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 송영론이어야 할 이유

W.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Band 1, 1988, 63-66쪽

판넨베르크, 정용섭 옮김

출처: 대구성서아카데미

 

하나님이 진리 자체라는 어거스틴의 사상(De lib. arb. Ⅱ,15)은 모든 참된 것의 결집력과 그것의 단일성이라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단일성의 궁극적 거처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동일한 (이런 점에서 “불변하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모든 참된 것을 포괄하며, 자신 안에서 결정한다(위의 책 Ⅱ,12). 결집력을 위한 모든 인간적 수고는 늘 불완전하며 미완료의 상태로 남아 있는 추가집행일 뿐이다. 즉 하나님 안에 토대를 둔 모든 진리의 단일성을 숙고하는 것일 뿐이다. 또는 하나님 안에 토대를 둔 모든 참된 것의 단일성이 역사 형식을 취함으로써 그 단일성이 시간의 과정에서 성취되게 하는 선(先)기획이다. 교의학에서 기독교 교리의 조직적 서술에 해당되는 것은 그 단일성이 단지 하나님 안에 토대를 둔 세계와 역사의 단일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 계시의 추가 실행이며 추가 기획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교의학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런 것으로 확정시킬 수 없다. 그리고 양식화할 수 없다. 이러한 교의학적 수고가 진리를 파악해내고 그것을 서술하려는 목표를 정하면 정할수록 더욱 교의학과 하나님의 진리와의 일치는 우리의 신학이 인간의 인식론적 수고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식과, 그리고 이런 것으로써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의식과 연결된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된다.

신학 지식의 유한성은 전체 전승이 확인하고 있는 무한한 “대상”에 대해서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 및 그런 작업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게 이런 지식이 시간에 묶여 있다는 사실에 토대하고 있다. 즉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의 신성은 우선 모든 시간과 역사의 마지막이 이르러야 결정적으로, 또한 의심할 나위 없이 드러날 것이다. 시간 내에 있는 모든 거점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바는 우선 무엇이 참되게 항존적인지, 따라서 무엇이 신뢰할 만 하며, 이런 의미에서 무엇이 “참된”지가 미래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성서의 진리 이해는 그리스 사유와 마찬가지로 진(眞)을 항존적이고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에게서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것의 자기 동일성을 시간의 흐름 뒤에서 영원한 현재로서 파악하려고 한 게 아니라 시간의 진행에서 항존적으로 확증되고 보증되는 것으로 파악해보려고 한 것이다. 시간은 존재자의 경험이나 그 진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찰 방식은 근대의 후기 관념주의 사상의 경험에도 부합한다. 특히 역사적 자리에 대한 모든 경험의 상대성에 부합한다. 이 상대성은 역사 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 역사적 자리에서 이 상대성이 획득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상대성이 그 어떤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렇게 늘 절대적으로 상존하는 진리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상대성은 절대에 대한 사유에 대해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런 절대를 사유함으로써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에게서는 진리의 절대성이 우리 경험과 반성의 상대성 안에서만 유효하다. 이것은 딜타이가 지적한 바와 같이 경험의 역사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역사가 계속 진행되는 한에서 우리가 우리 세계의 사물과 생기(生起)에 담지된 참된 의미를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그런 의미에 둠으로써 사물과 생기의 의미를 실제로 규정한다. 물론 이러한 의미 부여와 주장들은 선취에 기인한다. 더욱이 이것은 대략 동형적으로 회귀하는 자연 생기의 영역에 해당된다. 천동(天動)의 대략적인 동형성을 선취하지 않은 채 날(日)과 해(年)를 헤아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욱이 이런 낱말들 자체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우리가 생명사(史)의 사건과 사회사(史)의 생기에 부여하는 의미는 역사에서 발전하는 이런 구성물의 전체와 미래의 선취에 좌우된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옳다. 그리고 이러한 선취는 경험이 진행되면서 지속적으로 변경된다. 왜냐하면 경험의 지평이 선두의 자리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시간이 진행되면서, 우리의 마지막 세계에서는 무엇이 항존적이며 “참된” 것으로 증명되는지, 그리고 이와 달리 무엇이 불확실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지, 또한 그렇게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렷이 드러날 것이다. 인간 경험의 역사에 주어진 제한은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 경험에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동거한 이 세계에서 어느 한 순간도 그 정체가 파악될 수 없었던 대상이며, 또한 그의 현실성은 세계와 역사를 초월하는 능력에 대한 경험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 능력의 역사는 세계를 초월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계의 마지막 미래와 그 역사의 미래야말로 하나님의 현실성을 최종적이며 반박될 수 없도록 증명할 수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현실성을, 그리고 역사 진행에 내재한 하나님의 영속성을 잠정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에 관련된 모든 진술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적 언급에서 특수하게 드러난 방식으로 세계 전체를 선취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아직은 완료되지 않은 역사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미래에 기인한다는 말이다. 인간 경험과 반성의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하나님 인식이 역사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언급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인식 앞에서 불가피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고찰하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라는 근거에서 하나님 인식에도 해당된다. 기독교의 신학적 지식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드러나는 최종적인 하나님 계시와 비교할 때 “부분”일 뿐이다(고전 13:12). 기독교인은 신학적 앎의 유한성을 기억하기 위해서 경험의 역사성에 주어진 우리 지식의 유한성에 대한 근대의 반성을 통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이런 가르침을 이미 인간의 상황에 대한, 즉 하나님 앞에 있는 신앙인의 상황에 대한 성서의 진술에서 획득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적 언급의 유한성과 부적절성에 대한 지식은 신학의 자기 제한적 성격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진술의 내용이 상대적으로 타당하다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진술이 진리론적 조건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지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송영론(Doxologie)이 될 뿐이다. 고유한 유한성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은 이 송영론에서 자기의 유한성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고양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사유의 윤곽이 희미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송영론은 전적으로 조직적 반성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