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중복음과 한국교회

 

 

박명수

 

                      

 

 

 

II. 근대복음주의와 사중복음의 형성

 

사중복음이란 용어는 19세기 말 미국의 복음주의자 심프슨(A. B. Simpson)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어 졌다. 사중복음은 19세기 말 미국 복음주의의 중요 메시지였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총칭하는 말이다. 사실 사중복음이라는 말은 심프슨에 의하여 19세기 말에 사용되었지만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종교개혁이후 긴 세월을 거치면서 복음주의의 주요 메시지로 형성된 것이다.

중생의 복음은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루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의 복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낯선 의(Alien Righteusness)를 덧 입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진 반면에, 칼빈은 칭의와 더불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 중생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에게서 중생은 단순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실질적으로 분여(impartation) 받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생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가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칼빈의 중생의 복음이 보다 구체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청교도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청교도들은 영국교회의 형식적인 신앙에 대하여 반대하고 나온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은 영국교회의 모든 형식적인 잘못된 신앙을 깨끗이 하는 데 큰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예배의식에 있어서 비 성서적인 예식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진정한 크리스챤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칼빈의 신학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청교도들은 진정한 크리스챤의 시작은 외적인 예배 참석이나 교리의 암송이 아닌 진정한 은혜의 체험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자신의 죄악성을 인식하고 멸망의 자식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사죄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때 만이 참된 신자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중생의 체험이 참된 신자의 표징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긴 기독교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일이다.2)

이후부터 중생, 또는 회심은 복음주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고든 콘웰 신학대학원의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18세기 대각성 운동으로 부터 시작되는 복음주의 전통의 분명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영적 중생을 모든 신자가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첫 번째 경험으로 강조하는 것이다"고 지적하였다.3)    

중생의 복음이 칼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성결의 복음은 웨슬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생이 개신교의 역사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 16세기 후반 부터 17세기의 청교도 시대부터라면 성결이 개신교의 신학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의 요한 웨슬레부터이다.

웨슬레는 영국성공회의 성직자였다. 영국성공회는 종교개혁의 유산과 초대 기독교의 전통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인간의 죄성을 깊이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한 중생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웨슬레는 동시에 온전한 성화를 강조하였다. 성화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강조점이었고, 이것은 영국성공회의 전통으로 정착되었었다. 성화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초대기독교이래 신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구원의 완성이었다. 웨슬레는 따라서 성화를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이라고 불렀다.

웨슬레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성화를 무시한 칭의의 강조는 성서의 온전한 복음을 강조하지 못한 왜곡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있는 웨슬레에게 있어서 구원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칭의에 있다. 그러나 웨슬레는 칭의를 구원의 시작일 뿐이라고 보았다. 웨슬레는 칭의를 구원의 문이라고 말하고 성화를 구원의 방이라고 말했다. 구원의 문만 들어 가고, 구원의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구원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웨슬레는 칭의와 더불어서 성화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기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성화의 복음이 제대로 외쳐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역(the whole work of God)이 모든 점에서 증진된다"4)고 지적하였다.

웨슬레가 성화의 복음을 강조한 이래 성화는 웨슬레안을 넘어서서 복음주의적인 개신교의 중요한 강조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특별히 19세기의 영미의 복음주의에 있어서 성화 또는 성결의 복음은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예를 들면 칼빈주의의 전통에서 챨스 피니의 부흥운동, 보드만의 "차원높은 신앙생활," 그리고 영국에서 일어난 케직사경회를 들수있다. 또한 웨슬레안에 있어서도 19세기 후반의 미국에서 일어난 전국성결연맹과 수많은 성결교파들, 그리고 영국에서 새롭게 형성된 구세군운동등을 들수있다.5)

중생과 성결이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개신교에서 강조되어 온 복음이라면 신유와 재림이 기독교의 주요흐름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19세기는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기이다. 서구 기독교는 콘스탄틴 이후 정치와 종교의 일치 가운데 형성되어 왔다. 종교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고, 따라서 종교는 정치의 주요한 관심사에 속했다. 또한 종교는 국가권력의 막강한 지원 가운데 발전하여 왔다. 국가와 교회는 함께 정통교리를 제정하였고, 여기에 불복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런데 이런 연결고리를 깬 사건이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볼 수있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유래한 미국의 헌법은 국가가 어떤 특정한 종교를 지원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따라서 교회는 콘스탄틴이래 가장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19세기의 미국 기독교는 이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결과 이전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가지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9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여러가지 현상 가운데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두가지 현상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서로 돌아가자는 강력한 움직임이 일어 났다고 하는 점이다. 기독교의 정통교리는 항상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국가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와 종교의 분리이후 국가 권력은 어떤 특정 종교의 교리를 공식적으로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신자는 교회가 정한 정통교리라는 범주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성서, 특히 신약성서로 귀의하게 되었고, 성서 외에는 어떤 것도 정당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특별히 미국교회에서 19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새로운 교파들이 성서로의 환원을 부르짖고 나선 것은 이런 특별한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구조의 변화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국가권력의 힘을 엎은 엘리트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사고 구조가 교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국가와 종교의 분리이후 교회의 지지 기반은 더이상 국가권력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일반대중이 되어야 했다. 즉 일반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교회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설교도, 교회의 조직도 이들을 의식하고 이루어 져야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구조가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반 대중의 눈으로 신약성서를 읽게 될 때 지금까지 정통적인 기독교에 의해서 간과되었던 새로운 복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신유와 재림의 복음이다.

19세기에 시작된 근대복음주의의 신유운동의 기원은 성결운동에 있다. 19세기 성결운동의 근본적인 전제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용서해 주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 시킬 수 있는 능력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결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의 문제만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질병의 문제까지 해결하여 주신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문제(중생과 성결) 뿐만이 아니라, 육체문제(신유) 까지도 해결하여 주시는 모든 문제의 넉넉한 해결자(All Sufficient Christ)라고 강조하게 되었다.

신유 운동가들에 의하면 신유는 성서가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신약성서, 특히 마가복음에 보면 신유는 초대교회의 복음의 중요한 강조점 가운데 하나임을 알수 있다. 개신교정통주의는 신유와 같은 기적의 역사는 초대교회만 나타났을 뿐 현재에는 사라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세기의 복음주의자들은 성서의 메시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불변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나타났던 복음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반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신유의 운동은 19세기의 유럽에서 시작하여 미국에서 크게 열매를 맺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컬리스( Charles Cullis), 보드만(William Boardman), 심프슨(A. B. Simpson), 고든((A. J. Gordon)등이다.6)

재림운동은 다른 차원의 기원을 갖고 있다. 기독교는 여러가지 차원의 종말론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천년왕국에 대한 이론으로는 3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전천년설로 천년왕국이전에 예수의 재림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후천년설로 천년왕국이 먼저 이루어 지고 그 다음에 예수의 재림이 온다는 것이다. 세째는 무천년설로 성서에 나오는 천년왕국은 단지 상징일 뿐 실제로는 없다는 이론이다. 이 세가지 형태의 천년왕국설은 기독교의 역사에 긴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기원은 19세기 영국의 달비(John N. Darby)에게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세대주의적인 천년왕국은 천년왕국이전에 예수의 재림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전천년설이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역사를 여러세대로 구분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세대주의라고 부른다. 따라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기존의 전천년설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배경을 살펴보면 근대복음주의의 또 다른 특색을 찾아 볼 수 있다. 원래 세대주의의 창시자인 달비는 영국국교회의 성직자였다. 그러나 영국국교회의 성직자로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영국국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는 커년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속적인 정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대주의는 원래부터 기존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근대복음주의는 교회에 대한 세속정치의 개입을 반대하며, 순수한 교회를 지향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달비의 세대주의가 미국에 들어 온 것은 19세기 후반에서이다. 19세기 후반의 미국교회는 도시화로 인한 사회의 타락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한 전통적인 복음의 혼란이 심했다. 이런 상황을 사람들은 말세의 징조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과 재림을 강조하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 널리 퍼지게 토양이 마련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들어 온 세대주의는 달비와는 달리 교회를 극단적으로 보지 않고, 비록 현재의 교회가 타락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역사의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19세기 말 미국의 복음주의는 이런 종말론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19세기말의 대표적인 부흥사 무디를 들 수 있다. 또한 무디를 중심으로 일어 났던 19세기 말의 선교운동도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7)

위에서 살펴본대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종교개혁 이후 복음주의 개신교에서 긴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되어 온 복음이다. 이것이 19세기 후반의 미국복음주의 그룹의 중심 메시지가 되었다. 사실 이 네가지 강조점은 거의 모든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에서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을 구체적인 표어로 삼은 것은 칼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심프슨의 기독교선교연맹과 웨슬레안에 뿌리를 두고있는 만국성결연맹이다.8)

여기에서 한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할 것은 사중복음은 근대 기독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중복음의 내용은 성서에서 충분하게 강조되어 왔다. 하지만 이것이 긴 기독교의 역사에서 별로 강조되어 오지 못하였다. 사실 사중복음의 내용이 기존교회에 매우 도전적인 내용을 담고있다. 중생의 복음은 기성교회의 형식적인 신앙을 비판하며, 성결의 복음은 크리스챤의 세속화를 우려한다. 또한 신유는 항상 주류교회와 사회로 부터 미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고, 재림은 그 사상 자체가 기존교회와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사중복음의 내용은 정통기독교의 강조점이라기 보다는 근대 복음주의의 등장이후 성서로 돌아가자는 순수신앙운동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신자들은 교리의 눈이 아닌 평범한 눈으로 성서를 보게 될 때 이런 것들이 성서의 중심 메시지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을 것이다.

 

III.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사중복음

    

    A. 중생과 한국교회

 

    1. 1907년의 부흥운동과 중생

    

초기 한국개신교를 하나로 묶는 단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복음주의라는 단어이다. 1905년 장로교의 4개의 선교부, 감리교의 두개의 선교부가 모여 협의체를 형성하였는데 그 명칭이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였다. 그리고 이 연합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조직하는데"9) 있었다. 이것으로서 초기 한국교회의 중요한 특징이 복음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복음주의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전도이다. 사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복음전도(Evangelism)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이 복음전도는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회심, 혹은 중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교파에 따라서 제도나 신학의 차이점이 많았다. 그러나 초기 한국교회는 이런 차이점을 넘어서 복음전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복음주의교회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초기 문서에는 이런 복음전도로 말미암은 중생의 체험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10)

중생의 체험은 죄의 회개와 사죄의 확신으로 이루어 진다. 이 중생의 체험은 한국교회의 부흥회의 중심주제였다. 1904년 3월에 서울 잣골교회(자교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야말로 놀라운 집회였다. 죄의식이 너무나 깊어 온갖 추악한 죄들을 고백했고, 훔친 재물들을 돌려 주었다. 우리 교인들은 처음으로 죄가 어떤 것이고, 죄사함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 집회의 결과로 참석했던 자들은 새삶을 살게 되었고, 축복을 받았다. 이런 집회를 통하여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성령께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현재의 구원을 확신하고 증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11)

이런 중생의 체험은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렸던 부흥회에 참석했던 정익로 장로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쳐 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너무 괴로워 교회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12)고 간증하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집회 가운데 "어떤이는 울고, 어떤이는 하나님께 죄목을 나열해가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13) 이런 철저한 회개 후에 부흥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놀라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 교인이 "죄 짐이 사라져 주님께 감사합니다" 하자 다른 교인이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왔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했다. "구원을 얻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찬양드립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쁩니다," "내 원수들을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등등 외쳤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수 있다. 그것은 초기한국교회가 철저한 죄의식과 거기에서 부터의 사죄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초기 한국기독교를 재래의 전통적인 종교에서 구분시켜 주는 요소이다. 유교에서는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절대자 앞에서의 죄의식은 없다. 감리교목사 김종우가 진정한 회심을 하는데 장애가 되었던 점은 바로 다른 사람 앞에서 죄를 짖지 않았다는 점이다.14) 또한 여기에서 알수있는 것은 초기 한국교회의 성격이 철저한 복음주의라고 하는 점이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구분하는 중요한 깃점이 죄와 구원에 대한 이해이다. 복음주의는 인간의 죄성과 속죄의 은총을 강조한다. 자유주의신학에는 이런 철저한 죄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진정한 구원의 감격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 세칭 "구원파"의 중생논쟁

    

한국교회에서 중생의 문제가 범교단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것은 1960년대 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구원파사건에 기인한다. 구원파는 1961년 4월 미국인 독립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은" 유병언과 1961년 11월 네델란드 선교사 길 기수(Case Glass)의 영향으로 "죄 사함을 깨달은" 권신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권신찬과 유병언은 장인 사돈의 관게인데 이들은 1963년 경부터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5) 필자는 아직까지 이들 선교사들의 배경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영국의 달비(John N. Darby)에 배경을 두고 있는 형제파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권신찬과 유병언은 이들에게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배우고 이것을 자기들 나름대로 발전시켜 세칭 "구원파"를 형성한 것 같다.

권신찬씨는 원래 장로교 통합측의 목사였으나 1962년 12월 외국인 선교사로 부터 침례를 받고 다른 교리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제명 처분을 받았다.  그후 개인적으로 전도활동하다가 1966년 부터 극동방송에서 전도목사로 일했다. 유병언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구원파를 이끄는 실력자이다. 이들은 1970년대 초 극동방송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한국어 방송을 전담한다는 조건으로 방송국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그들의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1969년 부터 1982년 까지 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명칭을 가지고 활동하여 왔다. 그 후에는 기독교복음침례교회라는 간판 아래 활동하는데 1990년에는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20.000명의 인원이 모여서 집회를 가진적도 있다.

구원파가 가르치는 내용이 여러가지로 한국교회에 문제를 야기시켰지만 본 논문에서는 중생의 문제만을 다루겠다.16) 구원파에는 그들이 대외적으로 공개하는 책자와 그들 자체 내에서 통용되는 책자가 있는데 전자에는 기성교회의 교리와 별 다름이 없으나 후자에는 구원파의 실제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후자의 모습은 그들에게 직접설교를 듣거나, 그 구원파에 속해있던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구원파의 중생에 관한 주장을 요약하면 첫째로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파는 일명 중생파라고 불리우는데 이들은 기존신자들에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라고 질문하고, 거듭났다면 연월일시를 정확하게 대답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대해서 대답하지 못하면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의심하고, 다시금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분명하게 갖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둘째로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의 노예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죄는 영원한 속죄이므로 진정으로 중생한 사람은 다시금 회개할 필요가 없고,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는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권신찬씨는 "구원이후에 지은 죄가 영혼의 구원이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17) 따라서 그는 구원 받은 후에 신자는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든지 않든지 그것은 우리의 관심거리도 아니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18) 이런 구원파의 주장은 영육의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즉 중생한 이후 나의 나됨은 영에 있으므로, 육에 속한 내가 지은 죄는 나의 책임이 아닌 육신의 일이므로 나의 영혼의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9)    

구원파의 이런 극단적인 중생론은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논란의 출발점은 1967년 장로교통합측 경안노회에서 문제를 제기한 이래 1974년에는 목포기독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부흥사협회에서 구원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여기에는 교단적으로 성결교회(예성, 기성)가 여기에 참여하였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예수교교회협의회 같은 교회연합기관에서 이문제를 거론하여 구원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20)

이 구원파와의 논쟁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중생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를 배격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중생의 체험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인 전통을 강조하여왔다.21) 그러나 이런 중생의 강조가 너무 극단적으로 흘러서 중생의 년월일시를 인위적으로 강조하거나, 은혜의 구원을 강조한 나머지 율법을 무시하는 도덕폐기론적인 태도는 한국교회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B. 성결과 한국교회

 

    1. 이명직의 성결체험과 경성성서학원의 부흥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배경은 복음주의이다. 그리고 이 복음주의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가 성결운동이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이 복음주의적인 성결운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한국교회의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라가 그 경우이다. 장로교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신학교시절에 성결단체인 구세군에서 은혜를 받았으며, 아펜셀라는 원래 장로교인이었는데 감리교에서 은혜를 받고, 교파를 옮겼다. 감리교는 성결을 강조하는 교파이다. 한국교회가 성결운동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당시에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성결운동의 결과이다. 즉 1904년의 영국 웨일즈의 성결운동과 인도의 성결운동이 한국교회에 소개되었고, 거기에 자극을 받아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한국에 본격적으로 성결의 복음을 전한것은 성결교회였다. 성결교회는 1907년 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윤리적인 성결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속 사람이 새로와지는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성결교회는 이 성결의 복음을 처음부터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성결의 은혜를 보다 깊이 체험하여 성결교회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1921년 경성성서학원에서 이명직을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에서이다.

1921년의 부흥운동은 3.1운동이후의 한국교회의 상황을 반영해 주고있다. 먼저 3.1운동이후의 한국민족의 허탈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이 당시에 자유주의 사조에 대한 갈등이다. 즉 기독교신앙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견해가 보수주의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당시에 밀려들었던 자유연애풍조에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휩쓸려 교회에 스캔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명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런 갈등을 안고서 경성성서학원의 교사로서 가르치고 있었다.22)

그러던 중 이명직은 학생들 앞에 서있는 자기의 모습이 진정 성결한 사람인지,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게 되었다23):

주께서 나에게 기도할 처소도 가르쳐 주시고, 기도 문제도 가르쳐 주셨다. 기도할 처소는 멀지 않고, 기도문제는 복잡하지도 않고 많지도 않고, 필경 자기에게로 돌아오고 말았다. 전에는 기도할 때 학원, 선교회, 교사, 학생, 모든 교회등 문제가 매우 많고 복잡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하게 자기에게로만 돌아오게 되었다. 오직 성결을 실험하기로 하였다. 나에게 성결을 주시든지 사명을 거두어 가시든지 하소서. 나는 주의 뜻을 이루는 교역자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모든 문제의 근원을 내면의 세계에서 찾는 것이다. 특별히 웨슬레안 성결론은 인간의 모든 문제의 배경에는 죄악이 자리잡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이 죄악의 제거에 있다고 보았다. 이명직은 이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기도했다. 3일이 되었을 때 그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아 그때 그 순간 성신의 역사는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때에 성신에 충만하게 되었다. 이것은 락지후(落地後) 처음의 영험이다. 한참동안 울고, 한참동안 웃고, 혼자 춤추고, 취한 사람이 아니면 미친 사람이었다."24) 이명직의 진정한 회개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그후 경성성서학원의 전학교로 번져 15일 동안이나 수업을 전폐하고 회개와 기도로 매일 매일을 보내게 되었다.

1921년 부흥운동에서 일어난 회개의 역사는 단지 회개에서 끝나지 않고 아름다운 회개의 열매를 맺었다.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죄를 깨닫게 되면 먼저 그것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음에는 피해를 입힌 사람이나 상처를 준 사람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거기에 합당한 보상을 지불했다. 직접 사람을 찾아 갈 수 없을 때에는 편지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 이 당시 이런 회개의 열매가 얼마나 컷는가는 어떤 날에는 회개의 편지가 성서학원에서 200여 통이나 발송되었다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25)

1921년 경성성서학원에서 일어난 성결운동은 성서학원에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을 뿐만이 아니라 성결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번의 부흥은 실로 일부에만 부흥이 아니라, 우리 성결교회를 영적으로 개조하는 부흥이더라. 이 부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회개하고, 거듭나고, 성결의 은혜를 실제로 받는 수양생 뿐만이 아니라 교역자도 다수 있었다. 그래서 이 불길은 각 지방교회에 파급이 되고, 다른 단체에 까지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26)

     

    2. 평양신학교의 성화론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중생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성결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론(異論)이 있다. 칼빈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중생을 강조하고 성화는 중생에서 계속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중생이후에 특별히 새롭게 추구해야 할 은혜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웨슬레안들은 중생은 신앙생활의 입문이요, 성결은 신앙생활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중생이후의 제 2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물세례가 중생의 외적인 표시라고 불리워지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장로교회가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결에 대한 이해에서 칼빈정통주의와는 다른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중생이후의 성령세례를 강조하여왔다. 초기 선교사들은 1907년의 성령의 역사를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이것은 1907년의 배경이 영국 웨일즈의 성결운동이었음을 생각할 때 잘 이해할 수 있다.27) 한국 초기 선교사들은 웨슬레안계통의 성결운동과 칼빈주의 계통의 케직성결운동에 직간접으로 관계되어 있었다.

이렇게 초기 한국교회가 성결을 강조해왔다는 또 다른 증거는 1931년 평양신학교의 성령론교재에서도 그대로 들어난다. 이 교재는 중국인 가옥명이 쓴 것을 보수주의 선교사로 알려진 이눌서가 감수하여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장로교회의 신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초기 한국장로교회가 성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가옥명은 성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8)

成聖[sanctification, 聖化]은 엇던 것인가 성성은 참 신의 格外之恩으로 일운 공이니 신이 이로써 우리의 全性을 다시 새롭게 하야 능히 신과 같게하며, 또한 우리를 죄에서 날로 떠나가게 하야 聖과 義가 완비한 地步에 나아가게 하나니 우리가 이런 경지에 득달케 됨은 바로 신이 성령의 功을 依籍하야 개화케 하며 또 우리가 중생할 때 얻은 신생명을 育養하므로 우리의 영성이 長育되어 날마다 鞭達함이라. 대게 성성은 죄욕을 제하야 죄악을 깨끗하게 씻어 버리게 함만 아니라 또한 신의 신성과 神德과 神像을 具有함으로 신과 갓이 됨을 말함이라.      

여기에서 가옥명은 성화를 인간의 죄악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가옥명은 이어서 중생과 성화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29)

 

사람이 중생하는 시초에 있어 비록 新性生命을 받아 가졋스나 그 구성은 의연히 존재한 즉 일인 심중에 2종의 동기가 잇슴 갓도다. 대게 신성은 때때로 선으로 향함을 명하고, 舊性은 때때로 악에 치우침을 명하게 되니 바울의 소위 일인 심중에 二慾이 서로 다토아(갈 5: 17) 혹시 원치 안는 일을 하게 된다 했은 즉, 부득불 죄로 더불어 奮戰할 지라. 대개 심중의 利慾이 서로 싸움함이 맛치 다윗이 사울과 교전함 갓흐니 "다윗은 점점 강하야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야 가더라"(삼하 3: 1)하엿스니, 마침내 다윗이 전승함을 엇어 성성한 사람이 되엿나니라.

 

여기에서 가옥명은 중생은 영으로 말미암는 새 사람의 시작이요, 성화는 그 새사람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가옥명은 전통적인 칼빈주의와 달리 케직파의 성결론을 따른 것 같이 보인다. 이것은 웨슬레안 성결론과 매우 비슷한 주장이다. 전통적인 칼빈주의는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서 가옥명은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주장하였다. "혹 曰 우리의 身靈이 완전히 성성할 날은 곳 내생일 것이요, 금생에 잇지 아니한다 하니 참 그러치 안토다. 대게 사람의 一肢나 一體가 殘缺됨으로 죄욕이 삭감됨을 보지 못하엿스니 이갓치 사람의 전체가 영으로 더부러 분리될 때 곳 죄욕이 滅削된다고 엇지 말하리오. ... 이 聖境은 각 신도가 人世에 생존할 시에 應至 또 必至할 地步인 것이라."30) 가옥명은 이 세상에서 결코 성화할 수 없다는 학설을 자세하게 소개한 후에 이 주장이  성화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여 이세상에서 성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또한 성경의 전제 내용을 알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31)

한국의 초기 장로교회는 성결론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구 프린스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장로교 구파는 성결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으로 생각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와필드(B. B. Warfield)이다. 와필드는 그의 두권으로 된 방대한 저서에서 성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펠라기안이라고 주장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는 심지어 개혁주의 전통에서 나온 케직성결운동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32) 이런것을 볼 때 분명하게 기존의 장로교의 입장을 반대하는 성결론이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쳐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필자는 초기 한국교회는 장로교 구파의 신학 보다는 오히려 폭 넓은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C. 신유와 한국교회

 

    1. 김익두의 신유운동

    

초기 한국선교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서 한국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새로운 서구문명과 동일시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통해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유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가 미신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신유운동은 한국의 개화사상을 가진자들과 충돌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많은 교파가 들어 왔지만 신유를 본격적인 복음의 주제로 설정하고 나타난 것은 복음전도관(성결교회의 전신)이라고 생각된다. 성결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질병에서 치유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성결교회의 신유의 집회에 참석한 대한매일신보기자는 "소위 신자로서 조그마한 병에 걸리게 되면 한갖 약이나 의사에게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기도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는 설교를 듣고, 복음전도관은 시대를 역행하는 종교계의 여우라고 비판하였다.33)

그러나 신유의 복음이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3. 1 운동 직후에 거세게 불기 시작한 김익두의 부흥회부터라고 생각된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자들 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즉 기독교를 방편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앙유형이 1907년의 부흥운동을 깃점으로 보다 개인적인 이유로 기독교신앙에 입문하는 형태로 전환되어 갔다. 그러던 것이 1919년의 3.1운동은 고비로 해서 한국교회의 신앙은 보다 개인적이요, 종교적인 형태로 변형되었다. 즉 일제통치의 큰 벽을 느낀 사람들에게 기독교도 더 이상 독립을 가져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신자의 계층도 초기의 정치 엘리트에서 일반 서민들로 바뀌었다. 일반인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이유는 민족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인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김익두의 신유운동의 출발점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군 현풍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였다. 이곳에 박수진이라는 걸인은 10년동안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김익두는 이 걸인을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정성스럽게 기도하던 중  사흘째 되던 날 아래 턱이 올라붙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34) 이후부터 김익두의 부흥회는 전국을 휩쓸게 되었고, 예수이후 "1천 9백여년 동안을 세계에서 많히 보지 못하던 희한한 이적"35)을 행하게 된 것이다. 김익두가 고친 병명만해도 중풍, 혈루증, 반신불수, 앉은 뱅이, 요통, 자궁병, 냉증등 매우 다양하다.36) 또한 김익두의 집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1920년 10월에는 서울의 7개 당회가 연합하여 집회를 열었는데 약 만명이 참석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이것은 조선교회에서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러면 김익두의 신유이적은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신유의 역사는 회개와 동시에 일어났다. "첫째로 이적은 만명의 큰 무리가 밤을 새워 기도하며, 회개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이로다. 이는 사람의 수단으로 하라함도 아니요, 기도와 십자가의 도만 전할 뿐이었나니 ... 경성교회에는 은혜의 비가 내리었고, 사회에는 어떠한 각성을 줌일러라."37) 여기에서 우리는 신유가 단지 치병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의 역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전인적인 치유행위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신학은 질병의 깊은 배후에는 인간의 죄악이 자리잡고 있고, 따라서 죄의 치유는 질병의 치유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신유의 역사는 그당시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도 매우 의의가 있다. "이 때는 안과 밖으로 교회에 해로운 씨가 들어 와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며 ...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 성경에 기재한 이적기사를 믿지아니하고, ... 이적이 어디있느냐 하는, 이런 진실치 아니한 말을 전파하며, 심지어 조선교회의 교리를 야만이라고 훼방하는 자들이 일어났느니라."38)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신유이적인 것이다.

이런 신유의 역사는 초대한국교회의 선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사람들은 신유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된다. "이 때는 말세라. ... 그러한 고로 하나님께서는 속히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자를 위하여 이러한 이적을 보이신 것이로다."39) 이런 김익두의 신유집회를 중심한 1920년대 초의 한국교회의 부흥은 매우 놀라왔다. 1921년도의 조선교회의 성장은 25%에 이르렀다.40) 정말로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3.1운동이후 상처받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복음이 보다 보통사람들의 문제 곧 질병과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도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한국의 초기 선교는 병원을 통한 의료선교였다. 그리고 기독교는 서양의학과 동일시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김익두의 믿음을 통한 신유의 역사는 선교사의 선교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보기 보다는 한국인들의 순수한 마음으로 성서를 읽으므로 인해서 형성된 한국인들의 신앙사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황해도 재령지방에서 목회하던 임택권목사를 중심한 사람들이 김익두의 신유운동을 지지하고 "김익두목사 이적증명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김익두의 이적을 객관적으로 조사하여 [조선예수교회 이적증명]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런 객관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금일에는 이적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엿느니라"고 규정된 장로교 헌법 3장 1조의 내용을 수정하자는 건의문을 총회에 제출하기도 하였다.41)

    

    2. 베뢰아의 귀신론과 신유

    

아마도 김익두의 신유운동이후 한국교회에서 신유의 문제가 법교단적으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김기동목사를 중심으로한 베뢰아의 귀신론 논쟁일 것이다. 김기동은 1938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1972년 대한신학교를 졸업하여 현재 성락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다. 그는 1972년 12명의 신자들을 모아 놓고 자기가 깨달은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의 베뢰아 아카데미가 되었다. 베뢰아 아카데미는 주 1회 2시간씩 2년동안 김기동의 귀신론을 배우게 되는데 현재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고,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에 널리 미치고 있다. 그러나 김기동은 그가 속해있던 한국침례교 총회에서 1987년 11월 16일 이단으로 규정받아 침례교에서 제명되어 기독교남침례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조직하였다. 1990년 현재 그의 교회는 4만여명의 교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김기동의 영향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김기동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우선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서울대학교의 한만영교수이다. 그는 한국최고의 지성인이면서 동시에 김기동과 비슷한 신유의 체험을 하고, 급기야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직을 버리고 신유를 중심으로 하는 목회를 시작했다. 또한 인천의  한국 예루살렘교회 이초석목사, 로스엔젤리스 은혜한인교회의 김광신목사도 이와 비슷한 목회를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형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42) 이런 현상은 질병의 문제는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복음주의적인 신유신학의 수립을 통하여 건전한 신유운동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를 제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김기동의 신유운동은 귀신추방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그의 신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귀신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김기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따라서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 또는 사탄이 되었다고 보고있다. 그러나 그의 귀신에 대한 견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와 다르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귀신도 타락한 천사라고 보고 있으나 김기동은 불신자가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이 이세상을 떠나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는데 그것이 귀신이라는 것이다. 김기동은 인간은 정해진 수명을 갖고 있는데 그 정해진 수명대로 살지 못한 영혼 가운데 불신자의 영혼은 그 나머지 수명을 살아있는 사람의 육체에 기생하면서 살아간다고 주장한다. 김기동의 이런 귀신관은 그의 실제 경험에서 나왔다. 그는 수 많은 축사과정에서 귀신과 투쟁적인 대화를 하였는데 그 대화의 내용을 모아보면 귀신은 반드시 불신자의 이름과 주소를 갖고 있으며, 예수를 믿고 죽은 영혼은 귀신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43)

김기동은 인간의 모든 재난의 원인이 바로 이 귀신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질병, 모든 사고, 중독, 범죄, 그리고 자살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본다. 특별히 김기동은 모든 질병의 원인이 귀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병이 같으로는 여러가지 현상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배경을 보면 귀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서적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의학은 귀머거리는 청각신경이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귀먹은 귀신이 들어왔다고 말씀하셨으며, 의학은 소경된 것이 시신경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눈먼 귀신이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즉 병든 귀신이 들어와 인간에게 병을 옮겨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질병의 치료는 약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이 되는 귀신을 몰아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44)

김기동의 이런 귀신론과 질병의 이해는 전통적인 한국의 샤만니즘과 성서를 혼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샤만니즘은 인간의 모든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초자연적인 영적인 세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흉과 화를 미리 제거하고, 길과 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당의 도움으로 신령세계의 힘을 빌어 제재초복(除災招福: 재앙을 제거하고 북을 불러오는 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5) 김기동은 이런 샤만니즘의 세계관을 성서적인 내용과 혼합하여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근본적인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역사의식의 결여이다. 문제의 해결을 우리의 역사현실의 문제를 직시하는데서 출발하지 않고, 피안의 세계에서 찾으려고 함으로써 역사를 바로 잡지 못하고 후퇴시킨다는 점이다.           

 

    D. 재림과 한국교회

 

    1. 길선주의 [말세학]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 올 때 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하나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었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무디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19세기 말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고 있었는데, 이 복음주의의 중심메시지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다.46)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인 브라운에 따르면 "한국문호 개방이후 찾아온 전형적인 선교사는 ... 신학과 성서비판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이며, 그리스도의 전천년왕국 재림설을 핵심적인 진리로 믿었다"고 말한다.47) 특별히 이런 종말론은 장로교 계통의 선교사들에게 더욱 강했다. 장로교선교사 게일은 1913년에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쉽게 설명하여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의 Jesus is Coming을 [예수의 재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조선예수교서회에서 출판하였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런 선교사들의 종말론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초기 한국사회의 상황은 그야말로 종말론적인 상황이었다. 이 시기는 유교를 축으로하는 한 사회가 끝나고, 아직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지 못한 불안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는 역사적으로 종말론이 성장하기 좋은 시대였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런 종말론 위에 성장하였다. 특별히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이후에 신자가 급증했다는 것은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48)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밀려드는 서구문화를 보면서 나라의 개화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서구문화의 유입이 종말의 징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초기 초기한국교회의 이중적인 태도가 들어난다. 한편으로는 서구문화를 발전의 증거로 보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문화를 종말의 증거로서 보는 것이다. 아마도 초기 한국교회는 전자의 입장이 강했지만, 점점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고 기독교가 근대화의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부터 후자의 입장이 들어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종말론에 대한 최초의 글을 남긴 사람은 성결교회의 김상준이다. 그는 1918년에 [묵시록강의]를 출판했다.49) 여기에서 그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에 입각하여 묵시록을 강해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적으로 종말론을 널리 전한 사람은 길선주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주역인 그는 105인 사건에서 큰 아들을 잃고, 3.1 독립선언서에 기독교의 대표로 서명을 하였다. 이 시대에 길선주는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길선주는 원래부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졌지만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면서 이런 종말론적인 신앙은 더욱 깊어져갔다.  길선주는 감옥에서 그의 기존의 묵시록강의를 재정리하였고, 말세학강의를 체계화하였다. 이것은 출감후 부흥회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의 말년의 부흥집회는 종말론강의였다고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50) 그는 요한계시록만 1만 2백회 독파하여 거의 암송할 지경이었다.51)

길선주의 대표적인 저작은 [말세학]이다. 이 말세학을 통하여 길선주의 종말론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길선주는 세대주의 신봉자였다. 세대주의란 인류의 역사를 몇세대로 나누고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독특한 섭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길선주는 일반적인 세대주의와 같이 인류의 역사를 일곱으로 나누고, 1. 창조부터 범죄까지의 무죄시대, 2. 범죄부터 노아홍수까지의 양심시대, 3. 홍수후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인권시대, 4. 아브라함부터 모세까지의 허락시대, 5. 모세부터 예수 때 까지 율법시대, 6. 예수 때 부터 7년 대환란까지의 은혜시대, 7. 천년왕국시대부터 무궁시대까지 안식시대로 나누고 있다.52)

둘째, 길선주는 전천년설을 따른다. 그는 [말세학]의 첫머리에서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을 비판하고 전천년설을 주장한다:53)

첫째로 천년안식세계뒤에 주의 재림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합당치 아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환자의 병이 다 나은 뒤에 의사의 소용이 없으며 세사이 광명하다면 빛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이 병들었으므로 의사되시는 예수를 갈망하는 것이요, 시대가 암흑하므로 빛이신 예수께서 오시어 광명한 천년왕국을 건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또는 주의 재림이 없다고 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말이요, 또는 신앙의 좀이다. 주의 재림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의 과녁이요, 소망의 영역이다. ... 주께서 반드시 오셔서 천년안식을 건설하실 것은 성경전부를 자세히 연구할수록 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뿐더러 주께서 빨리 재림하실 것이 사실임을 더우기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길선주는 낙관주의적인 후천년설도, 칼빈정통주의의 무천년설도 다같이 비판하고 있다. 특별히 그가 칼빈정통주의의 무천년설54)을 "신앙의 좀"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을 보면 길선주 뿐만이 아니라 초기 한국교회의 종말론이 얼마나 철저히 전천년설에 입각하고 있는가를 볼수있다. 이것은 한국의 초대교회가 칼빈정통주의인 장로교구파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중요한 대목이다. 

세째, 길선주는 문명의 발전 가운데서 종말의 징조를 보고있다. 전천년설의 기본전제는 비관주의적인 역사관이다. 역사는 점점 타락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길선주도 그의 설교의 많은 부분을 종말의 징조를 입증하는데 할애했다. 그가 종말의 증거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권의 신장, 어른 멸시, 형제간의 싸움, 신분의 무시, 전화, 라디오, 비행기등 통신수단의 발달, 지진, 인구의 증가,전쟁, 사술과 이단의 등장, 유대인의 환국, 국제연맹의 등장, 공산당등이다.55) 여기에서 기독교를 서구문화화의 수단으로 보려는 초기의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이 왜 1920년대와 30년대에 교회를 떠나게 되는가를 찾아 볼 수 있다.

이상의 것들은 길선주의 독창적인 것들이 아니다. 이미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나와있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길선주의 말세론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변화무궁세계이다.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으로 7년환란이 시작되고, 그 뒤에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으로 천년왕국이 시작된 뒤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이 있은 후 신천신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신천신지는 기존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길선주는 이런 일반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성서가 말하는 신천신지는 세상을 불로 심판하여 없애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요, 기존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자연계의 물체는 다 변화작용으로 이 물질이 저 물체로 변하고, 이물질이 저물질로 化成하는 것 뿐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하나도 그 질까지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56)

길선주의 말세학은 단지 학문이 아니라 1920년대와 30년대의 한국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복음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선생의 손에 세례받은 자 3천인 이상이요, 구도자 7만인이라 하니 기실 40만 교인중에 선생의 감화를 받지 아니한자 적으리로다."57) 따라서 길선주의 종말론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종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길선주의 종말론을 김인서는 "조선신학"이라고 불렀다.58) 물론 길선주의 종말론이 거의 구미의 종말론을 답습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것을 한국인의 가슴속에 깊이 심어 한국인의 종말론으로 만들었던 것이다.59)              

   

 2.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

    

종말론은 한국교회 초기 부터 지금까지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한국교회의 모든 이단의 배경에는 잘못된 종말론이 자리잡고 있다. 해방 이후만해도 통일교의 문선명은 자기를 재림주라고 주장하며, 전도관의 박태선은 자신을 말세의 감람나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종말론은 성서의 내용과 한국의 정감록과 같은 민간신앙을 혼합하여 만든 것이다.

최근에 한국교회에는 또 다른 차원의 종말론이 열풍처럼 지나갔는데 그것은 이장림을 중심으로한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이다.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이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준 이유는 그의 종말론이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장림은 기존의 전천년설에 1992년 10월 28일이라는 재림의 날짜를 정해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므로 한국교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심지어 일반 매스컴에서도 10월 28일에 예수의 공중재림과 신자의 휴거가 이루어지는가를 확인하고자 대규모의 취재단을 다미선교회의 집회장소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세대주의는 종말을 강조하면서도 종말의 날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침례교 목사인 밀러(William Miller)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1844년 10월 22일 재림한다고 예언하였는데 그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 이것을 역사적인 경험으로 그 이후에 발전하기 시작한 세대주의는 종말의 날짜를 언급하지 않고,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입장을 견지하여 왔다. 다른 말로하면 주님은 언제 오실른지 모르며, 또한 언제고 오실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Any Time Theory"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장림은 왜 이런 기존의 종말론에서 벗어나서 시한부종말을 말하게 되었을까? 첫째는 이장림의 시한부종말론의 근거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서기 2000년의 전해인 1999년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주장은 인류의 역사는 창조의 7일에 비추어 7000년이며, 7일은 안식일이므로 6000년 부터 새로운 천년왕국이 시작되고, 서기 2000년은 바로 그 6000년에 해당되는 해라는 오래된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1999년에 지구의 종말이 오려면 그 앞에 7년 대환란이 있어야 하며, 그러면 7년 대환란은 바로 1992년이라는 계산이 가능한것이다.

둘째는 이장림은 많은 사람들의 계시를 근거로 하여 1992년 10월 28일의 종말을 주장하고 있다. 이장림은 전세계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수집하여 그것을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이 점이 이장림의 독특한 점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장림을 종말론기자목사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장림이 이런 취재원으로 부터 끊임없는 계시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이장림의 주장에 의하면 이들이 한결같이 1992년 10월 28일을 종말의 날로 계시받았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서의 그날과 그때를 모른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이 아니라, 성서의 계시외에 개인의 사적인 계시에 의존하여 주장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교회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도 불발로 끝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기독교의 대외적인 공신력을 크게 추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종말론을 숙고해보는 계기를 가져왔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한국교회의 종말론의 주류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다. 박형룡박사를 중심으로한 장로교보수파에서도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수정하여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한다. 역사적 전천년설이란 그리스도의 공중재림과 7년대환란설을 부인하지만 다른 점에서는 전천년설을 받아들인다.60) 그런데 다미선교회사건은 천년왕국사상 자체를 부정하려는 경향을 나타냈다. 장로회신학대학의 조직신학교수인 김명용은 모든 종류의 천년왕국설을 배제하고 칼빈과 개신교정통주의로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적 전천년설이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든 모두 비성경적이고, 종교개혁자들에 기초한 정통적인 개혁신학에서 빗나간 잘못된 종말관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61) 김명용은 종말론의 왜곡된 주장에 대한 반발로 무천년설을 주장하였지만 이것이 한국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좀더 두고보아야 할 것이다.        

 

IV. 맺는 말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복음은 한국성결교회가 강조해온 성결교회의 중심교리이다. 그러나 사중복음은 성결교회 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중심 메시지였다. 이것은 사중복음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에서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알수 있다. 논쟁은 한상 주변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중복음을 둘러싼 논쟁이 많았다는 것은 그것이 한국교회의 중요한 과제라고 하는 것을 뜻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부터 강조되어 온 복음이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 1921년의 경성성서학원의 성결운동, 김익두의 신유집회, 길선주의 종말론 강의는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있던 중요한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소수의 학자들의 이론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 교회적인 지지 아래 이루어졌다. 교회의 역사가 몇몇 신학자의 학설의 역사나, 몇몇 정치가의 교권쟁탈의 역사가 아닌 일반교인들의 생생한 신앙 모습을 담아야 한다면 사중복음의 한국교회사에서의 중요성은 더욱 클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구원파 문제로, 신유는 베뢰아 아카데미에서, 재림은 다미선교회에서 각각 그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것은 대중지향적인 신앙운동이 건전한 성서적, 신학적인 배경을 갖추지 못할 때 어떤 위험성을 갖게 되는 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성서해석이 기독교 역사의 유산을 무시하고 이루어 질때, 또한 한국의 샤만니즘과 무분별하게 결합되어 질 때 여기에는 심각한 신학적인 이탈이 생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본인은 이런 문제의 해결책은 성결의 복음을 바로 강조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단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건전한 윤리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중생파는 율법폐기론의 위험을, 베뢰아의 귀신론과 다미 선교회의 종말론은 현실도피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이런 잘못된 사상은 성결의 복음을 바로 강조할 때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재미있는 현상은 한국교회에서 아직 지나친 성결의 강조로 인해서 교회에 파문을 일으킨 이단은 없다고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성결의 강조로 인한 펠라기안적인 완전주의의 위험 보다는 성결의 무시로 인한 비도덕적인 위험에 더 크게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중복음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메시지였다. 죄에서 벗어나 성령으로 거듭나고, 보다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질병에서 벗어나 치유되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은 한국 신앙인의 주요 관심사이다.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 신학계는 추상적인 사 보다는 목회현장의 실질적인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여 이런 복음이 왜곡되지 않고, 바로 잘 증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1. Nathan Hatch, "Foreword," in Harry Stout, The Divine Dramatist: George Whitefield and The Rise of Modern Evangelicalism (Grand Rapids: Eerdmans, 1991), X.  

2. 여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인의 "청교도의 신학과 회심," [회심], 홍성철 편저 (서울: 도서출판 세복, 1994): 63-88을 참조하시오. 최근에 청교도의 회심에 대한 여러 측면의 연구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Wm. K. B. Stoever, 'A Faire and Easie Way to Heaven': Covenant Theology and Antinominianism in Early Massachusetts (Middletown, CN: Wesleyan University Press, 1978); Charles L. Cohen, God's Caress: The Psychology of Puritan Religious Experienc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3. Richard F. Lovelace, The American Pietism of Cotton Mather: Origins of American Evangelicalism (Grand Rapids: Christian University Press, 1979), 73.

4. John Wesley, Concise Ecclesiastical History (1781). Colin W. Williams, John Wesley's Theology Today (Nshville: Abingdon, 1960), 171에서 재인용.

5. 19세기의 복음주의적인 성결운동의 여러 모습과 그들의 성결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Myung Soo Park, "The Concepts of Holiness in the American Evangelicalism: 1835-1915" (PhD diss., Boston University, 1992).

6. 여기에 대한 논의는 본인의 "근대복음주의 신유운동의 역사와 신학," [목회와 신학] (1994/2)을 참조하라.

7. 여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인의 "성결교회와 신앙선교," [선교세계], (1994)와 "근대복음주의의 종말론과 성결교회," [신학과 선교], (1995)을 참조하시오.

8. 만국성결연맹에 대하여는 필자의 미발표 논문, "만국성결연맹, 동양선교회, 그리고 한국성결교회"(1995년도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레 회심강좌에서 발표)를 참조하라.

9. "Constitution of the General Cou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Annual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Oct. 1909), 35.

10. 여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로는 이덕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이야기] (서울: 전망사, 1990)이 있다.

11. J. B. Moose, "Report of the Seoul Circuit," Minutes of the Annual Meeting of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04), 41; 이덕주, "초기 한국교회의 민족교회적 성격,"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158.

12. 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 (서울: 기독교문사, 1971), 86.

13. G. S. McCune, The Holy Spirit in Pyeng Yang," Korea Mission Field (Jan. 1907), 1.

14. 이덕주, [개종이야기], 370.

15. 정동섭, "구원파는 왜 이단인가," [세칭 구원파의 정체], 탁명환 편저 (서울: 한국종교문제연구소/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91), 187.

16. 자세한 내용은 탁명환 편저, [세칭 구원파의 정체]를 참조하시오.

17. 권신찬, "성경대로 믿는 신앙," [목회와 신학] (1991년 3월).

18. 권신찬, [서로 사랑하라], 27; 정동섭, "구원파는 왜 이단인가?" 206에서 재인용.

19. 탁명환 편저, [세칭 구원파의 정체], 23.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런 구원파의 주장은 달비를 중심으로 일어난 형제파의 견해와 같다. 형제파의 도덕폐기론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필자의 "Concepts of Holiness in American Evangelicalism: 1815-1915," 226-242를 참조하라.

20.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탁명환, [세칭 구원파의 정체]에 수록되었다.

21. 교회의 역사에 중생의 체험을 강조한 그룹이 있는 반면에 중생은 세례시에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중생의 분명한 체험이 필요없다고 보는 그룹이 있다. 사실 천주교에서는 세례시에 영생의 씨가 자동적으로(ex opere operato) 신자에게 주입되므로 세례와 더불어 중생이 시작된다고 본다. 이것을 세례적 중생(Baptismal Regeneration)이라고 부른다. 이런 세례적 중생은 주로 국가교회나 고교회적인 형태의 교회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강한 복음주의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세례를 중생의 표시로 보지는 않는다.  중생에 관한 복음주의와 고교회적 견해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조하라: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191ff; 차영배, [성령론] (서울: 도서출판 경향문화사, 1987), V.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전제설 비평.   

22. 이명직, "은혜기"(하), [활천], 1924년 10월호; 박명수, "각성운동의 원형: 1921년의 경성성서학원의 대 부흥운동," [활천], 1995년 3월, 42-44.

23. 이명직, "은혜기"(하), 11.

24. 윗 책, 41.

25. 이명직, [성결교회약사], 39.

26. 이명직, 윗책, 40.

27. 이눌서, "영국 웨일스, 인도, 조선 三處의 부흥연락," [신학지남], (      ): 458-463. 1907년 부흥운동의 국제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되지 않았다. 1907년의 부흥운동은 20세기 초에 일어난 전세계적인 부흥운동의 일환이다. 웨일즈의 부흥운동은 미국 LA와 인도, 한국, 중국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조: J. S. Gale, Korea in Transition (New York: Laymen's Missionary Movement, 1909),215-221.

28. 가옥명, [성령론], 정재면 역 (평양: 장로회신학교, 1931), 81-82.

29. 윗 책, 83.

30. 윗 책, 85.

31. 윗 책, 90-93.

32. Benjamin B. Warfield, Perfectionism 2 vol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1). 이 책은 후에 단권으로 축소되어 Studies in Perfectionism (Philis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58)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33. 이명직, [성결교회약사] (경성: 동양선교회성결교회이사회, 1929), 53. Cf.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21일; 1909년 9월 14일; 1910년 7월 15일 사설참조.

34. 임택권 편저, [조선예수교회이적명증] (서울: 조선야소교서회, 1921), 5.

35. 윗책, 1-2.

36. 민경배, "김익두의 부흥운동과 그 이적치병," [일제하의 한국기독교 민족/신앙운동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304쪽에 임택권의 저서를 기초로 하여 작성한 1919년 12월 부터 1921년 1월 까지의 김익두목사 치병일람표(52항목)가 실려있다.

37. "경성교회의 火洗論," [기독신보] (1920년 11월 3일).

38. 임택권,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 4.

39. 임택권 편,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 5.

40. J. N. Mills, The Cause of Changes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Feb. 1922): 118; 민경배, "김인서의 부흥운동과 그 이적치병," 289.

41. 이덕주, [개종이야기] (서울: 전망사, 1990), 360.

42. 최삼경,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90), 23-24.

43. 김기동, [성서적, 신학적, 현상적 마귀론] (서울: 도서출판 베뢰아, 1988), 211-230. 김기동의 귀신론과 그에 대한 비판을 개괄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두란노 편집, [마귀론 대해부]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2)를 참조.

44. 김기동, [성서적 신학적 현상적 마귀론], 231-239.

45. 목창균, "무속신앙의 영향과 한국교회와 마귀론," [마귀론 대해부]; 박명수, "한국문화와 기독교의 과제," [활천], 1985년 3월호 참조.

46.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미국복음주의에 대한 가장 좋은 연구는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he Twentieth 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0)이다.

47. A. J. Brown, The Mastery of the Far East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19);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134에서 재인용.

48. 심창섭,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종말사상," [목회와 신학] (1990년 4월), 45; 심창섭,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종말론 흐름," [재림과 종말], 두란노(편)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1): 27-48.

49. 김상준, [묵시록강의] (평양: 조선야소교감리회, 1918).

50. 길진경, [靈溪 吉善宙] (서울: 종로서적, 1980), 280.

51. [靈溪先生小傳], 김인서저작전집 (서울: 신망애사, 1976), V: 67;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351.

52. 길선주, [말세학], 영계길선주목사유고선집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8), 29.

53. 길선주, [말세학], 23-25.

54. 칼빈은 천년왕국설자들의 주장을 가리켜 "그들의 주장은 허구이며, 너무 유치하여 논박할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배격하였고, 유럽의 개혁파교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제2헬베티아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에도 천년왕국설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있다. "우리는 심판의 날 이전 지상에 황금기가 있을 것이라는 것과 또한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적들 및 불경건한 자들이 진멸된 후에 세상에 속한 왕국의 소유물을 취할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망상을 거부한다." 김명용, "1992년 재림론, 천년왕국, 열 뿔 짐승과 666," [시한부 종말론, 과연성서적인가?]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국, 1991), 128.

55. 길선주, [말세학], 39-72.

56. 길선주, [말세학], 135-37. 김인서는 이 변화무궁세계에 대한 주장은 길선주의 독특한 사상이라고 주장한다([영계선생소전], 70). 그러나 길선주의 말세학 이전에 출판된 김상준의 [묵시록강의]에는 옛세상이 없어진다는 소멸설과 옛 세상이 새롭게 개조된다는 一新改造說을 소개하며, 일신개조설이 다수의 의견이라고 말한다. 김상준 자신은 판단을 유보하며, 마지막 시대에 가서야 알 것이라고 말한다([묵시록강의], 252-253).    

57. 김린서, [한국교회 순교사와 그 설교집] (부산: 신앙생활사, 1962), 74-75;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351.

58. [영계선생소전], 70.

59. 송길섭교수는 길선주의 종말론에 "전천년완국설, 후천년왕국설 또는 무천년왕국설에 대한 언급이나 비판이 없고 그가 이해한대로의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예고하고 있다"고 말하여 그의 종말론이 그의 독창적인 것이라고 시사해 주는데 이것은 오해라고 생각된다.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한국기독교백년대계 2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7), 276.

60. 박형룡, [내세론], 교의신학 제 5권 (서울:       ), 278.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종말신학적 전통은 역사적 전천년기 재림론이다. 구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오랜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친 이율서(W. D. Reynolds)박사가 역사적 전천년기 재림론을 강의하였고, 그후 8.15 광복 후 남한의 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에서 여러해에 걸쳐 조직신학을 강의한 필자[박형룡]도 역사적 전천년기 재림론응 전하였다."

61. 김명용, "1992년 재림론, 천년왕국, 열 뿔 짐승과 666," [시한부 종말론, 과연성서적인가?],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