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

정미현(바젤대학, 연세대 교수)

 

I. 생애

도로테 죌레(결혼 전 이름 Dorothee Nipperdey)는 1929년 9월 30일 독일 쾰른에서 오빠 셋과 여동생 하나 사이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성냥개비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갸냘프고 자그마했던 소녀시절 그녀는 수줍음 또한 많았다고 한다. 그녀의 사춘기 시절은 시대적으로 2차 대전의 참담함과 암울함이 교차되고 배고픔 또한 뼈저리게 맛보았던 시기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법률가였다. 가정은 교회에 열심인 그런 유형이 아니라, 성서보다는 괴테를 즐겨읽고, 교회 출석보다는 사회문제, 즉 나찌주의, 반유대주의에 더욱 관심을 갖는 개신교 자유주의적 분위기였다. 어린 시절 죌레는 그리스도교인은 바보같고, 구태의연하며, 겁쟁이고, 불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독일 제 3제국의 붕괴뿐 아니라, 그것을 막지 못한 독일 시민주의의 철저한 붕괴가 이 시기에 죌레의 실존적 물음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내 부모는 이 일에 저항하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하였는가? 내 스승은 어떠한 자리에 서 있었는가?   
당시 많은 독일인들처럼 2차 대전중 교회의 태도에 실망하여 교회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반감을 갖었던 죌레는 신학의 기초가 되는 고전어를 몇학기 공부한 뒤에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된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에 죌레의 부모님은 무척 놀라와 하셨다고 한다. 어떤 소명의식에 의하여서라기보다, 죌레는 불트만에게서 학위한 제자인 마리 바이트(Marie Veit)와의 만남에 영향을 받고 이러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진리를 찾아보기 위해 신학 공부를 결심한 죌레에게는 일찍부터 급진적 성향의 그리스도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리 바이트는 죌레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매우 철저하며 공명정대하고 성실한 교사였다고 죌레는 전한다. 이때 마리 바이트의 도움으로 죌레는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사상을 가까이 접하게 되었고, 신약성서를 허심탄회하게 논해 볼 수 있었던 기회를 갖었다. 마리 바이트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해방신학이 아니라, 독일 파시즘을 경험한 후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해방의 신학을 추구하였고 이점에서도 죌레에게 영향을 준다. 마리 바이트는 죌레가 던지는 거침없는 신학적 질문들을 묵살하지 않고, 사려깊게 의견을 존중하며 죌레의 사상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신앙과 이성의 긴장관계 가운데 이성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음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이 무렵이다.

1949년부터 쾰른 대학과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철학과 독문학, 고대 언어를 공부한 이후 죌레는 1951년 괴팅엔 대학으로 옮겨서 개신교 신학과 독문예학을 공부하였다. 철학에 흥미를 느껴 공부를 하던 죌레는 아테네로 가는 도상에서 본인이 가려던 길은 처음부터 오히려 예루살렘이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죌레가 신학 공부할 때 여학생은 숫적으로 상당히 열세였으나 모두가 굉장히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한다.

죌레는 1954년 국가시험(대학졸업시험)을 치루고 화가인 디트리히 죌레(Dietrich S lle)와 결혼한다. 같은 해 죌레는 독문예학 분야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는데 제목은 다음과 같다. "보나벤투라의 야경꾼에 나타난 구조에 대한 연구(Untersuchungen zur Struktur der Nachtwachen von Bonaventura)". 이후 그녀는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쾰른-뮐하임 지역의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종교와 독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6년 첫 아들 마르틴(Martin)이 태어난데 이어서 이듬해인 1957년에는 딸 미카엘라(Michaela)가 태어났다. 죌레는 1960년부터 방송국과 잡지사에서 신학과 문학에 관련된 주제를 담당하여 일하였고, 1961년에는 둘째딸 카롤린(Caroline)을 출산하였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아헨 공대 철학 연구소에서 조교로 일하였던 죌레는 그 무렵 1964년에 첫 남편과 이혼하였고,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쾰른대학 독문학 연구소 고등교육부서에서 학생 상담일을 맡아 보았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죌레는 고향인 쾰른에서 "정치적 밤기도회(politisches Nachtgebet)"를 주도하였는데, 이것은 죌레의 신학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된다. 죌레가 존경하는 스승 마리 바이트도 이 모임에 소속하여 활동하였고 신학적 지식, 조직과 실천면에서 다양한 조언을 주는 기둥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알려주고 저항과 갱신을 호소하였던 새로운 형태의 예배였다. 죌레는 이러한 예배를 통하여 죄에 대한 신학적 담론을 새롭게 이해하였다고 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와 소련의 침공, 자유화 운동, 베트남 전쟁과 평화문제, 남아메리카에 대한 북아메리카의 정치, 경제적 억압상황에 대한 문제화등이 이 모임에서 신학적으로 작업되어야 할 정치적 주제였다.

1969년 베네딕트 사제였던 풀베르트 스테펜스키(Fulbert Steffensky)와 재혼한 죌레는 문필가로서도 대단한 활약을 하는데 1970년부터 서독의 pen 본부 회원이 되고, 1974년 테오도르 호이쓰(Theodor-Heuss) 상을 수상하게 된다. 또한 1981년 함부르크에서 레씽(Lessing) 장학금을, 1982년에는 메레스부르크 시에서 서정시 분야 드로스테(Droste) 상을 수상하는 등 독문학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였다. 1970년에는 막내 딸 미리암(Mirjam)이 태어난다. 1971년 쾰른대학 철학부에서 한번의 실패를 딛고 죌레는 교수자격시험에 통과한 후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마인쯔 대학 개신교 신학부에서 강의하였다. 그러나 죌레는 고국인 독일에서 지속적인 교수직을 갖지 못하였고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담당 교수로 봉직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 죌레가 독일어권 신학대학에서 교수직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차별적이고, 정치적이며, 신학적인 것이었다. 죌레의 신학이 "학문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다. 죌레의 글들은 독일어권의 소위 학문적 시각으로 볼 때 논리적 체계성을 갖춘 것이라기보다는 수필형태의 글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박사학위 논문은 독문학에 관련된 것이고, 교수 자격시험 논문도 문학과 신학의 관계성에 대한 것으로써 신학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한 이유였다. 제도권 안에서 교수직을 갖고 지속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하였으나 죌레는 오히려 자유로운 상태로 세계를 무대로 신학하며 신학적 시야를 넓게 갖고 활동하였다. 유니온 신학대학의 초빙으로 뉴욕에서 살게 된 죌레는 여성주의자들과 만나게되고 세계와도 만나게 되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된다.

죌레는 1977년에는 파리 개신교 신학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카쎌 대학에서,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바젤대학에서 초빙교수로서 가르쳤고, 1994년에는 함부르크 대학 명예교수를 지냈다. 그녀는 대학의 울타리에만 갇히어져 있는 신학자가 아니었다. 198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일에 무트랑엔에서 Pershing II 로케트 설치에 반대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도하고, 1988년 피쉬바하의 미군 독가스 저장소 앞에서 "평화"를 위한 시위 등 여러 종류의 집회를 주도하는데 죌레는 빠지지 않았다. 머리로만 신학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사르며 신학하는 모습을 그녀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II. 죌레신학의 주제

죌레의 신학에는 신학과 문학, 사랑과 노동, 꿈꾸는 것과 순종하는 것, 신앙과 실천, 신비와 저항, 헤겔-맑스 전통과 종교개혁 전통등이 양자택일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졌다.

1. 정치신학에서 해방신학으로

쾰른에서의 정치적인 밤 기도회를 통하여 죌레는 소위 제3세계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관심하게된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이후 죄에 대해 새로이 이해하게되고 "양심의 정치화"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세계의 구조적 죄악과 문제성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는 위르겐 몰트만, 요한 밥티스트 메츠와 더불어 1970년대에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을 주도한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과 사회적 행동은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만나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해방신학을 통하여 죌레는 추상적인 신학의 개념을 구체화하는 법을 배운다. 개인적 지평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큰 지평에서 신학의 개념을 설명하는 법을 익힌 것이다. 그러한 죌레의 신학은 사회주의적 성격이 짙다. 그리고 해방과 저항을 추구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생산적 긴장이 정치 신학에 관심 기울이던 시기부터 죌레 신학의 중요한 화두였다.

또한 그녀의 신학에서는 "중간자(Interlokutor)"의 개념이 주요하게 다루어지게된다. 진정한 신학은 바로 이 중간에서 묻는 자를 분명히 인식하며 귀 기울여야 된다는 것을 터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중간자"란 이 점에서 유태인들과의 대화를 뜻한다. 한스 요나스(Hans Jonas)와의 대화가 그러한 역할을 해 주었고, 엘리 비젤(Elie Wiesel), 에밀 파켄하임(Emil Fackenheim)과 같은 저술가들도 죌레로 하여금 전통적 신학을 교정하는데 도움을 준 이들이다.

2.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

죌레는 안네 프랑크와 동갑인데, 안네의 일기를 읽고 난 후 그녀는 줄곧 죌레의 내면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유머가 있고, 호기심 있고, 지적이고 생명력 넘치던 어린 소녀 안네의 죽음은 죌레로 하여금 독일 민족의 죄악에 대한 구체적 현실을 일깨워 준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 이것은 죌레의 신학에서 아주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주제이다. 죌레는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 신학의 내용에 커다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즉 신학을 하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분석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죌레에게는 독일 민족이 저지른 범죄의 현실을 직시하고 신학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아우슈비츠 이전의 신학이나 아우슈비츠와 관련없는 신학이란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현실에 대한 외면, 혹은 전혀 몰랐었다는 식의 책임회피, 유태인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등의 변명 내지 부정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고전적인 신학의 근본개념인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부정이 무엇보다 죌레의 신학에서 두드러진 변화에 속한다. 죌레는 전능을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사용하는 것은 남자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하나님에게 투사하는 것이며 "남자들의 망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본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세대로서 죌레는 아우슈비츠에서 하나님은 매우 작은 분이셨을 뿐 아니라, 아무 친구도 갖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정의는 빛나지 않았으며, 성령은 이 땅에 거할 장소를 갖지 못하였음을 말하면서 "힘"이라는 용어가 신학에서 잘못 오용됨을 지적한다.

죌레는 하나님을 전통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인 '전지', '전능', '편재하심'이라는 절대적 지배자의 이미지에 문제성을 지적하며, 남근숭배적 환상과 권력숭배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3. 여성신학

죌레는 성차별이 있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권력자, 역사의 지배자라는 개념의 문제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여성신학적 인식을 갖게된다.

여성신학의 주요 과제는 대명사의 교체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작업이 필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힘에 대한 이해이다. 죌레는 힘의 분배, 힘을 나누어 가짐으로 서로 사랑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을 꿈꾼다. 죌레에 의하면 선한 힘이란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독어 단어인 "권한부여(Ermaechtigung)"보다 영어단어인 "강화(empowerment)"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독어의 이 개념이 지닌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이 단어가 망가졌다고 본 것이다. 죌레가 표현하려는 의도는 선한 힘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강화하는 것이란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리스도교는 권위주의적 종교로 바뀌어 갔는데 죌레는 여성신학적 논점에서 이러한 가부장적 우상숭배의 문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능을 고집하기를 포기하는 신이해는 여성적 사고의 요소를 포함하고 과정신학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의 대립이 아니라 긴장완화의 역할을 감당한다. 또한 전지 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왜소하며 보잘 것 없어 보이게 되는 위험에 빠진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죌레는 강조한다.

4. 신비주의

죌레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신비주의가 정의하는 '실험으로부터의 하나님 인식(Cognito dei experimentalis)'이라는 신비주의적 이해 안으로 몰입한다. 이것은 성서나 성직, 미사, 혹은 그외의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경험을 통한 하나님 인식을 말한다. 그녀가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일상성과 세계의 죄악을 외면한 뉴에이지 풍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일상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저항적 정신을 내포하는 신비주의이다. 즉 신비주의와 저항의 두 개념을 보편화하고, 이 개념들에게서 엘리트적인 경향성을 떼어버리기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죌레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세계 도피적이거나 탈세계적 성향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계안으로 들어가며 그 안에서 정의를 추구하며 정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과 어우러진 것이다.

세계질서의 자본주의로의 단일화된 편입이 강요된 지구화의 시대에 죌레는 자본주의의 일방적, 궁극적 승리앞에서 지향할 신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본다. 즉 하나님의 신비적 임재와 저항을 지향하는 해방신학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라틴 아메리카적 의미에서의 해방신학 뿐 아니라, 가진 자, 지배자를 위한 해방신학의 내용을 추구하는 것이다.


5. 교회를 위한 신학

죌레는 많은 신학자들이 2차 대전의 대학살 이후에도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신학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들어냈었다. 그녀는 그리스도교가 허무주의를 직시할 능력이 없다고 여겼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속적이며 니체적 경멸의 시선을 지녔던 것이다. 소시민적 자유주의적 오만함에 빠져있었다고 회고하는 그녀는 산상수훈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정녀 탄생을 믿어야 되는 것을 몰랐노라고 말한다.

죌레가 책을 통해 대하게 된 스승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은 키에르케고르와 시몬느 베이유, 파스칼등이다. 특히 키에르케고르는 세속적 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고 방어하고자 한 설교가였는데, 이러한 안경을 통하여 보게된 그리스도교의 모습에 매료된 후 죌레는 교회를 끌어안으려는 태도를 수용하게 된다. 이 세계 안에서 자행되는 불의한 구조에 저항하는 힘은 대학과 같은 제도권 안에서 나오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으로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보며 교회가 그러한 기반이 되어질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래서 심지어 죌레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오래 전에 건조한 학문만을 추구하는 대학을 떠나 버렸고 대학에서 불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이처럼 교회에 대하여 일방적인 부정을 하던 태도에서 탈피하여 후기에는 교회에 대한 긍정적 기대감을 표현한다. 신학은 바로 이 교회를 위한 역할을 담당해야한다.

III. 신학적 스승들

앞서 언급한데로 인내로써 죌레를 신학의 길로 안내한 마리 바이트 외에 죌레의 스승가운데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루돌프 불트만과 프리드리히 고가르텐이다.

1. 루돌프 불트만

죌레는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에게서 직접 배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자신을 '손녀 제자'라 칭하기도 한다. 성서나 루터보다 괴테와 칸트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유주의적 개신교 가정에서 자라난 그녀는 계몽주의적 분위기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지적인 회의를 많이 하였다. 동정녀 탄생, 빈 무덤, 기적 사화들, 교리들 등등은 특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마리 바이트를 통하여 불트만의 신학을 접한 죌레는 그리스도교인이면서 계몽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불트만은 교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무척 경건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생각하는 것과 믿는 것, 비판과 경건, 이성과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불트만이 제시한 비신화화론은 죌레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것은 성서에서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거나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으로써 성서가 학문적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적으로는 불트만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나, 1968년 쾰른에서 비롯된 정치적 저녁 기도회 모임 이후 죌레는 정치신학의 선봉에 서게 되는 데 이점에서 불트만과 입장이 철저히 달라지게 된다. 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불트만은 개인적 차원에서 거짓말, 신뢰를 저버리는 것등의 개별화된 죄를 말하는데 반하여, 죌레는 죄의 집단적 차원을 말한다. 불트만은 개인적 차원의 죄를 S nde라 표현하고, 집단적 차원의 죄는 Schuld라 구별하여 칭한다. 그러나 죌레는 죄를 이렇게 구분지어 말하는 것을 비판하며 죄의 집단성, 공동체성을 개인주의적 죄와 구분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불트만 신학이 갖는 실존주의적 개인주의의 문제성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결여됨을 지적한다. 이와같이 불트만의 입장과 죌레가 갈라지는 중요한 기점은 한마디로 '아우슈비츠'이다. 그녀에게는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하며 살아간다는 의식이 강한 반면에 불트만의 신학은 시대적 연관성, 시대 의식없이 학문으로써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점에서 격차가 생긴 것이다.       

2.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죌레는 사상가인 프리드리히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을 책을 통해서 뿐 아니라, 강의실과 세미나실에서도 만났다. 신학의 기본 사상을 그에게서 배운 것이다. 죌레가 괴팅엔에서 신학수업을 시작하기로 선택한 이유는 고가르텐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관한 고가르텐의 책을 통하여 예수, 바울, 루터에 구체적으로 접근하게된다. 그리고 고가르텐에게서 개념의 반복을 지양하고 개념을 바꾸는 지혜와 용기, 끊임없이 질문하고 역설적으로 되묻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굉장히 학생들의 의견을 경청하였다고 하는 고가르텐은 매주 월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세미나 후에 하루에 한 학생씩 집으로 저녁초대를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고가르텐은 식사 후 소음으로부터 이중으로 차단된 그의 연구실로 학생을 데려가서는 파이프를 물고 침묵하면서 어린 학생이 무슨 질문이든 할 때까지 기다렸다. 너와 나, 주는 것과 받는 것, 학생과 스승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죌레가 배운 것이 이때였다. 스승은 내가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고 죌레는 말한다. 한 사람이 지니는 인식과 지식으로 어떤 사람이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스승으로 선택하게 됨으로 스승이 된다는 것이다. 스승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정신력, 이성, 지식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증언해야만 한다. 그리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경멸할 것인가를 인식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한 스승의 모습을 죌레는 고가르텐에게서 본 것이다.

이외에도 베르톨드 브레히트(Bertold Brecht)와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 semann)도 손꼽을 수 있는 죌레의 스승들이다. 죌레는 브레히트의 글들을 자주 인용한다. 악은 하나의 주소를 갖고 있고, 하나의 전화번호도 갖고 있다는 브레히트의 말을 죌레는 즐겨 인용한다. 이 말은 악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과 악은 신학내부에도 존재한다는 것, 즉 악은 전혀 엉뚱한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바로 악의 이름과 주소를 거론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악과 대적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악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신학자로 죌레에게 영향을 끼친 스승은 케제만이다. 죌레는 케제만과 늘 다투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무리 독일과 같은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고 사제간의 논쟁이 가능한 곳이라고 할 지라도 그리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닐 것이다. 불트만에 대하여 절대적 신뢰를 가진 죌레는 케제만이 불트만을 비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도 한다.

IV. 신학사상

죌레의 신학 내용은 다양한 각도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다음의 세 측면에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죄

죌레가 말하는 죄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죄란 개인적, 사회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죄를 개인적 일로만 축소시키는 것은 곧 사회적 죄악, 구조악에 대한 책임회피이며 외면이기 때문에 이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1960년대 "정치적인 밤 기도회"를 주도한 죌레는 우리가 행하지 않는 것이 곧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고 이것이 죄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치적 예배모임에서 양심은 "정치화"되었고, 여기서부터 "정치신학"이 생겨났으며 실천되었다.

죌레는 근본주의자나 부르조아처럼 죄를 한 개인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거나 가톨릭 교회처럼 죄를 성욕으로만 축소하는 것을 문제시한다. 때문에 죌레는 감정적 차원에서의 개인적 죄성이 아니라, 구체적 차원에서의 집단적 죄악을 강조한다. 즉 내가 나의 후손들이 마실 물을 오염시키는 것, 군수산업에 연관된 회사의 제품의 소비자가 되는 것,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죽어가는 것에 내가 의식하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등의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죄를 말한다.

2. 고난

죌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말하는 대신에 고통받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욕구와 상처받기 쉬운 감정의 저편에 자리한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고 불변하며 영원히 머물어서 인간적 고뇌에 대하여 답하지 못하거나 단지 냉소적으로만 답할 뿐이라는 것이다. 죌레는 신정론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한다. 즉 어떻게 하나님이 그러한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되며, 하나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 가운데 드러나는 것인가 라는 것으로 달리 접근한다. 죌레는 바울이 말하듯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과 세상의 슬픔'(고후 7, 10)을 구분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난이 기쁨을 향하여 있고, 그 기쁨에 의하여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을 때이다. 바로 이와같은 고난과 기쁨의 모순적 조화의 유비를 출산의 고통과 생명의 탄생의 관계성으로 설명한다. 죌레는 우리가 세상의 슬픔을 지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슬픔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픔을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스스로가 야기했으나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대하여 민감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자의적으로 참여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픔을 진지하게 배우는 길이라는 것이다. 죌레는 개인적인 고난의 이해보다는 집단적 고난을 말한다. 타인의 고난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고난은 연대적 고난이 되고, 그러한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죌레는 고난의 문제를 소시민적, 개인화된 차원으로부터 확대하여 공동체의 시각 속에서 신학화한다. 고난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는 그녀는 항상 세계적 고난의 연대성을 시야에서 잃지 않고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시도를 한다. 죌레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만 받으려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것을 고쳐나가는 구체적 행위에 참여하는 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내어주는 경건성이고 이것은 한쪽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통전적행위이다. 즉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홀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합일은 세상 속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다른 피조물에 대한 관심, 배려와 돌봄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통전적이 된다는 것은 곧 세계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의에서 눈을  돌려 외면치 않고, 사랑의 운동에 참여하며 스스로 사랑이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

나사렛의 예수가 죽기까지 고문당한 갈릴리의 가난한 남자였다면,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세상에 왔으나 우리를 통해 그 안에 살아있는 죽일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죌레는 특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란 말이 집단성을 표현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리스도란 연대성, 즉 함께 고난당하고 함께 싸우는 것을 표현하는 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개인적 인격과 결부시키는데에서 벗어나 인류의 구원을 위한 대리적 죽음을 통하여 해방을 가능케한 총체적 인격을 뜻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성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성향은 이미 죌레의 첫 저서 "대리-하나님 죽음 이후의 신학"에서부터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두가지 유형의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법정에서 변호자가 피고인을 변론하듯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리하여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고, 아마 어디론가 떠나서 부재중인 하나님,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여기는 그러한 하나님을 대신한다. 죌레는 두 번째 유형의 그리스도에 더 관심하고 있으며, 이 그리스도는 나와 우리의 실천적 결단으로 늘 새롭게 역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죌레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집중한다. 그것은 신약성서적으로 고백된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이후 역사에서 신앙인에 의하여 증언되고 고백되어지는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죌레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실재성(Wirklichkeit)으로써가 아니라, 신앙인의 구체적 행함으로 들어나게 되는 가능성(M glichkeit)으로 이해된다. 신앙인에게 요청되는 것은 비열한 저승신앙이 아니라, 몸으로 나타내는 사랑을 통하여 스스로 부활의 역사에 거듭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V. 나가는 말을 대신하여: 주요저서 목록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다고 했던가! 죌레의 신학은 살아있기에 부드럽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에는 언제나 저항적 힘이 스며들어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되쏘이는 신비적 저항이다. 아직 생존한 신학자에 대한 글을 쓰기는 쉽지 않다. 변화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열려진 채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끝맺음의 말 대신에 그녀의 주요 저서를 다음과 같이 연대기별로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A) 독어 원어본

Stellvertretung. Ein Kapitel Theologie nach dem Tode Gottes, Kreuz Verlag 1965.
Phantasie und Gehorsam.  berlegungen zu einer k nftigen christlichen Ethik, Kreuz Verlag 1968.
Atheistisch an Gott glauben. Beitr ge zur Theologie,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68
Meditationen und Gebrauchstexte, Wolfgang Fietkau Verlag 1969
Politische Theologie, Kreuz Verlag 1971
Leiden, Herder Verlag 1973
Die revolution re Geduld. Gedichte, Wolfgang Fietkau Verlag 1974
Die Hinreise. Texte und  berlegungen zur religi sen Erfahrung, Kreuz Verlag 1975
Fliegen lernen. Gedichte, Wolfgang Fietkau Verlag 1979
W hlt das Leben, Kreuz Verlag 1980
Spiel doch von Brot und Rosen. Gedichte, Wolfgang Fietkau Verlag 1981
Aufr stung t tet auch ohne Krieg, Kreuz Verlag 1982
F rchte dich nicht, der Widerstand w chst, Pendo Verlag 1982
Lieben und arbeiten. Eine Theologie der Sch pfung, Kreuz Verlag 1983
Revolution ohne Todesstrafe. Zwei Berichte aus Nicaragua (Zusammen mit Peter Frey), Pendo Verlag
Die Erde geh rt Gott. Ein Kapitel feministischer, Befreiungstheologie (zusammen mit Luise Schottroff), Rowohlt Taschenbuch Verlag
Verr ckt nach Licht. Gedichte, Wolfgang Fietkau Verlag 1984
Ein Volk ohne Vision geht zugrunde, Peter Hammer Verlag 1986
Das Fenster der Verwundbarkeit. Theologisch-politische Texte, Kreuz Verlag 1987
Ich will nicht auf tausend Messern gehen. Gedichte,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87
New Yorker Tagebuch, Pendo Verlag 1987
Und ist noch nicht erschienen, was wir sein werden. Stationen feministischer Theologie,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87
Nicht nur Ja und Amen. Von Christen im Widerstand (zusammen mit Fulbert Steffensky), Rowohlt Taschenbuch Verlag 1989
Zivil und ungehorsam. Gedichte, Wolfgang Fietkau Verlag 1990
Gott denken. Einf hrung in die Theologie, Kreuz Verlag 1990
Hannas Aufbruch. Aus der Arbeit feministischer Befreiungstheologie, G tersloher Verlagshaus 1990
Das Recht auf ein anderes Gl ck, Kreuz Verlag 1992
Es mu  doch mehr als alles geben. Nachdenken  ber Gott, Hoffmann und Campe Verlag 1992
Die Sowohl-als-auch-Falle. Eine theologische Kritik des Postmodernismus (zusammen mit Fulbert Steffensky), Edition Exodus 1993
Gott im M ll. Eine andere Entdeckung Lateinamerikas,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93
Mutanf lle. Texte zum Umdenken, Hoffmann und Campe Verlag 1993
Tr ume mich, Gott. Geistliche Texte mit l stigen politischen Fragen, Peter Hammer Verlag 1994
Gewalt. Ich soll mich nicht gew hnen, Patmos Verlag 1994
Gegenwind. Erinnerungen, Hoffmann und Campe Verlag 1995
Mystik und Widerstand. Du stilles Geschrei, Hoffmann und Campe Verlag 1997
Jesus von Nazareth(zusammen mit Luise Schottroff), Hoffmann und Campe Verlag 2000.  

(B) 한국어 번역본

1. 도로테 죌레, [환상과 복종], 오청자역, 대한 기독교서회, 1980년.
2. 도로테 죌레, [사랑과 노동], 박재순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년.
3. 도로테 죌레, [나를 따르려면], 서창원역, 나단, 1990년.
4. 도로테 죌레, [고난], 채수일, 최미영역, 한국신학연구소, 1993년.
5. 도로테 죌레,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서광선역, 한국신학연구소, 1993년.
6. 위르겐 몰트만 편, [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이신건역, 한들출판사 1998년, 36-44쪽.
7 도로테 죌레. 신비와 저항, [기독교 사상] 1999년 10월호, 정미현역, 98-110쪽.
8. 도로테 죌레, [말해진 것 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한다], 정미현역, 한들출판사 2000년.
9. 도로테 죌레, [다른 행복의 권리], 손규태.이한석역, 한국신학연구소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