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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성결교 재건 운동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감격은 만주 무순(무순)교회에서 맞이하였다. 어떻게 감사한지 꿈인가 생시인가 그날 노래를 지어 온 교회와 함께 불렀다.

 

해방 기념 노래

1. 할렐루야 우리 동포들아 하나님 찬양해

오묘하신 섭리로 우리 나라 해방돼

대한 독립되었네 만세 만세 만만세

만민들아 함께 모여 와서 주의 영광 보아라

2. 할렐루야 세계 만민들아 여호와 찬양해

신실하신 그대로 공의 칼을 가지고

권세 위엄 베푸사 교만한 자 물리고

이방신을 때려 부쉈으니 할렐루야 즐겁다

3. 할렐루야 우리 성도들아 우리 주 찬양해

말씀하신 그대로 무한 자비 베푸사

크신 능력 가지고 원수 마귀 박멸코

자유 평화 내려주셨으니 할렐루야 즐겁다

4. 할렐루야 백의 동포들아 네 사명 중하다

주신 은혜 감사해 분골 쇄신되도록

몸과 맘을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같이 사람 사랑함을 잊지 말지어다.

 

그때 고국에 돌아가는 물결 같은 백성들과 예배당의 안과 밖에 쌓이고 쌓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무수하였다. 계속하여 맡은 집회를 마치니 무너진 곳을 수복하라는 영음이 들려왔다.

성결교회는 왜정 말년에 일본 성결교회와 함께 재림 말세 교리 고조로 단체적으로 해산당하고 목사와 전도사들은 다 검속되어 시련 중에 배반한 자도 있고 겉으로는 항복하고 속으로는 믿음가지고 나가는 자도 있고 끝까지 싸워 순교한 자도 생겼다.

예배당은 다 팔아 나눠 먹으면서 싸움한 자도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데 그 옷을 벗겨 제비를 뽑은 로마 병정들과 같은 현상을 현재에도 보았다. 알곡인지 쭉정인지는 까불러 봐야 알 것이며 선한 목자인지 삯꾼인지는 이리가 와 봐야 아는 것이다.

1945년 9월 15일에 귀국하게 되었다.

첫째는 무너진 곳을 다시 수복하라는 주님의 영음이요, 둘째는 만주에는 앞으로 다시 어려운 일이 생길 것을 예감하였기 때문이다.

해방되자 목사들이 정치 운동한다고 예배당에서 정당을 조직하고 신자 비신자가 섞여서 야단을 했다. 내가 그 목사에게 충고했더니 나를 무식한 자라고 공격한다. 우리 기독교인이 찾은 나라니 우리가 지배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는 며칠 안되어 쫓겨나서 지금은 남한에 내려와 교역을 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나는 이거 또 큰일났구나. 또 매를 맞게 생겼구나" 하고 조용히 그들과 작별하고 특별히 정운학 목사와 같이 가자고 하니 그는 양떼와 교회를 내버리고 다 나가면 어찌하겠느냐고 남은 교회들을 지키겠다고 한다. 그만 섭섭히 작별하고 나 흘로 빈 몸으로 성경 한 권 손에 들고 입은 채로 피난민들과 함께 어려운 차를 타고 겨우 신의주에 왔다.

전에 내가 건축한 성결교회는 귀국하는 피난민으로 꽉 들어찼다. 황해도, 평안남북도에 있는 교역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재건 부흥 집회를 하고 각처에 무너진 제단을 다시 찾으니 곳곳에서 부흥이 일어났다.

또한 굶주리고 목마르고 왜정 시대에 눌렸던 모든 심령들은 기쁨에 넘쳐 가는 곳마다 불길이 일어났다. 그때 정건익 장로는 신천교회 장로였는데 항상 나의 집회를 도왔고 내 이름을 가지고 글을 지어주고 봉사하더니 후에 공산당에게 순교당하였다.

많은 무리들이 벌떼같이 돌아왔다. 그러나 38선이 막히고 점점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며 교회를 은근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유 세계로 나가야겠다 하는 중에 서울서 성결교단이 재건되었으며 나의 월남을 고대한다고 했다.

그래서 1946년 3월에 38선을 밤중에 넘었다. 그 후 소식을 들으니 내가 떠나온 후에 공산당들이 나를 찾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항상 앞서가시면서 어려운 일 당할 것을 피하게 하시고 또한 당해도 이길 능력 주심을 체험케 됨을 믿는 자만이 알게 되는 것이다.

오는 길에 연안, 배천 등지에서 계속 집회하였다. 특히 서성감리교 집회시 차몽구라는 사람이 은혜받고 지금은 성결 교단의 유력한 목사가 되었다.

오래간만에 남으로 와 보니 각처에 무너진 제단을 재건하느라고 선후배 여러 목사들이 악전 고투들을 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신학교 재건에 나를 이사장으로 선택을 하였으나 아무래도 사무와 행정은 내게 불합하였다. 그래서 한 일 년간 도와주고는 사면하였다.

그리고는 곳곳으로 흩어진 양떼를 다시 모아들이고 물러간 교역자들을 불러내어 새 힘 얻어 일하게 하고 이리저리 팔아 없앤 교회당들을 3-4년 동안에 다시 찾아 복구하느라고 내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

특별히 잊지 못할 사실은, 강원도에서는 예배당을 개인 손에서 아직 찾지 못하고 교회도 재건이 되지 못하였다 하여 1948년 여름 한더위에 마침 찾아갔던 일이다. 오대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 신학생 이성민과 임동선 두 사람을 만나 손을 잡고 재건 집회를 하였다.

장소가 없어 그 전 교회당을 찾아 다시 예배당을 돌려 달라하니 본값을 주면 주겠다 했다. 그도 그렇게 허락하게 된 동기는 처음에 그 집 산 사람이 자동차 사고로 횡사하고 또 그 집을 다시 산 사람이 병들어 오래 신음하니 자기는 예배당을 개인 살림집으로 만들어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기로 약속했으나 돈도 한 푼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예배당 마당에 차일을 치고 집회를 시작하였는데 비가 쏟아져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신자네 방앗간에 가서 집회를 하고 다음에는 누에고치 말리는 건견장을 얻어 며칠 집회하는 중 다른 교파 신자들이 모여들어 은혜를 받아 너도 나도 옷을 벗어 바치고, 시계를 바치고, 금반지를 바쳤다. 이렇게 헌금을 바쳐 그 집을 도로 찾아 성결교회 간판을 다시 붙이게 되었다.

여리고에서 불한당 만난 사람을 사마리아인이 구원한 것처럼 불한당 만난 성결교회를 뜻밖의 사람들이 구원함을 보았다. 그 집회에 장로교 청년들이 많이 와서 은혜를 받는 중 한의신이란 청년이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자기 시계를 바치더니 그 후에 우리 서울신학교에 와서 졸업하고 지금은 유명한 목사로 미아리 교회에서 목회 중이다.

또 그때에 본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던 이 전도사(부인)가 이백여 리 밖에 자기 동생집에 가 있는 것을 임동선 목사가 대관령을 넘어 도보로 가서 그 더위에 모시고 왔다. 그것을 보고 임동선의 장래를 유망하게 보고 기도하였다.

후에 과연 정오의 햇빛처럼 점점 빛나 각 교회에 큰 부흥사가 되고 후계자가 됨을 감사한다. 그때 같이 일한 이성민 목사도 충남 지방에 유력한 목사로 지방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고는 계속하여 초교파적으로 농촌, 산촌, 도서, 도회지 방방곡곡을 계속 순회하면서 부흥 사명에 충성을 하였다.

좌우간 1년에 최고 기록은 82군데의 교회를 부흥한 것이었다. 한 교회에서 5일, 4일, 3일을 하되 하부에 세 번씩 새벽기도, 낮 사경회, 밤 전도강연을 하루도 쉬임 없이 계속 집회하나 주께서 시간시간 새 힘을 주셔서 어느 교회나 어느 집회나 항상 승리케 하셨음을 감사한다.

천막 대집회에는 무려 만여 명의 회중에게 설교를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불과 십여 명 내외의 집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숫자가 적다고 낙망하지 않았다. 주님도 어느 때는 수만 수천 군중에게 설교를 하였으나 어느 때는 소수의 12제자 혹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에게 또 어떤 때는 니고데모 한 사람을 가지고 밤새도록 가르치시고 어느 때는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을 종일 우물가에서 가르치심을 생각할 때에 사람이 많고 적음에 전도자가 좌우될 것이 아님을 알았다.

신유의 이적

성결교회 4중 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지하고, 그대로 체험하고, 그대로 전함을 나의 사명으로 알았다.

그래서 신유의 체험을 많이 하였다. 본시 나 자신이 폐디스토마로 오래 고생하여 어릴 때 별명이 깔다귀였다. 신학공부 할 때에도 몸이 심히 쇠약하고 수원서 교역할 때에도 쇠약하여 몇 달 휴양하는 중 주야에 기도로 나음을 얻고 복막염에서도 나음을 얻었는데 그때부터 나의 몸은 22관까지 나가는 뚱뚱보가 되었다.

특별히 황해도 송화읍 무초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화단이 일어나 머리부터 전신이 붓고 열이 과하여 집회를 중지하게 되었으나 나는 입으로 설교 못하면 죽음으로 하리라고 그 고열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나아가 서서는 설교 못하고 그만 앉아서 한시간 반을 설교하면서 땀을 냈다. 사람들은 개가죽을 뒤집어쓰고 땀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만두어라. 하나님의 종이 개가죽을 쓰다니, 나는 어린양 예수를 옷 입듯 하였다" 하고 참고 기도할 때에 신기 이적이 나타나 그 밤으로 거짓말같이 나아서 그 집회를 승리로 마쳤다.

그 병나는 이유 한 가지는 송화읍 집회를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래도 그 양떼를 생각하여 병이 채 낫지 않은 상태에서 집회를 하는 중에 30년 동안 집사끼리 서로 감추고 말하지 않고 있다가 그 집회에서 서로 붙들고 회개하고 화목잔치를 굉장하게 차려 잘 대접받았다.

그러나 경찰에서 신사 참배 갔다 오지 않으면 집회를 중지시키겠다 하여 많이 기도하는 중에 불가불 신사 망하라고 기도하자고 몇 신자를 따라 올라가 기도하였으나 나는 처녀가 강간을 당한 후에 눈물 흘려 애통하는 맘으로 돌아왔다.

이사야 26장 13절로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집회를 못하고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신앙의 정조를 굳게 지켰더라면 주님은 더욱 기뻐하셨을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한다 할지라도 남의 인도자로서 좀더 강하지 못한 것을 항상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나는 또 맹장염에서도 구원받았다. 그 후 해남에서 부흥회 하다가 맹장염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집회를 결사적으로 하였다. 너무도 고통을 당하니 송의사(공의)가 와 보고는 급성 맹장염인데 24시간 안에 수술을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수술하지 않으면 어찌되냐고 물으니 의사 말은 죽든지 병신 되든지 한다고 했다.

"아이고 그만두소 나 죽으면 하나님 손해 나지 나 손해 나겠소? 그만 이대로 주님께 맡길랍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그 의사는 집에 가서 탄식하였다. "별난 목사 다 보았네. 왜 일부러 죽으려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나 나는 결사적으로 기도만 했는데 그날 밤 너무도 고통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침에 이상하게 씻은 듯 나음을 주시었다. 그 병중에 노래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라

1. 소자야 소자야 안심하고 나를 보라

고요히 잠잠히 바라보라 나는 네 구주라

2. 네 병에 고통이 심해도 나를 보라

십자가 쓴 잔의 한 모금 영원한 생명수

3. 내 주여 뜻대로 합소서 믿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리

너는 나를 앙망하고 구원을 받으라

환난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후렴)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시니

믿음에 굳게 서 굳게 서 나를 앙망하라

 

해남은 오래 전에 인연이었던 목포 근방이어서 다시 목포로 가서 복음의 자녀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하나님께서 북교동에 오막살이 초가 삼간을 주시어 거기 머무르면서 각처에 다시 부흥회를 계속하였다.

최병인을 통해 동명동 교회를 세웠다. 나의 사위 정승일 전도사가 목포교회를 담임하여 내려와서 온 식구들을 한데로 모으고 나는 계속 집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