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성결연맹, 동양선교회 그리고 한국성결교회

박명수

 

                      

들어가는 말

최근 한국성결교회의 정체성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촛점이 되는 문제는 한국성결교회와 만국성결연맹의 관계이다. 성결교회 초기역사의 결정적인 자료인 이명직 목사의 [성결교회약사]에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의 신앙개조는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내심과 요한 웨슬레의 성경해석의 근본적 됴리와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주 강생 일천구백이십오년에 공포하여 성서학원과 모든 교회의 신도들에게 가라쳐 영구하도록 지키는 신경으로 하나니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이명직목사는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인 뿌리가 웨슬레와 만국성결교회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성결교회는 만국성결연맹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다. 한국성결교회는 카우만과 길보른이 "후원자도, 아무런 교단적인 배경도 없이" 동양선교에 임했다는 말을 너무나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동양선교회의 배경이 되는 여러 운동들에 대해서 전혀 연구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된것은 일차적으로 동양선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양선교회는 한국성결교회가 다른 성결단체들과 유대관계를 맺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성결교회를 세계성결운동단체에 소개하여 주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성결교회는 자신들이 세계성결운동의 주역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세계성결단체들은 한국성결교회를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존스(Charles E. Jones)가 쓴 성결운동연구의 안내서인 [성결운동연구안내](Guide to the Study of the Holiness Movement)에는 일본성결교회와 운동에 대하여는 소개되었는데 한국성결교회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한국성결교회가 진정 세계성결운동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성결운동단체들을 연구하고 그들과 힘을 합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성결교회의 책임도 크다. 한국성결교회는 지금까지 성결교회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연구하여 보지 못하였다. 한국성결교회와 18세기 웨슬레신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교적 활발하게 연구하여 왔지만 보다 성결교회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까왔다. 그 결과 어떤 성결교회의 중진목사는 이명직목사의 [약사]에 나오는 만국성결교회라는 말은 이명직목사가 당시에 성결운동이 만국에 퍼져있는 줄로 잘못알고 사용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국성결교회의 지도적인 인사들 까지도 만국성결교회의 존재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한국성결교회는 자신들의 배경에 대해서 보다 진지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연구해보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최근에 만국성결연맹과 한국성결교회와의 관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 중에는 조종남박사의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사중복음] (서울신대출판부, 1991)과 [이명직목사가 주창한 성결교회의 신학적 계통과 입장] (서울신대출판부, 1991)이 있다. 또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성결교회의 공식적인 역사인 [성결교회사] (서울: 기독교대한 성결교회출판부, 1992)에 만국성결연맹와 한국성결교회의 관계가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이런 연구들은 매우 의미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연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동양선교회는 초기부터 "아무런 교파의 배경이 없이, 특정한 선교부의 지원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동양에 선교하러 왔다고 밝혀왔다. 그러면 동양선교회의 배후에 만국성결연맹이 있다는 말은 무었을 의미하는 말인가? 이 말은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연맹의 선교기관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 아무런 배경이 없이 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지 아니한가? 아직도 이런 문제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만국성결연맹과 한국성결교회의 관계는 아직 공정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본논문에서 이 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다루기 위하여 먼저 만국성결연맹의 창립에 결정적인 역활을 한 말틴 웰스 ?(Martin W. Knapp)의 생애와 만국성결연맹의 성격을 살펴본 다음에, 이들과 동양선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한 다음에, 한국성결교회와의 관계를 서술하려고 한다. 이렇게 할때 만국성결연맹과 한국성결교회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배경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성결전도자 말틴 웰스의 생애와 사역

A) 웰스의 성장과 초기 사역

19세기 말에 감리교회에서 추방되어 형성된 성결단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사렛교회외에 만국성결연맹이다. 나사렛교회가 보다 전국성결연합회의 로선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단체라면, 만국성결연맹은 나사렛교회보다 좀더 급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국성결연맹은 웨슬레안 성결운동의 전통에 서있지만, 19세기 말의 미국복음주의 운동의 전반적인 흐름에 깊게 영향을 받고 있다. 이 단체는 1897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웰스 중심으로 만국성결연맹 및 기도동지회(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따라서 웰스의 생애를 중심으로 만국성결연맹의 모습을 추적하려고 한다. 물론 웰스와 더불어서 리쓰(Seth C. Rees)도 만국성결연맹의 창시자로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자료와 지면의 한계로 ?만을 다루려고 한다.

웰스는 1853년 3월 27일 미시간의 칼훈 카운티(Calhoun County)의 감리교가정에서 태어났다. 농촌에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던 그는 17살에 알비온대학(Albion)에 들어가게 되었다. 알비온대학에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여자친구 글렌(Lucy J. Glenn)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인도로 19살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체험을 하였다. 웰스는 어려서부터 신앙적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가 분명한 회심의 체험을 한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그후 약간의 방황이 있었지만 ?은 그를 복음적 체험으로 안내한 글렌과 24살에 결혼하고 대학을 마치기도 전에 곧 바로 감리교의 교역자로서 목회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후 약 8년 동안 그는 미시간연회에서 감리교의 교역자로서 일했다.

미시간연회에서 목회하던 1882년 여름 웰스는 윌리암 테일러(William Taylor)의 집회에 참석하여 한편으로는 그의 사역을 도와주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 테일러는 웨슬레안성결운동의 지도자이며 특별히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 테일러는 1884년 감리교의 선교감독이 되었다. 이 집회에서 웰스는 더 깊은 은혜를 추구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다시 말하면 성결의 은혜를 갈망한 것이다. 그후 그는 교회에서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의 복음을 전파하지만 마음은 답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따로 시간을 내어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다. 이 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요한 1서 1장 7절의 말씀이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사하실 것이요." 이 말씀을 읽을 때 웰스는 자신의 불신앙이 깨달아졌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빛가운데 행하면 모든 죄에서 사해주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못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였다. 모든 죄를 내놓고 회개하는 빛 가운데 거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였다. 이 때 그의 마음 속에서는 평화가 임했고, 모든 죄에서 해방 되었다는 성결의 확신이 왔다.

그러나 그의 체험은 성결의 체험에서 끝나지 않았다. 웰스는 오랫동안 일사병으로 고생하였고, 이것 때문에 대학공부를 계속하기 힘들었고, 동시에 목회에도 큰 지장이 있었다. 그리해서 의사는 목회를 그만 두고 쉬라고 강하게 권고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런 성결의 체험시에 신유의 체험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영과 육의 축복을 동시에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은 이 육체적인 치유는 영적인 축복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뒤에서 우리가 언급하겠지만 ?에게는 성결의 복음이 신유의 복음으로 자연히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런 영육의 구원은 그가 외치던 온전한 구원의 구체화였던 것이다.

이 체험 가운데 웰스는 세가지 분명한 확신을 가졌다. 첫째는 이 체험은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던 성결의 체험이요, 두번째는 신유의 복음에 대한 구체적인 확신이요, 세번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개교회 목회 보다는 특별한 전도사역으로 인도하신다는 확신이다. 이런 ?의 체험에서 우리는 그가 후에 설립한 만국성결연맹의 성격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만국성결연맹은 영육을 포함한 온전한 구원을 선포하며, 동시에 새로운 교파교회를 설립하기 보다는 특수전도의 사역을 감당하려고 했던 것이다.

특별히 이런 체험 후에 웰스는 곧바로 테일러에게 선교사로 갈 것을 지원하였으나, 테일러는 그의 건강을 고려하여 그의 지원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열정은 그에게 계속 남아 있었다. 그가 다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부흥사역에 나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1886년에 전임 부흥사가 되기 위하여 연회에 청원을 하였고, 연회는 그것을 허락하였다. 이 당시에 미국전역에는 수많은 성결부흥사들이 있었는데 1887년에 전국성결촉진캠프집회연합회에 가입된 부흥사들의 숫자는 206명에 이르렀고, 이 숫자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였다. 웰스도 이런 성결부흥사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전임부흥사로서의 사역외에도 웰스는 이 당시에 출판사역을 시작하였다. 19세기의 성결운동은 말로 복음을 전했을 뿐만이 아니라 문서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웰스는 알비온에 출판사를 만들어서 자기의 책을 출판하고, 다른 성결운동가의 책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웰스는 많은 성결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 중 초기의 대표적인 것이 Christ Crowned Within (1886)과 Out of Egypt into Canaan(1887)이다. 이 책들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웰스는 1888년 6월 월간성결잡지를 시작하였는데 그 명칭은 [부흥사](The Revivalist)였다. 웰스는 이 잡지를 통하여 많은 성결지도자들과 접촉하였고, 또한 성결운동의 지도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웰스는 이런 잡지의 출판과 더불어서 계속 Revival Tornadoes; or Life and Labors of Rev. James H. Weber(1889), Revival Kindlings(1890), Impressions(1892) 같은 단행본도 세상에 내 놓았다.

웰스의 초기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성결운동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힐쓰는 그가 쓴 웰스의 전기에서 그의 초기사역을 보기 드문 성공적인 경우라고 평가하면서 그의 출판사와 그의 저서들은 성결운동가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받는 출판사역이 되었고, 그의 부흥사역 역시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놀라운 성공을 경험하는 가운데서 그는 그의 초기사역에서 가장 아픈 경험을 하였다. 그것은 그의 아내요, 사역에서 동료였던 루시가 1890년 9월 5일 사망한 것이다. 루시는 웰스의 출판사역의 보조자였는데 루시가 아플 때, 펄(Miss. Minnie Ferle)이 루시를 대신하여 임시로 출판사역을 도왔었다. 자연히 루시의 사망과 함께 펄이 그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1892년 11월에 결혼하였고, 결혼 후에 보다 넓은 도시인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로 옮겨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을 포함한 많은 성결운동가들은 여성들의 사역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부인을 사역에 있어서 신뢰할 수 있는 동료로서 이해하고, 그렇게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B) 웰스의 신시내티에서의 사역

웰스의 신시내티 사역 역시 전형적인 성결부흥사의 면모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그는 여전히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출판사업을 확장하였다. 여기에 덧 붙여 ?은 신시내티에서 새로운 성결단체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성서학원이라는 사역자 양성기관을 설립했다. 또한 그는 신시내티 부근에 캠프집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래서 웰스는 신시내티를 성결운동의 중심지의 하나로 만들었던 것이다.

신시내티는 원래 "불타는 지역"(burnt district)이라고 불리울 만큼 성결운동의 중심지였다. 1870년대에 이 도시에 전국성결연합회의 지도자들인 인스킵(Inskip), 맥도날드(McDonald), 로우리(Lowrey) 등이 와서 놀라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은 끝내 건전하게 나가지 못하고 지나친 환상주의에 빠져서 결국 자멸하고 말았다. 지나친 환상주의는 힐쓰의 표현대로 한다면 성결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사탄의 가장 훌륭한 사역"이다. 그후 신시내티에서의 성결의 열기는 식어있었다.

그러나 신시내티의 열심있는 신자들 가운데서는 이 도시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고, 이들은 웰스를 신시내티로 초청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웰스가 도착한 것이다. 웰스는 신시내티를 다시금 성결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세기 후반의 성결운동의 주요지도자였던 힐쓰는 웰스의 신시내티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미국의 어떤 도시도 지금 신시내티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큼 그렇게 완벽하게 시작되고, 그렇게 잘 강화되고 조직되며, 그 계획에 있어서 그렇게 포괄적이고, 그 성취에 있어서 놀라웁고 당당한 성결의 사역은 없다. 이 작은 감리교 설교자의 신시내티로의 여행은 작은 사도 바울의 로마로의 여행과 같다." 신시내티에서의 웰스의 첫번째 사역은 성결집회를 여는 것이었다. 웰스는 신시내티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집에서 "성결연합회"(Holiness Association)을 조직하였다. 이 연합회의 목적은 성결신자들을 모아서 신시내티를 중심으로 성결사역을 확장시키는데 있었다. 이 모임은 매 주일 오후에 신시내티에 소재한 성요한 감리교회에서 열렸다. 이 성결연합회는 1893년 봄에 그 지역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시내티의 삼위일체 감리교회에서 연합성결집회를 계최하였다. 이 모임을 계기로해서 형성된 것이 "중앙성결동지회"(Central Holiness League)였다. 목적은 같았으나 조직의 규모는 보다 확대 되었다. 이 모임은 신시내티의 YMCA건물을 빌려서 매주 화요일에 성결집회를 가졌고, 또한 주일 오후에는 신시내티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집회를 가졌다. 이 중앙성결동지는 미국중부의 주요한 성결단체가 되었다. 얼마 안가서 이 모임은 또 다른 단체를 낳았다. 그것은 "국제부흥기도동지회"(International Revival Prayer League)이다. 이 모임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기도로서 신약성서의 부흥의 불길을 이르키자는 것이었다.

웰스는 켄터키, 버지니아, 테네시등의 산산마을의 영적인 상태와 교육에 대해서 많은 염려를 하였다. 그리하여 이 산간지역에 캠프집회장소를 마련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산간지역의 선교와 교육사업을 병행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런데 이런 계획을 알고 몇몇 신자들이 켄터키의 산간지방에 수백에이커의 땅을 기증하였다. ?은 이곳에 캠프장소를 마련하고, 이곳을 뷸라 하이츠(Boulah Heights)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1895년부터 매년 여름에 캠프집회를 열고, 또한 이곳의 주위에 있는 취학의 기회를 얻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뷸라 하이츠 성결기초학교(Beulah Heights Holiness Primary School)를 열었다. 이 학교는 첫해에 25명의 학생이 등록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운동이 산간의 교육사업과 함께 이루어졌음을 알수 있다. 캠프집회를 위한 시설이 동시에 교육을 위한 시설로 바뀌어 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캠프집회장소는 후에 성경학교나 기독교대학으로 발달하였다. 이것은 무디의 부흥운동의 경우와 매우 비슷한 것이었다. 무디의 사역에 있어서도 부흥운동과 시골확생들의 교육사업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뷸라 하이츠의 모습에 대한 리쓰의 증언은 이것을 뒷받침해 준다: "어린이들은 일고 쓰는 것을 배우며, 동시에 예수가 그들의 구주요 거룩케 하는 분이라는 생생한 지식을 얻는다. 구원의 소식을 담은 책, 책자, 팜플렛등이 이곳에 놓여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보내온 의류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지고 있다. ?이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업훈련원(Industrial Home and School)을 설립하여 가난해서 도시학교에 갈수 없는 사람 들이 와서 일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하여 미래의 사역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성결운동이 사회개혁운동과 만나고 있다.

뷸라 하이츠는 신시내티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캠프집회를 열기에는 적합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886년에는 뷸라 하이츠 집회외에도 신시내티에 가까운 곳에 구원공원캠프집회(Salvation Park Camp Meeting)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여름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는 많은 지도적인 성결부흥사들이 참석하여 집회를 인도하였으며 또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웰스의 신시내티 사역은 일종의 성결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렇게 ?의 성결운동이 중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판사역 때문이다. 웰스의 [부흥사]는 성결운동의 중요한 언론매체였으며, ?의 출판사는 성결운동의 지도자들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힐쓰, 갓비(William Godbey), 리쓰등이었다. 힐쓰의 경우는 예외적이지만 이들은 전국성결연합회 보다 좀 더 과격한 그룹이었다. 즉 중생, 성결이외에도 신유와 재림을 전하였다. 이것을 이들은 온전한 복음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의 출판사를 통하여 책을 출판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웰스가 주최하는 부흥집회에 초청받아서 부흥회를 이도하기도 하였다. 웰스의 집회는 1896년에 이어 1897년에도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서 형성된 것이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이다. 이 모임은 원래 있던 기도동지회를 확대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만국성결연맹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하게 언급할 예정이다.

이렇게 급속도로 ?의 성결사역이 확장된데에는 무엇보다도 웰스의 출판사역이 주요한 역활을 감당했다. 1888년에 시작된 ?의 월간잡지 [부흥사]에는 웰스의 사역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였고, 이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 성결사역을 도왔다. 원래 8페이지의 뚽간잡지로 시작되었던 [부흥사]는 창간 10주년이 되는 1899년 1월 부터 주간으로 바꾸었고, 매달 평균 20.000부가 보급되었고, 그 범위는 전국에 걸쳐있었다. 이 잡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성결운동의 모습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이다.

또한 웰스의 저작활동은 신시내티에 와서도 활발하였다. 성결에 관한 일반신자들의 궁금증에 대하여 답한 것이 The Double Cure(1895)이다. 그 뒤에도 참된 성결체험과 거짓된 성결체험에 대하여 설명한 Lightening Bolt from Pentecostal Skies(1898)과 10계명을 설명한 The River of Death(1898)등이 있다. 웰스의 저작활동은 매우 활발하여 여기에서 언급한 책외에도 많은 책을 남겼다. 그의 글은 매우 대중적이며,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풍자와 더불어 철저한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성결운동가들 가운데서 비교적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웰스의 신시내티 사역 가운데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성서학원 및 선교사훈련원(God's Bible School and Missionary Training Home)이다. 우리는 위에서 웰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을 살펴보았다. 19세기 후반의 복음주의자들 가운데는 신학교육에 많은 회의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신학교육이 너무 사변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신학교들이 대학의 졸업을 입학자격으로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명이 있어도 신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복잡한 이론교육이 아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누구에게나 문호를 개방하는 성서학원이 설립되게 되었다. 이 성서학원의 대표적인 모델이 무디성서학원이다. 웰스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아 성서학원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1900년 ?은 그의 잡지 [부흥사]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특별기도를 요청하였다. 그 내용은 성서학원의 설립에 관한 것이었다. 즉 성서학원및 선교사훈련원을 설립하려고 하니 기도와 후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후 [부흥사]의 6월 21일자에는 보다 구체적인 성서학원의 계획이 실려있다. ?은 일찌기 세계선교에 대해서 꿈을 가져 왔고, 그런 선교를 위해서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세례로 성화되고, 성령의 은사로 능력충만한 사역자가 필요했다. 그런 사역자를 길러내기 위해서 성서학원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성서학원의 주요 목적은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것이다. 다른 과목은 그것을 돕기위해서 존재한다. 또한 성서학원은 훈련원이라는 이름을 같고 있다. 즉 성서학원의 목적은 이론교육이 아니라 현장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데 있다. 웰스의 이런 정신은 당시의 성서학원운동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웰스는 1900년에 그가 계획한 성서학원을 세웠고, 이 학교는 20세기 초의 성결운동의 하나의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C) 웰스의 성결운동과 감리교회

웰스가 만국성결연맹과 같은 성결단체들을 만들 때, 그가 새로운 교파를 만들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기존교회내에서 성결의 복음을 전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을 모아서 그 은혜를 지속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런 성결운동은 감리교내에서 여러가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감리교의 당국은 될 수 있으면 이런 특별집회를 막으려고 했고, 성결파교역자들을 가장 어려운 교회로 파송하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많은 성결파교역자들은 감리교당국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점에 있어서 웰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898년 웰스는 매릴랜드의 치사피크성결연맹(Chesapeake Holiness Union)의 초청으로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회가 열리고 있는 지역의 감리교 감리사와 감리교회들은 이 집회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리해서 그곳의 감리사는 웰스가 속해있던 미시간연회에 편지를 내서 웰스는 그곳에 오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런 요청을 받은 미시간연회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 결과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판결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런 행동이 반복될 경우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에 ?은 다시금 초청을 받아 매릴랜드에 가서 집회를 인도했다. 그 결과 다시금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은 이번 경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웰스는 자기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감리교는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성결을 전한다고 해서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감리교당국은 웰스가 감리교장정 223항을 어겼다고 주장한다. 이 조항의 내용은 감리교의 순회설교자들은 그 지역의 교역자들이 집회를 인도하지 말것을 요청할 경우 그 집회를 취소해야 하며, 이것을 어길 경우에 징계를받게 된다는 것이다. 웰스는 이 조항의 원래의 목적은 잘못된 가르침을 방지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조항을 근거로 하여 자기의 집회를 취소하하고 요구하는 것은 법조문을 잘못 적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감리교의 어떤 제도나 법도 감리교의 원래의 목적인 성서적 성결을 전파하는것을 방해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못 밖았다. 이런 적극적인 주장때문에 웰스는 조사위원회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899년 웰스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는 내적으로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에게 있어서 감리교회, 특별히 감리교회의 교권세력은 더 이상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성결의 도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방해세력이었다. 그는 미국전역의 30개주 이상에서 성결파지도자들이 감리교회에서 추방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감리교회의 교권주의에 대한 웰스의 비판은 매우 혹독하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의 하나는 거룩하지 못한 교권주의이다." 감리교회가 웨슬레의 정신을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되었을 때, 감리교는 정말로 복음의 날개였다. 그러나 타락한 감리교는 오히려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데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성결을 말하지만 그 성결을 실제로는 실천하지 않으며, 세상적인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웰스는 이런 교권주의를 개신교의 "교황제도"라고 비판했다. 이런 교황제도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말을 더욱 높이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기독교(Christianty)라기 보다는 교회자체를 비호하는 교회주의(Churchanity)이다.

웰스는 더이상 성결의 도구가 되지 못하는 교회에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그리해서 1901년 그는 감리교회에서 탈퇴하여 신시내티의 한 건물을 빌려서 "부흥사 예배당"(Revivalist Chapel)이라는 간판을 걸고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는 [부흥사지]에 왜 그가 감리교를 떠나야 되었는가를 설명하였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가 독자적인 전도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리교와 실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감리교에서 탈퇴하는 것이 정당하다. 둘째는 감리교회가 원래의 정신을 잃고, 성결의 복음을 무시할 뿐만이 아니라, 고위성직자들 까지도 주류거래에 가담할 정도로 타락하고, 교회가 공공연하게 무도회장과 비슷한 모습으로 전락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즉 감리교회의 세속화가 그를 감리교에서 탈퇴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성결운동이 감리교에서 분리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 세속화된 교권주의임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만국성결연맹의 형성과 특성

A) 만국성결연맹의 형성과 발전

만국성결연맹및 기도동지회(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는 1897년 9월 신시내티에 있는 ?의 초라한 집에서 시작되었다. ?은 1897년 초에 이미 오순절성결연맹및 기도동지회(Pentecost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9월에 조직된 만국성결연맹은 이것을 확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국성결연맹의 출범은 단순한 확대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만국성결연맹의 조직을 통해서 이 단체는 ?의 개인적인 조직체의 범위를 넘어서서 하나의 그룹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이들은 세게선교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만국(International)이라는 단어를 첨가한 것이다. 즉 만국성결연맹은 본질적으로 세계선교를 위해서 모인 단체라고 하는 것이다. 새로 조직된 만국성결연맹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리쓰; 부회장, ?; 총무, 힐스트(W. N. Hirst); 통신담당총무, 바이론 리쓰(Byron Rees); 재무, 루쓰(C. W. Ruth). 이 시작을 후에 리쓰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작은 사건"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장인 리쓰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쓰는 원래 1854년 퀘이커 가정에서 태어나 1873년 중생의 체험을 한 뒤에 교역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에 그는 더 깊은 은혜를 갈구했고, 그 결과 모든 내재적인 죄에서 해방받는 온전한 성화의 체험을 하였다. 1880년대 초에는 리쓰는 약 2년동안 인디안지역에 들어가서 전도하기도 하였고, 1880년대 말에는 심프슨이 조직한 기독교선교연합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와 관계를 맺고 활동했으며, 심프슨이 주도하는 집회의 강사로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리쓰는 사중복음을 강조하는 점에서, 또한 세계선교나 도시빈민선교를 강조하는 점에서 심프슨과 매우 유사한 공통점을갖고 있었다.

그후 리쓰는 로드 아일랜드의 독립교회인 임마누엘교회의 목사로서 일했다.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리쓰는 1890년 로드 아일랜드의 포츠마우쓰(Portsmouth)에 독자적인 쒜프집회를 개최하였고, 이곳에 웨슬레안성결부흥사들을 초청하였다. 여기에 초청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갓비, 애즈베리대학의 창시자인 모리슨(Henry Clay Morrison), 전국성결연합회의 주요지도자인 파울러(C. J. Fowler), 왓슨(G. D. Watson)등이다. 리쓰는 그뒤에 임마누엘교회를 사임하고 전임부흥사가 되었다. 리쓰의 웨슬레안성결부흥사와의 관계는 1866년 ?의 집회에 초청받게 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7년에 ?과 같이 만국성결연맹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만국성결연맹의 초기의 모습은 1897년의 [헌법]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헌법은 만국성결연맹의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국성결연맹은 교회조직체가 아니라 기독교신자들의 형제애적인 연합체이다. 이 연맹은 기존교회조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 가운데서 깊은 영적 생활을 증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연맹은 모든 교권주의적인 교황제도를 반대하며, 죄가 아닌한 모든 점에서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믿는다." 여기에서 만국성결연맹은 새로운 교파를 만들려고 시작된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897년은 아직 ?이 감리교에 속해 있던 시기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00년에 만국성결연맹은 그의 명칭을 바꾸고 헌법을 개정했다. 새로운 이름은 만국사도적성결연맹(International Apostoic Holiness Union)이다. 이 새 명칭에는 기도동지회라는 말이 빠졌다. 이것은 이 연맹이 보다 조직적인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새 헌법에는 이 연맹이 교회조직이 아니다는 이전의 조항을 삭제하여 버렸다. 아직 이 단체는 교파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향을 향하여 나갈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 "사도적 성결회"(Apostolic Holiness Society)의 설립허가이다. 이 명칭 아래서 교회의 형태로 집회를 가질 수가 있었다. 또한 보다 교파적인 성격을 갖게 하는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철도여행에 있어서 성직자들은 요금이 할인 되기 때문에 이것을 위하여 철도회사로 부터 인정을 받기 위하여 이 연맹은 단체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이런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연맹은 기존교파와 같은 관료주의적인 조직을 거부했다.

이 새명칭 가운데 첨가된 것은 사도적(Apostolic)이라는 말이다. 이 단어는 새로운 단체의 또 다른 성격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즉 새단체가 지향하고 있는 목적은 신약성서의 사도적인 교회를 회복하자는데 있다. 여기에서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은 감리교를 넘어선다. 물론 이 단체는 웨슬레의 중생과 성결의 복음을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주장한다. 그러나 웨슬레의 중생과 성결을 넘어서서 또다른 신약성서의 중요한 주제인 신유와 재림, 성령의 능력, 그리고 세계선교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만국성결연맹은 초대교회의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을 전하는 것을 모토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동양선교회나, 초기한국성결교회에서도 웨슬레로의 회복 보다는 온전한 복음 또는 순복음의 전파를 기치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1900년의 [헌법]은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은 "온전한 복음의 전파는 사도와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대로 성서적 성결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결은 신약성서의 오순절적인 체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온전한 복음의 강조는 만국사도적성결연맹에 있어서는 순수한 복음의 강조로 이어진다. 1902년의 [헌법]의 신조에는 "합리주의는 고등비평이나 신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세계를 처절하게 파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에 의해서 초자연적인 영감으로 쓰여졌고, 원래에는 오류가 없으며, 신앙과 생활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신적 권위를 가진 외적인 기준이라는 우리의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분명하게 주장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래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이라는 표어가 순복음이라는 말로 바꾸어 해석되게 된 배경을 살펴 볼 수 있게 된다. 즉 원래 성결운동의 강조점은 신약성서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통교회나 기존교회들이 신약성서의 온전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전한다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존교회는 성결이나 신유, 재림과 같은 성서의 중요한 핵심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더불어 성서의 온전한 복음의 전파는 자유주의에 물들지 않은 성서의 순수한 복음의 전파라는 새로운 강조점이 덧붙여진 것이다.

만국사도적성결연맹에 있어서 이런 보수주의적인 신앙의 기수는 컬프(George G. Kulp)였다. 컬프는 19세기 미국의 구파의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그는 미국의 구파의 신학의 본산지인 필라델피아에서 목회하였다. 걸프는 종종 조상이 물려준 것은 하나도 바꾸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성결운동의 근본주의적인 변화는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에 미국에 등장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9세기의 성결운동은 성결운동을 반대하는 정통주의와 싸웠는데, 20세기의 성결운동은 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하여 근본주의와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성결운동의 주요한 관심은 교리의 수호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성결의 체험이었다.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의 설립에 가장 중요한 인물인 웰스는 1901년 12월에 장티푸스성의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고, 그의 사역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가 세운 하나님의 성서학원은 세워진지 2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학생이 백명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주간지 [부흥사]는 2만 5천명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은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웰스는 사망은 이 단체에 큰 문제점들를 남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서학원과 그의 출판사업의 운영권에 관한 것이다. 웰스가 살아 있을 때에 이 기관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했다. 그러나 웰스의 사망과 함께 이 운영권은 연맹에게 넘어오지 않았고, 웰스의 유언에 따라 웰스가 임명한 세 여자로 구성된 이사회에 넘어갔다. 그 이사들은 웰스의 아내을 비롯한 ?의 사역의 동역자들이었다. 이들이 하나님의 성서학원과 출판사역을 이끌어 갔다. 이들과 연맹은 그 후에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것은 법적인 구속력은 없었다.

이런 가운데서 1905년 만국성결연맹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리쓰는 이 단체를 사임하고 말았다. 사임의 주요이유는 선교자금의 사용에 관한 문제이다.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은 근본적으로 선교지향적 단체였다. 그리나 선교를 위한 모금은 [부흥회]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 기금의 관리도 리쓰의 부인을 중심으로 한 이사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들이 선교기금중에 특정사업을 지칭하지 않은 것은 리쓰가 세운 뷸라 하이츠 학교나 또한 그 외의 고아원을 돕는데 사용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리쓰는 선교기금은 전액 해외선교를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리쓰의 부인은 리쓰가 선교를 말할 때에는 미국내의 소외된 지역도 포함된다고 맞섰다. 결국 리쓰는 이 단체를 떠났다.

리쓰가 사임한 다음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의 리더쉽은 위에서 언급한바 있는 컬프에게로 넘어갔다. 컬프는 리쓰의 뒤를 이어 1905년에서 1921년까지 이 단체의 총리(General Superintendent)로 일했다. 컬프의 등장은 이 연맹의 중요한 변화를 의미한다. 즉 창립자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1905년의 총회는 다시금 [헌법]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였다. 무엇보다도 명칭을 만국사도적성결연맹에서 만국사도적성결연맹및 교회(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 and Churches)라고 바꾸었다. 우리는 위에서 이 연맹에 속한 모임을 위해서 "사도적성결회"라는 개교회적인 단체를 세웠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1905년에는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변경한 것이다. 이것은 이 단체가 보다 교파적인 성격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전국적인 차원에서는 강력한 조직을 가진 교파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교회라는 명칭은 개교회를 지칭하는데에만 사용될 뿐 전국적인 연합체를 지칭하는데에는 여전히 연맹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에서 도 알수 있다. 또한 여전히 교회의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성결파신자들의 신앙모임으로서의 연맹(union)도 존재하고 있었다. 1905년의 [편람]에는 145명의 안수받은 목사와 선교사가 있고, 32명의 안수집사의 명단이 나오고 있다. 또한 1906년의 교세 통계는 74개의 교회와 2.744명의 신자로 보고 되고 있다.

1905년 이후의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은 성결파신자들의 친교조직인 연맹(union)과 기존교회의 목회형태를 따르는 교회(church)의 두 조직을 다같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교회의 형태로 전환하고 있었다. 성결운동이 확장됨에 따라서 성결단체들은 기존교파로 복귀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성결교파를 만들든지 둘중의 하나를 강요받게 되었다. 이것이 구체적을 쟁점이 된 것은 1913년의 총회에서 였다. 1913년 총회에서 총리인 컬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주의 상황을 살펴볼 때 일반적으로 연맹이 곧 사도적성결교회로 곧바로 조직되지 않은 곳에서는 그 단체는 곧 벽에 부딪히게 되고, 얼마가지 않아서 사라지고 맙니다. 나의 이 결론은 여러 설교자들과 지역감독들의 증언에 의하여 뒷받침됩니다."

그러나 이 연맹이 교파의 형태를 갖게 되는데 반대하는 의견을 갖는 사람도 있었다. 총회는 그리하여 이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위원회는 만국사도적성결연맹및 교회는 만국사도적성결교회라는 이름 아래 교파적인 단체로 재조직되며, 이것은 성결사역을 온전한 구원의 전파라는 구조속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치이며, 따라서 이 사역을 위하여 모든 단체들이 협력하여 강력한 단체를 만들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래서 이 단체는 1913년 부터 교파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연맹이 기존교파의 교권제도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는 계속되었다. 여전히 전체를 통괄하는 의미의 본부는 존재하지 않았고, 총회에 대한 분담금 같은 것도 없었다. 단지 사안에 따라서 자발적인 헌금으로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만국사도적성결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1919년에서 1925년은 통합과 확장의 시기이다. 이시기에 많은 소규모의 성결단체들이 만국사도적성결교회와 연합했다. 이런 연합운동의 첫발자국은 1919년에 이루어진 성결기독교회(The Holiness Christian Church)와의 연합이다. 이 때 만국사도적성결교회와 성결기독교회는 각자의 명칭에서 하나씩을 빼서 만국성결교회(International Holiness Church)라고 새로이 명칭을 만들었다. 성결기독교회외에 여기에 연합한 교파로는 뉴욕오순절구조선교회(The Pentecostal Rescue Mission of New York), 캘리포니아필그림교회(The Pilgrim Church of California), 오순절형제교회(The Pentecostal Brethren in Christ Church), 평민선교교회(People's Mission Church)등이 있다. 이 중에 캘리포니아필그림교회는 리쓰가 세운 단체이다. 리쓰는 만국사도적성결연맹에서 탈퇴하여 나사렛에서 일하다가 거기에서 독립하여 필그림단체를 만들었는데, 다시 이 단체와 만국사도적성결교회가 1922년에 연합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새로 채택된 이름이 필그림성결교회이다.

또한 이 연합에는 위에서 언급한 교파뿐만이 아니라 선교단체와 피선교지교회도 포함되어있다. 이 연합에 참여한 선교회는 전세계선교회(The World Wide Missionary Society)와 성경내외선교회(Bible Home and Foreign Missioanry Society)가 있고, 또한 여기에 참여한 선교지단체로서는 바바도스임마누엘선교회(The Immanuel Mission on Barbados)가 있다. 이런 단체들은 다같은 신앙적인 배경과 신학적인 입장들을 공유할 수 있는 단체들이다. 이런 연합의 결과로서 필그림성결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하였다. 1919년에 약 8천명이었던 이 단체는 1924년에는 15천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고, 교회의 분포도 미 전역으로 확장되게 되었다.

필그림성결교회는 1920년대를 지나면서 보다 중앙집권적인 교단의 모습을 구체화해 가기 시작하였다. 원래부터 이런 연합의 주요목적은 해외선교였기 때문에 해외선교외에 국내선교를위한 프로그램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교단의 형태가 강화되면서 국내선교도 교단적인 차원에서 지원하게 되었고, 따라서 총회는 크게 해외선교와 국내선교를 위한 업무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이 둘은 원칙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없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이런 기구의 정비가 이루어졌고, 이때에야 비로소 모든 조직이 정비 되었다. 이후 부터는 해외선교도 교단의 보다 직접적인 주도아래 이루어 지게 되었다. 필그림성결교회는 그후 1968년에 웨슬레안감리교회와 연합하여 웨슬레안교회가 되었다.

   
B) 만국성결연맹의 주요 특징

우리는 이상에서 웰스의 생애와 만국성결연맹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에서 이것을 정리하면서 웰스의 사역과 만국성결연맹을 중심으로한 성결운동의 주요한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만국성결연맹은 무엇 보다도 웨슬레안성결운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물들이 감리교계통의 교역자라는 외형적인 사실외에 이들이 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성결이기 때문이다. 만국성결연맹이 주장한 성결론은 웰스의 베스셀러인 [내주하신 그리스도],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이중적인 치유]에 잘 묘사되어있다. 먼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서 ?은 성결이란 그리스도가 왕으로 내주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내주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웰스는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왕으로 내주하실 때, 자기주장, 자만스런 야망, 이성적인 판단등이 물러나고, 청결, 성결, 사랑, 겸손이 자리잡게 된다. 또한 [이중적인 치유]에서는 전형적인 웨슬레안의 성결론을 반복한다. 즉 인간의 영혼의 치유를 위해서는 이중적인 치유가 필요한데 첫번째는 죄책에서의 해방인 용서(칭의)요, 두번째는 부패성에서의 정결함인 성화이다. 그리고 이 성화에는 두단계가 필요한데 중생을 통하여 부패성이 깨어지기 시작하고, 성결을 통하여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부패성이 완전하게 제거된다.

무엇보다도 웰스의 성결론에 관한 가장 유명한 책은 [애급에서 가나안으로]이다. 웰스는 웨슬레안 성결론을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비유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웰스의 설명에 의하면 애급은 죄악의 세상을 말한다. 여기에서 바로는 사탄으로 묘사된다. 또한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은 중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광야는 중생후의 신앙상태를 말한다. 중생후의 신자는 일시적으로 승리감을 맛보지만 아직도 내재적인 죄 때문에 갈등을 느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갈등을 느끼는 것과 비교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의 부족 때문에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한다. 이것은 중생한 신자가 믿음이 부족해서 온전한 성결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는 낙심한 신자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다름이 아닌 온전한 성화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과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는 것처럼 우리도 순종과 믿음으로 온전한 성결을 체험하게 된다.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땅이 전개된다. 가나안땅은 온전한 성결의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해서 웰스는 웨슬레안 성결론을 출애급의 비유를 통하여 생생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웨슬레안성결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결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만국성결연맹의 헌법은 성결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온전한 성화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세례이다. 이것은 중생 다음에 오며, 모든 신자가 추구해야할 것이며, 믿음으로 즉각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온전한 성화를 체험한 자의 마음은 모든 죄에서 개끗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르신 사명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성령세례라는 말이다. 웨슬레안 성결운동의 성결론은 훈련을 통한 성결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한 체험이다. 이점이 18세기의 웨슬레의 성결론과 구별되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성결의 체험은 성령의 능력과도 결부되어지고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만국성결연맹에서 목사의 안수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 중의 하나가 성결의 체험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았느냐인 것이다.

둘째, 만국성결연맹은 성결과 더불어서 신유와 재림을 강조한다. 1897년 만국성결연맹의 헌법에 의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대로 주의 재림과 신유를 믿는다. 그리고 이 진리를 적절하게 강조하는 것은 성결의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되어 있다. 만국성결연맹은 성결의 복음이 성서적인 복음이지만 신약성서에는 이것과 더불어서 신유와 재림의 복음도 강조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만국성결연맹이 가장 많이 강조하는 말이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이다. 만국성결연맹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온전한 복음이라고 불렀다. 만국성결연맹의 헌법은 초기부터 이 온전한 복음을 전하게 위해서 이 단체가 생겼다고 분명하개 밝히고 있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연맹의 헌법이 신유와 재림의 선포가 성결의 전파에 도움을 줄것이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신유와 재림을 성결운동과 관련시켜서 이해할려고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이 부분은 특히 성결운동내에서 신유와 재림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위에서 웰스가 성결체험을 할 때 동시에 신유의 체험을 했음을 기록한 바 있다. 이것은 19세기 말의 성결운동에서 많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성결부흥집회에서는 죄의 회개를 강조하게 되고 이때에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웰스뿐만이 아니라 리쓰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웰스와 더불어 만국성결연맹운동에 가담했으며, 성결운동가 가운데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사람 가운데 하나인 갓비도 신유에 열심이었다. 만국성결연맹의 신조는 이 단체는 성서의 육체의 치유에 대한 가르침을 믿으며, 신유를 위한 기도는 신자의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의 건강을 위한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신유와 더불어 만국성결연맹은 전천년설적인 재림을 받아 들인다. 웰스의 전기를 쓴 힐쓰에 의하면 ?이 감리교당국과 갈등을 느끼고 있을 때 피켓(Pickett)과 갓비와 같은 인물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전천년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타락했다고 믿는 전천년설은 왜 감리교가 성결의 전도자를 박해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은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은 성경을 무시해서는 않되는데,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재림은 성서의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라는 것이다. 온전한 복음을 전할려면 재림에 대한 복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웰스의 주장은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반복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웨슬레안 성결운동과 이런 신유와 재림과 같은 새로운 운동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887년 전국성결연합회는 중생과 성결의 복음외에 신유와 재림의 복음을 중심주제로 전하는 사람의 회원권을 제한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곁길(side track)에 빠진 사람으로 비판하였다. 19세기 말에는 도우이(Alexander Dowie)나 크리스챤 사이언스같은 잘못된 치유운동이 있어서 많은 신자들의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19세기 미국감리교는 전반적으로 전천년설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후천년설은 웨슬레안의 전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성결운동에서 신유와 재림의 강조는 잘못된 곁길로 보여지기도 했다.

초기 만국성결연맹에서도 여기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러나 1902년의 [편람]에 의하면 이 문제에 대한 오랜 동안의 숙고와 토의 끝에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 다같이 온전한 성서의 복음이며,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만국성결연맹이 존재한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리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웃기는 것은 신유와 예수의 재림은 '곁길'이라고 인식되어진다는 사실이다. . . . 사람들은 이들의 이런 목청높은 주장을 들을 때 웃음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3년 동안 예수님이 곁길을 헤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디서나 병든자를 고쳐주셨다. 또한 사도들도 주류를 이탈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병든 무리를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성서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유와 재림은 신약성서의 변두리 문제가 아니라 중심주제이다. 사실 기독교의 긴 역사가 이것들을 무시해 온 것은 정통교회가 신약성서의 중심메시지를 잃어버리고 곁길에 빠졌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세째, 만국성결연맹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선교를 강조한다. 19세기말, 그리고 20세기 초 새로운 성결단체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교리적인 것외에 새로운 성결단체의 존재이유를 소외된 자들의 선교에서 찾았다. 19세기 후반에 많은 미국의 도시들은 산업화가 되었다. 산업화의 결과 많은 도시들을 공장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이런 공장의 인력수요는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나, 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렇게 도시에 밀려온 사람들은 술, 마약, 환락에 빠져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도시는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전 부터 도시에 살던 중산층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교외로 이사가게 되었고, 또한 이들의 교회도 같이 교외로 옮겨졌다. 다시 말하면 도시는 버려진 슬럼가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성결운동의 주요선교 대상은 바로 이들이었다. 만국성결연맹은 "슬럼과 정글, 그리고 전 세계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므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만국성결연맹의 초기 사역에 참여했던 힐쓰는 누가복음 4: 18-19을 설교하면서 예수에게 성령이 임재하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까지 가난한 사람들은 역사를 통하여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만국성결연맹의 이런 도시선교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리쓰의 사역이다. 리쓰는 일찌기 로드 아일랜드의 임마누엘교회에서 사역할 때에 슬럼, 선원, 감옥, 도심(都心)지역, 병원, 그리고 노방(路傍)의 6개 전도대를 구성해서 기존교회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지역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 리쓰는 임마누엘교회의 2년 목회동안에 적어도 천명이상의 불신자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 리쓰는 그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해인가! 수백명의 주정뱅이, 도박꾼, 매춘부들, 그리고 일반 죄인들, 또한 기술자, 은행원, 교인들까지 영광스럽게 구원받았다. ... 많은 주정뱅이들이 독주와 방탕과 그리고 담배로 부터 구원 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의 붇고 병든 몸도 치유받았다. ... 파산에 이루렀던 그들의 삶이 전적으로 새롭게 되었다."

리쓰의 도시선교는 1900년대 초에 시카고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시카고는 가장 산업화된 도시였고, 따라서 가장 도시문제가 심각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복음주의 기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무디가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말해준다. 리쓰의 이 당시의 사역은 그의 책 [슬럼에서 일어난 기적]에 잘 묘사되어있다. 여기에는 어떻게 수많은 버림받은 사람들이 리쓰의 사역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되었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리쓰는 이 책의 서문에서 미국의 주요도시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것 보다 심각하며, 자기의 사역은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리쓰는 이책을 쓰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능력은 너무나 위대해서 비천한 자중의 가장 비천한 자까지도 구원하시며, 타락한 자중의 가장 타락한 자를 새롭게 하시며, 모든 희망이 사라진 사람에게도 희망을 불어 넣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리쓰는 이들에게 단지 복음을 전할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그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미혼모의 집"같은 갱생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역은 대부분의 교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네째, 만국성결연맹은 교권주의를 배격하며, 순수한 성도들의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19세기말에 시작된 새로운 성결단체들은 타락한 기존교파를 갱신하고자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처음부터 새로운 단체를 만들려고 한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 교파가 이들의 갱신운동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부리하여 새로운 단체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단체가 발전하여 나중에 하나의 교파를 형성하였다. 그러면 이들이 지향했던 교회관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이들은 교권주의를 배격하였다. ?이나 리쓰나 다같이 기존 교파의 교권주의에 의해서 시련을 당하고 그 교파를 떠났다. 따라서 이들은 처음부터 기존교파의 교권주의를 천주교의 교황제도의 잔재라고 비판하였다. 만국성결연맹이 시작할 때, 그들의 모토는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모든 것 위에는 하나님을"(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God over all)였다. 여기에서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라는 귀절은 이 연맹이 근본적으로 멤버들의 행동을 자유롭게 보장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헌법 제 1조에 의하면 "죄가 아닌 모든 것에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믿는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감리교가 교역자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만국성결연맹의 교권제도에 대한 반대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어졌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움직이는 단체가 아니다. 성령이 통치하시는 단체이다. ?은 신약성서에 묘사된 하나님의 교회의 특징은 "머리는 그리스도, 감독은 성령, 헌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제직은 성화된 직원"이라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교회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제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성경의 말씀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또한 만국성결연맹은 처음부터 기존교파, 특히 감리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였다. 19세기 감리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고, 이런 부흥은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왔으며, 이런 세속화된 교회는 신자들의 생활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만국성결연맹은 교회는 거룩한 성도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국성결연맹은 처음부터 회원의 자격을 "마음의 청결을 소유한 증거를 제시하거나, 성결의 체험을 간절하게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리쓰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시킨다. 교회는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신부이다. 신부는 힌 옷을 입고 신랑을 준비해야한다. 따라서 교회는 거듭난 깨끗한 영혼으로 이루어진 신부와 같아야 한다.

흥미있는 것은 만국성결연맹은 여성의 활동에 대하여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성결운동은 일찌기 여성의 지도력에 많이 의존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팔머(Mrs. Phobe Palmer)여사이다. 팔머여사는 남여를 합하여 19세기 웨슬레안 성결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현재 세계의 성결단체들 가운데 매우 중요한 단체의 하나인 구세군은 부우드부부(William and Catherine Booth)가 만든 단체이다. 만국성결연맹도 이런 흐름에 속해있다. 우리는 이미 ?의 사후에 하나님의 성서학원을 비롯한 많은 ?의 사역을 ?과 함께 일했던 세 여자들이 이끌어 갔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결운동의 많은 여성들은 가정주부의 역활에 머물지 않고 본격적으로 남편의 동역자로서 활동했다. 이것은 ?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리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리쓰는 그의 [이상적인 오순절교회]에서 오순절교회는 성 차별이 없는 교회임을 강조했다. 리쓰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한몸이 될 만큼 동등했으나 죄가 들어오면서 남녀의 차별이 시작되었고, 여자는 무시당했다. 그러나 오순절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 2의 창조가 시작도었고, 여자는 원래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만국성결연맹의 안수자 명단을 볼때 많으면 전체 안수자의 30%가 여자인 경우도 있다. 이것을 통해서 본다면 만국성결연맹은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만국성결연맹은 선교지향적인 단체였다. 만국성결연맹이 중생, 성결, 신유, 재림과 더불어 항상 강조했던 부분은 세계복음화(World EVangelization)이다. 1902년의 헌법에 만국성결연맹은 "온전한 복음의 전파가 사도와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대로 성서적 성결과 세계복음화에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다"고 기록되었다. 이런 세계복음화는 만국성결연맹이 만들어진 중요한 목적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그 명칭에 만국(Internation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특별히 ?의 잡지 [부흥사]는 세계선교를 위한 촉매의 역할을 하였다. 1899년 이 잡지는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라는 표어 아래 선교기금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이 기금을 통해서 이 단체의 세계선교는 시작되었다. 실질적으로 이 단체의 선교는 이 [부흥회]지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것은 만국성결연맹이 여러교파를 합하여 필그림성결교회로 바꾸어진 1922년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면 만국성결연맹의 선교정신은 무엇인가? 무엇 보다도 교회의 일차적인 책임은 선교에 있다. 특별히 복음이 미치지 않은 곳에 우선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여기에서 만국성결연맹과 이와 유사한 단체들이 슬럼선교나 미지의 오지선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이유가 있다. 리쓰는 "내지든 외국이든, 슬럼이든 정글이든, 버려진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은 성결단체는 바리새적이며, 의례적이고, 또한 율법주의적이다. 이것은 분명히 비성서적이다"고 못밖고 있다. 이어서 리쓰는 세계선교를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은 성령의 세례라고 지적한다. "선교에 대해서 타는 듯한 마음이 없는 성결파 사람들은 분명히 제이의 축복인 온전한 성화를 가져오는 성령의 세례를 추구해야 하며, 또한 체험해야 한다." 여기에서 세계선교의 원동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만국성결연맹은 선교의 본질은 복음전파에 있다고 보았다. 많은 대교단의 선교사들이 문화개발과 복음전파를 혼동하고 있고, 문화개발사업에 몰두한 나머지 복음전파사업을 등한시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사역에 있어서 "신앙원칙"이다. 이들은 모든 사역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단체나 개인으로 부터 확보된 후원의 약속이 없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세계선교에 나섰다. 이들에게는 고정된 월급은 존재하지 아니하며, 순간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간다.

만국성결연맹과 동양선교회

A) 동양선교회의 형성과 만국성결연맹

동양선교회는 미국인 카우만과 일본인 나까다 쥬지가 1901년에 세운 신앙선교단체이다. 카우만은 원래 감리교인으로 19세기 후반의 웨슬레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아 중생과 성결의 체험을 한 후에 심프슨의 선교대회에서 세게선교에 대한 비젼을 갖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성경을 보다 철저하게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무디성서학원에서 6년동안 공부하였다. 당시에 그는 전신회사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일과를 피하여 야간에 공부하였다. 이러한 카우만의 신앙성장의 과정은 동양선교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카우만은 웨슬레안 성결운동의 전통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심프슨이나 무디와 같은 19세기 후반의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다. 카우만은 무디성서학원에서 일본유학생 나까다 쥬지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 의해서 일본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카우만은 일본에 선교사로 가려고 1900년 9월 7일 감리교외국선교부에 선교사로 지원을 하였고, 감리교선교부는 9월 12일 아직 일본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며,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다시 연락하라는 회답을 보냈다.

카우만이 만국성결연맹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바로 이 싯점이다. 카우만은 한편으로는 감리교선교부와 관계를 가지면서 아지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시카고를 떠나 9월 22일 신시내티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이 하나님의 성서학원및 선교사훈련원을 개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카우만은 이곳에 가서 ?의 성서학원의 개교를 도우면서 그들과 더불어서 생활을 하였다. 카우만이 ?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의 잡지 [부흥사]때문이었다. 아마도 카우만은 ?의 [부흥사]를 정기적으로 구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카우만 부인은 "이 잡지가 매우 깊은 영적인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카우만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그 잡지의 편집자를 만나기를 갈망했다. 따라서 이 목적으로 신시내티로의 여행이 이루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카우만은 ?이 시작한 하나님의 성서학원의 "첫번째 등록한 학생"이 되었다. 카우만부인은 오랜 세월이 지난후에 이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 했다. 비록 이 신설학교가 여러모로 시카고의 무디성서학원과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이곳에는 마음이 하나로 뭉쳐있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하나님]이 존귀함을 받았기" 때문에 놀라운 매력의 장소가 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설립자들의 희생적인 삶은 그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카우만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감리교외국선교부에서는 카우만부부에게 영어교사와 음악교사자리가 각각 마련되었다는 통보를 해왔다. 그러나 이때 카우만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전기가 왔다. 그것은 ?의 신앙사역(faith work)에 의한 것이었다. 카우만은 일찌기 심프슨과 피어선을 통하여 신앙사역에 대하여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신앙사역이란 기존교파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선교단체를 만들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으로 나가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에게 신앙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신시내티에서 ?의 사역을 보면서 신앙사역이 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카우만은 오랜 기도 끝에 감리교외국선교부의 지원을 받아서 일본에 가기 보다는 오직 믿음으로 독자적으로 일본선교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카우만은 1900년 12월의 어느 아침에 마태복음 20장 4절을 보이면서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다시 나에게 이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리고 그는 덧 붙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선교부와도 관계를 맺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선교를 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카우만에게 있어서 이런 신앙사역은 사도와 초대교회의 패턴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우만은 감리교선교부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일본선교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작정하였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 다음 주에 카우만부부는 신시내티교외의 작은 교회의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 때 어느 여신도가 일본선교를 위해서 1불을 카우만에게 쥐어줬다. 이것이 동양선교회의 최초의 선교헌금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되어 크리스마스집회가 하나님의성서학원에서 열렸다. 이곳에서 카우만은 일본선교의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집회에 참석한 장로교의 장로 한사람이 이곳에서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하고, 카우만의 선교를 위해서 300불의 수표를 보내왔다. ?은 카우만부부의 기도의 응답을 기뻐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어느날 저녁,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우리는 2월에 일본을 향하여 떠날 것이다.' ... 나는카우만이 수표를 공중에 흔들면서 '오 일본! 오 일본! 하나님께 영광! 오 일본'라고 외치는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카우만의 선교를 위한 최초의 모금은 하나님의 성서학원에서 이루어 졌다.

카우만부부는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카우만 부부가 일본으로 떠나기전 1901년 1월 어느날 시카고에서 카우만 부부를 위한 조촐한 안수식이 있었다. 이 때 카우만을 안수한 사람들은 만국성결연맹의 지도자들인 리쓰(총리), ?(부총리), 리쓰의 아들 바이론(Byron) 리쓰(선교담당총무), 스탈커(Charles Stalker, [부흥사]지의 도움으로 최초로 세계일주전도여행을 한 복음전도자)등이었다. 이 만국성결연맹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을 카우만과 그의 아내의 머리위에 얹고 안수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구별하였다." 이것은 만국성결연맹의 최초의 안수예식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카우만뿐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도 함께 안수 받았다는 사실이다. 만국성결연맹의 안수받은 사역자의 명단에 카우만과 함께 카우만부인도 항상 같이 언급되고 있다. 안수 후 카우만 부부는 1901년 2월 1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였다.

카우만은 일찍부터 그의 신앙과 선교의 비젼을 같은 직장동료인 킬보른(E. A. Kilbourne)과 나누었다. 길보른은 당시에 무디성서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카우만이 일본으로 떠난후에 하나님의 성서학원으로 옮겨, 이곳에서 공부하고 1902년 안수를 받고 일본으로 가서 카우만과 연합하였다. 킬보른도 카우만과 함께 만국성결연맹의 멤버가 되었다.

만국성결연맹은 동양선교회의 중요한 후원자였으며, 동양선교회의 사역을 그들의 주요한 선교적 관심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특별히 이것은 초기 단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카우만은 1901년 7월 [부흥사]에 "우리는 '만국사도적성결연맹'과 동일한 계동의 한 단체를 만들었다. 이 명칭을 번역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성결연맹(Holiness Union)이라고 불렀다." 1901년 12월 ?은 세상을 떠났다. ?의 사망을 들은 카우만부부는 ?부인에게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 ?이 우리를 위하여 해 주신 일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읍니다"라는 감사의 말과 함께 위로의 전문을 보냈다.

만국성결연맹과 동양선교회에 관한 보다 포괄적인 설명은 1907년 경에 쓰여진 킬보른의 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미국을 떠나기 전에 카우만부부는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의 창시자이며, [하나님의 부흥사]지의 편집인이었던 M. W. ?과 관계를 맺었다. ... 특별히 우리의 일본사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바로 그와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의 멤버들이었다. 그들의 기도와 자발적인 헌금은 어느 누구 보다도 크게 우리의 사역을 도왔다. 얼마 후에 만국사도적성결연맹에 의해서 선교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에서 그들을 대표하게 되었다. 지금 이 사역은 미국과 영국의 모든 성결단체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수천명의 귀한 영혼들이 오늘의 일본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며, 이 사역은 온 세계의 성결운동이 지원하는 단체가 되었다. ... 이 사역은 온 세계 성결운동의 기도와 자발적인 헌금으로 이루어 지고 있으며, 미국과 영국 뿐만이 아니라 ... 오스트랄리아, 카나다, 스코트랜드, 프랑스, 서인도, 중국, 인도등 지구의 모든 나라가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킬보른의 이 글에서 만국성결연맹과 동양선교회의 관계의 중요한 측면을 볼 수 있다. 만국성결연맹은 초기 동양선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 단체를 통하여 동양선교회는 세계성결운동과 접촉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동양선교회는 전세계성결운동의 지원을 받는 단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국성결연맹이 동양선교회를 돕는 방법은 [부흥사]를 통해서였다. 실질적으로 만국성결연맹이 세계선교를 위해서 최초로 모금활동을 한 것은 이 잡지를 통해서이다. 이 잡지는 그때 그때 여러가지 차원에서 선교모금활동에 참여하여 세계선교를 위해서 도왔다. 여기에는 "가든지, 보내든지 기금"(Go, or Sent Fund), "아프리카선교기금," 그리고 '일본선교기금"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기금의 관리는 원칙적으로 [부흥회]지의 통제아래 있었다. 물론 [부흥회]지와 만국성결연맹이 처음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부흥회]지는 만국성결연맹의 기관지는 아니었다. 이것은 특별히 ?의 사망 후에는 더욱 분명했다. 위에서 지적한 것 처럼, ?은 [부흥회]지의 운영권을 만국성결연맹이 아니라 자기의 부인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이사회를 구성하여 거기에 넘겨주었다. 이 이사회에서 실질적인 선교비를 관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연맹이라는 단체 뿐만이 아니라 [부흥회]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미국에서의 동양선교회를 위한 헌금은 [부흥사]지로 보내졌다.

[부흥사]지와 더불어서 우리가 언급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성서학원이다. 여기에 [부흥사]지의 사무실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세운 이성서학원 역시 ?의 사후에 만국성결연맹이 아닌 [부흥회]지의 이사회에 의해서 운영되어졌다. 따라서 이 학원은 만국성결연맹과 유대관계는 맺고 있지만 만국성결연맹의 법적인 제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부흥회]지와 하나님의 성서학원은 초교파적인 단체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서학원이 동양선교회를 위해서 공헌한 점은 선교사의 인력 수급이다.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의 대부분은 바로 이 학원 출신이다. 카우만과 킬보른이 이 학원에서 공부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도 많은 이학교 출신들이 동양선교회에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10년대에 동양선교회가 전 일본을 상대로 "대거부락전도운동"(The Great Village Campaign)을 벌였다. 이 것은 일본의 모든 집들을 방문하여 한 집도 빠지지 않고 축도전도하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 운동의 막바지에 동양선교회는 하나님의 성서학원에서 "10명의 젊은이"를 선발하여 전일본에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여기에 참여하였던 사람 가운데 한국에서 중요하게 활약한 선교사로는 토마스 감독을 이어 감독이 된 헤이스(Paul E. Haines)와 20년대와 30년대의 한국선교의 책임자였던 우드(Harry Wood)가 있다.

만국성결연맹을 중심으로 한 그룹과 동양교회의 관계가 소원하여 진 것은 아마도 1930년대에 들어서 인 것 같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만국성결연맹은 이제 하나의 확고한 교파의 체제를 갖춘 필그림성결교회가 되었으며, 교단에는 해외선교부가 있어서 해외선교를 직접 주맅하였다. 이러는 가운데서 자연히 동양선교회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게 되었고, 동양선교회는 이들외에 새로운 후원자들을 찾아야 했다. 그리해서 동양선교회와 만국성결연맹과의 관계는 약화되게 된 것 같다.

B) 만국성결연맹과 동양선교회의 관계

우리는 이상에서 동양선교회의 초기 역사에 만국성결연맹이 어떻게 공헌하였는가를 역사적으로 살펴 보았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만국성결연맹과 동양선교회의 관계를 분석하여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가 초교파적인 선교단체이므로 아무런 교파적인 배경이 없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최근에 이르러 만국성결연맹과 동양선교회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동양선교회가 만국성결연맹이 동양선교회의 후원단체임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 이 두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것인가? 동양선교회는 어느 선교부의 도움도 없이 교파적인 배경도 없이 왔다는 것과 동양선교회의 배후단체는 만국성결연맹이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져야 하는가? 이것은 동양선교회와 한국성결교회의 초기역사를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만국성결연맹의 성격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적어도 초기의 만국성결연맹은 교파조직은 아니었다고 하는 점이다. 만국성결연맹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기존 교파의 교권주의자들과 갈등관게에 있었고, 따라서 교파를 매우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새로운 교파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만국성결연맹이 1900년에 사도적이라는 단어를 그 명칭에 첨가한 것은 바로 이런 인간적인 단체가 아닌 사도가 세운 초대교회로 돌아가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또한 이 단체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본래 속해있던 교파에 그대로 적을 두고 있었다. ?의 경우에도 1897년 만국성결연맹을 창설하였을 때 그는 여전히 감리교목사였으며, 그가 감리교를 탈퇴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다. ?과 함께 만국성결연맹의 창설에 기여했던 갓비는 1901년 만국성결연맹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교파들이 이 사역[만국성결연맹]과 관련되어 있다. 이 사역은 명백하게, 실질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초교파적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비교파적인 단체는 아니다. 거의 모든 [하나님의 성서학원의] 학생들과 사역들은 주요한 개신교들의 멤버들이다. 새로운 또하나의 교파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갓비의 주장에 따르면 만국성결연맹을 하나의 교파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따라서 비록 동양선교회가 만국성결연맹의 도움을 받아왔지만 교파적인 배경이 없이 왔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사실인 것이다. 동양선교회의 기관지인 Electric Message (후에는 Missionary Standard)에는 항상 자기들이 초교파임을 밝히고 있다.

동양선교회가 만국성결연맹으로 부터 후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양선교회가 만국성결연맹의 감독과 지도를 받는 선교단체가 아니라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만국성결연맹으로 부터 발전된 필그림성결교회의 공식적인 역사에 이 사실은 수차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초기에 있어서 선교사들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보냈다"라는 말보다 "갔다"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확신에 의해서 또한 그들이 부름받았다고 생각하는 장소로 갔다. ... 일반적으로 만국성결연맹과 같은 성결단체들은 그들의 성품과 지위에 대해서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을 감독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들[카우만과 킬보른]은 일본에서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의 패턴(pattern)을 따라서 일본에서 그들의 사역을 시작했다. 이 단체의 사역은 여러해 동안 이 연맹구성원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였다. 그리고 비록 동양선교회가 독립조직(separate organization)이지만 이 단체는 동양으로 진출하는 출구로서 간주되어졌다. 결과적으로 이 단체는 전체성결운동의 산물(the child of the whole holiness movement)이 되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일하는 이 선교사들은 비록 이 연맹의 멤버이며, 또한 이 연맹의 구성원에 의해서 지원받고 있지만 그들 자체의 자율적인 단체들(autonomous society)을 조직했다. 이 연맹이 이 선교단체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다. 그러나 이 선교단체들이 수행하고 있는 사역은 그 연맹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의 선교사역으로 간주되었다. 신앙선교의 원칙(faith policy)에 의해서 누구에게도 아무런 구속을 요구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만국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연맹에 의해서 도움을 받았지만 처음부터 독자적인 선교단체라는 것, 둘째, 동양선교회는 광범위한 성결운동으로 부터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것, 세째, 이들을 근본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신앙선교"(faith mission) 원칙이라는 것이다. 네째, 동양선교회의 사역은 만국성결연맹의 패턴을 따랐다고 하는 것이다. 이 네가지 중에 첫번째 사실은 이미 충분하게 설명하였다. 따라서 두번째와 세번째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동양선교회의 주된 후원그룹이 만국성결연맹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양선교회는 모든성결단체들로 부터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서 동양선교회가 어떻게 전세계의 성결운동과 관련을 맺었는가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은 또 다른 본격적인 연구주제이다. 여기에서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하여 본다면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연맹을 넘어서서 전국성결연합회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원래 전국성결연합회는 1910년경에동양선교회를 자기들의 선교회로 만들려고 했으나 동양선교회는 이것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도양선교회와 전국성결연합회의 관계는 계속 지속되어 왔다. 동양선교회는 미국의 성결운동 뿐만이 아니라 영국의 성결운동단체들의 지원도 받았다. 특별히 그중에 영국의 크로슬리(Frank Crossley)가 세운 스타 홀 선교회(Star Hall Mission)와 대비드 토마스(David Thomas)가 세운 만국성결선교회(International Holiness Mission)가 중요하다. 이들은 다같이 영국의 웨슬레안 성결운동단체로서 독립적인 선교사역을 하였다. 한국에 최초로 온 동양선교회 선교사 요한 토마스(John Thomas)는 스타 홀의 사역자였으며, 만국성결선교회를 세운 대비드 토마스의 동생이다. 동양선교회는 이들로부터 매우 중요한 도움을 받았다. 동양선교회의 후원이사회는 미국과 영국에 각 각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사들은 여러 성결단체들의 대표자들이었다. 따라서 동양선교회의 배경을 만국성결연맹으로만 국한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만국성결연맹과 동양선교회는 신앙선교의 원칙아래 움직이고 있었다. 신앙선교운동은 19세기 후반에 기존교파선교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기존교파들의 선교사업이 지나치게 관료주의에 빠져서 일선에 나가있는 선교사 중심이 아니라 본국에 있는 선교부 중심으로 움직여졌다. 이런 교파들의 선교는 대부분 전도보다는 교육이나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동시에 어려운 지역에는 가지않고, 도회지에서 평안한 선교를 하고 있었다. 이런 기존교파의 선교에 반대해서 선교부 중심이 아니라 현지 선교사 중심으로, 의료나 교육같은 간접전도가 아니라 영혼구원을 제 1의 목적으로 삼는 직접전도로, 가능한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서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선교운동을 신앙선교운동이라고 한다. 이런 단체들은 직접 후원자로 부터 지원을 받으며, 본국에 선교본부를 갖고 있지 않고, 현지의 선교사들이 모든 것을 직접 책임진다. 따라서 만국성결연맹도 완전히 교파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전에는 선교사를 통제하는 의미의 선교부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동양선교회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는 선교본부가 현지에 있었다. 즉 처음에는 일본에, 다음에는 한국에, 다음에는 중국에 선교본부를 두었다. 신앙선교단체들은 거의가 여러 교파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라고 밝히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동양선교회는 지금도 초교파적인 신앙선교단체임을 그들의 공식잡지에 밝히고 있다.

비록 동양선교회가 공식적으로는 만국성결연맹의 종속단체는 아니지만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연맹의 패턴을 따라" 형성되었다. 즉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연맹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앞에서 만국성결연맹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만국성결연맹은 웨슬레안성결운동의 전통에 서있는 단체이다. 또한 이들은 중생과 성결 그리고 신유와 재림의 온전한 복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동양선교회는 충실히 만국성결연맹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중생과 성결은 웨슬레안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신유와 재림은 보다 폭넓은 복음주의의 전통에서 유래하였다. 즉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연맹과 같이 웨슬레안의 전통에 서있지만 거기에 메이지 않고 보다 폭넓은 복음주의의 셰계와 호흡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표현하는 표어로서 만국성결연맹과 동양선교회는 다같이 온전한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즉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 성서의 온전한 복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두단체를 움직이는 근본정신은 신약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하는 말로서 1900년 만국성결연맹은 그 명칭에 "사도적"이라는 말을 첨가하게 된 것이다. 사도적이라는 말은 사도행전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들은 "오순절적인 교회"를 지향했다. 즉 오순절의 성령에 충만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만국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의 관계는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잇다. 첫째,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연맹에 속해있는 선교단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동양선교회는 별개의 독립적인 선교단체이다. 따라서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아무런 교파의 배경도, 선교부의 지원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국성결연맹은 동양선교회의 배후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정신에 있어서는 만국성결연맹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특별히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연맹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만국성결연맹과 한국성결교회

이제 본 논문의 마지막 과제는 만국성결연맹과 한국성결교회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만국성결연맹, 동양선교회와 한국성결교회의 관계를 보다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만국성결교회와 한국성결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여기서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만국성결연맹과 한국성결교회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동양선교회를 통한 간접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한국성결교회는 만국성결교회와 활발한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국성결연맹과 한국성결교회의 사이에는 몇가지 매우 구체적인 관계를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이명직목사의 [성결교회약사]에 나오는 만국성결교회에 대한 언급이다. 이명직목사는 동양선교회의 신앙개조를 설명하면서 전문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의 신앙개조는 그리스도와 사도들로 말매암아 나타내심과 요한 웨슬네의 성경해석의 근본? 교리와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주강생 1925년에 공포하야 성서학원과 모든 교회와 신도들의게 가라처 영구하도록 직히는 신경으로 하나니라." 여기에서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것은 웨슬레의 사상의 근본을 바탕으로하여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작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가 동양선교회성결교회의 신앙개조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현재 1925년에 제정된 성결교회조례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조례의 영어판이 있다. 이 조례의 영어판에 의하면 만국성결교회의 헌법과 한국성결교회의 헌법사이의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만국성결교회의 목적, 신앙개조, 입회서약, 교회계약, 교역자들에게 주는 특별권면등은 거의가 그대로 동양선교회의 헌법과 장정에 수록되었다. 필자는 여기에서 만국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의 헌법을 조목 조목 비교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서는 선행연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와 이명직목사의 [약사]에 언급되고 있는 신앙개조를 비교하여 보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말해야 할 것은 이명직목사의 언급대로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동양선교회의 신앙개조는 만국성결교회의 것을 거의 그대로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이런 유사점은 만국성결교회의 1916년판 신앙개조와 비교해 볼 때 가장 잘 드러난다. 동양선교회는 특별히 칭의, 성결, 신유, 재림, 교회에 관한 조항에서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1916년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는 모두 17개조로 되어있는데 이중에 동양선교회의 신앙개조에 누락된 것은 제 11조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회중에서 말하는 것에 관한 조항이다. 이 조항에서 방언으로 회중에서 말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말하며, 또한 성결세례를 성결체험이 아닌 방언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동양선교회가 이 조항을 삭제했다고 해도 이런 정신은 동양선교회에서 계속 유지되어 왔다. 또한 대폭 수정한 것은 세례에 관한 부분이다. 만국성결연맹은 세례의 형태는 갖자의 자유로 할것이며, 아무도 어떤 형태를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또한 유아세계는 유지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침례가 세례의 성서적 형태라고 말하면서 부득이 한 경우에는 약식으로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한 조항은 빠졌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동양선교회의 신앙개조는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가운데 하나는 삭제하고, 다른 하나는 대폭수정하고 나머지는 만국성결교회의 것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만국성결교회와 한국성결교회의 보다 직접적인 관계는 1933년의 최석모목사의 미국 방문을 통해서이다. 최석모목사는 아현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동양선교회의 통역으로 수고한 분이었다. 1933년 한국성결교회는 제 1회 총회를 조직하고, 자치를 선언하였다. 총회의 조직과 더불어서 한국성결교회의 최고의 책임자는 한국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성결교회는 주체적으로 해외의 성결교파와의 유대관계를 맺고, 선교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여 성결교회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이런 게획의 일환으로 제 1회 총회가 끝난 뒤 5월 21일 최석모목사는 미국을 향하였다. 최석모목사의 미국여행은 한국성결교회의 뜻도 있었지만 동시에 미국의 필그림성결교회(만국성결교회의 후신)의 초청도 있었다. 필그림성결교회는 1933 시카고에서 열린 총회에 한국대표를 초청하였다. 필그림 1930년대에 이르러 완전한 교파교회를 형성했고, 따라서 해외선교도 교단의 선교부의 지휘아래 놓으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필그림성결교회는 한국성결교회와 교단의 차원에서 관계를 맺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석모목사는 필그림성결교회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서 여러 성결단체와 교제를 나누고, 선교비를 모금하여 돌아왔다. 이 때 최석모목사가 방문한 곳은 필그림성결교회 뿐만이 아니라 신시내티의하나님의 성서학원도 포함 되어 있었다. 최석모목사는 이곳에서 상당한 모금을 할 수 잇었다. 그러나 1933년 제 1회 총회 이후 한국성결교회는 교단의 주도권문제를 놓고 동양선교회와 갈등을 겪게 되었고, 그 뒤에는 곧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여 필그림성결교회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 되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한국성결교회와 만국성결교회의 직접적인 관계는 활발하지 못하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의 가장 가까운 성결단체는 역시 만국성결교회이다. 그리고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할찌라도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를 통해서 만국성결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별히 신학적인 면에서는 그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 따라서 한국성결교회는 만국성결교회의 정신과 신학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맺는 말

최근에 한국성결교회의 배경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선교에 의해서 시작된 교회이다. 이 동양선교회는 아무런 교파나 선교부의 배경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동양에 선교를 시작했다고 말해왔다. 그래서 많은 한국성결교회신자들은 세계에 성결교회는 한국에만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동양선교회의 배경으로서 만국성결교회가 언급되고 있다. 동양선교회의 창립자인 카우만이나 킬보른이 만국성결교회의 멤버이며, 이들의 도움을 받아왔으니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교회의 선교단체로서 이해될 소지가 있다. 그러면 이 서로 상반되는 것 같은 이 두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선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은 동양선교회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어떤교파에 속하지 않은 독립선교단체라는 것이다. 동양선교회는 이것을 항상 강조하여 왔다. 위에서 충분하게 밝힌 것처럼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교회를 포함한 여러 성결단체로 부터 물질로, 기도로 지원을 받아왔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이들중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았다. 동양선교회는 초교파적인 신앙선교단체인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19세기 웨슬레안성결단체의 신앙정신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만국성결연맹을 중심으로한 "과격파"성결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은 중생과 성결의 전통적인 웨슬레안 성결운동과 더불어서 신유와 재림 역시 성서의 중심 메시지라고 믿어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전하려는 사명아래 - 즉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을 전하려는 사명아래 - 출발하였다.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교회의 이런 정신을 충실하게 이어받고 있다.

따라서 만국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의 관계를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교회의 큰 도움을 받았지만 만국성결교회의 통제아래 놓여있는 선교단체가 아니라 초교파적인 신앙선교단체이며, 둘째 동양선교회는 독립적인 선교 단체이긴 하지만 만국성결교회를 중심으로한 과격파 성결단체들의 신앙과 신학을 유산으로 이어받고 있다.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신앙적인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1925년 제정했던 성결교회조례는 아직까지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인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성결교회는 이런 신앙적인 유산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그 근원을 밝혀내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바르게 전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성결교회는 세계를 향하여 나가고 있다. 이런 차제에 한국성결교회는 세계에 우리의 정신을 나누고 있는 단체들이 누구인가를 살펴보고, 그들과 함께 세계선교를 위해서 나가야 할 것이다. 정말로 한국성결교회가 세계성결운동의 중심이 될려면 세계성결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연구하고, 그 참된 정신을 밝혀내는 진지한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