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 또는 인간의 삶의 본질에 관하여

 

 

 오희천

 


 


「민생 챙기기」.「민생이 우선이다」.「이제는 민생이다」. (지금까지는 민생이 아니었다). 우리 시대 최대의 화두는 「민생」인 것 같다.「민생」 즉 「인간의 삶」은 우리 시대의 화두일 뿐만 아니라 지나간 시대의 화두이기도 했어야 하며 오는 시대의 화두이기도 해야 한다. 민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으며, 민생을 떠나서는 어떤 명분도 성립될 수 없다. 우리도 이제 비로소 민생에 관심을 가질 만한 단계에 이르렀나보다. 또는 인간의 삶에 관한 타당한 이해가 요구되는 시대인 것 같다.

 

에리히 프롬은『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에서 삶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라 삶의 두 양식을 구분하고 있다. 「소유양식」과「존재양식」이 그것이다.

 

소유양식이란 소유, 지위, 업적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삶의 태도에서는 언제나 양이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우리는 이런 삶의 태도의 대표적인 예를 창고에 가득 쌓인 곡식을 보며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하고자 한「어리석은 부자」(눅 12:16-21)에게서 발견한다. 종교적으로 볼 때는, 행위에 의해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려는 태도, 즉 종교적 확신과 율법과 도그마에 의존하여 종교적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도 소유양식에 따른 삶의 태도의 일종이다.

 

존재양식이란 존재하기에 근거하여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존재하기란 인간의 본질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에 성립한다. 그런데 창조적인 활동에 의한 존재하기는 인간의 자유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자유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권리(인권)이다. 존재양식은 인권 또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양식의 특징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경구에서 발견한다:“인간은 그가 무엇을 행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민생 또는 인간의 삶에 관한 반성에는 위에서 언급된 삶의 두 양식들 사이의 관계가 고려되어야 한다. 프롬에 의하면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소유양식이 중세이후 지배적인 가치관이 되었으며, 오늘날 우리의 세계를 심리학적으로 생태학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삶이 파국을 재촉하는 소유양식을 지양하고 사랑과 인권에 기초한 존재양식으로의 방향전환을 촉구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이 소유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소유와 존재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하나가 완전히 부정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이 두 요소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 성립한다. 소유 없는 존재는 불가능하며, 소유는 존재의 부산물이다. 문제는 이 두 요소들 중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지는 것이다.


민생 또는 인간의 삶은 가치의 문제이다. 삶에  기여하는 것을 우리는 니체와 함께 가치라고 규정한다. 소유양식에 기초한 경제는 그것이 삶에 기여하는 한, 또 삶에 기여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러나 경제는 삶에 기여하는 한 「부분」이다. 누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살고 있기도 하다. 삶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부분은 바로 존재양식에 기초한 인간의 고유한 권리(인권)인 자유이다. 민생은 경제적 만족과 인권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시련을 겪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며 이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의 한 지도자를 추억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의 경제적 형편이 30년 전보다 더 어렵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왜 과거를 그리는 것일까? 과거에 대한 향수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의 투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실제적인 것에 의존해서만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기대의 공간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의존하여 미래의 기대를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과거가 미화되고 신화가 탄생한다.

 

우리가 지금 과거의 한 때를 회상하는 것은 삶에 기여하는 가치 있는 두 요소인 경제와 인권 중 하나의 측면만을 강조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삶의 또 다른 측면을 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그 측면이 이제는 우리가 잊어버려도 좋을 만큼 좋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이집트인들의 노예로 있으면서 고기를 먹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이 실제로 고기를 넉넉히 먹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고기를 삶는 가마솥을 지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이 먹던 고기를 위해 지불해야 했던 삶의 한 부분 - 어떤 의미에서는 전부일지도 모르지만 - 을 잊었다. 우리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리석기 때문은 아닐 것이며 또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민생에 있어서 경제와 인권 중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다른 한 쪽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민생을 경제적으로 보는 것은 개인주의에 기초한다. 민생을 인권으로 보는 것은  사회정의 즉 세상에 대한 책임과 분배에 기초한다. 경제가 민생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부분이다. 인권도 민생의 한 부분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부분이다. 경제와 인권이 잘 조화를 이룰수록 그 나라는 선진국이다. 경제에 초점을 맞추는 개인주의는 집단적 이기주의나 편협한 민족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과거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나찌)는 여기에 그 기원을 가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권에 대한 강조는 보편적 인류애로 확장되어야 한다. 민생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한 배려도 포함되어야 한다. 현재로선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배려해주는 것도 그들의 인권에 대한 배려에 포함된다. 우리도 이제 그 단계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