 경우 고통과 죽음의 원인은 그것을 야기한 우리와, 또 그것을 용인한 우리에게 있다. 이제 우리는 ‘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그냥 허용하는가’라고 우리에게 질문해야 한다. 물론 직접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일로 인해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도 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우리는 현재 인간의 죄와 악독으로 야기된 모순의 현실에 살고 있다. 이 모순은 하나님 없는 삶의 모순, 약속된 하나님 나라와 현실 사이의 긴장과 갈등에서 나타나는 모순이다.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단지 우리가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지 하나님께 돌릴 문제는 아니다. 이런 종류의 무고한 자의 고통과 죽음은 어떤 직접적인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순된 현실의 총체적인 결과로 인해 파생되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무고한 자들은 우리에 의해 야기된 부조리의 총체적인 힘에 희생된 것이다. 21세기에 우리는 신정론의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보자. 고통의 현실에서 하나님께 ‘왜’라고 질문하며, 그 대답 여부에 따라 신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그런 신정론은 지나간 시대의 유형으로 돌리자. 그 대신 모순의 현실을 만들어 내는 원인들을 찾아 담대히 맞서면서, ‘왜,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허용했는가?’라고 우리에게 질문한다. 모순과 부조리가 줄어들 때, 모순의 총체적인 힘에 의해 희생되는 무고한 자의 고통과 죽음도 줄어들 것이다.

1) Cf. J. Hick, Evil and the God of Love (London: Macmillan, 1977). J. Moltmann, "Theodicy", in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London: SCM, 1983), ed. A. Richardson & J. Bowden, pp. 564-566. Hick은 위 책에서 신정론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2) 몰트만은 The Crucified God 서문과 History and the Triune God 말미에 자신의 신학적 관심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간략히 밝히고 있다. Cf. The Crucified God (Minneapolis: Fortress, 1993), pp. 1-6. History and the Triune God (New York: Crossroad, 1992), pp. 165-182.

3) J. Moltmann, The Crucified God, pp. 112-113. 역사성과 역사적 예수에만 일방적인 무게를 주면 ‘예수론’(Jesuology)이 되고, 신앙과 도그마의 그리스도에만 무게를 두면 ‘그리스도론’(Christology)이 될 가능성은 기독론 연구에서 언제나 존재한다.

4) Ibid., pp. 113-114.

5)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을 The Crucified God에서는 세 차원으로, The Way of Jesus Christ에서는 약 다섯 가지 차원으로 세분해서 다룬다. 내용으로 볼 때는 세 차원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Cf. The Way of Jesus Christ (London :SCM, 1990), pp. 160-170.

6) J. Moltmann, The Crucified God, p. 129.

7) Ibid., pp. 130-131.

8) Ibid., pp. 134-135.

9) J. Moltmann, The Way of Jesus Christ, pp. 160-165.

10) Cf. J. Moltmann, The Crucified God, pp. 138-139.

11) Cf. Ibid., pp. 138-142.

12) Ibid., pp. 143-145.

13) Ibid., p. 144.

14) Ibid., p. 146.

15) Ibid., pp. 160-164. The Way of Jesus Christ, pp. 165-167.

16) J. Moltmann, The Crucified God, p. 158.

17) J. Moltmann, Theology of Hope (London: SCM, 1967), pp. 16-17.

18) Ibid., pp. 86 f.

19) Ibid., pp. 84 ff.

20) Ibid., pp. 102-106.

21) Ibid., pp. 84-94.

22) Ibid., p. 186.

23) Ibid., p. 194.

24) Ibid., p. 229.

25) Ibid., p. 18.

26) 참고, 도스토예프스키, ?까라마초프의 형제들? (서울: 삼성출판사, 1979), vol. I. pp. 310-323.

27) 참조. 까뮈,『반항적 인간』(서울: 휘문출판사, 1977), 세계의 대사상, vol. 17. pp. 303-323.

28) Cf. E. Wiesel, Night (New York: Hill & Wang, 1960), pp. 70 ff.

29) J. Moltmann, The Crucified God, pp. 150-151.

30) Ibid., p. 278.

31) Ibid., p. 192.

32) J. Moltmann, The Way of Jesus Christ, pp. 173 ff.

33) J. Moltmann, The Crucified God, p. 223.

34) Ibid., p. 232.

35) Ibid., pp. 242 ff.

36) J. Moltmann, Theology of Hope, pp. 139 f.

37) Ibid., p. 100.

38) J. Moltmann, The Crucified God, p. 226.

39) J. Moltmann, Hope and Planning (London :SCM, 1970), pp. 49-50.

40) J. Moltmann, The Way of Jesus Christ, pp. 196 ff.

41) J. Moltmann, The Crucified God, pp. 229-230.

42) Ibid., p. 278.

43) J. Sobrino, Jesus in Latin America (New York: Orbis, 1987), p. 153.

44) Cf. J. Sobrino, Spirituality of Liberation (New York: Orbis, 1988), pp. 154-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