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와의 대담

사회: 박종화 목사

2000년 5월 19일, 국민일보 사옥 12층

 

 
신학자와 목회자의 만남


박종화 : 21세기를 새로운 영성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한국교회와 신학을 주도해온 월간 기독교사상 은 "21세기 영성"을 특집으로 정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이를 분석하고, 미래를 수놓은 기독교 영성의 진면목을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정말로 귀한 두 분을 모시고 영성 대담을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특히 영성 설교자로 이름 높으신 조용기 목사님과 영성 신학자로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시는 몰트만 교수님을 모시고 대담을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신학과 목회현장을 연결하는 고리로서도 영성은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두 분의 진솔하고도 실질적인 대화를 통하여 한국교회와  기독교사상  독자들에게 귀중한 말씀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몰트만 교수님께서는 한국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번 한국 방문의 계기는 어떤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몰트만 : 이번 한국 방문은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와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초청을 받고 국제신학 학술세미나에 주강사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계기로 자주 찾고 싶었던 한국의 여러 신학대학에서도 강연을 할 수 있었고, 또 보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교계 지도자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95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당시 박종화 총무)의 초청으로 성서연구 중심의 기념강연을 위해 내한했다가 일정 가운데 조용기 목사님과 '십자가와 부활'의 현실적 경험과 신학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조용기 목사님의 성령운동과 신학적 입장을 잘 알고 싶었는데 그때 나눈 대화가 너무도 인상적이었고 또 유익했었습니다.

조용기 : 사실 지난 95년 몰트만 교수와 첫 대면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분의 신학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 이분은 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목회경험을 풍부하게 하신 분이고 특히 히틀러 치하에서 연합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심오한 신앙체험을 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기에 만남 자체가 참 기쁘고 유익했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서로 약속한 게 있어요. 우리가 한 번 초청할 테니 다시 한국을 방문하겠느냐고 제안했더니 기꺼이 오시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번 5월 국제신학학술세미나에 주강사로 초빙하게 된 것이지요.

 

한국교회 영성의 현주소


박종화 : 이 정도면 서론은 된 것 같습니다. 이미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을 두 분이 대담으로 논의한 바 있으시어, 이제는 곧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영성'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95년 당시에도 제가 대담 사회를 맡았었는데, 이번 대담의 사회를 다시 맡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자, 그럼 먼저 조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의 영성생활이나 영성운동의 현주소가 어떠하다고 보시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토론을 위해서 개개인의 영성보다는 교회의 영성을 주로 다루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의 모습을 하나씩 살피면서 영성 문제를 풀어갔으면 합니다. 영성하면 먼저 '거룩한 신앙생활'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조용기 : 저는 먼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사역 자체가 바로 영성 그 자체였다고 봅니다.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악의 근원인 사탄의 세력 내지 사탄의 문화를 몰아내고 슬퍼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시고, 병을 고치시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고,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시고, 짓밟힌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바로 이런 일이 영성 실천이고, 그것이 진실된 의미에서의 '거룩함'이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거룩함이 상당히 오해 내지 곡해되고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더러운 속세를 등지고 홀로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고 찬송하다 산 아래에 내려와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 없는 신앙을 가지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 속에 파고들어 복음을 헌신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거룩한 삶을 구체적으로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영성입니다.

몰트만 : 그렇습니다. 지금 조 목사님이 말씀하신 왜곡된 거룩성은 유럽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똑같아요(모두 웃음). 예외가 없군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용서, 용서받고 헌신적으로 복음을 위해 사는 자들의 삶, 그것이 바로 거룩함이겠지요.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같은 죄인이고, 같이 용서받아야 하는 거죠. 거룩한 공동체는 죄인들의 공동체요, 죄사함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요, 헌신적인 공동체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예배를 통한 영성

박종화 : 좋은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정교회에서도 먼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에서 거룩함을 찾더군요. 예배의 삶이 거룩하다면, 예배 다음에는 무엇이 오느냐, 세속적 죄된 삶이냐 추한 타락의 삶이냐. 아니다. 거룩한 예배 다음에는 거룩한 삶이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는 거룩함과 세속이 하나로 되어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 살면 거룩한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래서 예배 다음에 오는 삶을 가리켜 '예배 다음의 또 다른 예배'(liturgy after liturgy)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는 거죠. 말하자면 예배 속의 거룩함과 생활 속의 거룩함이 신앙적 일치의 근본이라는 말이죠. 바로 이 점을 한국교회도 성실하게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몰트만 : 그렇죠. 일상생활 자체가 거룩해야겠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일기장과 달력이 사실은 예배서라 해야겠습니다(모두 웃음). 삶 전체의 거룩함이 핵심이니까요.

조용기 : 저도 동감입니다. 거룩함을 예배행위에만 국한시키면 안 된다고 봐요. 음식을 먹으면서도 주님의 삶을 생각하고 일하러 가면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정치를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 안에서는 성과 속이 따로 없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예수의 삶이 바탕으로 뿌리내리는 것이 거룩한 생활의 요체라 봅니다.

몰트만 :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다만 예배가 정교회가 말하는 통전적 의미로서의 예배로 이해될 때, 혹시 개신교의 경우 예배 형식의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들이 없을지… . 예전 문제에 부딪치면 갈등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갈등은 외형적인 것 때문에 발생한 것이므로 참 예배가 근간이 된다면 당연히 극복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확고한 사고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가 되는 예배라면 말이죠.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영성

박종화 : 이제 교회의 영성과 관련하여 또 다른 영역이 있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자 동시에 '보편적'(catholic) 교회라 일컬어지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의 우주적이며 실천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바로 개체 교회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지역의 개체 교회(a local church)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우주적 교회(a universal church)가 되어야 한다는 점인데요. 특히 오늘의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면서 '세계화'(globalization) 과정을 밟고 있는데, 세계화의 현장은 바로 지역이요, 그 과정은 지역화(localization)라는 말이죠. 이 양자의 관계는 바로 교회의 위상과도 직결된다고 봅니다. 다 아시는 대로 1983년 캐다다 벤쿠버에서 모였던 WCC 제6차 총회에서는 신앙 영성 내지 기독교적 사고와 실천의 틀을 "생각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에서 구체적으로"(Think globally! Act locally!)라고 잡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개교회, 개체 교파는 자기 나름대로의 교리적, 제도적 특수성을 유일한 것으로 보편화하는 우를 범치 말고, 보편적 교회를 자부하면서 구체적인 지역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 실천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몰트만 : 물론 저도 동감입니다. 그런데 꼭 풀어야 할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의 보편성이란 우주적이며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원형은 교회를 '새로운 이스라엘' 또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라 이름하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자동적으로 되는 게 아니다. 복음을 들고 세계의 산재한 백성들에게 나아가고 그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목시킨다는 뜻에서 보편성을 말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말을 장로교회의, 천주교회의 또는 어느 교회의 보편적 생각과 동일하게 쓰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보편성은 세계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구현한다는 선교적 의미에서 보아야 합니다.

박종화 : 그렇군요. 그렇다면 교회의 보편성 문제를 한국교회의 경우와 접목시켜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예를 들어,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하나의 개교회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계적 교회로서의 자태를 지키려 할 것입니다. 예배, 선교 사역, 봉사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사회와 세계 인류의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조 목사님 보시기에 그 실상은 어떻습니까?

조용기 : 우리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세계 구원이라는 우주적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현주소는 실질적인 한 지역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는 하나이고, 하나님께 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지역마다 다양한 교회가 존재합니다. 사회적, 역사적 실체로서 말입니다. 일종의 다양성이죠. 저희 순복음교회는 모든 교파가 가지고 있는 교리상의 장점들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로교회가 말하는 예정론을 수용합니다. 아주 다양한, 그리고 풍부한 그릇이라고 자부합니다만  .

박종화 : 일종의 용광로라는 말이군요(모두 웃음).

조용기 : 그렇다고 해두죠. 성령을 좇다 보니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모두 지니려고 하나 봐요. 하지만 성령 안에서 서로 돕고, 서로 끌어안고, 서로 아끼고   하는 성령의 영성 말입니다.

 

일치와 화해자로서의 교회의 영성

몰트만 : 저는 하나님께서 갈라진 교회들의 분열을 치유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핍박받는 교회들의 일치라고 봅니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히틀러 나치 치하에서 박해받던 교회들은 손쉽게 에큐메니컬 일치를 이루어 '고백교회'로 뭉쳐 반나치 투쟁이라는 정치적 영성을 실천한 바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문화혁명 때 핍박받던 교회는 지하로 들어가 가정교회를 이루며 생존했으며, 그 일이 있은 후에는 하나의 중국교회로 그 모습을 이루고 있습니다. 함께 고충을 받음으로 믿음의 한 형제, 자매라는 일치 의식이 실존적으로 싹트게 됩니다. 분열을 극복해 나가는 바탕이 됩니다.

박종화 : 지금 말씀하신 대로 고난받는 자들과의 연대, 예컨대 연대의 영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근자에 와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한 지주로서 역할을 담당합니다. 신앙을 함께, 희망을 함께, 사랑을 함께 하는 공동체적 결속을 통하여 바로 우리는 보편적인 교회로서 국경과 교파와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 행동하는 신앙 양심으로서의 일치를 경험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한국사회를 보더라도 남북간의 분단의 아픔을 남북이 서로 나누어짐으로써 민족이 하나임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유하는 일, 곧 분단 극복이 말하자면 '정치적 보편성'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또 우리 사회에는 지역갈등이라는 아픔이 있습니다. 이 차별 속에는 분노와 적대감이 자리합니다. 몸이 십자가에서 찢김을 당하는 아픔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보편성'이라 말해도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바로 이런 분단의 아픔과 차별의 아픔에 잉태하면 고난의 나눔의 공동체로서 나아가 고난의 원인을 극복하고 화해된 공생을 가능케 하는 희망의 나눔의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여기서 영성을 분명히 '공동체적 영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즉 함께 사는 공생적 영성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몰트만 : 사회자의 말에 동의합니다. 사실 어제 이곳 순복음교회 주최 국제신학학술세미나에서 보니까 참석자들의 출신 교파와 신학 노선이 아주 다양함을 느꼈습니다. 그만큼 세미나의 폭이 넓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다양성 속의 일치 추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공동체란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조용기 : 그렇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 순복음교회는 폭이 넓습니다. 여기 '순'자가 바로 이런 에큐메니컬 개방성과 동시에 순수성 및 통전성을 의미한다고 보고 또 그렇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도적 교회로서의 영성

박종화 : 이제 교회의 영성의 문제 중에 다루어야 할 영역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사도적 교회'의 모습 속에 담긴 영성 문제입니다. 사실 '사도성'의 문제는 그동안 많은 오해와 아전인수식의 잘못된 해석 때문에 논란이 많았습니다. 사도성을 사도적 전승과 사도직 계승이라는 교직 질서 차원으로 보는 것이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과정에서도 '교황직' 문제를 비롯한 사도적 전승의 문제가 사실은 일치를 가로막는 중요한 직제상의 암초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절대권위를 지닌다는 교황의 '무오설' 역시 장애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도직의 문제는 위계질서 차원이나 권위 전승의 차원보다는 오히려 복음을 전파할 책임과 축복을 동시에 받은 '선교적 사명'으로서의 사도직 차원에서 토론되어야 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사도적 영성이란 바로 선교적 영성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989년 미국의 산 안토니오에서 모였던 WCC의 세계선교대회가 '그리스도 방식에 따른 선교'(Mission in Christ's Way)를 주제로 삼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 식대로의 선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방식대로의 선교가 핵심이고, 그것이 전수되어야 할 핵심사항이라고 봅니다. 사도적 사명 역시 크게 보아 선교적 사명임에 틀림없다고 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대선교명령(마 28:20)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몰트만 :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사도성은 사도직의 계승(apostolic succession)이 핵심이 아니라 사도적 사명의 계승이 중요합니다.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교회의 사도직 계승론은 위계질서 내지 지위가 아니라 사도직이 지니는 선교적 사명의 변치 않는 계승이어야 합니다. 개신교도 복음서와 서신서들을 기록한 사도들의 기록인 성서의 권위를 교황직의 권위 대신에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직이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사명의 상징이라는 점입니다. 가룟 유다의 후임을 투표로 선출한 것도 빈자리만 채우는 선거나 위계질서에 따른 권위의 임명이 아니라 민주질서의 한 단면이고, 사도직 자체가 선교적 사명의 직분이라는 점에 핵심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근대에 와서 회켄다이크를 비롯한 화란의 신학자들과 교회가 사도직을 선교직으로 강조하면서 '평신도의 선교적 사도직'을 강조한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만큼 선교사명으로서의 사도직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럽의 교회, 특히 저희 독일교회는 선교적 직책으로서의 사도직 또는 사도적 선교영성의 과제가 아주 빈약한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저희 튀빙겐 대학교 신학부 교수직 가운데 선교신학 교수직 후임을 채우는 일에 학교당국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는 선교에 대한 관심 저하 때문입니다. 오히려 비교종교론이나 타종교와의 대화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직으로 바꾸자는 거예요. 선교적 관심의 후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실례입니다. 큰일이죠.

조용기 : 듣고 보니 정말 큰일이군요.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 서구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문명' 또는 '예수가 빠진 예수교회'에 침몰해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입니다. 제가 덴마크에서 경험한 한 토막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펜하겐 공항에서 마중 나온 자가용을 타고 호텔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운전 기사에게 물었죠. "이곳은 크리스천 숫자가 많지요?" 이랬더니 자기들은 나면서 모두가 크리스천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재차 물었죠. "그럼, 당신은 크리스천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습니까?" 그랬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이러더군요. "그 양반 혹시 한국사람 아닌가요?"(일동 큰 웃음) 기독교 문화에 몸담고 살면서 그리스도를 잃은 사람들 같아요.

몰트만 : 그래요. 사도적 선교의 문화를 잃어가고 있다고 봐야죠. 그런데 그 덴마크가 배출한 위대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미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어떻게 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이지요(일동 웃음).

 

선교의 바람을 일으키는 영성


조용기 : 그런데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면 서구라파도 위로 받고 일어서야 한다고 봐요. 성령이 예루살렘에서 바람을 일으켰잖아요. 그 바람을 들고 예컨대, 도마가 동쪽 인도로 갔지만 별로 큰 효과를 일으키지 못했어요. 성령은 동쪽보다는 서쪽을 더 크게 보신 것 같아요. 말하자면 사도 바울도 복음을 들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예루살렘에서 마케도니아로, 로마로 전진했어요. 그후 그 성령의 바람은 서구 대륙을 휩쓸고 신대륙 미국을 휩쓸더니 이제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로, 그리고 이제는 한국 땅으로 불어닥치는 것 같아요(웃음).

몰트만 : 서편으로만 불진 않았어요. 남쪽으로도 많이 불었어요. 예컨대, 마가는 성령의 바람으로 에디오피아, 이집트 등지로 향했죠. 이런 지역이 지금은 정교회 중심지가 되었지만요.

조용기 : 그걸 모르는 게 아닙니다만 선교의 결과를 놓고 본다면 성령의 서풍은 동풍이나 남풍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의 경우를 보더라도 성령의 열풍과 선교적 열정은 서해안 지역이 훨씬 강하구요, 또 제가 독일을 가보았더니 독일의 서쪽 지역이 동쪽이나 북쪽보다 훨씬 선교 열정이 강한 것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성령은 주로 서풍이라고 생각해 보는 거죠(웃음).

몰트만 : 맞아요. 북 독일은 머리 중심의 선교가 주를 이루었고(일동 웃음), 샤를르마뉴 대제의 이성적 기독교 정책의 무대였거든요. 그런데 남서쪽 독일은 열정적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슴 중심의 경건주의 선교가 크게 기승했으니까요(웃음).

조용기 :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쪽으로 갈수록 성령의 바람이 뜨거워요(웃음).

 

21세기 영성의 과제와 방향


박종화 : 자, 이제 마지막 문제로 넘어가려 합니다. 21세기의 영성은 무엇이며 어떤 사명을 교회가 지니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은 과학과 기술이 최고조에 달했고, 인터넷 물결이 인간의 삶의 방식을 통째로 뒤바꿔 놓고 있습니다. 신지식의 시대라고 하고, 포스트모던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문명의 첨단화와 함께 우리 인간 사회에 부정적 측면이 그만큼 첨단화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문제입니다. 아무도 미래를 정확히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어디로, 어떤 방향으로 문명의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그 속에는 문명 속의 무지, 문명의 이기 속의 불안, 삶의 가치관의 혼돈 등 미래 생존의 불안이 집단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은 이런 포스트 모던 시대의 불확실성을 향해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확실한 미래를 심어 주거나 최소한 방향이라도 제시해 주고 있습니까? 기독교 영성 역시 불확실성의 영성인가요? 불확실이 가져다 주는 불안을 요즈음에 와서 신흥 종교들이 채워 주는 게 아니냐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거의가 부정적이며, 파괴적일 뿐입니다.

몰트만 : 참 중요한 지적입니다. 제가 보기에 19세기는 진보, 발전, 성장이 세계 곳곳에 편만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비해 20세기는 처절한 참화와 재난의 시대였다고 봅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 나치, 파쇼주의, 동구의 공산화, 냉전의 적대적 갈등, 억압과 탄압…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재난과 이로 인한 갈등으로 얼룩진 시대였지요.. 제가 보기에 특히 유럽의 경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 치욕적이며 대량 살상의 문화가 지배하던 20세기의 재난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봅니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우리는 분명히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절망과 좌절을 넘어 희망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기술 문명도, 인간공학도, 컴퓨터 문명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장족의 진보와 발전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확실하다고 말할 때 그 밑바닥에는 목적의식의 결여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기술문명의 발달을 통해 보다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리겠다면 누구에게 얼마만큼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과 부가 주어질지 불확실하기에 불안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권력이냐를 묻지 않고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합니다. 말하자면 문명의 불확실성이 문제가 아니라 문명을 살아가는 인간의 목적의식의 불투명성이 문제입니다. 인간의 삶의 의미를 다시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예컨대 어린이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 하루종일 앉아서 게임을 한다고 칩시다. 컴퓨터가 삶의 이기가 아니라 컴퓨터에 예속된 종된 생활에 빠집니다. 사이버 세계를 그릴 수 있지만 그 속에 삶의 의미와 목적을 현실적으로 투여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컴퓨터 시대가 편리하지만 얼굴과 얼굴을 맞대로 유무상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은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이버 세계 속의 커뮤니케이션이 현실적인 몸과 몸의 부딪침의 커뮤니케이션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현실세계이든 사이버 세계이든 우리가 살고, 만들고 싶은 삶의 의미를 심각히 묻고 답을 찾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합니다.

 

21세기와 세계화 물결 속에서


박종화 : 그러니까 문명의 이기들을 삶을 위해 활용하는 방안보다 이기들 그 자체의 발전과 진보에 골몰한다는 것이지요.

몰트만 : 맞아요. 그것들의 의미를 찾아야 해요. 그리고 생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물어야 합니다.

박종화 : 21세기는 단순히 기술문명만이 아니라 세계화 물결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쟁적 시장 경제 체제의 등장으로 경제적, 실존적 생존마저 불투명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세계화 물결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시장 경제 속에 인간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게 문제 아닌가요?

몰트만 : 맞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시장가치, 즉 상품가치를 기준으로 계산하는 세계가 문제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장경제가 아니라 돈 중심의 시장경제입니다. 오늘날 교회 구성체도 이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실업이 증가하고, 생존이 위협받다 보니 물질적 생존을 위해 개개인의 인간 존엄성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또 하나의 불치의 비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절망적 상황들을 치유하고 밝은 미래를 제시할 생명의 영성이 절실합니다. 경제는 생산을 지속합니다. 잉여생산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잉여분은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쓰레기로 폐기됩니다. 다시 환경오염을 유발합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차단해야 합니다.

조용기 : 절대 찬성입니다. 특히 오늘날 기술문명의 발달을 보면서 느끼는 게 있습니다. 속도의 문제입니다. 예컨대 자동차의 속도를 미친 듯이 내며 운전한다고 합시다. 망하는 것은 차가 아니라 운전하는 사람입니다. 기술문명을 운전하는 인간이 병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망합니다. 기술문명이 아니라 운전하고 이끄는 사람이 치유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실존 방식 자체가 치유받아야 합니다. 사람을 치유하고, 실존방식을 고쳐 주는 자는 예수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기술문명은 더 이상 종교도, 대체종교도 삶의 목적도 아닙니다. 몰트만 교수님 말씀대로 의미와 목적이 없는 문명은 불안이고 좌절이며,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리면 죽음에 이르는 질병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질병의 치유자입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주일예배에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이 자꾸 어려워집니다. 주차나 시간과 교통문제 등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예배를 비롯한 모든 것을 컴퓨터로 제공합니다. 전세계적으로 50만 가량이 클릭하는 연결체제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결국 문명의 이기 자체가 아니라 그 이기를 무엇을 위해 활용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내용과 알맹이를 주어야지요.
제가 중동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집회에는 300여 명 정도밖에 참석치 않았어요. 집회를 인터넷을 통해 중계했죠. 그랬더니 방문객 수가 만명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당국자들도 놀래더군요. 결국 여러 가지 제약으로 집회에 와서 직접 복음을 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인터넷은 아주 중요한 선교매체입니다. 예컨대 불교지역, 이슬람 지역 등에서 직접 선교로 인한 분란을 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간접적이지만 합리적인 설득과 제언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인간의 문제, 기술과 문명으로 생기는 문제들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저는 그 해결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영성을 우리 속에 회복하자는 것이지요.

박종화 :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고 손쉽게 전달하자는 선교 목적에 인터넷이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조용기 : 그렇죠. 활용 여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몰트만 :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성만찬은 인터넷으로 집전할 수도 나눌 수도 없습니다(일동 웃음).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고 보고 나누고 해야 하죠. 사이버 공간은 유익하나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습니다.

조용기 : 그렇죠. 사이버 교회가 우리의 실제 교회의 몫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만찬 예배를 많이 하면 할수록 교회 성장과 공동체 형성에 도움이 되겠지요(일동 웃음). 물론 예배신학적 의미도 크지만요.

박종화 : 자, 이제 토론을 마감해야겠습니다. 온종일 토론해도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따분한 이론적 대화가 아닌 실질적 문제를 가지고 목회석학과 신학석학이, 서양과 동양이 함께 대담을 나누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기독교사상이 그동안 한국교회와 민족의 과제를 위하여 정진해 왔는데, 이제 21세기의 교회와 영성의 문제를 심층있게 다룬다는 점은 중요한 일이라 봅니다. 오늘 세계적으로 저명한 신학자와 목회자 두분과의 대화가 교회의 새로운 영성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된 자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 영성과 21세기의 생명의 영성이 이 땅을 충만하게 적시기 바라면서 오늘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