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얼굴과 윤리적 주체성



 오희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는 다시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란 물음들이 포함될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없는가? 이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하는 이성비판과 이성의 올바른 사용이다. 순수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올바른 이성의 사용과 함께 인간은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앎에 도달한다.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라며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가? 그 바라는 바는 임박한 미래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고 먼 장래의 소망일 수도 있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바람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며 또 그 바람은 실현가능성이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그 바라는 바에 이를 수 있는가?

  

이상의 세 물음의 중심에는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해야 할 것을 제대로 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이성의 사용을 통한 앎의 목표이며 바랄 수 있는 것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기술문명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든 학문과 실천의 중심에 이 물음이 있음을 간파한 한 철학자의 윤리적 견해를 간단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삶의 원론적인 지침을 반성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레비나스는 1906년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1923년 17세의 나이로 프랑스로 가 쉬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28-29년에는 독일의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배웠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그의 철학자로거의 활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다. 그의 철학적 경향은 전쟁동안 그가 겪은 경험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 학살과정에서 희생된다. 레비나스 자신은 프랑스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전쟁포로로 독일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며, 그의 부인과 딸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지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는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연루되었을 때 그때까지의 하이데거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탈무드에 있는 용서에 관한 교훈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많은 독일인들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하기가 어려운 몇몇 독일인들이 있다. 하이데거를 용서하기는 어렵다." 전쟁에서의 경험 때문에 그는 철학의 과제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이나 인식론이 아니라 윤리학에 있음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는 "윤리학이 존재론에 우선된다"고 주장하는데 이 말은 그의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서양철학은 존재자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존재자의 본질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인식론의 역사였으며, 그 중심에는 인간의 주체적 자아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자아중심적인 존재론과 인식론을 거부하고 윤리학이 그보다 더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생각하는 나」대신「윤리적인 나」가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윤리적인「나」는 누구인가? 윤리적인 나는 타자와 대면하여 자아중심적인「나」의 자발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나」이다. 윤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도덕성이 아니며,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해 주는 단순한 지침도 아니다. 윤리란 바로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자아중심적인 자발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자아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찾아 나서는데서 윤리는 시작된다는 것이다.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타인의 타자성에 근거한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이 열린다. 자아의 자기동일성 보다는 타인이 더 우선적이라는 데에 윤리적 의식의 본질이 있다.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타인은 우선적으로 자아에 대하여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외재성이다.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로 통합시킬 수 없는 절대적으로 다름, 즉 절대적인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 타인은 유한한 자아의 사유대상이 아니며, "떼어내어진, 절단된"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절대적 타자성」은 "자아에 종속되지 않고 자아로부터 절단된 타자성"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행동은 폭력이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강령이 분명해졌다.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대로 있게 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강령은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인정해 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정의는 사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정의에 기초한다: "amo volo ut sis"(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인 그가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랑이 타인을 절대적인 타인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라면 타인의 절대적 타자성은 어떻게 보증되는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타자를 만나야 하는가? 우리가 만나는 타자의 종류에 따라 그에 대한 위리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타자는 크게 사물로서의 타자와 타인으로 타자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세분된다. 우리는 사물로서의 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사물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물은 단순히 인간의 어떤 목적을 위해 기여하는 도구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물에 대해 잘못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태도가 인간관계에까지 확장된다면 모든 관계의 파멸이다. 사물은 도구가 아니다. 사물에는 세계가 있다. 세계는 사방이다. 사방은 동, 서, 남, 북의 방위만이 아니다. 사물에는 하늘과 땅이 들어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있다. 하늘과 땅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며 하나님의 은총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의 존재의 보증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물로서 강물에는 그 물을 지탱해 주는 땅이 있으며, 그 물이 기원된 하늘이 있으며, 그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는 죽을 자들이 있으며, 죽을 자들을 위해 그 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있다. 우리의 세계는 하늘과 땅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는 사물 속에서 사방으로서의 이런 세계를 발견하며, 또 발견해야 한다. 사방으로서의 이 세계는 한 사물을 사물이게 해주는 사물의 사물성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물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 사물의 사물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사물에서 세계를 발견해야 하며 그 세계를 보호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세계의 거주자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보존하면서 사물과 함께 세계에 거주하는 자이다. 우리는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함께 거주하는 자이어야 한다. 어떻게 거주함이 마땅한가? 1. 인간은 그가 땅을 구원하는 한 거주한다. 그는 땅을 개발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작함으로써 거주해야 한다. 2. 인간은 하늘을 하늘로서 수용하는 한 거주한다. 3. 인간은 신적인 것을 신적인 것으로서 기다리는 한 거주한다. 4. 인간은 그의 고유한 본질 즉 죽음을 죽을 수 있는 본질에 순응하여 잘 죽을 수 있는 한 거주한다. 모든 문화와 문명은 이러한 거주함의 방식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 한에서 문명은 파괴가 아니고 건설이 될 것이다. 인간은 사물을 건설하면서 사물과 함께 세계에 거주해야 한다. 건설할 때는 사물 속에 들어있는 세계 즉 사방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의 탐욕스런 개발정책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그 결과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사물 속에 들어있는 세계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거기에 사유하는 인간의 본질이 있다. 인간의 사유능력은 바로 사물 속에서 세계를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인간은 사물로서의 타자를 대할 때 사물의 사물성을 고려해야 한다. 즉 사물 속에서 사방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타인은 도구도 아니며 사물도 아니다. 타인은 이 사물의 세계에 함께 거주하는 자이다. 우리는 타인을 함께 거주하는 자로 대해야 한다. 땅에 함께 거주하면서 하늘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자로 대해야 한다. 그런데 거주자들 사이에는「사이」가 있다. 이「사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얼굴」이다. 사람(人)은 사이(間)에 있으며 그 사이에는 얼굴이 있다는 것이다. 얼굴을 매개로 우리는 서로 만나며 또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통해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편에서는 타인이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는 뜻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얼굴을 가지고 타인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타인은 나에게 얼굴을 통해 다가온다. 내가 타인의 얼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듯이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타인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어떤 것인가?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의로 피할 수 없는 낯선 침입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단지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이러한 관계는 나의 주관적 지배성이 배제된 「관계성 없는 관계」이다. 즉 자아와 타자는 "창문 없는 모나드"로서 서로 상호침투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자아는 단지 타자를 지각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타자를 수용할 때 타자는 더 이상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내면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접촉점이 된다.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살기를 주장하기 이전에 먼저 타인의 절대타자성이 긍정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타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상생) 존재자로 다가온다. 타인의 얼굴은 상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한편, 내게 다가오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나도 얼굴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우리의 관계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타인의 얼굴을 피하거나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자신의 얼굴을 감추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얼굴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으며 또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가? 얼굴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속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어 얼굴이 없기 때문에 누가 속이고 누가 죽이는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속이고 죽인다. 얼굴을 감추고 타인을 대하면 타인은 더 이상 함께 거주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 소모되어야 할 도구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이 발생하는가? 「터무니없다」는 것은 「터가 자라했던 흔적(무늬)이 없다」즉「터(根)자리(據)가 없다」는 것이니 근거가 없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근거 또는 이유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로고스와 라틴어 라티오(ratio)는 「비율」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비율을 측정할 줄 아는 능력을 또한 로고수(이성; ratio)라고 한다. 따라서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것은 적정한 비율을 측정할 줄 모르기 때문이며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그럼 왜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가?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사람은 터무니없이 많은 이윤을 남기고자 한다. 적정한 이윤의 비율을 측정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모르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적정한 비율이 아닌 것을 적정한 비율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대기업의 회장이 구속되었다. 터무니없는 일을 했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국회의원이 구속되다니 터무니없는 짓을 했을 것이다. 두부에 석회를 섞다니 터무니없는 일이다. 설탕을 섞어 토종꿀이라고 판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터무니없는 일들이 터무니없이 많이 일어난다.

 

얼굴을 가지고 타인의 얼굴을 만날 때 나는 비로소 책임적인 주체가 된다. 주체성은 「타인을 받아들임」에서 형성된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면서도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책임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인의 얼굴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장소이다. 주체성은 타인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빛을 통해 발아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타인의 얼굴 속에 자신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계시하신다. 타인의 얼굴은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가면이다.「가면」을 의미하는 라틴어 persona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인의 얼굴은 하나님의 가면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인격(person)이다. 이것은 나의 얼굴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나의 얼굴은 하나님의 가면이다. 하나님은 나의 얼굴 속에 자신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계시하신다. 타인의 얼굴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내가 얼굴을 감추고 얼굴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타인의 얼굴은 타인의 인격(person)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사람은 타인의 얼굴의 절대성을 인정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인격적이라는 개념과 윤리적이라는 개념은 동의어이다. 타인과의 만남은 언제나 인격적이어야 하며, 이런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진정한 윤리적 주체성은 얼굴을 가지고 타인의 얼굴을 대할 때 형성된다. 그리고 여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다. 진정한 윤리적 주체성은 사물 속에서 세계를 보고 타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랑에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