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예술이다

 

오희천

 

 

설교는 예술이다. 예술은 기술이 아니다. 기술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만 예술은 사물을 다르게 표현함으로써「다른 것」을 보여준다. 예술은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표현함으로써「낯선 것」1)을 드러내고자 한다.「낯설게 하기」이다. 예술은 하나의 사물을 낯설게 함으로써「그 사물과 다른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예술은「알로 아고류에이」) 즉 알레고리(Allegorie: 비유)이다. 한편, 예술은 일상적인 사물과 다른 것을 그 사물과 함께 우리 앞에 던져 준다. 예술은「함께 던져줌」즉「심발레인」(Symballein)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Symbol(상징)이기도 하다. 예술의 낯설게 하기는 상징과 비유이다. 예술가는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시인은 낯선 표현을 통해 일상적인 것과「다른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음악가는 낯선 소리를 통해 다른 것을 표현한다. 음악은 일상적인 소리들을 적절한 비율로 조합한 음의 하모니인데 이 하모니는 일상적인 소리와는 다른 낯선 소리이다. 미술가는 사물을 낯설게 그림으로써 다른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조각가는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깎아 다른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문신의 작품은 다른 것을 보여주고자 한 알레고리였으며 상징이었으며, 그의 삶도 알레고리였으며 상징이었다.


예술가가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다른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근원적 존재와 실존이다. 예술가는 인간에게 근원적 존재를 상기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실존으로 부르는 선지자이다. 작품 앞에서 인간은 존재를 생각하며 따라서 그는 비로소 실존적이 된다.


설교자는 노예이다. 인간을 실존으로 부르는 존재의 노예이다. 설교자의 설교에서 우리는 존재의 소리를 들으며 그때 우리는 실존적이 된다. 설교자는  존재망각이 일상이 된 이 시대에 낯설게 되어버린 존재의 소리를 전달하는 존재의 목자이며 존재의 예술가이다. 설교자는 인간을 실존으로 부르는 존재의 노예이며 존재의 선지자이다. 우리는 설교에서 존재의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거룩함에 대한 동경을 일으키며,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게 하며, 겸손하게 한다. 그 소리는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가지게 한다. 그 소리는 인간을 사랑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예술은 조화와 균형과 상생의 추구이다. 생명의 본질은 조화와 균형이며 상생인데, 우리 시대에는 그것이 낯설게 되어버렸고 투쟁과 상쟁이 상식이 되었다. 예술은 낯설게 되어버린 조화와 균형과 상생을 상기시킨다. 존재를 상기시키고, 균형과 상생을 일깨우고, 인간을 실존으로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예술이어야 한다.

 


1) 이 낯선 것이 본래는 가장 가깝고 친근한 것이었지만 일상성에 사로잡힌 생활인에게는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낯선 것이란 낯설게 되어버린 본질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