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쉬운 일과 가장 아쉬운 일


 

오희천


 

 

 

기원전 600년 경 고대 그리스 세계에 일곱 명의 현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사람은 탈레스라는 철학자였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대답했으며, 가장 쉬운 일이 무어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을 충고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충고 즉 조언은 ‘도와주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말은 돕는 말이다. 인간의 본질은 관계성이고 이 관계성은 말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말은 언제나 ‘도움 말’이다. 그런데 이 도움말이 가볍고 쉬운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충고하는 일이 가볍고 쉬운 이유는 거기에는 자기 자신의 실존의 무게가 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 충고는 단지 타인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쉽고 자신을 아는 일이 어려운 것은 우리의 눈이 대상을 보기는 쉽지만 눈 자신을 보는 것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더 나아가 충고는 단지 가볍고 쉬울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충고에 익숙해지면 마치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시기심에 의해 지탱되고 발전되어 왔듯이 야곱 일가도 이 시기심에 의해 그 존속이 보장되었다. 꿈을 꿀 수 있었기에 많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셉은 드디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다. 그 후 가나안에 닥친 기근이 계기가 되어 그는 부모와 형제들을 다시 만난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타계하자 더 이상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요셉에게 용서를 구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이다.”(창 50:19-20)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요셉의 말에서 신앙인의 삶의 모범을 발견한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대행자이며 대언자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한다고 생각해야 위안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 기꺼이 정의의 심판자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충고하고 심판하기를 즐기었던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던가! 아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던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하나님을 대신해 타인을 충고하고 심판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왔던가!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단지 우리를 위해 -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 무엇인가를 할 뿐이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 요셉의 이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이는 하나님 자신임을 발견한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은 많은 경우 좋지 않은 의도에 의해 인도되지만 하나님에 의해 그 결과가 좋게 바뀌는 경우가 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해하려는 의도에서 행한 일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어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듯이 말이다. 우리는 결과가 좋게 될 때 악한 의도를 은폐하고 그 결과에 대해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고 안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악한 동기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일시적으로 은폐될 뿐이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셉의 형들이 그들의 행위에 대해 변명할 수 없었듯이 말이다. 만일 그들이 선한 결과에 대해 자신들을 정당화하고자 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한 것일 것이다. 반대로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가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동기의 순수성이 비난받아서도 안될 것이다. 타인에 대한 심판을 삼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동기의 순수성과 그 결과는 인과적 필연성의 관계에 있지 않다. 우리는 결과에 의해 그의 선한 동기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판은 결과에 의존하고 우리는 타인의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 다른 사람들을 충고하고 심판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힘들지만 중요한 “자신을 아는 일”이다. 자신을 알기위해서는 나를 대상화시켜야하고, 이렇게 대상화된 나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타인의 눈으로 타인이 된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이 된 나의 눈 속에서 들보를 발견할 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충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고 단지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어렵지만 최선의 태도이며, 그런 태도는 다시 타인을 용납하는 태도, 타인을 용서하는 태도의 기초가 될 것이다. 요셉이 용서를 구하는 형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말로 용서를 베풀었듯이 말이다. 요셉의 이 말에서 우리는 지극히 겸손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며, 바로 이런 마음에서 형들에 대한 용서가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용서에는 이런 소극적인 용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함에서 오는 적극적인 용서도 있다. 감사하는 마음은 넉넉한 마음이며, 이런 넉넉함이 없이는 타인을 포용할 수 없을 것이다. 풍요롭고 여유 있는 마음이 그런 마음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은 아니다. 그 마음은 ‘소유함’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이다. 그 마음은 넉넉한 공간이다. 그 마음에는 내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은 빈 마음이며 공허한 마음이다.

 

우리에게 가장 쉬운 일은 하나님을 대신해 남을 충고하는 일일 것이며, 가장 아쉬운 일은 빈 마음으로 남을 포용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