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에 관하여
 
 
오희천

 

 

카라잔이라는 부유한 수전노는 점점 부자가 되자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부터 자기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의 마음에서 식어가는 동안에도 그의 성실한 기도와 종교적 경건은 증가해갔다. 고해를 마친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이 차근히 말했다. "어느 날 저녁, 등불 옆에서 내가 장부를 꺼내 수입을 계산하고 있을 때였소.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소. 이런 상태에서 나는 죽음의 천사가 회오리바람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소. 그의 무시무시한 습격은 살려달라고 청할 새도 없이 나를 덮친 것이오. 영원히 계속될 나의 운명이 나에게 던져졌음을 알았을 때,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선한 일에다 어떤 것도 더할 수도 없고 또  내가 범한 모든 악한 일들에서 어떤 것도 감해질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나는 온 몸이 굳어졌소. 나는 세 번째 하늘에 있는 주님의 권좌 앞으로 인도되었소. 내 앞에 있는 찬란한 영광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려왔소.‘카라잔, 신에 대한 너의 예배는 상달되지 못하였다. 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닫아버렸고, 너의 보물들을 금속 자물쇠로 채워버렸다. 너는 오직 너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홀로 살아야 할 것이며,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분리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보이지 않는 힘에 휘말려 빛나는 창조의 세계를 지나갔소. 나는 곧 무수한 세계들을 뒤로 하게 되었소. 내가 자연의 가장 가장자리에 근접하게 되었을 때, 내 앞에 있는 심연 깊은 곳에서 바닥이 없는 공허의 그림자들을 보았소. 영원한 침묵과 고독, 그리고 암흑으로 이루어진 공포의 왕국! 그것을 보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나를 엄습했소. 마지막 별이 나의 시야에서 점차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소. 마지막으로 내가 살았던 세계로부터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순간마다 절망으로 인한 죽을듯한 공포도 점차 증가되었소. 나는 견질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천년의 천 배가 더한 해가 지나갈 동안 온 우주의 지경을 넘어 나아간다 해도 여전히 무한한 암흑의 심연만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소. 이러한 당혹감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해 현실의 물체들을 향해 손을 뻗을 때 나는 깨어났소. 이제 나는 인류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소. 왜냐하면 그러한 무시무시한 고독 가운데서는 내가 가진 재산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내가 등을 돌려버리게 될 "


이상은 칸트가『관찰들』에서 인간의 사회성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다. 인간의 사회성이야말로 골콘다의 보물들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의 현실적인 필요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본질에 있어서도 상호의존적이다. 사람의 본질은 인간(人間)에 있으며, 인간의 본질은「사이」(間)에 있으며,「사이」는 「관계맺음」의「사이」이다. 이「관계맺음의 사이」에 의해 인간의 사회가 형성된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그런데 이때 인간의 가능성의 조건인 사회는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이어야 하는가? 먼저 관계맺음의 유형에 관해 살펴보자.

  

인간이 맺는 관계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겠다. 첫째는 사물들과 맺는 관계가 있으며,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있다. 먼저 사물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 인간은 그 사물들을 도구와 수단으로 대한다.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음식과 편의를 위한 도구가 그것이다. 우리는 식물과 동물을 음식으로 취한다. 그리고 편의를 위해 여러 도구들을 만들어 사용한다. 이때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는「감사함」이다. 그리고「감사함」의 근거는「빚짐」에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것을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런 한에 있어서 그는 그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이 빚은 갚을 길이 없는 빚이다. 따라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 감사함은 갚을 수 없는 것을 탕감 받은 사람이 가지는 그런 감정일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사물들과 맺는 관계와는 다른 관계이어야 한다. 그 관계는 땅에 함께 거주하면서 하늘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자로 대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인간은 이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며 이 거주자들 사이에는「사이」가 있다. 이「사이」는 관계맺음의 사이이며, 그 관계맺음은「얼굴」을 매개로해서 이루어진다. 사람(人)은 사이(間)에 있으며 그 사이에는 얼굴이 있다는 것이다. 얼굴을 매개로 우리는 서로 만나며 또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통해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편에서는 타인이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는 뜻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얼굴을 가지고 타인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타인은 나에게 얼굴을 통해 다가온다. 내가 타인의 얼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듯이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타인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어떤 것인가?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의로 피할 수 없는 낯선 침입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단지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이러한 관계는 나의 주관적 지배성이 배제된 「관계성 없는 관계」이다.

  

내가 타자를 수용할 때 타자는 더 이상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내면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접촉점이 된다. 타인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따라 하나님께 대해 취하는 자세도 달라진다. 타인을 위협적인 존재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가지게 된다. 그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타인을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를 나에게 도움을 주는 자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도움을 주는 존재자로 다가온다. 타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상생) 존재자로 다가온다. 타인의 얼굴은 상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한편, 내게 다가오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나도 얼굴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우리의 관계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타인의 얼굴을 피하거나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자신의 얼굴을 감추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얼굴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으며 또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가? 얼굴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속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어 얼굴이 없기 때문에 누가 속이고 누가 죽이는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속이고 죽인다. 얼굴을 감추고 타인을 대하면 타인은 더 이상 함께 거주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 소모되어야 할 도구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인간 자체가 목적이라면 인간은 서로 서로에게 봉사하고 베푸는 사이여야 한다. 인간의 사회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다양한 개인들이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며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데 성립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봉사와 베풀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람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성과 관련하여 그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감사와 베풀음이다. 무엇을 베풀음인가? 자비이다. 자비를 베풀음이 관계성의 본질이고 이웃됨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 이웃이야말로 골콘다의 보물보다 귀한 것이다. 성경에서 그 예를 보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우연히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해 거의 죽게 되었다. 그가 왜 그 시각에 여리고로 길을 떠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지금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불가항력적이듯이 말이다. 어떤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쳤다. 어떤 레위인도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구해주었다. 성서는 이 사마리아 사람을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가 자비를 베풀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자비를 베풀음」이 바로 이웃됨의 조건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비를 베풀음은 이웃됨의 하나의 조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이웃됨의 또 다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베풀어진 자비를 받음이다. 자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비를 긍정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문제가 무자비함에 있다면 그 치유는 자비를 긍정함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자비를 베푸는 손길이 없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받기를 거부하는 데 있다. 자비를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비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비를 베풀 수도 없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위한 공간이 파괴되는 것은 한편에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자비를 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도 있다. 강도만난 사람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자비를 거부한 것은 아닐까? 그들 사이에 이웃관계가 형성될 수 없었던 것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제 다음과 같은 물음이 발생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베풀음을 못하게 하는가? 먼저 인색함을 들 수 있겠다. 인색함은 어디서 오는가? 소유욕이 아닐까. 왜 소유하고자 하는가? 공허함이 아닐까? 마음은 채울수록 공허해지고 비울수록 채워지는 것 같다. 다음에는 미움이 자비를 방해하는 것 같다. 무엇이 베풀어진 것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