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하여

 

 

오희천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하박국은 여호야김 왕이 통치할 때 갈대아가 유다를 침공할 것을 예언한다(1:6-11, 14-17). 그 시기는 B.C. 600년경으로 보인다. 하박국은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선지자로 유다 민족이 갈대아에 의해 정복되어 고난당할 것을 바라보며 「왜 악한 사람들이 번성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는가?」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이는 마치 욥이 하나님을 향해 제기했던 물음과 흡사하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들 중의 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욥의 물음은 욥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인데 반해 하박국의 물음은 유다 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라는 차이는 있었다. 욥과 하박국은 모두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을 보고 신앙관에 있어서 혼란을 느껴 하나님께 물음을 제기하지만, 인간의 지성적인 합리적 사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그 대답을 발견했다. 하박국서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두 단어는「왜?」와「믿음」이란 단어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의」란 개념과 믿음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의로움」이란 「올바름」을 의미하는데, 이때 올바름이란 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름으로 사람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 사이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여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살 것이다. 즉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은 의인이 비록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살 것이라(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것을 말한다. 독일어 성경은 합 2:4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의를 짓밟는 자는 망한다. 그러나 나를 신뢰하고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생명을 구원한다.”The Living Bible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보라, 악한 자는 (이 갈대아인들이 그렇듯이) 자기 자신만 의지하며, 그래서 망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나를 신뢰하며, 그래서 살 것이다.” 믿음을 가지는 자 즉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란 신앙고백을 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단번에 죽으셨다는 복음을 강조한다. 이 복음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를 보여주셨다. 인간은 이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의탁하는데 있다. 그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박국서를 인용한다.“복음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신의를 보여 주셨다. 복음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보여주신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철저히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에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살 것이다’


믿음 즉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인간의 삶의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 삶의 방식은 인간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먼저 감각적인 것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마치 동굴 속에 갇혀서 동굴 벽면에 맺혀진 그림자를 실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무엇이든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거기서 만족을 찾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욕망에 빠져있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림자에 사로잡혀 실상을 볼 수 없다.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은 윤리적인 규범들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감각적인 것이 무상함을 안다. 그들은 감각적인 것에서는 더 이상 평안함을 발견할 수 없음을 안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올바름을 추구함으로써 평안을 얻고자 한다. 그들은 의로움의 한 가지 조건 즉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의로움의 다른 한 가지 조건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조건은 아직 만족시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가치의 기준이 사람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라고 본다. 그러나 이들도 진정한 자유인은 아니다. 그들은 법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하기 쉽다. 자기의 의를 주장하기 쉽다. 그들은 구원이 자기의 행위의 공로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한에 있어서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때 가능하다. 율법에 절망할 때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율법으로부터 은총으로의 초월이며, 이런 초월은 절망에 의해 가능하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동시에 삶에 이르는 병이기도 하다. 절망은 율법에 매인 삶의 죽음이며, 은혜를 통한 구원에 이르는 병이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이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맡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절망감에서 그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에게로 초월할 수 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인들이 된다. 그들은 감각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경험하고 은혜의 세계로 초월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런 초월을 진정한 믿음이라 한다. 믿음은 절망에서 생기는 절대적 신뢰이다. 이런 믿음만이 사람을 살리는 믿음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전형적인 예를 바울의 고백에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1-25).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절망을 발견한다. 그는 율법적으로는 상대적으로 흠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지체 속의 다른 한 법 즉 죄의 법에 사로잡히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이런 절망으로부터 그는 비로소 그리스도에게로 초월하여 감사하게 된다. 이런 믿음은 금욕주의도 아니고 신비주의도 아니지만 그런 노력을 거치지 않고는 이르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