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사랑과 정신

 

 

오희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존재」를 명사로 볼 것이냐 아니면 동사로 볼 것이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명사로 본다면「존재가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있는 것」인데 존재는 어디에「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존재가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존재」를 동사로 보아야 하는데 이때「존재」는「존재하다」와 동의어가 된다. 그리고「존재하다」는「~이다」와 동의어이다. 그렇다면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그 주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 주어는 무엇인가? 그 동사의 주어로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존재자」이다. 그러므로「존재한다」는 표현은 」다 구체적으로「존재자가 존재한다」이다. 그렇다면「존재하다」는 것은「존재자가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를 한다. 밥을 먹고 ........   모든 존재자들을 포괄하는“존재자”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존재(하다)」이다. 존재자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존재한다」. 그럼 존재자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존재자는 현상 즉「나타나 있는 것」(das Unverborgene)이며 나타나 있는 것을 나타나게 하는 것 즉 존재자의 존재는「나타남의 사건」(Unverborgenkei)이다. 그런데 Unverborgenkeit는 Unverborgenkeit(은폐)와 Unverborgenkeit(비은폐)의 사건이다. 존재는 은폐와 비은폐의 모순작용이다. 존재자는 나타난다.「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자는 그 최초의 상태에서 즉 그것이 무엇 무엇으로 규정되기 이전에는 단지「~이다」(존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무). 그러나 이 무는「존재하는 것이 없음」이라는 의미에서의 무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그것이 무엇 무엇으로 규정되기 이전에 이미「이다」(존재)와「아니다」(무)에 의해 규정되어 존재한다(있다). 하나의 존재자 내부에는 존재와 무의 운동 즉 무에서 존재로의 운동(생성)과 존재에서 무로의 운동(소멸)이 일어난다.「나타난다」는 것은 소멸의 운동이다(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생성도 소멸의 한 방식이다). 이 운동이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 동일한 하나의 존재자가「이다」와「아니다」, 「긍정」과「부정」,「+」와「-」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존재자는 본질적으로 이와 같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언표도 「이다」와 「아니다」라는 계사를 통해 표현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일한 이 꽃에 대하여 「이것은 장미꽃이다」고 말하며 동시에 「이것은 호박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존재자는 그 속에 모순을 내포한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하나의 존재자는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원자는 원자핵 주위에 양전자(+)와 음전자(-)를 가진다. 존재자는 양전자와 음전자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에너지의 덩어리이다. 그리고 에너지인 양전자와 음전자의 운동에 의해 열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렇게 발생된 열은 다시 에너지원이 된다(열역학 제1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그러나 에너지의 양은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열은 다시 에너지로 환원된다. 그러나 그렇게 환원될 때 또 다른 에너지가 소모된다. 결국 이런 과정에서 더 이상 에너지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 남게 되는데 그것을 엔트로피라 하며 이 엔트로피는 점점 증가한다(열역학 제2의 법칙: 엔트로피 법칙). 하나의 물체는 이렇게 하여 점차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운동한다. 이 에너지의 덩어리는 엔트로피의 법칙(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 엔트로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의 에너지가 사라진다.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엔트로피의 증가는 에너지에 의해 낮아지기 때문이다. 즉 존재자는 그의 에너지가 살라져 열로 화해 엔트로피가 증가함으로써 사라진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는 살라지면서 사라진다.

  

그런데 존재자들 중에서 그의 에너지가 살라짐으로써 사라지면서 동시에 그의 에너지를「사르는」(살으는) 존재자가 있다. 그는 그의 에너지가 사라짐을 알며, 그의 에너지를 사를 줄 안다. 우리는 이렇게 그의 에너지를 사르는 존재자방식을 「사름」(살음-삶)이라 하며 그런 존재자를 사람이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사르면서 다른 존재자를 사르게(살게) 하는 행위를 사랑이라 한다. 자기를 사르면서 타자를 사르게(살게)한다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Seinlassen)이다. 사랑은 사람의 존재방식이다. 그리고 사랑이 자기를 사르는 것인 한 그것은 「자기부정」이다. 사랑과 자기부정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존재자란 드러나 있는 것이며 드러나 있는 것은 어떤 것으로「규정되어 있음」이다. 어떤 속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규정된다는 것은 다른 것과 다른 것으로 구분되어 있음이다. 이렇게 규정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자는 존재와 무의 차이를 그 속에 가지기 때문에 다른 것과 다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

  

존재자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다른 것과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 이 관계성의 총체적 그물망을「세계」라 한다. 인간도 하나의 존재자로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 그는 필연적으로 「세계내 존재자」이다.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이중적이다. 사물들과의 도구적 관계와 인간들과의 인간관계가 그것이다. 도구적 관계란 사물이 가지는 에너지를 나를 위해 사용하는(사르게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내가 나의 에너지를 사름으로써 남을 사르게(살게)하는 관계이며, 사랑의 관계이다. 만일 인간이 타인의 에너지를 나를 위해 사르게 한다면 그 관계는 도구적 관계일 것이다. 참 사람은 타자를 위해 자기를 사름에 있다.

  

참 사람이 자기의 에너지를 사르는데 있다면 그는 본질적으로「자기부정」이다. 그런데 이 자기부정은 이중적으로 일어난다. 먼저 인간은 그의 가장 자연적인 직접적 상태에서 「순수한 자기의식」1)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주관적 자기의식은 아직 진정한 자기의식이 아닌 즉자적(an sich) 단계에 머문다. 이 단계는 절대적으로「자기」(나)만이 존재하는 독단적 자아이다. 그런데 이 독단적 자아가 타자를 느낄 때 자기를 부정하고 객관적 의식이 된다. 자기 밖에 다른 것이 있음을 느낀다. 이 단계에서 의식은 타율적 의식이 된다. 그 의식은 자기 밖의 타율적 규범에 의해 지배된다. 모든 기준이 밖에 있다. 그러나 의식은 객관적 의식의 단계에서 다시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타율성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이 된다. 그는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자율적이 된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자이다. 그는 한편에서, 독단적 자아로부터 자유롭고 다른 한편에서는 타율적 자아로부터 자유롭다. 이러한 이중적인 자기부정을 통해 형성된 절대적 자율성을 우리는 헤겔과 함께「(절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 정신은 주관과 객관에 매이지 않는 「절대적 자유의 정신」이다. 정신의 본질은 자유에 있으며 이 자유는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있음」이며, 우리는 이 자유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성이라 한다.2) 여기서 우리는 절대정신을 순전히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때의 절대정신은 무한한 능력을 지닌 실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정신은 독단적 자아에도 매이는 상대성으로부터 자유롭고 타율성에도 매이는 상대성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그리고 「정신」이란 언제나 「올바른 정신」이다. 사라지는 것 중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자들은 정신으로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가? 정신이 없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매여 있거나, 타자에 대한 관심에만 매여 있는 것이다. 정신없는 사람은 극단적 이기주의와 타율성에 의존한다. 그는 독단적 자아에 의해 지배되거나 자기가 아닌 것에 의해 지배된다. 그는 진정한 주체가 아니다. 주체는 자율적이다. “당신의 의지의 원칙(Maxime)이 언제나 당신의 의지의 원칙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칙으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하십시오.”(KpV A 54).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정신없이 노는지 보라. 그들의 모든 관심은 자기 자신에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언제 정신을 차리는가? 타자도 나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자임을 의식할 때이다.


위에서 우리는 사람의 존재방식을 사랑이라고 규정했다. 왜 그런가? 사람을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사람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가「사람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사람을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사람하기」즉「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사랑과 존재는 동의어이다. 사랑은 인간의「실존적 존재규정」이다. 사랑은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작용이다. 사랑은 사람을 항상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그 작용 즉 사람에게 일어나는 존재사건이다. 실존적 존재사건이다. 사람은「땅을 돌봄」(사랑)으로써 존재한다. 사람은 「하늘을 경외함」(사랑)으로써 존재한다. 사람은 「죽을 자의 운명을 수용함」(사랑)으로써 존재한다. 사람은 「영원함을 추구함으로써」(사랑) 존재한다. 이 넷은 다시 믿음, 소망 , 사랑에 근거한다. 따라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은「항상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항상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항상 있음」자체 즉 존재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있다가 없어지지만 존재는 언제나 있음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인간이란 존재자를 항상 인간으로 있게 하는「항상 있음」이다.

  

중생은 사람의 존재방식이어야 한다. 사람은 거듭남의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중생은 믿음이며, 소망이며, 사랑이다.

  

성결은 사람의 존재방식이어야 한다. 사람은 그 자신이 점차 거룩해져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성결은 믿음이며, 소망이며, 사랑이다.

  

신유는 사람의 존재방식이어야 한다. 사람은 자기의 삶을 치료해야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 신유는 믿음이며, 소망이며, 사랑이다.

  

재림은 사람의 존재방식이어야 한다. 재림은 희망이다. 그것은 추진력이다. 그것은 중생, 성결, 신유의 이유이다. 재림은 믿음이며, 소망이며, 사랑이다.

 


1) 실제에 있어서는 대상과 무관한 순수한 자기의식이란 불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식은 순전히 논리적인 개념이다.


2) 에리히 프롬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매이지 않음」이며 후자는「~를 향함에 있어서 매이지 않음」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구분이 정당한가? 후자의 자유는 오히려 의지의 속성이 아닌가? 따라서 그것은「의지의 자유」와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며 넓은 의미의 자유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소극적 의미의 자유일 뿐이며 적극적 의미의 자유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의 특수한 예이다. 우리의 의지 또는 의식은 본래 지향적인데 이 의지는 자유를 전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