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이야기로

하나님을 향한 여성신학적 조명

 

채수일(하이델베르크 대학, 한신대학교 총장)

 

죌레의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것은 아마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분의 뛰어난 문장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문학을 공부했고 또 시인으로서도 이름을 얻은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글에 힘이 넘치고 감동을 주면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무서운 정직성, 신학적 철저성, 현실에 굳게 뿌리내린 실천성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녀의 책이 그렇지만, 이번에 나온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정미현 역, 한들)도 '신론'을 중심으로 한 그의 철저한 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적'인 책은 아니다. 체계 잡힌, 논리적 엄격성을 지닌, 논쟁의 역사적 연구를 갖춘 책이 아니라 에세이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죌레 자신도 이 책을 학문적인 책으로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녀는 산업사회의 새로운 형태의 종교가 된 이른바 학문(Wissenschaft)이라는 것이 '전쟁을 막지 못했고, 살인의 능력을 오히려 개선했으며,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모든 자연과 모든 피조물을 겁탈하는 거대한 기계를 생산하였다'고 비판하면서 '학문하는 사람들이 봉사해야 할 세계에 대한 다른 접근, 다른 가치측정'(129쪽)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신학도 다른 접근을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노래'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죌레에게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노래'(16쪽)여야 한다. 신학의 역사, 신학적 지식을 신앙의 참여 없이 전달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신학이 어려운 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낯선 경험에 대한 경험 없는 진술을 하기 때문이다'는 오이겐 드레버만(Eugen Drewermann)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경험 없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지 않는 한 얼마나 우리의 신학적 진술이 진실할 수 있을까!

죌레의 이 책은 모두 9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각 장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근거로 일관되게 하나의 주제를 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도대체 어떠한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신은 가부장적으로 이해되었고 그런 신은 '전지', '전능', '편재하심'이라는 세 가지 절대성을 주장하는 지배자의 상으로 그려졌다(55쪽). 기독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전통을 지켜오면서 기독교는 권위주의적 종교로 변했다. 그러나 죌레는 여성신학의 논점에서 이런 권위주의적 종교의 '남근 숭배적 환상과 권력 숭배'에 성상 파괴적으로 맞선다. 놀랍게도 히브리 성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데 매우 신중함을 보인다. 히브리 성서에는 단지 약 스무 군데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다(22쪽). 아버지의 이름은 '호세아, 예레미야, 제 3 이사야의 예언서들과 예언적으로 이해된 새 창조의 미래의 상황 가운데서 등장한다'. 출애굽 전승과 창조 기사에서도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이신 하나님보다 먼저 등장한다.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 곧 '나는 나다'라고 계시한 사건은 '모든 신인동형론적 표상과 아버지의 모습을 포함한 모든 형상들의 해체를 의미한다'. 이런 경향은 복음서 전통에까지 이어진다. 복음의 핵심은 하늘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이 뒤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23쪽). 그렇다고 여성신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하는 것이 하나의 표현 방법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표현법이 강압적으로 유일한 표현법이 된다면 그런 상징은 하나님의 감옥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신다. 과정신학자들이 말하듯, '하나님은 하나님을 넘어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넘어서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특정한 언어에 감금되고, 특정한 정의로 규정된 그리고 특정한 사회 문화적 통제 형태를 갖고 있는 이름들로 알려진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다'(40쪽). 그렇다면 하나님을 비권위주의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없을까? 죌레는 자연에서 드러나는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말한다. '모든 선의 근원', '살아있는 바람', '생명의 물', '빛' 등의 표현은 권위나 힘, 국수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느낌 없이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상징들이라는 것이다. 또 죌레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위계질서적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이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신비주의를 제시한다. 이 신비주의는 무의식의 바다 속에 빠져 익사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해방을 갈망하는 것이다(56쪽).

죌레가 말하는 하나님은 고통받는 하나님이다. '욕구와 상처받기 쉬운 감정의 저편에 자리하여 스스로 자족하고 불변하며 영원한 하나님은 인간적 고뇌에 대하여 답하지 못하거나 단지 냉소적으로만 답할 수 있을 뿐이다'(83쪽). 죌레는 엘 살바도르의 현실로부터 신정론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무관심과 중립적 냉소주의와 연관되어 있는 제 1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신정론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신정론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되며 어떻게 하나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 가운데 드러나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82쪽). 죌레는 '고통 뒤에 이미 다시 기쁨을 보내며 비온 뒤에 해를 보내는 자동화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92쪽). 그러나 인간의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과 같은 것은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과 '세상의 슬픔'을 구분한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가져옵니다"(고후 7,10).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슬픔과 하나님의 슬픔을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의 고난이 단순히 고난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난이 기쁨을 향하여 있을 때, 또한 그 기쁨에 의하여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을 때이다. '기쁨과 고통의 모순적인 조화'와 이런 역설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출산에서 그것을 경험한다. 한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킨다'는 것은 삶의 신비에 가장 가깝게 이르는 근원적인 체험이며, 창조의 위대한 경험이다(93쪽).

죌레는 우리가 세상의 슬픔을 지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슬픔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픔을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내가 야기했으나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대하여' 민감해지는 것(94쪽),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자의적으로 참여하여 고난을 받는 것(95쪽)을 의미한다. 자의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정화하고 화해하고 구원하는 힘을 지녔다.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운동을 이끌면서 그런 고난의 힘을 믿은 사람들이다. 타인의 고난에 자의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난은 연대적 고난이 되고, 그들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의 일부가 된다. 고난은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고난은 개인의 자아완성이라는 교육적 목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고난은 우리가 생명체에 서로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연대적 고난을 기쁨으로 자의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부장적이고 남근숭배적이고 위계질서적인 신론에 대한 죌레의 비판은 이른바 '위로부터의 그리스로론'에도 적용된다.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알 수 있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천상적 존재',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슈퍼맨과 같은 아주 다른 존재, 천상적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는 천상의 존재가 베들레헴에 잠깐 내려와 소풍 온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를 불멸의 전능자로서 신적인 존재로만 보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가현론'으로 귀결된다(102쪽). 그러나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는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그의 신적 의식을 자신을 무엇인가 더 나은 존재로 여기거나 섬김을 받기 위함이나 스스로 앞에 나서는데 사용하지 않았다'(105쪽).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는 갑자기 암이나 핵무기를 퇴치하는 초자연적 영웅'이 아니라 '상처받은 치유자'이시다(107쪽). 이런 그리스도론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죌레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죌레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특정한 의미에서 집단성을 표현한다'고 말한다(108쪽): '나사렛의 예수가 죽기까지 고문당한 갈릴리의 가난한 남자였다면,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세상에 왔으나 우리를 통해 그 안에 살아있는 죽일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말한다면 나는 언제나 아씨시의 프란시스와 빙엔의 힐데가르트, 마르틴 루터 킹과 엘 살바도르에서 살해된 미국 수녀 이타 포드와 오늘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리스도란 나에게 연대성, 즉 함께 고난 당하고 함께 싸우는 것을 표현하는 한 이름이다'(108쪽). 그리스도론이 법적 개념으로서, 인격 개념으로서만 이해되어온 전통에서 그리스도를 집단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낯설지만 새로운 것이 아니다. 민중신학도 그리스도 사건을 민중사건과의 연대성 안에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로서의 역사적 예수가 상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들의 총체, 집단적 인격을 반영할 뿐이다. 이로서 죌레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개인적 인격과 결부시키는데서 오는 협소함(계시 일원주의) 혹은 위험성(정치적 메시야니즘)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죌레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죌레가 책에서보다 직접 만났을 때, 비록 그녀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라도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신학자'임을 경험했을 것이다. 작고 마른 체구, 깊이 패인 주름과 가늘게 뜬 눈,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면서 솔직하고 천천히 말하는 태도에서 나는 우리 시대가 이런 신학자를 가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한 정미현 박사에게도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