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만주 전도 시대

 

만주 봉천 중앙교회에 목사로 임명받아 1941년에 이국땅 만주로 식구들을 거느리고 건너갔었다. 그리고 김광준 목사가 예배당을 짓다가 준공하지 못한 그 교회에 들어가 결사적으로 활동할 때 반년도 채 못되어 교회는 부흥되고 미완성이었던 예배당도 완전히 준공하였던 것이다.

또한 청신 성경 학생을 모집하여 매일 새벽 백여 명이 모여 은혜가 넘치는 새벽 기도회를 보았다.

해방 후 그 교회에서 교역자가 많이 나왔는데, 조병두, 김성추, 박원준, 박관빈, 김덕진 외에 여전도사들도 많이 나왔다. 또한 북능에 신개척 교회를 세워 정운학 목사를 그곳에 들어오게 하였다.

정운학 목사는 일찍이 나와 목포에서 인연 맺은 형제로서 그 당시에 일본서 구원받고 한국에 와서 강정식(내가 수원 있을 때 구원받은 처녀)과 결혼하였으나 정식이는 그만 죽고 집에서는 핍박이 심하여 아버지가 죽이려고까지 하니 할 수 없이 또 일본으로 도망가던 중 부인이 전에 항상 내 이야기하던 것을 기억하고 목포에 찾아와서 서로 알게 되었다. 일본 가려던 일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 있으면서 성전 문지기 노릇하며 나의 신앙의 동지가 되었고, 후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그는 13년간이나 나의 신앙과 전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만주에 와서 북능에다가 신개척을 하고 합력하여 벽돌 예배당 80여 평을 짓고 내가 그의 집에 유하면서 만주 각지에 순회 부흥을 하게 되었다.

내가 목회하던 중앙교회는 김홍순 목사에게 맡기고 나의 식구들은 고향으로 보내고 나 홀로 오 년간을 동만, 남만, 북만, 방방곡곡에 교회를 찾아 유리하는 우리 동포를 찾아 전도하였다.

우리 동포들은 살 길 찾아 남부 여대하고 만주에 가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그래도 곳곳마다 교회를 세워 여러 교파 교회가 모두 사백여 교회나 되었다. 만주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동아기독교, 조선기독교 5교파가 합동하여 만주 조선기독교라 하고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일하였다.

나는 정치에는 간섭하지 아니하고 그저 순복음을 가는 곳마다 전하였다. 그래서 죽은 심령이 살아나고 병든 자가 구원받으며 고국에서 잘 믿던 자 중에 만주에 들어와 신앙 타락한 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때 은혜받고 교역자 된 이가 많고 지금 각처에서 많이 활동을 하고 있다.

특별히 이때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로서 교통이 어찌 불편한 지 전도다니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많았다. 잊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신징(新京)서 하얼빈으로 집회가던 일이었다. 신징서 점심 먹고 밤차를 타기 위해 차표 사러 오후 네 시에 나가 보니 벌써 아침부터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줄지어 서 있었다. 그만 밤 열시 차를 못 탔고, 그 자리를 잃으면 내일 아침 차도 탈 수 없어서 그날 밤 철야로 시멘트 바닥에 그 추운 11월말 타월수건을 깔고 가방을 베개하고 중국 사람들 틈에 끼어 새우잠을 자려니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몸은 꽁꽁 얼어 들어오고 중국 사람에게서 보리알 같은 이가 기어 올라왔다.

야곱이 돌베개하고 광야에서 자듯 거기서 나는 많은 은혜를 받았다. 이튿날 조반도 먹지 못하고 오전 열시 차를 겨우 얻어 탔으나 너무 사람이 많아 꼼짝할 수가 없어 가방을 들고 콩나물 시루같이 좁은 곳에 끼어 종일 서서 열 시간을 달려갔다.

저녁 9시에 하얼빈에 내리니 어떻게 추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마차를 타고 교회로 달려가니 신자들은 만원으로 교회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터라 어제 저녁부터 오늘 종일 자연 금식하고 언 몸으로 강단에 서니 입이 얼어붙어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결사적으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외치고 방에 들어가 쓰러졌다.

얼마 후에 정신을 차려 음식을 먹고 밤을 지내니 새 힘을 얻어 그 집회는 참으로 승리로웠다. 어느 집회나 어려운 일 당한 대로 족한 은혜를 주신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이 없고,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는 것이다. 따르는 기사와 이적으로 복음을 많이 전하게 되었다.

동만 목단강(牧丹江)에서의 여러 집회는 승리로웠다. 계창주 목사 때이다. 또한 목단강 지나가 목사라는 곳에서 집회할 때 우리 어머니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 듣고 기도하는 중에 한참 싸웠다.

생전의 어머니를 뵈오려 가자니 불일듯 일어나는 집회를 내버리고, 굶주리고 목말라 허덕이는 양떼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아니 가자니 불효 막심하고 어떻게 할까? 그러나 "전쟁에 나간 사람이 부모 병들었다고 돌아갈 수 있느냐?" 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렸다.

나는 영전에 나선 그리스도의 정병이요 복음의 결사대로서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사사로운 일에 매일 수 없어 그저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그냥 집회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어머니 별세의 부고가 왔다. 집회 마치는 날 밤차로 가니 삼 일이나 걸렸다. 집에 가니 방금 어제 장례를 지냈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정운학 목사가 봉천(봉천)에서 나와 아들 노릇을 대신했다.

무덤에 찾아가서 기도하고 수고한 분들을 위로하고 다시 집회를 위하여 그 이튿날 떠나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 별세하실 때 천사가 와서 가잔다고 하시면서 고요히 운명하시었다고 한다. 아들인 나를 부를 것이냐 하니 그럴 것 없다며 천국 가서 만날 것이라고 하셨단다. 내 아내가 가서 임종을 맞았다.

별세하기 몇 달 전에 집에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어머니께서는 "아마 나는 금년에 가려는가 보다. 천국 고향이 그립구나" 하시며 "그리운 내 고향'이란 제목으로 노래를 지어 작곡까지 하시고는 날더러 배우라고 하셨다.

노인의 찬미가 변변치 않게 보여서 두어 번 받아 불러보다가 바쁜 일이 있어 그만 다 배우지 못하고 만주로 갔는데, 이번에 갔다 돌아와서 어머니 보시던 성경을 찾아보니 그 노래를 써놓고 가셨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리운 내 고향

 

1. 하늘나라 우리집 보석성의 내 집은

영원 무궁하도록 낡아짐이 없으며

영원 무궁하도록 낡아짐이 없도다

 

2. 보석성의 우리집 해와 달과 등불이

비취임이 없어도 항상 밝은 곳일세

비취임이 없어도 항상 밝은 곳일세

 

3. 하늘나라 내 집은 먹을 예비 안 해도

열두 종류 다달이 열매맺어 주도다

열두 종류 다달이 열매맺어 주도다

 

4. 보석성의 내 집은 의복 준비 안 해도

세마포와 흰옷이 무궁 무진하도다

세마포와 횐옷이 무궁 무진하도다

 

5. 하늘나라 성도들 우리 임군 우리 주

영원 무궁하도록 경배 찬양하도다

영원 무궁하도록 경배 찬양하도다.

 

어머니 생각이 나면 글 이 노래를 부르고 각처 집회 때마다 이 노래로 우리 어머니의 신앙을 소개하여 직접 간접으로 효과가 적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평양노회 집회

평양교회에서는 남신, 신양, 서성, 유정, 서평양, 기림, 동평양 등 수십 집회를 인도했다. 그런데 집회 때마다 크신 승리로 주께 영광을 돌렸다.

그 중에도 평양, 강서, 안주 3노회 연합 주최로 숭실 대강당에서 대집회를 열 때에 특별한 영광이 나타났다. 대동아 전쟁이 극도에 달하니 방공 연습이 심하여 저녁 여섯 시에 시작했고 또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모이는 데 지장이 많았지만 그 큰 강당이 늘 초만원이니 성령의 역사인 줄 믿는다.

그때 큰 사실은 최경자라는 자매가 새벽기도하고는 평양 경찰서에 뛰어가서 살인죄를 회개한 것이다. 이 최경자는 한국인으로 일본 사람의 양자 된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아이 셋을 낳았는데 얼마 안 있어 남편이 죽고 또 아들이 죽었다.

그래서 딸 둘을 데리고 친정에 오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갈라져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얻고 어머니도 다른 남자와 산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그래도 어머니 정이 있어서 어머니를 찾아갔더니 구박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세상을 비관하고 난 지 몇달 되지 않은 작은 딸을 손으로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이불을 씌워 죽여 묻어버리고 세 살 난 딸을 데리고 동해 앞 바다에 가서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때 어린 딸이 어머니 가슴에 매달려 "어머니 살자, 어머니 살자" 소리를 내어 우니, 멀리서 고기 잡던 어부가 "그거 무슨 소리냐? "고 소리를 질러 그만 죽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하여 평양에 와서 어느 선교사네 집에 식모로 있으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딸 죽인 죄를 숨겨 두니 항상 평안함이 없이 지내다가 그 집회 때 견딜 수 없어 경찰에 자수를 하여 신문에 나고 경찰들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

후에 함흥 검사국으로 넘어가 검사국에서 조사해 보니 사실이었다. 그러나 온 법관들이 신기한 일이라고 동정하여 일 개월간 유치장에 있다가 삼 년 집행유예로 석방되어 나와서 지금까지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잘 지낸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때 평양 집회는 최고 기록이었다.

그때 어느 목사가 자기 교회 집회 청원을 하면서 형사부장을 초대하는데 나도 같이 참석하였다. 점심 같이 먹는 것은 관계치 않을 듯했으나 점심 후에 나가면서 그 목사는 담배 한 갑을 형사 양복 주머니에 넣어 주고 "요로시꾸 다노무"(잘 부탁한다)라고 하며 눈을 깜박한다.

그것을 볼 때에 나의 몸은 떨렸다. "아, 이거 큰일났구나.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을까?" 하고 그 목사를 따라 집에 들어가서 책망하였다. "목사넘, 나는 당신 교회 집회 못하겠소" "왜 그러십니까? " "왜라니 ? 오늘 목사님 손으로 담배 사서 형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오? 아주 떨어지면 그렇게까지 되겠소 강단에서 술과 담배를 먹지 말라고 외치면서 목사가 담배를 사서 주다니 웬말이오?" 하니 그 목사는 당황하면서 "목사인 낸들 왜 모르겠소 나는 이미 몸을 더럽혔습니다. 나는 지옥으로 가더라도 저 목마르고 굻주린 양떼들, 잠깐이라도 집회하여 기갈을 면케 하려는 정신에서 수단을 부린 것뿐입니다"라고 했다.

물론 동정도 할 만하다. 마치 어떤 과부가 아이들은 굶주리고 헐벗었으니 차라리 양갈보 노릇이라도 해서 저것들을 살려야겠다는 정신과 같이 그 모성애도 가긍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일이다. 교회와 신자는 하나님의 것이니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기르면 전부 음행의 자식을 낳는 것뿐이니 안 된다.

"차라리 교회를 헤쳐 버리고 목사 노릇을 그만두더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고 피차 울면서 기도하고 작별하였다. 그후 그 목사는 공산당 시대에 힘써 싸우다가 순교당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은 강해 보이면서도 약하다. 나도 어떤 데서는 강하였지만 오십보 백보지 신앙의 참 정조를 다 지키지 못한 숨은 부끄럼이 적지 않다. 그러나 강간을 당한 것과 화간이 다른 줄 안다.

마음에는 없지만 영과 육이 약하여 순결한 처녀가 무인지경에서 악한을 만나 강제로 정조를 잃은 것은 용서하려니와 자기가 자진하여 명예와 금전에 유혹되어 범죄한 것은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강간인지 화간인지는 주께서만 그 심정을 심판하시지 사람은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국에는 아니 나오겠다고 만주로 들어갔지만 또한 황해도 황주와 사리원에서 너무 간절히 집회 청원을 하였다. 그런데 반드시 나가면 어려운 일 당할 것이 예감되었다.

그러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란 성자가 쓴 책자를 읽다가, 십자가가 올 때에 자진하여 그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가 너를 져다가 원하는 곳에 갔다 주지만 오는 십자가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면 그곳에는 더 큰 십자가가 있느니라 하는 말씀이 내게 부딪혔다. 옳다. 그 십자가를 져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국으로 나와 황주 던모루라는 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어느 날 새벽에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저주를 받으리라. 주께서 강림하시느니라"는 제목으로 "예수 다시 오신다. 자연계의 징조를 보아라. 국제와 사회 징조를 보아라. 인심의 징조를 보아라. 교회 상태를 보아라.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보아라(그때는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전이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민족이 다 망한다"도 설교하였다.

그때 나를 어려서부터 사랑하던 송세영 장로가 거기까지 따라 와서 은혜를 받고는 그 말씀을 공책에다 기록해 가지고 사리원 집회에 또 따라오다가 정거장에서 잡혔다.

사리원 경찰서에 있는 호시(星)란 형사부장은 기독교를 미워하고 목사들을 많이 괴롭게 한 자였다.

"너 이 설교를 어디서 들었느냐?" 하니 "이성봉 목사한테 들었다"고 하였고 "그 이 목사 지금 어디 있느냐?" 하니 "사리원 감리교회에 와서 집회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놈을 잡아 오라 하여 부흥회 닷새만에 사리원 경찰서에 검속(檢束)되었다.

"너 이 설교 황주에서 한 것이냐?" 한다. 보니 나의 설교다. 그렇다고 하니 "너 어찌하여 이 시대에 이런 설교를 했느냐? " 내 대답은 "나야 예수 믿는 사람'이오 그것을 전하는 것이 내 사명이니 전한 것이 아니냐"였다. "이 자식아, 만주에서나 그런 소리하지 우리 나라에 와서 왜 하느냐? 콩밥 좀 먹어 보아라. 나는 여지껏 너를 만나보려고 하던 차였다" 하고 팬티까지 발가벗겨 추운 마룻바닥에 잠을 재우며 갖은 모욕을 다 주고 십삼 일 만에 검사국으로 넘긴다. 그러나 발가벗고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바라볼 때 오히려 감사하였다.

사람의 사랑은 그림자 같다더니 내가 어두운 감방에 들어가니 그렇게 많던 사람의 사랑은 다 떠나고 말더라. 그때 누군가 인단 한 봉지와 휴지 한 뭉치 보내준 것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가 옥에 있을 때 누가 와서 보았던고! 그러나 나는 기도와 찬송, 전도, 금식으로 승리하였다. 나로 인하여 여러 교회에서 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니 유치장이 좁아서 여관에다 가두고 취조하였다. 농수골 이환수 목사 이하 장로 집사들도 많이 걸렸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기도만 하였다. 이상한 일은 호시부장은 나를 검사국에 넘겨 놓고 발진 티푸스란 전염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열이 올라 정신을 잃고 "아이고 예수쟁이, 아이고 예수쟁이" 하며 발광하다가 일개월 만에 죽었다. 또한 다른 부장이 대리로 와서 일하다가 또 죽었다. 5일 만에 경찰서 서장이 또 죽었다.

이렇게 같은 서에서 일하던 세 사람이 연달아 죽었다. 나는 그때 울었다. 그들의 영혼이 불쌍하여 울고 또한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공의로 심판하심을 체험하니 감격할 뿐이었다.

그런데 검사도 기소를 못한다. 알고 보니 그도 건성 늑막염이 들었다. 또한 검사 마누라가 병들고 검사 장모가 병들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자기도 떨떨했던지 6개월만에 기소 유예를 하여 놓아주었다.

나는 검사국 유치장에서 밤낮 기도하기를 "언제나 자유롭게 이 큰 사실을 증거하리이까? " 하였다. 또 그대로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러던 중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한 달만에 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모 감리교 신자네 뒷방에서 임시로 살림하면서 보석 중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 교회로 또한 어떤 가정에 신자들을 비밀로 모아 놓고 성경을 강의하며 기도로 매일 지내게 되었다.

또한 주일이면 그냥 지낼 수 없어 비밀로 토요일은 변장을 하고 이전에 부흥 집회하여 인연을 맺었던 교회, 교회를 찾아 야미(비밀) 설교를 하려니 참으로 결사적이었다.

그 일은 모든 교회와 목사들을 시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어느 교회에 가면 너무 기뻐서 절대 환영하고 예배를 드려 굶주렸던 모든 심령들은 만족한 은혜를 받고 감사하지만 어느 교회에 가면 자기들에게 화가 미칠까 하여 벌벌 떨며 돌아가기를 원한다.

한번은 평양 대동강의 베기섬이란 곳에 갔더니(그 전에 부흥회 때 은혜 많이 내린 곳이다) 목사가 벌벌 떨면서 환영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내일 주일 강단에 세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의 먼지까지 떨어버리고 그곳을 떠나 각금리란 교회에 갔더니 그곳은 대환영이라 주일 낮과 밤 두 집회 때에 크신 은혜를 내렸다.

후에 베기섬 신자들이 그것을 알고 자기 목사를 원망했다. 목사는 입장이 대단히 곤란한 중에 깨닫고 그 후 해방되어 공산당 시대에 굳세게 싸우다가 순교하였다 한다. 베드로는 죽어도 주와 같이 죽고 옥에도 같이 가겠다고 하였으나 불과 몇 시간 안 되어 닭 울기 전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한 것과 같이 오늘 우리도 그러한 일이 많다.

그래도 주께서는 항상 나와 같이하사 금족(禁足) 중에도 계속 전도하게 하심을 감사한다. 도둑질해 먹는 불이 더 달다고 그 어려운 중에서 비밀로 전하니 나도 은혜가 더 되고 받아 먹는 사람도 은혜가 더 되어 그런 재미는 평상시에는 전혀 맛보지 못한 것이었다.

6개월만에 기소 유예가 되어 다시 만주로 들어가 계속하여 그리웠던 저들을 찾아 집회할 때, 베드로가 옥중에서 나와 모든 신도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된 것처럼 나의 산 간증은 과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저들에게 알려 주었으며 오래지 않아 일본이 망할 것을 확실히 알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