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계신 하나님

 판넨베르크, 정용섭 옮김

 

- 대구성서 아카데미,2002,232쪽 -

 

 


 

1. 머리말

1. 사랑의 능력(고전13:1-10)

2. 죄로부터의 자유(롬6:3-11)

3. 하나님 나라의 현재(마4:12-17)

4. 승천(골3:1-3)

5. 아브라함의 믿음(창15:1-21)

6.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들(막3:20-30)

7. 기도(시143)

8. 축복선언(눅6:20-22)

9. 고난 위로 임하는 빛(사52:7-10)

10. 기독교인다운 삶의 스타일(고전9:24-27)

11. 하나님의 승리를 향한 길(사40:1-5)

12. 굳게 지키시오!(계3:1-6)

13. 그리스도의 몸(고전12:1-18, 27)

14. 이웃으로부터의 자유(눅14:25-33)

15. 하나님의 영광과 계시(고후3:12-18)

16. 하나님은 영이다(요4:19-24)

17. 성령 충만(엡5:15-20)

18. 권위의 근원(마13:10-17)

19. 삶의 차안과 피안(롬11:33-36)

20. 새로운 인간(고전15:12-22)

21. 자유와 이성(막5:1-20)

22. 생명의 의미(요1:1-5, 9-14, 16)

23. 하나님의 부재와 현재(겔36:22-28)

24.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기독교인의 십자가(마16:24,25)

25. 회개하라!(마3:1-11)

26. 기도에 대하여(딤전2:1-6)

 

 

머리말

 설교집을 출판하고 싶은 생각이 저에게 진작부터 있었습니다만 오랫동안 망설여왔습니다. 제 설교가 주석적으로나 수사학적으로 이렇다 할 만큼 내보일만한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다르게 마음을 먹게되었습니다. 신학적인 면에서나 교회의 실천적인 면에서 공적인 일을 맡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제 경우처럼 학문적인 작업을 펼쳐나가는 일이라면 신학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라도 설교와 연결되도록 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무리 저의 관심인 신학적 전망들이 설교라는 다른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신학이 반드시 설교로 이어져야 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설교집에 간추려진 설교들은 거의 모두 본문설교라는 전통적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출판의 편집 의도에 따라서 비슷한 주제를 다룬 설교들이 선택되었습니다. 본문 설교라는 형식을 유지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본문이 매 순간의 상황 속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모든 설교에서 우선 주제를 선명하게 설정하는 작업입니다. 말하자면 설교 본문의 도움으로 구체화되어야 할 기독교 교리의 주제가 핵심입니다. 저의 실천신학 은사이셨던 빌헬름 하안 박사는 전적으로 실용적인 이유에서, 즉 많은 주제 설교가 흐르기 쉬운 추상화와 일반화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본문 설교를 고수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저에게 유효합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설교 본문이 기독교 교리의 한 주제와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주제는 일반적으로 각각의 제목을 통해서 암시되어 있습니다. 한 성서 본문의 역사적 내용 그 자체가 설교의 대상이 아니라 그 본문이 연결되어 있는 교의학적인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이미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리고 현대적으로 생각하는 언어와 사유 형식에서 파악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 본문으로부터 곧 설교로"라는 형식, 즉 설교를 듣는 이들의 상황에 들어맞아 떨어지는 문제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본문에 대한 역사적 주석과 그것의 현재적 적용 사이에서 조직신학적 인식이 결여된 곳에서만 긴급한 현안으로 등장합니다. 이 조직신학적 인식은 원래 기독교 전승이 현재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관계된 것입니다. 설교에서 구체화되어야할 본문에 대하여 신학적인 주제가 독립적이라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즉 저의 설교에서는 회중의 현재적 상황이 본문과 어떤 유비적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서만 질문하는 게 아니라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제에 대한 오늘의 인식이 그 본문의 언설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어떻게 대립되는지를 고려해보고, 또한 가능한대로 그 요점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설교의 본문 안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려는 입장과 가장 현격하게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설교에서 논박 당할 수 없는 그 말씀을 말합니다.

저는 제 설교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어떤 특별한 주제들과 상관되어 있기 때문에 "교리설교"라는 특징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설교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제 설교는 직접적으로 결코 교리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주석적으로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그 위험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설교단에 접목시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설교단에 올라서기보다는 오히려 설교단 아래서 훨씬 자주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설교자들이 신학적인 문제에서 자신을 절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결과가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 본문과 그 주제에 해당되는 정보를 어느 정도나마 회중들에게 전달하게되는 경우에 일단 이 설교들은 그 내용이 풍성하게됩니다. 이 정보라는 것은 설교자가 자신의 학문적인 전문분야에서 얻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설교자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회중들의 지적인 수준이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접근합니다. 그렇게 많은 신학 정보를 회중들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설교자가 정말 명심해야 할 사실은 대단히 많은 회중들이 지적인 면에서 설교자보다 월등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설교자 못지 않게 성숙 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 훈련받는 신학 교육이 설교단에서 좀더 활용되어야한다는 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말은 설교자가 전문적인 신학 용어를 마구 사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학 용어를 그렇게 절제 없이 사용한다는 것은 그 신학의 대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리킬 뿐입니다. 설교자는 회중의 일상적 용어로 신학적 목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저는 신학 이론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게 설교의 고유한 과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습니다. 제 기억에 남는 좋은 설교는 제가 그 설교를 들음으로써 생명과 그 의미에 대해 자극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설교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과 우리가 현재 경험한 생명의 의미를, 또한 기독교 전승을 통해서 얻게되는 이런 생명의 의미를 심화시키고 숙고하도록 이끌어주고 자극시키려는 작은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73년  뮌헨에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