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생애와 사상

삶에서 우러나오는 신학

 

이신건

 

1. 끈질긴 인연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박사가 8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올해 5월에 또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지금까지 8차례 한국을 방문한 셈이니, 세계적인 신학자로서 그 만큼 한국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할 것이다. 아마도 그가 동일한 나라를 이처럼 자주 방문한 경우는 전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그의 한국 방문은 대개  한국 사람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므로 실제로는 한국 사람이 그를 더 열렬히 사랑한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번의 한국 방문은 몰트만의 요청에 응한 것이라고 하니, 어느 편이 서로를 더 뜨겁게 사랑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 사람과 몰트만의 인연이 왜 이토록 뜨겁고 끈질긴 것일까?

 

한국교회가 제각기 교부처럼 모시고 있는 신학자들, 예컨대 루터와 깔뱅, 웨슬리 등은 이미 고인(故人)이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었다. 한국교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예컨대 디트리히 본회퍼,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파울 틸리히, 루돌프 불트만은 우리 땅을 전혀 밟지 않았다. 그들의 제자들도 전무하거니와, 그들은 한 번도 한국에 초대되지 않았다. 그들의 신학을 연구한 적잖은 학자들도 그들을 한국에 초대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몰트만 아래 박사학위를 획득한 한국 사람은 모두 9명에 이르며(김균진, 이성희, 박종화, 김명용, 배경식, 이신건, 유석성, 김도훈, 곽미숙), 이들은 지금 몰트만의 신학을 활발하게 소개하고 있다. 몰트만의 주요 저서들은 이들에 의해 거의 다 번역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몰트만이 한국을 이토록 자주 방문한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인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신학이 한국 사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의 신학자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이 컸다. 바르트의 세계적 영향력은 어쩌면 나머지 학자들의 영향력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새로운 신학을 만들었다. 그의 신학을 연구한 학자들이 세계 도처에 널려 있고, 지금 한국의 조직신학자들 가운데서도 바르트를 연구한 학자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짧은 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본회퍼의 영향력도 상당히 컸다. 특히 한국의 고난의 상황과 맞물려 소개된 그의 생애와 신학은 우리에게 진한 감동과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나를 따르라』(Nachfolge)는 한국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때 틸리히의 신학도 꽤 유행을 탔고, 불트만의 신학도 논쟁 속에서 꾸준히 소개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브루너는 바르트의 그늘 아래 큰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영향력이 몰트만의 영향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제자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본회퍼를 제외하면, 그들의 신학은 대개 한국적 상황과 잘 들어맞지 않고, 때로는 사변적이거나 비역사적이다. 그래서 그들의 신학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이를 선뜻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우리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무작정 걸치는 느낌을 주었다. 바로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들의 영향력은 급속히 감소되었다.

 

몰트만 못지않게 독특한 신학세계를 구축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도 한국을 한 차례 다녀갔지만, 제자를 전혀 배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과 논리 때문인지 몰트만 만큼 폭넓은 사랑을 받지 못한다. 몰트만이 지금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것은 그가 살아 있는 유일한, 아니 어쩌면 마지막일 지도 모를 세계적 신학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신학이 책상 위에서 생산되는 사변적 신학이 아니라 신음하는 세계의 현실에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이에 진지하게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세계 상황에 눈을 감은 채, 전통의 두꺼운 담 안에서 죽은 언어들을 고루하게 내뱉는 '교조적' 신학자가 아니다. 더욱이 그는 현대인의 질문과 사상에서 해답을 찾아 성서의 증빙 문구들을 끼어 맞추는 '상황적' 신학자도 아니다. 그가 성서적 계시를 중시하는 점에서는 바르트와 유사하지만, 구체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본회퍼의 자극도 받고 있다.

 

몰트만이 남달리 우리에게 감동과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의 신학이 그 누구의 신학보다 더 강하게 '삶에서 우러나오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이번의 한국 방문 기간에 행해진 강연의 제목처럼 그는 '신학을 위한 삶'을 살았고 ‘삶을 위한 신학’을 수행했다. 그래서 그의 책은 갈피마다 인간과 피조물의 신음 소리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이 신음과 깊이 연대하는 가운데서 강력한 희망의 소리를 들려준다. 그의 출세작『희망의 신학』처럼 그는 언제나 고난을 당하는 인간에게 불굴(부활)의 희망을 선사하며, 자신의 진솔한 체험담과 문학적 표현을 통해 이 희망을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게 만든다.   

 

사람들은 흔히 그의 신학을 '해방신학' 혹은 '정치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 '자유주의적' 혹은 '좌파적'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학을 '성서적 근거를 갖는 신학', '종말론적 방향을 갖는 신학', '정치적으로 책임적인 신학'이라고 요약한다. 그는 성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그래서 언제나 성서 주석에 충실하다. 비록 그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찾고 불렀지만, 성서를 통해 그를 찾아오신 은혜의 하나님을 만났던 그는 언제나 성서에 충실하다. 그리고 그는 성서를 통해, 그리고 그 자신에게 희망의 능력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항상 종말론적 희망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성서의 종말론적 희망을 사후나 피안의 희망이 아니라 현재를 변혁하며 들어오는 미래의 힘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특히 세상과 역사에 대해 민감하고, 그래서 정치적 신학의 경향을 강하게 띄게 된다.

 

 

2. 고난 속에서 피어난 희망

몰트만은 1926년 4월 8일 독일 함부르크(Hamburg)의 자유스러운 세속적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학과 원자물리학을 전공하기를 원했다. 그의 우상은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성서보다 괴테, 쉴러의 문학 작품을 더 즐겨 읽었다. 하지만 17살이 되던 해에 전장에 투입되어 전쟁을 수행하던 그는 영국의 '고모라 작전'에 의해 함부르크가 엄청난 화염 속에서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목도했다. 수많은 동료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지옥과 같은 전장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듬해에 전쟁 포로가 되어 벨기에와 스코틀랜드에서 3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삶의 확실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던 중에 한 군목이 건네준 성서를 읽어가던 그는 성서 속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절망과 자포자기를 이겨내는 생명력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생명력을 허락한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신학 공부의 문을 두드렸다.

 

이와 같은 전쟁 체험은 일평생 그의 신학이 연대적, 현실적 특징을 갖도록 방향을 지워 주었다. 개인이 경험하는 삶의 상황은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적, 집단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음을 그는 자각하게 된 것이다. 찢기고 죽임을 당한 수많은 인간들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던 그는 결코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나 개인적 관심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포로수용소에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석방된 후에 괴팅엔(Göttingen)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브레멘-바써호스트(Bremen-Wasserhorst)라는 작은 마을에서 5년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는 논문을 완성했다.

 

그 이후 그는 부퍼탈(Wuppertal), 본(Bonn) 대학에서 교수하였고, 1967년에 튀빙겐(Tübingen) 대학의 부름을 받아 오랫동안 가르쳤고,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하여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 그는 세계의 수많은 기관 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의와 강연을 행해 왔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그도 항상 많은 자극을 받아왔다. 이번의 한국 방문 동안에도 그는 학문적 천재성과 함께 뛰어난 기억력과 놀라운 정신력을 발휘했다. 아마도 그는 꽤 오래 살 것 같다. 그래서 그가 5월 12일에 서울신학대학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님이 "하나님, 왜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까?"라고 종종 질문하셨다면, 앞으로는 이렇게 질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왜 내가 이렇게 오래 살고 있습니까?"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가 꽤 오래 산다면, 앞으로도 계속 희망의 복음을 더 힘차게 전해 주리라 믿는다.     

 


3. 위대한 유산

몰트만의 신학 작업은 세 단계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첫 번째 단계는 전체의 신학을 하나의 관점 아래서 해명한 시기이다. 그에게 일약 세계적 명성을 안겨 준『희망의 신학』(1964년)은 원래 그 당시에 활발히 논의되던 ‘약속과 역사’에 관한 토론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제시하기 위해 착수된 것이지만, 무신론적 신(新)마르크스주의자 에른스트 블로흐(E. Bloch)의『희망의 원리』(1960년)를 통해서도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블로흐의 저서를 접한 그에게는 즉각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고 한다. 왜 기독교 신학은 그 자신의 가장 본래적 주제인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오늘날 기독교에서 초대교회의 희망의 영이 어디에 남아 있는가? 그러나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몰트만이 블로흐의 철학을 계승하거나 기독교적으로 각색하려고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무신론이 없이는 메시아적 희망도 없다”고 말한 블로흐가 이를 통해 사회적 유토피아를 철학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면, 몰트만은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살려서 세계의 미래의 주님으로 삼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희망, 성서의 하나님 신앙에 기초한 기다림을 중시했고, 그 토대 위에서 정의로운 유토피아를 기대한다.

 

그에 의하면 종말론적 희망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매체요, 모든 음들 중에 주음(主音)이며, 새날의 여명의 빛이다. 그리고 희망에 사로잡힌 신앙은 불의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항하기를 시작한다. 종말론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영혼이 구원받는 것, 시련에 처한 양심이 위로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정의의 희망의 실현, 인간의 인간화, 인류의 사회화, 온 피조물의 평화이기도 한다.

 

1983년에 교황 바오로 2세가 니카라과를 방문하여 사제들에게 정치적 해방에 참여하지 말고 백성들을 영생을 위해 준비시킬 것을 권고했을 때, 몰트만은 그것이 그릇된 양자택일이라고 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영생을 믿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에 개입한다. 나는 치명적인 억압 권력에 맞서 싸우는 백성들의 저항에 참여하기 때문에 부활을 희망한다. 여기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을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신 것을 나누는 자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년)은 희망의 다른 측면, 즉 부활한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임을 회상적으로 고백하는 측면에 주안점을 맞추었다. 성공과 행운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의 고난에 눈이 어두운 문화 속에서 실패하고 고난당한, 수치 속에서 죽어간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계신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의 눈을 진리로 돌리게 할 수 있다고 몰트만은 확신했다. 그는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해석했고, 정치적 권세의 우상, 율법주의적 교권 체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버림 받은 상태를 폭로하고 죽어간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무감정한 하나님 대신에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격정(Passion), 하나님의 수난을 내세웠다. 그는 본회퍼처럼 "오직 고난을 당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아들의 고난을 통해 인류의 고난에 참여하시고 이에 항거하시는 사랑의 하나님만이 성서적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년)에서 몰트만은 십자가의 신학에서 해명된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의 역할이 적절히 강조되지 못했음을 깨닫고, 성령론을 교회 갱신의 실천 이념과 결합하려고 했다. 교회의 전통과 제도가 점점 더 적합성을 상실하는 위기 속에서 교회갱신의 기회를 간파한 그는, 새로운 성령 체험이 없다면 교회 갱신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성령론의 관점에서 성례론, 예배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새롭게 제시했다. 그리고 교회의 미래는 제도적, 목회적 교회가 아니라 자기 결단과 능동적 참여에 근거한 자발적 공동체에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이런 확신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공동체 운동에서 아래로부터 나오는 갱신의 힘을 발견한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 단계에서 몰트만은 이제 하나의 관점 아래서 신학을 기술하는 방법을 중지하고, 마르크스주의와 가톨릭 신학과 동방교회의 신학과 유대교와 대화하는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진지하게 청취하고 그들과 진솔하게 대화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신학을 확장해 나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가톨릭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 도로테 죌레와 더불어 '정치신학'을 발전시켰고,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스탈리노에 등)과의 대화를 통해 삼위일체론을 교정하려고 시도했으며, 독일인의 죄책의 근원이 되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했다. 특히 유대교의 다양한 전통과 신학, 특히 유대교 신비주의(카발라 신학 등)를 흡수하여 자신의 신학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몰트만은 다른 사람들의 신학과 대화하는 것의 한계를 느끼고, 이제는 정직하게 자신의 것을 가지고 신학에 기여하기 위해 새로운 주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년)에서 그는 서구 신학의 독재론적, 양태론적 유일신론을 배척하고 삼위일체의 통일성, 상호교통과 내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는 사회적 삼위일체를 전면에 부각하고, 일방적인 지배의 개념을 상대화, 제한하려고 시도했다.

 

『창조 세계 속의 하나님』(1985년)에서 몰트만은 생태학적 창조론을 제시했다. 여기서 몰트만은 영원한 영을 통하여 창조물 속에서 내주하고 관통하면서 교제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의 새로운 이해, 모든 지배-봉사의 구조를 상호 대화의 구조로 변화시키는 신학적 인간학을 제시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1989년)에서 몰트만은 메시아적 지평 안에서 그리스도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를 정적으로 두 본성을 가진 인격이나 역사적 인격으로 파악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하나님과 세계의 역사 과정 속에서 파악하려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순례하는 자들의 그리스도, 길의 그리스도로 나타난다.

 

『생명의 영』(1991년)에서 몰트만은 부제가 말하듯이 ‘총체적 성령론’을 전개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령을 특히 살리는 영 혹은 생명의 영, 삶의 영이라고 부른다. 그가 성령론을 저술한 것은 삼위일체의 재발견과 생명을 파괴하는 현대인의 경험 때문이었다.

 

『오시는 하나님』(1995년)에서 몰트만은 전통적, 현대적 종말론을 정리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평가하였으며, 그 동안 간과되었던 개인의 종말론까지 방대하게 다루었다. 여기서 그는 종말은 언제나 참된 시작임을 강조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우주적 내주(쉐히나)를 특별히 강조한다.『희망의 신학』으로부터 폭포수처럼 떨어진 그의 종말론적 신학은 수많은 신학의 들판을 적시며 도도히 흐르다가, 드디어 장엄한 대양 속에서 그 목표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밖에도 몰트만이 쓴 책으로는『정치신학. 정치윤리』,『과학과 지혜』,『신학의 방법과 형식』,『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생명의 샘』,『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등이 있다.  이번 한국 방문 기간에 그는『그의 이름은 정의다』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왔으며, 지금은 한참『희망의 윤리학』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 상대적으로 윤리적 입장이 약했던 그가 이 책을 통해 오늘 우리가 당면한 윤리적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 동안 몰트만에 관해 연구된 논문들이 많이 나왔으며, 단행본으로는『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환상』(G. Müller-Fahrenholz)과『몰트만의 신학』(R. Bauckham),『몰트만과 그의 신학』(한국조직신학) 등이 나왔다. 그 다음에는 또 무슨 책이 나올까 궁금해진다. 

 

4. 한국인의 영원한 친구

앞에서 말했듯이, 몰트만은 특히 한국과 인연이 깊다. 그는 암울한 유신 독재의 시기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지치지 않는 희망과 세상에 대해 책임적인 삶의 근거를 제시해 왔고, 고난을 받는 한국의 민중을 향해 깊은 정신적 연대감을 표시해 왔다. 세상과 역사에 책임적이고 피조물의 고통에 민감한 그의 신학은 기복주의, 내세주의, 개인주의, 성장주의, 자본주의 등에 치우쳐 있는 한국교회를 각성하는 예언자적 충격을 주었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고 고난 속에서 제자의 길을 실천하며 자신을 항상 갱신하도록 끊임없이 독려해 왔다.

한편으로 그는 유럽의 기독교 전통을 새롭게 되살리려고 노력해 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활기찬 모습, 정치적 저항과 고난, 한국교회의 영성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자신의 신학 안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의 신학은 특히 민중신학, 여성신학, 오순절신학(조용기) 등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비판적인 목소리도 분명히 들려준다.

몰트만과 한국 그리스도인은 깊은 사귐과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함께 성장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짧게 만나 영원히 보내야 하는 그의 뒷모습이 참으로 아쉽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영원한 친구다. 그가 애타게 갈망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히 임할 때, 나는 그에게 물어볼 것이다. 선생님이 그리워하시던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 나라입니까? <기독교사상 2009년 6월호 게재>

 

수정보완할 내용

 

기독교사상의 편집장으로부터 매우 급하게 원고청탁을 받은 후에 원고를 부랴부랴 작성하다보니, 원고 게재 후에 사실과 다른 문장이 발견되어 아래와 같이 바로 잡습니다.

 

-> 감신대 학장을 지내신 윤성범 박사님은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칼 바르트에게 직접 배우셨고, 그분의 제자로서 『칼 바르트』(대한기독교서회)라는 최초의 바르트 연구서를 남기셨다. 다만 그분은 바르트의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급속히 떠나서 토착화 신학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분은 그것조차 바르트의 신학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신 것으로 기억한다.(박봉랑 박사님이 쓰신 『신학의 해방』에 나오는 두분의 논쟁을 참고). 그리고 에밀 부르너는 일본을 거쳐서 한국 땅을 한번 밟으셨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이라 잘 알지 못했다. 아쉽게도 그분의 제자와 그분의 학문을 연구한 학자들은 거의 전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