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생애와 사상

 

안희철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가 2014년 9월 4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하반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꼽히곤 하였던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 교계와 신학계는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그는 이미 수년간 중병으로 외부 활동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필자가 판넨베르크를 공부하기 위해 독일에 갔던 2007년에 그는 이미 공식석상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필자는 그의 제자 뉘쎌(Friederike Nüssel) 교수에게서 판넨베르크의 우연성 개념에 대한 연구에 천착하면서도, 계속해서 판넨베르크와의 개인적 면담을 요청하는 글을 그의 비서에게 보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2001년 11월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먼발치서 바라본 것이 결국 필자에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판넨베르크 신학자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여러 가지다. 어떤 이는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앞장선 이로, 또 어떤 이는 신앙의 이성화 작업에 몰두한 인물로, 또는 지나친 헤겔리안으로, 또 어떤 이는 교부 시대 및 중세의 수많은 교의들을 백과사전식으로 파낸 고고학적 조직신학자로 소개한다. 그의 사망 소식에 즈음하여 필자는 판넨베르크의 일대기를 신학적 여정을 중심으로 소개해야 할 의무를 느끼게 되었다. 그의 주요 작품들도 다 번역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삶과 신학에 대한 오해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일생을 신변잡기식으로 짜깁기하기보다는 판넨베르크 스스로가 작성한 2008년도의 자서전적 글에 기대어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한국의 신학계에 다시금 판넨베르크에 대한 재조명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 본다. 

 

1) 그는 왜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나?

판넨베르크는 1928년 10월 2일 슈체친(당시 독일, 현재 폴란드 지역)에서 태어나, 루터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다. 일찍이 부모가 교회를 떠나게 되면서 더 이상 종교적 교육을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클래식 음악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는 후에 회고하기를 피아니스트나 혹은 카라얀(Herbert von Karajan)과 같은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기독교로 발을 들이게 한 계기는 엉뚱하게도 니체에게서였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기독교에 가장 큰 비판을 가했던 인물이다. 1944년 미군의 폭탄으로 베를린의 집이 폭발해 버리는 경험을 했던 시기, 그는 도서관에서 음악에 대한 책 한 권을 찾았는데 바로 니체의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이었다. 이는 15세였던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45년 1월 6일,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판넨베르크는 소위 '빛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음악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거대한 빛이 무한한 시간동안 그를 빨아들이는 듯한 경험이었고 그 경험 내내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판넨베르크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듯한 경험이었고 결국 그의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찾는 데 자극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을 청소년기 시절에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군인으로 전쟁의 끝에 가담하게 되면서 결국 전쟁 이후 포로 생활로 1945년 여름을 맞게 되었다. 포로 생활 이후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만나 1946년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1947년 그는 잊을 수 없는 한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독일 고전 문학을 가르치던 랑에 박사(Dr. Lange)였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이는 니체가 묘사한 기독교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으며 정신적으로 강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자주 괴테의 삶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특히 괴테와 그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제로 삼았으며, 그의 강의에 판넨베르크는 매우 놀라워했다고 한다. 결국 판넨베르크는 과연 니체가 말한 기독교의 금욕적 태도가 실제인지, 스스로 알아보고 싶어했다. 이후 판넨베르크는 1947년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거기서 그는 신학에 매료되어 신학자가 되었다.

 

2) 철학에 빠지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함께 공부해 나갔다. 임마누엘 칸트에 대해 공부하면서 '순수이성비판'에 상당히 매료되기도 하였다. 베를린에서 세 학기쯤 보내었을 때, 더 많은 철학과 문학 서적들을 탐독하였고, 특히 칼 마르크스의 휴머니스트 관련 책들을 읽어 나갔다. 당시 그가 베를린에 거주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이모를 자주 방문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저서들을 읽는데도 시간을 매우 많이 보냈다. 하르트만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베를린의 철학교수로 지냈으며 구 서독 지역인 괴팅겐에서 계속해서 철학교수직을 지냈다. 판넨베르크는 칼 야스퍼스나 마틴 하이데거보다도 하르트만의 철학을 더 좋아했다. 그는 철학의 전 역사를 다루는 능수능란한 철학자였으며 어떤 특별한 주제에 대한 해결을 철학 전반의 역사 앞에 두고 토론하며 찾으려 하였다. 판넨베르크는 하르트만의 이러한 방법론에 감동하였고 이것을 그의 신학적 주제들에도 적용하였다. 또한 하르트만은 세미나 가운에 스토아 철학자들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소크라테스 이전 고전 철학자들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것이 판넨베르크에게는 하이데거의 고전철학 인용에 비판을 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가 보기에 하이데거는 많은 고전 철학을 인용했던 <숲길(Holzwege)>와 같은 책에서 철학자들의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판넨베르크가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르트만은 무신론자였고, 무신론적 철학으로는 적합한 하나님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바젤에서 머물던 당시 칼 야스퍼스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했지만 그의 철학에 결국 만족할 수는 없었다. 초월과 하나의 하나님 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된 인간의 존재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헤겔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사 시절을 보내면서 헤겔의 신에 대한 아이디어에 천착하였는데, 판넨베르크가 판단하기에 그의 개념이 현대철학자들의 주장 가운데 가장 기독교에 근접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헤겔리안이 아니냐고 비판하곤 하는데, 단언컨대 판넨베르크는 헤겔리안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헤겔에 대한 근본적 의심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역사 개념에 관련하여서 판넨베르크는 헤겔보다는 빌헬름 딜타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봐야 한다.

1963년에는 시카고에서 화이트 헤드의 철학에 빠져들었다. 당시 시카고에는 존 캅과 같은 과정신학자들이 포진해 있었고 화이트 헤드에 익숙하지 않고서는 지적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유럽의 철학 교육을 받은 입장에서 항상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미국인 철학가 윌리엄 제임스를 선호했다고 한다. 그가 화이트 헤드와 그로부터 기인한 과정신학을 비판한 데는 화이트 헤드가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주로 간주하지 않은 데 있었을 것이다.

 

3) 칼 바르트와의 만남

스위스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19세기 이후 인간중심주의 신학자들과 맞섰다. 물론 신중심주의 신학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에리히 쉐더(Erich Schaeder)다. 그는 1909년 인간중심주의 신학에 맞선 신학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완전히 실행하여 길고 오랜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르트다. 그는 나치 독일 안에서 독일고백교회의 지도적 신학자로서 교회의 투쟁(Kirchenkampf)에 앞장섰다. 바르트는 1932년 <교회교의학>의 첫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았고 계속해서 신중심주의적 방향을 구체화했다.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이해 속에서 삼위일체적 교의로 발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940년대 후반 판넨베르크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베를린의 첫 선생이었던 하인리히 포겔(Heinrich Vogel) 교수에게서 소개받았다. 포겔 교수는 바르트의 학생이었다. 판넨베르크가 1948년 괴팅겐으로 학교를 옮겼을 때, 거기서 바르트의 강한 영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교회교의학> 3번째 책까지 탐독하였다. 여기서 그는 바르트에 크게 매료되었는데, 지금까지의 철학 공부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신론의 삼위일체적 관점 때문이었다. 1949년 WCC 장학금을 통해 바르트에게서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어 바젤로 이동한다. 그는 거기서 그의 <교회교의학> 책에 대해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는데, 당시 아직 출간되지 않은 창조론이나 인간론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금방 바르트의 유비적 방법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바르트의 집에서 소그룹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바르트가 기독교 모임과 도시 사회 사이의 관계에 쓴 책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예수가 빛이시라는 성서적 근거로부터 그는 결론을 내리기를, 세속적 영역 안에 어떤 비밀한 것들이 없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판단하기에 그것이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비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르트는 당시 자신의 학생들이 가하는 그런 비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바젤에 머물면서 바르트가 신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에 판넨베르크는 지쳐 갔다. 그가 보기에 바르트의 신론에는 철학적 섬세함이나 명확성이 떨어져 보였던 것이다. 특히 바르트가 성서의 문구들을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독단적인 것처럼 보였다. 판넨베르크가 다시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온 이후부터 바르트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지게 되는데 이는 그가 성서 주석에 빠지게 되면서부터이다.

 

4) 성서 주석의 중요성

판넨베르크가 1950년 여름 하이델베르크에 처음 왔을 때는 대학교 4학년차였다. 당시 그는 많은 신학 서적들, 특히 교의학 관련 책들을 읽었지만 성서 해석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철학에 관심을 많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서 주석에 큰 흥미를 갖게 된 계기가 바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있었다. 바로 게르하르트 폰 라트의 구약성서 강의에서였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로부터 인간의 현실을 잘 설명하였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왔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의 신은 역사의 신이라는 논지를 펼쳐 나갔다. 이는 미국의 구약성서학자 어네스트 라이트(Ernest Wright)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판넨베르크는 크게 고무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은 그들의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판넨베르크는 철학자 칼 뢰비트(Karl Löwith)의 역사에 대한 강좌를 듣게 되는데, 거기서 뢰비트는 현대의 역사철학에서 어거스틴의 역사신학과 그 성서적 뿌리에까지 추적해 나갔다. 비록 그의 관심이 역사 철학의 재건이었지만, 또한 판넨베르크는 역사에 관한 성서적 신학에 대한 재구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자연스레 신약성서 연구로 이어졌다. 과연 고전적 이스라엘의 신학역사를 신약성서가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보른캄(Günter Bornkamm)이 바울에 대한 강의를 하였을 때 판넨베르크는 그 강의를 통해 증거를 찾았다고 한다. 후에 묵시적 연구에서 이를 증명하게 되는데, 특히 초기 기독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루게 된다. 묵시적 문헌 안에는 지혜문학에 대한 의존성이 존재하는데, 그러나 이것이 결코 역사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종말론적 관점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어느 역사의 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구원에 대한 갈망의 완성체로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들은 사실 하이델베르크 학생들로 구성된 한 모임에서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물론 판넨베르크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해석학과 교의학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1961년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책으로까지 출판되는 모태가 된다. 판넨베르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역사가 어떻게 이 상황에 적합한지 다루게 되면서 이 논의를 통해 예수의 부활이 중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교부학과 신약의 교수였던 캄펜하우젠(Hans von Campenhausen)은 1952년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 전통과 빈무덤의 발견에 대해서 말이다.

꽤 혁명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신학자였던 그는, 예수의 빈 무덤 발견에 대한 보그들이 널리 묵살되어 온 것이 매우 심각한 편견이라고 주장했다. 판넨베르크는 그의 주장에 감명받고 부활절 전통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특히 캄펜하우젠은 학생들에게 매우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이 또한 판넨베르크에게 큰 자극이 된다. 왜냐하면 그 비판은 단순히 전통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전통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가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5) 중세 신학과 철학

판넨베르크의 박사 논문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의 예정론이 중세 시대에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중세 스콜라 신학과 철학에 대해 연구하는 가장 어린 신학자였다. 신학을 공부한 지 2년째, 즉 그가 괴팅겐에 있었을 때, 이반(Iwan) 교수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었다. 거기서 루터의 책 <De servo arbitrio>을 다루고 있었는데 소논문을 쓰고 싶었던 판넨베르크에게 그 수업은 적절한 주제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반 교수는 판넨베르크에게 관심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베를린에서 온지 얼마 안 되었고, 당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있던 판넨베르크는 루터가 지성에 관하여 이상주의적 관점에 있는지 물질주의적 경향 속에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고 답하였다. 그래서 그는 루터의 주의주의적(voluntarism) 경향에 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며 특히 둔스 스코투스의 주의주의적 뿌리를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것이 판넨베르크가 둔스 스코투스와 그의 주의주의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해 겨울과 이듬해 여름까지 스코투스의 롬바르두스(Peter Lombard)에 대한 주석집을 샅샅이 연구하였다.

당시 그는 스코투스가 이해한 자유라는 주제로 100쪽이 넘는 소논문을 작성해 제출했다. 그러나 이반 교수는 이것을 받고는 돌려주지 않았다. 다행히 카피본 하나를 더 가지고 있던 판넨베르크는 그의 멘토였던 하인리히 포겔 교수에게 보냈으며, 그에게서 이것이 박사논문으로도 충분한 것이라는 답을 듣게 되었다. 판넨베르크는 어느 프란치스코회 학자에게 이 논문에 대한 조언을 받고 좀 더 증가 자료를 보충하여 베를린대학에 제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당시 이미 너무 오래 구서독 지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당시 구동독 지역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만다.

결국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슐링크(Edmund Schlink) 교수에게 요청했으며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학위를 받도록 도움을 주었다. 판넨베르크의 회고 속에서는 슐링크가 이 논문에 대해 큰 흥미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1953년 박사 논문으로 받아들여지고 1954년 출판되었다. 출판 전후로 판넨베르크는 논평이나 사전 관련 글들을 기고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특히 중세 신학에 대한 것들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그쪽 분야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쓴 글 가운데 유비 개념과 그 역사에 대한 것이 있는데, 이를 슐링크 교수가 보고는 두 번째 논문(교수 자격 논문)으로 써보라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글을 더욱 확장하여 고전 그리스 철학자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등에 이르는 긴 역사의 여정을 책으로 완성하여 1955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제출하였다. 그 후 그는 조직신학 분야에서 강의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슐라이어마허부터 현대신학에 이르기까지 신학의 역사를 강의하거나 혹은 중세기에 대해서 강의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중세 사상의 역사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평생을 이것만 연구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원고에 만족하지 못하고 수년간 더 유비의 개념에 대해 파고들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그의 책은 출판되지 못하였다. 여러 다급한 일들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결국 이 논문은 2007년이 되어서야 추가된 두 개의 장과 함께 출판되었다. 해당 논문은 판넨베르크의 사상 형성에 대한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6) 역사로서 계시로부터 기독론 기초로

판넨베르크는 1958년 가을 부퍼탈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가게 된다. 당시 위르겐 몰트만도 부퍼탈로 왔다. 3년 뒤 판넨베르크는 마인츠 대학으로 이전한다. 거기서 그는 완성된 교의학 체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또한 바로 그해인 1961년 <역사로서의 계시>가 출판되었다. 어떤 신학적 혁명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던 기획은 아니었지만 바르트와 불트만 쪽 사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부각되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으로 등장한 역사야말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이 논쟁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1961년부터 1967년까지 마인츠에 머물렀던 시절 판넨베르크와 그의 역사로서 계시라는 기획에 대한 비판이 엄청났으며, 판넨베르크는 그와 함께했던 하이델베르크의 그룹과 함께 이를 방어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 과정 속에서 판넨베르크는 기독론에 대한 주제를 다룰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가 부퍼탈에서 강의했던 것을 토대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그는 역사나 계시에 대한 연구가 단순히 어떤 기획에 의해 간단히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보다 중요한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그의 기독론 책은 역사적 예수와 교부 시대의 그리스도 이해를 연결시키려는 시도였다. 당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두 번째 비평적 연구가 시작된 시기였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사역을 생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적 선포와 인간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지를 문제 삼았다. 물론 그 둘 사이에 분명한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가 그의 선포로서 예수를 이야기할 권한을 갖고 있다면 이 연속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된다. 이런 연속성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적 선포가 이미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 속에 함유된 것을 온전히 풀어 내고 있는 것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 또한 1929년 소위 결정으로 부름(Jesu Ruf zur Entscheidung) 개념을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나라를 선포할 때에 기독론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교회의 선포는 예수의 행위와 말씀 속에 함축된 것을 풀어 설명해 내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함축(implication)과 해석(explication)의 관계 속에서 판넨베르크는 그의 책 <예수, 신과 인간>을 1964년 출간하였다. 여기서 캄펜하우젠의 부활절 전통의 역사성을 토대로 부활 사건을 어떤 확고한 사건으로 보려고 시도했으며, 이로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기초 위에 부활의 역사성을 논증할 수 있었다.

판넨베르크의 기독론 서적 출판 이후 역사로서의 계시에 대한 토론은 보다 향상된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에까지 도달되었다. 1963년 그는 시카고대학에 기독론 강사로 초빙되었는데 당시 그는 폴 틸리히의 옆방에서 생활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첫 미국인 박사 학생인 프리베(Duane Priebe)가 자신의 기독론에 대하여 논문을 쓰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다. 1963년은 미쳐 기독론이 인쇄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는데, 이 경험이 그로 하여금 미국인들이 미래에 대해 꽤 큰 흥미를 가진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1964년에는 하버드신학대학에 정교수로 초대되었지만 거절하고 1966년에 교환교수로만 한 학기를 머물렀다. 클레어몬트대학에서도 가르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판넨베르크는 뮌헨 대학이 교수로 초빙하길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첫 출판은 1969년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였다. 오고 있는 나라의 하나님은 미래의 힘으로서, 그는 모든 것의 완성을 가져오실 분이라는 기획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후에 삼위일체 신학의 형성 속에서 설명되었고, 특히 1989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그러니까 판넨베르크가 은퇴하기 직전까지 완성한 3권짜리의 책 <조직신학>을 출판하는 데 기반이 된다. 호주의 신학자 모스터트(Christian Mostert)가 2002년 출간한 <신과 미래>에서, 판넨베르크의 후대의 삼위일체 신학이 그 이전에 그가 언급했던 미래의 힘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언급들에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오히려 고전적 신학의 언어 속에서 아이디어의 전적 발전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7) 인간론과 조직신학

판넨베르크가 기독론 책의 출판과 강연들이 이어 한 이후 자연과학과 신학의 관계 문제에 몰두한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약간의 오해다. 판넨베르크가 과학과 신학에 활발히 토론에 응하였던 것은 당시 1973년 무렵 일반 대학에서 신학의 위치의 정당성에 대한 긴급한 토론들이 활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의 주된 관심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론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신에 관한 말은 늘 인간과 그 본성에 연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폴 틸리히가 말한 상호성의 개념을 가져오지도 않았다. 판넨베르크의 인간론 작업은 1960년대 부퍼탈 강의로 시작하였고 현대 인간론과 그 신학적 해석에 대한 라디오 강의들에서 확장되었다. 이것이 인간론에 대한 작은 책으로 묶였으며 당시 학교의 종교 강의 시간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는 보다 본질적인 연구를 목표로 했으며 1983년 <신학적 관점에서의 인간론>을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이 보다 새로운 간문학적 토론으로 야기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한 만큼의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았으며 신학적 연구 작업으로서 활용되는 쪽으로 기울었다.

신학은 늘 현실과 연관되어 있기에 창조신학과 무관할 수 없다. 이 동기부여는 자연과학과 대화하도록 이끌었는데, 특히 하이델베르크의 슐링크 교수가 그를 50년대부터 대화로 안내하였다. 괴팅겐에 있을 당시 과학자들, 철학자들, 신학자들이 그룹이 되어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 대화가 1962년 소위 '칼스루에 대화 모임'으로 확장되었으며, 1970년 이 토론이 하나의 책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연성 개념과 자연법칙'이다. 후에 과학과 종교에 대한 토론이 미국와 영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될 때 판넨베르크도 거기에 소개되었는데, 그는 그들에게 보다 철학적 관점의 사람들이 포함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을 통해 보다 다양한 현대 자연과학과 신학적 창조론과 인간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현실에 대한 이해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신학이 단지 신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창조자로서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하기에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 신학의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판넨베르크 자신이 - 이에 대해 스스로도 꽤 멋쩍어하였다 - 소개한 부분을 필요에 따라 편집한 것이다. 이것으로 판넨베르크의 인생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도 없고 특히 그의 사상에 대해 정리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말년에 자기 스스로의 인생을 짧게 요약한다고 할 때 가장 기억에 남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었으니 그의 생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그의 생애 86년의 시간동안 제한된 시간 안에 주어진 능력의 최선을 다한 신학자로, 그래서 많은 신학도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20세기 신학의 발전에 누구보다 큰 기여를 한 신학자로 기억되었다. 비록 이제 더 이상 그의 새 글과 사상을 만날 수는 없겠지만 그가 남긴 수 많은 책들을 통해 꽤 오랜 시간 기독교 진리 탐구의 영역에 각인될 것이다.

안희철 / 서울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2008년부터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판넨베르크의 제자였던 프리데리케 뉘쎌(Friederike Nüssel) 교수의 지도 하에 '우연성 vs. 결정론?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신학에서 우연성 개념의 의미와 기능'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여, 2012년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