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현상학적 이해

 

 

 

오희천

 

 


설교는 성서를 통한 설교자의 하나님 체험을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하나님 체험”인데, 이 체험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회적인 사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거는 하나님의 말이며 이 말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이 성서이다. 설교는 이 기록된 말씀을 토대로 한 설교자의 하나님 이해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해와 관련하여 성서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데 이때 우리의 언어로 기록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성서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인가?

 

우리는 복음서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관련된 성서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 ” (막 4:33-34).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 비유는 하나님을 전해주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었다 - 성서 전체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비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건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미 그는 하나님의 비유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아날로기'(Analogie)란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아날로기’란 개념에 해당되는 라틴어는 analogia인데 이 단어는 원래 “동일한 관계” 또는 “비율에 있어서 동일함”을 의미한다. 예를들어, 1:2와 2:4는 배수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서로 다르지만 그 비율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이때 우리는 이 둘을 같다고 말한다. 아날로기란 이와 같이 어떤 것이 어떤 것과 같음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이와같이 성서에 기록된 말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표현들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같다 (비유이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유로 표현된 성서에서 본질적 사태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볼 때 해석학적 작업이다. 그리고 그 드러내는 방법은 현상학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현상학적 방법론이라 부른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의 과제는 스스로 나타나는 것을 나타나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나타나는 것”은 우리 앞에 보여지는 가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의 본질적 사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상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태 자체에로”(Zur Sachen selbst) 돌아가는 것이다. 후서얼에 의하면 이 사태 자체는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파악될 수 없고 단지 순수의식에 의해 체험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태 자체가 순수의식에 의해 체험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태도로부터의 방향전환이 필요한데 후서얼은 이것을 넓은 의미의 현상학적 환원이라 부른다. 이 현상학적 환원은 다시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선험적 환원” 또는 좁은 의미의 현상학적 환원이며, 두 번째 단계는 “본질적 환원” 또는“이데아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이란 우리의 의식 밖에 있는 대상 (이 대상을 후서얼은 의식초월적 대상이라 부른다)의 절대적 진리성을 보류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대상은 우리 의식의 착각에 의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서얼은 이것을 “에포케” (판단중지)라고 한다. 그러나 에포케란 그 사물의 존재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괄호 속에 넣어둔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판단을 보류할 때 그 사물은 우리의 의식에 내재적이 된다. 의식 초월적인 대상의 사실성에 대해 판단을 보류할 때 비로소 그 대상은 의식에 내재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의식 초월적인 대상이 의식 내재적으로 환원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칸트적 의미에서 “선험적 환원”이다. 그러나 의식 내재적으로 된 이러한 대상도 아직 사물의 완전한 본질은 아니다. 단지 대상이 의식에 내재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 그 대상에는 아직도 여전히 우연성과 개별성이 지배하고 있다. 그 대상은 보여지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보여지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모습으로 주어진다. 그 대상이 아직도 그늘지어진 상태에 있다. 대상의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을 자유연상에 의해 또는 “이데아화하는 추상”에 의해 서로 비교하고, 구별하고, 연결하고, 관련시킴으로써 그 대상의 보편적 본질이 보여지게 된다. 이러한 작업을 “본질적 환원”이라 하며, 이렇게 하여 의식에 주어진 본질을 파악하는 작업을 “본질직관”이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비유적 성격을 가지는 성서의 기록에서 어떻게 그 사태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는가? 먼저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세계관을 괄호 속에 넣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때 성서의 그 기록은 시대적 차이를 넘어서서 지금 나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오게 된다. 즉, 나에게 의식 내재적이 된다. 다음에 우리는 이 기록에서 우연적인 요소들을 괄호 안에 넣어야 한다. 어떤 사건에 있어서 그 사건에 관련된 이물들의 이름이라든가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 등은 우연적 요소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그 사건의 보편적 의미가 (영적으로) 직관된다.

 

하이데거는 순수의식에 주어진 대상의 본질적 사태를 밝히기에 앞서 먼저 "현상학"(Phaenomenologie)이란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대상이 대상으로서 주어질 수 있는 조건을 보여주고자 한다. Phaenomenologies는 "Phaenomen"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Logos"(말하다. 드러내다)의 합성어로 "스스로 나타나는 것을 나타나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우리는“Phaenomen"이란 단어가 가지는 의미의 특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단어를 "현상"이란 개념으로 번역하는데, 이 개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현상(Erscheinung)이라 부르는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Erscheinung이 소박한 의미에서의 현을 의미하는 데 반해, Phaenomen은 현상학적 의미에서의 현상, 즉 소박한 의미의 현상 속에 감취어진 채로 나타나지 않음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본질적 상을 말한다. 전자가 존재자로서 우리 앞에 보이는 사물인데 반해 후자는 그 존재자의 본질이다.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본질적 현상은 필연적으로 가시적 현상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가시적 현상은 본질적 현상이 나타나는 장소이다. 이 둘은 앞에서 언급된 것과 관련해 보면 서로 '아날로기'의 관계에 있다. 이 둘은 그 관계에 있어서 서로 같다. 이러한 관계는 왜 필연적인가?

 

위에서 우리는 "나타나는 것"(Phaenomen)으로서의 현상과 그 나타나는 것이 나타나는 장소로서의 현상 (Erscheinung)에 관해 언급했다. 이 둘 사이의 필연적 관계성을 밝혀보자. "나타나는 것"은 그의 매개되지 않은 최초의 상태에서 볼 때 단지 "있을" 뿐 그 속에는 아직 아무런 규정도 "없다". 규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과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여기서 이미 "있음"과 "(규정)없음"의 차이가 나타남을 발견한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차이를 자기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다.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있음”과 "없음"의 모순관계에 근거한 "시간"이라 부른다. 본질적 현상 (Phaenomen)은 그 속에 이러한 순수시간의 구조를 가지는데, 그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형식으로 시간화 됨으로써 우리 눈앞에 가시적 현상 (Erscheinung)으로 나타난다.

 

본질적 현상은 시간화 됨으로써 가시적 현상이 된다. 근원적 의미에서의 현상은 소박한 의미에서의 현상에 숨어있다. 그것은 나타나지 않음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를들어, 감기에 걸렸을 때 콧물이 나거나 열이 난다. 감기는 콧물도 아니고 열도 아니다. 그러나 감기는 콧물과 열에서 나타난다. 이 콧물과 열에 감취어져 나타나는 감기를 드러내는 작업이 현상학의 과제이다. 이러한 작업이 바로 Logos의 작업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legein ta phainomenon"이라고 정의한다. 이때 legein은 시간과 공간 의해 규정된 현상 (Erscheinung) 속에 숨어있는 본질적 현상을 드러내는 작용을 의미한다. 그것은  apophainesthai (드러내다)와 동일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apophainesthai ta phainomenon"이다. 본질적 현상이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통해 규정되듯이 우리는 하나의 절대적 본질에 관해 우리의 언어로 표현한다. 절대적 진리의 언어적 표현을 우리는 신화 (Mythos)라고 한다. 그리고 이 신화는 절대적 진리와 같다 (아날로기). 현상학은 절대적 진리와 같은 (아날로기) 이 신화를 탈신화화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불트만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탈신화는 신화적 표현, 말하자면 신화적인 본문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실제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진리는 신화를 통해 감취어지며, 감취어진 진리는 탈신화를 통해 드러난다.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며, 어떻게 그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삼위일체라는 존재방식에 근거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 계시사건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시간화하는 사건이다. 그는 시간화함으로써 인간으로 현현했으며 인간은 이 시간화된 하나님의 현상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의 시간화 (현현)이다. 그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자로서 하나님의 비유이며 하나님의 신화이다. 성서기자들은 이 하나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했으며, 이 체험을 다시 우리의 언어로 기록했다. 이 기록은 다시 하나님의 비유이며, 시간화이며, 신화이다.

 

설교자는 성서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한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체험을 시간화하며, 비유로 전달한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체험을 신화화한다. 설교자는 탈신화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며, 이 체험을 다시 신화화하여 전달한다. 따라서 설교는 탈신화하는 신화화 작업이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이 신화 (설교)를 다시 탈신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 이와같이 해석학적 순환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