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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동란 때

 

특별히 오래 전부터 인연 있던 유재현 목사와 삼각산에 "임마누엘 기도원"을 설립하고 나는 "임마누엘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문서 전도에도 힘썼다.

그리고 1950년 6월 14일부터 일주일 간 전국의 신앙 동지 3백여 명이 모여 개원 집회를 승리롭게 마치고 나는 서울 충청 장로교회 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6·25를 만나게 되었다. 26일까지 집회를 마치고 27일에 목포로 내려오니 유재현 목사는 기도원에서 많은 신자들과 계속 집회하다가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됐다. 그 후로 오랫 동안 기도원을 묵혀 두었다가 양도천 목사에게 인계하여 운영하였다.

나는 목포로 내려와 곧 압해도에 들어가서 20일간 집회하고 나오니 벌써 인민군은 정읍까지 내려왔다고 하고 모든 교역자들은 다 피난갔고 우리 정 목사도 피난가자고 했다. "내 걱정은 말고 너는 젊은 몸이니 어서 가라"고 해서 부산으로 보내고 나는 남아 있는 교회 신도들과 우리 식구들을 데리고 예배와 기도를 계속 하였다.

특히 금식기도를 하여 공산당 물러가기를 기도하고 피난간 교역자들 부끄럼당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거기에 은근한 교만이 섞인 모양이다. 나는 피난가지 않은 선한 목자인 양 자처하였다. "이 성에서 핍박하면 저 성으로 피난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어버렸다.

7월 24일에 그만 인민군 선발대가 들어왔다. 때마침 임성교회 김종선 전도사가 자기 집으로 내려가서 환란을 피하자고 끌고 내려갔다. 거기 가서도 여전히 돌아다니면서 가정 집회를 계속하였다.

8월 2일 수요일 밤 집회를 하고 나서 치안서원들에게 붙들려 나갔다. "네가 목포에서 온 목사냐?"고 했다. "그렇다"고 하니 "이번에 비행기 열두 대가 와서 목포를 폭격한 것을 아느냐?"고 했다. "비행기 온 것은 안다"고 했더니, 어느 예수 믿는 여학생이 신호를 해서 비행기가 왔다는 것이고 그 주동자가 이성봉 목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 믿고 전도나 하는 목사지 그런 것은 모른다" 하니 "이 자식아, 네가 예수 믿었느냐? 이승만을 믿었지, 목사 새끼 다 죽여버려라" 하더니 뒷산 밑으로 끌고 나갔다.

청년 십여 명이 몽둥이를 들고 마구 후려갈기니 스데반의 돌무덤이 생각나서 저들을 위하여 사죄 축복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때려도 아프지가 않았다. 이 자식이 얼마나 뚱뚱한지 도무지 아픈 줄을 모른다고 더욱 많이 맞았다. 마지막엔 코가 터져 뜨거운 피가 쏟아지니 참으로 감사하였다. 주님은 나를 피 쏟아 구속했는데 나도 생피라도 쏟게 하시니 감사하다는 마음이었다.

그만 쓰러져 기절하니 대장이 "아주 죽이지는 말아라. 단번에 죽이기는 아까우니 좀더 고생시키다가 죽이자"며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회복시켜 유치장에 쓸어 넣었다. 두세 평 되는 좁은 방에 30여 명을 쓸어 넣으니 제일 더운 한여름에 기가 탁탁 막혔다.

그래도 바울이 옥중에서 찬송하여 옥문이 열린 것이 생각나서 허사가를 한번 큰소리로 멋들어지게 불렀다. 처음에는 듣기 좋은 지 가만히 듣더니 "홍안 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 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는 널 기다린다"고 불러대니 수직하던 자가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며 잠잠하라고 한다. 바울은 찬송하니 옥문이 열렸으나 나는 옥문은 열리지 않고 욕만 얻어먹었다.

그러나 삼일 만에 빨치산 이십여 명이 총을 휴대하고 소위 반역자를 숙청하러 다녔다. "여기 죽일 사람 없느냐?" 하니 "목사란 놈 하나 잡았는데 때려도 죽여도 찬송만 하고 기도만 하니 저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 했다. "그거 왜 여지껏 그대로 두었느냐? 죽여 버려라" 하더니 목사 나오라고 했다. 이제는 총살당하러 간다 싶었다.

그러나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사랑으로 인사를 하였다. "목사 노릇 몇 해나 했느냐?" "한 25년 하였소" "아이고 무던히 착취해 먹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뚱뚱보가 되었구나." "나는 착취해 먹은 것이 아니오. 아이 때에는 별명이 깔다귀였소 그러나 예수 믿고는 의약을 쓰지 않아도 25년간 몸이 건강하였소"

"예수는 왜 믿소?" 세례 문답으로 묻는다. "당신들은 사회를 혁명하지만 예수는 자아를 혁명하는 것이오. 물줄기가 길게 흘러가려면 물 근원을 파야 하고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려면 뿌리를 가꾸어야 하지요 우리 나라가 복을 받으려면 우나 좌나 정치적으로보다는 먼저 우리 민족의 양심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양심은 얼마나 바로잡았소? " "나는 사람은 몰라도 내 양심은 바로잡았소" 하니 "그래, 예수쟁이들은 현실을 부인하고 밤낮 천당, 천당, 천당 하니 봤소?" 내가 "보구 말구요"라고 했다.

"천당이 어디 있소?" "천당 본점은 보지 못하였어도 천당 지점은 보았소" "천당 지점이 어디 있소?" 했다. "내 마음 속에 있소. 본점 없는 지점이야 어디 있나. 은행 지점 보면 은행 본점 있는 줄 알고 경찰서 지서를 보면 본서가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나는 천국 본점은 보지 못하였지만 천국 지점은 내 마음에 이루어졌소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신을 힘입어 의와 평강과 기쁨이로라"고 하였다.

천당 지점이라는 말에 빨치산들과 보안서원들이 박수를 치며 웃음보가 터졌다. "천당 지점, 이거 처음 듣는 말이로구나. 예수쟁이 말 잘한다더니 참 말 잘하누나" 했다.

대장이 "이 전쟁을 어떻게 봅니까?" "옛날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바벨론을 들어서 내려쳤고 우리 나라 이조 5백 년에 범죄하여 일본 방망이로 삼십육년 간 얻어맞았소 이제 이 나라에 해방을 주었으나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깨달음이 없이 여전히 죄악을 지으니 이제는 공산 방망이로 이 민족을 내려치는 것이오 그러나 공산당이 이렇게 들어와서 또 예수를 핍박하고 애매한 사람을 악형하고 죽이면 또한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망한다고 하고 싶지만 총을 가지고 있는 저들 앞에서 그 소리는 차마 못했다. 조금 더 살려고, 아니 이 큰 사실을 좀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함이었다.

여러 가지로 변론 중에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저들은 나의 말을 듣고 감화를 받았다. 또한 대장이 이전에 예수를 믿던 사람으로 광주 의과대 학생인데 그만 사상이 잘못 들어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약하고 있으나 어려서 받은 믿음의 씨는 아직 있는 모양이었다.

나를 보고 "목사님, 어디 악형당하셨습니까?"했다. 발가벗겨 보니 3일 전에 당한 상처로 인하여 전신이 먹장같이 되었다.

그때 빨치산 대장은 보안서원들을 책망했다. "이거 뭐요? 우리 인민 정치에는 이런 법 없소. 죽일 사람은 즉결하고 조사할 일 있으면 검속하여 말로 취조하는 것이지, 이렇게 하니까 우리 인민정치가 오해를 받는 것이오"

엄중히 책망을 하고 나를 골방으로 데리고 가서 약을 발라 주었다. 그리고 나하고 김치한 전도사 두 사람만 석방시키더니 그날 밤 29명을 총살하고 갔다. 죽이러 왔다가 살리고 갔다. 있는 것 같아도 없는 것은 사람이요, 없는 것 같아도 실재자는 하나님이시다. 있는 것 같아도 없는 인간의 헛 총소리에 속아서 없는 것 같아도 실재자이신 하나님의 실탄이 날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여 실패하는 자가 부지기수이다.

감옥을 나와서는 치안서 바로 뒷집 최 마리아씨 행랑방에서 지내면서 모든 신자들이 찾아오는 대로 전도하고 위로하고 같이 예배하였다.

특별히 주일날 많은 사람이 함께 모이면 의심하기 때문에 저들의 눈길을 피하려고 시간제로 하루에 여러 번 분반하여 예배하였다.

아무래도 전쟁은 치열하고 미구에 끝날 것이 예감되고 그들이 후퇴할 때는 많은 희생자가 날 것 같아서 9월 20일경 밤에 소달구지를 타고 목포로 들어가서 골방에 숨어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목포에 들어간 지 수일 후에 9월 16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 감행으로 공산군이 후퇴하는데 그때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그때 그 치안서에서 나를 찾았으나 행방불명, 나는 되살아나서 주의 능력을 한번 더 체험하였다.

그때 최명길 목사, 김재선 목사는 학살당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더욱 힘을 다하여 무너진 제단들을 다시 쌓고 흩어진 양떼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하였다.

내가 숨었을 때에 찾아왔던 문준경 여전도사와 임자도의 이판일 장로 형제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가지 말라고 하나 그래도 교회를 생각하여 가더니 종내 그들에게 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내 딸이 "아버지, 이젠 영영 공산국가가 되고 마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그때 나는 "아니란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그러면 좋은 날이 다시 온단다" 하고는 "조금만 더 기다려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지어 가만가만 불렀다.

 

1. 만국이 사모하는 자 반드시 강림하시어

천지를 진동시키고 네 소원 성취하리라

 

2. 기도의 응답 없다고 그렇게 낙심 말아라

만사에 때가 있나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3. 심신이 피곤하여서 실패를 거듭하여도

주님을 앙망하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라.

 

(후렴)신실한 약속 붙잡고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더 기다려라.

 

주님은 40일 금식하셨기에 나는 80일을 한정하고 절식 기도하였다. 밥은 반 공기, 물은 세 모금 성부 성자 성신 하면서 절제할 때에 아주 금식보다 절식이 더 힘들었다.

조금만 더 달라고 속에서는 발버등치지만 "주여!" 하고는 수저를 던지고 기도하였다. 납치되어 간 동역자들과 철의 장막에서 고통받으며 사는 동포들을 생각할 때에 어찌 평안히 지낼 수 있으랴! 결사적으로 기도하니 약속대로 80일 한정이 78일만에 해결됨을 체험,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도의 능력을 다시 한번 체험하였다. 그래서 무너진 각처의 제단을 다시 쌓느라고 불철 주야 활동하였다.

그러나 육체적 괴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어느 교회를 갔더니 이불이 없어 이불 하나 가지고 세 사람이 덮으란다. 주인 영감하고 그 교회 당회장하고 나하고 세 사람이 덮고 한참 자다가 깨어 보니 다 벗겨 갔다.

또 어느 교회는 어찌나 빈대가 많은지 벗었던 옷을 다 다시 입고 벗었던 양말을 다시 신으니 좌우 손으로 달려들었다. 그래서 가방 속에 있던 다른 양말을 양손에 다 끼고 묶었다.

그랬더니 빈대가 목덜미로 얼굴로 달려들었다. 그래서 수건으로 온 머리와 목을 감싸고 숨쉬는 구멍만 내어놓았다. 완전무장이었다. 이렇게 밤을 새우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수복지대 교회를 갔더니 거기는 그릇이 없어 군인 철모에다가 세숫물을 줬다. 거기에 세수하고 보니 그것으로 소여물을 주었다. 또 다시 보니 돼지 먹이를 주는 것이었다. 철모 하나를 가지고 내가 소, 돼지와 나눠 썼다.

그러다 어떤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어느 때는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고 비오는 새벽에 수 십리씩 걸어다니니 하늘나라에는 올라도 잘 가고 내려도 잘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데에 자유로운 것을 감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