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희천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에서 천사 미하일을 통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물음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첫 번째 물음은“사람의 내부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이며 이에 대해“사람의 내부에는 사랑이 있다”는 대답이 주어진다. 두 번째 물음은“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이며 이에 대해 인간에게는“자기 육체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지식”이 허락되어있지 않다고 대답된다.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세 번째 물음에 대해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모든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하고 걱정한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자이다.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삶은 믿음을 전제한다. 믿음은 삶에 있어서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믿음은 먼저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일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일을 잘 했을 때 그에게 부여되는 믿음이 아니다. 그 믿음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그가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그가 나와 같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그의 본심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믿음은 용서의 근거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보이는 인간을 믿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미래에 대한 지식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현재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백년도 못살 것이 천년을 살 것처럼 ...”성경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러나 또한 인간에게는 미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삶의 긴장이 있다. 삶의 긴장은 소망의 이유이다. 삶의 긴장을 가지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소망은 삶에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이때 두 번째 물음과 세 번째 물음은 인간의 실제적 삶의 사실과 관계되며 첫 번째 물음은 그러한 삶의 가능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인간이 그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의 유한성 때문에 사람에 의해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내부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의 내부에는 사랑이 있다”는 대전제에 근거하여 인간 삶의 현사실을 설명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도 이 전제에만 머물러 있다면 독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당연히 왜 사랑이 인간 삶의 대전제인가 물어야 할 것이다.

 

사랑이 사람의 내부에 있다는 것은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결정적 요소임을 의미한다. 이것은“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바울의 주장에 의해서도 단적으로 입증된다. 그런데 문제는 톨스토이도 바울도 왜 사랑이 사람다움 즉 사람이 그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가능근거임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과 사람다움의 인간론적 관계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먼저 “사람은 관계성이다”는 가장 근원적인 인간론적 정의에서 출발함이 좋을 것이다. 물론 이 정의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는 불필요할 것이다.

人間으로서의 사람의 본질이 관계성에 있다고 할 때 그 관계성은 어떤 관계성을 의미하는가? 어떤 관계성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며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살리는 관계이어야 한다. 인간의 본질은 관계성에 있으며 그 관계성의 본질은 살리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람 즉 살음(사름)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살음(사름)으로써 타자를 살게하는 관계이다. 자기의 삶을 살음(사름)으로써 즉 자기를 타자에게 줌으로써 - 우리가 타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대단히 다양하다 - 타자를 살리는 관계이다. 성서에 의하면 이렇게 타자를 위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이며 따라서 사람다움의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렇게 타자에게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타자를 살리는 관계를 사랑이라 한다.“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기”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적극적인 사랑에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대단히 중요한 한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나를 희생해서 타자를 살게하지만 타자의 삶의 주체는 결코 내가 아니라 타자라는 사실이다. 내가 타자의 삶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타자로 하여금 나처럼 살 것을 강요하는가!) 타자를 타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 그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타자의 절대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보다 더 근원적인 사랑이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사랑은 타자를 타자로서 존재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타자의 가치는 단지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그는 나와 다르게 존재한다. 사랑은 타자가 이렇게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견디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나와 다른 타자를 견디지 못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견지지 못하는가!)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한다. 타자가 나와 다름을 견디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되며 믿음에 의해 타자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은 믿음의 시작이며 믿음은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과 믿음은 동근원적인 것이다. 따라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동근원적으로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이다. 사랑과 믿음의 이러한 조화가 바로 사람다움의 조건이며 인격의 조건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타자로부터 공급받을 수밖에 없으며 또 타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다움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런 조건은 다시 타자의 타자성을 견디는 타자에 대한 신뢰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사람다운 사람은 사랑에 의해 산다. 사람다운 사람은 믿음으로 산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