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운동과 사회개혁

박명수

 

              

서 론

많은 사람들은 성결교회가 사회개혁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진보주의적인 학자들은 성결교회를 포함한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역사적인 현실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따라서 이들 신앙은 타계주의적 도피주의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성결교회 내부에서도 이런 비판을 대체로 수용하고 있다. 성결교회 지도자들은 성결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는데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한국성결교회가 민족의 문제 앞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3·1운동 때에도, 7-80년대의 민주화운동 때에도, 성결교회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교육이나 의료선교를 통해서 한국문화에 크게 기여하지도 못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위대한 지도자를 배출하지도 못했다.

물론 성결교회가 민족의 한 복판에서 공헌한 점도 있다. 복음을 통해 사람을 새롭게 함으로써 건전한 시민생활을 하게 한 것은 큰 공로이다. 사실 낙망에 빠져 아무렇게나 살던 사람들에게 성결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사실을 과소평가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또한 일제 말 천황제에 반대하다가 교단이 해산되는 쓰라린 경험을 한 것도 매우 소중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결교회가 마땅히 해야할 그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에는 성결교회 내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과 활동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성결교회는 어떤 신학적 근거를 갖고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야 할 것인가? 본 논문은 여기에 대해 답해 보려고 한다. 본 논문은 적어도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성결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성결운동의 전통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필자는 성결전통은 강한 사회개혁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성결교회는 변화하는 시대의 문제에 새롭게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전통에 굳게 서면서도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해석학적 작업의 필요성을 보게 된다.

사회개혁은 사회구조를 통한 개혁도 있고, 개인의 변화를 통한 개혁도 있다. 전자가 주로 진보적인 단체들이 이끈 사회개혁이라면, 후자는 주로 복음주의자들이 지지한 방법이다. 성결운동은 사회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의 덕목이 사회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막스 베버이다. 그에 의하면 청교도의 근면윤리가 오늘날의 근대자본주의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해석한 사람이 프랑스 역사학자인 할레비(Elie Halevy)이다. 그에 의하면 감리교도들은 그 근면성으로 인해 노동자계층에서 중산층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영국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계급간의 대립이 심각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영국을 사회주의 혁명에서 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의 개혁에 대해서 매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진정한 크리스챤은 건전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본 논문은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양분하기보다는 이것이 상호 조화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서 그 논의를 시작한다.

본 논문은 웨슬리 이후의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성결운동을 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사회개혁에 공헌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웨슬리 이후의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있었던 성결운동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19세기의 성결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연구는 그 실적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그러나 18세기 웨슬리 전통뿐 아니라 그 이후의 성결전통에서도 사회적인 활동이 매우 활발히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성결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Ⅰ.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에 대한 최근의 연구

A. "대역전"(The Great Reversal)에 대한 논쟁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18세기와 19세기의 성결운동은 사회개혁에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18세기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곧 사회개혁운동이었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산업사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18세기 영국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에는 수많은 공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서 도시로 밀려들었다. 도시는 슬럼화가 되었고, 많은 문제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도시는 죄악의 온상이 되었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자리 잡은 상황이 이런 것이다.

웨슬리는 타락한 영국사회를 구원하는 메시지가 성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개인의 성결은 곧 사회적인 성결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성결을 체험해야 한다고 외쳤을 뿐만이 아니라, 경제를 포함하여 생활의 현장 속에서 감리교도들이 지켜야할 구체적인 지침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것을 속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이런 노력으로 감리교도들은 산업사회의 죄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이것 뿐 아니라 웨슬리는 사람을 죄악에 빠뜨리는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하며 사회의 개혁을 외쳤다.

19세기의 미국에서 가장 흥미있는 운동 가운데 하나가 성결운동이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은 19세기를 맞이하면서 희망에 부풀었다. 19세기 초에 일어난 제 2차 대각성운동은 이런 낙관주의적인 배경에서 일어났다.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개혁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여성문제, 흑인해방, 도시개혁 등 많은 개혁적인 프로그램을 주도해 나갔다. 이것은 19세기 중엽에 활발했던 찰스 피니의 성결운동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피니는 죄에서의 성결이라는 개인적인 경건을 사회의 개혁이라는 문제와 결부시켰다.

19세기 말 성결운동도 이런 개혁적인 전통을 이어갔다. 특히 도시 빈민층을 대상으로 한 성결운동은 도시문제의 저변에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곧 인간의 죄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모든 사회문제의 밑바닥에는 인간 본성의 부패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때 사회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신으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도시의 슬럼가에 들어가 그 거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도시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세군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18세기와 19세기에 활발했던 복음주의 내지 성결운동의 사회적인 관심이 1910년대를 지나가면서 현격하게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비전을 가졌던 복음주의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비전을 잃었고, 사회와 격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대 역전"(The Great Reversal)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복음주의가 20세기에 들어와서 그 사회적 관심을 상실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학자들은 20세기의 복음주의가 사회적인 관심을 잃은 것은 미국의 복음주의가 후천년설에서 전천년설로 전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주장으로서, 재림의 조건으로 이 세상에 먼저 복음이 전파되어 지상천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많은 부흥사들은 열심히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반면에 전천년설은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도피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복음주의 내에서 후천년설의 개혁적인 측면은 사라지고 전천년설의 도피주의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분명히 전천년설에는 도피주의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의 유명한 사회개혁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전천년설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세기 후반의 가장 활발한 사회봉사단체인 국제기독교사역자연합회의 회장은 유명한 세대주의자인 토레이(R. A. Torrey)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재림하면 죄악된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는 전천년설의 주장은 도시의 슬럼가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20세기 복음주의 내에서 사회적인 관심이 퇴조한 것은 사회복음의 등장에 대한 반동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회복음이 미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00년대 초이다. 유럽에서 들어온 진화론과 사회학의 영향을 받은 사회복음은 성서의 복음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영혼의 구원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기독교는 사회에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으며, 기독교의 목적은 사회를 기독교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특히 전통적인 윤리를 강조하는 부흥운동을 비판하고, 사회구조를 개혁함으로서 사회를 새롭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사회복음은 복음주의자들에게 강한 반발을 받았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 특히 성결운동가들은 여기에 대한 반발로 기독교의 본질은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복음의 전파를 통한 영혼의 구원이라고 주장하였다. 복음주의는 사회복음을 비판하는 가운데서 더욱 영혼 구원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주의 진영으로 하여금 사회적인 관심을 축소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필자도 사회복음의 등장이 복음주의의 사회적인 관심을 역전시킨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적으로 복음주의 내에서 사회적인 관심이 쇠퇴한 것은 전천년설이 강한 힘으로 전파되던 19세기 말엽도 아니고, 사회복음이 전통적인 부흥운동을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한 20세기 초부터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복음의 등장과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퇴조 사이에는 밀접한 상호관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에 속한 학자들 가운데는 성결운동과 사회복음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말하면 20세기 초에 일어난 사회복음의 기원을 19세기 성결운동에서 일부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성결운동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20세기의 사회복음 운동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성결운동과 사회복음은 전혀 다른 대상과 배경을 가지고 등장했다. 성결운동은 개인의 변화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 반면, 사회복음은 개인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고 사회구조의 변화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대 역전"의 원인에 대해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역사가인 도널드 데이톤은 "대 역전"의 원인이 복음주의 내에 프린스톤 구파의 등장에 기인한다고 본다. 19세기 복음주의의 사회운동의 배후에는 성결운동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것은 강력한 사회개혁의 동인이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복음주의 주도권은 프린스톤 구파(Old School)가 잡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전도를 중심으로 하던 복음주의가 20세기에는 자유주의와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해주어야 할 사람은 프린스톤 구파였다.

프린스톤 구파는 자유주의와 싸우는 데에는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고등비평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학자들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 프린스톤 구파였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린스톤 구파는 사회적으로도 보수적이었다. 일찍이 프린스톤 구파는 노예문제와 여성안수에 대해서 반대했을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엘리트적인 기성사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지성을 강조하며 엘리트적이라는 점에서 프린스톤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19세기 복음주의의 사회개혁은 대중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부흥운동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런 배경이 여성안수, 노예해방, 가난한 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러나 복음주의 내에 프린스톤 구파가 기득권을 가지면서부터 복음주의는 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수적이 되었으며,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기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다.

여기에 반해, 칼빈주의 역사가인 조지 말스덴은 복음주의 운동에서 사회적인 관심이 쇠퇴한 것은 19세기 미국 기독교가 칼빈주의 전통에서 경건주의적인 성결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제네바에서 시작한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은 문화개혁의 강력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복음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말스덴에 의하면 청교도로부터 시작된 미국의 칼빈주의적인 전통은 강한 사회개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부터 알미니안적인 성결운동이 등장하여 신앙을 개인화 시켰다는 것이다.

말스덴의 지적처럼 19세기 중엽부터 미국 기독교의 중요 흐름은 칼빈주의에서 알미니안주의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개혁의 쇠퇴를 가져왔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알미니안의 볼런티어적인 성격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런 볼룬티어적인 행동의 밑바닥에는 강한 경건주의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즉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사회의 죄악을 바꾸겠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B. 성결운동의 사회개혁 연구의 흐름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성결운동의 사회개혁 연구의 시발점은 디모디 스미쓰이다. 나사렛교회 출신인 그는 1957년 [부흥운동과 사회개혁]이라는 책을 냈다. 원래 하버드대학의 박사논문으로 제출됐던 이 책은 성결운동이 19세기의 사회개혁의 뿌리가 되었음을 잘 밝혀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가 엘리트 중심으로 진행함으로서 대중운동이 무시되어왔다는 점을 간파한 그는 수많은 신앙대중잡지를 중심으로 19세기 미국기독교의 실질적인 모습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온전한 기독교인을 추구하는 성결운동은 온전한 사회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그는 20세기의 사회복음은 이런 19세기 성결운동의 이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성결운동이 구체적으로 노예문제와 빈곤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여 왔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디모디 스미쓰 다음으로 주목할만한 학자는 마그누손이다. 스미쓰가 19세기 중엽의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을 다루었다면, 마그누손은 [슬럼에서의 구원]이라는 책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을 다루었다. 그는 스미쓰의 패턴을 따라서 성결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는지를 다루었다. 특별히 19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과 세계로 번져나간 구세군을 중심으로 연구한 마그누손은 그의 책에서 도시선교, 요양원, 여성구조사역, 무직자센터, 감옥전도, 여성사역, 흑인을 위한 프로그램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적 측면을 강하게 드러내고 옹호한 학자는 도날드 데이톤이다. 웨슬리안교회 출신인 데이톤은 그의 저서 [복음주의 유산의 재발견]에서 어떻게 현재의 성결교파들이 19세기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졌는가를 구체적으로 연구하였다. 데이톤은 자유감리교회, 웨슬리안 감리교회, 필그림 성결교회, 나사렛교회, 구세군등이 처음에는 강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혀냈다. 또한 현재 칼빈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 휫튼대학이나 고든대학 등이 원래는 알미니안적인 성결운동에 속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관들이 칼빈주의로 바뀌면서 교리적인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고, 따라서 원래 가졌던 사회개혁 프로그램은 퇴조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후 많은 성결운동학자들이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적인 측면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분야가 성결운동의 여성사역에 관한 분야이다. 남녀의 구별보다는 성령을 받았는가의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성결신학은 성령 받은 자들은 남녀의 구분 없이 사역에 나설 수 있다는 개혁적인 입장을 지지하였다. 데이톤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여성사역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또한 학자들은 성결운동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모델을 구세군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Wesleyan Theological Journal은 1990년 봄호에서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적인 측면은 개개 인물들에 대한 연구로 확대되고 있다. 챨스 화이트는 19세기 성결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팔머 여사를 연구하였는데, 여기에서 화이트는 성결운동이 어떻게 여성운동과 빈민구제사업과 연결되었는지를 잘 밝히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수지 스탠리는 또 다른 성결운동의 지도자인 알마 화이트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철저하게 보수적인 성결운동이 철저하게 개혁적인 여성운동을 지지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적인 측면에 대한 왕성한 연구와는 달리 성결운동의 개인윤리적인 측면은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사실 성결운동의 일차적인 관심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결학자들은 미국 학계의 흐름을 따라서 사회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하지만 최근에 성결운동의 개인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가 나오고 있다. 로드니 리드는 개인윤리를 무시하는 학계의 흐름을 비판하고,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술과 담배 같은 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인식해왔다. 하지만 19세기 성결운동은 술과 담배는 단순히 개인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를 망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측면에서 리드는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분리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성결운동에서 이들이 어떻게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지를 연구하였다.

리드는 역사가들은 성결운동의 개인윤리를 무시함으로써 이에 대해 잘못된 해석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결운동의 사회활동은 개혁운동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반면, 개인윤리는 율법적인 경향을 가졌다고 비판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성결운동에는 율법적인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동시에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있다. 성결운동이 화려한 복장을 금하고, 세속적인 오락을 배척한 것은 당시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세속주의에 강력하게 도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윤리는 율법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사회 비판적인 측면도 갖고 있다.

로드니 리드의 뒤를 따라서 20세기 성결운동의 개인윤리에 대한 연구가 나왔다. 20세기 중반에 성결운동은 19세기의 엄격한 생활윤리를 포기하고 미국의 주류사회에 편입되었다. 원래 성결운동은 극장이나 화려한 옷을 피한다는 엄격한 생활규범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성결운동이 성장하면서 이런 섹트적인 것을 버리게 되었다. 여기에 반발한 일부 성결파들은 기존의 성결운동에서 분리하여 수많은 보수파 성결그룹을 형성하였다. 이 보수파 성결그룹의 센터가 바로 하나님의 성서학원이다. 쏜톤은 이 보수적인 성결운동의 개인윤리를 다루었다. 이런 연구는 지금 현재 미국에서 포르노나 성적인 타락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성결운동의 윤리에 관한 연구는 미국사회의 관심의 변화와 함께 발전되어 왔다. 처음에는 진보주의자들로부터 성결운동은 도피주의적이라는 비판에 응답하기 위해 19세기의 성결운동이 사회적인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런 관심과 더불어 지금 미국에는 심플 라이프 운동이나 반 포르노 운동 같은 복음주의적인 사회참여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흐름과 발맞추어 성결운동의 절제된 생활이 시대적 요구에 부합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의 의미를 보다 적극적으로 밝히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Ⅱ. 성결운동의 사회개혁 프로그램

19세기의 성결운동에는 20세기의 성결운동에서 생각하기 힘든 많은 사회개혁 운동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19세기의 성결운동은 낙관주의적이었다. 성결운동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개인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낙관주의적인 성결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A. 성결운동과 인종문제

성결운동은 인종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이었다. 19세기 미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예문제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기독교는 둘로 나뉘어졌다. 북쪽은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노예에 의지해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남부는 노예제도의 유지를 주장하였다. 미국에서 노예해방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세기로서 성결운동의 출현과 그 시기를 같이한다. 1835년에는 19세기 미국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푀뵈 팔머가 성결증진을 위한 화요집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미국 감리교의 장로사(presiding elder)인 오렌지 스코트는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에서 노예폐지 캠페인을 벌여 많은 감리교인들로 하여금 노예폐지의 입장에 서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오렌지 스코트는 감리교에서 축출되어 웨슬리안 감리교회를 만들게 되었다. 웨슬리안 감리교회는 미국의 중요한 성결교파이다. 성결운동의 온전한 신앙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죄악을 그대로 인정하기보다는 이것을 제거하고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미국 교회사가 디모디 스미쓰는 노예폐지 운동의 배후에는 성결에 대한 강력한 추구가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세기의 성결운동이 웨슬리안의 전유물은 아니다. 장로교 출신인 챨스 피니도 1835년부터 성결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피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교회와 사회가 먼저 성결해야 한다. 성서가 말하는 구원은 죄 안에서(in sin)의 구원이 아니라 죄로부터(from sin)의 구원이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죄에서 용서받았지만 인간은 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성서는 우리에게 온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로부터 자유하여 온전한 성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결에 대한 갈망은 노예폐지 운동으로 이어진다. 피니에 의하면 미국사회를 가장 강력하게 얽어매고 있는 큰 죄악은 노예문제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바로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19세기의 노예해방론자들은 대부분 직간접으로 피니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피니의 성결운동의 핵심은 그가 교수로 있던 오벌린 대학이었다. 오벌린 대학은 창립 때부터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금지했다. 그리고 오벌린 교회는 노예소유자를 결코 강단에 초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탈출노예를 위한 기금을 만들어서 노예 소유주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또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벌린 대학은 노예폐지운동에도 앞장섰다. 당시 미국법은 노예가 탈출하는 것은 불법이며, 도망간 노예가 잡히면 노예 소유주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아울러서 도망간 노예를 도아주는 것은 불법이었다. 당시 오하이오주에 소재한 오벌린은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로 도망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오벌린 공동체는 이들을 도와 주었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그것은 불법이었다. 결국 1858년에 경찰은 도망한 노예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21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오벌린 공동체의 이러한 행동은 법률이 양심과 성경에 비추어서 틀렸다고 생각될 때에 불복종할 수 있다는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이어졌다. 피니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오하이오 반 노예협회(Ohio Anti-Slavery Society)는 그 결의문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어떤 인간의 법도 하나님의 법과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첫째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법은 무엇이든지 참된 의미에서 법이 아니다. 둘째 법정은 부도덕을 조장하는 어떤 것도 법률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고 판결해왔다. 셋째 법정에서 성서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서를 하는 것은 인간의 법을 초월하는 신적인 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넷째 미국 헌법은 어떤 인간의 법도 양심과 하나님의 법을 거스릴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선언들이 오벌린 공동체로 하여금 실정법을 어기면서까지 노예해방운동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1860년대에 미국은 노예문제로 남북전쟁을 치렀다. 북쪽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은 노예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이런 법률적인 해방이 실질적인 해방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교회는 흑백의 골이 더욱 깊어져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각각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성결운동은 흑인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노예폐지 운동의 전통을 가진 성결운동은 19세기 후반에 흑인들을 성결운동에 합류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구세군은 일찍이 흑인들을 사역자로 받아들이고 흑인들 가운데서 성결단체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심프슨의 기독교연합선교회도 흑인사역에 큰 노력을 하였다. 실질적으로 기독교연합선교회의 가장 활발한 몇몇 단체들은 흑인그룹이었다. 이것은 다른 성결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성결운동은 모든 신자들은 인종과 관계없이 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용서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안에서는 인종적인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결이야말로 인종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한 성결운동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화된 마음은 절대적으로 모든 전쟁과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성결은 모든 사람, 즉 국적, 피부색, 환경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형제로서 사랑할 때까지 인간의 본성을 심화시키고, 부드럽게 만들며, 폭을 넓혀 준다."

그러나 흑인들이 보다 안전한 자신들의 고향을 만난 것은 성결-오순절운동에서이다. 19세기의 성결운동가들 가운데에는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오늘날의 오순절운동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성결을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다. 특별히 이 성결-오순절 단체 가운데 가장 큰 단체가 하나님의 교회(그리스도)인데 이 단체는 흑인집단이다. 이 단체를 만든 사람은 메이슨(C. H. Mason)으로 원래 침례교도였으나 성결체험을 한 후 성결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세계에서 가장 큰 흑인교파요, 동시에 가장 큰 오순절교파가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백인 사역자들이 이 메이슨의 단체에서 안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흑인이 주도한 이 단체에서 이런 백인들의 사역은 흑인교회의 백인지부로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성결-오순절전통에서 더욱 상징적인 인물은 근대 오순절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무어(William J. Seymoure)이다. 원래 노예였던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그는 성결파에서 은혜를 체험하였고, 성결파인 하나님의 성서학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로스 엔젤리스의 나사렛교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방언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축출 당했다. 시무어는 하는 수 없이 1906년 아주사 거리에 전도관을 열고 집회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오순절운동의 기원이 된다. 이 시무어의 집회는 그야말로 흑백 혼합집회였다. 그리고 수많은 백인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성령체험을 한 뒤에 돌아가서 성결운동을 일으켰다. 아마도 흑인들이 교회사에서 가장 크게 공헌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순절운동일 것이다.

 

B. 성결운동과 여성문제

둘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성결운동이 여성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여성안수이다. 많은 보수적인 교회들은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진보적인 교회들은 여성안수를 찬성한다. 그러나 19세기의 성결운동은 어느 전통보다도 더 여성사역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19세기의 전통적인 교회들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보는데 비하여 성결운동은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세기의 성결운동은 많은 여성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전통적인 목회사역이 설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근대복음주의 부흥운동에서는 신앙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간증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부흥운동이 교리의 설명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의 체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서 여성들이 간증자로서 나서기 시작하였다. 여성들의 이러한 활동은 원래 웨슬리 당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크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이다. 실지로 19세기 성결운동은 푀뵈 팔머, 한나 스미쓰, 캐더린 부쓰 같은 뛰어난 여성들을 배출하였다.

19세기의 성결운동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 팔머이다. 팔머는 [아바지의 약속]이라는 책에서 왜 여성사역을 인정해야 하는가를 주장하였다. 팔머의 주장에 의하면 말세에는 남성과 여성에게 성결을 부어주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성별의 구별이 없이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미쓰는 팔머의 뒤를 이어 1870년대에 [차원 높은 신앙생활]이라는 성결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스미쓰는 여성다운 섬세한 언어로 성경의 여성적인 측면을 부각시켰다. 그녀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남성적인 이미지 보다 여성적인 이미지가 강하다고 주장하면서, 은총, 용서, 사랑 같은 성서의 단어는 이것을 뒷밭침 해 준다고 주장하였다. 캐더린 부쓰는 남편과 함께 구세군을 창시한 인물로서 구세군에서 남녀가 함께 사역하도록 만들었다. 아마도 기독교의 어떤 교파보다도 남녀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만든 단체가 구세군일 것이다.

그러나 성결운동이 여성사역을 강조한 것은 오늘날의 진보주의 신학이 말하는 여권신장의 차원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여성사역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결운동의 여성사역은 선교적인 측면이 강하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성결운동의 여성사역에 대해 연구하여 왔다. 성결운동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윤락여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들을 구조하는 많은 구조사역을 전개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사역은 학자들의 주목을 거의 끌지 못하였다. 많은 진보적인 학자들은 성결운동의 이러한 사역이 사회를 개혁하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윤리를 강요하는 보수적인 운동이라고 이해했다. 물론 이런 구조운동은 전통적인 성 윤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이런 윤락여성 문제의 배후에 있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인식했으며,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최근에 미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윤리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성결운동의 이런 구조운동도 다시 조명되고 있다.

미국의 성결운동은 윤락여성 구조운동을 노예폐지 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했다.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남성이 가난한 여성을 노예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결운동은 윤락여성을 백인노예라고 불렀다. 따라서 성결운동은 노예폐지 운동과 동시에 윤락여성 구조운동도 전개했다. 성결운동의 본산지인 오벌린 대학에서는 1834년 여성도덕개혁협회(Female Moral Reform Society)를 결성하였는데, 이 단체의 초대 총무는 바로 피니의 부인 리디아 앤드류 피니였다. 이 단체는 1840년에 대규모의 대회를 열었는데, 당시에 전국적으로 550개의 지부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들은 각 지역에 있던 버려진 여러 종류의 보호소들을 이런 여성들을 위한 직업소개소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남성 중심의 사회와 여성들의 낮은 임금구조, 그리고 미성년자 고용문제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런 구조사역은 19세기 후반의 많은 성결단체에서 계속되었다. 1882년 뉴욕의 크리텐튼(Charles Chritenton)은 유흥가에서 구조사역을 시작하였다. 두 명의 윤락여성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들을 위한 사랑의 사역이 함께 동행하지 않는 한 별 효과가 없다고 느낀 크리텐튼은 1883년 플로렌스선교회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10년 안에 250명의 여성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하였다. 그 후 크리텐튼은 이런 단체들을 확산시켜 전국적으로 25개소의 지부를 운영하였다. 크리텐튼이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였다.

트리텐튼의 모델을 따라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는 수많은 구조단체들이 생겨났다. 뉴욕에서는 위트모어(Whittemore) 부부와 심프슨과 협력하여 '희망의 문'(Door of Hope)이라는 구조단체를 만들어 윤락여성과 주정뱅이들의 구조활동을 벌였다. 그 후 희망의 문은 여성들을 위한 구조활동을 따로 분리하였으며, 1903년에 61개의 지부를 갖게 되었다. 구세군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1885년 영국에서는 복음주의적 개혁가인 스테드(William Stead)에 의해서 영국도시 슬럼가의 어두운 면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윤락 문제가 어떻게 도시문제, 임금구조, 범죄구조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다루고 있다. 스테드의 친구였던 구세군의 부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스테드와 함께 정부로 하여금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하게 끔 만들었다. 이것은 성결운동이 단지 구조활동만이 아니라 제도적인 개선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있었던 거의 모든 성결단체들은 이런 구조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만국성결연맹의 창시자이며, 동양선교회를 설립한 카우만의 안수식에도 참석했던 리스(Seth C. Rees)도 시카고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구조활동을 벌였다. 그의 책 Miracles in the Slum은 그가 변화시킨 수많은 윤락여성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런 구조활동에 나사렛교회도 적극적이었다. 1913년의 나사렛 잡지에는 이런 구조활동을 기존교회는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나사렛교회는 이것을 중요한 임무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 이런 구조단체 10군데를 언급하고 있다.

성결운동의 잡지들은 이런 문제의 핵심을 직시하고 있었다. 도시에 윤락여성들이 생기는 것은 이들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유혹에 이들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문제가 함께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적인 범죄란 항상 남녀가 함께 저지르는 것인데, 그 책임은 항상 여성들에게만 떠넘겨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결운동 잡지들은 남성들의 학대 때문에 집에서 나와서 윤락여성이 되는 여자들과 그러한 여성들을 노예로 생각하여 매음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누가 더 나쁘냐고 묻고 있다. 어떤 성결단체는 [미국의 백인노예](The White Slave of America)라는 제목의 팜플렛에서 딸들을 순결하게 키우기를 원한다면 먼저 아들들을 순결하게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경찰의 타락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다시 말하면 경찰과 윤락업자들 사이에 검은 고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끊지 않고서는 윤락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C. 성결운동과 도시빈민문제

셋째 성결운동이 도시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산업화로 인해서 생긴 도시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18세기 영국은 급격하게 산업화가 되었고, 따라서 도시에는 수많은 공장이 생겼다. 그리고 새로 생긴 공장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밀려왔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영국성공회의 대응책은 없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여기에 주목한 사람이 웨슬리이다. 웨슬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집중적으로 일하고 있던 지역에 감리교회를 세웠다. 웨슬리는 이들에게 건전한 경제윤리와 생활윤리를 가르쳐 이들을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원래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던 웨슬리는 교회가 부르좌화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에서 소외시키는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웨슬리는 예배당은 가능한대로 검소하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감리교도들은 부유해졌으며 이에 따라 교회도 중산층화 되었다. 그리고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의 헌금이 아니라 부자들의 기부금으로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 자유감리교회였다. 자유감리교회란 교회는 빈부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미국 성결운동이 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19세기 말 미국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여기에 따른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이전에는 미국이 농업국가였다면 이후에는 미국이 산업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사회도 가난한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계층으로 나뉘게 되었다. 유명한 미국교회사가인 스윗은 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미국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부의 증가와 거기에 따른 교회의 구조변화라고 지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원래 가난한 자의 교회였던 미국 감리교회는 중산층의 교회로 자신을 변신하게 되었다. 이것을 데이튼과 많은 학자들은 감리교의 부르좌화라고 부른다. 이것은 감리교회뿐 아니라 대부분 주류교회의 모습이었다. 1886년 아담스(Oscar F. Adams)는 "[지금의] 개신교는 그의 경계 안에 가난한 자의 자리를 갖고 있지 않다. 부요한 교회들은 가난한 자들이 자신들에 합당한 교회로 떠나든지, 아니면 자신들이 이사하는 교회에 따라 오는 것을 포기하도록 윽박지른다"라고 말했다.

감리교회의 부르좌화 현상은 예배의 전례화와 건물의 고딕화 같은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제 중산층 교회가 된 감리교는 그들의 취향에 맞는 예배 형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가난한 자의 교회였던 감리교회는 지금까지 천주교나 성공회의 전례중심의 예배에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부흥회 중심의 예배는 밀려나게 되었다. 또한 19세기 후반의 감리교회는 당시의 유행을 따라 거대한 고딕식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들은 찬란한 고딕식 건물을 지으면서 그 속에서 자기들의 성취감을 맛보게 되었다. 말틴 마티에 따르면 이런 건물이야말로 성공의 가장 가시적인 증거였다.

그러나 성결운동은 이런 변화 속에서 감리교회의 변질과 순수성의 상실을 보았다. 그들은 감리교회가 다시금 생명력이 없는 전례주의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더욱 열정적인 예배를 선호하였다. 이것은 성결운동이 오순절운동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들은 숨막히는 엄격하고 엄숙한 전례적인 예배보다는 아멘과 할렐루야를 마음껏 외칠 수 있는 부흥회적인 경향의 예배를 더욱 선호했다. 또한 성결운동은 화려하고 웅장한 고딕식 양식의 교회당 건축에 반대했다. 기독교연합선교회의 심프슨은 원래 루이빌에서 화려한 건물을 선호하는 장로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나사렛교회는 그 헌장에 교회의 건물은 가능한 대로 평이하게 지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1899년 나사렛 잡지에는 이러한 성향의 건축 양식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우리는 많은 청중을 위하여 크고 보다 편리한 시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화려하게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이한 장소를 원한다. 그래서 극빈자들도 환영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부자가 없이도 살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이웃의 화려한 교회를 샘내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갈망한다. 그래서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기를 원한다. 나사렛교회로 하여금 이 사명에 충실하도록 하자. 그래서 크고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굶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슬픈 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우리 주님의 왕관에 보석을 달아드리자.

이런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성결운동으로 하여금 전문적인 도시빈민층선교에 나서게 하였다. 기존의 많은 교회들이 도시의 슬럼지역을 떠나서 변두리의 주택지로 옮겨갔다. 따라서 도시의 슬럼지역은 종교의 공동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성결파이다. 이미 1850년에 성결운동가 팔머는 뉴욕의 도시빈민층을 상대로 화이브 포인트 선교회(Five Points Missionary Society)를 세웠다. 이곳에서 그녀는 도시의 여성과 그들의 자녀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그 슬럼가의 도덕적인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런 성결운동의 도시선교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여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구세군이다. 1887년 테임즈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오던 부드 대장은 수많은 '홈리스 피플'(homeless people)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일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구세군은 1890년 초에 매일 15,000명의 사람을 먹이고, 820명의 사람을 재웠다. 그뿐 아니라 부드는 [암흑의 영국와 그 출구]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시빈민의 참상을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삶을 살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드의 이 책은 복음주의적인 사회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이런 도시의 빈민을 위한 운동은 도시의 어린이들을 위한 운동으로 이어졌다. 도시의 여성들은 대부분 생계를 위하여 직장을 다녀야 했다. 따라서 아이들은 방에 가둬 두거나 거리에 버려 두어야 했다. 또한 윤락여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한 성결운동은 수많은 사생아들을 보게 되었다. 또한 이혼 당한 여자들의 아이들도 도움이 필요했다. 성결운동의 도시선교는 이들을 위한 어린이 탁아시설을 운영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탁아사역에 앞장선 것도 역시 구세군이다. 구세군은 1887년 처음으로 탁아소를 운영했는데 3년도 못되어 약 6000명의 아이들을 보호할 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아이들 가운데 이들이 보호하는 동안 죽은 아이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많은 성결단체들도 구세군을 따라서 탁아소를 운영했다. 1910년 나사렛교회의 통계에 의하면 그들은 9개의 육아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산업화는 노동시장의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 말 미국의 서부개척은 끝났고, 농촌은 기계화되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도시로 밀려왔다. 하지만 이들에게 적절한 직업이 제공되지 못했다. 따라서 19세기말 미국은 장기적인 고용불안으로 타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결운동은 이들을 위해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성결운동은 고용불안을 노동조합 같은 권리운동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새로운 노동시장에 맞는 인력을 제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산업훈련원이다. 많은 성결단체들이 직장을 얻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느질, 요리, 가사, 인쇄 같은 기초적인 것들을 가르쳐서 새로운 직장을 얻게 하였다. 구세군은 1897년에 직업소개사업을 시작했는데 처음 20개월 이내에 2600명의 지원자 가운데 1975명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성과를 거뒀다. 만국성결연맹을 창시한 말틴 ?도 직업훈련원을 세워 일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것은 특히 윤락여성들에게 해당되었다. 윤락여성들에게 새로운 직장을 제공해 줌으로서 그들을 윤락가에서 구해 주었다. 아울러서 성결단체들은 직장이 없는 사람들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구세군은 도시에 급식소를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도시빈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을 담당했다.

 

네 번째로 성결운동이 절제운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미국에서 절제운동이 시작된 것은 제 2차 대각성운동 때이다. 미국은 청교도적인 전통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기독교가 술을 절대적으로 금하지는 않았다. 미국기독교가 금주를 철저하게 시행한 것은 19세기 초부터이다. 19세기 성결운동의 열기 속에서 시작된 절제운동은 알콜이 미국사회를 흔드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비쳐(Lyman Beecher)는 음주는 미국사회의 개인을 흔들고, 가정을 붕괴시키며, 나아가서 복음전파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부흥운동이 퍼지는 것과 비례해서 절제운동이 확산되었다.

19세기 후반의 절제운동은 윌라드(Francis Willard)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감리교도이며, 성결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은 윌라드는 미국의 여성기독교절제협회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19세기 이전의 미국에서 가장 큰 절제운동단체이며, 동시에 가장 큰 여성단체였다. 이 운동의 주요 목표는 금주운동이다. 이들은 미국의 가정을 파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주라고 보고,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술 판매를 법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여성단체들을 동원하여 금주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여러 주에서 성공하기도 하였다. 윌라드는 성결이라는 개인적인 윤리를 금주법제정이라는 사회적인 행동으로 연결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세기 말의 성결단체들은 이런 절제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구세군은 처음부터 절제운동에 앞장섰다. 부드 부부는 원래 영국의 절제운동단체에서 만났으며, 구세군을 일종의 절제운동단체로 이해했다. 캐더린 부드는 "독주 대(對) 기독교"라는 글에서 "취하게 하는 것을 음료로 사용하는 습관은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수많은 범죄의 가장 강력한 원인이 된다"고 강조하면서 술 자체가 우리 자신과 이웃의 복지를 해치는 사탄의 도구라고 주장했다. 자유감리교전도자인 세퍼드(M. H. Shepard)가 강력한 성결의 복음을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술집에 가지 않고, 부흥회에 참석하였다. 그래서 술장사들이 부흥회가 열리고 있는 장소에 달려나와 돌과 계란을 던졌다. 경찰이 와서 이것을 막았으나 결국 부흥회 장소는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나사렛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00년경 LA의 금주운동협회의 회장인 바우어(Stephen Bowers)은 나사렛교회가 금주운동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사렛교인이 되었다. 그는 "나사렛교회는 분명히 금주교회이다. … 성결과 금주는 이들이 강조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점이다. 성화된 신자는 결코 술집과 주류판매의 영속화를 합법화시키는 편에 자신의 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성결운동은 이런 금주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가게 되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놀라울 정도로 경제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도 초기의 절제된 삶을 버리고 소비를 미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결운동은 이런 흐름이 결국 신앙을 타락하게 만들고, 성결을 상실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성결운동은 당시의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항하여 신자가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자유감리교회의 한 전도자는 "성경에서 우리의 몸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성경 구절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결운동은 신자들이 물감으로 외모를 가꾸는 것보다 성령으로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성결운동은 또한 세속적인 오락을 금했다. 성결운동이 금지한 세속적인 오락의 목록에는 카드놀이, 경마, 댄스, 극장, 서커스, 흡연 등이 들어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다함께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별히 성결운동은 흡연에 대해서 민감했다. "맑은 공기는 개인의 지갑의 돈만큼이나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이 맑은 공기를 흡연자들에 의해서 강제로 빼앗긴다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에서 호주머니를 털리는 것과 같다." 미국 복음주의 교회는 금연운동을 금주운동만큼 강하게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금주와 금연은 함께 움직였다. 유명한 성결운동가 가운데 한 사람인 갓비는 가나안 땅에 아직 정복되지 않은 여러 족속들이 있는 것처럼 신자들에게도 아직 정복되지 않은 많은 세속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즉각적으로 가나안 족속을 없애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들 속에 남아있는 세속적인 오락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Ⅲ.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을 위한 신학적인 성찰

지금까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있었던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성결운동의 내적인 요소들이 사회의 개혁을 위해서 어떻게 긍정적으로 공헌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뤄 보려고 한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결운동의 역사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결운동 내에 있는 사회개혁적인 요소를 발굴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결운동은 다른 어떤 운동 못지 않게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강한 열정이 있었다. 노예해방, 여성문제, 도시빈민구제 같은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실천하여 왔다. 사실 18세기와 19세기에 있어서 사회개혁 프로그램은 진보적인 단체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적인 단체가 주도하였다.

또한 개인윤리에 대한 재발견이 필요하다. 19세기 말 소위 사회학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구조의 개혁은 진보적인 것이요, 전통적인 개인윤리는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리하여 사회구조의 개혁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개인윤리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웨슬리안 전통이 풍부한 사회개혁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성결을 강조하는 운동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의 성결로 발전되는 것이다. 성결운동은 개인의 성결을 모티브로 한 사회의 성결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구조의 개혁을 통한 사회개혁을 강조해 왔다. 특히 막스주의자들은 사회구조가 바꿔지면 세상이 바꿔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외적인 구조가 바뀌어져도 그것을 움직이는 개인이 바뀌어지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그런 개혁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성결운동이 개인의 변화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생각이다. 문제는 20세기의 성결운동이 개인이 어떻게 사회에서 책임적인 존재로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충분히 가르치지 못한데 있다. 개인의 성결은 사회적인 책임에서 그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결운동은 신자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가이드 라인을 보다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성결운동의 윤리는 성결론의 재해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결교회는 성결이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믿는다. 복음주의 신학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믿는다. 따라서 인간이 참으로 인간이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다. 이것을 성결교회는 성령세례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통한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새로운 역사는 출발한다.

최근 미국의 윤리가 원칙과 규범의 윤리에서 덕 중심의 윤리로 전환하고 있다. 이것은 도덕적인 행위보다도 도덕적인 인간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덕 중심의 윤리, 즉 성품윤리는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신학과 비슷하다. 성결운동이 말하는 성결이란 인간의 심령이 변화하는 것이다. 일찍이 성결신학자 우드는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거룩한 행위가 아니라 거룩한 심령이다. 이 거룩한 심령이 오히려 거룩한 행위를 만든다"라고 말했다. 웨슬리안이 '마음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더 나아가 웨슬리안은 진정한 회개는 보상과 더불어서 이뤄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1901년 시카고에서 열린 성결총회에서도 확인되었고, 한국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인 이명직 목사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죄의 종류에 따라서 거기에 합당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성결교회는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고 있다. 따라서 내적인 성결은 구체적으로 외적인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성결교회의 잡지인 [활천]에는 회개하고 보상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사실 이것은 성결교회만의 일이 아니다.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도 나타났다. 회개와 더불어서 구체적인 보상이 수반되어 불신자들에게 신자들의 변화된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보상론은 개신교의 믿음의 교리가 단지 입으로만 그치는 것을 방지해 주는 중요한 윤리적인 배경이 된다고 생각한다.

성결교회는 성결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로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교리는 성결교의 윤리가 일반도덕과는 구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행위의 반복으로 덕을 형성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는 달리 참된 인간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윤리를 포함하지만 그것을 뛰어 넘는다. 그것은 성결은 일차적으로 성령체험이기 때문이다. 성결에 있어서 성령의 체험이 일차적이고, 그 다음의 결과가 성결한 생활이다. 따라서 진정한 성결은 강제적으로 나타나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성령의 내적인 역동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복음적인 것이다.

셋째로 성결교회의 사회개혁은 복음적인 낙관주의에 근거한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무능력을 주장한다. 하지만 웨슬리안은 하나님의 은총을 근거로 한 그 가능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낙관주의는 개인의 영역에서 온전한 성화를 믿고, 사회의 영역에서는 사회의 개혁을 만들어 낸다. 18-19세기의 성결운동이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은총의 낙관주의 때문이다.

성결운동은 죄 안에서(in sin)의 구원이 아니라 죄로부터(from sin)의 구원이다. 칼빈주의는 이 세상에서 죄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사상에서는 적극적인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웨슬리안은 죄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제거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적극적인 사상은 웨슬리안으로 하여금 현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도록 만드는 동력이 된다.

넷째 성결교회의 사회윤리는 전인적 구원에 기초해야 한다. 성결교회는 처음부터 성서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여(Full Gospel)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온전하게 구원해야(Full Salvation)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사중복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성서는 영혼구원과 육체의 구원을 나누어 놓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고, 동시에 우리의 질병을 고쳐 주셨다. 그러므로 성서가 온전히 가르쳐 주는 복음은 우리를 영육에서 온전히 구원해 주는 복음이다.

지금까지 전통교회가 영혼을 사역의 대상으로 하고, 육체는 사역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영혼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육체의 치유도 중요한 사역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성결운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의 욕구를 찾아보고, 거기에 응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는 자연스럽게 육체의 문제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다.

다섯째 성결교회의 윤리는 종말론적이어야 한다. 성결교회는 전천년설을 믿는다. 전천년설이란 세상은 점점 타락하고 그리스도가 재림하므로 이 세상을 심판하고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전천년설이 교회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현실도피주의적으로 나가게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전천년설에는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천년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식하기 때문에 보다 철저하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끈다. 실지로 19세기와 20세기의 수많은 도시선교단체들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심판을 외치므로 수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런 점에서 종말론적인 메시지는 강력한 사회변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가 니느웨 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재림에 대한 신앙은 성결운동으로 하여금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을 갖게 만든다. 한국성결교회는 재림교리 때문에 총독부에 의해서 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예수님이 재림하면 일본의 천황도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는 재림신앙은 결국 불경죄에 해당되어 교단이 해산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운동은 세속적인 법을 뛰어넘는 신적인 법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의 성결운동은 신앙양심에 따라 노예를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것이 시민불복종운동이다. 세속의 법 위에 더 높은 하나님의 법이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신앙이 기존의 질서를 제한된 범위에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섯째 성결운동은 죄악의 사회적인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결운동은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의 개혁을 추구하여 왔다. 물론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한 점도 있지만 그것을 크게 강조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사회복음이 등장하면서부터 성결운동은 사회의 구조개혁과 같은 문제에는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성결운동은 개인의 죄악을 지적하고 이것을 해결하는데는 관심이 있었지만 구조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사회구조가 부패구조이면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도 부패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성결한 삶을 살려면 사회구조가 개혁되지 않고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성결운동은 시민운동과 함께 사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사회개혁은 사회를 성결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웨슬리의 말처럼 성결이 사회적인 성결이 되지 않으면 진정한 성결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맺는 말 : 몇 가지 실제적인 제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로 18세기 웨슬리는 개인의 성결만이 아니라 사회의 성결도 외쳤다. 이런 전통은 19세기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에도 계속 유지되어 왔다. 오히려 19세기의 감리교회가 부르좌화하면서 초기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비해서 성결운동은 초시대 감리교의 회복을 외치면서 성결과 사회개혁을 하나로 묶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사회복음의 등장에 대한 반동으로 성결운동은 개인의 구원과 개인의 성결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복음주의 부흥과 더불어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일어났던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성결교회도 18세기와 19세기의 성결의 전통을 계승하여 개인의 성결과 더불어 사회의 개혁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성결교회의 전통에 근거하면서 동시에 최근의 사회개혁운동을 고려하면서 사회개혁에 대한 몇 가지 실제적인 제안을 하려고 한다. 첫째는 부흥운동과 개혁운동의 접목이다. 18-19세기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사회개혁운동의 뿌리였다. 그 대표적인 예를 피니와 팔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개인의 성결을 주장하는 부흥운동은 자연히 그 개인이 저지르고 있는 사회적인 죄악을 공격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많은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성결교회는 강한 부흥운동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부흥운동이 교회성장에는 큰 공헌을 하였지만,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는 큰 공헌을 하지 못하였다. 진정한 부흥이 진정한 회개와 새로운 삶으로 연결되어 진다면 부흥의 열기는 사회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는 성결운동은 성범죄의 추방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근대 성결운동은 성적인 타락을 가장 중요한 범죄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진보주의자들은 성적인 문제는 사적인 것이라고 하여 사회개혁의 범주에서 제외시키지만 오늘날의 성범죄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미 사회문제가 되었다. 미성년 접대부, 미혼모, 룸살롱, 동성애, 그리고 이런 것들과 관련된 가정파괴 문제는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모든 문제는 건전한 성 윤리가 전제되어야 해결된다고 믿는다. 이미 정부와 사회단체들은 이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성결을 강조하는 성결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셋째는 성결운동은 절제운동을 강화하여 이것이 환경보호 문제와 연결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결운동은 출발부터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강조하여 왔다. 그래서 금주와 금연 뿐 아니라 화려한 옷을 피하고 세속적인 오락도 금했다. 요즈음 서구와 일본의 환락문화가 한국에 침입하여 많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주택가까지 환락가가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성결교회는 한국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보루가 되어야 한다. 술과 담배도 이미 사회가 사회악으로 규정하여 금주와 금연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는 지나친 소비로 인해서 자원이 고갈되고, 결국 환경을 파괴하고 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절제운동이야말로 환경보호운동의 출발인 것이다.

넷째는 성결운동은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는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성결운동은 세속적 문화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분리를 주장한다. 하지만 인종문제와 여성문제,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는 지나치게 성결운동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왔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종과 성별과 빈부를 넘어서서 활동하여 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는 지역 의 갈등, 빈부의 갈등, 남북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결의 복음으로 사회를 화합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성결운동은 모든 사회의 죄악의 배후에는 인간의 죄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 그리고 이런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한 모든 개혁은 근본적인 개혁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성결운동의 사회개혁의 출발점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성결운동은 이런 본성의 변화는 도덕적인 수양이나 법률적인 제재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성결운동의 역사는 수많은 죄악에 빠진 사람들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자신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유익하게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성결운동은 진정한 개혁운동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성결운동은 개혁운동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