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신학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세계 석학 초청 국제학술대회

 

 

일시: 2012년 5월 1-3일 /장소: 존 토마스 홀 / 강사 : 위르겐 몰트만

 

 

<강연 요약>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5월 1일)


사랑은 가장 강렬한 생명 경험이고, 가장 강렬한 하나님 경험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기쁨이 있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에 분열이 일어난 것은 자기 사랑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다면, 인간이 베푸는 최상의 도움과 업적도, 최고의 종교적 감정과 가장 영리한 인식도 공허하다.”고 말한다.

생명 사랑은 죽음 사랑으로 변질될 수 있다. 죽음 사랑은 오늘날 테러리즘과 핵무기 위협과 빈곤(빈부격차)의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사랑의 결핍은 하나님의 결핍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사랑과 관계되어야 하는가?

나는 전쟁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 사랑을 경험했고 새로운 생명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찾아오셨다. 나는 이것을 세 단계로 기술하고 싶다. 1) 예수는 사랑이 없는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온다. 누구든지 예수를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만난다. 2)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자기희생의 죽음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계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다. 3)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변화시키고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계시한다.

생명, 곧 이웃의 생명, 공동의 생명 그리고 이 땅의 생명을 사랑할 때,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화답한다. 개인의 생명, 사회적 생명 그리고 정치적인 생명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할 때, 우리는 이 모든 생명들을 거룩하게 한다. 어떻게 인간의 생명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 1) 인간은 수용되고 긍정되고 존중될 때, 생명력을 갖게 된다. 2)  다른 사람의 생명에 참여할 때, 인간은 생명력을 갖게 된다. 3) 행복과 하나님을 찾을 때, 인간은 힘을 얻는다.



2.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입니다.(5월 2일)


정의는 하나의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정의는 사랑보다 더 합리적이다. 정의는 사회적인 것이며, 불의한 사회의 균형을 창출한다. 정의는 조화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열쇠이다. 불의는 인간을 화나게 만들고 국민의 정당한 분노를 유발한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이 일어나고, 전쟁이 발발한다.

나는 이 강연에서 서로 분리되어 발전되어 온 상이한 정의 개념들에 대해 고찰하고, 예수가 말한 “더 나은 정의”에 도달할 것이다.

1) 신들의 법(희생제물)의 종교 : 현대세계 이전의 종교적 국가들의 시민들은 국가의 신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숭배해야 했다. 신들에 대한 불순종, 공적인 희생제의에 불참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고, 백성들이 생명을 부지하도록 하기 위해 신성모독을 범한 자들은 죽임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희생제물의 종교들은 성서를 통해 거부되었다. 희생제물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화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부인하고 불법을 자행하는 세상과 자기의 화해를 이루신다.

2) 역사의 법칙(카르마와 구약성서) : 인도의 카르마(업보) 이론과 구약성서의 지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우리의 행위의 필연적 결과로 본다. 모든 행위는 정당한 결과를 가지며, 이 결과를 통해 우리의 행위는 보응을 받는다. 하나님은 역사의 내적인 질서를 통해 이를 행하시며, 이를 통해 세계를 보존하신다. 선한 것은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은 악한 것을 그 결과로 가진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코 역사적 응보(보복)의 법칙에 대한 근거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카르마를 반박하며, 행위와 결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깨뜨리신다. 끝없는 응보(보복) 대신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창조하신다.

3) 상호성의 법칙(공자와 모세) :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정의의 윤리를 위해 예로부터 상호성이 그 기초로서 제시되었다. 응보는 보복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상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가진다. 상쇄를 통해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이 보장된다.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천상의 법질서로 간주되기도 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정의로운 재판장으로 생각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정의의 해”(말 3:20)로서 경배를 받으신다. 하나님의 정의는 모든 생명을 돌보신다. 하나님의 정의는 위험으로부터 건지고 상처를 치유하며, 폭력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공의를 세운다. 예수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용서를 가르친다. 예수는 우리에게 창조적이고 앞서오며 생명을 장려하며 바르게 회복하는 정의를 가르친다. 바울도 하나님의 창조적인 정의를 가르친다. 이러한 정의 안에서 우리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갖게 된다.


 

3. 평화의 하나님(5월 3일)


나는 이 강연에서 영혼의 문제와 함께 시작하고자 한다. 하나님과 우리 영혼의 평화가 없이 우리는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내적으로 평화를 얻은 사람만이 그가 살아가는 주변 환경 속에 평화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1) 영혼의 평화 :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영혼의 평화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죄책에 시달릴 때, 죄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한 불법과 폭력으로 인해 영혼이 병들고 상처를 받았을 때, 영혼은 그가 당한 굴욕감과 함께 자기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이리하여 죄가 영혼을 지배하게 된다. 악을 범한 자들은 자기 자신과의 평화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죄의 용서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십자가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희생을 통해서다!

하지만 죄의 용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구원의 절반에 불과하며, 나머지 절반은 부활하였고 의로운 삶에 있다. 우리는 용서를 경험한 죄인인 동시에 부활의 영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인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평화이다. 죄의 용서는 과거를 향한 하나님의 행위라면,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은 앞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이다. 화해는 적의에 찬 과거를 종결시키며, 생명으로의 부활은 새로운 미래의 시작이다.

2) 평화의 정치 : 이제 나는 평화의 정치를 위해 기독교가 기여할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힘은 생명을 강하게 하고 고양시키지만, 폭력은 생명을 침해하고 파괴한다. 선한 힘들이 악한 폭력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다. 죽음의 폭력이 생명의 힘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불안이 서로에 대한 신뢰로, 서로에 대한 위협이 공동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데 있다. 오늘 우리 인류가 살아남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 불안을 버리고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 폭력을 감소시키고 생명의 힘들을 증대시켜야 하며, 군사적 대결을 철폐하고 시민들의 협동을 구축해야 한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9). 이 말씀은 평화로운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예수에게 원수 사랑을 뜻한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첫째 가능성은, 우리 자신이 우리 원수들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친구와 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버리는 치명적인 사고의 포로가 된다. 둘째 가능성은 우리의 원수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와 나 사이에 발생한 원수관계를 극복하는 일이다. 이 때 우리는 서로 간의 신뢰를 구축함으로써 원수들을 우리와 함께 일하는 친구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두 번째 길은 평화를 세우는 자들의 길이다.

어떻게 인간의 영혼 안에서 원수 사랑이 가능한가? 첫째 단계는 원수관계에 대해 원수관계로 반응하지 않고 새로운 공생을 창조하는 것이고, 둘째 단계는 나와 다른 타자를 인식하는 것이며, 셋째 단계는 원수관계가 일어나게 된 동기를 인식하는 것이다. 예수가 가르치는 원수사랑은 마음의 윤리가 아니라, 책임의 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