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와 저항

손성현 역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스콜라주의에 의하면 신비주의란 "경험을 통한 하나님 알기"이다. 책이라든지 교회기관, 미사 혹은 여타 종교적 의식에 참여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비주의를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중세신학은 영적인 자유 공간, 특별히 여성들이 자신들만의 종교적 입지를 찾을 수 있는 영적인 자유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교회의 성스러운 직제나 신학 수업은 여성들을 배제시켰다.

그 결과 새로운 삶의 형태가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메히트힐트 폰 막데부르크'(Mechthild von Magdeburg)와 같은 뛰어난 여성 신비주의자들을 배출한 '베기넨 공동체'(Beginen-Gemeinschaft)다. 이 공동체에 속한 여성들 가운데는 순결과 청빈서원을 했으되, 복종서 원은 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독자적인 조직을 세우고 무정부적인 요소를 지켜나갔다.

이러한 운동을 교회의 변방에서나마 용인했다는 점에서 스콜라 신학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경험을 통한 하나님 알기"라는 정의는 일반적으로는 아주 권위적이었던 그 체제가 다른 생각을 품은 자들, 즉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문을 열어주었던 관용의 흔적이다.

그러나 이 문이 오래 열려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로마교회와 극심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른 종교의 신비주의자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겪어왔다. 예컨대, 이슬람의 수피들도 바그다드의 종교당국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신비주의는 저항운동과 사회적인 대결에 동조한다는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신비주의는 이 세상을 도피하거나 이 세상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요소를 항상 지녀왔던 것이다.

위대한 수피 신비주의자인 루미(Rumi)가 이런 말을 남겼다. "하나님이 그렇게 크신 분이시라면 어째서 당신은 하필이면 감옥에서 잠들어있소?" 매우 상징적인 이 말은 지금 우리의 세계에 잘 들어맞는다. 우리는 역사의 감옥, 뭐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잘 갖추어놓은 감옥에서 살고 있다. 아니,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 감옥을 지키는 '나'라고 하는 문지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감옥의 울타리는 경제이다. 경제는 무한히 쾌락을 탐닉하고 소비를 즐기는 인간을 선전하면서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이 울타리 안에서 "쇼핑"은 종교의식이요 삶의 형태이다.

어떻게 하면 이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스페인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나-벗어나기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그는 말한다.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마음에 자유가 깃들일 수 없다." 자유로 나아가는 길은 전혀 다르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도달하려면, 그 무엇도 즐기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도달하려면, 그 무엇도 알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소유하는 데 도달하려면, 아무 것도 가지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는 데 도달하려면, 어떤 무엇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과 "무"는 이 명상의 중요한 단어이다. 명상가는 이 둘이 서로 속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 서 "모든 것"이 되려는 동경(Sehnsucht)에 대해 말하고 그 욕망에 대해 성찰한다. 그러나 이제 그 성찰의 목표는 추구하던 그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을 바꾸는 것이다. "모든 것이 되는 데 도달하려면, 어떤 무엇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우선 "자기를 벗고", "자기가 없어져서" "영혼의 겸손한 떨어져나옴"에 도달해야 한다.

계속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즐기지 못한 것을 얻고자 한다면, 네가 아무 것도 즐기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라. 네가 모르는 것에 이르려고 한다면, 네가 아무 것도 모르는 그곳으로 떠나라. 네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얻으려면, 네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라. 네가 너 아닌 무엇이 되려고 한다면, 네가 아무 것도 아닌 곳으로 떠나라." 이 시의 첫째 연에서는 "다다른다"(gelangen)는 말이 가장 중요하고, 이 부분에서는 그것이 "떠난다"(hingehen)는 말로 이어지고 있다. 떠남이란 단순히 어딘가에 도달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길 떠남'이다. 우리가 모든 지식과 권력과 소유와 의미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 곧 빈곤과 무소유와 무권력과 무의미성의 자리로 길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내적인 자기 인식에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이 세상의 지배적인 권력과 폭력에 대항하여 저항할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체험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방어기재들을 여의고 무방비 상태로 떠나가야 하는 '어둔 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네가 무가 되는 곳으로 떠나가라!" 이 말은 곧 어떠한 로비도 불가능한 그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라는, 나 자신의 무를 겁내지 말라는 뜻이다. 프로테스탄트 신비주의자인 야콥 뵈메의 표현을 빌면 "모든 것이 되려고 하는 무를 향해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萬有]이 되시려는 무(無)다." 아주 자극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현재 서구 사회에서 하나님은 무가 되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힘도 없는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계화와 개인주의화가 목을 조여오는 상태에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경제구조가 점점 세계화될수록, 경제가 사회적-생태적 현실에 점점 무관 심해질수록 그 경제체제가 필요로 하는 인간형은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개별적 인간인 "호모 이코노믹스", 도덕적으로는 점점 퇴화되면서 돈벌이와 쾌락추구의 능력만을 가진 단독 존재이다. 소비주의라는 우리 시대의 종교는 낡고 쇠약해진 형태의 종교, 낡아빠진 "민중의 아편" 따윈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 구식 아편보다 더 좋은 마취제가 도처에서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지구적 권력에 내맡겨진 존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몇 가지 관점에서 신약성서 시대 사람들의 정황과 상응한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로마 제국주의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것을 죽음 안에 있음이라고 표현한다. 가령 요한1서에는 "우리는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기웠음을 안다"고 적혀있다. 여기서 "죽음"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폭력 아래서의 굴복 상태를 뜻한다. 온갖 소외와 죄와 병적인 욕망은 생명으로 가장한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죽음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영적인 죽음이다.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바울도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원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환영(幻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적 전통의 도움을 받아 이 세속적인 세상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서구인)는 이 땅의 원수며, 세계 인구 2/3 의 원수이고, 우리 위에 있는 하늘의 적이며 또한 우리 자신의 적이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은 "죽음의 악취"가 우리가 사는 땅 위에 퍼져있다고 말했다. 그 악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미 이 시대의 지배적 체제와 타협한 이들이다. 이들은 개인적인 선행의 차원에 자신을 국한하고 이 시스템의 좋은 측면을 통해 이득을 보며 살아가다가 마침내 이 기계 장치가 영혼을 위해 준비해놓은 죽음이 자기 앞에 넓게 퍼져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의 지배자들, 그리고 저항할 줄 모르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대중만을 응시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신비주의자들의 새로운 시각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계속해서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우리의 안락한 감옥 신세를 지게 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다른 시각을 제시해 준다. 신약성서의 사회학적 모델은 '대중'도 아니요 '개인'도 아닌, '무리'―함께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무리들이다.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낸 원시공동체가 바로 그 무리였다. 역사상 모든 시대의 '혁명적-신비적' 운동들이 거기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 운동은 가부장적 교권이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리들이 주체적으로 가이사의 권리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를 제시하였다.

신약성서에서 종교의 의미는 옛 로마나 지금의 워싱턴에서처럼 사회에 어떠한 무리도 일으키지 않는 개인적 종교의식의 실천이 아니었다. 종교를 개인적인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적-근대적 관념은 신비주의의 불꽃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전혀 다른 생명의 실재를 따라 자기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그 강렬한 불꽃을 말이다. "사랑은 개인적인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고 흔히 말하는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원시공동체는 제국주의의 억압과 특정한 사회의 공급을 거부했다.

금욕과 은둔, 반대와 항의와 저항의 기운이 이 소수가 공유하는 문화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후일 비국교도들도 주류 문화에 "아니오!"라고 말하 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으로 삼았다.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공동체성을 키워나가는 신비주의 역시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기쁨이라든지 행복, 신과의 연합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탈피하는 것이 신비주의가 하고자 하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수피 신비주의에 는 이런 말이 전해온다. "춤은 혼자 출 수가 없다. 한 손만 가지고는 손뼉을 칠 수 없다." 마이스터 엑크하르트가 쓴 글 중에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잘 나뉘어지는 존재", 즉 인간이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숨겨놓 을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은 나뉘어지기를 원하신다.

"전지구적 놀이꾼들"(global players)과 오락에 빠져있는 개인들이 엮어 내는 이 시대의 시나리오에서 그래도 희망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자발성과 비판의식과 자주적인 행동을 추구하는 '무리들'이다. 비정부단체(NGO)들 ―기독교 교회의 살아있는 지체들 역시 여기에 속한다 ―은 정치적인 면으로 보면 저항의 담지자들이며, 영적인 면에서 보면 소비주의의 감옥에 갇혀 잠들어 있는 자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자아를 구현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을 깨어있게 해주고 체념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을 신비주의적 요소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려는 무"라고 야콥 뵈메는 말했다. 세계적 시장 구조 속에서는 이 무의 존재를 알아차리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 걱정의 원인이다. 그 존재의 광휘는 점점 가리워지고 있으며 그 "고요 한 외침"은 점점 쇠잔해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되려는 무"는 다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그 존재만의 신비한 오기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그 신적인 것을 어떤 움직임으로, 어떤 흐르는 것, 자라나는 것, 몰아 쳐오는 것, 어떤 과정(process)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과정의 흐름을 함께한다면 모든 것이 서로 이어지는 신적인 운동의 한 부분이 될 것이 다.

만일 우리가 이 무의 운동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그 무와 함께 사는 것, 우리를 그 무에게 내맡기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가 늘 말 해오던 "無가 되기"(zunichte werden)이다. 신앙이 이렇게 허울을 벗어 버리고 단순한 모습으로 탈바꿈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 '나-없는, 소유-없는, 폭력-없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가운데서 모든 것이 되려고 하는 무로 나아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