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 자서전

 

 

 

박영식
경산 좋은교회 담임. 독일 베텔신학대학(Dr. theol. 조직신학)

 

 



몰트만 교수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인 신학자이다. 그러나 우리 중 다수는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또한 그의 신학을 깊이 연구한 분들은 더러 있지만 그 분 곁에서 생활하신 분은 비교적 적고, 그 분과 직접 친분을 가진 분이라 해도 그 분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면밀히 알고 있는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몰트만 교수가 직접 자신의 삶과 신학의 여정을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들려주니 무척이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살아온 시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다. 더구나 세계적인 신학자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은 그가 살아온 한 시대의 신학 전체를 살펴보는 것이어서 감격스럽다. 『몰트만 자서전』은 몰트만 교수 개인의 농도 짙은 신학적 삶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시대의 치열했던 신학적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안내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자서전적 신학(autobiographical theology) 또는 신학적 자서전(theological autobiography)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도 좋다. 나는 그동안 알고 있던 그 분의 신학에 대한 개인적 사색을 여기에 펼쳐놓기 보다는 이 책에 소개된 몰트만의 신학여정을 그대로 따라가고자 한다.


몰트만의 자서전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장면은 그가 독일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5년간 포로생활을 하며 경험했던 지옥 같은 고통의 경험들이다. 그는 “죽은 자들의 얼굴이 나타나 창백한 눈으로 노려”보는 꿈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했던 자신의 포로생활을 얍복 강가에서 외롭게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의 체험에 비유한다. 전쟁포로라는 실존적 상황은 그에게 굴욕감을 줄 뿐 아니라 독일 나치의 만행으로 인해 더욱 수치심과 자괴감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처럼 버림받은 예수의 얼굴과 더불어 자신의 버림받은 영혼을 향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거기서 만나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인간적인 사랑과 한 마음씨 좋은 군목이 건네준 성서를 통해 그의 고통과 버림받음은 용서와 희망으로 점차 변해간다. 그가 이해하고 그를 이해해 준 예수를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제요, 나와 함께 이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는 길동무요, 나의 고난을 지고 가는 친구다.” 나는 몰트만의 이 체험을 그의 신학함의 근원적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삶에 뿌리를 둔 이 구체적인 경험은 몰트만의 신학에 항상 전제되어 있다. 버림받은 자를 찾아오시는 버림받은 예수와의 사귐 안에서 그는 죽음과 지옥의 경험을 부활의 삶으로 전환시키는 희망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몰트만은 포로생활 중 영국의 노튼 캠프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며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후로 50년이 지나 다시 포로생활을 하던 옛 장소에서 그는 시편 30편 11-12절(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을 본문으로 설교하며 자신의 포로생활 중 만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한다. 


몰트만이 자신의 위대한 신학적 스승들 예컨대 폰 라트, 에른스트 볼프, 귄터 보른캄, 한스 요아힘 이반트, 요아힘 예레미아스에 대해 회고할 때 나는 한껏 부러움에 사로잡히는 한편,  훗날 아내가 될 엘리자베트 벤델과 사랑을 키워가는 장면을 묘사할 땐, 나도 모르게 설레기도 했다. “나는 엘리자베트 벤델을 사랑하게 되었다. ... 사랑은 함부르크 기차역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갈 때, 나는 그녀의 가방을 들어 주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두 시간 후에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고, 지금까지 이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68-69) 많은 저서를 썼지만 그 어디에서도 말하지 못했던 이 아름다운 장면을 몰트만 교수는 아마 이 책을 집필하면서 아내에게 슬그머니 보여줬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이들의 초라하게 시작한 신혼생활과 첫 목회지의 활동은 우리의 그것과도 별다름이 없어 보인다. 어쨌든 벤델과의 만남과 더불어 향후 몰트만 신학에 가장 중요한 만남은 다름 아닌 에른스트 블로흐와의 만남일 것이다. 블로흐는 골초였고, 무신론자가 아니냐는 몰트만의 질문에 “나는 하나님 때문에 무신론자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신론자였던 블로흐는 첫 번째 부인의 비석에 요한계시록 3장 5절을 새겨 넣었으며, 그의 책상에 놓인 부인의 사진 뒤에도 이사야 35장 10절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몰트만은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에 먼저 매료되었고 그 후 그와의 개인적 만남과 비판적 대화를 통해 “구약성서의 약속의 역사와 신약성서의 부활의 역사를 토대로 “신학적인 희망의 원리를 추구”해 나갔다.


당시 몰트만의 신학의 중심축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폰 라트의 구약성서적 약속신학과 케제만의 묵시문학 연구, 그리고 네덜란드의 사도적 신학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되어 예수의 부활을 희망의 근거로 하는 신학적 대작으로 탄생한다. 이렇게 해서 『희망의 신학』(1964)의 원고가 완성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을 때, 그의 아내 엘리자베트는 『희망의 신학』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기대와 떨림으로 두 개의 촛불을 밝혔다고 한다. 희망의 신학의 대성공으로 몰트만은 환영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신학적 논의의 키워드가 되었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의 세 가지 핵심적 개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개념. 2.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생각하는 것. 3.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로 이해하는 것.”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 대한 개인적 반응 - 판넨베르크, 리꾀르, 메츠, 라너, 발타자르, 헨드릭 베르코프와 칼 바르트의 비평 - 과 슈피겔에 실린 비평을 꽤 자세히 소개한다. 특히 내게 바르트의 논평은 흥미로웠는데, 바르트는 희망의 신학을 열린 마음으로 읽으면서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나는 그의 견해를 따르기를 주저했다. 왜냐하면 이처럼 새로운 체계가 - 많은 점에서 동의할 수는 있겠지만 - 진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희망의 신학 이후에 이어지는 그의 정치신학(제5장)에 대한 언급에서 몰트만의 첫 번째 한국방문(1975년)에 대한 회고가 눈에 띤다. 그는 한국의 선교와 기도에 대한 열정을 독재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 이해했으며 이러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독일의 고백교회의 경험과 연관시켰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복음을 향한 투쟁에 대해 “선교 현장과 감옥 안에서 그들이 겪었던 복음의 경험은 다른 나라의 교회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한국교회와 신학을 향한 그의 기대와 애정이 느껴진다.


몰트만의 책 중에서 한국의 교회와 신학에 가장 사랑받았던 것은 역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이 아닌가 한다. 신앙이 고통의 피난처가 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앞서 언급했던 몰트만 자신의 지옥과 같은 어두운 삶의 여정과 그의 하나님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신정론과는 무관하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세계의 고난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골고다 사건 이후, 곧 아우슈비츠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몰트만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십자가 신학은 희망의 신학보다 더 오래된 관심사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비밀”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자신의 고난과 죽음의 경험으로 동일시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을 주제로 한다. 연이어 몰트만은 자신의 십자가 신학에 대해 칼 라너를 비롯하여 메츠, 한스 큉, 그리고 도로테 죌레가 제기한 중요한 신학적 비평에 답한다. 몰트만은 자신의 신학적 사유로 인해 세계 각처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관심과 주제를 전달할 뿐 아니라 다양한 신학적 흐름을 자신의 사유 속에 수용한다. 그러한 결실 중 하나가 바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라고 할 수 있다. 몰트만은 십자가 안에서 그리고 예수와의 우정 안에서 고난당하는 민중과 장애를 가진 자들과 친구가 될 수 있으며 교회의 일치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몰트만은 언제나 신학과 현실 양자를 가교하며, 신학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을 통해 신학을 개방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또한 그는 각종 학술지의 편집위원으로, 그리고 개신교 학회장으로 활동했던 자신의 이력에 대해서 소개하며, 자신이 영향을 끼치고 동조했던 해방신학이 자신에게 가했던 비평에 대해 다소 씁쓸했던 경험도 내비치고 있다. 몰트만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화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신학이 ”유대교의 쉐히나 신학과 안식일 신비주의와 인식일 율법 제정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대화란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고 상대방에 동조하는 것을 뜻하지 않듯이, 몰트만에게서 ”이스라엘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자는 말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새롭게 인식하자는 말“을 의미했다.


1980년부터 몰트만은 “신학을 위한 조직신학적 기여”라는 시리즈를 기획하여 “분명한 체계적 순서에 따라서 중요한 신학 교리를 다루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몰트만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소위 보편적인 신학을 전개하거나 기존의 교리들을 옮겨놓은 교리서나 교과서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길 위의 신학“ ”시간 속의 신학“이라는 표현 속에 함축되어 있듯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길로 초대하는,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제안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첫 걸음은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1980)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으로 시작된다. 삼위일체론은 그저 이론적이고 사변적일 뿐이라는 비판은 순환적(perichoresis) 사고에 토대를 둔 그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으로 인해 이제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 이러한 순환적 삼위일체론적 사고는 기포드 강연을 책으로 묶어 출간한 『창조 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1985)과 총체적 성령론을 전개한 『생명의 영』(1991)까지 이어지며, 그의 신학적 창조력은 계속해서 새로움의 빛을 발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신학에 대한 그의 평가는 정당하다. ”진보란 항상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의 신학 작업에도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몰트만의 신학은 그와 함께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젊어진다. 60세 이후에도 그는 여행과 강연을 통해 세계의 현실과 살아있는 대화를 지속하며, 새로운 주제를 신학화 한다. 그는 로마의 그레고리아나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가르쳤고, 아메리카 평화대회에 참여하여 지미 카터와 함께 주제 강연을 하며, 세계의 평화촉진을 위해 정치인과 신학자가 서로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싱턴에서 자연과학자들과 정치인들이 함께 하는 환경정책 모임에도 참여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1989) 이후 『생명의 영』(1991)과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생명의 샘』(1997)을 출간하여 사회에 만연한 감정적, 사회적, 생태학적, 묵시적 허무주의에 대항하여 생명의 문화를 창조하고 살림의 영이신 성령과 현실적 경험들을 연관시키는 작업을 시도한다. 은퇴 이후에도 그는 “마지막에 나의 시작이 놓여 있다”는 엘리어트의 시를 떠올리며 여전히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듯하다. 고령의 나이에도 그는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희망의 신학』을 강연했고, 아시아 여행을 통해 목도한 조상숭배라는 동아시아의 문화를 신학적으로 사유하며, 이를 우상숭배로 여겨 배척하기보다는 “한국에서 그러하듯이, 기독교적인 부활희망으로부터 조상숭배의 독특한 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제언한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삶의 이야기를 튀빙엔의 친구들과 함께 했던 우정 어린 기억들로 마무리한다.


몰트만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자신의 신학만큼이나 그가 새로움에 개방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아마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는 “놀랐다.”라는 표현일 텐데, 그만큼 그는 현실을 어린아이처럼 순박한 호기심으로 반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포로수용소의 암울한 기억 때문에 자기머리를 쥐어뜯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시는 희망의 숨결 속에서 삶을 기뻐하며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버림받은 그에게 다가와 자신을 친구로 맞아준 예수와의 우정으로 인해, 그는 약하고 힘든 자들에게 언제나 친구가 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후기」에 그는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심판자가 될 필요는 없다. ... 초기의 죽음의 경험 이후에 내게 삶은 항상 놀라운 선택이었으며, 모든 아침이 즐거운 놀라움이었다.”고 기록한다. 나는 그의 자서전을 읽는 동안, 삶은 본질적으로 즐겁고 놀라운 것, 축제라는 사실을 배웠다. 끝으로 나는 궁금했다. 우리말 번역본으로 500쪽이 넘는 분량의 글을 도대체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감사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회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가깝고 먼 삶의 공간에서 나와 결속된 모든 사람을 위해 이 삶의 이야기를 썼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을 손에 받아들고 있는, 내가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나는 이 책을 썼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나는 고백한다. 이 책을 쓰는 동안에 나는 오직 이야기하는 즐거움과 쓰는 기쁨만 느꼈다.”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오직 즐거움과 기쁨만을 느낄 수 있는 그는 이제 은총의 빛을 통과하여 마치 영광의 빛 앞에 서 있는 듯하다. 우리말 번역본의 표지사진 속의 몰트만 교수는 또 다시 즐겁게 더 넓은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그 분은 진정, 영원한 희망의 신학자로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기독교사상 2011년 10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