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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전도시대


내가 40세 되던 해 봄에 신학을 연구하러 일본에 건너갔었다. 그리하여 일본 신학 연구과에 입학하여 놓고도 영혼 구원에 불타서 거기서도 우리 동포들의 교회와 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하였다.

동경(東京), 대판(大阪), 풍교(豊橋), 신도(新島), 광도(廣島) 등 각 곳으로 다니며 집회를 하였다. 상근성회, 유마성회 등에 참석하여 나의 간증과 독창으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방수원 목사의 주선으로 나의 독창 몇 가지를 레코드 취입하였었다. 그것은 "인생 허사가", "하나님은 사랑이라", "나의 기쁨 나의 소망",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이었는데 대단한 인기였으며 많이 팔렸다.

동경 성결교회에서 집회하고 그 교회의 정 목사가 한국에 나오게 됨으로 그 교회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몇 달간 강단을 지켜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해가 되어 내가 지방 회장과 결탁하여 자기를 내몰았다는 원망을 들었다. 그러나 범사가 주께로부터 오는 줄 알아서 감사히 받을 뿐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그는 후에 잘 이해가 되어 다시 본 단체로 돌아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마귀들은 항상 이간을 붙여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횡빈(橫濱)에서 집회할 때였다. 그 교회 정씨라는 사람이 회개하며 애통하기를 "내가 주님의 가슴을 오랫 동안 아프시게 하여 드렸으니 내 자식이 내 가슴 아프게 하는 것 당연한 일이지요"라고 말했다.

왜 그러냐고 하니 그의 말이 자기는 일찍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잘 봉사하여 왔는데 일본에 와서 사업에 치중하고 돈벌이에 눈이 멀어 주님을 배반하였다는 것이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놈을 대학까지 졸업시켜 공장을 하나 차려 주었더니 그만 실패하여 두 내외가 야간 도주를 하였다는 것이다. 정씨는 하루 아침에 돈 잃고 자식 잃어 비관하며 밤낮 술만 먹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불면증으로 인해 신경쇠약까지 걸려 있었는데 나의 집회에서 "하나님의 칼날을 보라"고 외치는 것을 듣고 영의 눈이 밝아지고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칼날을 보고 회개하고 주께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집회 기간에 아들로부터 멀리 한국땅 평양에서 편지가 왔던 것이다. 불효 자식을 용서하여 달라는 탕자의 회개와 같은 편지를 받은 정씨는 너무나 기뻐서 "내가 주께로 돌아오니 내 자식도 내게로 돌아옵니다"고 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은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 예수 잘 믿고 지금은 부산 동래 성결교회 장로로, 남성고교 교장으로 오랫동안 교육계에 이바지한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그 후 내가 임시로 강단을 맡아보던 동경교회는 김태일 목사가 부임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맡기고 나는 공부도 중도에 그만두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부흥회만 하고 다녔다. 그랬더니 교단 이사회에서 청천 벽력이 또 내리었다. "너는 왜 공부하러 간다고 하더니 공부는 안하고 부흥회만 다니고 이제 또 돌아와서도 명하지도 않은 부홍회를 다니냐? 이제는 휴직 만기가 됐으니 어느 교회든 맡아서 목회를 하든지 그렇지 않고 부흥회를 하려면 이 교단에서 나가 자유로 하라"는 권고 사직장이 온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큰 시험이 왔다. 장로교회에서 오라고 대환영이었던 것이다. 감리교에서도 돌아오라고 대환영이었다. 성결교 작은 교단에서 인간의 야심과 시기심으로 가득 차 사람을 헐뜯는 것을 생각할 때 차라리 자유롭게 나아가 전도하는 것이 낫지 않으랴 이러한 마음과 함께 사직서를 몇 번이나 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것이 주님의 뜻인지 몰라서 기도하고 또 다시 기도하다가 나의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의논하였다. 아내는 사직하지 말고 순종하자고 하였다.

일단 주께 헌신하고 목사 안수받을 때에 본 단체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 것이 아니냐며 거짓 맹세하지 말 것과 또한 나를 수양시켜 준 은혜를 행여 배은 망덕하지나 않을까 두렵다는 아내의 말에 그대로 본 교단에 있기로 결심하고 총회장을 찾아가서 순종하겠다고 말하고 대신에 목회할 곳을 만주로 정해 달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일본인의 압박이 점점 심하여지고 신사 참배를 강권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만주로 보내 달라고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