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균진 교수와의 대담

국민일보(2001.12.10)

 




-김균진 교수: 오늘날 세계는 갈등과 문제들,죽음과 고난으로 가득하다.이러한 세계 상황 앞에서 시편기자의 옛 질문이 다시 한번 제기된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의 사랑하는 창조라고 하는 이 세계속에 어찌 이렇게 많은 불의와 고난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신앙은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 아닌가?

△몰트만 박사: 불의가 가득한 세계,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계속에서 오늘날 고난을 당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 무엇을 향해 부르짖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론적으로 하나님께 질문한다. "왜 하나님은 불의와 고난을 방치하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만이 대답하실 수 있다.인간의 모든 대답은 수용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것을 방치할 수 있는가의 질문은 구경꾼의 질문이다. 그것은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들의 질문이 아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왜 그가 고통을 당하는가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그를 도와주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나의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하나님은 먼 하늘에 계신가? 그는 아무 느낌도 관심도 없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그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는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전자의 질문이 이 세계속에서 일어나는 고난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정당성(神正: Theodizee)을 묻는 이론적 질문이라면, 후자의 질문은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교통에 대하여 묻는 실존적 질문이다.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와주실 수 있다"고 디트리히 본회퍼는 사형당하기 전 감옥에서 기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함께 고난당하는 하나님이요, 끝까지 참으시면서 이 불의한 세계를 견디시는 하나님이다. 그는 정의를 갈망하는 정열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는 폭력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의를 세우신다"고 시편은 고백한다. 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만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때문이다.

-김교수: 이 세계의 종말은 대재난으로 인한 세계의 완전한 파괴와 폐기라고 기독교의 소종파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묵시사상적 주장은 오늘의 세계 상황을 고려할 때 부인하기 어렵다. 과연 오늘의 이 세계에 미래는 있는가? 소종파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세계는 총체적 멸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몰트만 박사: 이 세계의 가공할 만한 마지막에 대한 기다림은 전형적인 묵시사상적 기다림이다.그 러나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인가? 기독교의 희망은 세계의 마지막이나 역사의 마지막과 아무 관계가 없다.오히려 그것은 시작에 대하여 말한다. 곧 참 생명의 시작, 하나님 나라의 시작, 새 창조의 시작에 대하여 말한다. 기독교의 희망은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의 시작자들이다. 믿음 가운데 있는 그들의 자유는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피할 수 없는 세계의 대파멸적 종말을 믿는 묵시사상적 숙명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창조적 하나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그리고 철저히 거부되어야 한다.장차 올 재앙에 대한 묵시사상적 신앙은 그 자체로 불길한 것이다.


-김교수: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는 이 세계의 소위 진보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온 세계가 테러와 반테러의 악순환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있다. 국경 없는 전쟁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세계는 긍정적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몰트만 박사: 수동적 형태의 묵시사상적 테러리즘이 있다면, 그것은 온 세계가 폭력과 대응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총체적 파멸로 치닫고 있다는 불안이 다. 이 묵시사상적 불안은 우리의 힘을 마비시키며, 모든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이것은 반기독교적인 것이다.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희망으로 다시 태어남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수동적 형태의 묵시사상적 테러리즘에서 적극적 형태의 묵시사상적 테러리즘으로 발전하는 길은 멀지 않다. 이 세계가 결국 파멸하고 말 것이라면 우리 자신이 이 세계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고 이슬람의 테러분자들은 말한다. "끝이 없는 경악보다 경악의 끝이 더 났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묵시사상적 테러분자들은 체포되어 법정에 서야 한다. 요즈음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프가니스탄 국민에 대한 미국인들의 '전쟁'이 아니라 빈 라덴의 범죄자 집단에 대한 군사적 경찰행위이다. 앞으로 우리는 20세기에 경험했던 것과 같은 거대한 세계대전을 다시 겪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테러집단들의 '사적 폭력'을 언제나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유엔의 국가공동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인권의 보호를 관철해야 한다.

-김교수: 만일 세계가 긍정적 희망을 가진다면, 이 희망의 현실적 주체는 누구인가? 이 희망의 실현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사회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몰트만 박사: 기독교는 본래 부활과 생명을 위한 희망의 운동이었으며, 오늘도 그러하다.보다 나은 희망을 가지고 기독교는 지난 역사를 통하여 다른 종교들과 문화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세계'가 희망을 가졌든 갖지 못하였든지 간에, 우리는 이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희망을 눈앞에 가지고 있으며 이 희망을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힘있는 사람들의 교만을 비판하는 동시에 힘없는 사람들의 절망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늘날 인류를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은 그들이 절망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해에 있어 절망은 가장 나쁜 죄이다. 보다 더 정의롭고 보다 더 평화로운 새 세계를 위하여 우리는 이성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으며, 이 이성은 기독교 희망과 분리될 수 없다.

-김교수: 언젠가 빈 라덴은 테러리즘에 대한 미국의 전쟁을 이슬람 종교와 서구의 기독교 종교간의 전쟁이라고 선포하고 이를 통하여 '기독교적' 서구 세계에 대한 온 아랍 국가의 결속을 얻고자 하였다. 빈 라덴이 선포한 것처럼 이 전쟁이 과연 종교전쟁인가? 테러리즘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테러리즘의 극복을 위하여 세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몰트만 박사: 지난 89년 동서 갈등과 '냉전'이 끝난 후 '지구촌화',다시 말해서 새로운 세계 질서가 시작되었다. 어쨌든 이 새로운 질서는 아랍 국가들에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래 평화로운 이슬람에서 공격적인 이슬람주의가 생성되었고, 그들 입장에서 '타락하였고' '비신앙적인' 서구 세계와 '거대한 사탄' 아메리카에 대항하는 빈 라덴 테러리즘이 이슬람주의에서 생성되었다 핵심 문제는 종교간의 전쟁, '문명의 충돌'(새뮤얼 헌팅턴)이 아니라 아랍인들의 이슬람 세력권이 현대 세계와 더불어 가진 문제들에 있다. 이슬람은 아래의 기본 조건들을 수용할 때, 현대 세계 안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종교와 정치,종교적 공동체와 시민사회를 분리해야 한다.둘째는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셋째는 여자의 가치와 인권의 존중이 선포되어야 한다.오늘날 근본주의적 이슬람주의는 바로 이러한 현대 세계의 기본 조건들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먼저 이슬람주의의 살인적인 극단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이슬람 세계 공동체의 과제이다.이를 위하여 우리는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김교수: 예수의 부활속에서 죽음의 세력은 하나님의 생명의 힘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고 기독교 신앙은 선포한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 죽음의 세력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파괴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죽음의 세력에 의하여 파괴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부활신앙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몰트만 박사: 기독교 신앙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희망한다. 이 희망을 나타내 보이는 기독교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의 부활은,죽음의 심연과 하나님의 버림받은 상태의 쓰라림을 경험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인용하는 첫 부활절 찬송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죽음아,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지옥아,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확신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항하여 싸우는 저항인들이다"라고 희망의 설교자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기독교의 희망은 이 죽음의 세계에 대항하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으로 발전한다. 이 하나님 희망의 현재적 의미는 생명을 긍정하고 보존하며 절망과 냉소주의의 치명적 독소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있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Ja)은 죽음의 부정(Nein)보다 더 크다. 바로 이것이 생명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실망들보다 더 강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