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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청년시대


나의 청년 시대는 극도로 타락한 시대였다. 공부는 할 수 없으니 어떻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말을 한필 사서 겨울에는 나무 장사를 하포 여름에는 실과를 싣고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일하여 살림이 바슬바슬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고 보니 본시 믿음이라야 수박 겉 핥기로 껍데기만 핥았지 참 속 진리를 알지 못한 나는 모든 것을 다 부인하여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도 부인하고 천당, 지옥, 내세도 부인하고 말았다. 더구나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하였다.

또한 부모님 권고에 이기지 못하여 산골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은 하였지만 조상에는 정신이 없고 팥죽에만 정신이 있다고 교회 나가야 색시 처녀들이나 보는 취미로 나가지 참 예배 정신은 없었다.

또한 목사도 없고 전도사도 없는 산골 교회. 그냥 신자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라고 들을 것도 없고 자연히 교회와 멀어졌다. 혹시 평양에서 유명한 선생이 오신다면 좋아서 나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형편이 없는 것이다.

얼마나 사람이 귀하면 날 보고 설교를 하라고까지 했을까. 나는 그저 들은 풍월로 열심히 내 멋대로 주워대면 모든 신자들은 잘 한다고 칭찬하고, 여학생들의 인기를 얻는 재미에 가증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또한 그때에는 남자 여자반을 따로 갈라서 가운데 휘장을 쳐 놓았었다.

그러니 더욱 여학생들이 보고 싶어서 여자반 보기 좋은 앞자리에 자리잡고 앉아서는 입을 벌리고 끄덕끄덕 졸곤 하였다.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책망을 하셨다. 졸려면 뒷구석에나 가서 졸지 왜 여자반을 바라보면서 꼴사납게 졸고 있느냐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예배당에 안 가려는 것을 어머니가 자꾸 데리구 가시니 그러지요 이제부터는 내가 집을 볼 터이니 다들 예배당에 가소" 하고는 집에서 못된 장난만 하고 있는 것이다. 늙으신 외조모님 방에서 돈을 도적해다 쓰고는 마음에 걸려 회개하던 생각도 난다. 그리고는 또 죄를 짓는 것이다.

18세로부터 21세까지 나는 말할 수 없이 타락한 인간이 되었다. 마부생활로 하류층의 인간들과 상종하게 되니 담배를 배우고 술을 마시게 되었다. 또한 화투, 투전, 노름에 미치게도 되었다. 죄라는 죄는 고루고루 다 지었다. 그래서 때때로 양심의 가책으로 회개도 하지만 아주 죄의 종이 되고 습관이 되니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이 얽매여 버렸다.

내 힘으로 이기어 보려면 더욱더 범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성에 대해서는 어떤 여자를 그리워하면서도 윤리에 어긋난 일은 없었다. 내가 본래 수줍은 탓도 있고 또한 양심의 가책도 있고 또 용기를 낸다 해도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됨은 전혀 주님이 막아 주심인 줄을 후에 깨달았다. 어머니가 나보고 예수 잘 믿으라고 권하면 이 다음에 40세 되면 잘 믿겠다고 말하고 젊은 놈이 어떻게 자유 없는 종교생활의 구속에서 살 것이냐고 하면서 젊어서 맘대로 잘 놀고 늙어진 다음에 믿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40 전에 죽으면 어떻게 할 터이냐? "고 하신다.

나는 "어머니두,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답디까? 나는 적어도 70은 살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어머니께서 다시 하시는 말씀이 "너 만일에 하나님이 권고하실 때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 농부가 땅에 무엇을 심으려 할 때에 비가 와서 물러지지 않으면 괭이로 파서 헤치고 기어코 무엇을 심는 것같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권고하실 때에 회개치 않으면 징계의 채찍이 떨어진다"고 설교하신다. 물론 나는 그런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고 "하나님 ! 하나님이 있으면 좀 패주시우. 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겠소" 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저 자식이 어떻게 저런 망령된 말을 함부로 지껄이냐?" 하시며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신다. 나는 쫓겨가면서 "좋다. 좋다"고 놀려대며 얼른 어머니 손에서 빗자루를 빼앗아 내버리면서 "무슨 하나님, 천당, 지옥, 그렇게 미신으로 믿지 마세요 하나님이 어디 계신답디까? 위즉신(爲卽神)이라, 신을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무슨 하나님이 때리고 징계하신다구 그러세요?"라고 말했다.

이론을 들어 마귀 전도를 한참 하면 어머니는 말에는 그만 막히시고 어처구니 없고 기가 막혀서 골방에 들어가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며 애타서 어쩔 줄 모르신다. "하나님이시여 ! 어찌하여 어려서부터 주의 교훈으로 기른 자식이 저렇게 되었나이까?" 하고 기도하면 나는 도리어 비웃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행여 장가를 보내면 마음 바로잡고 다시 신앙생활과 가정에 취미를 붙일까 하고 내가 19세 되던 해 봄 음력 2월 10일에 중화읍에 사시는 이영기 장로의 장녀 이은실과 문명선 장로의 주례로 결혼을 시켰다. 은실은 본래 나의 어머니의 제자이며 내가 중화읍에 살 때 같이 놀던 사이였다. 그러나 나는 결혼 생활이 도무지 즐겁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의 아내가 그렇게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아 부부의 애정이 없이 살아왔다. 더구나 나는 불량 생활로 가정에 충실치도 못하고 도리어 아내를 많이 괴롭혔다. 그래서인지 아내도 과격한 성격이 생겨 나와 성격적인 충돌이 있었다. 좌우간 나는 평생 달콤한 부부의 애정을 모르고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로 참고 이해하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은 다만 신앙과 기도로 통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도 불행이요, 나도 불행이었지만 그것이 도리어 나의 아내에게는 인간의 정을 떠나 주님께 더욱 매어 달리는 생활을 하게 하였고 나도 또한 가정에 대한 쾌락이 있었더라면 지금같이 이렇게 널리 돌아다니며 주의 일을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팔자라고 하나 믿는 우리에게는 만사합동하여 유익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범사에 감사함으로 지낼 것이다.

내가 21세 되는 해 6월 24일은 주일이었다. 내가 이 날로 인해서 큰 변화가 일어날 줄은 하나님 밖에는 누구도 몰랐다. 그때 우리 과수원에 실과(추리)는 무르익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일 일하고 교회에 나가서 예배보자고 권하신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원 어머니두, 저 실과를 오늘 따지 않으면 다 썩어 떨어질 터인데 저걸 두고 예배당에 가다니요? 나는 예배당 못 가겠소" 하고는 실과를 모두 따 가지고 마차에 싣고 평양으로 들어갔었다.

"사람은 돈이 제일이야.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하면서 실과를 팔아 가지고는 그날 밤 술집에서 진탕 술을 먹고 못된 짓과 온갖 부끄러운 일을 다 했다. 그리고 밤늦게야 불량 친구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늙어지면 못 노니라"고 유행잡가를 부르면서 기자묘 앞을 의기양양하게 지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쪽 넓적다리가 뜨끔하고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더니, 온몸에는 열이 오르고 이제 한 발자국도 걸을 수가 없었다.

사울은 다메섹 가는 도상에서 거꾸러졌으나 불량하고 난봉꾼인 이성봉이는 기자묘 앞길에 쓰러졌다. 친구들이 왜 그러느냐고 하며 큰일났다고 마차에 올려 싣고 거의 죽게 된 나를 집에 겨우 데려왔다. 다 죽게 된 나를 보신 어머니는 "싸다, 싸" 하셨다.

"주일날 돈벌겠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부모의 말 안 듣고 제멋대로 제 고집대로 나가다가 잘되었다" 하고 야단만 치셨다. 그만 병중에 그 말을 들으니 감정이 불끈 치솟았다. "싸? 이거 예수 안 믿어서 이렇게 됐나? 난 죽어도 예수 안 믿을 것이다. 남이 고통을 당하는데 동정은 안 하고 오히려 저주를 하다니‥‥‥. 이것이 종교생활이란 말인가?" 나의 마음은 아주 비뚤어지고 반항심만 커갔다.

그러나 병은 더하여 갔다. 백약이 무효였다. 병원에서는 골막염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의사는 다리를 자르라고 하였다.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병이 점점 더 중해지니 나에게는 죽음만이 가까왔다. 밤낮 먹지 못하고 앓으니 분명히 내게는 죽음 밖에 올 것이 없었다.

70세까지 살겠다던 내가 21세에 죽는 것이다. 돈벌어 놓고 예수 믿겠다던 나는 논밭 모두를 먹게 되었다. 그것으로 나는 여섯 달 동안이나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했던 것이다. 참으로 허무한 것이 인생이다.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 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 옥답도

우리 한번 죽어지면 일장의 춘몽

 

꿈결 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 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가느냐

 

인삼 녹용 좋다 해도 늙는 길 못 막고

진시황의 불사약도 죽는 데 허사라

인생 한번 죽는 길을 누가 감히 피할소냐

분명하다 이 큰 사실 너도 나도 다 망한다.

 

죽음 아래 모든 것이 다 매장을 당한다. 돈을 많이 벌어 보려고 하였지만 백만장자도 죽어버리니 허사요, 땅을 사고 뫼를 사고 밭을 사고 고대광실 높은 집을 지어도 나 죽으면 땅 한 평, 수의 한 벌, 관 한 개밖에 못 가지고 가는 것이며, 천문지리 상통하는 많은 지식을 가졌어도 나 죽을 날짜 알지 못하고 영웅 호걸 미인들도 죽음 앞에서 다 항복하고야 마는 것 아닌가?

죽음이라는 것을 제 삼자가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겠지만 참말로 그 죽음이 내게로 닥쳐 보니 그처럼 무섭고 그처럼 잔인하고 그처럼 허무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이러한 죽음에 대해서 느끼게 될 때에 "너는 이제 죽어서 어디로 가려느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천국은 없으면 안 가도 좋지만 만약 지옥이 있다면‥‥‥나는 꼭 지옥의 자식이로구나.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지 않은가! 나는 내 눈앞에 눈썹이 몇 개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무엇을 안다고 교만을 부리고 건방지게 굴었고 미련하게 놀았던고?" 하며 후회했다.

아무리 잘났다 떠들어도 콧구멍 둘과 입만 틀어막으면 십분 안에 죽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나는 이제 죄인인 것을 알았다.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 양심상으로 지은 죄 등등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나는 죄인인 것을 절실히 알았다.

평안 무사할 때에는 가리어졌던 나의 양심이 최후에는 끝없이 예민하여져서 불의한 나의 모든 죄를 낱낱이 손가락질을 한다. 악마는 또한 나의 불의한 모든 죄를 들고 나를 정죄한다. 나는 공포와 불안 중에 양심에 호소했다. "요만큼 살다 죽는 것을 이렇게 죄를 많이 지었던고 ! 아, 나는 이 죄로 인해서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마는구나. 오 하나님이여, 나를 이 죄악에서 건지소서!" 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죽어도 회개나 하고 죽어야지" 하는 최후의 호소였다. 한참 울고 있으니 어머님이 들어오신다. 나는 어머니 무릎에 엎드려 "어머니, 이 불효 자식을 용서하세요 저의 이 많은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까요?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하고 울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셨다. "회개하라. 죄 지은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이란다. 예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세상에 오셨단다. 너는 예수를 믿으라.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하라. 예수는 너 위하여 죽으셨다가 너 위하여 다시 사셨단다. 예수는 너 위하여 승천하시고 너 위하여 지금도 기도하신다. "그리고 그의 성신을 보내어 너를 감화시켜 회개시키신다. 하나님은 지금 네 기도와 나의 간구를 다 들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네 생사를 다 주께 맡겨라." 이는 어머니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곧 나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성신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나는 무조건 항복하고 말았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이제야 깨달았나이다. 한번만 살려주시면 이 몸을 주께 바치고 이 사실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또한 나의 뒤로 오는 후배 청년들에게 이것을 증거하겠나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섭리를 전하겠나이다. 예수를 증거하겠나이다. 이 몸 이제 죽으면 정말 원통하겠나이다. 한번만 살려주세요" "그래도 인간은 간사하여 노루 새끼처럼 급하면 하나님을 찾고 편해지면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돼지가 씻어 놓으면 다시 수렁통에 들어가는 것처럼 또 죄악의 자식이 될 것 같으면 차라리 나를 지금 데려가 주세요. 나는 이제 주의 손 가운데 있나이다"하고 자복하고 회개하였다.

하나님은 나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사 마음에 참 평안을 주셨다. 나는 그때 비로소 성경을 받아들고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성경을 보아도 맹물에 자갈 삶은 것 같아 아무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연애소설은 밤잠 못 자고 눈을 버티어 가면서 시작하면 단숨에 다 보고야 말던 바람이 이제는 모든 잡지 소설을 걷어치우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니 이 말씀을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보다 더 달고 꿀송이보다 더욱 달게 여기게 되었다.

병든 사람에게는 고량진미가 있어도 입맛이 없지만 병이 나으면 조밥에 된장국이라도 없어 못 먹는 것이다. 나의 심령이 병들었을 때에는 귀한 주의 말씀이 아무 재미가 없었으나 내 심령이 건전하여진 후에는 구구 절절이 나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때부터 불의한 습관인 술과 담배를 다 끊어 버렸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성령께서 도와 주셔서 불의한 죄의 습관을 일소시켜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내 심령은 평화와 기쁨과 행복에 가득 찼던 것이다. 병으로 오는 고통 중에도 찬송과 감사가 계속되었다.

할렐루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 : 17).

그러면 병도 속히 나아야 되겠는데 도무지 낫지를 않고 3년간이나 끌었다. 웬일로 이렇게 오래 병석에 두는고?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타락한 생활을 하면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불같이 일어나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독립 단체에 가입했었다. 나 자신은 그렇게 타락 생활을 하면서도 일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은 말할 수 없이 컸었다. 불량자인 내가 그래도 민족을 사랑한다고 조선 독립을 부르짖으며 "대동단"이라는 독립 단체에 가입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군자금을 모금하며 비밀 결사를 하고 좁은 산중에 혹은 골방에서 비밀회의를 갖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탄로나서 모든 동지들이 다 검속되었다. 어떤 이는 사형을 당하고 혹은 일이십 년씩 징역을 가게 되었다.

나의 집에도 일본 순사가 수십 명 달려들었으나 병중이라 꼼짝 못하고 누워 있던 때였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가마에 태워 가지고 주재소로 끌어갔는데, 가만히 보니 거의 죽어 가는 송장 같은 것이라 잘못하다가는 송장 치를 것 같으니까 도로 집으로 보내고 보석으로 감시만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 병이 낫기를 기다리나 언제 그 병이 나아야지. 그렇게 하기를 3년이나 끄니 그 동안에 사건은 다 낙착되고 내 병도 다 나았다. 그러나 강서 경찰서로 불려가서 한 5일간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 동안 배후에서 교제도 했음인지 나이 어린 사람 징역 보낼 것 없다고 서류만 작성하여 넘기고 석방시켰다. 나는 경찰서 문밖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렸다.

병들어 죽을 몸 살려 주시고, 병이 3년씩이나 끌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무병했다면 적어도 수삼 년 징역살이를 할 터인데 그 병으로 인해서 면하게 됐으니 이 어찌 감사감격의 눈물이 나오지 않으랴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 28)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는커녕 반역하여 주님의 가슴을 그처럼 태우게 한 죄인이거늘 이처럼 사랑해 주심은 무슨 연고인가 ?

그 사랑의 불로 나를 개조하여 새 사람으로 쓰시려는 주님의 절대 사랑과 권능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병도 가장 적당한 때에 주님의 사랑과 신유의 이적으로 신기하게 치료받아 여러 번 죽을 자리에서 살았으니 병중에서 약속한 대로 신앙생활은 물론 전적으로 헌신하기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강의록을 사다가 집에서 열심히 독학을 하였다.

그러면서 산골교회를 지성으로 받들고 소학교를 세워 교원생활을 하기도 하여 주일학교는 물론 교역자가 없기 때문에 장년예배 인도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주일 낮과 밤에는 물론 삼일예배에도 빠져 본 일이 없고 누구보다 일찍 나가서 종 치는 일, 난로에 불 피우는 일, 등잔에 불 켜는 일 등등 교회 일들은 모두 도맡아 하고 자진해서 교회 소사 노릇을 다했다.

교역자가 없는 고로 서로 돌아가면서 예배 인도를 하는데 이진서라는 유사(有司) 영감이 두루마기도 입지 않고 설교를 하던 중 성경도 잘 볼 줄 몰라서 사도행전 12장에 헤롯왕이 교만하다가 충(盤)이 먹어 죽었다는 말씀을 충이 무엇인지 몰라서 춤(입에서 나오는 침)이라고 말하였다. 이 노인 열을 내며 "이것 보라! 헤롯이 교만하여 하나님이 춤을 먹여 죽였다"고 설교하니 참으로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지만 내가 은혜받은 다음부터는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니 나 스스로 성경 말씀 중에서 은혜받고 듣기 싫은 설교라도 잘 듣는, 즉 잘 참고 견디는 은혜도 생겼던 것이다.

요새 신자들은 귀만 당나귀 귀처럼 커져서 설교 채점만 하고 그 말씀을 들어도 이론만 세우고 준행치 아니하니 이러한 신자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되는 것이다(마 7 :24-27).

이렇게 산골교회가 목자 없이 굶주렸다가 도회지의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신년 정초에 집회하러 오시면 참으로 그때는 영혼들이 살찌는 것 같으며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이다.

특히 내가 잊을 수 없는 강사 목사는 안영극 목사님이었다. 대개 감리교는 신신학의 경향이 좀 있는데 그는 순복음주의로 설교를 하여 25세 때 그 사경회에서 특별한 은혜를 받고 사명에 더욱 불탔던 것이다

내가 24세 때 즉 결혼한 지 5년만에 딸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이름을 현숙이라 지었다. 목포 정명학교를 졸업시켜 여학교는 일본서 다녔다. 전쟁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봉천에서 보육학교를 거쳐 유치원 보모로 수년간 여기저기서 일을 보았다. 22세가 되니 혼기가 되어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중에 나는 재판소 소사로 일하는 어느 홀아비의 아들에게 줄 생각을 했다. 이는 다만 그의 믿음을 보고 시집 보내려 했으나 정운학 목사가 적극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그런데 하루는 신의주 거리를 걸으면서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정의근 장로의 장남이 어찌 되었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한성과 목사를 만나게 됐는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끝에 정의근 장로의 아들 승일군을 사위로 삼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생각했던 바라 주의 뜻인 줄 알고 그대로 성혼하였다.

승일군은 그 후 월남하여 신학을 하고 주의 귀한 종의 반열에 서게 되고 7남매를 낳아 부부가 의좋게 산다. 또한 정목사는 나의 아들과 같이 모든 일을 도맡아 잘 보살펴 준다.